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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토요일 저녁 8시경,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던 정용민(33)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방금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이스라엘인 관광객 A씨. 서울에서 일하는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왔는데, 그만 호텔로 가는 길을 적어놓은 쪽지를 잃어버렸다. 난감해하는 A씨를 위해 택시기사가 BBB코리아 대표번호 1588-5644로 전화를 걸었다. 무료 휴대폰 통역봉사 서비스인 BBB코리아의 ARS 자동응답시스템이 전화를 영어 통역 봉사자 정씨의 휴대폰으로 연결해 준 것이다. 호텔 이름만 기억하던 A씨를 위해 정씨는 즉시 자신의 아이폰으로 호텔 위치를 검색해 택시기사에게 가르쳐주었고, 택시 요금이 대략 얼마 정도 나오는지도 물어봐 주었다.
2002 월드컵 때 창립한 비영리단체
이스라엘인 관광객 A씨가 낯선 외국에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휴대폰으로 무료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BBB코리아 덕분에 가능했다. BBB코리아는 17개 언어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의 비영리단체이다. 누구든지 통역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하루 24시간 아무때나 1588-5644에 전화를 걸어 무료 통역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총 봉사자 수는 2010년 4월 현재 3700여명이며, 통화 연결 성공률도 90%에 이른다.
2002 한·일 월드컵 준비가 한창이던 2001년 12월 어느 날,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던 이제훈(70) BBB코리아 회장은 이어령 당시 중앙일보 고문 외 한국관광협회 회장,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이사장, 대한항공 사장, 아시아나항공 사장, 인천공항공사 사장, 청와대 비서관 등과 함께 ‘관광과 문화를 생각하는 모임’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월드컵 기간 중 방문할 수많은 외국인을 위한 언어 통역 문제였다. 이때 이어령씨가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한국의 높은 휴대폰 보급률에 착안, 휴대폰을 이용한 통역 자원봉사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시작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2002년 4월 발족한 BBB 운동은 인류의 언어가 흩어졌다는 바벨탑 시대 이전을 꿈꾸는 사람들을 뜻하는 ‘Before Babel Brigade’의 약자이다. 지난 4월 27일 서울 한남동 사무실에서 만난 이제훈 회장은 BBB가 “‘삐삐삐-’하는 휴대폰 벨소리를 떠올릴 수도 있는 이름”이라고 말했다. 2002 월드컵 당시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원하는 언어를 선택하면 13개 국어를 구사하는 2000여명의 봉사자 중 한 명에게 연결되도록 했다. BBB는 월드컵이 열리는 두 달간 무려 2만여건의 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며 성공적으로 의무를 다했다.
언론인 출신 이제훈씨가 회장
성황리에 월드컵을 마친 후 BBB 운동을 계속 이어나가자는 주장에 따라 BBB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맡아온 이제훈씨가 초대 회장을 맡게 되었다. 이후 BBB는 문화관광부 산하로 편입됐으며 문화·관광 분야의 인사들 20여명으로 구성된 이사진과 외국어 전공 교수진을 언어별 위원장으로 영입했다. 문화관광부의 지원 외에도 업무 협약을 맺은 기업들로부터 예산 협조를 받아 ARS 자동응답시스템 소프트웨어 구축, 자원봉사자 교육, 상근직원 보수와 사무실 유지 비용 등에 충당한다. 통역 가능한 언어도 17개(유사 언어인 말레이시아어와 인도네시아어를 별개로 칠 경우)로 늘어났다. ARS 자동응답시스템이 구축된 이후로는 이용자가 대표번호 1588-5644에 전화를 걸어 언어를 선택하면 해당 언어 봉사자에게 자동 연결해 통역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BBB의 고문을 맡고 있는 이어령씨는 BBB 소식지 칼럼을 통해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첨단기술이 발전한다 해도 디지털이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아날로그적인 요소들은 분명히 있다”며, 휴대폰 강국 한국의 ‘디지털’적인 요소와 외국인들의 언어불편을 해소하는 데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놓은 정 많은 한국인들의 ‘아날로그’적 요소를 융합한 BBB운동을 ‘디지로그’ 트렌드의 구체적 사례라고 불렀다.
ARS 자동응답시스템도 발전을 거듭해왔다. 이용자들의 통화 연결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대표번호에 전화가 오면 해당 언어 봉사자 3명의 휴대폰으로 동시에 전화가 연결되며 이 중 가장 먼저 응답하는 사람과 통화하게 된다. 게다가 통화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 전화가 끊길 경우 동일 발신인이 30분 이내에 대표번호로 다시 걸면 같은 봉사자와 연결되도록 소프트웨어를 자동화해서 이용자들의 불편을 줄였다. 이 회장은 “초기 불만 사항 중 접속이 잘 안 된다거나, 전화가 끊겨서 다시 걸면 다른 사람과 연결돼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자주 접수가 되었다”며 “이메일과 웹사이트를 통해 봉사자들에게 피드백을 받으며 시스템을 개선해왔다”고 밝혔다.
교수·은퇴 외교관 등 전원 자원봉사
BBB는 24시간 가동되기 때문에 통역을 필요로 하는 긴급상황이 있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화가 걸려올 수 있다. 봉사자들이 BBB 웹사이트에 올리는 후기에는 자정에 행선지를 확인하는 택시 기사부터 새벽 1시에 지하철이 끊겨 발을 동동 구르는 외국인, 새벽 2시에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술집이 어디냐고 묻는 술 취한 외국인의 사례도 보인다. 하지만 도움만 된다면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기꺼이 자신의 휴대폰을 열어놓는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BBB운동을 가능케 하는 아날로그적인 원동력이라고 한다. BBB 측에서도 자원봉사자들의 시간을 배려하기 위해 봉사할 차례가 돌아오기 며칠 전 문자를 보내 사전 공지해준다.
100% 자원봉사로만 운영되는 시스템이야말로 BBB만의 강점이다. 이 회장은 “많은 외국인들이 BBB 서비스가 모두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듣고 감동을 받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 회장은 “BBB 규모의 자원봉사자들을 돈을 주고 고용을 한다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 것”이라며 “일부 지자체에서 통역 요원을 고용해서 배치한 경우도 있지만 이용 시간과 통역 가능한 언어에 제한이 많아 이용자들에게는 한계가 많다”고 밝혔다.
BBB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37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은 전·현직 교수와 은퇴한 외교관에서부터 교사, 학생, 주부까지 다양하다. 연 3~4회 정기적으로 신규 자원봉사자를 영입하는데, 언어별 위원장과 원어민이 응시자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를 통해 청취·회화 능력과 해당 언어가 사용되는 국가에 대한 기본적 상식과 문화적 이해 정도를 심사한다. 800여명의 응시자 중 200~300명만 뽑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춘 사람만 봉사할 수 있다. 합격자들은 오리엔테이션과 온라인 교육을 통한 봉사 준비 과정을 거친다.
지리과목 교사인 정용민씨는 2002년 월드컵 때부터 BBB에서 영어 통역봉사를 해왔다. “저도 대학 때 미국에서 2년간 어학연수도 해보고 여행도 많이 다녀봤지만 언어 문제만큼 불편한 것이 없었습니다. 주변에 영어를 못해서 외국 나가는 것 자체가 공포인 사람들도 많죠. 그런데 이렇게 간편하게 전화 한 통으로 통역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해준 것은 외국인들을 배려하는 좋은 제도인 것 같습니다.” 정씨는 “소통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단순한 언어 문제뿐 아니라 문화의 차이도 있다”며 자신의 경험을 나눴다. “영어 강사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이었습니다.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해 학원 측과 임금을 협상하는 중에 BBB에게 전화를 걸었는데요, 학원 측에서 제시한 임금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한국인들은 늘 가장 낮은 가격을 부르고 흥정하지 않느냐’며 묻더라고요. 쇼핑하는 관광객들이 전화를 걸어서 ‘이게 합리적인 가격이냐’고 묻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지자체·항공사·병원과도 연계
2003년부터 한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재중동포 안순화(45)씨도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이와 한국에서 생활하며 힘들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저를 도와주신 한국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보답하고 싶어서 중국어 통역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주여성 지원단체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는 안씨는 “특히 병원·경찰서 등에서 소통에 애를 먹는 외국인들을 도울 수 있어 보람이 있다”며 “동생도 BBB에서 자원봉사를 하라고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항공사 ‘에어프랑스’에 근무하는 프랑스어 봉사자 이태훈(47)씨도 1988년 서울올림픽 때부터 프랑스어 통역 봉사를 맡아온 베테랑이다. 2002년 BBB 출범 당시부터 자원봉사를 해온 초창기 멤버인 이씨는 “내게는 간단한 일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씨는 특히 전라도 순천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벨기에에 입양된 한국인이 생부모를 찾기 위해 순천의 경찰서를 찾았습니다. 가족과 헤어졌을 때의 상황이 기록된 문서를 찾고 싶어했는데 경찰서 직원들과 말이 통하지 않아 BBB에 전화를 걸었죠. 가족을 찾는 데 제가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BBB에는 하루 평균 130건의 전화가 걸려온다고 한다. 영어·중국어·일본어 수요가 가장 많고, 베트남어·러시아어·태국어가 뒤따른다. 기자가 접촉한 자원봉사자 중 영어를 담당하는 정용민씨가 일주일에 최소 3~4회의 전화를 받는 데 비해, 프랑스어 통역을 맡은 이태훈씨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전화를 받는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는 자원봉사자 수가 부족하지 않지만 이들이 주로 영어·중국어·일본어에 편중되어 있어 베트남어·태국어 등 희귀 언어 봉사자들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특히 국제 결혼 증가와 다문화 사회 확대로 인해 베트남어·필리핀 따갈로그어·캄보디아어·태국어 등의 동남아권 언어 통역 수요가 급증한 가운데 봉사자 영입이 시급하다고 이 회장은 밝혔다. 실제로 2009년 BBB코리아 ‘최우수 활동자’로 뽑힌 베트남어 통역 봉사자 조윤희(29)씨는 다문화가정 구성원들로부터 하루 6~7건에 달하는 전화를 받고 매번 30분 가까이 통역을 했다고 한다. 베트남 아내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통역해달라는 한국인 남편의 훈훈한 이야기도 있지만 언어장벽 때문에 오해를 사고 다툼이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이 회장은 “이제까지 희귀 언어는 대부분 전공 교수들과 학생들이 봉사를 해왔지만 앞으로는 한국어를 잘하는 주한 외국인들도 봉사자로 영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BBB는 여러 지방자치단체들 또는 기업과의 업무 협약을 맺고 있다. 외국인 관련 업무가 많은 항공사나 응급 상황에 신속히 대처해야 하는 병원 등은 BBB 통역 서비스로 큰 도움을 받는다. BBB 역시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인천공항공사 등을 통해 홍보 효과를 톡톡히 얻고 있다. 2002 월드컵 때는 아예 법무부가 공항에서 입국심사 때 BBB 카드를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관광객 등이 많이 몰리는 여러 관광안내소에도 BBB 안내 카드를 배치해놓고 있다.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안산시는 공무원들의 명함 뒤에 BBB 번호를 기재해놓고 언제라도 통역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고 이 회장은 밝혔다.
외국 나간 한국인에도 서비스
BBB는 또한 한국을 찾는 외국인 뿐 아니라 외국으로 나가는 한국인들도 이용할 수 있는 ‘아웃바운드(Outbound)’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웃바운드 서비스 이용률은 아직 전체의 10%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더 많이 알려진다면 해외 여행 중인 한국인들에게도 크게 유용할 듯하다. 현지 국제전화코드-82(한국 국가번호)-1588-5644를 누르면 추가 비용 없이 일반 국제전화비용만 부담하며 외국에서도 국내에서와 똑같이 통역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이 회장도 해외 방문 시 BBB의 도움을 늘 받는다고 했다. “중국 상하이 푸동공항에 내려서 중국인 택시기사와 단둘이 차를 타고 가는데 창밖으로 휘황찬란한 고층건물들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BBB에 국제전화를 걸어 ‘저게 어떤 건물이냐’ 택시기사에게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일본과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도 시시콜콜 BBB의 도움을 받곤 했습니다.”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발족되어 뿌리 내리고 있는 BBB 운동은 “대한민국 국가 이미지를 상승시키고 나아가 다른 나라에도 BBB 운동을 전파하여 세계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언어 장벽으로 인한 불편을 겪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고 이 회장은 밝혔다. 프랑스어 봉사자 이태훈씨는 “항공사에 근무하며 여러 나라 사람들과 각종 언어를 접해봤지만 한국어는 그중에서도 접근하기 힘든 언어”라며 “한국에 세계 유일하게 BBB 같은 인프라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중국어 봉사자 안순화씨도 “전화비만 내면 손쉽게 통역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한국은 참 좋은 나라”라고 밝혔다.
그러나 BBB와 같은 운동이 한국에서 최초로 파생될 수 있었던 데에 ‘디지로그’라는 한국 특유의 요인이 있었던 만큼 BBB 운동을 세계로 수출하는 데에는 각종 제약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 회장이 2008 베이징올림픽 조직위원회와 일본관광협회를 상대로 BBB 설명회를 가진 적이 있었지만, 상이한 휴대폰 요금제도와 저조한 지원자 수 때문에 활성화되지 못했다고 한다. 이어령씨도 “(외국에서 언어봉사 시스템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 전화를 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주 개인적인 정보인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흔쾌히 공개하겠다고 나서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BBB 소식지에 쓴 바 있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작년 방한한 셰크 시디 디아라 UN 사무차장에게 BBB를 설명하며 휴대폰을 활용한 통역에 들어가는 통신요금을 UN 차원에서 지원해줄 것을 제안했다”며 앞으로도 각종 제도적·문화적 장벽을 낮추는 노력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40년간 언론인으로 종사해온 이 회장은 “이제 여생을 내가 받은 만큼 사회에 되돌리며 살고 싶다”며 “한국 특유의 지식인 자원봉사인 BBB 운동이 한국에 더 깊이 뿌리 내리고 세계로 전파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심혜기 인턴기자·미 브라운대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