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것은 어렵다. 시간이 갈수록 무언가에 집중하기가 정말 어려워지고 있다. 내 삶은 위태롭다. 발밑의 흙이 조금씩 갈라져 흘러내리고 있는 느낌이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저 산기슭은 조금만 비가 오면 임계점에 임박해 있는 터라 금세 사태가 나고 만다. 꼭 그만큼만 위험하지 싶다. 지금 저 아파트 너머로 매미소리가 들린다. 매미가 운다는 것은 기억이 운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내게도 종종 떠오르는 그런 기억들은 존재한다. 평온한 마음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에 연루되어 살아가게 마련이다. 완벽하게 자유로운 그런 진공묘유의 순간이 갈수록 존재하기 어렵다. 나는 꿈꾼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소망한다. 바라건대 내 남은 생의 순간순간이 온전히 자유롭기를. 햇살 따가운 어느 정오의 순간에 봉당마루 밑에 옆으로 길게 누워 혀를 길게 빼고 뱃가죽을 들썩이며 나른하게 눈 감은 채 졸고 있는 삼복의 개를 상상해 본다. 꼭 그렇게만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옳음에 대해서도 그름에 대해서도 선에 대해서도 악에 대해서 당위에 대해서도 결핍과 충족에 대해서도 생각하거나 구애됨이 없이 그저 그렇게 존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지위를 잃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열망들은 이미 외면당한 것이다. 아니면 우리에게서 진작에 회수된 특권이다. 슬픈 일이다. 괴로운 일이다. 현존하지 않는 것을 희망하고 꿈꾼다는 것은. 나는 삶에 많이 지쳐 있다. 피곤하다. 신은 이런 나를 이해해야 한다. 신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사람들은 이를 알아야 한다.
가끔 나는 이 주어진 생에서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낀다. 아니 강박이라기 보다는 그런 욕망을 지니고 있다. 내가 무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그런 확인을 하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의 시구처럼 ‘나도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것이 정직한 표현이리라. 자신감의 부족은 나를 괴롭힌다. 이것은 오랜 내력을 지닌 심리적 불안요인이다. 동시에 나는 무화하고 싶은 혹은, 무능력하고 무기력하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다. 세상 속과 밖으로 동시에 움직이는 이 모순적 경향은 늘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어 왔다. 내게는 한 줄기 따사로운 빛 한 줄기와 불어가는 바람과 그늘이 드리워진 처마 아래 마루 한 뼘만이 필요하다. 인간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어야 한다는 것과 배설해야 한다는 것과 욕망을 느낀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것이 삶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은 충분히 자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인정하자. 나는 모든 세계를 다 바라보지 못한다. 또 모든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며 모든 책을 읽지도 못하고 많은 분야에 능통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이다. 주어진 내 삶은 밋밋하고 자극적이지도 못하고 내세울 업적도 없고 든든한 배경도 없고 재산도 없고 삶은 늘 조금씩 팍팍하고 까다롭다. 심리적인 균형을 찾는 것도 쉽지 않고 자기 존중감을 갖고 사는 것도 허세가 아니라면 다소 힘들다. 늘 위태로운 외줄을 타는 것과 같은 위태로움. 언제 모든 것이 붕괴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은 인간이 지닌 나약함의 증좌인 것 같아 씁쓸하다. 왜 삶은 단순하지 않은가. 왜 사람은 광합성을 하는 존재가 아닌가 말이다. 그랬다면 자기 안으로 조용히 꿈꾸면서 살았을 텐데.
서두가 길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지난번에 다녀온 지리산 산행과 홍도 가족 여행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다. 누가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는 기념을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방학을 오래 기다렸다. 늘 그렇지만 긴장이 임계점을 향해 막바지로 치솟을 때 그렇게 구원은 찾아온다. 이번 방학에는 보충수업 같은 것은 없다. 올해 한 해는 나의 안식년이다. 그렇게 선언했고 그렇게 마음먹었고 또 그렇게 살았다. 게으름은 내 천성이다. 이 게으름 때문에 나는 천국에 가기 힘들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다소 손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각해 본다. 돈에 삶을 맞추기 보다는 삶에 돈이 필요한 것이다. 본말이 전도되는 것을 늘 조심해야 한다. 쉬기 위해서는 돈도 필요하지만 시간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생은 짧다. 지금도 사람들은 세상을 쉼 없이 오가고 있다. 나는 혀로 삶의 세부를 핥아 보고 싶다. 이 여름은 내게 중요하다.
지난 7월 21에는 장을 봤다. 지리산에서 2박 3일을 보내려면 잘 먹어야 한다. 그리고 쌀을 가져가서 밥을 해먹으면 설거지가 문제가 된다. 그래서 환경에는 상극이지만 햇반을 샀다. 6끼에 해당하는 분량은 어마어마했다. 아,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환경친화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이 다시 한 번 슬펐다. 오이, 사과, 영양갱, 과자, 사탕 등 우리가 장을 본 양과 액수는 놀라울 정도였으니. 산 지 20여 년이 되어가는 낡고 곰팡이 핀 배낭을 꺼내 짐을 담고 작은 배낭은 집사람용으로 배정하고 불휘에겐 내 책가방을 전용하였다. 버너와 코펠, 수저, 옷 등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철도청 인터넷 예매창구에서 SMS승차권을 휴대전화로 발급받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상이 점점 달라져 가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제는 자야한다. 집사람의 건강도 그리 미덥지가 않고 불휘도 은근히 걱정이 되긴 했다. 하지만 어쩌랴 주사위는 던져졌고 길은 가야 하는 것이니.
아침과 점심은 미리 준비해 가기로 했고 부지런한 아내가 이미 철저하게 포장해 놓았다. 충분했다. 일어난 시간은 5시 경이었다. 잠에 취한 불휘를 깨우니 흐느적거리면서도 용케 일어나 앉는다. 새별이는 불참의사를 밝혔으므로 본인 의사를 존중하여 버리고 가기로 했다. 지리산에서 우리 3인은 극기훈련을 하게 될 것이고 새별이는 집에서 독자적 생존훈련을 할 것이다. 아무튼 서로 잘 지내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서로의 무운을 빌며 각자의 길로 갔다. 5시 40분쯤에 60번 버스를 타고 영등포역에 도착하니 6시 35분경이다. 차는 6시 58분 출발이다. 여수행이고 무궁화다. 우리는 구례구역에서 내릴 것이다. 11시 20분쯤 도착 예정이란다. 새벽 영등포역은 벌써 사람 사는 일들로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영등포역은 서울역과 함께 노숙인들이 많기로 소문난 곳이 아닌가. 역시나 여기 저기 지린내를 풍기는 와중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노라니 성을 구별하기 힘든 어떤 노숙인이 돌아다니며 손을 벌린다. 사람들은 익숙한 그 모습에 별로 동정심이 발동하지 않는 모양인지 반응이 없다. 암환자가 바싹 마른 것처럼 깡마른 얼굴에 살이라고는 별로 붙어 있지 않은 사람인데 어디 병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자세히 보니 여자임을 알 수 있겠다. 불휘가 마음이 불편한지 나를 힐끔 본다. 저 아이는 마음이 여린 편이다. 거리에 쓰레기를 보면 줍고 다니는 아이다. 고지식한 아이다. 나는 내 앞에 선 그녀에게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서 있더니 다른 자리로 간다. 마음이 불편하다. 이 불편함을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세상이 점점 정글로 변해가고 있음에도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도 낙원에 대한 꿈이 잊혀지질 않고 있는 것이다.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노는 그런 세상,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입지 않는 그런 세상. 어쨌든 사랑의 리퀘스트 프로그램을 보다가 마음이 불편해서 채널을 돌리는 그런 자기 방어적 불편함과 닮았다. 우리가 떠나는 여행의 규모를 생각해 본다. 차비 얼추 12만원, 장보기 10만원 이상, 기타 추가 경비랑 하면 30만원 이상 들어간다. 나는 불휘에게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어준다. 그리고 눈짓으로 갖다 주라고 한다. 불휘는 그녀에게 가서 머뭇거리다 전달한다. 그녀가 잠시 불휘를 바라본다. 신은 우리 가운데 있다. 우리 마음이 깨끗하다면 만나게 되리라.
기차는 달린다. 참 오랜만에 타보는 기차다. 간디의 삶을 바꿔 놓았던 기차에서의 차별과 내동댕이쳐진 자존심. 투사는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투사를 만들어가는 틀이다.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은 저 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불의한 세상이 정의에 대한 열망의 인큐베이터다. 안양을 지나고 수원을 지나고 천안을 지난다. 아침을 먹는다. 집사람이 준비한 삼각김밥을 한 끼로 무려 4개를 먹어치웠다. 나는 언제나 나의 이 왕성한 식욕에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 나는 결코 엄격한 수행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쇼펜하우어처럼 나 역시 삶의 염세를 논하면서도 맛있는 음식과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안락함과 포만은 좋은 것이다. 나는 나의 한계를 안다. 무시로 나를 사로잡는 우울에도 불구하고 나는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 먹으며 잠을 잔다. 생물학적 욕구가 결핍된 자에게 프로이트와 융의 정신분석학은 사치다. 물론 아우슈비츠에서도 꿈꾸는 자는 존재했다.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혹은 731부대의 생체실험대 위에서 꿈꿀 자신이 없다.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그런 자리에서 나는 증오와 혐오만을 안고 허우적댈 것 같다. 집을 떠나면 잠이 잘 오질 않는다. 잠자리에 대한 예민함. 아직은 내 삶이 한계상황에 도달한 적이 별로 없었다. 신의 자비로.
대전을 지나고 있다. 저 어딘가에 계룡산이 있을 것이고 동학사가 있을 것이고 갑사가 있을 것이다. 대학 1학년 땐가 MT를 간 적이 있었다. 비에 졸딱 젖어서 강행한 산행 후의 갑사 어디께의 민박집에서의 그 대학시절 특유의 추억이 발효하기 시작한다. 여행이란 언제 가는가도 중요하고 어디로 가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군대를 제대하고 지금의 아내와 연애를 하면서 자주 다녔던 곳이 계룡산이다. 기차는 제 목적을 향해 쉼 없이 달리고 내 상념은 제 갈 길로 부유하고 있다. 나는 태백선을 기억한다. 내가 기억하는 구간은 제천에서 철암까지의 그 구간이다. 내 유년기를 지배하는 그런 공간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그것이 고통스런 것이든 아름다운 것이든 간에 한 사람을 빚는 질료와 같은 것이다. 우리 몸의 70% 이상이 물로 채워지듯 우리의 삶은 그렇게 추억의 질료가 지배한다.
익산을 지났다. 지난 번 지 선생님과 함께 둘이서 오붓하게 지나갔던 곳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보수 중이어서 볼 수가 없었다. 허탕을 친 셈이다. 그리고 군산엘 갔었다. 군산회집은 거대한 기업이다. 거기서는 사람이 회를 먹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이 사람들을 삼켰다가 소화시켜 내뱉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돌아간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규모의 경제를 잘 보여주는 그런 장소다. 거기서 채만식 문학 기념관도 갔었지. 채만식의 <탁류>, <태평천하> 등을 비롯한 작품들은 교과서를 비롯해서 한국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문학기행도 해볼 만한 것이리라. 남원을 지나 구례구역에 도착하니 11시 25분쯤이다. 구례터미널에서 11시 40분에 성삼재로 가는 버스를 놓치면 1시간 30분 이상 시간적 누수가 발생하고 일정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역 앞의 택시를 잡아타고 달리니 10분 만에 닿는다. 이제는 순조롭게 계획대로 가면 된다.
구례 읍내를 벗어나니 곧 화엄사가 나온다. 운전사가 길가에 차를 세우더니 부탁을 받은 것인지 강아지가 든 박스를 어떤 여자에게 전달한다. 강아지의 움직임이 세상을 환하게 한다. 모든 어린 생명들은 복 받을지언저! 세상이 그들에 의해 희망을 갖기 때문이니. 화엄사는 전에 가족과 온 적이 있는 곳이다. 사실 지리산 등산은 화엄사를 지나 올라가야 하나 사람들은 지리산 관통도로를 타고 올라가 성삼재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서너 시간의 고행을 잘라 먹는 것이다. 성삼재로 오르기 직전에 천은사 경내임으로 해서 통행세를 받는다. 1인당 1600원. 언제나 이 돈은 갈취당하는 기분이다. 법이 어쩌고 하지만 천은사를 밟아보지도 않고 문화재 관람료를 낸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다. 한국불교는 이 부분에 대해서 반성해야 한다. 대승불교가 경제적으로 신도들의 시주금 없이도 기본적 재산을 가지고 유지하게 되는 시점에서 초기불교적 탁발 정신은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서양의 기독교 역사에서 수도원을 비롯한 종교적 행적이 비슷한 면을 보이듯 지상의 안정성은 하늘나라를 성취하기 위한 가벼운 마음과는 늘 대척을 이루는 것이다.
성삼재 오르는 길은 위태로운 길이다. 해발 천고지 이상을 올라서기 위해 버스는 가파른 경사를 힘들게 오른다. 브레이크에 이상이 조금만 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저 멀리 암자 하나가 보인다. 이미 여러 차례 오른 이 길이건만 내 가족과 함께한다는 경험은 새롭기만 하다. 이 산행이 우리에게 좋은 추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다. 특히 가족의 경우에는 무엇이 그들을 가족이게 하는가라는 점에서 함께 나눈 기억은 중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회자되고 있는 <마지막 강의>라는 책의 주인공 랜디 포시처럼 우리가 시한부의 삶을 산다면 가족에게 특히 어린 자식들에게 무엇을 준비해 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것이 사랑받았던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공유하는 기억의 중요성은 그래서 강조될 수밖에 없다. 지리산행은 불휘에게 그런 것이기를 바란다. 그 아이는 앞으로 누군가와 이 자리에 다시 오게 될 때마다 부모와 함께 걸었던 이 산행을 기억할 것이고 곱씹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생을 살아갈 힘을 지닌 사람은 행복하다.
12시 20분쯤 노고단을 향해서 출발한다. 노고단은 여기서 1시간 정도 올라가는 곳으로 방송중계소나 휴게소로 차들이 다니는 도로가 있고 사람이 다니는 길이 엇갈려 있다. 포장도로처럼 잘 되어 있어 노고단까지만 가려는 사람들은 가벼운 샌들 차림으로 산책 삼아 다니는 길이다. 그러나 무거운 등짐의 무게를 지고 긴 여정을 시작하는 마음이라 그리 여유롭지는 않다.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을까. 어깨끈이 예전 배낭이라 인체공학적으로 친화적이지 못하고 내 어깨뼈의 생김새도 갑작스런 무게에 놀라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조금씩 아파온다. 하긴 먹을 것만 해도 그 무게가 보통이 아니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는다. 햄버거처럼 속을 채운 샌드위치가 야채의 물기를 머금어 퉁퉁 불었다. 옥수수랑 하나씩 먹고 나니 점심은 해결이 되었다. 물을 채우고 대피소 뒤의 언덕길로 오르기 시작한다. 재작년인가 혼자 봄에 지리산을 종주한 기억이 난다. 그때에는 남원에서 밤 7시에 택시로 성삼재에 올라와 이 대피소에서 잠만 자고 5시 전에 출발을 하고 그날 저녁을 장터목에서 먹었다.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족과 가는 길이라 무리를 할 수가 없다. 짐도 무겁고 말이지.
지리산의 길은 지리지리하다. 능선을 20여 킬로 이상 가는 길이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연하천 산장까지 들어가는 것이다. 가족과 함께라 쉬는 시간이 잦다. 아내는 연방 감탄사를 토한다. 불휘는 예상보다 잘 걷는다. 아이들이란 몸이 가볍게 마련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평상시 운동량이 어른에 비해 많기 마련이다. 불휘가 입은 옷은 기능성이 아닌 면직물이라 땀이 채면 여러 가지로 불리하다. 물론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긴 했지만 아이들이란 자꾸만 몸이 변하기에 무얼 사기도 어정쩡하다. 뱀사골 휴게소가 폐쇄된 모양이다. 안내 표지판에 나오질 않는다. 노고단에서 연하천까지가 10킬로가 넘는 길이다. 이러다가 저녁 7시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쨌든 산길이라 만만치 않은 길이다. 대피소에 연락을 해야 하겠는데 중간 중간에 휴대전화가 잘 터지지 않는 구간이 있어 연락이 되질 않는다. 6시가 넘어가니 약간 초조해진다. 다른 사람들과 자주 조우한다. 아직 방학 초기 평일이라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내가 지리산에 불휘를 데려오고 싶어한 계기는 몇 번 지리산에 올 때마다 아들을 함께 데리고 온 사람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아이가 좀 여물면 함께 지리산에 오리라. 와서 부자지간에 서로 나란히 누워 자고 밥 지어 먹으면서 시간을 공유하고 추억을 만들리라.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던 차에 내년이면 중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으니 이젠 어떨까 싶어 본인의 의사를 타진해 보았더니 선선히 가겠다는 답을 한다. 좋다. 아주 좋다. 그런데 집사람은 어떨까 싶어 가겠냐고 하니 지리산을 꼭 가고 싶단다. 좋다. 그럼 아주 판을 크게 벌이는 거다. 새별이는? 역시 거절이다. 사춘기에 들어섰는지 다루기가 쉽지 않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 첫날은 원래 힘든 법이다. 자주 다 왔냐고 보채는 것이 지친 모습이다. 나도 상당히 힘이 든다. 산에서의 1킬로는 평지를 걷는 것에 비해 몇 배로 힘이 든다. 마지막 능선을 하나 올라채니 휴대전화가 터진다. 대피소에 가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연락을 했다. 7시를 조금 넘겨 대피소에 도착했다. 아, 무사히 하루의 여정이 끝났다.
큰 그릇에 포장밥을 넣고 물을 끓였다. 고시히까린가 하는 제품인데 먹어보니 값이 싸지는 않지만 밥이 맛이 있었다. 해장국, 미역국, 북어국 등을 준비했는데 짜장, 카레 등과 함께 준비한 반찬이랑 먹으니 진수성찬이다. 전에 혼자 궁상스레 지리산을 종주할 때 라면에 햇반 몇 개만 가져와서 질리도록 먹은 기억에 비하면 분명 호화로운 식단이다. 사람은 경험이 늘수록 준비에 요령이 생기는 모양이다. 예약을 한 덕분에 편안한 잠자리를 배정 받았다. 지리산에 와서 이렇게 편안한 상태로 잠을 자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비박을 하려는 사람들과 관리공단 사람들 간의 언쟁이 좀 오가더니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안에 여유 공간이 있어서 들어가 자라는 입장과 이왕 준비한 비박이니 그냥 자겠다는 입장이었다. 올해부터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연하천산장을 관리하게 되었단다. 어깨가 배낭끈에 눌린 곳에서부터 뻐근하게 느껴지는 와중에 잠을 잔다. 자기 전에 페트병에 든 소주를 한 병 마셨더니 몸이 덥다. 온 가족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잤다.
아침을 역시 같은 요령으로 해 먹고 출발이다. 오늘 일정은 벽소령대피소를 지나 세석대피소를 지나 장터목대피소까지 가는 것이다. 어제보다는 시간상의 여유가 있다. 그래서 천천히 가기로 한다. 지리산에 야생화가 지천이다. 나리꽃과 원추리꽃을 비롯한 갖가지 꽃들의 이름을 나는 잘 모른다. 다만 꽃을 무대로 나는 잠자리들이 아득하게 펼쳐진 산의 능선 사이로 군무를 보이며 날아들고 날아간다. 걱정했던 것보다 날이 좋다. 등산하기에는 좋은 날이다. 구름이 적당히 가려주어 햇살에 덜 노출되고 땀도 덜 난다. 점심은 세석대피소에서 먹었다. 1시가 좀 넘었을 것이다. 라면을 끓였는데 3개라서 라면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지만 오이에 사과에 옥수수에 아직도 먹을 것이 많다. 오다 보니 연세가 많이 든 어른이 홀로 길을 잘도 가고 계셨다. 나이 들어서도 저렇게 산행을 할 수 있을 체력을 유지한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길을 가면 여기저기 나를 깨우치는 스승을 만나게 마련이다.
저녁 6시를 전후해서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다. 그런데 구름이 짙게 깔리고 조마조마하게 빗방울을 조금씩 흩날리더니 마침내 장터목대피소 취사장에 들어서자마자 비가 질펀하게 쏟아지기 시작한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금만 어긋났더라면 정말 큰 낭패를 볼 뻔했다. 옷이 젖거나 신발이 젖으면 산행은 정말 고난의 행군이 된다. 비를 맞은 사람들이 자꾸 도착한다. 저녁을 먹고 자리 배정을 받아 일찍 자기로 했다. 이곳은 남녀 숙소를 구분하고 있어서 아내는 따로 들어가고 불휘와 나는 담요를 깔고 잠을 청하지만 사람들이 많고 수런거려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저 건너편에 교사 일행인 듯한 사람들이 내일 비가 오면 백무동쪽으로 하산하겠다는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나도 이 가족을 이끌고 위험을 무릅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안전이 제일이니까. 옆에 누운 사람에게 내일 일기예보를 들었냐고 하니 비가 온다고 했단다. 어쨌든 잠을 자기로 한다. 지리산 천황봉의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이번에도 일출 제대로 보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에 집사람이 천황봉에 가지 않느냐고 물어온다. 다른 사람들은 출발한 사람이 많단다. 4시가 좀 지난 시간인 듯한데 비가 오지 않느냐고 하니 비는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을 생략하기로 하고 헤드랜턴도 하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위태로워 보이더니 차츰 하늘이 훤해져 걷는 데 지장이 없었다. 한 시간 정도를 가서 천황봉에 올랐다. 집사람의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에 보람이 있었다. 해는 이미 어느 정도 올라와 있었고 생각보다 날씨가 맑은 편이었다. 산에서의 날씨란 예측하기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특히 지리산과 같은 큰 산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천황봉에서 사진을 찍고 로타리대피소 즉 법계사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거기에서 점심을 먹을 셈이다. 1900미터 이상의 고지에서 곧바로 고도가 떨어지는 벼랑길이었다. 내려가는 길에 집사람의 다리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산행에서 내려가는 길이 더 위험하고 힘들 수가 있다. 근육에 문제가 생겨 시간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불휘를 보는 사람들마다 전에 내가 그랬듯이 한 마디씩 치사를 하고 간다. 아마 이번 산행에서 불휘는 몇 년 동안 받을 만한 칭찬의 말을 단기간에 몰아서 받았을 것이고 나름대로 자극도 되었으리라 믿는다.
아침 겸 점심은 로타리대피소에서 먹었다. 미역국이 참 좋았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여행용 휴지를 샀는데 값이 무려 1000원이었다. 주유소에서 주는 그것을 처리하기도 곤란할 만큼 가지고 와서 쓰다가 막상 돈을 주고 사려니 아까운 생각이 든다. 식사 후에 내려오는 길은 시간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불휘는 조바심이 나는지 혼자 저만치 갔다가는 한참 기다리곤 했는데 좀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집사람은 다리를 구부리지 못하고 뻗정다리로 걸어가느라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했다. 안하던 산행을 너무 무리하게 강행한 대가인 것 같았다. 중산리 입구로 내려온 시간은 거의 2시가 다 되었다. 마지막 식사를 중산리 입구 야영장에 딸린 취사장에서 해 먹고 입구에서 버스 타는 곳까지 걷기가 어려울 것 같아 택시를 탔다. 5000원의 지출이 있었다. 진주행 버스를 기다리면서 캔맥주 하나씩을 마셨다. 캔맥주의 참맛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발휘되는 것이리라. 진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강남행 우등고속을 탔다. 이제 집으로 간다. 3시 20분 출발이었다. 그런데 기사의 말이 서울에는 비가 많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은 이렇게 말짱하고 덥기만 한데 말이다. 우리나라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실이다. 아까 통화한 지 선생님의 말과도 일치하는 얘기다.
비몽사몽간에 버스가 대전을 지나 신탄진휴게소를 지나니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강남에 내리니 집에 갈 일이 아득하다. 우산을 하나 사서 9501번을 타고 집으로 오는데 자리가 하나고 없이 만원이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은 괴로운데 불휘와 집사람이 안쓰러웠다. 새별이는 홀로 잘 지냈을까? 올림픽대로를 지나 버스는 속도를 낸다. 드디어 불노동에 하차. 집에 들어오니 어수선하다. 설거지도 하지 않은 싱크대가 아내를 열 받게 하고 만다. 새별이도 만만치 않다. 배낭 속의 어수선한 물건들을 모두 꺼내 널브러뜨려 놓고 몸을 간단히 씻고 잠이 든다. 길 떠나는 자는 모름지기 명심할 지어다. 돌아올 곳이 없는 떠남은 무릇 방황에 불과하니 돌아올 곳이 있는 자는 행복할지어다. 나에게 몸 누일 작은 집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함께 떠나고 돌아온 가족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무사히 집을 지켜준 딸에게도 감사한다. 그리고 모든 길을 돌보아주신 하느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2. 홍도(7.30-8.1)
이번 여름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보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살만하니 다시 어디론가 가고 싶다. 돌아오면 떠나고 싶고 떠나면 다시 돌아오고 싶은 이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마음을 어이하리. 처음에는 홀로 떠나고자 했다. 흑산도 홍도가 어떠하기에 소문이 그런지 가보고 싶었다. 섬 여행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전에 울릉도를 갔던 기억도 나고 폐쇄공포증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한 눈에 들어오는 세상에 대한 열망도 있고 바다에 대한 향수도 적당히 남아있는 터라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29일 10시 이후에 출발하는 목포엘 무궁화 표를 끊었다가 낮에 지나가는 말로 ‘같이 갈까?’하고 물어본 끝에 전격적으로 같이 가기로 되었다. 새별이는 역시 이번에도 불참이다. 할 수 없다. 원하지 않는 자에게는 권하지 말라. 장을 이번에는 좀 적게 보기로 했지만 그래도 적은 것은 아니다. 5끼 이상은 먹기로 했으니. 사람은 먹고 사는 것이 참 문제다. 이슬만 먹고 사는 법은 그래서 신선에게만 허락된 것일까. 아니면 광합성을 하는 인간이었다면? 늘 벌거벗고 살아야 하기에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리라. 이번에는 차를 가져가기로 했다. 기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싸기는 하지만 이 또한 대중이 원하는 대로 해야겠지. 새벽 1시 30분쯤에 일어나 정신없는 상태로 차를 운전해 간다. 목포 여객터미널을 네비게이션으로 찍고 출발하니 2시가 얼추 넘는다. ‘아싸, 달려!’라고 추임새를 넣고 주위를 둘러보니 고요하다. 아직도 잠이 부족한 아내와 불휘가 연속극을 만들며 깨다가 졸다가 한다.
서해안 고속도로는 길이 좋다. 그리고 제한속도가 110킬로다. 그러면 120아래에서 융통성이 있다. 길은 참 끝나지 않을 듯이 길게 이어져 있다. 이 좁은 섬같은 땅에서도 400여 킬로미터는 이렇게 지루한데 미국과 같은 큰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자동차 여행이라는 것은 참 어마어마한 이야기일 것이다. 비행기가 가장 각광받는 교통수단이 된 것도 그러한 이유이겠지만 속도와 여유는 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자동차로 갈 것이라면 나는 국도를 택하겠다. 느리지만 풍광이 들어오며 볼일이 있으면 언제든 세울 수 있는 그런 국도가 나는 좋다. 여행에도 조바심이 따라 붙는다. 천천히 걷는 그런 여행을 나는 좋아한다.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언젠가 나도 그 길 위에 서서 800여 킬로를 걸어보고 싶다. 신께서 이 이야길 귀 기울여 들으시기를. 아내의 알바가 3개월 만에 결국 다소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것을 깨어먹기로 했다. 그래봐야 적자겠지만. 이젠 마이너스통장의 잔고를 비워가는 중이다. 하느님의 몫은 있어야 한다. 어머니의 몫도 떼어 두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과 휴식을 위한 비용도 생존의 몫과 함께 떼어두자.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몫은 하느님께. 이 원칙을 잊지 말라.
평택 지나 서해대교를 지나 당진을 지나 홍성을 지나 군산을 지나 부안을 지나 선운사를 지나 더 남하한다. 무안을 지나 목포에 다다르니 박의용 선생의 고향인 압해도를 육지로 연결하는 압해대교를 지나간다. 다리가 생겨서 좋아졌을 그의 고향을 생각한다. 섬에서 등용문을 오른 셈일까. 그는 그 집안의 희망이었겠지.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우리 모두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그랬듯이. 모두에게 삶이 좀더 너그러워지기를 바란다. 목포 시내로 경유해 들어가니 예전에 작은아버님이 목포에 사실 때 기억이 난다. 숙모님의 고향이 바로 여기다. 유달산으로 가는 이정표가 눈에 반갑게 들어온다. 추억이 준동하는 시간이다.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우리의 삶이 하루하루 더 나은 것으로 변해가고 있기는 한 것인가. 목포항 여객터미널 주위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차를 댈 곳이 없어 시에서 운영하는 곳을 헤매다가 마침내 어렵사리 자리 하나를 확보하고 차를 세웠다. 2박 3일 동안 차는 여기서 우리를 기다려야 하리라. 짐을 꺼내서 매고 끌고 터미널로 향한다. 우리나라의 배삯은 결코 싸지가 않다. 어찌보면 비행기삯이 상대적으로 더 싼 편이다.
절에 가서 입장료를 끊을 때마다 신도증을 발급받고 싶은 유혹을 느끼듯 여기에 와서 배삯을 보니 주민등록을 홍도로 잠시 옮기고 싶은 생각이 든다. 도서민은 5000원인데 홍도까지의 운임이 3만원이 넘는다. 1인 왕복 6만원 잡고 둘이면 12만원 불휘는 반값으로 쳐도 15만원이 훌쩍 넘는다. 와우! 장난이 아니다. 거기에 기름값, 통행료 하면 15만원 이상. 식사비 부대비용하면 또 30만원에 가깝게 추가된다. 총 60만원에서 70만원을 왔다갔다 한다. 올해 나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하지만 이왕 마음먹은 일이니 뒤로 물러서지 않으련다. 사람이 합리적인 계산만으로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남해해운과 동양해운 소속의 쾌속선이 번갈아가면서 흑산도와 홍도 노선을 뛰는데 하루에 네번 왕복을 한다. 성수기인 여름철 이야기지만. 정원이 350여 명 정도인 배로 시속 60킬로에 육박하는 속도로 달린다고 한다. 바다에서 이 정도 속도면 정말 무지하게 빠른 것이란다. 집사람과 불휘는 멀미약을 먹고 나는 그냥 가기로 한다. 몸 상태에 따라 멀미를 하는 정도가 다른데 지금은 괜찮은 편이다.
우리가 탄 배는 흑산도에 들리지 않고 바로 홍도로 직행하는 배다. 말로만 듣던 홍도가 어떤 모습인지 점점 궁금해진다. 신안군의 섬들을 헤치고 큰 바다로 나서니 파도가 다소 있다. 1.5미터라는데 뱃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지만 우리에겐 배의 울렁임이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우우 소리를 낸다. 웃음이 난다. 2시간 30분을 달려 10시 30분쯤 되었을 때 안내방송에서 홍도에 다왔다는 소식을 전한다. 선착장에 내리니 사람들이 마중하듯 나와 민박 호객을 한다. 한 할머니가 민박을 안내하기에 얼마냐고 묻자 5만원이란다. 그 정도 어디가나 주어야 하겠기에 군말 없이 따라나선다. 고개를 넘어 마을이 이어졌는데 여기가 홍도1구 마을이란다. 홍도2구 마을은 배를 타고 가야 한단다. 얕은 고개를 넘으니 거기에 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홍도는 두개의 섬을 갖다 붙인 모양새를 하고 있는데 마을이 형성된 곳이 바로 그 이어진 목부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정상으로 마을이 고개를 넘어 골목으로 이어진 형상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다. 산을 넘어 다니지 못하게 보호구역으로 통제를 하기 때문에 홍도의 면모를 보려면 유람선을 타는 수밖에 없다.
할머니를 따라 민박집에 짐을 풀고 점심은 사먹기로 했다. 선착장 부근 횟집으로 내려와 바닷가쪽 횟집에 앉아 농어를 시키니 6만원이란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돈도 자꾸 쓰다보니 이젠 이골이 나는 것 같다. 불휘도 예전에 율포에 놀러가 회를 먹어본 후에는 바닷가에만 가면 회를 먹고 싶어 한다. 나도 먹는 것에는 애착이 강한 사람이라 사양하지 않기로 한다. 회가 썰린 폼이 관광지답게 얕은맛이 있다. 즉 넉넉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다만 같이 덧달려나온 해삼은 참 꼬들꼬들한 것이 싱싱해 보인다. 식사 후에는 유람선을 탔다. 2시간 30분에 걸쳐 홍도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보는 일정이다. 갖가지 바위와 동굴과 식생을 설명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또 한 귀로 흘리면서 나는 파도가 잔잔한 바다가 주는 그 시원함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우리 삶에 자유가 있는가 여흥에 철학이 있는가 여행에 깊은 운치가 있는가 정신없이 몰려다니고 시간과 돈과 체력을 소모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가는 여행에는 자기 성장의 과정은 없을 터이다. 더불어 생각하거니와 삶은 참으로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그의 명상록에서 말하기를 황제인 그의 부귀영화도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순간이 올 것이라고 했지만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저기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그리고 벼랑 끝에 위태롭게 하늘대며 피어있는 나리꽃의 진노랑 빛이 바람에 흔들리며 망막에 어른거린다. 홍도는 관광으로 먹고 사는 세대들이 대부분인 듯하다. 발전소도 있고 식수원도 개발되어 예전보다 살기 좋아졌다고 한다. 이들의 소득은 도시의 웬만한 사람들보다 높을 것 같다. 자식들도 다 뭍에서 공부를 시킬 것이고 앉아서도 끊임없이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해 많은 기회를 지니고 사는 것이다. 횟집을 하고 물질을 해서 팔고 민박을 하고 유람선을 띄우고 가게를 하고 등등 모든 것이 들고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기회를 발견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빈약한 주머니 때문에 자꾸만 우체국에 들러 마이너스통장의 잔고를 점점 높여가야만 했다. 여행은 무섭게 돈이 든다. 특히 한국적인 섬여행은 말이다. 저녁이 되어서도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더위를 느끼지 못하겠다. 여기서도 생맥주를 판다. 낮에 선착장 부근에 있던 좌판들이 밤이 되면서 모두 반대편 선착장으로 넘어와 야시장을 형성한다. 여름 석달만 지금의 선착장을 사용하고 나머지 기간은 반대편 선착장을 사용하는 이유가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이란다. 나는 불휘와 불이 훤하게 밝혀진 밤의 야시장을 왔다갔다하면서도 빈약한 주머니를 생각하고 지나치게 욕망을 풀어놓는 데 대한 내적 저항감으로 인해 결국 그날은 더 이상 돈을 쓰지 않기로 했다.
다음날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아침을 해 먹고 흑산도로 나오기로 했다. 전날 유람선을 타면서 멀리 보이는 섬이 흑산도라고 하길래 눈여겨보기도 했지만 30여 분 거리에 떨어진 그곳은 또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진다. 흑산도에 도착하면서 보니 농협 하나로 마트와 수협은 물론이고 갖가지 시설들이 홍도와는 상대가 되지 않게 큰 섬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선착장에 내려서 누군가 소개해준 대로 남도민박을 찾아 짐을 풀고 보니 흑산도에는 성당이 있어서 성당교우임을 알리는 표찰이 많이 붙어 있었다. 우리가 묵은 집에도 흑산도 성당의 교우임을 알리는 표시가 있었다. 점심은 간단히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이번에는 4개를 끓여서 충분히 먹었고 설거지도 제대로 할 수가 있었다. 섬에 와서 바다에 제대로 들어가보지 못한 터라 해수욕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5000원을 주니 뭐라뭐라 하는 해수욕장에 내려놓는다. 사실 말이 해수욕장이지 몸 씻을 샤워시설도 없는 그런 곳이다. 조수가 들어오면 물이 좀 넓게 퍼지고 물이 나가면 백사장이 드러나는 그런 곳이다. 그래도 아이들이 놀기에는 제법 안전한 곳이다. 우리 세 식구는 나름대로 짠물을 먹어가며 수영도 하고 다시마도 잡고 그렇게 한참을 즐겁게 놀았다. 돌아오는 길은 걸어서 오기로 했다. 사실 나 혼자 왔다면 나는 흑산도를 도보로 한 바퀴 돌아보았을 것이다. 흑산도에서 4륜구동 택시로 섬일주를 하는 비용이 6만원이었다.
이리저리 헤매면서 걸어서 오다보니 농협에서 운영하는 하나로마트가 있는데 이곳의 물가는 목포 시내의 물가와 차이가 없었다. 목이 긴 캔맥주 하나를 시원하게 마셨다. 맥주는 이런 더위에 먹어야 제맛이다. 나는 나의 혀와 위장을 결코 소홀하게 대하고 싶지 않다. 저녁 식사는 사먹기로 했다. 홍어회를 작은 걸로 하고 된장찌개를 2인분을 시켰다. 소주는 내가 준비한 휴대용을 양해를 구하고 먹었다. 저녁을 먹고 마을 뒤로 걸어가니 다시 바다가 나온다. 섬이란 이렇게 구비구비 속살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미역이 바위에 매달려 있기에 웬일이니 싶어 부지런히 따서 먹어도 보고 모으기도 했다. 먹다보니 깨끗하지 않은 것 같아 찝찝했지만 어떠랴 싶다. 다시마 미역을 민박집 앞 건조용 수레에 널어놓고 해삼 한 접시를 또 시켜서 소주 한 병을 먹었다. 올 여름 내 위장은 원없이 먹고 싶은 것을 먹었으니 당분간은 조용히 자중할지어다. 흑산도는 특산물이 그래서 그런지 온 섬이 홍어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마지막 날 이제는 흑산도에서 나가야 한다. 그러나 배가 오려면 11시40분쯤 되어야 하니 그 동안 시간이 꽤 많다. 그래서 흑산도에서는 한 눈에 섬을 보기가 어려우니 택시 관광이나 큰맘 먹고 하리라 생각하고 택시를 잡았다. 택시 관광에 걸리는 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 비포장 도로가 아직 남아 있어서 일반 승용차는 어렵단다. 구비구비 돌아 올라가는 도로를 올라서니 전망대가 서 있다. 이미자 씨의 노래비가 서 있다. 그 유명한 ‘흑산도 아가씨’다. 여기 흑산도에서 섬마을 선생님이라는 드라마도 찍었다지. 흑산도 뒤편의 마을들은 포구마다 저마다의 속살을 품고 아늑하니 자리잡고 있었는데 바다가 주는 넉넉한 품이 느껴졌다. 해수욕장으로 좋은 곳이 별로 보이질 않아 보길도나 다른 섬과는 비교가 된다. 흑산도는 바다를 생업으로 하는 땅이지 관광지로서만 의미가 있는 땅은 아닌 것 같다. 그 점이 홍도와는 다른 점이겠다. 전복을 많이 양식하는데 다시마는 그 전복의 먹이로 주기 위해 기른다는 것이다. 택시기사의 입담은 걸쭉했는데 다소 인위적인 맛이 있어서 부담스럽기도 했다. 어쨌든 택시로 한 바퀴 흑산도를 돌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착장에 내렸다. 우리에게 다시 한 장소에 또 가게 될 기회가 짧은 생에서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가족과 함께 왔으니 돈을 좀 써도 보람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추억의 대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집사람은 선착장에서 미역을 팔러 나온 웬 할머니하고 말판이 벌어졌다. 다시마를 사고 미역을 사고 아내도 여흥을 즐기는 것 같았다. 배를 타고 목포에 나오니 시간이 얼추 3시에 가깝다. 점심을 사먹고 차를 빼서 고속도로에 올렸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끝점에서 끝점까지 달리는 시간의 흐름은 곧다. 졸음이 와서 휴게소마다 세워가면서도 꾸준히 올라왔다. 금요일이다. 내일은 미사해설이다. 해설단에 계속 있어야 할지 갈등이 생긴다. 흑산도는 흑산답게 생겼고 홍도는 홍도답게 생겼다. 이것이 이번 섬여행의 결론이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것이 참 중요하다.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것 역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다. 올 여름은 이제 은인자중하면서 조용히 지내야 한다. 한 백만 원이나 까먹었으니 말이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내게 돈이 많았으면 싶다. 그리고 시간이 많았으면 싶다. 그리고 건강했으면 싶다. 그러나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는 시간은 2008년의 8월 6일 수요일 오후 4시 6분경이다. 이 글을 쓰는 데 오늘 5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상 끝.
첫댓글 선생님.. 잘 읽고 갑니다. ^^ 글을 읽는 동안 많은 부분 공감했고, 이런 저런 상념에 잠기다 가요. 아- 저도 떠나고 싶네요. 산으로 바다로 섬으로, 어디로든 떠나고 싶네요. 막바지 무더위에 건강 유의하세요..♡
곰돌아 더위 먹지 말고 잘 지내렴. 빨리 결혼해라. 그러면 나처럼 가족여행이라는 형식으로 어디든 가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