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에 이르면 땅고 열풍은 가장 잘나가는 살롱에까지 도달하여 프랑스 사회 전체에 충격파를 일으켰다. 그해 여름에는 어디에나 땅고가 있었고, 사교계, 화류계, 부르주아지, 쁘띠 브루지아지, 노동계급 등 모두가 땅고에 빠졌다. 오후 4-7시에 열려 5프랑 정도의 입장료로 차와 샌드위치도 제공되며 마음껏 춤출 수 있는 땅고 다과회thé tango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땅고 샴페인 파티, 자선 땅고 파티, 땅고 만찬, 나이트클럽 땅고 파티 등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 대부분은 샹젤리제 거리에서 열렸고, 샹젤리제 거리 원형 교차로의 Palais de Glace 아이스링크에서 빙상 땅고 무도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초대형 땅고 경연대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우승자 커플은 총 62곡을 춰야 했고 이 포맷이 그대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역수입되기도 했다. 심지어 그해 여름철에는 파리와 도빌 사이를 운행하는 ‘땅고 열차’도 있었다.
땅고다과회thé tango를 그린 그림들
Palais de Glace. 한국말로 하면 '얼음궁전'
땅고 시연자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사람은 Sénas 후작 루도비치 드 포탈루Ludovic de Portalou였다. 파리 화류계의 중심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레스토랑 중 하나라는 Maxim’s를 연 주축 멤버이기도 한 그는, 땅고가 인기를 끌기 오래 전에 부에노스아이레스 현지에서 땅고를 배운 몇 안 되는 프랑스인 중 하나였기에 파리에서는 ‘땅고의 왕Le Roi du Tango’으로 통했다. 여전히 땅고를 외설적이라고 보는 시각이 존재했기에 젊은 여학생들이 땅고를 배우는 것은 금지되었지만, 포탈루 후작의 조카인 Adry de Carbuccia는 삼촌에게 땅고를 가르쳐달라고 졸라 배웠고, 1913년 8월 도빌의 카지노에서 열린 티 댄스 파티 땅고 경연대회에서 이 삼촌-조카 커플이 1등을 먹어버렸다. Carbuccia는 자서전에서 ‘잘만 추면 땅고에는 부적절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여 땅고 옹호자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땅고가 사회에 미친 영향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Carbuccia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땅고는 관습과 규범을 바꿔놓았다. 몇 년 전만 해도 혼자서 집밖으로 나가지 않던 여자들이, 어머니에 의해 주입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얼굴도 모르는 춤 파트너들의 품에 덥석 안기곤 했다. 다과 무도회가 엄청나게 유행하여 모든 계층의 여자들이 참석했다. 돈을 내고 ‘사교 댄서’들에게 레슨을 받기도 했다. 나이 든 여성들은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수업 후에 은밀하게 연애를 즐기기도 했다.” ...이래서 ‘라틴 연인’이라는 땅고 춤꾼의 팬시한 이미지가 일반인들에게는 ‘제비족’과 별 다를 바 없게 느껴지는 거다.
Adri de Carbuccia의 자서전 <Du Tango a Lily Marlene>
향수부터 코르셋에 이르기까지 여러 상품들이 땅고라는 명칭을 갖다 썼고, 땅고라는 이름은 색상에도 차용되어 ‘땅고 색상couleur tango’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대한 뒷이야기가 또 있다. 어떤 실크 제조업자가 가진 상품 중에 팔기 힘들 만큼 야하게 염색된 오렌지빛 노란색 공단 천이 있었는데, 팔리지 않은 채 오래된 재고가 엄청나게 많아서 헐값에 바겐세일을 했더란다. 근데 이때 상품 이름을 ‘새틴-땅고’라고 했더니만 며칠만에 완판되고 재입고 안되냐는 고객들의 요청이 빗발쳤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이 업자가 그 색조를 뽑아낸 제조법을 잃어버린 거라. 그래서 경쟁업체들이 너도나도 뛰어들어 연한 레몬색부터 진한 샤프란색까지 ‘땅고 색 계열la véritable couleur tango’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를 했다는 이야기.
다음으로 유행한 것은 ‘땅고 블라우스’로, 검은 털이나 백조 깃털로 가장자리가 장식된 ‘땅고 색’ 실크나 공단 재질의 가벼운 긴팔 블라우스였다. 이 블라우스는 한 조각의 천으로 재단을 해서 어깨부터 손목에 이르는 부위에만 봉제선이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따라서 상체를 훨씬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고, 부풀어 올라 있는 소매가 춤 동작에 따라 하늘거렸다.
블라우스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의복류에 땅고의 영향이 미쳤다. 패션을 좀 안다는 남자들은 ‘fumadero tango’라고 알려진, 어깨와 팔 부위가 넉넉한 아르헨티나 스타일의 기다란 디너 재킷을 입었다. 여성들의 패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땅고의 영향을 받았다. 약간 비스듬하게 쓰는 것이 유행이었던 모자는 춤추다 떨어지지 않게 머리 가운데에 쓰는 스타일로 변했고, 모자에 다는 깃털 장식도 파트너의 시야를 가리지 않도록 수평형에서 수직형으로 변화했다. 길고 덜렁거리는 목걸이나 바닥에 질질 끌리는 치맛자락도 사라져갔고, 춤출 때 엉덩이 부위에 걸치적거리는 이브닝백도 유행에서 멀어져갔다. 다리가 길어 보이고 동작이 편해지도록 댄스복의 허리선은 더 높아졌고, 이미 유행하고 있던 무릎 길이의 덧치마는 땅고에 잘 어울렸다. 보다 더 자유로운 움직임을 위해 일부 과감한 여성들은 ‘jupe culotte(치마바지)’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 일찍이 1911년 파울 프와레Paul Poiret에 의해 미래의 패션으로 예견되기도 했던 이 스타일이 1913년 땅고 무도회나 경마장 등에 등장하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13년 미국 잡지 <Dress and Vanity Fair>에 실린 파리 최신패션 동향 기사, '땅고 다과회에 뭘 입고 가나?'
파울 프와레가 디자인한 jupe culotte(치마바지)
요리사나 파티셰들도 땅고 열풍에 편승했다. 땅고와 연관된 노란색이라는 이유로 바나나 땅고La Banane Tango라는 이름의 디저트가 페슈 멜바(Peche Melba, 복숭아와 아이스크림을 재료로 한 디저트)와 나란히 메뉴에 오르기도 했고, 땅고 다과회에서는 땅고 과자Le Gateau Tango가 제공되었는데 이는 아이싱을 얹은 초콜릿 케이크부터 사브르 비스킷까지 춤추는 사이사이에 가볍게 집어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를 총칭하는 것이었다. 화가나 시인 등 예술가들도 땅고를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Clermont-Tonnerre 공작부인이었던 Elisabeth de Gramont는 회고록에서 당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춤이 여기저기로 퍼져나갔다. 춤을 싫어했던 사람들도 무도회를 열었고,손님들이 정치인들에서 탱고 추는 커플로 교체되었다. 한번은 예전 습관대로 알고 지내던 노부인 집을 찾아갔다. 원래 오렌지에이드나 대접하는 조용하고 작은 파티를 열던 곳이었는데, 그 집에 도착하니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벽에 걸려있는 조상님들 초상화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들이 손에 담배를 쥔 채 서성거리고 있고, 카우보이 같은 남자들이 땀을 뚝뚝 흘리면서 종아리를 드러낸 파트너들을 붙들고 있었다. 원래 오던 상류층 손님들은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어딘가 다른 데로 피신을 했을 거라나.”
하지만 사실은 그 상류층 사람들도 땅고를 배우는 데 열심이었다. 파리에서 땅고가 인기를 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돈을 벌려는 젊은 아르헨티나 댄서들이 땅고 선생으로 파리에 왔고, 실제로 그들 중 일부는 이름을 날리며 큰돈을 벌었다. 앞서 인용한 공작부인 Elisabeth가 회고록에서 (과장을 섞은 것일 수도 있지만) 말한 것처럼 당시 파리의 대형 댄스홀인 매직시티에서는 점잖은 마나님들이 때로 자신의 시종이나 미용사와 땅고를 추었다는 이야기를 보면, 그때도 땅고를 추는 데 있어 여자보다 남자가 더 귀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Elisabeth의 말에 따르면 당시 파리 땅고계 최고 스타는 스페인 왕족 출신인 Galliera 공작부인 Infanta Eulalia로 그녀는 한 무리의 아르헨티나 댄서들을 거느리고 다녔는데, 그중 한 명은 뻔뻔스럽게도 ‘이 몰락한 프랑스 귀족들과 춤추는 게 너무 좋다’고 나불댔다고 한다. 더러는 러시아 공주니 이탈리아 공작이니 귀족 신분을 사칭해서 땅고 무도회에 스며들어 소매치기나 도둑질을 하는 잡범들도 출몰했다고 한다.
파리에서 시작된 땅고 열풍은 영국 런던,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땅고를 접한 최초의 영국인은 1911년 여름 영불해협 휴양지에서 땅고를 경험한 것으로 추정되고, 같은 해 영국 잡지 댄싱 타임스Dancing Times에 처음으로 땅고를 추는 모습의 사진이 실렸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땅고 열풍을 촉발한 것은 1912년 2월에 런던 게이어티 극장에서 올라간 <The Sunshine Girl>이라는 공연이었다. 공연 중 땅고를 추는 장면이 있었고, 주연배우 George Grossmith는 1911-12년 겨울에 파리에서 땅고를 배운 바 있었다. 그와 파트너가 춘 땅고 장면이 아주 멋져서 따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1913년 봄 무렵에는 땅고 열풍이 최고조에 달해서 런던에서도 파리에서만큼 땅고 다과회가 큰 인기를 끌었고, 호텔이나 레스토랑에서뿐만 아니라 중상류층 가정에서도 땅고 다과회가 열렸다. 사보이 호텔에서는 정기적으로 땅고 만찬이 열리기 시작했다.
<The Sunshine Girl> 공연 홍보 엽서(왼쪽) / 주연인 George Grossmith와 Phyllis Dare
1913년 런던 레스토랑의 땅고 다과회Tango tea
1913년 11월 22일 London News에 실린 삽화.
댄스 강사가 땅고 스텝과 동작을 가르치는 모습
그러나 모두가 땅고를 환영한 것은 아니었고, 선정적이라거나 점잖지 못하다는 이유로 땅고를 반대하고 공격하는 목소리들도 계속 있었다. 1913년 5월 20일에는 ‘어느 귀족 부인’이라는 필명으로 타임스지에 기고문이 실렸는데, 런던 사교 시즌에 어린 여식들을 지도해야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요즘 유행하는 땅고나 터키 트롯, 보스턴 등의 춤을 추는 무도회는 못마땅하기 그지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맞서 잡지 Dancing Times와 배우 Grossmith는 땅고를 옹호하는 의견을 냈고, 뒤이어 여러 언론들이 땅고라는 춤을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가 하는 토론에 뛰어들었다. 대략적으로 의견이 모아진 결론은, ‘점잖게 추면 용인될 만하다’는 것이었다.
유머 잡지 Punch에 실린 만화.
상류 사회의 생활방식을 열망하는 딸에게 엄마가: "얘야, 네가 무슨 썰을 풀든, 이 응접실에서 땅고 다과회는 열리지 않을 거란다."
1913년 말에 이르면 땅고의 인기가 더욱 높아져서, 일러스트 잡지 더 스케치The Sketch 11월호는 커버스토리로 땅고를 선택하고 “모든 사람들이 땅고를 추고, 땅고를 배우고, 땅고 이야기를 하며, 땅고를 관람한다.”는 기사를 실었다. 다음해인 1914년 여름, 러시아의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햄프스태드 켄우드에서 무도회를 열었는데 여기에 영국 국왕 조지 5세의 메리 왕비가 오기로 되어있었다. 여기엔 유명한 프로 댄서인 Walton부부가 새로운 춤을 시연해 보이는 순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왕비가 땅고를 몹시 못마땅해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땅고는 제외해 놓았다. 그런데 정작 행사가 진행되자, 왕비가 땅고가 빠진 것에 실망스러워하는 기색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바람에 7분간의 땅고 시연이 이어졌고, 이를 본 왕비는 ‘매력적이다’라고 말하며 맘에 들어했다고 한다.
<The Sketch> 1913년 11월호와 10월호 표지
독일에서는 약간 사정이 달랐다. 엄격한 통치 스타일의 빌헬름 2세는 춤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있어서 폴카, 왈츠 등 이른바 ‘신식’ 댄스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궁정 무도회에서는 미뉴엣과 가보트 정도만 허용되곤 했다. 1913년 여름, 프러시아 국회 의장의 공작부인이 국회 공식 리셉션룸에서 외교관들과 고위 관리들을 초대해 땅고 다과회를 열었다는 사실을 안 황제는 격노하여 제복을 입은 관리들이 땅고를 추는 것을 금한다고 선포했다. 또 땅고 매니아로 유명한 자신의 아들 황태자 때문에 몹시 역정을 내기도 했다. 이렇게 궁정에서는 황제의 노여움 때문에 여의치 않았지만, 궁정 바깥에서는 땅고의 인기가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드높았고, 땅고 다과회가 성행했으며 땅고 공연들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는 아마도 군주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땅고 추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일 것이다. 191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층들이 가는 나이트클럽에서 아르헨티나 땅고라는 쌔끈한 새 춤이 소개되었는데 거기에 황제의 조카인 젊은 대공 두 명이 연루되었다는 소식을 내무부장관이 황제에게 알렸다. 황제는 그 두 조카들에게 자신의 앞에서 시연을 해 보라고 명령했고, 놀랍게도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문제의 두 조카 중 한 명인 디미트리 대공은 당시 56세의 고모 아나스타시아 대공비를 에스코트하여 갔던 것인데, 이 대공비는 춤에 지지리도 재능이 없었으나 의욕만은 활활 타오르는 사람이었다. 애초 에스코트 자체가 내키지 않았던 디미트리 대공은 짐스러운 고모를 당대 최고 유명 댄서인 버논 캐슬Vernon Castle에게 떠넘겼고, 아나스타시아 대공비는 그에게서 원스텝과 땅고를 배웠다. 버논의 파트너이자 부인인 아이린 캐슬Irene Castle은 자서전 <Castles in the Air>에서 “대공비가 땅고 추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코끼리가 왈츠 추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을 텐데.”라고 말한 바 있다.
스페인에서는 국왕 알폰소 13세가 땅고를 대단히 좋아해서 보수적인 궁정 관리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파리에서만큼 땅고의 인기가 대단해서 가난한 젊은 귀족들이 갑자기 땅고 파트너라는 새로운 직업을 찾았다.
한편 땅고의 불길이 가장 거세게 피어올랐던 파리에서는, ‘친땅고파’와 ‘반땅고파’ 사이의 논쟁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반땅고파는 1914년 2월 16일 잡지 Mercure de France를 통해 땅고가 ‘창녀의 춤’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끔찍한 꼴들을 몸소 봤다는 스코틀랜드 작가의 말을 인용해 땅고를 추다 보면 고주망태가 되어 싸움판이 벌어진다고 주장했다. 또 아무리 좋게 봐줘도 땅고는 ‘순결한 여인의 몸을 되바라진 것으로 만드는 포즈와 움직임을 취하는, 확실히 외설적인 춤’이라느니, 무도장에서 젊은이들이 ‘안데스 산맥에서 온 원숭이들’처럼 행동한다느니, 땅고라는 춤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혼혈 사생아이며 그 춤을 추면 프랑스의 국가 위신이 아르헨티나 정도로 떨어지게 된다는 등등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
친땅고파 중 유명인사로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쟝 리슈팽Jean Richepin이 있었다. 그는 위대한 배우 사라 베르나르Sarha Bernhardt의 한때 연인이었고, 대개 운문으로 쓰인 그의 희곡은 본능과 격정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대중문학가였던 그가 지적 진지주의를 표방하는 프랑스 학술원 미술 아카데미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지만, 아무튼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그는 1913년 10월 25일 열린 프랑스 학술원 5개 아카데미 연례 모임에서 <땅고에 대하여A Propos du Tango>라는 제목으로 땅고를 옹호하는 일장 연설을 했다. 연설이 이루어진 학술원 원형 홀은 잘 차려입은 여성들로 가득 들어찼는데, 이 역시 드문 일이었다. 정작 리슈팽의 동료 학술원 회원들은 거의 출석하지 않고 단 4명만이 나와 있었다.
땅고 옹호자 쟝 리슈팽Jean Richepin
리슈팽은 땅고가 근본이 천한 춤이라는 공격에 대한 방어로, 궁정에서 즐기는 모든 춤들이 처음에는 어떤 식으로든 평민 사회에서 시작된 것이며, 점잖은 계층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항상 동요가 일어났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것이 그 춤을 ‘어떻게 추는가’에 달려 있다는 논리를 폈다. 그의 연설 내용 일부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저는 탁월한 우아함의 본보기인 공주님들이 땅고를 추는 모습을 목격하는 기쁨을 누린 적도 있습니다. 반면 무미건조한 폴카나 순진무구한 랜서즈 춤을 추더라도, 우리 유명한 조상님의 표현을 빌자면 ‘원숭이마저 얼굴을 붉힐’ 만큼 외설적으로 느껴지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도덕주의자들과 국수주의자들이 땅고를 도덕적 타락이라고 욕하지만, 그것이 원래 어떻게 생겨먹었는가는 중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프랑스화합니다. 우리가 즐겨 추면 그 춤은 프랑스의 춤이 됩니다. 프랑스는 고대 그리스와 같습니다. 프랑스는 삶에 춤이 필수적인 나라입니다.”
리슈팽이 대본을 쓴 연극 <Le Tango>는 1913년 12월 30일에 개막했다. 극의 주인공은 젊은 부부인데, 이들은 결혼식을 올렸으나 첫날밤을 치르지 못해 양가 가족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부부는 땅고를 추고 나서야 성적인 욕구를 되찾아 문제를 해결한다는... 땅고에는 본질적으로 섹슈얼한 성격이 없다고 했던 학술원에서의 연설과는 제대로 모순되는... 그런 내용이었다. 전설적인 패션 디자이너 파울 프와레의 무대와 의상이 돋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은 혹평을 받았고, 반땅고파의 주요 매체였던 Mercure de France지에서는 리슈팽이 그저 땅고 열풍에 빌붙어 돈벌이를 했을 뿐이라고 비난했다.
1914년 1월 잡지 <Vie Heureuse> 표지와 기사에 실린 연극 <Le Tango>
이만하면 땅고가 마침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을 법도 하건만 1914년 첫날이 밝았을 때 (아마도 리슈팽의 연극 탓도 있었을 텐데), 프랑스 천주교에서 매섭게 땅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러 고위 성직자들이 설교단에서 땅고를 맹비난했고, 프랑스 대주교인 Amette 추기경은 1월 11일 기독교도다운 경건함이라는 율법을 지키라는 엄숙한 권고를 선포했다. 추기경은 ‘땅고라는 외국에서 들어온 춤’이 ‘본질적으로 음탕하며 도덕을 해친다’고 비난하며, 성직자들에게는 신도들의 고해성사를 들을 때 이 춤의 사악함을 강조하라고 촉구했다. 당시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 부처는 엘리제 궁에서 땅고를 금지했다.
이처럼 맹비난이 이루어진 후, 2월 7일자 L’illustration지에 독자들의 눈을 의심케 하는 그림이 실렸는데, 교황 비오 10세가 눈앞에서 땅고를 추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사실이 아닐 거라는 말들도 있었지만, 로마 현지에서는 널리 퍼진 이야기였고 다양한 출처로부터 확인된 사실이기도 했다. 이 일의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았다.
1914년 2월 7일 L'Illustration지에 실린 삽화.
교황 비오 10세가 뚱한 표정으로 땅고 추는 커플을 바라보고 있다.
땅고가 교황의 질책을 받은 데 더해 국방부 장관까지 나서서 장교들에게 제복을 입고 땅고 추는 것을 금지하려던 무렵, 땅고에 빠진 한 이탈리아 왕자가 교황이 가장 신임하는 비서인 Merry del Val 추기경에게 접근해서, 유명한 댄스마스터인 Pichetti 교수가 땅고를 개편하고 수정해서 로마의 살롱에서 추어지는 땅고는 이제 비난 받을 구석이 없다고 어필하며, 가장 화려한 무도회 시즌이 열리는 축제 기간이 다가오는 만큼 교황님께서 잘 봐주시도록 이야기 좀 넣어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다음날, 로마 귀족 남매의 알현을 받고 있던 교황에게 추기경이 다가가 이야기를 전했다. 유행의 첨단을 걷는 축에 속했던 이 남매는 당연히 땅고를 잘 알고 있었고, 추기경의 이야기를 들은 교황은 무슨 변덕에서였는지 남매에게 자기 앞에서 땅고를 춰 보라고 청했다. 깜짝 놀랐지만 감히 교황의 부탁을 거스를 수 없었던 남매는 그 자리에서 부둥켜안고 땅고를 추어 보였는데, 아무래도 엄숙한 분위기는 물론 교황 알현 시 발목까지 오는 드레스에 머리와 어깨를 덮는 베일을 갖춰야 하는 여성 복장 탓에 그들의 땅고 시연은 굉장히 절제된 춤사위였으리라. 이들의 땅고 시연에 별 감흥을 받지 못한 베네치아 출신의 교황 비오 10세는 유행을 좇는답시고 이딴 재미없는 춤에 에너지를 쏟느냐고 이죽거리며, 이런 검둥이 인디언 오랑캐들의 춤을 출 것이 아니라 우아하고 아름다운 베네치아 춤 furlana를 추라고 권했다. 남매가 furlana라는 춤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하자, 교황은 베네치아 출신 시종을 불러 그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게 했다.
1913-14년 겨울 땅고 열풍은 대서양을 가로질러 뉴욕에 도착했고, 그 위력은 유럽에서와 마찬가지였다. 댄스홀과 땅고 다과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1914년 1월 4일에는 뉴욕타임스에 ‘뉴욕 전역을 땅고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추종자들 입장에서 땅고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 춤이었다. 땅고는 미국인들의 금주 운동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던 프랑스인과 영국인들에게, 미국인들도 놀 줄 아는 족속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 유명한 실내장식가는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내게 있어 땅고는 엄청난 휴식이다. 빨빨거리며 움직여대는 원스텝(춤의 일종)이 지나간 다음, 땅고에서는 쉬어가는 순간들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심지어 땅고를 추면서 소화불량이 나았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1914년 1월 4일 뉴욕타임스 기사, ‘뉴욕 전역을 땅고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있다’
땅고를 비롯하여 새로 유행하는 춤을 가르치는 일로 새로운 생계수단을 찾은 이들이 아주 많았다.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땅고가 인기를 얻으면서 뉴욕에는, 아르헨티나 춤 선생을 자처하는 짙은 색 피부의 젊은 남자들이 떼거지로 나타났으며, 이들은 자신들이 쁠라따 강 남쪽 출신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짙은 피부의 젊은 땅고 선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 당시 멕시코 혁명이 일어난 때와 겹친다며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땅고가 선정적인 춤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고 그런 점이 아주 점잖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기에, 땅고를 사랑하는 뉴요커들은 도덕적인 근거를 제공해 줄 비빌 언덕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유럽 쪽을 넘겨다보며 누가 땅고를 추고 있는지 탐색했고, 뉴욕타임스는 런던의 아무개 백작, 파리의 모모 공주, 덴마크의 왕비, 러시아의 대공비 등등 땅고를 애호하는 고관대작들의 명단을 부지런히 독자들에게 공급해 주었다.
1914년 1월에 뉴욕타임스는, 땅고가 생각이 제대로 박힌 사람들이 추기에 적합한 춤인가 하는 논쟁에 대해 기사를 싣기도 했다. 최초로 땅고에 대한 격한 반대의 목소리를 낸 것은 뉴욕 천주교회로, 야만적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최신 춤들 중에서도 땅고가 최악이라고 비난했고, 개신교와 유대교 원로들도 여기에 합세해 ‘사람들을 홀려 오찬에서까지 춤을 추게 만드는 이 난리는 건전한 인생관과 도덕관념에 해롭다’거나 ‘딸이 땅고를 추도록 허락하는 엄마들은 사교적 출세라는 명목으로 딸들을 악어의 입에 던져 넣는 것’이라며 땅고를 공격했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일단의 상류층 부인들이 사교계에서 땅고를 반대하는 모임을 조직했다. 하지만 이들 엄마 세대들 사이에서는, 자식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그 ‘불쾌한 춤’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바로 자신들이었다는 사실로 어딘가 편치 않은 감정이 존재했다. T. George Dodworth라는 댄스마스터는 땅고 그 자체는 비난 받을 점이 없고, 다만 젊은 커플들이 ‘사이에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이’ 너무 서로 꼭 끌어안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불평했다.
Irene Castle과 Vernon Castle 부부. 미국에서 땅고를 유행시키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말쑥한 용모와 바른 생활, 거기다가 부부 사이인 이들은 Irene의 표현을 빌리면 ‘선정적인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런 땅고를 추었다.
“만약에 Vernon이 땅고를 추다가 불타는 열정이 담긴 시선으로 내 눈을 바라보기라도 했다면 우리 둘 다 웃음이 빵 터져버렸을 걸요.”
땅고 열풍이 유럽과 북미를 휩쓸자 해외, 특히 파리에 거주하는 아르헨티나인들의 커뮤니티는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1890년대에 재외 아르헨티나인들은 돈을 물쓰듯이 펑펑 써대는 걸로 유명했지만, 10년여 후에는 좀 더 차분해지고 사회적 평판에 대해 좀 더 신경쓰게 되었다. 그들이 여는 파티는 여전히 화려하고 대규모였지만, 이전에 비해 훨씬 점잖고 각국의 왕족이나 고관대작 등 국제 사교계 최고의 명사들을 모시기에 걸맞도록 꾸려졌다. 매년 봄이면 부유한 대초원의 지주들을 포함하여 아르헨티나 사교계의 엘리트들이 여객선을 타고 파리로 쏟아져 들어와서는 2-3개월씩 머물다가, 18세기 프랑스 건축 양식과 가구, 패션 등 프랑스식 문물과 스타일을 가지고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한 마디로 20세기 초 아르헨티나 상류층과 부자들에게 파리는 동경의 대상이자 닮고 싶은 모든 것이었다. 우스개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을 일컫는 이런 말도 있다. ‘뽀르떼뇨들은 스페인어를 하는 이탈리아인들로, 자기들이 영국인이라고 생각하면서 프랑스인이길 바라는 사람들이다.’
파리에 거주하는 부유한 아르헨티나인들의 커뮤니티에서는 땅고를, 고국 아르헨티나 문화에 기질적으로 내재된,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강렬한 무정부주의적 기질의 상징으로 보았다. (보르헤스Borges도 “아르헨티나인들은 스스로를 군인이 아니라 반란자-가우초와 꼼빠드레-와 동일시한다.”고 말한 바 있다.) 1912년 11월에 스페인 국무총리 José Canalejas가 암살당하는 등 당시 무정부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히스테리 수준이었다. 파리 사회에서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길 간절히 원했던 아르헨티나 상류층들은, 땅고가 선정적이고 마초적인 춤이라는 평판이나 그 춤의 근본이 흑인이나 사창가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매우 난처했다. 땅고에 대한 공격의 선봉장이었던 Mercure de France지가 ‘그와 같은 민속춤을 가진 나라는 정말이지 원숭이들의 집단임에 틀림없다’느니, ‘검둥이의 기질을 가진 사람만이 혐오감을 느끼지 않고 그런 광경을 보고 있을 수 있다’느니 하면서 빈정거렸을 때 아르헨티나인들의 반응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외교관들이 보기에는, 독립 100주년 즈음하여 눈부신 경제적/문화적 발전을 통해 어엿한 나라로 인정받기 시작하던 차에, 땅고가 나라의 국격을 깎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헨티나 정계의 유명 가문 출신인 소설가 Enrique Larreta가 당시 프랑스 주재 아르헨티나 전권 공사였는데, 위와 같은 맥락을 볼 때 그가 파리 아르헨티나 대사관에서 땅고 춤을 금지시킨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땅고는 평판이 나쁜 집들이나 최하 계층이 다니는 술집에만 한정된 춤이다. 훌륭한 살롱에서나 고상한 사람들은 절대로 추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인들의 귀에 땅고 음악은 아주 불쾌한 감정을 자극한다. 나는 이곳 파리의 우아한 댄스홀에서 추는 땅고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천한 밤거리에서 추는 땅고나 어떤 차이도 느끼지 못하겠다.”
땅고에 대한 이와 같은 멸시는 아르헨티나 대사와 그 주변 인사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고, 대부분 외교관 신분인 남미 출신 지식인과 작가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멕시코 작가이자 주프랑스 멕시코 대사 비서관이었던 Alfonso Reyes는 당시 땅고의 인기를 ‘개탄스럽다’고 했고, 20여년이 지난 후에도 땅고의 영향으로 파리 사람들은 남미인들을 ‘반은 원숭이요 반은 앵무새’로 여긴다고 말했다.
파리와 로마의 살롱들이 땅고를, 이 무산계급의 춤일 뿐 아니라 가우초와 안달루시아 무어 혈통이 섞인 끄레올 잡종 혼혈 춤인 땅고를 장려하자 경악하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 잡지 El Hogar는 이 일을 ‘파리는 유행에 있어 매우 변덕스럽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발행되는 한 영어 신문은 다음과 같이 썼다. “파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정확히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땅고라는 춤이 남녀가 배를 맞대고 몸을 과장되게 뒤틀면서 음탕함을 강조하는 춤이라는 것은 말할 수 있다. 그걸 보는 사람은 아편에 취한 한 쌍의 아랍인 커플을 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가우초 전통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리까르도 귀랄데스와 아르헨티나 시인들은, 땅고의 그런 저속하지만 민중적인 특질이 그 춤이 지닌 힘이자 매력이라고 믿었다. 시인인 Silva Valdés는 땅고가 ‘피를 뜨겁게 하고 그 춤을 추는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고 말했고, 소설가 겸 시인인 Manuel Gálvez는 땅고를 가리켜 ‘곤혹스러울 만큼 매력적인 향기’라 일컬었다. 그러나 그들 중 땅고가 유럽에서 거둔 놀라운 성공에 기뻐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기자이자 작가인 José María Salaverría는 다음과 같이 썼다. “파리나 런던의 대중들에게 땅고는 그저 약간 쾌락적 죄의식을 자극하는 이국적인 춤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은 관능적이고 도착적인, 다소 야만적인 맥락에서 그 춤을 즐긴 것이다.”
이 모든 소동과 성직자들의 규탄, 높으신 분들의 격노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 온 유럽을 유례를 찾기 힘든 춤바람으로 뒤집어 놓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리슈팽이 예견했던 대로 땅고는 파리에서 프랑스화되었다. 땅고는 처음 파리에 수입되었을 때보다 훨씬 얌전해진 모습으로 고향인 아르헨티나로 돌아갔고, ‘1913년 이후 파리에서 돌아온 프랑스풍 땅고’로 알려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