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何然 姜澤鎭) 선생은 풍기 금계리 출신으로 35세로 순국하시기까지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재를 출연하여 야학운영을 하고 자신이 믿는 평등사상(평등사상을 강조한 독립운동계열을 사회주의 계열로 봅니다.)을 실천하고자 자신 소유의 땅을 출연하여 그 토지를 기반으로 풍기소작인조합을 결성하고 경북지방의 소작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선생은 9,000여 평이나 되는 자신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내놓고 풍기소작인조합을 결성하였고, 이웃에 후한 인심을 베풀었으며, 그의 집에는 그 넉넉한 인심으로 풍기에 사는 많은 마을 사람들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요즘도 자기 재산을 기부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자신이 편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전재산을 털어 소직인들과 함께 일제에 항거하였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후 임정의 국내연통제활동, 독립군자금 모금 등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셨으며,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되자 중앙위원·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농민운동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우리 지역에 이런 혁명적인 실천을 하신 분이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그 빛나는 정신을 이어받아 실천하는 후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하연 강택진(1892-1926) 선생 묘소 참배 결과를 아래와 같이 보고 올립니다
1. 일시 : 2008.5.31. 10:00- 15:00
2. 장소 : 풍기읍 금계1리 하연 강택진 선생 묘소
3. 지회 참석자 : 지회장 박태서, 고문 이한택, 운영위원 김진회, 운영위원 남조운, 조은숙 회원, 사무국장 박동규
4. 외부참석자 :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 김일수 교수 외 10 명, 독립유공자 정진홍 선생 손자 정영익님, 영주시청 주민생활지원과 담당 금덕호님
5. 행사내용
10시부터 지회장님을 비롯한 회원 6 명, 독립유공자 정진홍 선생 손자 정영익어른신께서 함께 강택진 선생 묘소를 정리하고 손질하였습니다.
<묘소정리, 순국하신지 82년이 지났지만 풀이 많고 나무가 뿌리내렸음에도 묘소봉분의 크기는 그때 그대로여서 모두 감탄하였습니다.>
12시 30분경 서울에서 김일수 교수외 10명의 참배객이 도착하여 지회 회원과 수인사를 나눈 후 마련해간 간단한 제물을 차려 놓고 참배행사를 하였습니다.
<추모참배 전 산신제, 박태서 지회장님께서 소백산신에게 술잔을 올리고 있습니다.>
<강택진 선생 묘소를 찾아 당시 강택진 선생의 하신 일과 풍기 금융조합장을 지낸 이풍환 씨와의 같은 시대 다른 인생을 많이 증언하여 주신 독립유공자 정진홍 선생의 손자 정영익 어르신께서 헌작을 하고 있습니다.>
<강택진 선생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도록 연구활동을 통하여 공적을 밝힌 성균관대 김일수 교수(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께서 헌작 후 배례하고 있습니다.>
<참배 후 과거사진상규명위 위원장(왼쪽 모자쓰신 분)과 김일수 교수 일행 및 회원들의 음복하며 강택진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하여 대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정영익 어르신은 강택진 선생이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병을 얻어 가석방된 지 7-8일 만에 순국하셨는데 석방될 당시 손톱이 하나도 없었다는 당시 어른들의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묘소 앞에 비목 설치, 김일수 교수 일행이 제작하여 온 비목을 지회회원들이 설치하였습니다.>
<기념촬영, 비목설치 후 김교수 일행화 지회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지회회원들이 정영익 어르신과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묘소에서 바라본 풍기의 전경 >
멀리 광복단 건물(사진 왼쪽 흰색건물)이 묘소와 일직선으로 맞닿아 있어 금계포란형 묘가 바로 여기가 아닌가하고 모두 신기해 하였습니다. 일제시대에 이자리에 묘소를 쓰니 선생께서 순국후 82년 후에 과거사진상규명위, 민족문제연구소 경북북부지회, 대한광복단 기념사업회 등 선생을 기리는 사람들의 주관으로 잃어버렸던 선생의 묘소를 찾아 정리하고 참배하고 오늘의 교훈을 되새겼습니다. 이 어찌 신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백년이 다 되어 가는 시기에 그 공을 기려 그 묘소를 다시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이 자리가 금계포란형의 명당 중 명당묘소 자리"라는 박태서 지회장님의 말씀이 새삼 가슴 저렸습니다.
또 "사람은 그 살아 온 생의 값어치 그대로 그 묘소가 백년이 다 되어도 조금도 무너지지 않고 이렇게 나타난 것은 그자리가 바로 명당이라는 말이며, 우리 생활 속에서 이렇게 작은 일 하나라도 밝혀 나가는 것이 바로 과거사진상규명이며 생활속에서의 역사조명"이라고 말한 남조운 위원의 말에 모두 공감하였습니다.
<풍기읍내에서 점심식사>
<일제 때 풍기 금융조합장을 지낸 이풍환씨 묘소. 회원들 뒤편 봉분이 이씨의 묘소>
이풍환씨는 일제 때 일본인 경찰서장, 조선인 군수, 면장 등등 쟁쟁한 사람들이 금융조합장을 지낸 이풍환씨를 먼저 찾아 인사할 정도로 당당하였고 조선총독의 수 많은 표창과 포상금을 받았고, 조선총독부의 경북도 자문위원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들리는 증언에 의하면 같은 풍기사람들에게는 임신한 굶주린 임신부에게 밥을 먹게 하려고 그 남편이 이풍환씨 집을 찾아가자 쌀이 없다고 하면서 쌀을 나누어주기를 거절할 만큼 매정한 인정으로 맞섰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제에 철저하게 아부하며 살다가 1933년 그가 죽고나자, 불과 10년 남짓 세월에 그 흥하던 집안이 쇄락해 후손은 모두 풍기를 떠났으며, 일제시대 때 모셨던 묘소는 지금 과수원 한가운데서 그 터를 사들인 주인이 돌아보는 풀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이풍환씨 질부의 묘소>
<이풍환씨 묘소가 있는 과수원 안에 있는데 그 과수원 주인 집에서 이풍환씨 묘소를 둘러보고나서 회원들이 대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강택진 선생 묘소 앞 참나무에 있는 까치집.>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분의 묘소는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한 분은 강택진 선생으로 살아 생전 일신의 안락을 버리고 민족을 위하여 독립운동으로 고달픈 생활을 살다가 말년에는 일제의 고문으로 손톱이 다 빠지는 고초를 겪으며 생을 마쳤습니다. 그러나 순국 후 82년이 지나 그를 잊지 않은 사람들이 그 공을 기리고 묘를 다듬고 참배를 올리고 비목을 세우고 영원히 잊지 말자고 기념촬영까지 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 이풍환씨는 일제시대 때 조선사람들에게는 사나운 인심으로 일제에게는 일본인 경찰서장이 부임해도 그에게 먼저 부임인사를 할 만큼 살아 생전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나 지금은 그 가족들이 아마 나름대로 금계포란의 묘터라고 생각하고 썼을 그 묘소조차 초라하여 뜻있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일제에 아부하며 적극협력하였으나 이웃들에게는 모진 인심으로 대하여 자신이 죽자 그 후손들은 스스로 이풍환씨가 개척한 마을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죽어 나중에 존경받는 사람과 질시받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 생전에 그 살아가는 인생에 따라 후세에 사람들은 그를 다르게 평가합니다.
오늘날 일제당시 민족을 배신하고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사람을 두고 그사람이 살아 생전에 공있다느니, 어쩔 수 없는 친일이었다느니, 행동은 친일을 해도 마음은 괴로웠을 것이라느니 등등 갖은 말로 친일파를 변명하는 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그 무덤이 어떤 모습으로 후손들에게 나타날 것인지 잘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좋은 이름인지 나쁜 이름인지는 자신이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무심한 것 같지만 강택진 선생 묘소 앞 참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까치집과 그 집에서 해마다 새끼치고 떠나고 또 새끼치고 떠나는 까치는 무수히 그 집을 드나들면서 두 분 묘소의 주인공이 어떤 생을 살았는지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2008.6.1.
민족문제연구소 경북북부지회
첫댓글 다녀오시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네요.. 함께 참여하지 못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