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이 시대 최고의 지식인이라 칭송을 받는다. 나는 그저 까마득한 옛날 학창 시절에 언뜻 들어본 기호학자라는 말만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와 관련된 책을 한 장도 읽어본 적도 없다. 그저 1919년 하면 유관순이나 독립만세를 떠올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나는 불행하게도 그런 내 일천한 지식과 그의 풍부한 지식으로 풀어낸 말들이 서로 엇갈리는 바람에 나는 그의 말을 너무 어려워했으며 결국 잘 이해하지 못한다. 책장을 서너 장도 넘기지 못하고 몽롱한 상태에서 눈이 초점을 잃거나 그저 건성으로 글줄을 따라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독서 수준이 겨우 그 정도니 읽은 내용을 기억하기는커녕 그 의미를 캐내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의 소설 ’제0호‘는 그가 쓴 소설 중 가장 읽기 쉽게 쓰인 것이라고는 서평들을 보니 그저 내 무지를 한탄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 이탈리아인들의 이름은 입에서 줄곧 겉돌고, 건조한 문장은 입에 가시가 돋친 듯 자꾸 거칠어졌으며, 자유자제로 펼쳐지는 은유는 그 말의 배경을 각주로 달아놓았음에도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책을 읽는 동안 자주 눈을 감았고, 책을 덮었으며, 눈물을 흘리며 하품을 해댔다.
소설 제0호는 아직 호수가 없는 제호가 말하는 것처럼 아직 창간된 신문이 아니라 창간을 준비하는 신문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창간을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저널리즘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들은 대개 매일 한 두 종류의 신문을 읽는다. 그것도 자기가 선호하는 신문만을 대상으로 읽기 때문에 기사에 대한 비판을 별로 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결국 우리들은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 등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갖게 되는 셈인데 각자가 선호하는 뉴스 원이 따로 있으므로 서로의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렇게 달라지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지만 그런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탓에 다른 시선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려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독자들의 이런 시선을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는 십분 활용하는 것이다. 세상이 움직이는 방향을 마음대로 조종하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 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또 다른 예로는 지난 미국의 대선을 들 수도 있겠다. 선거 중에 상대방 후보 진영에서 나오는 모든 뉴스는 가짜라는 소리를 들을 지경이었다. 가짜 뉴스라는 말은 이제 거의 일상어가 되었다. 지난번에는 국회의원의 질문에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가짜 뉴스라는 말로 그 의원을 공박하기도 했다.
소설은 무대를 1992년으로 가져간다. 그 해는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전무후무한 정치 스캔드이 터지며 대대적인 부패 청산의 물결이 일던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3년 전이 꼭 그러했다. 새로 들어선 정권은 군사정권의 흉내를 내며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온갖 신문에는 연일 그에 관한 날선 보도들이 줄을 이었고 텔레비전 뉴스도 다르지 않았다. 민초들은 세상을 공정하게 보는 법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하나의 사실만을 진실로 믿게 되었다. 자기들이 믿는 사실과 다른 시각은 ’기레기‘라는 이름으로 매도되었고 온갖 거친 말들이 인터넷 공간을 유령처럼 떠돌며 해방군 노릇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소설은 그처럼 어지러운 시기에 막대한 자금력과 조직력으로 무장한 세력가를 배후에 둔 어느 신문사의 편집부가 주 무대다. 그들은 처음부터 탄생하지도 못할 신문 창간을 위해 연일 회의를 하며 나름대로 창간 이전 신문을 어떤 형태로 할 것인지, 어떤 내용을 다룰 것인지를 진지하게 협의하고 취재를 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무솔리니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언론의 음모론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미국의 CIA부터 테러리스트, 마피아 그리고 교황까지 얽혀 든 음모는 끝내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에 이른다.
우리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사회가 그렇다고 하면 그 아니라는 말은 순간에 거짓이 되고 마는 경우를 흔하게 본다. 그리고 그러한 진실은 만드는 곳이 다름 아닌 취재라는 편리한 옷을 입은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라는 것을 안다. 사람들은 모두 그러나 뉴스는 취재를 통해 확인한 것들이므로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허구일 수 있는지 말하자면 황색 언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매일 듣는다. 최근의 ‘채널 A’ 기자와 한 모 검사가 얽힌 사건도 그런 경우다. 법무장관이 사기죄로 구속된 죄수의 말을 믿고 검찰을 공격하는 것도 모두 이런 경우에 속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것이 음모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믿는 무리들이 있다. 우리는 에코의 이와 같은 미디어의 엄청난 영향력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황색 언론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한은 정치인들이 끊임없이 그런 황색 언론을 이용할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그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임은 자명하다. 우리가 울타리 속에 산다는 것은 가두어지고 길들여진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물 안과 다를 바 없을 것이며, 어느 진보지식인을 자처한 황색 정보 유포자의 말처럼 우리는 가붕개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황색 언론과 정보에 길들여져 있으므로 그것의 정체가 황색이라는 것을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