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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 만난 사람 | 옛집국수 배혜자 할머니 |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봤지만 어른들께 배운 대로 살았어”
“손님들이 다 가족 같어” “많이 먹고 가야 돼요. 우리 집에 오면 많이 잡숴야 돼요. 모지라면 얘기하세요.” 자리마다 다니며 손님들 챙기느라 분주한 배혜자 할머니. ‘옛집국수’는 온국수, 비빔국수, 여름엔 콩국수까지 국수 맛으론 알아주는 곳이다. “어떤 사람들이 배고픈 줄 알고 찾아 먹이겠어요. 그래도 나같이 부족한 사람 찾아와 국수, 김밥 먹고 배부르게 가니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어요.” “어머니, 막내아들들 왔습니다” 하며 우르르 들어오는 손님들은 바로 군인들. 근처에 국방부와 미8군이 있고, 지금은 대전으로 이사 간 육군본부가 있을 때부터 할머니 집은 군인들의 ‘명소’였다. 일반 손님 15명이 먹을 양을 다섯이서 너끈히 해치우건만, 할머니는 자식 입에 들어가는 것처럼 좋을 뿐이다. 인력시장에 일하러 가는 분들, 아침 못 먹고 출근하는 우체국, 전화국, 소방서, 보훈청 등에 다니는 직장인들을 위해 3년 전부터는 오전 메뉴로 우거지 국밥도 팔고 있다. “새벽부터 출근하는 거 보면 다 금쪽같은 아들 딸인데 싶은 게 맘이 아파서 안 되겠더라구. 그래서 시작했지.” 국수값 3,000원. 재작년까지 12년 동안 2천원을 받던 할머니였다. 그런데 손님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우리도 양심이 있지, 밀가루 값이 엄청 올라 포장마차에서도 4천원은 하는데 어떻게 2천원에 먹냐”고 성화였다. “힘들기도 해 500원을 올렸는데, 인제 배추 값이 오르는 거야. 국수 2,500원어치 먹으면 배추는 4천원어치 먹네. 나 미쳐.”(웃음) 결국 올해 들어 다시 500원을 더 올렸다. 싸고 맛있게 먹이려는 마음을 아는지, 할머니 국수 먹으며 열심히 일한 사람들은 근무처를 옮길 때면 “그동안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오고, 때로는 버선, 속옷, 과일 등을 보내온단다. “우린 그냥 가족 같어”라는 말처럼 할머니는 매일 그런 마음으로 음식을 준비하신다. 거지가 와도 상에 공손히 주라던 어머니 가르침 지난 30여 년간, 이 식당 골목에서 가장 먼저 불이 켜진 곳은 언제나 할머니 국수집이었다. 새벽 3시. 새벽이라 부르기도 뭣할 만큼 천지가 깜깜한 시각, 달빛에 의지한 채 가게 문을 연 할머니는 커다란 들통 뚜껑을 열고 국물부터 살핀다. 전날 밤부터 뭉근한 연탄불에 다섯 시간은 우려낸 국물, 제대로 맛이 난다 싶으면 연탄구멍을 활짝 열어 끓어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미역, 다시마, 멸치, 파 뿌리, 양파들을 건져내고 굵은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멸치가 너무 삶아지면 시원한 맛이 안 나고 덜 삶아지면 비린내가 나기 때문에 국물 내는 것만은 지금도 꼭 할머니가 하신단다. “이 부족한 죄인이 만드는 거지만, 우리 중생들이 먹고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다 건강하게 해주소서, 매일 눈을 뜨면 기도하지.” 한번은 하루에 몇 번씩 연탄불을 가느라 고생하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아들이 남들처럼 편하게 하자고 가스불로 바꿔준 적이 있다. 하지만 가스불로 끓인 국물 맛을 보니 영 아니었단다. “나 국수 장사 안 할란다, 이렇게는 먹으라고 못 한다” 하시는 할머니의 단호함에, 결국 아들은 어렵사리 연탄 화덕을 구해와야 했다. 천 근 고추 갈아 일일이 김치 담가야 하고, 시골 메주 구해다 직접 된장 고추장 쒀야 하고, 밥은 한꺼번에 많이 하면 맛이 없다고 압력밥솥에 수차례 나눠 하며, 할머니는 고생을 자처하신다. 그 정성은 하루아침 쌓여온 게 아닐 터였다. “나 클 때부터 어머니가 그랬어요. 물 한 그릇을 떠줘도 두 손으로 드려야 공이 되고, 암만 얻어먹는 사람들에게도 상에 받쳐서 가족같이 공손히 차려줘야 복 받는다고.” 배혜자 할머니는 1938년 전남 순천에서 1남 2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머슴을 셋씩 둔 부잣집이었으나 ‘여자가 공부를 하면 출가 후 시집살이 힘들다고 편지를 쓴다, 그러면 망신’이라며 학교는 근처도 못 가게 했다. 대신 수놓고 살림 배우고,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아야 했다. 아들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 일으켜준 군인들의 쪽지 남의 말은 듣지도 말고 하지도 말아라, 남의 흉이 한 가지면 내 흉은 열 가지다, 찌개 하나를 나눠 먹어도 줄 사람부터 먼저 주고 먹어야지 내가 먹고 남은 것 주면 죄받는다, 지금도 귀에 ‘장장한’ 어르신들의 말씀을 할머니는 가슴 깊이 새기며 자랐다. 열아홉 살 때, 참하고 반듯한 색시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더니 중매가 들어왔다. 상대는 부유한 명문가의 아들로 대학생이었다. “우리 딸은 학교 문턱도 못 갔는디, 대학생 사위가 가당키나 하냐”며 친정아버지는 반대했지만 시댁에선 가정교육이 중요하지, 학력이 무슨 상관이냐며 혼사를 서둘렀다. 그렇게 만난 남편은 그지없이 자상한 사람이었다. “방도 아랫목 따듯한데 나 눕히고 자기는 찬 데 누워. 좋은 건 나부터 먹이려고 하고, 애들 주자고 하면 애들은 크면 먹으니께 당신 잡수라고 그러고. 일요일엔 쉬라고 중국음식 시켜줘가매 일도 못 하게 했어. 난 동사무소가 어딘지 이사 가면 어떻게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어. 신랑이 다 알아서 해주니까. 그렇게 세상이 뭐인지 돈이 뭐인지도 모르고 살았어.” “배운 건 없어도 ‘답답하다’ 소리 한 번 안 들었다”는 할머니는 남편의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이름 석 자는 알아야 한다며 가르쳐주던 남편, 서울로 올라온 뒤 건축 사업을 하며 승승장구하던 남편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건 할머니의 나이 마흔이 채 되기도 전이었다. 다리가 아파 신경통인 줄 알았는데 암이라고 했다. “가실 때 걱정을 많이 했어.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어린 자식들하고 남겨놓고 가려니까.” 처음엔 연탄불을 피워놓고 4남매와 함께 죽을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뭐든 해보자 마음먹자, 가릴 것이 없었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해산 빨래도 하고 식당 일도 하다가 옆집 아주머니의 권유로 국수 가게를 시작하게 됐다. “처음엔 혼났어요. 국수를 후르르르 삶으면 꼬들꼬들 맛있는 줄 알고 살짝 삶아놓으니까 익지 않았다고 손님들한테 혼나고 버리기도 많이 하고.” 이렇게 저렇게 삶아 보며 연구를 했다. 그렇게 국수 맛은 제법 냈지만 정작 손님이 오면 ‘어서 오세요’ 소리도 못하고 부엌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매일매일 다짐했다. ‘장사를 해야 한다. 못하면 우리 아이들 못 먹이고 공부 못 시킨다.’ 그리고는 매일 새벽 3시부터 밤 12시까지 장사를 했다. 차비라도 아끼려고 집에서 가게까지 걸어 다녔다. 너무 추운 날에는 상 2개를 붙여놓고 그 위에서 새우잠을 잤다. 그러다가 새벽 2시건 3시건 누가 문을 두드리면 벌떡 일어나 김밥 하나라도 팔았다. 점점 맛있다는 소문이 났다. 이른 새벽부터 장사를 하다 보니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 구걸하는 사람, 차비 달라는 사람, 다 먹고는 돈 없다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 할머니는 김밥까지 말아서 더 실컷 먹여 보낸다. 어린 시절 배운 대로, 한 사람 한 사람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상을 차려주었다. 한바탕 손님을 치르고 잠깐 허리를 펼 때면 할머니는 남편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 이렇게 애들하고 열심히 잘 살아요. 그곳에서 마음 편히 쉬세요” 라고. 할머니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자신이 장사를 한다는 게 감사할 뿐, 학교 안 보낸 부모 원망, 무심하게 일찍 떠난 남편 한 번 원망 한 적 없었다” 한다. 그런데 그저 운명이려니 하고 열심히만 살았던 할머니도 처음으로 하늘을, 남편을 사무치게 원망한, 가슴 아픈 일을 겪는다. 착하디착한 큰아들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것이다. 8년 전이다. “남기면 왜 남겼나, 다 먹으면 적었나, 내가 맨 걱정이여” 학교 다닐 때부터 틈만 나면 가게 일을 돕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꼬박꼬박 어머니께 갖다드린 효자였다. 그날도 밤 12시가 되어서야 장사가 끝났다. 큰아들은 일해주는 아주머니를 댁까지 모셔다드리고 오겠다며 차를 몰고 나갔다. 그리곤 영영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심장마비였다. 사람으로 살다가 자식 먼저 보내는 것처럼 기막힌 게 또 있을까. “그거는 말로는 못해. 안 당해 본 사람은 몰라….” 할머니는 가게 문을 닫아버렸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었다. 꼼짝을 않고 집에만 있다가, 사람들이 찾아오자 하루 종일 한강에 나가 앉아 있다 오고는 했다. 그런데 얼마 후부터 집 앞에 쪽지들이 붙기 시작했다. 국방부 박중령입니다. 어제 가게에 갔는데 문이 닫혔더군요. 댁에도 안 계셔서 쪽지 남깁니다. 제발 가게 문 여십시오. 총각 때부터 어머니 국수 맛있게 먹었습니다. 어머니 국수 먹으며 군대 생활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계속 어머니가 해주신 국수 먹고 싶습니다. 어머니 힘내세요. 옛날처럼 그냥 웃고 살아요. 제발 가게 문 여세요….
어느 날은 세 장, 어느 날은 네 장이 붙어 있었다. 쓸 줄은 모르지만 띄엄띄엄 읽을 줄은 알았던 할머니. 그렇게 서너 달 만에 국수집은 다시 문을 열었다. 가족 같은 손님들 덕이었다. “요즘은 그래도 가게를 넓혀서 기분이 좋아. 내가 상 4개 펴고 30년을 했잖아. 손님들이 와서도 가게가 좁으니께 쪼그려 먹고 밖에서 서서 먹고 반은 가고 반은 들어오고, 말도 못했어요. 그게 항상 미안하고 죄송했지. 국수 하나를 먹어도 편안하니 잡수고 가는 게 소원이었는데 넓히니까 손님들도 박수 치고 만세 부르고 좋아라 해. 지금 너무 행복해.” 몇 달 전 가게를 넓혔더니 구중궁궐이 부럽지 않은 할머니. 그 안을 꽉 채우는 할머니의 따듯한 마음과 웃음이 있어 더욱 풍요로운 ‘옛집국수’다. “아이고, 남기면 왜 남겼을까 걱정, 다 먹어뿔면 적었는가 걱정, 내가 맨 걱정이여.”(웃음) “얼음장 같던 마음 녹여준 국수집 할머니” 기업 광고 소재된 할머니와 교포의 실화 8년 전쯤 할머니 국수 가게가 방송에 나간 적이 있다. 다음 날 방송국 피디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40대 남자인 그는 다짜고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그 할머니 덕분에 인생이 뒤바뀐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사연인즉 이랬다. 그는 15년쯤 전,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잃었다고 한다. 설상가상 아내까지 그의 곁을 떠나 버리자 노숙자가 되어 용산을 배회하게 된다. 하루는 배가 너무 고파서 식당들을 다니며 밥 한술을 구걸했지만, 박대만 당했다. 박절한 세상인심에 불을 질러 버리겠노라는 독한 마음까지 먹었을 정도였다. 그러다 작은 골목에 있는 할머니네 국수집까지 간다. 할머니는 그의 몰골을 보고도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허겁지겁 두 그릇이나 먹은 후 그는 자리를 박차고 도망갔다. 그때 할머니가 뒤통수에 대고 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무조건 달음박질쳤다. 나중에야 할머니의 외침이 불쑥 머릿속에 들어왔다. “괜찮아요, 뛰지 말어, 다쳐~!” 할머니는 자신이 돈을 내지 못할 것을 알고도 친절하게 맞아주었고, 국수 한 그릇을 더 퍼주면서 웃어주었고, 말 한마디 없이 도망갈 때에도 자신이 다칠까 봐 염려해주신 것이다. 그는 도망치다 풀썩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한다.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마음이 얼음장 같았던 자신에게 할머니의 말 한마디는 따스한 불씨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 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파라과이로 혈혈단신 이민을 떠나 사업가로서 재기에 성공했다.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그의 성공을 가족처럼 기뻐했다. “그 사람 기억나. 얼마나 배고프면 그럴까 한 그릇 더 줬는데, 먹고는 후다닥 도망을 가는 거야. 괜찮은데…. 그 사람 뛰던 모습이 눈에 선해.” 국수 집 할머니가 부랑인에게 희망을 준 이 이야기는 방송에 나가며 일파만파 퍼졌다. 후일 그가 직접 찾아와 감사의 인사로 돈 봉투를 건네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찾아와 준 것만도 고마울 뿐”이라며 극구사양했다. 한번은 모 교회에서 헌금을 걷어 칠십 몇 만원이 든 봉투를 주고 간 적도 있다. 되돌려주기에도 여의치 않자 할머니는 가게 수익을 보태, 연말에 라면과 연탄을 사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했다. 지난해에는 모기업의 광고 소재가 되기도 했다. 광고 사진을 찍고는 사례라며 준 돈 역시 라면과 연탄이 되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돈이란 자고로 내 몸 움직여서 벌어야 하는 것”이라는 할머니. 그러면서 한 가지는 빌었다고 한다. “다 파라과이 그 양반 땜에 생긴 돈이잖어요. 이렇게 쓴 게 다 그 양반 복이 됐으면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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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후루루루 맛있겠담 냠냠..
아, 저 이거 완전 감동적으로 읽었어요~
그죠? 할머니 완전 감동이심!
헉 진짜 너무 감동적이네요ㅠㅠ
우우우 맛있게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