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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7째>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빚) 지은 자를 포기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빚)을 포기하여 주시옵고
<눅11: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빚: 옵헤일레마 (빚지다)
*죄: 하마르티아 (과녁에서 벗어나다)
본문에서의 죄로 번역한 단어는 원문에서는 빚(옵헤일에마)라는 단어로 썼다. 그러나 병행 구절이 눅11:4~에서는 같은 내용인데, 죄의 원 뜻인 하마르티아로 썼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 빚을 져서 탕감 받는 문제를 제시하는 면제년이나 희년은 곧 죄의 사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도 빚이란 죄의 빚, 즉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삶을 말함이지 단지 윤리 도덕적인 세상에 국한된 요소들이 아닌 것이다.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 그런 자가 일반 사회 규범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짓을 저지른 적이 있을까? 전혀 없었을 지라도 그가 죄인인 것은 하나님의 의사성에서 벗어난 자이기 때문이다. 매 시대마다 석가모니의 제자나 공자의 제자들 중에는 모기 한 마리나 개미 한 마리도 안 죽이며 올곧게 살아가는 자들이 부지기수이나, 그들이 죄인이 아닌가?
당연히 죄인들이다. 그래서 죄의 삯을 따라 사망을 당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란 영적인 죄,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끊어진 상태를 말함이지 사람들의 윤리 도덕적 차원이 아니다. 혈과 육의 일이 아니라, 죽음 저 너머의 일들이요, 하늘의 일들에 대한 말이다. 그렇다고 윤리도덕을 어기면 되느냐? 미안 하지만 윤리도덕은 당연지사고 그 이상의 차원을 논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빚쟁이의 대표들은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이다. 구약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로 표현되었다. 창기와 세리가 되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생활의 터전인 문전옥답도 계속되는 극심한 가뭄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부자는 아닐지라도 쪼들리는 생활 또한 아니었지만 논바닥이 쩍쩍 갈라지는 가뭄으로 인해 한 해, 두 해 소득이 없다보니 점차 큰 빚을 지게 되고 급기야는 헐값에 전답을 팔아넘기고, 다음에는 가옥도 팔아 셋방 신세로 내려앉았다.
우선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겨워서 귀하고 소중한 눈 안의 자식들이지만, 품안에 끌어안고 있기에는 땟거리가 없으니 굶지나 말고 연명하라고 종으로 팔고, 급기야는 자신도 아내도 그렇게 남의 종으로 뿔뿔이 팔려나가게 되어 버린다. 가정은 해체되어 흩어졌다. 아이들의 행적도 묘연해지고 아내와 남편도 갈라서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이것이 거의 오랜 한발에서 비롯된 일이다. 소수의 부요 층이 아니면 대다수 백성들은 지난 수년의 가뭄으로 이렇게 종이나 과부, 고아, 노숙자(나그네)가 되었다.
이들을 그냥 방치하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 하지 않는가? 이를 아시는 하나님은 면제년과 희년을 제정하셔서 칠년 마다 빚을 탕감해 주도록 율법으로 정하셨다. 그리고 오십년마다에는 완전한 빚을 탕감해 주는 ‘기쁨의 해’로서, 희년을 두셨다. 우주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이 왜 사전에 가뭄을 조율하지 않으시고 멀쩡한 사람을 빚쟁이로 만드시고, 다시 탕감 받게 하시는가? 왜 병 주고 약 주시나?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평안과 일락 속에서는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다. 고여 있는 물은 썩게 마련이고, 안일함은 영혼을 잠들게 한다. 비만으로 신선한 피가 돌지 않는 곳에 바람을 일으켜 산소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가뭄이 들고 가난해져서 빚쟁이가 되어 고아나 종으로 팔려나가는 모든 것이 영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시청각 교보재다. 가정이 파괴되고 사람의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는 바닥 인생의 대명사인 창기와 세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욕되고 추한 삶이냐를 교훈하시고자 함이다.
영적인 것도 똑같은 이치이다. 영적인 가난과 결핍도 기근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기근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을 말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는 생수가 넘쳐흐르는 샘이어야한다. 그들의 배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가 가득차 있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무한 공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자를 생명나무라 한다.
<암8:11b>~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타락되어 주님의 영과 생명을 가진 복음의 제사장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교계에는 마귀가 뿌린 가라지의 무성함으로 영계가 온통 흐려져 있다. 진리와 비진리가 섞여진 바벨의 혼잡한 방언이 큰 무리를 이루어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들 하지만, 성경은 이들을 일컬어 큰 성 바벨론이요 음녀교회라 하고, 여기서 종교적 교권을 가지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을 짐승이라 한다.
짐승이라 함은 뱀을 말한다.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자가 뱀이다. 가장 요사스러운 꾀를 가져야 머리가 되지 않겠는가? 교권을 휘두르는 자들은 그 정신과 사상이 뱀이 준 선악과를 먹은 영이라는 뜻이다. 즉 율법과 종교적 가르침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오히려 사망으로 인도하는 마귀의 일군들이다.
이들을 구약에서는 상수리나무나 무화과나무로 비유한다. 상수리나무는 단단한 것이 특징이고 무화과나무는 커다란 잎이 특징으로 율법선생의 대명사이다. 율법의 완고함과 종교적 외식을 가르치는 종교지도자들은 생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나일강의 하수물을 품어내기 때문에 처음에는 시원한 것 같아도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컬컬하고 갈증을 더욱 느끼게 한다. 마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사람이 목이 타는 갈증을 견디다 못해 바닷물을 마신다면 결국 어찌 되겠는가?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될 터이다.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영적인 퇴보를 의미한다. 하란에서 부르심을 받은 아브람의 처음 신앙생활은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시작했다(창12:6~10). 히브리어로 모레는 ‘어깨’ 혹은 ‘강함’을 의미 하는데, 단단한 상수리나무를 강조해서 중복 사용한 단어이다. 아브람은 예외 없이 말씀의 기근을 당해서 애굽으로 내려가고, 급기야는 바로에게 아내를 빼앗기는 환란을 당한다. 모두 진리의 말씀을 듣지 못한 환란에서 비롯된다.
아브람의 발자취는 모든 믿는 자들의 예표요 그림자이다. 바로는 세상 신 마귀를 말한다. 누가 가르치는 교훈인가에 따라 사람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세상 축복을 빌어주는 삯군 목사 발람의 교훈을 들으면, 모압 왕 발락의 사술에 빠져 음행의 광기에 놀아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 북조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남조 유다도 다윗과 요시야 시대만 빼고 모두 짐승들이 다스리는 암흑의 시기였다.
이스라엘 전국 곳곳이 짐승들의 천지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임 맡은 왕과 방백과 제사장들은 산당제사의 향을 피워 온 나라를 마취시켰다. 산당 제사장들의 복술은 수천 년에 걸쳐 사람들의 영혼을 말라 죽이는 소금물이요 애굽의 하수물이었던 것이다. 그 결과 말씀의 아비를 잃어 고아요, 말씀의 남편이 없어 과부고, 진정한 안식처인 교회를 상실해서 나그네로 가득찬 곳이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계가 그 복사판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은 부자라 부족함이 없다고 착각하기에 구원이 중단된 상태이다.
하나님은 아모스와 같은 선지자를 찾고 계신다.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야, 다니엘, 호세야, 학개, 말라기...등등 너무 눈에 익은 선지자들 이던가? 그러나 이 분들은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 중에서 순교자의 길을 간 소수의 진리의 증인들인 것을 알아야한다. 마치 익숙하다 해서 수가 많은 것으로 오해해서는 금물이다. 미가야 선지자는 400여명의 가짜들과 싸웠었고(왕상22:6~),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과 앗세라 종들과 혼자서 싸웠다.
바울이 다메섹 사건을 경험하기 전에는 모레 상수리나무였다. 눈에 비늘이 덮여 있었지만 자신은 밝히 본다고 자만하면서 주님을 핍박했다. 그때는 마귀의 멍에를 매고 죄의 사슬에 매여 있었다. 죄의 빚진 자였다. 그가 주님의 계시와 숨겨진 제자인 아나니아의 가르침을 받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왔다. 이제는 복음의 빚진 자요, 생명의 빚진 자가 되었다. 그는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으로 비유된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았다.
그러나 성경은 이 탕감이 미완료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먼저 가불해서 탕감해준 것이니 남은 생애를 주의 종으로서 복음의 제사장을 수행해야 그 탕감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마18장: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가 제 직무를 소홀히 했을 때에 무효가 됨, 그러므로 앞선 탕감은 조건부였음>
이와 같은 직무를 수행할 복음의 제사장은 누가 될 수 있는가? 오랜 몽학 선생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할례를 받고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 생명을 가진 자만이 가능하다. 일곱 날의 빛이 되어 완전한 진리를 알고 그 가운데서 삶을 영위 하는 자이다. 이런 자를 일곱째 인을 떼고 나팔을 부는 천사라 한다.
천사란 하나님이 보낸 사자다. 주의 사자의 직무는 사람들을 깨우쳐 어긋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주님은 영이시기에 반드시 사람을 입고 일하신다. 제자들에게 한 것이 곧 주께 한 것이고, 주께 한 것이 하나님께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요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10: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한 사람의 영혼은 천하보다도 크다. 이런 사람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는 중단이 없다. 먼저 당신이 쓰시기에 합당한 종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 구원 사역은 계속된다. 주의 사자들은 이런 막중한 사명을 십분 이해하고 목숨을 바쳐 구령사역을 감당해야하는 것은 복음의 빚을 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먼저 죄사함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에, 그 은혜와 기쁨과 감격을 만방에 알려야 한다.
원래 죄를 사해주는 곳이 법궤위의 속죄소라 하는데, 속죄소란 두껑(카포레트)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덮다’라는 의미를 가짐을 상기해야한다. 즉 죄를 덮어 둔 것이지 없애버린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탕감은 무효가 된다. 일만 달란트의 탕감을 받은 주의 사자들은 자신의 남은 생애를 죄의 빚진 자들을 만나,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아오게 하여 죄의 멍에를 꺾어주며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사명을 다할 때에 주님의 보혈에 대한 빚을 조금이나마 감당하는 삶이 될 것이다.
복음 사역, 이것이 사랑이다. 주님께로부터 먼저 받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받아 죄에서 놓임을 받은 자들은 일곱 째 날에 도달한 삶을 산다. 이들이 진리로 무장하는 능력의 오순절 성령을 받으면 혀가 불처럼 갈라져서 혈과 육을 태우는 말씀의 검으로 할례의 수종자들이 될 것이다. 주님이 분배되는 것이다.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살라 심판으로 다스리는 추수꾼들이다. 마지막 날에 주께서 보낸 천사들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란, 어떤 윤리 도덕적 허물의 용납을 말함이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구원 얻기로 작정된 자들이 죄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을 말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기껏해야 오십 데나리온이나 혹은 백 데나리온 빚졌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가르쳐, 네가 지은 죄 빚이 일만 달란트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옥합을 깨드려 주님 머리에 붓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다.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고전9:16~19>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시37:21>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