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16/ by. 얼음빙수/
“좋아?”
낙엽이 많이 뒹구는 가을에
도경수는 민윤기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너 낙엽 보여주려고 야자도 빼고 왔는데.......”
민윤기가 말이 없다.
“에이, 너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냥 가야겠다.”
‘안 돼!’
민윤기는 탈락한 이파리를 보는 것뿐인데 가슴이 벅찼다.
‘도경수, 나한테 낙엽 좀 뿌려줘 봐.’
도경수가 낙엽이 많은 바닥에 민윤기를 내려놓고
민윤기 위에 낙엽을 마구 쌓았다.
“이제 됐어?”
‘어. 좋다. 계속 여기 있고 싶다.’
“그럼 윤기는 길바닥에서 살아. 경수는 갈 거야.”
민윤기가 또 말이 없다.
“민윤기, 진짜 여기서 살 거야? 왜 대답이 없어.”
민윤기는 가을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가을을 타는 건가.
민윤기는 감이 좋은 편이었다.
민윤기는 도경수가 수능을 보기도 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릴지 몰랐다.
‘도경수, 만약에. 네가 쓴 적도 없는 일기장을 읽는 기분이 들면.’
민윤기가 헛소리를 한다.
‘그 자리에서 덮어. 더 궁금해하지 말고.’
“무슨 소리야.”
도경수는 울컥했다.
기껏 좋은 구경시켜주려 데리고 나왔더니 민윤기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도경수, 너 일기 써?’
“지금 그 얘기를 왜 해.”
‘일기장 쓰냐고.’
도경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경수야, 너 일기 안 써.’
도경수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
/식물인간/ 16/ by. 얼음빙수/
민윤기의 예감은 들어맞지 않았다.
수능이 끝나고 면접이 코앞에 다가온 시점에도 민윤기는 도경수 곁에 있었다.
‘도경수, 너 뭐. 걱정되냐?’
“아무래도 면접이니까 첫인상이 중요하겠지.”
‘너 첫인상 좋아. 말만 좀 조심하면 돼.’
“식물의, 식물에 의한, 식물을 위한, 식물 팬, 식물 매니아, 식물 그 자체, 식물인간 도경수입니다! 이런 인사는 어때?”
‘말조심 하랬지.’
도경수가 식물도감을 뒤적이며 식물의 의의를 탐구했다.
도경수의 면접 준비는 전혀 체계적이지 않았으나
이상하게도 예감이 좋았다.
며칠 전, 싸이코패스 수타인이 도경수에게
이과 일등의 기운을 담은 바나나맛 제티를 선물했다.
도경수는 수타인의 수줍은 응원을 우유급식에 타서 마셨다.
도경수는 가서 시를 한 편 읊어도 분명 천재 소릴 들을 것이다.
/식물인간/ 16/ by. 얼음빙수/
도경수가 면접을 보러가는 날 아침이었다.
동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도경수가 한 손에 보리차를 들었다.
도경수는 대학 면접을 위해 먼 길 떠날 운명이었고
긴장감에 목이 바싹바싹 탈 예정이었다.
도경수가 호흡을 가다듬고 방을 나가려는데
도경수의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들, 혼자 가서 어떡해.”
도경수는 긴장감에 가슴이 울렁댔으나 눈물을 꾹 참았다.
“걱정하지 마, 엄마. 나 잘하고 올게.”
지켜보던 민윤기도 도경수를 응원했다.
‘그래. 긴장하지 마, 도경수. 너 붙을 거야. 나 귀신 같은 놈인 거 알지?’
‘이 진짜 귀신 같은 놈. 내가 면접 끝나면 아주 제대로 놀아줄 거니까, 기다려.’
‘미친놈이.’
도경수 엄마의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도경수의 엄마가 쇼핑백에서 새 운동화를 꺼내 도경수 발에 신겨주었다.
“경수야, 엄마가 이제야 새 걸 사주네.
다 떨어진 신발 신게 해서 미안해.
잘 하고 와. 알았지?”
아침부터 눈물바람 불게 생겼다.
청승맞게도 우는 건 민윤기였다.
‘아, 엄마 보고 싶네.’
“엄청 예쁘다. 역시 엄마 안목은 알아줘야 돼. 나 잘 갔다 올게.”
도경수를 실은 우등버스가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도경수는 처음 보는 길에게도 낯을 심하게 가릴 것이다.
/식물인간/ 16/ by. 얼음빙수/
도경수가 대기실에 앉아 면접 순서를 기다렸다.
도경수의 대기표는 35번이었다.
도경수 옆에 앉은 34번은 누가 봐도 모범생이었고
36번은 누가 봐도 양아치였다.
“어이, 35번.”
36번이 도경수를 불량스럽게 불렀다.
“왜”
“건투를 빈다. 나 대신 붙어라.”
36번이 도경수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이왕 보는 거 너도 꼭 붙으렴.”
“나는 아빠가 대신 원서 낸 거야. 면접 안 가면 집에서 내쫓는다고 해서 억지로 온 거지 대학 다닐 생각도 없다.”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
“34, 35, 36번 들어오세요.”
도경수의 심장이 달팽이관 바로 뒤에서 박동했다.
“야, 긴장하지 마. 다 좆밥들이야. 싸움하면 네가 이길걸?”
면접장에는 3명의 면접관이 앉아있었다.
지원자의 학생생활기록부를 빠르게 넘겨보던 면접관이 질문을 시작했다.
“34번 오상진 학생. 식물의 생명과 인간의 생명, 그 가치는 같을까요?
본인의 생각을 말해보세요.”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은 1차 생산자로서 생태계를 조성하는, 기초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인간이 식물을 이용하는 입장에 있다고 해서 식물보다 생명의 가치가 뛰어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각기 다르게 위치하고 기능하는 식물과 인간의 생명 가치를 겨루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34번의 FM 답변을 들은 면접관이 36번에게 질문했다.
“36번 임철 학생. 종자(씨)는 식물의 최초일까요, 최종일까요? 참고로 최초이자 최종이라는 뻔한 답은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오상진과 도경수가 뜨끔했다.
“최초건 최종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씨앗 좀 가만히 내버려 두세요.”
36번이 패기 있다 못해 싸가지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면접관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도경수에게 질문했다.
“35번 도경수 학생. 식물에게도 모성애가 있을까요?
식물은 종자를 맺기 위해 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데,
종자를 형성한 뒤 얼마 안 돼 죽고 맙니다.”
낳아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것이 생의 이치라면
모성이 없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남겨진 존재에 대한 안타까움에도 모체는 살아날 수 없을 테니.
“씨앗은 껍질과 배젖과 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배는 자라서 식물체가 되는 부분입니다.”
“껍질은 배를 열악한 환경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덕분에 배는 겨울과 가뭄을 견디며 무사히 피어야 할 때를 기다릴 수 있습니다.”
“배젖은 배가 자라는 데 필요한 양분을 제공합니다. 새싹이 스스로 광합성해서 먹고 살 수 있을 때까지 사용하라고 모체가 넣어준 겁니다. 적어도 움트기 전에 굶어 죽는 일은 없으라고.”
“씨앗을 세상에 떨어뜨려놓고 얼마 안 돼 죽을 수밖에 없는 식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씨앗을 위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왔을 겁니다.”
“저는 이와 같은 씨앗의 구조가 식물 모성의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면접관이 다시 36번에게 기회를 주었다.
“임철 학생, 꽃은 왜 핍니까?”
“걍 질 줄 모르니까 핀 거죠.”
“수고하셨습니다.”
면접장 밖에는 대학 방송국에서 나온 기자들이 예비 입학생들을 취재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면접은 잘 보셨나요?”
이게 뭐라고 취재 열기가 뜨거웠으나 학생기자는 목표를 잘못 정했다.
36번 임철은 기자가 내민 마이크를 보자마자 이빨로 물어뜯어 버렸다.
36번 임철의 임팩트가 대단했다.
도경수의 머릿속을 온통 맴도는 말이 있다.
꽃은 왜 핍니까?
그냥 질 줄 모르니까 핀 거죠.
꽃은 어떻게 핍니까?
질 줄 모르고 핍니다.
꽃은 질 줄 몰랐기에 피었다.
모든 인생은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