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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求禮) 사성암(四聖菴)을 답사하다.
글 쓴 이 고 학 영
10월8일, 한가위 연휴가 길어서인가? 도로는 한산하다.
화원 IC로 접어드니 임시로 개통된 도로가 더 넓어져 서부의 관문이 새롭구나! 저만큼 들녘에는 황금물결로 일렁이고, 연변(沿邊)의 코스모스는 하늘거리며 미소(微笑)로 다가오네!
남원을 지나 구례(求禮)에 도착하니 10시가 조금지나 있다. 문척교(文尺橋)를 지나 오산(鰲山 531M) 기슭에 이르니 산행객들과 답사객들이 어울어져 시끌벅적하다.
사성암(四聖菴)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서희와 길상이가 불공드린절” 이라고 씌여진 프랑카드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KBS 대하드라마 (박경리 작) “토지”의 주인공 서희와 길상이가 아니던가?
하동군(河東郡) 평사리(平沙里)는 여기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차로 8부능선까지 올라 사성암으로 나아가니, 가파른 언덕바지에는 활공장(滑空場:글라이더 연습장)이 있으나 오늘은 조용하다.
여러계단을 올라 도량(道場)에 들어서니 “옴마니 반메홈”의 진언이 흘러 나오고, 그 옆에는 젊은 보살님이 조용히 염송하고 계신다.
한평 남짓한 공간에는 달마(達磨)그림으로 가득하다. 무심한 마음으로 감상하고 있노라니... 한 그림에 시선이 멈추는데, 조선 인조시대 화가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의 노승도(老僧圖)와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보살님은 소리없이 다가와 달마그림의 설명에 열중이시다. 주지(住持) 묘각(妙覺)스님의 작품이라 하시며, 스님의 작품활동 안내서를 한장 주신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불화 단청 만봉스님의 사사와 시경 박익준 선생 사사, 대한민국 미술대전 최우수상 수상 등 등 많은 작품활동이 있었슴을 말해 주신다.
벽면, 전지(全紙)에 그려진 "서귀달마상(西歸達磨像)"은 활달한 필치로 아무거리낌없이 북북 그어내린선들이 가히 해탈의 경지라고나 할까? 상단의 제기(題記)는 더욱 빛나서...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감사를 드리며,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1매를 구매하여 지장전(地藏殿)으로 오른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서니 벼랑끝에는 수령이 4~500년은 되어 보이는 괴목이 한 그루 서 있어, 도량의 수호목(守護木)으로 짐작이 된다. 모진 풍우(風雨)를 용케도 견뎌 내시어 숨기신 깊은 뜻이야 님이 아니고서는 누가 알리요!
땅속에 몸을 감추신 보살(地藏菩薩)님이 천인단애(千仞斷崖)한 벼랑끝에서 몸을 나투시니... 참배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신다. 간단한 예배(禮拜)를 드리고, 소원바위에 이르니... 안광(眼光)이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이고 섬진강이 좌에서 우로 유장(流長)하게 휘감아 흐른다.
발밑에는 천길 낭떠러지요! 눈앞에 펼쳐지는 광할한 황금들판의 풍경이며, 강건너 지리산 연봉들이 천군만마(千軍萬馬)가 되어 달려 오시니... 소원바위에 비나이다! 이 기분으로 영원히 머무르게 하소서...!
우측으로 몇걸음을 더 나아가니 산신각(山神閣)이 진좌(鎭坐)하고 있으며, 그 옆에 도선굴(道詵窟)을 통과해 주위를 조망(眺望)하니... 더는 할 말을 잃는다.
이곳 오산(鰲山 531M)은 백두대간상의 함양 영취산 부근에서 서남으로 뻗어나온 호남정맥을 타고 800여 리를 달려 갈미봉(639M) 부근에서 동북방향으로 천황봉(652M), 등주리봉(671M)을 거쳐 이곳 오산에서 섬진강으로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백두의 정기와 호남의 정기가 오롯이 뭉쳐 있어, 정기(精氣)는 천하제일이요! 풍광 또한 금강(金剛)이로다!
아~ 아~ 천하제일 오산(鰲山 531M)이여!
영원(永遠) 무궁(無窮) 하소서...!
오래 오래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나려오니, 저만큼 벼랑위에 약사마애불(藥師磨崖佛)을 모신 약사전(藥師殿)이 섬광(閃光)으로 빛을 발하신다.
백팔번뇌(百八煩惱)를 닦는 심정으로 돌계단을 오르니... 3개의 철기둥을 고여세워 그 위에 전각을 지으니 제비집을 방불케하며, 금강산 보덕굴과 해인사 희랑대를 연상(聯想)케 하신다.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에 약병같은 것이 들려 있어 약사여래불로 부르며, 음각(陰刻)된 선(線)따라 금 도금을 칠하여서 음각의 기법을 이해 하기가 용이(容易)치 않으며, 전면이 통유리로 가리워져 마애불의 전체모습을 감상하기도 쉽지 않다.
일설에는 원효스님이 손톱으로 눌러 새겼다고도 하시니, 성인(聖人)의 신력(神力)을 범부(凡夫)가 어이 짐작이나 하리요!
양식으로 봐서는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작품이라 짐작되며, 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예(禮)를 드리고 물러나니 좌청룡이 휘감아 섬진강에 그 맥을 드리우고 있으니...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갈용음수형(渴龍飮水形)이다.
천골(千谷) 만골(萬谷)의 지류(支流)들이 모여서 대하(大河)를 이루어 약사전, 대웅전터로 입수(入水)되니 천하의 길지(吉地)로다.
대웅전을 건립 할 터에는 천막으로 덮여 있고 사성암(四聖菴) 현판만 댕그러니 걸려 있어 외롭구나! 기념품과 기와불사 접수를 받는 처사님께 “사성(四聖)”은 어느분이냐? 고 여쭈니, ‘원효와 도선, 연기조사(緣起祖師), 진각국사’ 라 하신다.
안내판에 사성암(四聖菴)은 백제 성왕 22년(544)에 연기조사가 화엄사(華嚴寺)보다 먼저 창건 하였다고 하며, 조선 인조8년(1630)에 중건됀 기록이 있으나 대웅전은 현재 옛건물을 헐고 재건 준비중에 있다.
창건이래로 1500여 년의 장구한 세월을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전법도량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으나, 경내 전각들은 근대에 지어져 고색어린 멋은 없다. 산색(山色)은 아직도 청청(靑靑)한데, 들녘에는 이미 황금물결로 일렁이니... 올 가을의 소식은 들녘에서 먼저 오시는가 보다!
문척교(文尺橋)를 다시건너 섬진강변의 십리장제(十里長堤)에는 가녀린 코스모스가 제방(堤防)을 수(繡)놓고 있으니... 코스모스는 가을의 화신(化身)인가? 탄성(歎聲)을 지르는 집사람과 빙모(聘母)님께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드리고는...
잔디 고수부지(高水敷地)에 앉아 허기진 배를 채우니, 저만큼 오산(鰲山)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서 거북이 형상이라는 말이 과연 허언(虛言)이 아님을 알겠도다!
마산면(馬山面) 사도리(沙圖里) ‘당몰샘’ 에 도착하니, “고향방문을 환영합니다.” 라는 플랑카드만 바람에 나부낄뿐, 정작 마을은 조용하다. 긴 연휴의 마지막 날이라 그러한가?
사도리 상사(上沙)마을 ‘당몰샘’은 전북 순창군, 전남 구례군, 곡성군, 담양군의 4개지역의 장수촌에 해당되는 지역이며 예로부터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곳이다.
이지역 사람들이 장수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이 당몰샘의 영험한 물맛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돌담에는 “천년고리(千年古里)감로영천(甘露靈泉)”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어떠한 가뭄이나 홍수에도 일정하게 흘러 넘친다고 하신다.
70년대 까지만 해도 샘 주위에는 구기자(枸杞子) 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며, 그 물이 우러나 약수였던 셈이다.
안내판에는 지리산의 천년묵은 산삼이나 약초들의 물이 우러나 영험있는 약수라 적혀 있으니... 몸에 좋은 것은 더 말해 무삼하리요!
그 옆에 2004년 6월 4일에 실시한 수질검사표가 있어 카드뮴, 비소, 셀레늄 등 47개 항목에걸친 유해물질 검사에서 모두 합격판정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물 한바가지로 식후의 갈증을 축이며 마을의 한 노인(老人)에게 여쭈니, 최고령자가 105세라 하시며 이웃하고 있는 오미리(五美里)에는 108세된 할머니가 아직도 바늘귀에 실을 꿴다고 하시며, 연신 싱글벙글 자랑이 많으시다.
“어디서 왔지라우!” 대구에서 왔심더.
“할매(聘母님)는 얼마나 됐지라우!” 아흔 넷입니더(94세).
“아직도 쌩~쌩~ 하구마이~”
할머니는요? “내보담 3살 덜 잡숫구마니라우(97세)!”
허~허~허~ 웃으며... 150세까지 무병장수(無病長壽) 하~이~소~오~ 할문이~ 예~!
마을 어귀로 걸어나와 사도천년사적비(沙圖千年事績碑)를 보니, “음차수자(飮此水者)수개팔순(壽蓋八旬)”이라 씌어 있다. 장수마을 답게 풍수적(風水的)으로도 많은 신경을 써 조성된 마을임을 충분히 알겠도다.
주산은 지리산 반야봉, 노고단, 형제봉을 거쳐 병풍산이 마을뒤를 감싸주고, 안산(案山)은 오봉산(五峰山)과 오산(鰲山)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으며, 청룡이 허약하여 비보림(裨補林)을 조성 하였고...
마을 앞에는 연못을 만들어 거북이알의 형상인 바위들을 못속에 쌓아두어 있으니, 마을지세(地勢)에 걸맞는 구상(構想)이라 생각된다.
오미리(五美里)에 접어드니 마을어귀에는 오미정(五美亭)이라는 팔각정자가 우뚝하고, 넓은들판에는 황금물결로 넘실대니 풍요(豊饒)로움을 느끼겠다. 만석군의 집 ‘운조루(雲鳥樓)’!! 오래전부터 와보고 싶었던 곳이 아닌가?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오미리(五美里)에 위치한 운조루(雲鳥樓)는 지리산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지맥의 병풍산을 배산(背山)으로 하여, 구만들의 넓은평야와 우에서좌로 굽이도는 섬진강을 지나 안산(案山)인 오봉산(五峰山)이 뭇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의 지세(地勢)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1000여 평의 대지에 건평이 100평이 넘는 보기드문 이 한옥은 일자형(一字形)행랑채(24칸), T자형사랑채(6칸), 외사랑인 운조루가(16칸), ㅁ자형안채(36칸), 사당(2칸) 등 등 옛날에는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한다.(현존73칸)
운조루는 조선 영조52년(1776) 무관(武官) 유이주(柳爾冑1726~1797)가 지은 가옥의 사랑채를 말함인데, 지금은 가옥전체를 운조루라 부르고 있다.
운조루(雲鳥樓:구름위를 나는새가 사는 빼어난집)는 본디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글귀라 하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낙지(金環落地), 오봉귀소(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으로 이 집터에서 거북이 형상을 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1987년에 돌거북을 도둑맞아 지금은 볼 수 없다함.)
무엇보다 특기할 사항은 사랑채 밖의 목독(나무로된쌀독)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자선보시(慈善布施)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으로 후세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일만여편의 시를 쓰고, 손자 류형업(柳瑩業)에 이르기 까지 80여 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고 8세손인 류응교(柳應敎, 전북대 건축과 교수 공학박사)선생은 전해 주신다.
부(富)와 명예 권력은 인간이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어서, 다 누리기는 참으로 어려운 법인데... 운조루(雲鳥樓)의 주인은 누대(累代)에 걸친 적선(積善)과 음덕(陰德)의 소산(所産)으로 광영(光榮)을 누리심인가?
운조루에 올라앉아 행랑채 너머로 보이는 오봉산의 봉우리들이 노적봉(露積峰)으로 다가오니, 만석군의 집터란 말이 사실로 다가온다. 벽에붙은 유훈(遺訓)과 가훈(家訓)을 보노라면 모든 것이 노력과 정성, 사랑으로 이루어 졌슴을 느끼면서 솟을대문(三門)을 나선다.
삼문(三門)앞에는 문수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그 앞에는 사각연못이 있어 가운데는 원형의 대(臺)를 쌓아 소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으니 운치를 더해 주신다. 연못은 동양사상에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서 하늘과 땅의 이치를 담아 있고, 안산(案山)인 오봉산의 화기(火氣)를 다스리기 위해 만들어 졌다고 하신다.
모든 것이 풍수지리를 염두에 둔 조성이요, 오복(五福)을 염원하는 것임을 알게되니... 하늘과 땅의 이치대로, 자연으로 회귀(回歸)하는 삶이 곧 행복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안내자의 정성과 사랑에 감사를 드리고, 문화류씨(文化柳氏)의 가문에 무궁한 발전과 영광이 계시기를 빌면서...
금환낙지처(金環落地處) 이순백(李淳白)의 가옥으로 향한다. 구만들의 가운데 쯤으로 느껴지며, ‘운조루’와 그리 멀지않은 곳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으니... 그중에 이병주씨(이순백.子)가 살고있는 집이 금환낙지(金環落地)의 명당이라 한다.
금가락지의 형태로 둥글게 막돌로 담을 쌓아, 묵은 담쟁이 넝쿨이 담장을 에워싸니 고색어린 멋이 풍기고 자연친화적인 환경을 느끼겠다.
솟을대문(삼문)을 지나 행랑채로 들어서니, 바깥마당에는 동에서 서로 명당수(明堂水)가 태극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니... 경주의 남산에 유상곡수(流觴曲水)로 유명한 포석정(砲石亭)이 떠 오른다.
사랑채는 3칸으로 새로지어 찻집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몸채는 정면5칸에 측면2칸의 팔작지붕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동편에 쪽마루를 놓기위해 기둥을 하나더 세운 것이 특이하고, 1920년대에 지어진 집이라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멋이 있다.
안내장에 1910년경부터 승주(昇州) 황전(黃田)에 사는 삼천석의 부자 박승림(朴勝林)이란분이 명당을 찾아 10여 년을 수색끝에, 이곳 이 금환낙지(金環落地)라 확정짓고 이교신(李敎臣:이병주의 증조부)씨와 함께 건축하게 되었다. 그 후 박승림씨는 타계하시고 이교신씨가 인도하여 현재 5대째 살고있다 하신다.
원래는 6채 53칸의 한옥으로 지어졌으나 중간에 훼손되어 1998년에 새로이 동행랑과 중간 사랑채를 복원하고, 누각을 신설하여 ‘춘해루(春海樓)’라 이름 지었으며, 연못(洗淵)을 확장 하였다고 한다.(현재 5채 51칸)
춘해루(春海樓)를 지나 대문으로 돌아 나오니 문기둥에 주련이 달려 있는데...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이요! (마당을 쓰니 황금이 나오고)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로다. (대문을 여니 만복이 들어온다.)
삼문(三門)옆에는 방명록과 주인명함 안내장이 놓여 있으며, “한번 오신분은 평생 가족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글귀가 붙어있고, 민박하실분은 1개월전에 예약하시란다.
“신혼 부부들이 하룻밤만 명당터에서 숙박을 하면 금환낙지(金環落地)의 운이 돌아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린다.”라고 쓰여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바램은 한결 같아서...
돌장승이 말하고 춤추는 날 내 다시 오리다!!!
시계는 벌써 15시 30분을 가르키고 있다.
문수골(文殊谷)로 돌아드니 산길은 꾸불꾸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이라! 문수지(文殊池)를 지나 20여 분을 오르니... 노고단(1507M)에서 뻗어내린 능선이 우로는 왕시리봉(1243M), 문바우등(1198M)이 눈앞에 보이고, 좌로는 월령봉(750M), 형제봉(912M)이 나란하여 아직도 녹색으로 여여(如如)하다.
800여 고지에 문수암(文殊菴)이 진좌하시니 마을도 인적(人跡)도 드물구나! 주차장에서 100여 미터를 오르니, 30여 미터는 됨직한 등나무 터널이 일주문을 대신해 답사객을 맞아 주신다.
요사채를 지나 경내(境內)로 들어서니, 사방 1칸의 3층 목탑형식의 대웅전이 새로 지어져 단정하다. 목탑형식의 법당은 그리 흔치 않아서 그 대표적인 것이 법주사의 팔상전, 화순 쌍봉사의 3층법당, 진천의 보탑 등이 이러한 양식을 띄고 있어서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높다.
문수사(文殊寺)의 대웅전은 1986년에 재건하여서 그 역사가 일천(日淺)하니, 고색어린 멋은 없으나 건축기법이 아름답고 뛰어나서 보는 눈이 다 즐겁다.
법당뒤편에는 감로수(甘露水)가 솟아 나는데... 수량(水量)이 하도 풍부하여 솟는물이 흐르는 도랑물처럼 콸콸 소리가 다 난다. 가을 가뭄이 상당한데도 저토록 수량(水量)이 풍부하니, 수도(修道)도량(道場)은 하늘이 점지 하시는가 보다.
한바가지 물로 속세의 번뇌(煩惱)를 씻으며, 여러 계단을 올라 문수전(文殊殿)과 삼성각(三聖閣)을 답사하고 주위를 조망하니, 백호는 허(虛)하나 청룡이 뚜렷하여 왕시리봉(1243M)이 눈앞에 선연하다.
해발 800여 미터에 인적이 드문 곳이라 수도(修道)하기에는 더 없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내판에 문수사는 백제 성왕25년(547)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다 하며, 그는 화엄의 종조로서 지리산 화엄사를 창건하고, 화엄원돈(華嚴圓頓)을 해동에 유포하여 계림(신라)에 대승불교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 중간의 역사는 알 수 없고 문수사 경내의 도량은 대웅전을 비롯, 대부분 1986년 이후 중건한 건물이라 쓰여 있다.
대웅전옆에는 지리산 반달가슴곰(천연기념물)이 5마리나 사육되고 있어 특별한 기억이 남는다. 도량내에서 짐승을 사육하는 일은 처음보는 일이며, 참외를 하루 60kg정도 먹는다고 한다.
겨울에는 사과를 먹이로 주며 그 외 사료도 먹인다고 설명하신다. 하기사, 중생이 어디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진덴...
수도자의 본분이 정각(正覺)에 있고, 중생제도(衆生濟度)에 있다면...
분별심(分別心)을 내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분별(分別)일세...!
화개장(花開場)터를 지나 칠불암(七佛菴)으로 향하노니...
연변(沿邊)의 벚꽃나무는 황엽(黃葉)으로 물들어 우수수 바람에 흩 날리니... 올가을은 벚꽃나무로부터 오는 것인가?
언덕배기 공간에는 여기 저기 찻집들이 즐비(櫛比)하여 오래전의 풍경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화개천(花開川)을 따라 양방(兩方) 비탈밭에는 녹차(綠茶) 재배로 빈틈이 없으니... 이른봄 벚꽃축제와 아울러 녹차향(綠茶香)이 함께 어울어 진다면, 봄의 향연이 화개천으로부터 온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아름다운 상상으로 범왕리(凡旺里) 칠불암 주차장에 이르니 우람한 일주문이 새로 건립되어 있고, 언덕배기 조용한 곳에는 초의선사기념부도(草衣禪師記念浮屠)가 새로 모셔져 있다. 자세히 살피니 조각기법이 뛰어나고 세련되어서 훌륭한 작품으로 보여지며, 화개천의 양변(兩邊)에 즐비한 찻집과 그 많은 녹차밭이 전례없이 많아진 이유를 이제서야 알겠도다.
조선 정조10년(1786)에 전남 나주군 삼향면에서 출생한 초의선사(草衣禪師)는 한국차(茶)의 중시조라고 일컬어지며, 당시 호남칠고붕(湖南七高朋)중의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유불(儒彿)에 두루 달통(達通) 하였으며, 시와 글씨와 그림의 달인삼절(達人三絶)로서 차와 선(禪)을 통하여 유학자와 선비들을 제도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선승(實學禪僧)이었다.
아버지뻘되는 정다산(丁茶山)과도 교유 했으며, 다산의 둘째아들 정학유와 동갑내기로 한생 친하게 지냈고, 추사 김정희와 백파(白波)스님과도 동갑내기로 차와 선(禪)으로 시와 예술을 논하였다.
초의스님이 지리산 칠불암에서 다신전(茶神傳)을 저술 하였으며, 차에관한 모든 것을 실어 보급하는데 노력하였고, 차와선은 한가지 맛이라 하여 다선일체(茶禪一切), 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선삼매(茶禪三昧)를 설(說)하였으니... 이 고장에 녹차의 붐이 일어난 이유가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한승원 작 “초의” 참조)
허허로운 마음으로 칠불암에 오르니 경사진 언덕배기에는 ‘꽃무릇’은 지고 대공만 오롯이 서 있으니 을씨년 스럽기도 하구나!
설법전(說法殿)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니 대웅전이 정면3칸에 측면2칸의 다포개 팔작지붕형태로 서 있고, 왼쪽에 그 유명한 아자방(亞字房)이 있으며, 우측으로 문수전, 지장전, 그 아래 선방(禪房)이 차례로 진좌 하시니... 도량은 청정하고 우람하다.
전설에 의하면 칠불암은 서기97년 가야의 김수로왕과 허황옥 왕비 사이에서 난 왕자 10명중 7명이, 당시 운상원(雲上院)에서 수도하여 성불한 후로부터 칠불암(七佛菴)으로 불리워 졌다하며...
창건설화는 고구려 소수림왕2년(372)에 중국에서 전파되었다는 종래의 사실보다 훨씬 앞서서, 가락국때 인도에서 전래되었다고(신라제3대 유리왕,서기22년경) 해서 남방불교 전래설에 뒷받침이 돼고 있으며...
전라남도 해남 달마산 미황사(美黃寺)의 창건설화 역시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추측케 하지만, 뒷받침 해 줄만한 사료가 아직은 발견되지 않고있는 실정이다.
칠불암의 여러건물 가운데 특기할 사항은 아자방(亞字房) 온돌 선원이다. 신라 효공왕(孝恭王 897~912)때 구들도사로 불리던 담공선사(曇空禪師)가 구들을 놓으면서 버금아(亞)자 모양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고 전하며, 50명의 스님이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할 수 있는 크기인데, 한번 불을 때면 한달반동안이나 따뜻했다고 전해온다.
여러번에 걸쳐 수리 복원된 아자방은 옛공법을 찾기는 어려웠다고 하며, 남북장방형으로 놓인 정면5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으로 “외인출입금지” 여서 들어 갈 수는 없고 옆면에 유리창을 내어 내부를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하안거(夏安居)가 끝나고 운수행각(雲水行脚)철이라 선방은 텅 비어 허전하고, 전해오는 야화(夜話)가 있어 만발하니...
조선조 중엽에 새로 부임한 하동군수가 늦은봄에 초도순시차 왔다가 아자방(亞字房)을 보게 되었는데, 점심공양후 오수(午睡)에 졸려 고개를 들고 또는 머리를 숙이고, 좌우로 흔들 흔들, 때로는 방귀도 퉁퉁 뀌면서 졸고있는 스님들을 보고는 ‘수도자가 저럴 수 있나 하며’ 내심으로 한번 혼내주리라 생각하고...
며칠뒤 편지를 보내 ‘귀사(貴寺)에는 도인(道人)이 많다는데 목마(木馬)를 만들어 가지고 와서 동헌(東軒)마당에서 한번 타고 돌도록 하라. 목마를 잘타면 후한상을 내리겠지만 그렇지 못할때는 큰벌을 주리라’ 하였다.
절에서는 대책회의를 하였으나 별 묘안이 없어 침울해 있는데, 탁자 밑에서 한 사미승이 나오더니 ‘그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스님들은 아무 걱정마시고 싸리채나 엮어서 목마(木馬) 한 마리를 만들어 주십시요.’ 라는 것이었다.
사미승의 말대로 싸리나무로 말을 만들어 부목(負木)을 시켜 동헌(東軒)으로 사미승을 따라가게 하였다.
군수는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으나 사미승의 태도가 하도 당당하고 의젓 한지라, ‘그렇다면 그대가 목마를 타기전에 물어 보겠다.’
‘칠불암에 도인들이 많다더니 내가 그 앉아 졸고 있는 꼴들을 보니 한심하더라.’
도인이라고 별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하늘을 쳐다보고 졸고만 있는것이 무슨 공부란 말이냐?’
그것은 앙천성숙관(仰天星宿觀)입지요, (즉 하늘을 보고 별들을 관찰하는 공부입니다.)
‘별은 왜 보는 것이냐?’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하달지리(下達地理)하여야만 천하만사(天下萬事)를 다알게되고, 중생제도(衆生濟度)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머리를 푹숙이고 땅을보고 조는자(者)는?’
예, 그것은 지하망명관(地下亡命觀)입니다. (사람이 죄를짓고 죽으면 지옥으로 들어가 죄 값을 치르게 되는데,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구제할 것인가를 관(觀)하는 공부입니다.)
‘그럼 몸도 가누지 못하고 흔들거리면서 쓰러지려는듯 하는 것은 뭐냐?’
예, 그것은 춘풍양유관(春風楊柳觀)이라 합니다. (有에 집착해도 안되고 無에 집착해도 못 쓰며, 고락성쇠(苦樂盛衰)에 집착해도 아니되므로, 마치 버드나무가 바람에 휘날려도 전후좌우 그 어느 것에도 걸리지 않는 것처럼 공유달관(空宥達觀)하는 공부입니다.)
‘그건 그렇다치고, 방구를 퉁퉁뀌고 앉아있는 중은 또 무슨 꼴이냐?’
그것은 타파칠통관(打破漆筒觀)인데... (사람이 우직(愚直)하여 남의 말은 듣지 아니하고 제고집대로만 하는 사또와 같은 칠통배를 깨닫게 하는 공부입니다.
사또는 ‘허허어~ 이놈이’ 하면서 ‘아직 입에 젖냄새가 가시지않은 너의 식견(識見)이 이러하니 그곳의 도승(道僧)들이야 더 말할게 있겠느냐. 자, 이제 목마(木馬)나 한번 타보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사미승이 목마(木馬)에 올라 발을 한번 내구르니 말이 터벅 터벅 동헌(東軒) 앞마당을 대 여섯 번 돌더니, 그만 공중(空中)으로 둥실 둥실 떠 올라서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군수와 육방관속들이 발심(發心)하여 불교를 독신(篤信)하게 되었고 쌍계사 칠불암을 생불주처(生佛住處)처럼 떠받드니, 군민이 모두 따라 일시에 하동(河東)은 불해(佛海)를 이루고 화장세계(華藏世界)를 재현 하였다는 것이다.
설법전 너머로 좌청룡이 포근히 감싸주고, 백호는 허(虛)하여 대숲(竹林)으로 비보(裨補) 하였도다!
인적(人跡)도 드문 칠불암에 저녁노을이 비치니
서광(瑞光)이 하늘에 충천(衝天)하고...
법향(法香) 다향(茶香)이 한데 어울어져
화개천(花開川)에 충만(充滿)한데...
초의선사(草衣禪師)의 후예(後裔)들이
아자방(亞字房)에 넘쳐나니...
다선삼매(茶禪三昧)의 향이 여여 하도다.
단기4339년(서기2006년) 10월 8일
구례 오산 사성암, 사도리 당몰샘, 오미리 운조루,
문수사(文殊寺), 하동(河東) 칠불암을 답사하다.
첫댓글 회장님~ 산행후기 잘 읽고 갑니다...글 쓰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여기 따뜻한 차 한잔 놓고 갑니다...^^*
구슬님! 장문의 글을 읽으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감사히 잘 마시겠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