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느님 아버지.
인혁당사건에 관한 동영상(아래 클릭)
http://tvpot.daum.net/v/39018276
인혁당 사형 참관 목사 박정일의 증언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1248.html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주위를 둘러본 그가 물었다.
법무관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형을 집행한다는 판결문을 읽고 유언을 물었다.
“난 억울해. 하지만 언젠간 모든 일이 밝혀질 거요.”
사형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행관은 사형수의 머리에 검은 복면을 씌웠다. 목에 밧줄도 감았다.
잠시 뒤 버튼을 누르자 사형수 발밑의 송판이 열렸다.
군의관이 다가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주검을 치웠다.
“한 사람당 30분씩 걸렸다”고 박 목사는 회고했다.
"그날따라 구치소가 너무 고요하고 이상했어요. 나중에 배식을 온 '소지'가 귀띔을 해줬어. 새벽부터 줄줄이 인혁당 사건 사형수들이 사형당했다고. 기가 막혔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감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어. 그런 줄도 모르고…."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20914030008492
"1년간 얼굴 한번 못 본채 사형… 그 재판이 정당했는지 묻고 싶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20912023508512&RIGHT_COMM=R12
송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38년 전 5월에 머물러 있다. 연행되면서도 아버지는 "잠시 갔다 올게, 걱정말라"며 중학생이던 막내 아들을 안심시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1년 뒤인 1975년 4월 10일, 아버지는 유골이 되어 돌아왔다. "국민들한테만 '사형선고'라고 발표한 거고 재판 뒤에 집으로 보낸다더라"는 주위의 헛된 말에 선고가 있었던 전날엔 새벽부터 밤까지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아버지를 기다린 그였다.
[인터뷰] 인혁당 사형 이수병씨 부인 이정숙씨
http://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1407.html
남편 주검 고문 흔적 역력
손톱·발톱은 찾아 볼 수도 없었고
발뒤꿈치는 시커멓게 움푹 들어가
“ 당국이 화장해 재로 만들어버린
다른 피해자들 생각하면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구속 뒤부터 남편 얼굴 못 봐
교도관 도움으로 먼발치서 잠시
두 돌 안 된 딸 들어 보이고
말 한마디 못했다 교도관 다칠까봐
“그렇게 빨리 죽일 줄 알았으면
무슨 말이라도 했을 텐데…”
사형은 새벽에 집행됐지만, 시신은 오후 6시가 지나서야 넘겨받았다. 죽은 이의 몸뚱이에는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다.
“등이 다 시커멓게 타 있었어요. 손톱 10개, 발톱 10개는 모두 빠져 있었고, 발뒤꿈치는 시커멓게 움푹 들어가 있었어요.”
그날을 회고하던 아내 이씨는
“당국이 시신을 화장해 재로 만들어버린 다른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했다”며 치를 떨었다.
박정희가 내 남편 죽였고
박근혜는 우리 자식들 죽이려 하는 것 같아…
자기 아버지 때문에 이만큼 됐지만
자기 아버지 때문에 결코 대통령 될 수 없을 것”
박정희정권의 유신치하인 1975년 당시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에서는 국가공권력을 행사한 폭력인 고문에 의해 간첩사건을 조작하는 것이 직무처럼 자행되었고 박정희정권 몰락 이후 그 정권을 그대로 이어받은 전두환 정권하에서도 그대로 계속되었는데(별첨 ‘고문과 조작’ 그리고 ‘인혁당사건 판결문’ 파일 참조) 그 상징이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이었다.
‘고문기술자’ 들이 자행한 고문에 의해 수많은 간첩사건이 조작되었고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불구자가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75.년의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박정희정권치하의 당시 중앙정보부가 고문으로 조작한 간첩사건이었는데 1975. 4. 8. 대법원은 하급심인 군사재판이 유죄로 판결한 그 사건에 대한 상고를 기각하여 확정시켜버렸고, 박정희정권은 대법원이 기각시킨 바로 다음 날인 1975. 4. 9. 새벽 4시30분 교수형으로 그 사건 피고인 8명의 생명을 박탈해버렸다.
이후 2007년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재심이 개시되어 무죄판결이 선고됨으로써 사형이 집행된 8인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폭력행사인 고문에 의해 조작된 ‘가짜간첩’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억울하게 생명을 박탈당한 ‘사법피해자’라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라면값으로 받은 돈을 공작금으로 둔갑시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32140595&code=940202
중앙정보부가 고문으로 조작한 간첩사건이었던 인혁당사건에 대한 상고를 대법원이 기각한 일자는 1975. 4. 8. 이었는데, 육군 제1교도소장이 당시 군종목사 박종일 대위에게 인혁당사건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을 알린 일시는 1975. 4. 8. 오후 5시경이었고, 사형이 집행된 것은 1975. 4. 9. 새벽 4시30분이었다는 점에서,
박정희정권은 사형을 집행한다는 계획을 사전에 미리 세워놓고 당시 유신정권의 앞잡이 역할을 하던 대법원으로 하여금 상고를 기각시키게 압력을 넣어 대법원이 1975. 4. 8. 상고를 기각시키자 그 즉시( 1975. 4. 9. 새벽 4시30분) 사형을 집행하여 8명의 생명을 박탈해버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인혁당사건 관련인 8명의 억울한 생명은 그렇게 박탈되었고 그래서 이를 ‘사법살인’이라 부르고 사형이 집행된 날인 1975. 4. 9. 을 ‘사법 암흑의 날’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에 의하여 위와 같은 수법의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어진 사법피해자들이 사형이 집행되어질 당시에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역할을 했었는데, 2007년 인혁당재건위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선고되어지고, 최근 이것이 정치적 문제로 떠오르자 박근혜는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여러 증언들을 하고 계시다. 그런 것까지 감안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함으로써 마치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어진 사법피해자8명이 사형 집행당한 것이 역사적으로 정당한 것처럼 했다가 국민들로부터 큰 분노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박근혜는 “인혁당사건의 가족들에게 사과를 할 용의가 있다”는 태도이고 야당은 “박근혜는 역사관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551444.html
아래인용한 것은 당시의 대법관들이 대법원판결이라는 이름을 걸어놓고 저지른 ‘헌법파괴적인 범죄행위’의 결과물인 허위내용의 판결문(허위공문서)이다.
첫댓글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주위를 둘러본 그가 물었다.
법무관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형을 집행한다는 판결문을 읽고 유언을 물었다.
“난 억울해. 하지만 언젠간 모든 일이 밝혀질 거요.”
사형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행관은 사형수의 머리에 검은 복면을 씌웠다. 목에 밧줄도 감았다.
잠시 뒤 버튼을 누르자 사형수 발밑의 송판이 열렸다.
군의관이 다가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주검을 치웠다.
“한 사람당 30분씩 걸렸다”고 박 목사는 회고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느님 아버지.
라는 피해자 가족의 절규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참상을 막는 길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설치이다.
인간 쓰레기가 아닌 폐기물들이 이 나라를 혼돈의 그물에 계속 가두려 하는 거지요.
특히 최고의 희망이라는 사법부의 지랄 발광은 언제 제 모습을 찾으련지...
이번 대선에서,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자들을 반드시 제거해야 합니다.
“라면값으로 받은 돈을 공작금으로 둔갑시켜”
이 놈들은 일제의 앞잡이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약탈하든 놈들의 후예인데,
일제가 조선인을 개,돼지처럼 봤듯이 이 새끼들도 국민을 개,돼지 취급합니다.
버러지보다 못한 이것들을 밟아 문데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