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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주둔 11공수 광주 이동명령
[광주상황] 경찰·신군부 주장 큰 차이 무장계엄군 맨손학생에 곤봉 휘둘러
경찰자체진압 묵살…CH-47·코브라등 헬기 광주상공 위협비행
전투경찰의 강력한 시위진압에 밀려 학생시위대가 뿔뿔이 흩어지고 있던 18일 오후 1시께 광주역인근에서는 트럭에 분승한 계엄군들의 이동상황이 목격된다.
이날 오전 10시 전남대정문앞에서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는등 만행으로 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른 7공수 33대대병력이다.
전남대를 떠난 33대병력이 재집결한 곳은 광주수창국교운동장. 오전 시간동안 학생시위의 중심지역할을 했던 가톨릭센터와 공용터미널 한일은행사거리등 주요지역에 2∼3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이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시내일원의 시위대 진압.
[경찰이나 보병투입에도 불구하고 무장폭도들이 특정시설을 거점으로 하여 격렬히 항거할 때] 투입하도록 돼있는 특공작전 수행부대가 1천명 미만의 비무장학생시위 해산을 위해 투입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다.
막무가내 군투입독촉
권승만중령이 지휘하는 33대대는 가톨릭센터를 중심으로한 금남로일대, 김일옥중령이 지휘하는 35대대는 금남로와 충장로 제봉로로 이어지는 중요지점의 시위진압명령이 내려진다. 이와함께 서울 동국대에 주둔하고 있던 최웅장군의 11공수여단에도 33·35대대 지원을 위해 광주로의 이동명령이 전달된다.
((본격적인 진압적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시위진압불능]을 전제로한 지원병력파견은 사후 공수부대투입의 정당성문제와 함께 5·18의 성격규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계엄사는 이와관련 당시 시내시위상황이 경찰병력만으론 저지가 불가능할 정도로 악화돼 있는 만큼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을 밝힌다.
[질서유지의 책임을 진 경찰의 사명감 희박으로 치안기능이 마비되자 시위군중들의 기세가 충전돼 무법천지 직전의 혼란상황을 초래, 치안회복을 위해 부득이 계엄군을 투입했다.]
[초기단계에서 포고령위반자의 집회농성에 대한 경찰의 미온적 조치는 시위묵인 결과를 초래, 경찰저지능력을 초과하는 상황발생.]
[14시께는 시위행렬이 3백∼1천여명으로 확대 경찰과 투석전으로 대치하면서 경찰의 가스차 1대를 방화하는 등 경찰능력으로는 저지할수 없는 상황에 이름.]
(이상 전교사 - 광주 소요사태분석자료. 계엄사는 이같은 인식을 토대로 당시 전남도경국장이던 안병하경무관을 5월26일 합수부로 연행조사한뒤 6월2일 사직시킨다. 안경무관은 조사당시 받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88년10월 사망한다.)
시내 상황이 악화로 치달음에 따라 오후2시께 공수부대 투입방침을 결정했고 오후 3시께 해당부대에 명령을 내려 호우 4시부터 본격진압작전을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18일 오후 광주지역의 상황은 신군부의 당시 주장이나 사후 기록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비공식적인 지휘계통
이날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앞 상황을 시작으로 확대된 학생시위는 신군부의 주장과는 달리 경찰의 강력한 진압작전에 밀려 시내 중심부 진입을 사실상 포기한채 외곽지역을 떠도는 수세적이고 산발적인 시위상태를 면치못한다.
경찰 또한 지난 14일 전후에 보였던 미온적 태도와는 달리 학생시위에 대해 강경한 모습을 보여 [경찰이 저럴 수 있는가]라는 불만이 학생들 사이에서 제기되는등 신군부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학생시위 진압을 담당했던 실무자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당시 31사단장 정웅소장과 경찰의 시위진압과정에 실질적으로 참여했던 전남경찰청 김경식 경정 (당시 전남도경경비계장·현재 여수경찰서 수사과장)은 군측의 주장이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증언한다.
[시위규모가 크지않은 만큼 우선은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진압하자고 건의했으나 상부의 지시는 막무가내로 군투입을 독촉했다. 오후 2시께 7공수 2개대대를 시내에 투입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를 이행치 않자 2시30분께 두번째 독촉이, 3시에 또다시 독촉이 와 결국 33·35대대에 시위진압지시를 전달했다.] (정전사단장, 88년12월 청문회증언)
[17일 이전까지의 시위상황은 결코 염려스런 것이 아니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지원병력을 되돌려 보낼 정도였다.
18일 오전상황도 크게 다를바가 없었다. 당시 학생시위는 질서정연했다. 경찰경비병력만으로도 상황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김경정 93년 5월 19일 본사인터뷰내용 5월22일 중앙일보보도)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였던 김영택씨는 오히려 [18일의 학생시위는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에게 전에 없던 수법으로 무차별 대응한데서 격렬화된 것] (사계절 10일간의 취재수첩)이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공수부대의 이동과 시위진압이 신군부가 시위상황 악화시점으로 주장하는 오후 2시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33대대 권승만중령은 지난 88년12월 20일 실시된 국회청문회에서 [오후 3시께 전남대에서 당시 31사단장이던 소장의 지시를 받고 오후4시께 금남로 일대 시위진압작전에 병력을 투입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당시 일부 기록과 시내상황을 목격했던 상당수 관계자들은 이와는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오후 12시45분 96연대로 부터 가톨릭센터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령.] (특전사 전투상보)
[오후 1시께 광주역 인근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트럭마다에 가득실려 시내중심부를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남풍출판사 주 [5월과 문학])
[오후 2시15분에서 20분 사이 수창국교 육교 인근에서 등에 총을 메고 진압봉을 든 공수부대와 대학생간의 충돌을 목격했다.] (89년2월23일 광주청문회 박병률씨 증언)
[점심시간 이후 얼마 안있어 시내에서 학생들이 연행돼와 쪼그려 뜀을 하는등 기합을 받은 뒤 대학건물로 끌려가는 것을 봤다.] (당시 전남대 수위 김웅산씨 증언)
[오후 3시께 정호용장군이 숙영지인 동국대로 찾아와 광주 7여단 2개대대가 계엄군으로 나가 있는데 소요진압작전을 못하고 매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11여단을 증파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88년 12월 20일 광주청문회 최웅당시 11여단장 증언)
11공수 선발대 출발
결국 이같은 증언들은 신군부의 공수부대투입 결정이 당시 광주시대 시위상황의 악화에 따라 부득이하게 결정된 것이라는 사후 발표가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당시 33·35대대가 정식계통을 통해 하달된 명령과는 달리 비공식지 휘계통을 통해 4시 이전부터 시내시위 진압작전에 돌입했음을 의미한다.
이와관련 일부 관계자들은 [전두환의 신군부가 김대중씨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에서 학생시위가 민중봉기로 발전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자기들의 계획을 방해하는 어떤 세력의 저항도 가차없이 분쇄할 의지와 능력을 과시하기위한 대량학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시행한 의도]된 행위로 해석하고 있다. (돌베개 주, 광주민중항쟁-다큐멘터리 80)
오후 1시께 수창국교에 집결한 7여단병력은 오후2시를 전후해 시작한 유동삼거리에 진압대형을 펼치고 도청방면으로 전진하면서 강력한 타격을 실시한다.
한편 이시각 최웅장군의 11공수여단선발대도 군용비행기를 이용, 광주로 향한다.
물론 이 시각부터 광주에 출몰한 군용비행기는 모두가 전쟁용 비행기로, 종목은 대형 CH47, 6인용작전헬기, [코브라]로 불려지는 폭격헬기, 건쉽, 에레나이트정찰기등으로 광주의 하늘을 굉음으로 찢기 시작한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좋은 하루 보네세요.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