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릉리 서낭당
두릉리라 함은 경기대능선부터 형제봉을 따라 올라가다 천년수[옛 명칭은 쉰배미골(논이 작아 50배미를 비교한 말)]로 틀면 국방골(성죽골 뒷산)을 거쳐 버들치고개를 지나 매봉재를 넘어 남쪽으로 돌아 두리봉을 거쳐 담안 뒷산부터 심산 내령을 따라 심부원군 묘소까지 분지형태의 마을로서, 두릉리에서 보면 광교산을 주산으로 하고 경기대쪽 능선은 우백호, 매봉부터 심산은 좌청룡, 북쪽은 겨울바람을 막아 주는 광교산, 남쪽은 시아래 벌판이 확 트였으니 살기 좋은 길지가 분명 했지요
그 살기 좋은 곳에 남쪽이 너무 넓어 허전한 감을 막아 주기 위하여 전나무백이(경기대 후문)부터 산의실쪽(현 톨게이트)으로 자그마한 능선인 한 개의 두렁(논 밭 두랑)과 병목해(1통 부녀회 가게 직전)부터 황새부리까지 조그마한 또 한 개의 두렁이 있어 마을 안전을 겹으로 보호 하였으며 황새부리부터 산의실(심부원군 산소 서남쪽)까지는 하구를 이루어 마을의 모든 액을 흘려보내게 되었다 이처럼 마을 전체가 삼태기 형태 또는 두렁치마 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을 명칭이 두릉리로 불린 것은 논두렁 밭도랑 하는 두렁이 두릉으로 불리였다는 이야기와 두렁치마에서 유래 되였다는 말이 있으나 어느 것이 맞는지는 확인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살기 좋은 두릉리로 들어오는 길은 전나무백이에서 첫 번째 두렁(소방훈련장능선)의 서낭당을 거쳐야 하는 주된 길과 또 하나 버들치고개를 지나는 두릉리의 뒷문 같은 샛길로 그곳에도 서낭당이 있어 두릉리 모든 동네사람은 반드시 서낭당을 거쳐야 드나 들었는데 정문격인 전나무백이에서 들어오는 길에는 서낭당을 거치고 또 한 번의 관문인 병목해(삼천병마골 격처럼 양쪽이 절벽으로 이루어 짐)를 두어 안전장치가 되었다 다만 자호개 길은 광교 저수지를 막은 후에 세죽골에서 광교로 넘어 다니는 일이 많아짐에 추후에 옆문격인 길이 되었으나 지금은 경기대에 흡수 되여 버렸고 황새부리에서 산의실로 내려가는 논둑길은 산의초등학교가 생긴 후에 두릉리에서 학교 가는 길로 발전하여 추후에 넓혀진 길이였으나 지금은 고속도로에 막혀 방향 감각을 잃을 정도의 길이 되었으니 길지 않은 세월 속에 아득히 묻혀 버리네요.
지난봄에 수원시 문화관광과에서 두릉리 서낭당 터를 찾는다기에 태철씨와 함께 수원시 직원들과 동행하여 서낭당 흔적을 찾으려고 전나무백이부터 버들치고개까지 안내하였으나 두 곳 전부 도로확장에 묻혀버려 옛 자리만 확인하고 돌아오면서 서낭당에 대한 어렸을적의 기억을 더듬어 몇 자 적고자 합니다.
서낭당은 그 이름이 선왕당 선황당 성황당 서낭당 천왕당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우나 (한문으로 城隍堂으로 표기 한 것이 많음) 그 어원은 제가 어렸을 때 들었던 서낭 또는 서낭댕이로 표시 하겠습니다
두릉리 서낭댕이(서낭당이)는 전나무백이에서 두릉리로 들어가는 첫 번째 두렁의 고개 마루에 당집은 없었고 원뿔 모양으로 돌무더기를 쌓은 밑 부분이 직경으로 6-7m에 높이가 2m정도의 크기로서 돌무덤 중간 뒤쪽으로 직경 20cm정도의 참나무가 가지를 펴고 있으며 나무에는 오색 헝겊과 새끼줄이 걸려있고 어쩌다 무당들이 치성을 드리는 것을 볼 수도 있었으며 버들치고개의 서낭은 버들치고개 마루(수원시와 용인시의 경계부분)에 크기가 전나무백이 서낭당이 보다 훨씬 컸던 것으로 기억됩니다(비교적 두릉리 사람들은 왕래가 드물었고 성복리 신봉리 고기리 사람들이 수원을 왕래하던 주된 길이였음)
제가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함께 서낭댕이을 지날 때는 귀신 붙지 말라고 돌 3개를 돌무더기 위에 던지고 침을 퉤 퉤 퉤 3번 뱉고 발뒤꿈치로 땅을 쿵 쿵 쿵 3번 구르며 지나갔으며 또한 이사를 오가는 집이 있은 뒤에는 잡귀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헌 옷가지를 찢은 헝겊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가끔은 무당들이 정성들인 촛불과 고사떡조각 과일 등이 있었으며 때로는 솔가지를 얹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전염병(눈병 등)이 돌면 할머니는 서낭댕이를 지날 때 반드시 돌 던지기 발 구르기 침 뱉기를 하지 않으면 꾸중을 하시고 강요 하셨으며, 특히나 재미있던 기억은 신풍국민학교(1947-9년경)에 들어가서는 함께 다니던 한건수 한완수와 함께 돌무더기를 뒤지면 돌 틈에 숨겨진 돈을 찾아(무녀들이 정성들일 때 사용한 돈 같음) 학교 길에 누깔사탕 사먹든 기억이 나는 군요, 길지 않은 세월이 지나니 서낭댕이(서낭당이)는 새마을 사업시절 길 넓히는 과정에서 축소되었다가 아스콘포장으로 도로가 확장 되며 사라지고 이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버들치고개의 서낭은 수원시와 용인시 경계에서 서낭의 주체를 찾지 못하고 어느 결에 사라지고 말았으니 서낭당에 관한 옛 기억이 떠올라 적다 보니 희미한 기억들이 더는 떠오르지 않는 군요 기억을 되살려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추가 하겠습니다. 지금에 생각하니 두릉리의 두 서낭당은 앞뒤로 두릉리의 경계표시인 동시에 마을수호 액운퇴치 소원성취 등의 기원장소가 아니었나 생각 됩니다
이제 광교신도시에 밀려 두릉리가 사라지는 이름 속으로 들어가는 역사 속의 안타까움에 옛 고향 그리며 지금이라도 수원시에서 두 서낭당을 복원하여 두릉리에 남아 있던 정서라도 남겨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글을 남깁니다.
신도시가 되더라도 마을 명칭만이라도 두릉리를 표시하여 주었으면 하면서.........,,,,,, 왜 이렇게 두릉리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길까요.
2008. 6.
첫댓글 아~ 두릉리의 산 역사이신 두릉산인 님의 두릉 이야기를 들어보면 역사책을 보는 것 같습니다. 고증을 거친 정확한 자료보다 더 생생한 이야기들이지요. 전나백이와 버들치고개에 서낭당이 둘 있었군요. 앞, 뒤로 삼태기 지형의 두릉리를 지켜 주었던 서낭당의 흔적은 찾을 수 없어 더욱 안타깝습니다. 수원과 용인의 경계인 버들치 고개는 서낭당의 장소로 적합하였으리라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천년약수터를 오르느라 버들치고개에 오르면 경계를 이루는 지점인 곳이 신기하여 다시 한번 의미를 가져본답니다.광교산 자락을 배경으로 삼태기 모양의 두릉리는 분명 명당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세한 두릉리의 옛이야기 너무 소중합니다.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