김유철 선생의 제1회 천주교 마산교구 가톨릭문학 신인상 공모 수필부문 당선작을 이리로 옮겨와 싣습니다. -편집자
평양의 베란다에도 화분이 있습니다
_김유철
영화 ‘레옹’(LEON)을 보셨는지요? 영화에서 주인공이 늘 가지고 다녔던 화분이 무슨 의미였는지 나는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름난 야생화 전문가가 재배하는 다양한 꽃들보다 영화 속 그가 삶의 팍팍함에도 불구하고 늘 가지고 다녔던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는 아예 소리 없는 웅얼거림이었습니다. 평양을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제법 많은 분들이 북녘 땅을 다녀왔지만 아직도 ‘평양’은 낯선 단어입니다. 멀쩡한 지름길을 놔두고 남의 나라로 돌아가는 모습은 남북 모두가 처해있는 어정쩡한 상태를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하룻밤을 자고나서야 북녘 땅에 온 것을 실감하고 있는 차에 우연히 올려다 본 아파트 베란다의 수더분한 화분 하나가 말을 건네 왔습니다. 깜작 놀라 어설프게 웃으면서 맞인사를 했지만 놀란 가슴은 이내 한없는 침묵으로 나를 이끌었습니다. 평양시 선교구역 장충동의 장충성당에 이웃한 아파트 베란다에 있는 몇 개의 화분과 동․서 평양을 양각도와 이어주는 대동강 다리 옆 빛바랜 아파트의 화분을 기억하면서 다시 북녘 땅을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단체의 일과 연관되어 북녘 땅을 최근 세 차례 다녀왔습니다. 그곳을 다녀온 느낌을 묻는 이웃들에게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금강산을 가니 겨레로서의 ‘북(北)’이 보였고, 개성을 가니 협력 사업을 하는 ‘남(南)’이 보였다고 말입니다. 이제 평양을 가니 ‘화분’이 있다고 말할 차례입니다. 순안공항이나 향산호텔, 민족식당에서 일행을 맞은 화려한 꽃이 피어있는 화분은 어떤 감정도 전달해 주지 못하는 공무원 화분이었지만 인민들이 살고 있는 평범한 아파트의 창문 베란다에서 애써 움을 튼 화분은 못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질문을 마음속에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화분을 왜 가꾸세요?”
금강산 장전항에 있는 한 식당에서 젊은 접대원 동무와 일행은 짧은 시간동안 오해에서 출발하여 이해로 가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대화는 이해로 가는 가장 편한 길이더군요. 눈이 하염없이 쌓여있는 만물상을 오르는 길에 만났던 변소(물이 있는 곳은 위생실이지만 물이 없는 곳은 그냥 변소다)의 관리인 아바이와는 말로 시작해서 침묵으로 가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역시 젊은 접대원보다 늙은 아바이가 가슴으로 하는 대화에 익숙하기는 민족이 같은 모양입니다. 개성에서 북측에 나무보내기와 관계된 일로 만난 북측 일꾼은 많은 것을 사려 깊게 판단하는 모습에서 현재보다는 내일에 쓰임새가 있을 재목이었습니다. 김일성대학을 나왔다는 그에게 농담으로 “집에 있는 나의 딸이 대학입시에 몰두하고 있는데 당신처럼 일류대학 나온 사람을 보면 재수없다고 한다”고 웃으며 말했더니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북에서도 매일 듣는 말이라 일 없습네다”라고 응수한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는 그를 지난 평양 방문 마지막 날 순안공항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각기 다른 일행과 섞여 있다가 멀리서 알아보고는 정말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헤어지기 전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집에도 화분이 있나요? 꽃도 피나요?”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가 어리둥절해 합니다. 이제는 북에도 아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62년 만에 아버지는 사진으로 귀향하셨습니다. 해방되고 이남으로 내려오신 선친께서는 그토록 그리던 고향땅을 사진으로 가셨습니다. 평양시 하수구리 109번지를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고향 땅을 휑하니 둘러보셨습니다. 3박4일의 평양과 묘향산 일정 내내 아버지 사진을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개선문 바로 옆에 위치한 평양 공설운동장에서는 아버지의 그림자와 목소리를 보고 듣는 듯했습니다. 생전에 아버지에게서 듣고 기억하는 유일한 장소가 평양시 공설운동장에 얽힌 일화였습니다. 남쪽으로 내려오던 날 정오에 동생과 그곳에서 만났던 이야기는 돌아가실 때까지 수 도 없이 되풀이되던 장면이었습니다. 23살의 청년이었던 아버지가 그렇게 62년 만에 사진으로 그곳에 가셨습니다. 그날따라 공설운동장 앞 화단의 꽃과 풀을 젊은 일꾼들이 가꾸고 있었습니다. 눈이 부시게 맑은 날이었습니다. 이산가족입장으로 북에 간 것은 아니었지만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보는데 문득 아버지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었습니다. “고맙구나.” 꼭 한마디 그 말은 “고맙구나.”였습니다.
화분에 담긴 것은 꽃이 아니라 생명이겠지요. 비록 도시의 아파트 베란다에 움튼 자리이지만 그곳을 자연 삼아 주어진 여건에 충실한 생명이겠지요. 좁쌀 하나에 우주가 들어있듯이 이끼긴 화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평화가 숨어 있습니다. 평화가 전제되지 않는 생명은 죽음과 다름없기에 하염없는 하늘 향한 비나리를 합니다. “이 겨레를 도와주소서.”
금강산의 젊은 접대원과 늙은 아바이, 개성의 일꾼과 양묘장의 어린 나뭇잎들 그런가하면 묘향산 가는 길섶을 따라 오래도록 따라오는 청천강과 물가의 굳센 나무들 그리고 평양의 아파트 베란다에 자리한 작은 꽃 화분들. 소리 없는 생명의 이어짐과 그 안에 간직한 평화를 갈망하는 다른 이름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머리로만 생각하던 북녘 땅을 세 차례나 몰아치듯 다녀오니 아직도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비망록에도 시간대별로 정리한 것 외에는 감정을 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 글을 적으면서 에둘러 말하는 저를 바라봅니다. 아직은 평화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모두 우리 겨레가 넘어가야 할 관문이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야합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유일한 길이다.’ 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