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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 11. 15. 00:30
[질문] 이재훈
■ 익재공이 동국 18현에 들지 못한 까닭은?
익재공 께서 공자의 도(道)를 연구하여 이땅의 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이 대단하시고, 어떤 면에선 문묘 배향에 들은 18현 보다 더 큰 학문적 업적을 남긴 분이신데도, 왜 문묘 배향 선정에는 못 들어섰는지 궁금합니다. 여러 제현 분들의 답변을 구하고자 합니다.
댓글 13
☞이민희 中河 2011.11.15. 06:42
제가볼때는 제자양성에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상훈 2011.11.15. 11:22
또 다른 원인이라고 한다면 익재공이 활동하셨던 시대는 성리학이 중국의 원나라로부터 전래되던 시기였지만 불교적인 종교의례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행해지던 시대였습니다. 익재공의 부친이신 동암공(휘 진)도 불교 인사들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교류하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익재공도 불교 인사들과 자연스레 교류를 하면서 불교와 관련된 문장도 더러 지었지요.
이런 모습들이 유학(특히 성리학)을 국시로 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던 유학자들에게 탐탁치 않게 평가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를 이렇게 적어봅니다.
☞이상구(Dr Lee)2011.11.15. 23:38
고려사를 보면 고려 왕실은 익재공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넘쳤다고 합니다. 문제는 역성혁명 때문에 제외된 것 같습니만 익재공을 대변할 만한 인물이 없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익재공을 배제한 이유는....자기들 보다 너무 뛰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노력해도 따라 잡을 수 없는 수준 이였기 때문에. 사실 조선시대에 에 익재공 만큼 뛰어난 인재는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되겠죠.
인물은 위기 때에 능력을 발휘하니깐, 임진왜란 때 유성룡정도가 익재공을 이을 정도라고 할까..18현은 후세 유학자들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인위적으로 만든 거죠. 이걸 보면 부자도 있읍니다. 웃기는 일입니다. 편향된 유학자들의 장난질.....
☞이이록(우)2011.11.16. 09:49
배제된 이유 중 하나가 상훈 종친께서 말씀하신 『불교인사들과 자연스레 교류를 하면서 불교와 관련된 문장을 찬하였다.
이런 모습들이 유학(특히 성리학)을 국시로 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던 유학자들에게 탐탁치 않게 평가되었다.』라는 내용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어디에서인가 이 글귀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익재공께서 성리학 한 학문에만 전념하고 저서도 그런 쪽으로만 저술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겁니다. 보덕사 시편과 묘련사 중흥비문을 찬하고 당시 유명스님들과 교유한 것이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승주(영암 망호정)2011.11.16. 09:16
우리나라 역사상 익재공만큼 뛰어난 인물은 없었다고 봅니다. 유교와 불교의 사상적인 차 잇 점... 등등 누군가의 사상적인 집단 요즘말로는 정치적인 집단에 의해, 18인 이라는 인물을 만들다 보니 ... 조헌. 최익현 같은 인물은 불교를 배척한다는 상소문까지 올렸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황. 이이. 김굉필. 김장생. 김집. 조광조. 송시열 등등 인물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18현을 어떻게 선정했는지, 또는 당시 정치판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느끼실수 있을것입니다.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18현은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볼때 종교적인 사상적인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분들 또는 불교적인 색채를 가진 영향력이 있는 분도.....
☞승주(영암 망호정)2011.11.16. 09:20
익재공께서는 성리학적으로도 또는 불교적으로도 서로 배척을 하지 않고 함께 받아들였던 분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유학자들의 입장에서 볼때는 18현에 넣는다면 상당히 부담이 갔을것 입니다. 좀더 자료를 찾아보고 연구해 본다면 의미있는 결과가 나올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李亨琇(譜名: 相亨)2011.11.16. 10:17
조선의 매우 온전하지 못한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정략과 당쟁으로 얼룩진 역사적 현상을 여실하게 보여 주기에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새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문묘에 배향된 인물들 중에는 賢(현)으로 추앙받기에는 너무나도 적합하지 않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꼭 그 位(위)에 들어가야 할 사람들도 무시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상훈 2011.11.16. 16:30
또 다른 원인이라고 한다면 조선시대에 동국18현을 선정할 때의 정치적인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동국18현에는 신라시대의 인물도 2명이 포함되어 있지만 주로 조선시대의 인물입니다. 또한 학맥이나 당파로 따지자면 율곡학파나 서인계열의 인물이 비교적 많은 편입니다. 이점도 고려해서 이해하여야 될 듯합니다.
또한 익재공은 立德, 立功, 立言의 三不朽의 위업을 달성한 분이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의 눈에는 비교적 불교적 색채도 농후한 분으로 보였을 겁니다. 고운 최치원선생도 불교나 도교적 색채가 농후한 분인데 동국18현에 선정되어 있는 것은 비교적 흥미롭습니다.
☞승주(영암 망호정)2011.11.16. 19:04
고운 최치원 선생은 신라말기로써 이분의 학맥은 조선에 와서는 그다지 영향력을 발휘할수 없었을것 입니다.
그러나 익재공의 학맥과 제자들은 조선에 와서도 꾸준이 이어져 왔었습니다. 동국 18현은 오늘날 다른 각도에서 연구가 되어야 되지 않을까라는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이상훈 2011.11.17. 11:46
예. 그렇습니다. 조선시대의 학자들 입장에서 신라시대의 학자나 사상가들을 동국18현에 포함시키는 것은 비교적 심리적인 부담이 적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비해서 승국(勝國)의 학자나 사강가들을 동국18현에 포함시키는 데에는 상당히 신중을 기하였으리라 생각됩니다.
고려시대의 인물로는 성리학을 전래한 공로가 큰 회헌 안향선생,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포은 정몽주선생 두 분이 고작입니다.
18현 중에서 14현이 조선시대의 인물입니다. 즉 조선시대의 필요성과 조선시대의 관점으로 선정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이상훈 2011.11.17. 11:49
고려시대의 인물을 더 추가하자면 김부식, 최충, 우탁, 이제현, 이색, 길재 등의 인물도 그 명단에 포함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색이나 길재는 조선 초기까지 생존했던 인물이지만 말입니다. 이 분들은 고려시대의 철학과 사상을 풍부하게 발전시켰던 분들이라 생각됩니다. 동국18현에 관하여 다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계기가 됩니다.
☞재훈(야촌)2011.12:19
위에 열거하신 모든 말씀들이 익재공께서 18현에 들지 못한 까닭이라 사료됩니다.
관심을 갖고 답변글 올려주신 종친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출처: http://cafe.daum.net/kungjulee/K805/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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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대한 답변
☞이용주님의 답변 | 2011.11.17. 18:35
세종 18년 병진(1436,정통 1)
5월 12일 (정축)
김일자 등이 이제현· 이색· 권근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다.
성균 생원(成均生員) 김일자(金日孜)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옛 성인(聖人)을 계승하고 후학(後學)을 열어 주는 것은 성현(聖賢)의 대공(大功)이요, 조종(祖宗)을 도타이 하고 예(禮)로써 행하는 것은 제왕(帝王)의 성전(盛典)입니다.
이러므로, 역대 이래로 무릇 도학(道學)에 공이 있는 분을 거의 학궁(學宮)에 모시어 제향하는 소이는 돌아가신 이에게 포숭(褒崇)의 뜻을 보이는 것이며, 앞으로 오는 뒷 사람에게 권려하는 뜻을 드리우는 것입니다.
옛날에 공자(孔子)께서는 하늘이 낳으신 성인으로써 경위(經緯)의 글[文]은 요(堯)·순(舜)의 도를 본받아 서술하여 밝히고,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도를 본받아 명백히 하사, 육경(六經)을 편찬 제술[刪述]하여 만대에 훈계를 드리우셨으니, 유도[斯道]가 장차 실추(失墜)되는 것을 붙들어 주고, 해와 달이 중천(中天)에 밝게 있듯이 세워 주신 것이오라, 한(漢)· 당(唐)의 왕성한 때에는 우리의 부자(夫子)를 남면(南面)하게 하여 석전제(釋奠祭)를 올리게 하였고, 여러 제자들을 제후(諸侯)로 봉(封)하여 배향(配享)하는 의례(儀禮)가 있게 하였습니다.
송(宋)· 원(元) 때에 미쳐 와서는 주자(朱子)· 정자(程子) 등의 사현(四賢)과 좌구명(左丘明) 등의 21인을 70제자(弟子)의 뒷자리에 종사(從祀)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유학을 높이고 도덕을 소중히 여긴 까닭이오라,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는 뜻이 성(盛)한 것이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나라[我大東]는 기자(箕子)가 교화를 베푼 뒤로부터 세대는 멀어지고 경서는 없어져서, 군자(君子)는 큰 도학의 중요한 것을 얻어듣지 못하고, 소인(小人)은 잘 다스려지는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다행히 그 사이에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과 같은 이가 밝은 슬기로서 학문을 좋아하매, 문장을 발양(發揚)하여 신라 시대를 울렸고,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안향(安珦)이 학문을 일으키려는 데에 뜻을 두고 반궁(泮宮)을 증수(增修)하게 하여 일대(一代)의 문풍(文風)을 떨치게 하니, 이 세 분께서 세도(世道)를 유지시키고 동방의 백성을 계도(啓導)해 준 공로는 또한 큰 것입니다.
이러므로, 전조(前朝)의 왕성한 때에는 특별히 포숭(褒崇)하는 법전을 들어 〈위의 세 분을 문묘에〉 종사(從祀)하는 반열에 참예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영원히 전할 불후(不朽)의 큰 모범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그 뒤로는 세속의 교화가 능이(陵夷)해지고 풍속이 퇴패(頹敗)하여져서, 성인의 도학이 막히어지고 유학[斯文]이 거의 끊어지려 하였는데, 이때를 당하여 익재(益齋) 문충공 이제현(李齊賢)이 그 사이에 태어나서 훌륭하고 뛰어난 자질과 정대 고명(正大高明)한 학문으로 북쪽으로는 연경(燕京)에 조회하고, 남쪽으로는 오회(吳會)에 유학하면서 중국의 명유(名儒)인 요공(姚公)·염공(閻公)·조자앙(趙子昻)·원복초(元復初)같은 분과 더불어 토론하고 연구하여, 소견이 더욱 높아지고 지식이 더욱 깊어지게 되매, 도학의 바른 것을 미루어 밝히고, 성명(性命)의 이치를 열어 보이었으니, 글은 문장이 되고 행함은 도덕이 되어, 비로소 고문(古文)의 학(學)을 창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시(詩)·서(書)의 혜택이 우리 나라[東方]에 양양하게 넘치고, 예(禮)· 악(樂)의 흥성함이 중국을 본받아 우리 나라의 문학(文學)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중국의 명유(名儒)인 탕병룡(湯炳龍)은 익재(益齋)를 찬(贊)하기를, ‘산천 정기를 타고나서 유학에 달통하며, 충성을 마음에 두고 정사를 공정히 한다.’고 하였고, 이색(李穡)도 또한 말하기를, ‘몸은 해동(海東)에 있으나, 이름은 세계에 넘치며, 도덕의 으뜸이요, 문장의 조종이다.’ 하였으니, 지나친 칭찬이 아니옵니다.
또 목은(牧隱) 문정공(文靖公) 이색은 북쪽으로 중국에 가서 배우게 되매, 학문이 정미하며 해박하고, 도학을 밝게 강론하여 남이 모르는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신축년 홍건족의 난(亂)을 치룬 뒤에는 학교가 파괴를 당하여 학문이 해이하였는데, 오직 이색(李穡)만이 성균(成均)을 겸직하면서 경적(經籍)의 깊은 뜻을 토론하고, 정주(程朱)의 뜻을 정미하게 합하여, 학자로 하여금 입으로 외고 귀로 듣는 당시의 사장(詞章)에만 힘쓰던 습성을 버리게 하고, 몸과 마음에 있는 성명(性命)의 근원을 궁구(窮究)하게 하여, 사도(師道)를 높이고 이단(異端)에 유혹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의리를 바루어서 공리(功利)에 싹트지 않게끔 하였으니,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이 크게 일어나고 유풍(儒風)의 학술이 새롭게 빛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양현(歐陽玄)은 천하의 유종(儒宗)으로서 이를 찬미하기를, ‘가사(袈娑)와 바릿대[鉢]는 해외(海外)에서 전(傳)하겠다.’ 하였고,
권근(權近)도 또한 말하기를, ‘색(穡)의 학문은 살갗[皮膚]를 버리고 골수(骨髓)를 얻은 것이다.’고 하여, 비록 중국이라 할지라도 이에 견주기를 드물게 여기었으니, 이는 실상이 없는 명예가 아닙니다.
논의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색(穡)이 불도에 혹하였다.’고도 하나, 신 등의 생각으로는 말이란 마음의 소리[聲]이요, 시(詩)란 그 뜻을 말하는 것인데, 그의 시를 보게 되면, ‘평생에 석가(釋迦)의 글은 알지 못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불교(佛敎)·도교(道敎)의 두 길[兩途]은 원래 무심히 지났으나, 공맹[洙泗]의 학에 맴돌면서부터 두 귀밑털이 희어졌다,
고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불도에 혹한 사람의 말이겠습니까.
예전에 당나라의 한유(韓愈)는 대전(大顚)과 벗하였었고, 주희(朱熹)는 운곡(雲谷)에서 노닐었으며, 최치원(崔致遠)은 해인사(海印寺)에서 은둔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불도에 혹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양촌(陽村) 문충공 권근(權近)은 원기(元氣)의 모임이 혼연(渾然)하게 자연히 이루어져서 정자(程子)·주자의 학(學)과 자유(子游)·자하(子夏)의 문(文)으로 오래도록 문형(文衡)을 맡으면서 덕이 이 땅[東土]에서 높았고, 경서(經書)의 심오한 것을 궁구(窮究)하였습니다.
깊이 조화의 근원을 더듬어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지었으니, 전현(前賢)이 아직 발명하지 못한 것을 낸 것이며,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지어 낸 것은 뒤에 오는 학자에게 무궁함을 열어 주었습니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취하여 이단(異端)을 배척함에 힘썼고, 춘추의 학문이 추락되는 것을 체험하여 사병(私兵)을 폐지하기를 청하여 다스리는 도를 도와주었으며, 황제의 법전을 밝혀 그 공·맹(孔孟)의 도로부터 정·주(程朱)의 학문에 이르기까지 생민들에게 은택이 스며들게 지극히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댄, 성명(性命)의 이치가 천하에 밝혀진 것은 공자와 맹자의 공이며, 공자와 맹자의 도학이 우리 나라에 행하게 된 것은 이제현·이색·권근 이 세 분의 공입니다. 그렇다면, 그 공에 보답하는 의식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지난 기해년에는 사간원에서 권근을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했고, 또 계축년에는 사성(司成) 신(臣) 김반(金泮)이 또한 위의 세 분을 배향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에 유사(攸司)에 명하여 문신(文臣) 6품 이상으로 하여금 그 가부를 의논케 하여 성상께 계문(啓聞)하게 하였사오매, 신 등은 기쁘게 들으시고 옷깃을 여미시와 윤허하시기를 크게 바란 지 여러 해 되었는데, 오늘날 수년이 되도록 아직도 거행되지 못하와 신 등은 이를 바라지 아니하는 자가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천하에 큰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천하를 통해서 제향하여야 하겠지만, 어찌 일국에 공이 있다고 하여 문묘에 종사(從祀)하겠는가? 하오나,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오니, 한 집에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한 집안에 제사하고, 한 고을에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한 고을에서 제사하는 것이 고금을 통한 의리이며, 천하를 통한 예식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주희(朱熹)는 스승인 연평(延平) 선생을 그의 집에서 제사지냈고, 조주(潮州) 사람들은 한유(韓愈)를 그 고을에서 제사지냈으며, 전조(前朝)의 왕성한 때에는 최치원·설총·안향(安珦) 선생을 학궁(學宮)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으니, 이것도 또한 천하에 공이 있어서 제사를 지낸 것이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문물과 예악이 갖추어지고, 교화(敎化)를 배양한 근본이 모두 이 세 분에게서 나왔다면 옛 성인을 계승하고 후학을 열어 준 공이 이보다 더 큼이 없습니다.
그러니, 조종(祖宗)을 두텁게 하고 예로써 행하는 정사가 지금껏 궐했으니, 제사를 지내고 아니 지내는 것이 비록 세 분과 관계됨이 없다 하더라도, 참으로 밝은 시대의 성전(盛典)에 결함이 있는 것이오니, 엎디어 바라옵건대, 뭇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살피시고 강단(剛斷)하신 밝으심을 돌리시와, 이 세 분으로 하여금 종사하는 반열에 올리게 하여, 최치원 선생 등과 함께 차례를 올리게 된다면, 오직 오도(五道)에 있어서만 크게 다행한 것이 아니라, 또한 만대에 이르도록 〈칭송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주01]경위(經緯) : 경서(經書)와 위서(緯書).
[주02]육경(六經) : 시· 서· 예· 악· 역· 춘추.
[주03]부자(夫子) : 공자.
[주04]반궁(泮宮) : 성균관.
[주05]오회(吳會) : 오(吳)와 회계(會稽)의 두 군(郡).
[주06]요공(姚公) : 원나라의 유학자. 이름은 수(燧).
[주07]염공(閻公) : 원나라의 유학자. 이름은 복(復).
[주08]조자앙(趙子昻) : 원나라의 학자. 이름은 맹부(孟頫).
[주09]원복초(元復初) : 원나라의 학자. 이름은 명선(明善).
[주10]정주(程朱) : 정자와 주자.
[주11]대전(大顚) : 당나라 때의 도승(道僧).
[주12]운곡(雲谷) : 중국 복건현에 있는 주자의 독서당.
[주13]문형(文衡) : 대제학.
[주14]연평(延平) : 송나라 때 유학자.
[주15]오도(五道) : 유도(儒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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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成均生員 金日孜等 上言
竊謂 繼往開來, 聖賢之 大功; 惇宗 將 禮, 帝王之 盛典。 是故歷代以來, 凡有功於道學者, 率皆祀于學宮, 所以示褒崇於旣往, 垂勸勵於將來也。 昔者夫子以天縱之聖、經緯之文, 祖述堯、舜, 憲章文、武, 刪述六經, 垂訓萬世, 扶斯道之將墜, 揭日月於中天。 故漢、唐盛際, 以吾夫子位南面, 而有釋奠之禮, 以群弟子封列侯, 而有配享之儀。 逮至宋、元, 以朱、程等四賢、左丘明等二十一人, 從祀于七十子之後, 其所以尊儒重道, 崇德報功之意, 盛矣哉! 惟我大東, 自箕子設敎之後, 世遠經殘, 君子而不得聞大道之要, 小人而不得蒙至治之澤者久矣。 幸於其間, 崔致遠、(孽聰)〔薛聰〕, 明睿好學, 發爲文章, 鳴於羅代, 至于高麗, 安珦志在興學, 增修泮宮, 以振一代之文風, 三子之維持世道, 啓迪東民, 功亦大矣。 是以前朝盛時, 特擧褒崇之典, 俾參從祀之列, 誠不刊之懿範也。 自是厥後, 世敎陵夷, 風俗頹敗, 聖道堙鬱, 斯文殆絶。 當是時, 益齋文忠公李齊賢, 挺生其間, 以奇偉拔萃之資、正大高明之學, 北朝燕京, 南遊吳、會, 得與中國名儒若姚公、閻公、趙子昂、元復初輩, 磨礱切磋, 所見益高, 所造益深, 推明道學之正, 開示性命之理, 辭爲文章, 行爲道德, 始以古文之學倡焉, 而詩書之澤, 洋溢東方; 禮樂之興, 侔擬中華, 我國文學之盛, 自此始也。 故湯炳龍, 中國之名儒, 而贊之曰: “光岳其鍾, 爲儒之通。 存心以忠, 臨政以公。” 李穡亦曰: “身居海東, 名溢域中。 道德之首, 文章之宗。” 非溢美也。 牧隱文靖公李穡, 北學中國, 學問精博, 講明道學, 闡發幽秘。 歲在辛丑經兵之後, 學校廢弛, 惟穡職兼成均, 討論經籍之蘊, 妙契程、朱之志, 使學者祛口耳詞章之習, 窮身心性命之源, 宗師道而不惑於異端, 正其義而不怵於功利。 於是東方性理之學大興, 而儒風學術, 煥然一新。 故歐陽玄, 天下之儒宗, 而美之曰: “衣鉢當從海外傳。” 權近亦曰: “穡之學問, 捨皮膚, 而得骨髓者也, 雖中國罕比。” 非虛譽也。 議者以爲: “穡有佞佛。” 然臣等以爲, 言者, 心之聲; 詩者, 言其志。 觀其詩則曰: “平生不識釋伽文。” 又曰: “兩途自是無心去, 洙、泗沿洄鬢已秋。” 是豈侫佛者之言哉! 昔韓愈友于太顚, 朱熹遊于雲谷, 致遠隱于海印, 是果佞佛而然歟? 陽村文忠公權近, 元氣之會, 渾然天成。 以程ㆍ朱之學、游ㆍ夏之文, 久典文衡, 德尊東土, 硏窮聖經之奧, 深探造化之源, 五經有淺見錄, 發前儒之未發; 入學有圖說, 開來學於無窮。 得孟子浩然之氣, 力排異端; 體《春秋》墮費之學, 請罷私兵。 笙鏞治道, 黼黻皇猷。 其所以沿洙、泗、遡濂、洛, 而澤閏生民者至矣。 以此觀之, 性命之理, 明於天下者, 孔、孟之功也。 孔、孟之道, 行於東方者, 三子之功也。 然則報功之典, 不可不擧, 故歲在己亥, 司諫院請以權近從祀廟庭, 又於癸丑, 司成臣金泮, 亦以三子之從祀啓請。 於是命攸司, 令文臣六品以上, 議其可否, 以聞于上。 臣等欣聞引領, 顒望兪音者有年矣。 今玆數年, 尙未擧行, 臣等罔不觖望。 議者以爲: “有天下之大功者, 當享天下之通祀, 豈可以一國之功, 而從祀於文廟乎?” 臣等竊惟有一家之功者, 享一家之祀; 有一鄕之功者, 享一鄕之祀。 此古今之通義, 天下之達禮也。 故朱熹祀延平於其家, 潮人祀韓愈於其鄕。 前朝盛時, 祀致遠、薜聰、安珦於學宮。 是亦果皆有功於天下, 而祀之歟! 我東方文物禮樂之備、培養敎化之本, 皆出於三子, 則繼往開來之功, 莫大於此, 而惇宗將禮之政, 猶闕於今。 祀不祀, 縱無與於三子, 誠有嫌於明時之盛典。 伏望察衆允之心, 回剛斷之明, 俾三子同升從祀之列, 咸秩致遠之輩, 則非惟吾道之大幸, 抑亦有辭于萬世矣。不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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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님의 답변 | 2011.11.19. 23:08
- 최치원, 설총, 안향 문묘 배향 시기입니다
태종 9년 기축(1409,영락 7)
3월 19일(임술)
사헌부에서 세포전·문묘 배향·여자의 의복 제도 등에 관한 시무를 올리다
사헌부에서 시무(時務)에 대해 두어 조목을 올렸다.
“1. 이제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고 조세(租稅)를 정하여 손실법(損實法)을 밝게 하니, 조세를 적게 거두고 민생(民生)을 후하게 한다고 이를 만합니다. 오로지 세포전(稅布田)만은 이러한 법을 행하지 아니하여, 시절이 풍년이 들거나 흉년이 들어도 거두는 데는 늘이거나 줄이는 것이 없습니다.
가령 10결(結)의 땅에 손재(損災)가 반분(半分)에 이르는데도 세(稅)는 원수(元數)대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법령이 고르게 행해지지 못하고 혜택이 고르게 미치지 못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세포전을 한결같이 녹전(祿田)의 제도에 따라 수손급손(隨損給損)하여, 전제(田制)가 널리 행해지고 혜택이 골고루 베풀어지게 할 것입니다.
1. 우리 동방(東方)의 예악 형정(禮樂刑政)과 전장 문물(典章文物)이 중국과 견주어 부끄러울 바가 없는 것은, 비록 기자
(箕子)의 교화(敎化)에 근본을 두지만, 또한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을 갖춘 신하가 치도(治道)를 널리 펴고 왕화(王化)를 도운 것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동방의 문신 가운데 성교(聖敎)에 공이 있고 치도(治道)에 도움이 있는 이는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도록 하여 포장(褒奬)하고 존숭(尊崇)하는 은전을 보였으니,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안향(安珦)이 바로 그분들입니다. 이후로부터 우리 조정에 이르기까지 문신 가운데 도덕과 공업(功業)이 어찌 안향·설총보다 앞서는 이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한 사람도 배향한 이가 없는 것은 하나의 흠입니다. 원컨대, 도당(都堂)에 명하여 전조(前朝)에서 아조(我朝)에 이르기까지 문신 가운데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할 만한 이를 들추어내어서 배향(配享)하는 예를 행하여 후세에 법을 남기소서.
1. 우리나라의 전장 문물(典章文物)이 모두 중국의 제도를 따르지만, 여자의 의복 제도만은 아직도 구습(舊習)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고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선 구제(舊制)에 따라 적당하게 상정(詳定)하여 그 참람한 것은 없애고, 사치스러운 것은 깎아서 등급(等級)과 상하(上下)의 명분을 분별하게 함이 옳습니다.
우리나라 여자의 의복 가운데 존귀(尊貴)한 것은 오군(襖裙)과 입모(笠帽)입니다. 그러나 주부(主婦)와 종비(從婢)의 상하(上下)가 모두 흑라모(黑羅帽)와 백초군(白綃裙)을 사용하니, 값이 비싸 재화를 허비하게 될 뿐 아니라. 존귀(尊貴)한 이와 비천(卑賤)한 이가 서로 섞이게 됩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대소 부녀(大小婦女)와 종비(從婢)의 의복은 오군(襖裙)을 입지 못하게 하고, 그 입모(笠帽)는 저포(苧布)만 쓰고 나(羅)·초(綃)는 사용하지 못하게 하며, 그 모첨(帽襜)의 장단(長短)도 주부의 입모(笠帽)와 같지 아니하게 하면, 시장의 값도 줄어들고 상하(上下)의 분별도 있을 것입니다.
1. 백성 가운데 토목(土木)의 역사에 죽는 자가 간혹 있는데, 수령(守令)이 감사(監司)와 도당(都堂)에 보고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사역(使役)시키는 자가 그 괴로움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감독하는 자가 그 죽음을 알지 못하여, 도당에서는 계문하지 못하고, 전하께서는 이를 알지 못하십니다.
문왕(文王)이 서민(庶民)을 자식같이 돌보았다는 뜻에 어떠하며, 이윤(伊尹)이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불행함이 있으면 자기가 구렁텅이 속에 밀어 넣은 것처럼 생각하던 마음에 또 어떠하겠습니까?
원컨대, 이제부터 외방(外方)은 감사가, 경중(京中)은 제조(提調)가 명심하고 그 역사(役事)를 고찰하여, 모관(某官) 관하(管下)에 병들어 죽은자가 몇 사람, 굶어 죽은 자가 몇 사람, 나무와 돌에 눌려 죽은 자가 몇 사람, 나루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몇 사람인가를 명백하게 일일이 기록하여 도당(都堂)에 전달 보고하게 하고, 도당(都堂)에서는 곧 계본(啓本)을 올려서, 사망자(死亡者)를 많이 낸 경우에는 그 감독한 관원을 죄주고, 그 사망자의 집을 우대하여 구휼하면, 이것 또한 인정(仁政)의 일단(一端)입니다.
1. 지금 대소 인원(大小人員)과 동량 승도(棟梁僧徒)들이 각도 각 고을의 진성(陳省)을 받아, 각사(各司)에 바치는 공물(貢物)을 스스로 준비해 선납(先納)하고, 체지(帖紙)를 받아 그 고을로 내려가서 값을 배(倍)로 징수하므로, 백성들을 침해함이 심합니다.
원컨대, 이제 부터 위와 같이 스스로 준비하여 선납(先納)하는 자를 일절 금단(禁斷)하여 그 폐단을 없애도록 하소서.”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의정부에서 한결같이 장내(狀內)에서 말한 대로 시행할 것을 의결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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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님의 답변 2011.11.19. 23:22
- 포은 정몽주 문묘 배향 시기입니다
중종 13년 무인(1518,정덕 13)
10월 26일(임진)
예조 정랑 이순을 보내어 정몽주의 무덤에 치제하다
예조 정랑 이순(李純)을 보내어 고려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문충공(文忠公) 정몽주의 무덤에 치제(致祭)하였는데【무덤은 용인현(龍仁縣)에 있는데, 신하노릇하지 않은 것으로 대우하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그 제문(祭文)은 다음과 같다.
“우뚝하신 우리 공(公)은 퇴파(頹波)의 지주(支柱)였고, 학문이 끊어진 때를 당하여 개연(慨然)히 일어났도다. 심오한 이치를 탐구하여 평상(平常)한 도리 열었는데, 행실은 효도와 우애를 먼저 하고 예의는 혼례(婚禮)와 상례(喪禮)를 강구하였으며, 일용(日用)의 일을 미루어 나라의 무너진 기강을 부식하였도다.
조정이 편안하지 못하여 사기(事機)가 어려움이 많았는데, 나나 드나 나라에 마음을 다하여 위난(危難)을 처리하였도다. 천지에 맹세하고 사생을 걸어 일하였으며, 밤중에도 근심하여 눈물 흘리며 배회하였도다. 운수가 돌고돌아 신기(神器)가 진인(眞人)에게 돌아가니, 어려운 때에 안정을 구하고 죽어서 인도(仁道)를 이루었도다.
말[馬] 앞에서 간하던 의리요, 형만(荊蠻)으로 도피하던 절조인데, 우주(宇宙)처럼 광대(廣大)하고 일월(日月)처럼 빛났으며, 만고토록 영원히 사람의 도(道) 보였도다. 밝고 밝으신 우리 조선(祖先)은 지공대정(至公大正)함을 밝게 펴서 시호(諡號)와 작호(爵號)를 내리고 화상을 그리고 찬(讚)을 지어 대대로 충절(忠節)을 심었도다. 슬프다,
내 영원히 사모하여 마음 깊이 모범을 삼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여 백성의 법칙을 밝혔는데, 이름난 저 무덤에 초목이 무성하니, 부로(父老)에게 부끄럽고 훌륭한 공(公)에게 욕되게 하였도다.
이에 좋은 날을 가려 무덤에 제사드리니 영령(英靈)은 감응하여 아름다운 교화를 펴게 할지어다. 돌아가서 천명에 배합하니 무덤에서 길이 편안하소서.”【이조 정랑 정응(鄭應)이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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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님의 2011.11.19. 23:46
-오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문묘 배향 시기입니다
선조 9년 병자(1576,만력 4)
4월 24일(정해)
태학 유생들이 오현 종사를 청하다
태학 유생(太學儒生)들이 상소하여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배향(配享)하는 것은 중대한 전례(典禮)인데 어찌 경솔히 논의할 수 있겠는가? 번거로이 진달하지 말라.”
광해조일기 1(光海朝日記一)
경술년(1610, 광해군 2)
봄에 공성왕후(恭聖王后 광해군의 생모)를 추숭(追崇)하여 봉자전(奉慈殿)에 봉안하였는데, 이것이 성릉(成陵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태묘(太廟)에 모셨다.)이다. 세자 책봉 주청사 신흠(申欽)등이 인준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
양사(兩司)의 계(啓) 및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 및 여러 도(道)의 유생들의 소로 인하여 특별히 오현(五賢)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허락하였다.
[주01]오현(五賢) :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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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님의 답변 2011.11.19. 23:51
-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문묘 배향 시기입니다
숙종 6년 경신(1680,강희 19)
8월 26일 (임오)
이이와 성혼의 문묘 배향을 청한 황해도 생원 윤하주 등의 상소
황해도의 생원(生員) 윤하주(尹夏柱) 등이 상소하여 청하기를,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선대 조정(朝廷)에서 시행하지 않았던 전례(典禮)를 지금 거론할 수가 없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學業)을 닦도록 하라.” 하였다. 상소가 세 차례나 올라갔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숙종 7년 신유(1681,강희 20)
9월 19일 (무진)
팔도 유생들이 재차 이이 등의 문묘 종사를 청하자 대신의 의논을 거쳐 허락하다
관학(館學)의 팔도 유생(八道儒生) 이연보(李延普) 등이 소(疏)를 올려 지난번의 주청을 다시 거듭하자, 임금이 답(答)하기를, “양현(兩賢)의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은 실로 한 세대에서 우러러 사모하며 사림(士林)의 모범[矜式]이 되니,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을 대체로 누가 불가(不可)하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나 대대의 조정[累朝]에서 일찍이 윤허[允兪]하지 않았던 것과 내가 과단성 있게 처리하지 못하고 미루었던 것은 모두 신중(愼重)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인사들의 주청이 오래도록 계속되었고, 또한 간절해서 끝내 억지로 어기기 어려우니, 그것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대신(大臣)에게 묻도록 하여 특별히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는 청을 윤허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 김수항(金壽恒)·김수흥(金壽興)·정지화(鄭知和)·민정중(閔鼎重)·이상진(李尙眞)이 모두 종사(從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다고 하자, 임금이 전교하기를, “대신의 의논이 모두 이와 같으니, 지난번의 소(疏)대로 문묘(文廟)에 올려서 배향(配享)하도록 비답한다.” 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