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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10장 30~37절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누가복음 10장 30~37절, 새번역>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불리는 오늘 본문은 사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말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이 땅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교사에게 고맙다고 표현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질문 덕에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하는 말씀을 듣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율법교사는 먼저 자신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율법교사의 중심을 알고 계시던 예수님은 오히려 이렇게 반문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누가복음 10장 26절, 새번역>
율법교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읽고 있느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부터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리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행동할 마음이 없으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율법교사에게 그저 율법을 읽고만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카운터 펀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율법교사는 이런 대답을 남깁니다.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 새번역>
신명기 6장 5절에 등장하는 하나님 사랑과 레위기 19장 18절에 등장하는 이웃 사랑이 바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율법교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의 대답에 맞장구를 쳐주시면서 다시금 카운터 펀치를 날리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신명기 10장 28절, 새번역>
율법교사의 대답은 예수님도 인정하실만큼 옳은 대답이었습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는대로 행할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율법교사의 '행동'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권면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답에 마치 자신은 그렇게 잘 하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자신의 이웃을 예수님께 물어보는 율법교사입니다. 율법교사라는 이가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의 범주를 모르고 있다니! 아마도 율법교사는 그저 '동반자'로서의 이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소한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은, '나'외에 모든 사람이란 것을 율법교사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이웃'이 누구인지 알려 주시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 주신 것입니다.
사실 이 비유의 제목만 들어도 유대인들은 심히 불쾌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선하다'와 '사마리아인' 둘 다 쓰고 있다는 것 자체로 기분이 나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비유하셨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그 비유로 잠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게 되었고, 큰 부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곧 죽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는데 마침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화들짝 놀라며 그 사람을 피하여 지나가게 됩니다. 정결함을 위하여 피를 멀리해야 했을까요? 그리고 레위인이 또 그 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과 마찬가지로 화들짝 놀라며 그 사람을 피하여 지나가 버렸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이 둘은 모두 율법교사와 연관이 있는 이들이었기에 율법교사는 마음이 조금씩 불편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실질적인 팁도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첫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관심'입니다.
측은한 마음을 가여운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해석해도 좋지만 가장 좋은 해석은 동감과 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지나치지 못했던 것은 언제든 자신도 비슷한 처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며, 어쩌면 이미 당해 보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에서 더 그런 마음이 듭니다. 아마 이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을 피해, 사람들을 피해 이 곳을 지나가던 중이었던지도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사라리아인들을 너무도 싫어했기에 만나면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쳐 갈 수 없었습니다.
이 부분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첫번째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감하고, 동감하고, 측은지심이 있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관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시선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외면하는 눈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관심을 가지는 시선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여러모로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피투성이였거나 심각한 부상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몰골이었을 것입니다. 어찌 쉽게 다가설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사마리안 사람은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중요한 물건인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었습니다. 빨리 지혈을 하고, 소독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멀리 서서 누군가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멀리 서서 안타까워만 한 것이 아닙니다. 관심을 바로 행동을 옳기기 위하여 가까이 다가 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이 자연스러운 존재여야 합니다. 가까이 다가와 주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어야 합니다. 그저 공감만 해주고 멀찌감치 서 있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관심이 간다면 직접 손을 내밀 줄 알아야 합니다. 관심이 생겼다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적극적으로 가까이 다가 설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자신의 시간을 내어 다음날까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우는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리고 근처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 사람을 돌보아 주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다음 날'로 바뀐 것으로 보아 위급한 상황동안 최선을 다해 간호한 것으로 보입니다. 안면부지 알지도 못하는 이를 이렇게까지 돌보아 줄 수 있다니!무엇보다 이 돌봄은 어떠한 댓가를 바라지 않은 '자비'였음이 더 대단한 것입니다. 자기도 바쁜 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귀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집으로 가던 중이던, 장사를 하러 가던 중이던 분명 바쁜 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사람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시간을 내어서 그 사람을 '다음날까지'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시간을 타인을 위해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시간을 더 쓸 줄 알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저 당장의 치료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돌보아 주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그 자비의 모습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할 일이 많이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구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넷째,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갈 길을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강도 만난 사람이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서 여관 주인에게 이틀치의 품삯을 주며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부탁했고, 다시 돌아올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혹시라도 그 여관 주인이 돈만 받고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주지 않을 수도 있기에 굳이 사마리아 사람은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이틀을 열심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 쓸 수 있다니! 이 점이 가장 놀랍습니다.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가까이 다가 설 수도 있고, 돌보아 줄 수도 있지만 지갑을 여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주머니를 열어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여러분의 지갑을 열어 누군가를 대접해 준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도와준 적이 있으십니까?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서 기꺼이 나의 돈을 사용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하여 아낌없이 나눠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스도인은 그 나눔에 아까움을 느끼지 않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보상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임할 것을 믿습니다. 주는 손이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기에 분명 순종함에 기쁨이 따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끝내면서 율법교사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누가복음 10장 36절, 새번역>
그러자 율법교사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차마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7절A,새번역>
율법교사도 분명히 어떻게 해야 자비를 베푸는 것인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그저 대답만 하고 있었기에 '행동'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한 번 더 율법교사를 권면합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누가복음 10장 37절B, 새번역>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지식과 앎만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행동할 줄 아는 존재들입니다. 율법 교사와 같이 대답은 옳지만 행동하지 않았던 모습이 있다면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우리는 '율법교사'가 가진 모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행해야 할 때입니다. 아는 것을 행할 때에야 우리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사데 교회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데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요한계시록 3장 1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슬기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우리는 선한 사마리안인에게 실질적인 이웃 사랑법을 배워야 합니다. 말로만 하고, 지식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안인처럼 행동하길 소망합니다.
공감하고 동감하며 관심을 가지길 원합니다.
내가 먼저 가까이 다가 서길 원합니다.
내 시간을 내어 돌보아 주는 자비를 베풀기 원합니다.
내 주머니를 열어 사랑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멋지게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얼굴을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기만 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떠나가서 그것이 어떠한지를 곧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 1장 23~24절, 새번역>
https://www.youtube.com/watch?v=XmM61kKlPGQ
https://www.youtube.com/watch?v=PtRPH9Fdv8A&list=PLVbVhDrpd5BfwFUzCYS-5-pZLF5BQ5gKF&index=18
https://www.youtube.com/watch?v=RTNls9UEg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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