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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리초등학교총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화구(57회)
어느 금요일 오후 나의 익산 방문기(중학교 동창생들과의 만남)
우리나라에는 각종 동창회 모임이 굉장히 활성화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고등학교동창회가 제일 활성화 되어 있고, 다음으로 초등학교동창회가 활성화 되어 있다.
그런가하면 중학교동창회는 상대적으로 활성화가 덜 되어 있고 기수별로는 모임 자체가 없는 학교가 대부분일 것이다.
익산의 경우 이리중이나 동중학교, 원광중을 나온 친구들에게 확인해본 결과 중학교를 76년도 졸업한 기수 중에는 동창회 모임을 하는 학교는 없었다. 주변에 남성중을 나온 친구는 없어서 확인을 못해 남성중은 어떤지 모르겠다.
익산 같은 중소도시나 대도시의 중학교동창회는 이렇듯 활성화가 되어있지 않은 반면 시골 중학교의 경우 중학교동창회가 웬만한 고등학교동창회 못지않게 활성화가 잘 되어있다.
예전 읍내에 고등학교가 없는 시골의 경우 다들 먹고살기 힘들고 가정형편이 어렵다 보니 중학교만 졸업하고 도시로 돈벌이 하러 나가다 보니 중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인 경우가 적지 않은 게 우리 시골의 형편이었다.
그러다보니 시골 중학교의 경우 특히 재경동문회가 굉장히 활성화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해마다 송년의 밤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있으며, 졸업 30주년이 되면 기수별로 멋지게 30주년 행사를 치르고 매년 봄이나 가을이면 시골 모교교정에서 체육대회도 성대하게 치른다.
나 같은 경우 지난연말 일출 57회 익산모임에 참석했다가 모임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인 김도중 친구로부터 이리남중학교 12회 동문모임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얘길 듣고 다음 모임에는 나도 참석하겠노라고 약속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지난 17일 금요일에는 오후 반나절 반차휴가를 내어 KTX를 타고 익산을 다녀왔다.
지난 17일 내가 다녀온 오후의 일정을 디카로 스케치하여 올려본다.
【아래 그림】나는 열차를 타기 위하여 용산역으로 달려갔다.
【아래 그림】열차통학생 출신이라 그런지 나는 아직도 열차만 보면 가슴이 설렌다.
【아래 그림】역대 최장기간의 철도파업이 정치권의 중재로 다행히 끝나 열차를 이용하여 익산을 다녀 올 수 있었다.
【아래 그림】어느덧 해는 기울어 배산 너머로 뉘엇 뉘엇 지고 있다.
【아래 그림】익산역에 도착하니 5시다. 모임은 7시라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나는 이리초등학교와 과거 남중학교가 있었던 이리농고 캠퍼스가 있는 마동으로 달려갔다.
【아래 그림】마동 모교로 가는 길에 간단히 요기를 하기 위해 옛 추억이 묻어나는 길명반점에 들렸다.
예전에 계시던 키가 크시고 뚱뚱하신 사장님은 고인이 되셨고 현재는 아드님이 길명반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말을 건네 보니 지금 사장님은 나와 60년 경자생 甲長이었다.
【아래 그림】길명반점 사장님은 당시 구시장에 있던 화교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화교 중학교를 다녔고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화교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대만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우리 사장님께서 집 가까이에 있는 이리초등학교를 우리와 같이 다녔으면 우리와 동창생일 텐데 말이다.
【아래 그림】이리초등학교 모교에 들리니 날이 벌써 어두워졌다. 예전의 모교 정문이 세월이 흐르다 보니 세상이 변하여 후문이 되었다.
【아래 그림】 “정화의 요람”은 우리 모교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우리의 모교는 교육(책)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사회적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정의를 가르치는 교육의 전당이다.
【아래 그림】우리 모교의 영원한 스승이자 수호신인 이순신 장군님께 나의 방문을 고한다.
【아래 그림】모교의 널따란 운동장과 실습지, 농고방죽, 인근의 푸른 동산 등 숲과 녹지로 둘러싸인 마동의 푸른 산둘레는 우리가 초딩시절 파란 마음, 하얀 마음으로 청운의 푸른 꿈을 꾸던 우리의 꿈동산이었다.
【아래 그림】우리 모교를 상징하는 조형물들
【아래 그림】날이 더 어둡기 전에 나는 옛 이리남중이 있던 이리농고(현, 전북대 익산캠퍼스)로 발길을 돌렸다.
【아래 그림】한하운 선생 시비 문둥이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하운 선생은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과를 졸업하고 중국북경대학교까지 유학을 다녀오신 분이다.
【아래 그림】한하운 선생(이리농림학교 시절 모습-좌측) 문둥병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가락 발가락이 썩어 잘려 나가는 거렁뱅이가 된 삶의 고통 속에서도 나환자 정착촌에 농축산을 장려하신 분이다.
【아래 그림】常綠의 숲속에서 大成의 神話를 엮으리
이리농고의 캠퍼스는 당시에도 상록의 숲으로 우거진 교정이었다.
【아래 그림】예전에 이리남중 校舍가 있던 자리에는 우리가 공부하던 목조건물은 헐리고 새로운 현대식 건물(학생관)이 들어섰다.
【아래 그림】예전에 이리농고 본관이 있던 건물 날이 어두워 사진도 희미하다.
【아래 그림】이리농림 50주년 기념비 이 비석은 1972년 5월에 세워졌으니 우리가 남중학교 재학시절(1973년도)에도 있었던 기념비다.
【아래 그림】이리농림 50주년 기념비
뒷면에 보면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구슬고개 푸른 언덕에 반세기를 거친 의연한 요람은......“
이곳 이리농림학교 자리가 예전에는 “구슬고개”라 불리었던 것 같다. 구슬고개를 한자로 표현하면 구슬 ‘주(珠)’자에 고개 ‘현(峴)’이 되어 “珠峴(주현)”아라 불리게 되어 주현동이 탄생한 것 같다.
【아래 그림】이제 모임시간이 임박하여 인화동 모임장소로 서둘러 갔다. 이리남중 12회 동창회 모임
【아래 그림】이리남중 12회 동창회 모임에 약 40여명의 친구들이 참석하는데 이날은 일정이 바쁜 친구들이 많아 30여명 밖에 참석하지 못한 것 같다.
【아래 그림】그래도 이날 모임에 전라북도 외에 전국 각지에서 친구들이 달려왔다.
나를 포함 서울에서 2명, 충청도 대전에서 4명, 강원도 동해안 묵호에서 달려온 친구도 있었다. 이정도 열정이면 이리남중12회 동창회의 미래는 매우 밝다고 할 수 있다.
【아래 그림】1976년 졸업 당시 이리남중 12회에서 이리남성고 입학시험에서 수석(박경식 친구)도 배출하였고, 동창생 중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상아탑인 서울대학에도 2명이 들어갔다.
【아래 그림】사실 나도 서울에서 익산까지 모임에 참석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직장에서 봉급이라고 받아 주머니 용돈이라도 있을 때 KTX라도 타고 익산에 내려와 그립고 보고 싶은 친구들 만나서 소주라도 한 잔 기울이며 친구들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직장에서 은퇴하고 돈벌이도 못하면 자주 참석하기는 힘들 것 같다.
【아래 그림】나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김도중 친구 나와 이리초등학교도 동창으로 김도중 친구를 통하여 중학교 모임을 알게 되었다.
학교 동창들 사이엔 잘나고 못나고, 잘살고 못사는 것 같은 세속의 잣대는 필요하지 않다.
왜냐면 동창생이란 언제나 우리 가슴 속에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창생이란 언제나 그 모습 오염되지 않고 깊은 산속 옹달샘 같이 맑은 영혼을 가진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세월과 연륜에 떠밀려서 저 마다 각자의 삶을 찾아 멀리 흩어져 살지만 세월은 흘러가는 대로 흐르게 하고 앞으로는 더 늦기 전에 자주 만나자
【아래 그림】인간사 세월의 연륜이 하늘의 뜻을 안다는 知天命(지천명)을 훌쩍 넘어 천지만물(天地萬物)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耳順(이순)을 향해 달려가는 50대 중반쯤 되면 가진 친구나 많이 배운 친구나 출세 좀 한 친구나 다 같지 않은가 싶다.
더 가지고, 더 배우고, 더 출세했다고 인생이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처세명심보감’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친구들이 부르는 데가 있거든 무조건 달려가고 보고 싶은 사람은 미루지 말고 연락을 해서 약속을 잡아 만나야 참다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면서】
끝으로 윤극영 선생님의 동요 한곡 올려놓고 물러갑니다.
♪♬ 까치 까치 설날 ♪♬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 ♪♬
♪♪곱고고운 댕기도 내가드리고 ~ 새로사온 신발도 내가신어요~ ♪♬
일출 동문 선후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57회 이화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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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친구애섰네!!!
화구 친구 익산방문기 너무도생생하게 잘보았어요.배경사진도 정감이 있고 부럽고 감사감사.이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