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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景 九曲 洞天 스크랩 [답사] 거창 수승대(居昌 搜勝臺) 탐방-(1/2)
이장희 추천 0 조회 63 14.05.09 21: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답사] 거창 수승대(居昌 搜勝臺) 탐방-(1/2)

(2012/10/27 현재)


사)서울문화사학회의 제261회 답사지로 경남 거창군 지역 유적지중,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있는 거창 수승대(居昌 搜勝臺) 전경 입니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
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으며 ,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그 후 조선 중종 때 요수 신권 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암구대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이라 하였습니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 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요수 신권 선생이 대의 면에다 새김에서 비롯
되었습니다. 경내에는 구연서원, 사우, 내삼문, 관수루, 전사청, 요수정,
함양제, 정려, 산고수장비와 유적비, 암구대 등이 있습니다.


 

 

 

 

 

 

 

 

 

 

 

 

 

 

 

 

 

 

 

 

 

 

 

 

 

 

 

 

 

 

 

 

 

 

 

 

 

 

 

 

 

 

 

 

 

 

 


◈ 거창 수승대(居昌 搜勝臺)    


-종    목 명승 제53호     

-지 정 일 2008.12.26 

-소 재 지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890번지 일원  


수승대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쳤던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위치하는 화강암 암반으로 깊고 긴 계곡과 주변 임야와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수승대’ 명칭과 관련하여 퇴계 이황의 개명시와 갈천 임훈의 화답시가 전하고, 수승대 양쪽에 위치하는 요수정과 관수루 등이 잘 남아 있어 요산요수하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산수유람 문화가 결합된 장소적 상징성이 큰 명승지이다.


 덕유산이 두 갈래로 뻗어 내린 동남쪽의 영취산과 서남쪽의 금원산에서 흘러나온 계곡물이 합류하여 자못 큰 계류를 이루는 원학동 계곡에 있다. 흰빛을 띠는 화강암 반석 위로 냇물이 굽이치며 장쾌하게 흘러 내리고 주위는 송림으로 우거져 명승이라는 말에 값하고도 남음이 있다.


넓게 트인 계곡 한가운데에는 신기하게도 거북모양의 거대한 바위가 있어, 이를보면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절로 느끼게 한다. 예부터 사람들은 이를 대로 삼아 풍류를 즐겨왔다. 전하는 말로는 신라와 백제의 나들목이 되는 이곳에서 양국 사신이 서로 전송 하면서 “근심을 잊게 했다”고 해서 수송대(愁送臺)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황산마을의 요수 신권은 이 거북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 짓고 그 위에 단을 쌓아 나무를 심고 아래로는 보를 만들어 물이 고이게 하고는 구연(龜淵)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중종 35년(1540)부터 정자를 짓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그 이름을 구연재 라고 했다. 이런 수송대가 전국적으로 더욱 유명 해지게 된 것은 퇴계 이황이 수송대를 수승대라고 바꾸자는 글을 짓고 나서였다.


1543년 퇴계는 안의 영송마을에 사는 장인을 뵈러 와 설을 쇠었다. 퇴계는 그 기회에 수송대를 꼭 찾아가보고 싶어하면서 동천(洞天)의 천석(泉石)은 빼어난데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수승대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모두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퇴계는 급한 왕명을 받아 서둘러 발길을 돌리게 되었고, 아쉬움에 시를 한편 남기고 떠났다. 퇴계가 이렇게 시를 남기고 떠나자  요수 신권은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감사 했다.


그러나 수승대 윗고을에 살던 갈천 임훈이 이에 화답한 시는 늬앙스가 조금 달랐다. 갈천은 퇴계와 동갑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다 부모 봉양을 위해 낙향하여 효행으로 정려문을 하사받고 나중에는 광주목사 까지 지낸 분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은 거창의 명사 였다.


한세기 뒤 문인인 오숙(吳?,1602~75)이라는 분은 ‘수송대에서 노닐며’에서 갈천의 시에는 퇴계가 이름을 바꾸려고 한 것에 반대하는 뜻이 있다고 했다. 갈천의 시를 보면 이곳에 와보지도 않은 ‘외지인’인 퇴계가 단지 말로만 듣고 이름을 바꾸려 하자 ‘현지인’의 입장에서 근심을 보낸다는 수송(愁送)의 뜻을 봄과 길손을 이별하는 마음과 연관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퇴계는 처사를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바쁜분’이어서 한양으로 급히 떠났지만  “꽃은 강 언덕에 가득하고 술은 술통에 가득”하다며 자신이야말로 처사다운 여유로움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고 했다.



▶거창 요수정(居昌 樂水亭)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3호 


요수정은 요수 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구연재와 남쪽 척수대 사이에 처음 건립하였으나 임란 때 소실되었고 그 뒤 다시 수해를 만나 1805년 후손들이 수승대 건너편 현 위치로 이건하였습니다. 상량문에 1800년대 후반에 수리한 기록이 있고 요수정은 수승대 건너편 솔숲에 부속건물 없이 홀로 세워진 중층의 정자입니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 어칸의 배면에 1칸의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모두 마루로 구성하였다. 방은 판방으로 구성하여 배면을 제외한 3면에 문을 내었다. 누의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배면 좌측의 출입구 일부를 제외한 4면 모두 계자난간을 둘렀다.

요수정은 자연 암반 위에 바로 세운 건물로 초석을 사용하지 않았다. 특별히 기단을 조성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배면 쪽에 경계의 표시와 굴뚝을 겸하는 낮은 돌담을 쌓았을 뿐이다. 기둥은 원기둥과 각기둥을 사용하였는데, 단칸의 방을 구성한 4본은 각기둥으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누하기둥은 직경을 상부기둥보다 크게 하여 구조적 안정을 꾀하고 있다.


요수정은 수승대의 경치를 완상하고 시회와 교육 등을 위해 솔숲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정자 건물로 형태가 매우 아름답다. 전통적인 정자건물 형식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산간지역의 기후를 고려하여 정자의 내부에 방을 들이고 있어 이 지역의 건축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거창 구연서원 관수루(居昌 龜淵書院 觀水樓)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2호  

-지 정 일 2005.01.13

-소 재 지 경남 거창군  

-소유자(소유단체) 거창신씨요수종중


구연서원은 요수 신권, 석곡 성팽년, 황고 신수이 세 분의 행적과 학덕을 경모하고 계승하기 위하여 사림들이 세운 서원으로 1540년 신권이 구연재를 완성하였으나 1694년 구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1868년)되었으나, 강당과 문루인 관수루는 그대로 지속되어지고 있다.


관수루는 서원의 문루로 1740년 창건되었다. 자연암반을 활용하고 틀어진 재목을 하부기둥으로 사용하는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형태 또한 대단히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로 암반 사이에 조성된 기단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기둥 바깥쪽의 네 모퉁이에는 적절하게 높이를 조절한 활주를 세웠다. 누하부 정면에 출입을 위한 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공간은 모두 개방하였다. 상층의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주변으로 계자난간을 둘렀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 위에 포대공을 올려 종보를 받고 다시 종보 위에서 상부에 소로를 끼운 사다리꼴의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좌우측면에는 충량으로 가구를 구성하였는데 끝단을 용머리로 장식하였다. 기둥머리는 초익공 형식을 하고 있으며, 창방과 처마도리 장혀 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다. 겹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이며 처마앙곡과 기와의 와곡을 크게 하였다.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는 자연과의 조화라는 한국건축의 가장 큰 특징을 잘 보여주며, 누정건축의 모범이라 할 만큼 입면에 비례가 뛰어나 학술적 가치가 높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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