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판매부수는 8000만부가 넘고, 해적판까지 합치면 전 세계적으로 1억 부 이상 팔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 <어린 왕자>. 16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오늘날에도 널리 사랑 받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책을 읽는 사람들의 통과의례와도 같다. 하늘을 사랑했고 하늘에서 사라져간 생텍쥐페리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
1942년 초 뉴욕의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생텍쥐페리는 흰 냅킨에 장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식당 종업원이 옆에서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함께 식사하던 출판업자 커티스 히치콕이 생텍쥐페리에게 뭘 그리는 것인지 물었다. 생텍쥐페리가 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마음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한 어린 녀석이지요.”
히치콕이 그림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 어린 녀석 말입니다. 이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시면 어떨까요. 어린이용 이야기로 말이지요. 올해 성탄절 전에 책을 낼 수 있으면 참 좋겠는데 말입니다.” 며칠 뒤 생텍쥐페리는 친구 레옹 윈체슬라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날보고 어린이 책을 써보라는 데, 날 문방구에 좀 데려다 주시오. 색연필을 사야 하니 말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착상을 색연필로 그려보았지만 신통치 못하다고 생각했고, <전시 조종사>의 삽화를 그린 베르나르 라모트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라모트의 데생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생텍쥐페리는 점점 더 이 일에 몰두했다.
1942년 여름 생텍쥐페리 부부는 뉴욕에서 기차로 45분 거리에 있는 롱아일랜드 노스포트 근처 이튼 네크에서 식민지풍의 하얀 삼층집을 세내어 살았다. 이 집이 <어린 왕자>의 사실상의 산실이 되었다. 그리고 1943년 4월 6일 레이널앤히치콕(Reynal & Hitchcock) 출판사에서 영어와 불어로 출간되었다.
이듬 날인 7일부터 배포된 영어판 초판은 3만 부, 불어판 초판은 7천 부였다. 나중에 갈리마르 출판사가 레이널앤히치콕 출판사를 고소했고(생텍쥐페리는 자신의 모든 저작에 관한 출판권을 갈리마르와 계약해둔 터였다.), 프랑스에서는 1945년 11월에야 책이 나왔다. 그러나 전후 인쇄용지 품귀 탓에 실제로 본격적으로 서점에 배포된 것은 1946년 4월이었다. (1948년 레이널앤히치콕 출판사는 하코트 브레이스 앤 컴퍼니에 인수되었다.)
“아니, 난 친구들을 찾고 있어. ‘길들인다’는 게 뭐지?”
“그건 사람들이 너무나 잊고 있는 건데…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관계를 맺는다고?”
“물론이지.” 여우가 말했다.
“넌 나에게 아직은 수없이 많은 다른 어린아이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나는 널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아. 너 역시 날 필요로 하지 않고. 나도 너에게는 수없이 많은 다른 여우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게 되는 거야. 너는 내게 이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거야. 난 네게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고….” “이제 좀…알 것 같아.” 어린 왕자가 말했다.
“꽃 한 송이가 있는데 말이야…그 꽃이 날 길들였나봐….” “그럴 수도 있겠지.” 여우가 말했다.
“지구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으니까….”
(<어린 왕자>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pp.98-99)
시간을 거슬러 올라 1939년 9월 3일, 예비역 공군 장교 생텍쥐페리는 툴루즈 기지로 오라는 명령을 받고 공군 대위로 복귀했지만, 신체검사에서 예전 비행에서 당한 사고로 좌반신의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전투기 조종 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생텍쥐페리는 비행하고 싶어 했다. 공군 장성과 장관 등에게 청을 넣어 결국 1939년 말부터 1940년 7월까지 2/33 전투비행 중대 소속으로 고공 정찰, 촬영 임무를 수행했다. 인기 작가였고 연령도 동료 비행사들보다 높았지만, 그는 스스럼없이 동료들과 어울리며 악조건을 견뎌냈다.
1940년 7월에 전역한 생텍쥐페리는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 진영에 가담하지 않고 프랑스의 승리를 위해 미국의 개입이 절대적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스스로를 프랑스와 동일시하는 드골에 대한 불신감이 깊었던 데다가, 드골의 자유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대독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8월 5일에 아게의 누이 집으로 가서 <성채>의 집필에 전념했지만 자신보다 스물두 살이나 많은 유대인 친구 레옹 베르트를 찾아가 그로부터 미국행을 권유받았다. 마침 미국의 출판사와 번역자도 생텍쥐페리에게 <바람과 모래와 별>의 저자 강연과 인터뷰를 권유하고 있던 터였다.
모로코, 리스본을 거쳐 1940년 12월 31일 뉴욕에 도착한 생텍쥐페리는 사실상의 망명자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달 내에 귀국할 작정이었지만 프랑스로 돌아가도 뚜렷하게 설 자리가 없는데다가, 미국 내에서 그는 이미 인기 작가가 되어 있었다. 1941년 2월에는 뉴욕의 리츠칼튼 호텔을 떠나 센트럴파크 사우스 240번지 27층 아파트로 이사했고 11월에는 남프랑스 오페드에 머물고 있던 아내 콘수엘로를 미국으로 오게했다. 그는 미국에서 작업할 때 녹음이 가능한 딕타폰에 목소리를 녹음해서 다른 사람이 그 내용을 타자하는 방식으로 원고를 작성했다.
생텍쥐페리가 처음으로 하늘을 난 것은 1912년 12살 때였다. 조종사 베드린이 모는 비행기를 타고 앙베리외 공항에서 처음 이륙했던 것. 1919년 생텍쥐페리는 해군사관학교 입시에 응시했지만 구두시험에서 불합격됐고 이듬해 파리 미술학교에서 청강생으로 6개월 간 공부했다. 그리고 1921년 공군에 소집되어 전투비행단 제2연대 소속으로 스트라스부르에서 근무했다. 처음에는 정비부대 소속이었지만 개인교습을 받은 후 조종사가 되었고 1922년 전투 중대 중위로 파리의 주 공항인 부르제에서 공군 2년차를 마쳤다. 이해 작가 루이즈 드 빌모랭과 약혼했지만 이듬해 파혼했고 6월에 제대했다. 제대 이후 사무원과 트럭 외판원 생활을 했고, 본격적으로 작가 수업을 한 것은 1923년부터였다. 그리고 1926년 ‘르 나비르 다르장’지에 단편 ‘비행사’를 발표했다.
1926년부터 항공사에 취업하여 프랑스의 툴루즈와 서아프리카 세네갈 다카르 항로 우편기를 조종하고, 다카르 항로상의 아프리카 기항지인 모로코 남부 캅 쥐비의 항공기지 착륙장 지점장으로 18개월 간 일하기도 했다. 사막 지역에서 보낸 이 시기가 <인간의 대지>, <어린 왕자>, <성채> 등 여러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9년에는 아에로포스탈 아르헨티나 영업부장이 되었고, 과테말라 출신 문인 엔리케 고메즈 카리요의 미망인 콘수엘로와 만나 1931년 4월 12일에 결혼했다. 이 해 <야간비행>이 출간됐고 페미나상을 수상했다. 1934년에는 에어프랑스사에 입사해 사이공에서 활약했고 이듬해에는 파리-사이공 비행기록을 세우기 위해 이집트로 출발했지만, 12월 30일 카이로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 리비아 사막에 불시착해 5일간 걸어가다가 극적으로 구조됐다. 1938년에도 뉴욕에서 이륙해 비행하다가 과테말라에서 추락하여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이듬해 1939년에는 <인간의 대지>가 출간됐고 같은 해 6월 미국에서 <바람과 모래와 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이달의 책’으로 선정되고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로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전쟁이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미국 여행 중 8월 말에 귀국했다.
<어린 왕자> 출간 직후 생텍쥐페리는 지난날 동지들이 있는 2/33 비행중대에 합류하기 위해 뉴욕을 떠나 3주간의 여정 끝에 1943년 5월 4일 알제에 도착했다. 당시 알제의 드골 임시정부는 생텍쥐페리를 공공연히 비겁자로 비방하며 <전시 조종사>의 판매를 금지시키기까지 했다. “왜 내가 전투 비행기에 몸을 싣고 순정한 삶을 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단 말인가.” 당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생텍쥐페리가 한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1943년 7월 21일 생텍쥐페리는 튀니스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옛 비행중대에 복귀했다. 그러나 조종사 연령제한이 30세 전후인 라이트닝 비행기를 타기에는 그의 나이가 많았다. 결국 관측과 기관총 보조사수 역할을 제외한 비행기 조종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1944년 4월 단 5회의 정찰비행만 한다는 조건으로 비행중대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6월 29일에는 출동 순번이 아님에도 자신이 잘 아는 사부아 정찰이라는 이유를 들어 출동을 자원했고, 안시 상공에서 엔진 고장이 일어나 실수로 이탈리아 제노아 상공까지 이르러 격추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그리고 1944년 7월 31일. 지중해의 한 여름은 그날도 맑고 짙푸르고 뜨거웠다. 아침 8시 45분 생텍쥐페리는 그르노블-안시 정찰 임부를 띠고 이륙했다. 론 강 골짜기를 따라 정찰을 한 뒤 코르시카 기지로 돌아오는 고독한 정찰 비행이 시작된 것이다.
예정된 기지 귀환 시각은 오후 1시 30분 무렵. 그러나 생텍쥐페리가 모는 정찰기는 기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독일 전투기들의 관측과 공격에 완전히 노출될 수밖에 없는 맑은 날씨. 생텍쥐페리의 정찰기는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니스 서쪽 상공에서 저공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바다 쪽으로 선회하여 해안선 저 너머로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 그의 비행기는 안전 고도인 6천 미터보다 낮게 그리고 예정된 항로를 벗어나 비행하고 있었다.
6월 29일의 비행에서도 생텍쥐페리는 지시받은 항로에서 벗어나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상기시키는 안시 호수 상공을 비행했다는 이유로 주의조치를 받은 적이 있었다. 7월 31일의 비행에서도 그는 어느 곳보다도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방스 지방으로 들어서자 정상적인 귀환 항로에서 서쪽으로 벗어났던 것 같다. 바스티야 북쪽 100킬로미터 지점 코르시카 상공에서 적기에 피격되어 바다로 추락. 이것이 44살 생텍쥐페리의 마지막이었다.
1998년 마르세유 동남쪽 바다에 넙치 잡이 어부들이 쳐놓은 그물에 작가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 하나가 걸려 올라 왔다.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생텍쥐페리의 비행기 ‘p38라이트닝’이 바다에 추락한 것이 분명해졌다. 팔찌 안쪽에는 ‘콘수엘로’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으니, 생텍쥐페리가 마지막까지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짐작도 가능해졌다. 이후 몇 년 뒤에는, 그가 마지막 탔던 비행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잔해가 같은 해역에서 수거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3월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조종사였던 호르스트 리페르트(89세)가 프랑스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생텍쥐페리가 타고 있던 비행기를 격추했다고 고백했다.
1944년 그날 리페르트는 프랑스 남부 해상을 비행 중에 미국산 ‘p38라이트닝’을 발견하고 수차례 근접 공격하여 격추시켰다고 밝혔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제 안 찾아다녀도 된다. 내가 바로 생텍쥐페리의 비행기를 격추시킨 사람이다. 나중에야 바다에 떨어진 그 비행기에 생텍쥐페리가 타고 있었음을 알았다. 나는 제발 그가 아니길 바랐다. 우리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러했듯이 나도 그의 책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이지 커다란 수수께끼다. 어린 왕자를 사랑하는 여러분에게나 나에게나, 이 세상 어딘가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 한 마리가 한 송이 장미꽃을 먹었느냐 먹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천지의 모든 게 온통 다 달라져버리니 말이다. 하늘을 쳐다보라. 그리고 이렇게 자문해보라. “양이 그 꽃을 먹었을까, 먹지 않았을까?” 그러면 세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무도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걸 깨닫지 못할 것이다. (<어린 왕자>,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p.137. 끝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