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에 순경이 가족이 나가고 이어서 공무원 가족이 나갈 즈음 뭔가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챈 군중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공무원 가족에 이어 마지막으로 대동청년단과 국민회 간부 차례가 왔을때 사람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나아가 이장과 청년단 사람들에게 매달렸다.
" 정숙이 아버지, 우리 친정 오래비가 작년에 병정 간 거 무사 알지 않우꽈?"
" 이장님 마씸, 우리 사촌동상이 금녕지서에 순경으로 이수다. 김갑재라고 마씸."
" 뒤로 물러갑서. 다들 직계가족이 아니라 아니됩니다. 물러갑서."
이장은 손을 내저었다.
" 직계가족이 뭐우꽈?"
" 이장님, 날 좀 내보내줍서."
이런 북새통에 별안간 군중 속에서 날카로운 부르짖음 소리가 났다.
" 불났져! 마을에 불났져?"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 학교 돌담 울타리를 기어올랐다.
" 불이여,불!" " 불났져, 불났져?" " 아이고, 아이고!" 운동장 사방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나 하늘을 찔렸다. 울타리까지 갈 것 없이 마을 동편 하늘에 까맣게 불티가 날고 있는게 내 눈에도 역력히 보였다.
매캐한 연기 냄새도 차츰 바람에 밀려왔다. 그때 서편 울타리 돌담이 여기저기서 매달린 사람들의 체중에 못 이겨 와르르 무너졌다. 사람들이 그 울타리 터진 데로 몰려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지체 없이 총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은 다시 운동장 복판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무너진 돌담 위에 흰 무명적삼에 갈중이를 입은 노인이 한사람 엎어져 죽은 모양인지 꼼짝하지 않았다.군인 여남은명이 빠른 동작으로 돌담 위로 뛰어오르더니 아래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러자 조희대 뒤에 늘어서 있던 이십여명의 군인들도 앞에총 자세로 잽싸게 뛰어나오더니 정면에서 사람들을 포위했다. 단상의 그 장교는 권총을 어깨 위로 빼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가 강하게 턱을 올려젖히자 철모가 햇빛에 번쩍 빛났다.
" 잘 들으라요. 우리레 지금 작전 수행 둥에 있소.여러분의 집은 작전명령에 따라 소각되는 거이오. 우리의 다음 임무는 여러분을 모두 제주읍으로 소개하는 거니끼니 소개 둥 만약 질서를 안 지키는 자가 있으문 아까와 같이 가차 없이 총살할 거이니 명심하라우요."
장교의 귀 선 이북 사투리가 겁 집어먹은 부락민들의 머리 위에 카랑카랑 울려퍼졌다. 사람들은 제주읍으로 소개시킨다는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군인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당장은 자기 집이 불타고 있다는 생각에만 완전히 넋 잃고 절망해야 할 사람들이 다른 무엇을 예감하고 두려워하는가?
마을 쪽에서 해풍을 타고 매캐한 연기 냄새가 더욱 심하게 밀려오고 불티가 까맣게 뜬 하늘에 불아지랑이가 어른거렸다.게다카 이따금 총소리가 탕탕 울렸다
" 난 그날 서동네에 쇠(소) 흥정하레 갔다 오던 참이라수다. 마악 빌레동산 잔솔밭에 당도해연 내려다보난 묵은 구장네 집허구 종주네 집이 불붙어 이십디다. 잔솔밭이 숨어서 보난 군인들이 조짚뭇을 빼어다 불붙여 들고 이집저집 옮겨댕기멍 추녀 끝뎅이에다 불을 댕기고 이십디다."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사람들이 교문을 향해 늘어서기 시작했을 때 별안간 " 군인들이 우리를 죽이레 데려감져" 하는 말이 전류처럼 군중 속을 꿰뚫었다. 그러자 교문 가까이 선두에 섰던 사람들이 흩어지며 뒤로 우르르 몰려갔다. 단상의 장교가 권총을 휘두르며 뒤로 물러가는 자는 가차 없이 총살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 말에 사람들은 잠시 주춤했을 뿐 다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때 큰아버지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하이고, 난 그때 저 길수 놈하고 상수 녀석을 얼마나 찿았는지 모를로고. 어머님하고 아명 큰 소리로 불러도 이노무 새끼들이 어디 가 박혀신지......."
할머니와 큰아버지가 번갈아 악쓰며 부르는 소리를 우리는 듣고 있었지만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도무지 헤어나갈 수가 없었다.우리는 둘 다 고무신이 벗겨진 채 사람들에게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면서 울고 있었다. 우리들은 서로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서로 이름 부르며 가족을 찾는 소리와 군인들의 악에 받친 욕 소리로 운동장은 온통 수라장이었다.
머리 위에서 한발의 총성이 벼락같이 터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서편 울타리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 붙었다. 운동장은 순식간에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몰려가고 난 빈자리에 한 여편네가 앞으로 엎어져 있고 옆에는 젖먹이 아기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그 아기만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 영배 각시 총 맞았져." 누군가 이렇게 속삭였다.
흰 적삼에 번진 붉은 선혈이 역력했다.
" 두살 난 그 아기가 바로 방앳간 허는 장식이여. 후제 외할망이 키웠쥬. 이젠 결혼도 하고 씨멸족할 뻔한 집이서 아들 둘까지 낳아시니 죽은 어멍 복을 입은 것일 거라, 아매도." 작은당숙의 말이었다.
첫댓글 학교 운동장에 모여놓고 총질할때 그 장면을 상상하니까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안타깝고 너무 슬프네요.
그당시에는 무엇때문에 제주도 마을 사람들을 모아 총으로 겨누었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마도 북한 개입이 된 것인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