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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 3. 8. 02:50
필명 : 점억개(피투성이)
출처 : 서프라이즈(http://www.seoprise.com/)
■한국의 근대명가 - 01편 이후락 家.
대한민국에 수많은 명문가문 가운데 왜 하필 맨 첫번째로 후라이 이후락의 집을 들먹이는가?
그 이유는 길이길이 남아야 할 이후락의 업적이 역사속에 묻혀가고 있는것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후락은 수많은 업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평가를 못 받고 있다.
전두환은 그래도 국회에 출석하기도 하고, 절에 좀 가 있기도 했다. 그리고 노태우는 추징금이라도 많이 냈다.
그리고 지금도 수많은 민중들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죽일놈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난리지만, 여기에 반해 박정희 정권을 세우고 지탱해온 부정축재자 이후락에 대해서는 조용하다. 내가 친구들을 붙잡고 이렇게 물어봤다."혹시 이후락을 아느뇨?"
역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설령 이름 석자는 어디서 들어봤더라도 구체적으로 이후락이 어떤 인물이며, 그 인물이 어떤 업적을 통해서 오늘날 자신의 가문을 한국의 명문가문 반열에 올려놓고 지금도 대한민국 주류로서 떵떵거리고 사는 건지 잘 모르고 있었다.
울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울산시민들이 선정하기도 하는 등 아주 가관이다.
우선 이후락이라는 사람은 박정희 밑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호가호위했다.
대통령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사람으로써 대한민국에 "떡값"이라는 말이 처음 회자되게 만든 사람이다.
" 떡을 들고 다니다 보니 떡고물이 묻었다..." 이 천인공노할 말을 스스럼없이 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이 받아쳐드신 떡고물이 무려 194억원이다. 70년대 초에 194억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아보기 위해 당시 서울에 그래도 사람이 살 만한 집 한칸을 마련하신 나의 모친에게 물었다.
"당시 얼마 주고 집을 사셨나요?" "200만원." 요즘 서울의 웬만한 집값이 2-3억 간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후락은 떡고물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2조원에 가까울 만큼 쳐 잡수신 것이다.
이것은 대머리와 귀 큰 놈의 수준에 거의 근접하는 것이다. 당시 김종필, 이후락을 비롯해 전두환 신군부에게 박정희정권 하 부정축재자로 몰린 사람들이 해먹은 돈이 밝혀진 것만 총 887억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치면 10조원이다. 이후락 이분은 얼마나 낯짝이 두꺼우신 분인가? 우리는 이런 배짱을 배워야 한다. 혼자서 2조원을 쳐 잡수시고도 떡고물이라고 말하는 저 배짱...
다들 알다시피 이후락은 박정희 시절 공무원이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할 공직자가 떡고물을 직무 중에 2조원씩이나 쳐 잡수신 것이 과연 자랑할만한 명예인가? 그것이 대가성있는 뇌물이든, 어떤 덜떨어진 놈들이 그냥 갖다 쳐 바친 것이든 이후락같은 공무원 10명만 있으면 대한민국은 거덜난다.
또 상식적으로 어떤 미친놈이 대가없이 이익을 수수하게 해 주겠는가도 한번 생각을 해 봐야 한다. 그 이익과 대가성을 명확하게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수사 기법상의 어려움일 뿐 공무원 이후락에 대한 민중들의 도덕적 평가는 그와는 별개다.
미국 의회의 보고서에도 이후락은 스위스에 비밀정치자금을 예치하고 관리하는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락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가 스위스에 예치한 비밀자금이 60억달러. 당시 수출 100억 달러 달성 어쩌구 떠든 것과 비교한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후락이 관리한 박정희의 스위스계좌는 박근혜로 명의가 바뀌었다고 한다.
전두환이 10, 26 이후 박근혜를 스위스로 보내 돈을 찾아와서 민정당 창당 자금으로 썼다는 설도 있다.
그 때 따라갔던 보안요원이 수고비로 5만달러를 받았다고 고백한 바도 있다.
어쨌든 이후락이 검은돈을 얼마나 많이 받아먹었는지 이후락의 부인과 자식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쳤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집에 돈 봉투를 들고 오는 사람이 하도 많다 보니 집주인이 내방객으로 부터 받은 봉투를 소파 밑에 밀어 넣어 두었다가 깜빡 잊어 버려 청소하던 식모가 당시 돈 수백, 수천만원짜리 수표가 든 돈 봉투를 주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코흘리개이던 이후락의 셋째 아들 이동욱이 모씨의 집에 놀러왔다가 모씨의 어린 딸에게 돈 세는 법을 가르쳐 준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폐를 한 장씩 넘기면서)" 돈은 1억, 2억, 3억... 이렇게 세는 거야"
박정희가 뒈지고 나서 전두환이 껍죽거리면서 조사 좀 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유야무야 다 처리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종결지어졌다. 큰 깡패들이 나타나면 동네 양아치들이 숨을 좀 죽이고 사는 그 정도였을 뿐이다.
공무원이 2조원이나 처먹은 사건에 대해서 아무런 단죄도 없이 그 불법적인 이익을 그대로 인정한 채 대중의 망각을 틈 타서 도리어 그 막강한 금력과 배경으로 명문가문 행세까지 하게 됐다. 그 엄청난 돈으로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초월읍 도평리, 기가 막힌 명당터에 대저택을 지어놓고 왕처럼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 아닌가? 별장과 그 부지가 무려 9000평이다.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해수욕장에도 붉은 지붕과 크림색 외관, 1층의 고급스러운 테라스와 2층의 이국적인 인테리어를 갖춘 무지하게 예쁜 별장을 지어놓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되느냐 이 말이다.
김재규의 옥중수양록에 보면 이렇게 나온다.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엇으로 시정할 것인가. 지금도 천하를 활보하고 있는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정렴, 오정건, 장동운, 길재호 등 수많은 부정치부자의 재산을 혁명적 방법이 아니고 무슨 방법으로 환수하겠는가.
지금 참여정부의 이병완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김승규 국가정보원장이 이후락의 1000분의 1이라도 뇌물을 먹었다면 과연 조중동은 가만히 있겠는가? 왜 이후락이 뇌물 처 잡수신 건 용서가 되고, 이병완실장이나 김승규원장은 안되는 거지? 조중동이 그 이후라도 이후락의 비리나 부정에 대해 무섭게 질타하고 심층취재한 적 있나?
천문학적인 돈만 받아먹은게 아니라 한승헌 사법개혁위원장에 의하면 "김대중 납치사건"도 이후락의 작품이라고 한다.
야당의 대통령후보이자 정치지도자인 김대중 씨를 일본 동경에서 백주대낮에 납치하여 국내로 끌고오는 황당한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것이다.
김대중납치사건은 박정희에 대한 이후락의 과도한 충성이 빚은 참극이었다. 물론 박정희의 암묵적인 동조 내지는 방관이 있었겠지. 그 뿐이 아니다. 71년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에게 패배하고 김대중 후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박정희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 이후락에게 졌다." 당시 이후락은 관권, 금권선거의 총 책임자였다.
이런 짓거리까지 하고도 그 패거리들이 뚫린 입이라고 민주주의 운운하는것 보면 기가 차다. 최종길 교수 의문사에 대한 진상조사가 활발하지만, 나는 불만이다. 당시 이후락 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고방식을 가진 부도덕한 인간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어디 최종길 교수 뿐이겠는가?
최종길 교수는 서울 법대 교수이고, 그 가족들도 어느 정도 사회적인 지위가 있으니 이나마 진상규명의 노력이 있는 것이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사람이 어디 한 둘인가? 정점에 박정희가 있고, 그 밑에 HR이라고 불리던 이후락이 있는 거 아닌가?
그 끔찍한 국가적 폭력 "실미도 사건"의 책임도 이후락에게 있다. 경향신문을 강탈한 것도 이후락이다.
평생을 남 뒤나 캐고, 약점이나 잡아서 공작하고, 대한민국을 우간다같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헌신했다. 국가의 녹을 먹는 민주공화국의 공직자가 국민은 어떻게 보든지 말든지 박정희 눈에만 들면 된다는 식으로 온갖 아부를 하였다. 이후락은 교활한 인물로 매우 유명하다.
그의 교활한 삶을 자세히 보면 기가 차다.
김정렬은 이런 말을 했다. "이후락이는 말이오, 국군 창건 당시에 대위로 시작한 놈이오. 그 보다 나이도 위고 계급도 위였던 박정희가 소위로 시작했는데 말이요. 해방 직후 귀국한 일본군 장교 출신들은 모두 군사영어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를 수료하면 일본군 시절의 계급을 참작해서 국군 장교로 임관시켰거든.
그런데 이후락이는 끝까지 자기가 일본군 대위였다고 우긴 거야. 하도 우기니까 미군 측에서도 사실을 뻔히 알면서 대위로 임관시켰지. 사실상 그 때부터 이후락이는 미군 측과 거래가 있었겠지"
박준규는 이후락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다. "5.16 후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자가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나가더구먼."
물론 박정희라는 사악한 인물이 부하들을 그렇게 만들어 이용한 측면이 많다. 또 사람을 써먹고는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식으로 용도폐기하는 것도 물론 박정희의 특기다. 어떻게 보면 이후락은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정을 해 주기에는 죄악이 너무 크다.
또 이후락은 미국 CIA가 박정희 주변에 심어놓은 첩자라는 얘기가 있다. 게다가 이후락은 박정희의 반민주적 행각을 앞장서서 도와준 악질 앞잡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민중의 인권을 짓밟았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욕하면 중앙정보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다가 죽여버리기도 하고, 각종 죄목을 붙여서 간첩으로 만들기도 하는 그런 민주주의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노동조합 만들려고 하는 사람을 잡아다가 가두어 버리는 그런 민주주의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국가정보기관이 정치인들을 시도 때도 없이 도청하고, 약점을 잡아 협박하는 그런 민주주의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지성인이라는 대학교수나 대학생들이 자기 생각을 담은 글 한 줄 발표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체제였다.
그들이 말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긴급조치로 처벌할 수 있게 하고, 긴급조치를 위반한 사례를 허락없이 발표하거나 신문에 보도하면 다시 긴급조치 위반이 되도록 만들어 놓은 체제였다.
이것이 박정희가 제시한 국가비전이었고, 이후락은 이 국가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충직한 개노릇을 마다하지 않은 자였던 것이다.
물론 개노릇을 하면서도 한눈을 팔면서 열심히 떡고물을 주워먹었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좋다. 개노릇도 좋고 떡고물 주워먹었던 것도 좋다.
그러나 이 대명천지에 뻔뻔스럽게 한국의 명문가문 행세를 하는 꼴만은 제발 보고 싶지가 않다. 이후락과 형님 동생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극동건설의 김용산, 대농의 박용학, 한국화약의 김종희, 호남정유의 서정귀 등이 소위 말하는 이후락 5인방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화그룹의 창업자 일명 "다이너마이트 김" 김종희다. SK 창업자 최종건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이들은 모두 이후락과 사돈을 맺게 됐다.
이후락에게는 세 아들이 있다.큰 아들 이동익은 박정희의 고교동창이자 당시 끗발 좀 날리던 호남정유 사장 서정귀의 딸과 결혼했다.
작은 아들 이동훈은 한화 창업자 김종희의 딸 김영혜와 결혼했다. 그러니까 현 한화회장 김승연과 처남 매부지간이다.
막내 아들 이동욱은 SK그룹 창업자 최종건의 딸 최예원과 결혼했다.
이렇게 보니까 무지하게 그럴싸하지 않은가? 박정희치하의 최대 이권이 무엇이었는가? 미국 석유회사 칼텍스와 유니언 오닐사의 한국 내 합작선 선정이 가장 큰 이권이었다. 결국 이 엄청난 이권은 이후락 큰 아들의 처갓집인 호남정유와 이후락 둘째 아들의 처갓집인 한화그룹 계열사 경인에너지가 먹었다. 게다가 막내아들의 처갓집인 SK는 유공을 먹었으니...
헐 요즘 종이신문들이 이후락에게 치매기가 있다는 둥 말년이 불행하다는 둥 하면서 연막작전을 펴고 있다. 좆을 까라, 씹쌔들아... 이후락이는 젊을 때부터 바둑을 많이 두고, 비상한 두뇌를 지닌 인물이라서 내가 보기엔 절대 치매 안 걸린다. 이제 겨우 여든인데 벌써 엄살은... 요즘 교통사고만 안나면 90세까지는 다 살 수 있다.
그리고 젊을 때부터 그렇게 잘 쳐먹고 살았는데 뭘 죽는 시늉을 하나? 그 죄값을 다 치루고 가야지, 그냥 편안하게 가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후락에게 억울하게 당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지. 이후락의 사돈인 SK그룹 창업자 최종건과 조선일보 방일영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물론 이후락도 방일영과 깊은 관계였다. 방일영만?? 동아일보 김상만과도 깊은 관계였다. "형님의 형님은 형님이다"라는 공식이 있지 않은가?
설마 그런 깊은 관계를 가진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 이후락 아직도 잘 먹고 잘 사니까 얼른 조지라는 칼럼을 쓰지는 못할 거 아닌가? 이후락 둘째 아들의 처남이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인데 굶어죽게 내버려두기야 하겠는가? 게다가 이후락 둘째 아들의 처남 김승연의 장인어른이 얼마 전까지도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있던 5선 의원 서정화다.
지금도 한나라당 고문으로 있다. 서정화가 중정 차장 출신이니 이후락을 모를리 없다. 이후락에 대한 진상조사라도 하겠다고 하면 아마 쌍심지를 켜고 덤벼들 것이다. 게다가 이후락의 사돈인 서정귀가 서정화의 6촌형이다. 게다가 김승연의 동생 김호연을 통해서 대한민국 모든 재벌이 또 다 얽히게 된다.
또 이후락 아들의 처남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의 큰아버지 김종철이 국회의원을 여섯 번이나 해먹은 사람이다.
김승연의작은 아버지 김종식도 국회의원이었다.
내가 요즘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서정화를 왜 이렇게 특별대우하는가를 의심스러워서 알아봤더니 얼마전에 죽은 윤덕주가 숙명학원 이사로서 자랑스런 숙명인상을 비롯해서 숙명학원에서는 거의 영웅으로 취급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숙명학원 발전기금도 심심하면 내고, 한국 농구계에서도 알아주는 인물이었다.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이다. 윤덕주는 이후락의 사돈 서정귀의 마누라다. 껄껄... 신문쪼가리들, 윤덕주가 박정희의 절친한 동창 서정귀의 마누라이며 그 덕분에 끗발 좀 날렸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농구계의 대모이며 숙명의 큰 별이 떨어졌대나 뭐래나.....
헐 내가 눈여겨보는 것은 대한농구협회 회장이 열린우리당 이종걸 의원이라는 사실이다. 이후락의 사부인 윤덕주가 죽었을 때 조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실눈을 뜨고 계속 지켜볼 것이다. 어쨌든 또 이후락의 막내며느리 최예원의 사촌 오빠가 SK 최태원 회장이다. 사촌 올케가 바로 그 악명 높은 노태우의 딸 노소영이다.
이 노소영의 동생 노재헌의 부인이, 그러니까 노태우의 며느리가 신동방그룹 신명수회장의 딸 신정화다. 신명수는 노태우의 비자금을 관리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신정화의 이모가 송원자다. 이 송원자의 남편 이봉서, 그러니까 노태우 며느리 신정화의 이모부 이봉서가 요즘
이회창 정계복귀를 위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으로 우리 민주개혁세력은 보고 있다. 이봉서는 이회창의 경기고등학교 후배다.
그 주변에는 아남그룹 회장 김주진과 한국유리공업 회장 이세훈 등이 있다. 이 이봉서의 딸 이원영이 이회창의 군대 안간 큰 아들 이정연과 결혼을 했다.이로써 이봉서와 이회창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후락의 영향력이 건재하다는 증거가 된다.
이후락 - 전두환 - 노태우 - 이회창은 한 통속이라는 강력한 증거다.
노태우의 며느리 신정화 쪽으로 가다보면 전두환이 또 나온다. 신정화의 아버지 신명수의 동생 신영수의 아들, 그러니까 신정화의 작은 아버지의 아들이 이희상 한국제분 회장의 딸 이유경과 결혼을 했다.
이유경의 형부가 전재만이다. 재만이 아버지가 바로 전두환이다. 전두환 아들 전재만의 마누라 이윤혜의 동생 76년생 이미경의 시어머니가 송광자다. 송광자의 조카가 이원영이다. 이원영의 시아버지가 이회창이다.
이회창의 구기동 자택이 전두환의 며느리 이윤혜의 명의로 되어있던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이렇듯 이후락가는 여전히 막강하게 대한민국 명문가문 행세를 하며 여전히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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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근대명가 - 02편 홍진기 家.
언제건 어디서건 명문가문은 있었다. 그걸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명문가문은 과거에 위세나 부리고 행세나 하던 세도가와는 구분이 되어야 한다. 그 위치도 존귀(?)한 것이어야 하지만 고결한 자격 또한 갖추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 공동체를 위해 사리사욕을 마다하고 헌신을 하지 않고는 현대적 의미의 명문가문이 결코 될 수 없다. 하물며 이 공동체의 파괴를 도모했던 자들이 알알이 구성원으로 박혀있는 집안이 명문가문 운운하며 떵떵거리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다.
우리같이 미천한 백성들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백성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건과 배경을 갖추지 않은 채 그저 가지고 있는 금력과 권력이나 앞세워 명문가문으로 둔갑한 사례가 한 둘이 아니다. 그 가운데 홍진기 가문이 중심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불행하게도홍진기는 지식인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는커녕 일제 식민지하에서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로 재직하였다.
홍진기의 약력을 보면 1945년 9월에 미군정청 법제부 법제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8월 15일에 해방이 됐는데 불과 한달도 안되서 민중에게 돌팔매를 맞기도 전에 친미 꼭두각시로 변신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런 행적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우리 헌법에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는 부분이다. 내가 생각할 때 전두환이 5.18 때 광주에서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나 4.19 때 이승만이 학생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이나 다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 죄질에 있어서 조금의 차이도 없다고 생각한다.
홍진기는 4.19 혁명 당시에 내무부장관직을 수행했고, 그 직전에는 법무부장관으로서 이승만에게 강력하게 계엄령을 건의했던 인물로서 이 당시에 홍진기가 지휘하는 경찰에 의해 서울에서만 무려 100여명의 양민들이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광주학살의 발포책임자를 규명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도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대머리까진 새끼가 광주 피바다를 일으킨 것이라는 점을 심정적으로 잘 알고 있지만 그 명령체계, 지휘계통의 진상을 명백하게 아직까지 밝히지는 못하고 있고 현재 진행 중이다.
광주학살 때 대머리가 한 짓과 마찬가지로 이 홍진기는 4.19 혁명 당시 양민에게 발포명령을 한 혐의로사형선고까지 받은 인물이다.
물론 최종책임자는 이승만이겠지만 적어도 광주학살과 비교한다면 "정호용"쯤 되는 인물이다.
3.15 부정선거로 민중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법무부장관으로 있던 홍진기를 이승만이 내무부장관으로 발탁한 것만 봐도 그 성향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홍진기가 직접 발포명령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지휘계통에 있던 사람이었고, 그 책임을 지고 곧바로 특사로 풀려나긴 했지만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며, 적어도 그런 역사적 모순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발포명령자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승만정권에 부역하면서 반민주적 행태를 일삼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홍진기의 마산시위 관련 망언은 유명하다. 경남 마산에서 발포사건이 일어나 여론이 들끓자 다음과 같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마산시위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광주사태는 빨갱이들의 짓이라는 대머리의 주장과 매우 닮아있다. 여론이 양민들에게 총격을 가한 것에 대해 들끓고 일어나자 당시 정권의 실세라는 자의 입에서는 이런 끔찍한 말도 나왔다. "총은 쏘라고 만든 것이다."
이기붕이 부통령 사퇴를 결심하고 성명서를 작성했으나 홍진기는 장경근, 한희석 등 몰지각한 자들과 함께 머리를 굴려 "사퇴를 고려한다."라는 문구로 바꾸기도 했다. 정권연장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이 홍진기의 머리에서 나온 "고려"라는 한마디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 죽고 다쳤는지....
이런 죄를 홍진기는 쏙 빠지고 모조리 곽영주와 정치깡패들에게 뒤집어씌운 것 아닌가? 게다가 홍진기는 법무부장관으로 재직하는 중에 경향신문을 전격폐간한 전력도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국가보안법 파동... 그런 홍진기가 중앙일보를 창간해서 언론자유를 말하다니 가소롭지 않은가? 조봉암 사건도 그 즈음에 일이다.
어쨌든 대한민국 썩은 언론의 침묵의 카르텔이 오늘의 홍진기를 만든 것이지 제대로 된 언로가 열려 있는 사회였더라면 오늘의 홍진기는 존재할 수가 없었고 그 홍진기의 자손들이 지금처럼 대한민국 주류로 행세하며 살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이쯤되면 왜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고 말하는지 모두들 이해가 갈 것이다. 30만명의 엄청난 군중이 부정선거와 부패정치에 신물이 나서 거리에 모여 시위를 하는데 거기다대고 무차별 사격을 가할 것을 명령한 사람이 여전히 대한민국 명문가문입네 하고 떵떵거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우울한 풍경인가?
광장을 피로 물들인 사람이 광장의 주인이다. 광장을 피로 물들인 홍진기는 약 5년동안 웅크리고 있다가 당대 최고의 사업가 이병철과 결탁하게 된다. 그 사이에는 훗날 국무총리를 지낸 신현확이 있었다. 홍진기가 감옥에 있을 때 이병철은 옥바라지를 지극 정성으로 신현확을 통해 홍진기와 손을 잡기 위해 애를 썼다고 한다.
고급관료 + 재벌의 결탁을 통하여 "언론권력"을 창출하기 위해 머리를 쓴 것이라 보여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중앙일보가 삼성의 사보로써 곡필을 일삼았던 궤적은 너무 진부하여 반복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이병철의 호암자전을 보면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언론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병철은 언론의 힘이 정치의 힘보다 강하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어쨌든 홍진기의 큰 딸 홍라희와 이병철의 세째 아들 이건희가 결혼함으로써 고급관료 + 재벌의 결탁은 더욱 굳건한 반석 위에 올라간다.
이런 배경 속에 만들어진 언론사 중앙일보에 대해 어떤 일말의 양식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홍진기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은 그의 장남 홍석현을 신직수의 딸 신연균과 결혼시킨 대목이다. 이 신직수라는 인물은 나중에 자세히 더 살펴볼 가치가 있다. 간단히 말한다면 신직수는 불과 36살의 나이에 검찰총장을 꿰찬 사람이다. 그 이유는박정희가 5사단장으로 있을 때 법무참모였기 때문이다. 홍진기보다 나이가 10살이나 어리다. 같이 놀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진기는 신직수를 사돈으로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박정희정권의 실세이기 때문에... 부실한 자신의 박정희정권 인맥을 탄탄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신직수는 육사+법조인 즉 육법당의 초대 당수격의 인물이다. 민복기와 더불어 대한민국 검찰의 자존심을 망가뜨린 인물이다.
검찰총장을 무려 7년 6개월 동안 재임했다. 중앙정보부장도 무려 3년 동안 역임했다. 법무부 장관까지 지냈다. 박근혜가 현재 소유하고 있는 정수장학회의 전신이었던 부일장학회의 포기각서를 받아낸 인물도 바로 신직수다. 10만 147평의 땅과 막대한 주식을 빼앗아 박정희의 손아귀에 안겨준 것이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는데 앞장섰던 것이 중앙정보부임이 밝혀지면서 당시 중정부장 신직수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박정희가 죽기 직전에 대통령 법률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끔찍한 유신헌법을 구상한 인물로도 손꼽힌다.
이 신직수가 바로 홍진기의 장남 홍석현의 장인이다. 중앙일보가 언론자유를 부르짖으며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색한 일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신직수에 대해서도 한국의 언론은 대체적으로 침묵하고 있다. 침묵의 카르텔이 또 작동하는 것이다.
신직수의 두 아들은 사업가라고 한다. 글쎄.. 동강기업, 광륜상사?? 이런 회사도 있나? 이거 혹시 유령회사 아닌가? 내가 아무리 찾아봐도 번듯한 사업을 하는 신창균, 신황균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다. 경영인명록까지 뒤져봐도 없다. 뭐지?? 혹시... 갑자기 패션 70s가 떠오른다. 껄껄.. 그럴지도 모르지.
신직수는 이동원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이동원은 박정희 하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자다. 굴욕적인 한일협정 당시 외무부장관이었다.
그 때 수석대표가 정몽새의 장인 김동조다. 이동원의 저서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통령을 그리며.." 헐.. 이 사람이 요새는 학원사업에 나섰다. 동원학원이라는 건데.. 문어발식으로 무섭게 확대되어 나간다.
그 확대를 진두지휘하는 것은 그의 딸 이정은이다. 44살의 나이에 학장이 되었다. 이정은의 남편은 한일투자신탁 사장 이정진이다.
이동원은 한진그룹 조중건과 사돈을 맺었다. 조중건의 딸이 이동원 집에 들어왔다. 따라서 홍진기가문과 한진그룹이 전혀 상관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홍진기의 사돈 신직수의 손자들이 노는 것도 한번 쭈욱 살펴보았다. 거의 미국물을 먹기 위해 준비 중이거나 미국물을 먹고 있다.
이 아이들이 이제 미국물을 먹고 돌아와서 자랑스런 주류로서 민중들을 또 가르치려 들 것 아니겠나? 여기까지의 홍진기 가문 혼맥은 빙산의 일각이다.
홍진기는 장녀 홍라희를 통해서 대한민국 최대재벌 삼성의 엄청난 인맥을 장악했고, 장남 홍석현을 통해서 박정희정권의 인맥과 손을 맞잡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현재 삼성리움미술관 부관장인 막내딸 홍라영을 통해서 전두환정권의 실세였던 노신영과 사돈을 맺은 점이다.
노신영은 전두환정권 초기 외무부장관을 지내다가 3년간 안기부장을 지내고 또 2년간 국무총리를 지낸 자다.
노태우와 더불어 전두환 후계자로 물망에 오르던 5공의 실세다. 장세동만 돌팔매를 받고, 노신영은 멀쩡한 거 보면 신통하다.
마치 곽영주만 뒤집어쓰고 홍진기는 멀쩡한 것과 꼭 닮았다.
노신영 또한 홍진기 못지 않게 화려한 혼맥을 자랑한다. 앞으로 노신영 가문도 명문가문(?)으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 노신영과 홍진기는 손을 잡는다. 노신영은 5공 실세인 것은 물론 노무현대통령과 국회에서 만나 혼이 났던 유찬우와 사돈이다.
또 현대그룹 정세영회장과도 사돈이다.
또 홍진기는 둘째 아들 홍석조를 양기식의 딸과 결혼하게 한다. 양기식은 철도청장, 서울시장을 지낸 양택식의 동생으로서 이 양씨집안도 상당한 혼맥을 자랑한다. 양택식의 큰 아들 양원용은 태광그룹 창업자 이임룡의 사위다.
양택식의 딸 양정아는 전두환에게 사랑을 받던 한일그룹 김한수회장의 며느리다. 이 김한수와 노태우의 처남, 그러니까 노태우의 마누라 김옥숙의 오빠인 김복동과 사돈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기가 찰 것이다. 김복동의 딸 김미경이 김한수의 며느리다.
홍진기가 설립한 중앙일보는 아들 홍석현으로 이어졌다. 홍석현의 누나가 삼성그룹 이건희회장과 결혼했다. 이건희회장과 홍석현의 누나 사이에 이서현을 낳았다. 이서현은 김재열과 결혼했다. 이 김재열의 아버지가 동아일보 명예회장 김병관이다. 홍진기의 외손자가 이제 대한민국 최대재벌의 후계자가 되게 생겼다.
그러니까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한번 생각을 해 봐라. 이승만 치하에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양민에게 발포를 명령했던 사람이 살아나서 일단 대한민국 1등 재벌과 사돈을 맺고, 그 힘을 바탕으로 이승만정권 이후에 박정희가 등장하여 권력에서 멀어질까 염려되니까 당시 실세인 신직수와 사돈을 맺고, 또 양기식과 사돈을 맺고, 그후 신군부가 출현하니까 노신영과 사돈을 맺고.....
그 자손들은 그 힘을 계승하여 더욱 강력한 힘을 재생산하고 또 다시 당대 최고의 권력을 찾아 혼맥을 맺고 또 그 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선조들의 죄악을 은폐하고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이런 자들이 명문가문 어쩌구 하면서 대한민국 주류로 행세할 때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명무실화되는 것이다.
3ㆍ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이건 완전히 사문화되는 것이다.
불멸의 홍진기를 보면 전두환이 왜 나만 갖고 그러냐고 항변하는 것도 전혀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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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명가 - 03편 김동조 家.
하루가 정말 후딱 지나간다. 이 허접한 글을 쓰는 것도 시간을 꽤 잡아먹긴 하지만, 틈날 때마다 우리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적 스승인 노무현대통령, 유시민의원의 하루에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주옥같은 말씀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그 진의를 곰곰이 따져보고, 가끔 날파리같은 알바들하고 댓글 투쟁도 하자면 바쁘다.
또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는 일과 가운데 미녀사진 열람이라는 독특한 취미가 있기 때문에 이거저거 하자면 꽤 바쁘다.
그러면서도 기쁜 것은 이런 글을 보고 서프앙들이 경악을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들은 다 상식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프앙들도 이런 사실을 정확히는 아닐지언정 누구나 대략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서프앙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수구떼들의 만수산 드렁칡 행각에 울화가 치미게 만드는 것이 매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무현대통령이 초선의원 시절 말씀하시길"분노 때문에 정치를 시작했고, 지금도 식지 않아서 한다"고 하셨다.
이 말을 수구 떼들이 이상하게 비틀어 가난과 학력컴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몰아붙였지만, 나는 "잘못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문제의식"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거기서 상응하는 변혁의 에너지가 솟구쳐 나오는 거 아닌가?
이것을 마치 성격파탄자라도 되는 것처럼 몰아붙였는데, 노무현대통령의 분노의 정치는 요즘 단순히 여야가 비생산적으로 정쟁하는 식의 증오의 정치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본다. 이 분노는 오히려 "사회적 울분"이라고 표현해야 옳다.
당시 시대적 상황을 봐도 울분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노릇이다. 그렇게 "공적인 울분"으로 정치를 시작하고,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비정상적인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는 거 아닌가?뭐가 잘못됐다는 건가?
따라서 분노는 참여의 동인이고 에너지라는데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인제의 뻘짓으로 노풍은 더욱 거세졌다.
김민새의 뻘짓으로 노풍은 되살아났다. 정몽새의 뻘짓으로 노무현은 승리했다. 뻘짓에 분노한 대중의 참여가 아니고서는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가 없었다.
분노마저 표현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변모한다. 냉소주의가 팽배하여 정치가 저급화되는 원인은 분노의 계기, 분노의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느냐?
내가 쓰는 이 글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만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한국의 수구떼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얽히고 설켜서 유착, 결탁된 모습을 확인하면서 서프앙들이 분노하고, 그 분노로 인해 다시 각성하고, 그 각성으로 인해 또 다시 전투화 끈을 조이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작업도 전혀 의미가 없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잡소리가 너무 길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늘은 한국의 명문가문 제 3편 "김동조 가문"에 대해 캐 들어가보자.
김동조라는 사람은 부산출신이다. 우리가 흔히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알고 있다. 왜 거목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수구언론에서 그렇게 부르니 그런 거 보다 하는 거다.
그러나 고위 외교관료직을 수행했다고 해서 무조건 거목이니 뭐니 하고 불러주는 것에 대해 나는 반대한다.그 인물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했으며, 살면서 무슨 덕을 쌓았는지 그게 중요한 판단기준이어야지 무조건 고위 외교관료직을 수행했다고 해서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불러주면 어쩌자는 거냐?한국외교의 산증인이라고 하면 그나마 이해하겠다.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일본 큐슈대학을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후생성과 내무성에서 근무하면서 일제에 충성하는 것으로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사람이다. 한국전쟁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브루스 커밍스라는 유명한 학자가 쓴 "한국현대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인이 일본에 협력한 훨씬 더 대표적인 예는 김동조(金東祚)의 경우로서, 그는 동족인 한국인을 감시하는 경관으로 인생의 첫발을 내디딘 후, 결코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과 한국 사이를 빈번히 오가며 일본에 징용된 수많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일본인들에게 밀고했다.
나중에 일본인들은 그를 승진시켜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다른 지급품들을 배급하는 전시 책임자로 삼았다.
1945년 이후 그는 미군정을 위해 역시 한국인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배급하는 일을 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신설 외무부에 들어가서 차관으로 승진을 했다가 퇴직했다.
그는 1961년 군사 쿠데타 이후 여당과 중앙정보부에 외교고문으로 복귀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에 기여한 후 그는 첫 주일 한국대사가 되었다.
대사로 재직하는 동안 “그는 일본 정치가들에게 뇌물을 준 매수꾼으로서 재일한국인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다.”곧(1967) 그는 주미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몇 년 후 그가 미국의회 방문을 준비하면서 1백달러짜리 지폐가 가득 든 봉투들로 서류가방을 채우는 것을 본 고용인이 그 사실을 폭로하는 바람에 큰 물의를 빚었다.>
사회가 어수선한 시점에서 체계도 안 잡힌 대한민국 정부하에서 일제 고급관료 경력으로 들어와 이곳 저곳 부처를 넘나들며 일하다가 느닷없이 외무부 정무국장이 되고 이승만정권하에서 불과 서른 여덟살의 나이에 외무부 차관이 되었다.
정통 외교관료도 아니고, 내가 보기엔 단순히 일본사람들과 가깝다는 이유로 승승장구한 거 같다.
충격적인 것은 굴욕적인 한일회담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수석대표였고, 주일대사였다는 점이다.
미국 중앙정보부 특별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가 허겁지겁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서둘러 체결한 것은 군사쿠데타 직후부터 일본기업으로부터 6600만달러의 정치자금을 받는 등 뒷거래를 해왔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혀낸 것이다.
노무현대통령이 몸담고 있었던 꼬마민주당에서 96년 총선 당시 이 문제를 정치쟁점화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단순한 정치적 의혹제기로 폄하됐다. 어쨌든 그 선봉에 김동조가 있었던 것이다.
김동조가 수석대표로 나가서 체결한 한일회담의 성과라는 것은 참혹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확인된 일제치하 징병, 징용피해자가 총 103만명이었다. 그 가운데 약 8만명이 사망자이고, 3만명이 부상자였다.
그 가운데 겨우 8천명의 사망자 유가족에게 쌀 15가마 살 정도의 돈인 30만원씩 나눠주는 정도로 끝났다.
그렇게 형편없는 보상을 해주고도 개인청구권 문제는 흐지부지 처리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명확한 사죄도 문서로서 전혀 받지 못했고, 독도 영유권도 확실하게 해 놓지 못했고, 피해자의 생사확인도 안 했고, 피해자 통계도 제대로 안 냈고, 사망자 유해발굴 문제도 논의하지 못했고, 위안부 및 원폭 피해자 문제는 거론조차 안했고, 징용 사할린 동포 처리문제도 꺼내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대표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측의 제공은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협력이라는 기본적 사고를 갖고 있다" 이렇게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굴욕적인 협정을 돈 몇 푼 받고 체결하는데 김동조는 앞장섰던 것이다.
과연 외교계의 거목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장희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한일협정은 일본의 전범세력과 한국의 친일세력이라는 부도덕한 두 세력이 역사의 지배세력으로 등장, 야합하여 만든 합작품이다. 그래서 한일협정은 몇 푼의 돈에 혈안이 되어 일제식민지 과거사 인식을 전면 외면함으로써, 그에 부응한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해 매우 불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어쨌든 눈을 씻고 찾아봐도 한마디의 사과도 없는 그런 비정상적인 한일협정을 맺는데 앞장선 공로로 김동조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미국이라면 끔뻑 죽던 시기에 주미대사를 무려 6년이나 하면서 유신정권을 합리화하는 첨병이 되었다. 그리고는 외무부장관에 발탁되어 2년여간 활동하다가 그 후 박정희의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직을 2년여간 수행하며 반민주적 유신체제 수호의 간성이 된다.
유신 말기 난데없이 한국석유개발공사 사장을 역임하다가 박정희정권이 붕괴하고 나서는 관직에서 물러나서 느닷없이 변호사 개업을 한다. 김동조의 약력을 아무리 뒤져봐도 그가 어떤 근거로 왜 변호사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모든 게 어수룩한 시기였다.
어쨌든 이런 대단한 이력을 가지고 김동조는 거대한 혼맥을 구성하기 시작한다. 김동조의 부인은 약사이다. 약사출신인 부인 송두만과의 사이에 2남 4녀를 두었다. 장남 김대영은 그다지 뚜렷한 움직임이 엿보이지 않는다. 차남 김민영은 현재 외국어대 무역학과 교수이다.
김민영의 부인은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인 정다미다.
장녀 김영애는 스스로 거물급 인사다. 모건스탠리 부사장이다. 오히려 김영애의 남편 최융호의 이력이 부인에 비해 밀린다.
차녀 김영숙은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손원일의 장남 손명원과 결혼을 했다. 손원일의 부친이 유명한 손정도 목사다.
손명원은 현대미포 사장과 쌍용자동차 사장을 역임했다.
세째 딸 김영자는 GS그룹 허씨 집안에 시집을 갔다. 남편이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사장이다. 막내 딸 김영명은 우리가 몽새라고 부르는 정몽준과 결혼을 했다. 이렇게 보면 별거 아닐 거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혼맥은 사실 대단한 것이다.
차녀 김영숙과 사위 손명원 사이에 낳은 손정희가 영화배우 남궁원의 천재 아들이라는 헤럴드경제신문 사장 홍정욱과 결혼을 하였다.
김동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헤럴드경제신문이 특히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외손녀 사위가 운영하는 회사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이 헤럴드경제신문은 노태우의 사돈인 신명수가 창업한 회사이다. 이 점은 특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말 문제는 세째 딸 김영자다. 김동조의 세째 딸 김영자와 사위 허광수 사이에서 낳은 허유정의 남편이 현재 조선일보에서 후계자 수업을 하는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의 아들 방준오다. 방준오가 김동조의 외손녀 사위가 된다는 말이다.
김동조의 세째 사위 허광수가 누구냐?? 바로 이병철과 더불어 삼성을 공동설립한 허정구의 세째 아들이다.
그 유명한 영남의 만석꾼 허만정의 손자이다. 허광수의 큰 형은 삼양통상 회장 허남각이다.
허광수의 작은 형은 GS 칼텍스 회장 허동수다. GS 칼텍스의 부회장은 김동조의 세째 딸인 김영자가 맡고 있다.
허광수의 누나는 누구냐? 바로 벽산그룹 회장 김희철의 부인 허영자다. 이 김희철의 동생이 바로 동양물산기업 대표이사 김희용이다.
김희용의 부인은 박설자다. 박설자의 아버지는 박상희다.
박상희가 누구냐? 바로 그 악명높은 박정희의 세째 형이다. 그러니까 김희용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되는 거고, 박근혜의 사촌형부가 되는 거다. 김종필과는 동서지간이 된다. 김종필의 부인 박영옥과 김희용의 부인 박설자가 자매지간이다.
둘 다 박상희의 딸들이다. 박상희의 아들로는 박준홍이 있다.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1급 관리관인 정무조정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32살의 나이에 대한축구협회장이 되었다. 다시 김동조의 세째 사위 허광수로 돌아가자. 이 허광수라는 인물이 운영하는 삼양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도 결코 만만한 회사가 아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들이 그토록 미워하는 조선일보 류근일 주필이 바로 삼양인터내셔널의 사외이사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허광수의 작은 아버지 허준구는 LG건설 명예회장이다. 또 다른 작은 아버지 허신구는 LG그룹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막내삼촌인 허승조는 GS유통 대표이사로서 태광그룹 창업주 이임룡의 장녀 이경훈과 결혼을 하였다.
그러니까 이경훈은 허광수의 작은 어머니다. 이 이경훈의 동생 이재훈이 서울시장을 지낸 양택식의 아들 양원용과 결혼을 했다.
이 양택식의 동생 양기식의 딸 양경희가 중앙일보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와 결혼을 했다.
조중동은 한 집안이라는 것은 바로 여기서 나온 얘기다.
허광수를 중심으로 본다면 허광수의 딸 허유정이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의 장남 방준오와 결혼을 하고, 허광수의 작은 어머니 이경훈의 동생 이재훈의 시아버지 양택식의 조카딸 양경희가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의 동생 홍석조와 결혼을 하고, 허광수의 작은 어머니 이경훈의 동생 이재훈의 시아버지 양택식의 조카딸 양경희의 조카딸 이서현이 동아일보 회장 김병관의 아들 김재열과 결혼을 한 것이다.
이것은 물론 다른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고, 삼양인터내셔널 허광수를 중심으로 볼 때 이렇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김동조의 후손들이 얼마나 막강한가? 지금 김동조의 막내 사위 정몽준과 부인인 막내딸 김영명의 인맥을 더한다면 이것은 거의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사돈에 사돈에 사돈에 사돈을 연결하면 대통령까지 다 연결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다 헛소리다. 그것은 한국의 폐쇄적인 그랜드 서클을 무시하는 발상이다.
설령 가물에 콩 나듯이 어쩌다가 개천에 용나는 식으로 폐쇄적인 그랜드 서클에 누군가가 진입했다 하더라도 그 것은 단지 그 사람 하나가 들어간 것에 불과할 뿐이지 확고하게 입성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런 증거도 없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시골에서 농사 짓는 집안의 딸은 뒷집으로 시집간다. 그 뒷집 딸은 그 앞집으로 시집간다. 그 앞집 딸은 또 그 옆집으로 시집간다. 이래 가지고 어느 천년에 이건희회장 집안에 도달하느냔 말이다. 사돈은 농민, 그 건너사돈도 농민, 그 건너사돈도 농민...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돈의, 그 사돈의, 그 건너사돈을 다 뒤져봐도 실상 다 똑같은 서민들이고,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이다.
주위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런 사례를 찾을 수가 없다. 한국 그랜드 서클의 폐쇄성과 고립성과 배타성과 경직성을 민주개혁세력은 주목해야 한다. 한국 수구 겹사돈 모임을 무시하면 안된다. 한국의 기득권은 바로 이런 강고한 카르텔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개혁을 원하지 않는 강력한 기득권 세력들이 혼맥을 통해서 거대한 망을 형성하고 저항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거의 상식이다. 정몽준이 2002년 12월 18일밤 10시에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노무현후보를 왜 버렸겠나?
혹시 노무현후보에게 적대적인 조선일보의 후계자 조카사위 방준오의 얼굴이 아른거리지 않았을까?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한국의 근대명가 - 04편 노신영 家.
오늘은 한국의 명문가문 제 4편 "노신영"가문을 알아보자.
노신영은 외무고시를 통해 관계에 입문한 정통 외무관료 출신이다. 노신영은 김동조와 관련이 깊다.
김동조가 외무부 장관으로 있을 때 노신영이 외무부 차관에 임명됐다. 김동조는 이동원과 끈끈한 관계다.
내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노신영은 정일권과도 상당한 교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차관시절 국회의장인 정일권에게 유신헌법 신임에 관련된 이야기를 발설한 것도 그렇지만, 둘 다 이북출신으로서 모종의 신뢰가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 사건으로 차관자리에서 해임되었지만, 박정희도 노신영의 능력을 인정했던 모양이다. 매장시키지 않고 주 스위스 제네바 대사로 임명하여 다시 썼다. 전두환 신군부가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자 노신영은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군벌 + 테크노크라트"
노신영은 신군부에 순종하며 협력하는 외무부 장관으로서 대외분야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 후 전두환의 신임을 받으며 2년 8개월간 안기부장을 지냈고, 또 국무총리까지 지내며 노태우와 차기를 놓고 기싸움을 벌일 만큼 강력한 힘을 행사했다. 이른바 노노체제다.
5공정권이 물러가고 노태우정권이 들어선 이후, 노신영도 권력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 이후 연구소에 근무하기도 하고,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으로서 착한 사람 얼굴로 쭉 살고 있다.
노신영에 관련된 사안 가운데 가장 끔찍스러운 것은 "정형근"의 발탁이다.
안기부장 시절 가장유능한 검사라고 정형근을 안기부로 끌어들인 사람이 바로 노신영이다.
노신영은 전두환에게 철저하게 충성하여 깊은 신임을 얻었다. 전두환이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정황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군벌들이 펄쩍 뛰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노태우와 경쟁하면서 최고권력을 지향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노신영가의 실체는.....
노신영은 전두환에게 운좋게 신임을 얻어 5공정권의 지배연합 내부에 기생하면서 테크노크라트로서 군부세력에게 전문적 지식을 가미해주고, 군사정권을 합리화해주고, 군부를 대신해 대국민홍보에 동원되는 하위파트너 역할을 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남덕우, 진의종, 김상협, 유창순 등 모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전두환의 시국수습용 카드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권력 분점의 떡고물을 챙긴 것이다. 또 재벌과 군부와의 매개체 역할도 이들의 임무였다. 대중을 군부와 엮는 것도 이들의 영역이었다.
군부에 의해 급조된 전두환의 민정당이 대중정당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민정당은 정당정치에 기반해서 형성된 정당이 아니므로 정치력도 매우 미약하였다. 따라서 신군부에게는 노신영같은 군사독재체제를 합리화 시켜줄 경험많은 인물이 필요했다.
공작정치의 소모품이었을 수도 있다. 또 대미관계를 원활히 조율할 필요성도 느꼈을 것이다.
또 하나는 하극상으로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이 늘 정통성 시비를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노신영류의 박정희 이래의 관료세력이 여전히 전면에 있음으로써 국민적 저항을 다소 무마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노신영은 광주사태를 수습하면서 최고권력을 구가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축소 사건의 책임으로 정계를 떠났다.
2002년 9월 우리는 노신영을 다시 정치의 무대에서 볼 수 있었다. 현승종, 남덕우 등 단골 멤버들과 더불어 이회창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에 귀빈으로 참가한 것이다. 따라서 전두환 = 이회창이라는 등식은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노신영이 단지 군사독재자 주변에서 권력의 단맛만을 맛본 것이 아니라 그 힘으로 화려한 혼맥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깨뜨리기 어려운 철옹성같은 기득권이다. 어쩌면 영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노신영은 3남 2녀를 두고 있다.
큰 아들 노경수는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로 있다. 요즘 서울대 대외협력본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영국 더 타임즈와 같은 일간지들의 대학평가 방법이 잘못됐기 때문에 서울대의 국제적평가가 낮다는 논리를 부르짖고 있다.
어쨌든 이 노신영의 큰 아들의 장인이 세상을 떠난 "포니 정" 정세영회장이다. 그 덕에 노경수는 70만주의 현대산업개발 주식을 상속받았다. 부인은 정숙영으로서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의 누나다.
노신영의 큰 며느리 정숙영의 동생 정몽규는 코오롱 이웅렬, SK 최태원 등과 고려대 동문으로서 예전부터 절친하다.
이 클럽은 늘 민주개혁세력의 요주의 관찰대상이다. 그 핵심에 코오롱 이웅렬이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삼성 이재용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을 쌓는 것 같다. 이 멤버에 노신영의 작은 사위 풍산회장 유진이 있다는 것도 말할 나위 없다.
정몽규의 부인은 대한화재보험 김성두사장의 딸 김나영이다.
노신영의 큰 며느리 정숙영에게는 파크 하얏트 호텔 사업에 관여하고 있는 정유경이라는 여동생도 있다. 정숙영의 여동생 정유경의 남편은 김종엽이다. 노신영의 큰 아들 노경수의 동서가 되는 이 김종엽은 누굴까? 민주개혁세력에게는 그다지 반가운 인물이 아니다.
김종엽은 김석성의 막내아들이다. 김석성은 전방 전 회장으로서 전방명예회장 김창성의 사촌동생이다. 김창성이 누구냐? 얼마 전까지 경총회장을 지냈고, 현재 경총 명예회장인 바로 한나라당 염창동 당사의 주인이다. 아주 염가에 가난한 한나라당에빌딩을 임대해 주고 계신 분이다.
이 김창성의 동생이 바로 우리 유시민의원이 지난 대통령선거 즈음 중국북경에 가서 간첩과 접선하고 돌아왔다고 떠벌린 한나라당 김무성의원이다. 이 김무성의 누나가 현대그룹 회장 현정은의 모친인 용문학원이사장 김문희로써 얼마 전에 아버지 김용주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박근혜와 이회창의 돈독한 자리를 마련해준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 바로 그 분이다.
이렇게 볼 때 노신영의 큰 아들 노경수의 인맥이라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지금 귀찮아서 이름에 "몽"자 들어가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전부 제외시켰다. 또 정씨가운데 이름 뒷자리에 "영"자 들어가는 그 수많은 삼촌뻘 되는 사람들도 전부 제외시켰다.
게다가 노신영 가문 혼맥의 백미는 둘째 아들 노철수다. 바로 홍진기의 막내 딸 홍라영과 결혼하였다. 이로써 노신영의 차남 노철수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과 동서지간이 되고, 중앙일보 홍석현과 처남 매제 지간이 되며, 삼성의 후계자 이재용의 이모부가 되고, 동아일보 김병관의 차남 김재열 또한 노철수의 조카사위가 된다. 노철수는 삼성에서 경영을 배운 후 독립하여 스스로도 꽤 큰 사업을 벌이고 있다.
얼마나 빵빵한가?
그러니 호텔대전이니 뭐니 하는 신문쪼가리들의 기사는 전부 우스꽝스러운 집안싸움이 된다. 신문쪼가리를 보면 삼성 이건희 회장의 큰 딸 이부진이 호텔신라에 공을 들이고, 또 신세계 이명희 회장의 딸 정유경이 조선호텔에 정력을 쏟고, 정세영회장의 딸 또 다른 정유경이 파크 하얏트호텔에 힘을 쓴다면서 피말리는 엄청난 호텔업계의 대접전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신라호텔 이부진과 조선호텔 정유경은 사촌지간이다. 게다가 파크하얏트호텔 정유경이나 신라호텔 이부진은 노신영 가문을 매개로 다 이어지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건너사돈밖에 안 된다.
어쨌든 이름도 별로 안 알려진 노신영의 아들들 노경수, 노철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삼성가문, 현대가문이 좌청룡 우백호로 버티고 있고, 그 막강한 동아일보, 중앙일보가 뒤에서 받쳐주니 왕후장상이 따로 없는 것 아닌가? 아버지 덕분에 인생은 탄탄대로, 그야말로 기호지세다. 세상에 두려운 게 뭐가 있으랴?
그 뿐인가?
노신영의 둘째 딸 노혜경이 요즘 소전 만들어서 대박 터뜨리고 있는 풍산 유진회장에게 시집갔으니 이것은 더할 나위없는 파워가 아닐 수 없다.
유진은 브이소사이어티라는 민주개혁세력이 집중감시하는 조직의 핵심멤버로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호되게 당한 유찬우의 아들이다.
비록 이혼하긴 했지만 유진의 형수가 박정희의 둘째 딸 박근영(후에 박서영이라고 개명)이다.
요즘 유진은 전경련 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이다. 유진은 특유의 사교성으로 그 아버지 유찬우에 이어 미국 부시가와 교류가 두텁다.
미국 국무장관 파월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전세기까지 제공하기도 했다. 그의 부인 노혜경(우리가 아는 그 노혜경 아님)도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바바라 부시와 친분이 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미국 공화당 인맥과 가장 가까운 집안이 바로 노신영의 사돈인 이 유찬우 집안이다.
김원기 국회의장이 얼마전 멕시코를 방문할 때 풍산 회장 유진과 유진의 손윗 처남, 그러니까 노신영의 큰 아들 노경수가 함께 김원기 의장을 수행했다. 노신영의 장남과 사위가 왜 김원기 국회의장을 수행하지?
김대중 대통령 이래로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할 때는 늘 노신영의 사위 유진이 수행한다.
어쨌든 현대, 삼성, 중앙일보, 동아일보의 배경도 모자라 이 노신영 가문은 미국공화당 인맥에까지 깊숙이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명문가문 반열에 오르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 노신영가혼맥도(盧信泳家婚脈圖)
■한국의 근대명가 - 05편 김치열 家.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김치열의 이름을 발견하고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김치열의 조상에 관련된 신문보도를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김치열은 사성 김해 김씨다. 현재, 이 사성 김해 김씨는 전국에 불과 2000세대 밖에 되지 않는다.
기존의 김해 김씨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성씨다.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이었던 왜장 사야가가 이 사성 김해김씨의 시조다. 이 왜장 사야가는 부산동래에 상륙하여 "명분없는 전쟁은 불가"라며 조선에 투항, 조선왕실로 부터 김해김씨와 충선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이다.
임금이 내린 김해김씨라 하여 사성 김해김씨의 시조라고 부른다.그 선조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투항한지 불과 300년만에, 그의 후손 김치열이 또 다시 이 나라를 배신하고 일본제국주의에 협력을 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으니 이 왔다리 갔다리 행각이 얼마나 웃긴 일인가? 친일인명사전 법조부문 1차 명단에 김치열의 이름은 부끄럽게 걸려 있다.
김치열은 일본 중앙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법조에 발을 들여놓은 인물이다. 김치열은 이승만정권 시절 서울지검장까지 지냈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지자 재야로 돌아가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10년 정도 세월을 보내다가 갑자기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어 본격적으로 유신체제가 들어서자 화려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내가 보기에 일단 현재 박근혜의 지역구인 대구 달성 출신이라는 것이 주효한 모양이다. 중정차장을 3년 정도 역임한 후, 2년간 검찰총장을 지내고, 또 3년 동안 내무부 장관을 거쳐,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박정희가 죽는 순간까지 현직에 있었다.
김대중납치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다. 또 당시 서울법대 최종길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던 중 의문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김치열은 천연덕스럽게 최종길 교수는 자신의 간첩행위가 밝혀지자 남은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 투신한 악질 간첩이라고 발표했다. 얼마 후 김치열은 검찰총장으로 영전했다.
인혁당 사건으로 8명의 억울한 생명을 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 검찰이 사형을 구형할 때 김치열은 검찰총장이었다.그 뿐인가? 남영동 대공분실을 만든 것도 김치열이었다. 아직도 남영동 대공분실에는 "1976년 내무부 장관 김치열"이라는 머릿돌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대공분실에서 김근태장관이 전기고문을 당했고, 잔혹한 물고문으로 박종철열사가 숨을 거두었다. 내무부 장관 시절 김치열은 치안본부 특수수사대 사직동팀과 신길동팀을 만들어 박정희의 특명사건을 수사하면서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박정희가 죽는 순간까지 유신에 충성하는 법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민중을 짓밟고, 독재권력을 강화하는데 헌신했다.
이런 김치열이 1980년 들어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이후락, 김종필 등과 함께 부정축재자로 지목당하였다.
그래서 부정축재로 모은 재산 200억원을 국가에 헌납하는 각서를 썼다. 그런데 그 때 빼앗긴 땅이 지금 1000억원도 훨씬 넘게 뛰어올랐다.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임야 1만평의 시가가 1000억원이 훨씬 넘게 된 거다. 그 때 빼앗긴 경기도 4만 4천평의 땅도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남의 눈에 피눈물 나는 짓을 일삼아 했던 김치열, 자신의 억울함은 참을 수 없었나 보다. 국가를 상대로 준재심 청구소송을 걸어 승소판결을 받았다. 이거 얼마나 훌륭한 재테크인가?? 인공노할 국가범죄에는 시효가 적용되고, 이런 재판은 시효도 없나보다.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해 협조해달라는 요청에 이후락, 김치열은 지병을 핑계로 계속 거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지 재산 찾는데는 아주 열심이다. 2001년부터 죽는 시늉하며 엄살 떨더니 여태 살아있다.
8명의 귀중한 생명을 한 순간에 앗아간 권력기관의 총 책임자였던 김치열... 지나간 죄악에 대해 회개하고 그 유가족들의 고통을 100분의 1이라도 갚을 수 있는 갱생의 길을 찾을 생각은커녕 박근혜 고액후원자 명단에 빠지지 않고 올라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꿈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는 듯 하다.
돈으로 후원할 뿐만 아니라 남덕우 등과 더불어 박근혜의 대표적인 조언자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박근혜 후원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거다. 노환, 지병 때문에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해 진실을 고백할 힘은 없으면서 박근혜를 조언해 줄 수 있는 힘은 펄펄 솟아나나?
독재자 하수인으로 민중을 탄압하고 속였던 경험을 박근혜에게 전수해서 뭘 어쩌자는 건가? 어쨌든 김치열은 독재정권의 주구로 충성하며 민중을 짓밟은 대가로 막강한 금력과 권력을 형성, 이 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 떵떵거릴 만한 화려한 혼맥을 구성하였다.
우선 김치열의 큰 딸 김윤희는 백낙서와 결혼하였다. 백낙서는 인제대 석좌교수다. 김윤희도 고려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 김치열의 사위 백낙서의 집안도 만만치 않다. 이 집안이 그 유명한 인제대 백인제 가문이다.
백용제, 백봉제, 백인제, 백붕제 4형제가 있었다.
그 가운데 백인제, 백붕제가 인제대 백병원을 설립한 것이다. 백인제는 의사였고, 백붕제는 일제 치하에서 사법, 행정과를 패스하고 조선총독부에 의해 군수로 발령받아 재직하다가 변호사 활동을 하던 자였다.그들은 모조리 6.25 때 납북되고 말았다.
그 이후 백씨 가운데 "낙"자 들어가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시기가 되었다. 백인제의 아들 인제대 전 이사장 백낙조, 백붕제의 아들 인제대 현 이사장 백낙환 등이 인제대를 이끌어 나갔다. 김치열은 백씨들의 인제대 서울 백병원 설립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김치열의 사위 백낙서는 백붕제의 아들이다. 유명한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지낸 서울대 명예교수 백낙청도 백낙서의 형이다.
진보진영에 서 있는 이 백낙청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민주개혁세력이 실눈을 뜨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면 최종길교수 추모식 같은 곳에 백낙청은 항상 자리를 함께 한다. 그런데 최종길교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그의 사돈 김치열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실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돈을 찾아가서 항의해야 하지 않을까?
반면 백낙청의 형 백낙환은 자신의 인생에 세 명의 은인 가운데 김치열을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완전히 이율배반이다.
백낙청은 자신 집안의 이율배반부터 정리해야 할 것이다. 개탄스러운 것은 열린우리당 멍텅구리 아저씨들 가운데 요즘 백낙청을 국무총리로 만들어주려는 발상을 하는 자들이 있다.
소위 열린우리당 재야파들이 어제 오늘 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내 정보망에 들어왔다. 헐..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이해찬총리가 물러나면 김치열의 사돈인 백낙청을 총리로 앉혀야 한다니 제 정신인가??세상에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다. 이부영 전 의장은 정치 그만두신 거 아니었나?
다시 김치열로 돌아가자. 김치열의 둘째딸 김영경이 김정수라는 자와 결혼을 했다. 이 김정수라는 자는 농림부 차관을 지낸 효성기계공업 회장 김종대의 아들이다. 이 효성기계공업 회장 김종대의 둘째 딸 김은주가 동성개발 회장 조욱래랑 결혼을 했으니 효성그룹과 연결이 된다.
조욱래의 큰 형이 조석래 현 효성그룹 회장이고, 조욱래의 작은 형이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이다. 이 김종대의 누나가 신동방 창업주 신덕균의 부인 김영자다. 그러니까 김치열의 딸은 이 신덕균의 조카며느리가 된다는 말이다. 신덕균의 아들 신명수는 김치열의 사위 김정수의 고종사촌형이다.
알다시피 신명수의 딸 신정화가 노태우의 며느리다. 김치열의 큰 아들 김형국의 부인이 조양상선 그룹 박남규 회장의 딸 박재숙이다.
박재숙의 오빠, 그러니까 조양상선 회장 박남규의 네째 아들 박재준이 농심그룹 회장 신춘호의 장녀 신현주와 결혼했다.
현재 신현주는 농심기획 상무이사로 있다. 신현주의 큰 아버지가 그 유명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이다.
이 신현주의 여동생 신윤경이 태평양그룹 서성환 회장의 아들인 현 태평양 대표이사 서경배와 결혼하였다.
서경배에게는 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서영배다. 서영배의 부인이 방혜성이다.
방혜성의 아버지가 그 악명높은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이다. 알다시피 방우영의 형이 "밤의 대통령" 방일영이고 방일영의 아들이 바로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이다. 김치열의 아들의 부인의 오빠의 부인의 여동생의 남편의 형의 부인 집이 바로 조선일보라는 거다.
더 줄여서 말하면 김치열의 며느리의 시누이의 제부의 제수씨 집이 바로 조선일보라는 거다. 막내딸 김혜림은 재무부 장관을 지낸 서봉균의 아들 서원석과 결혼하였다. 이렇듯 <군벌 + 관료 + 재벌 + 언론 + 서울대 학벌>이 만들어 내는 불쾌하고 음습한 5중주가 바로 대한민국 수구기득권 세력의 모습이다. 물론 그들이 친일세력을 계승하는 집단이라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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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명가 - 06편 정일권 家.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유용선
내 나이 여섯살 적에아버지와 함께간 그 냄새나는 식당, 그 옆에 냄새나는 변소, 그 앞에 묶여 있던 양치기, 는 그렇게 묶인 채로 내 엉덩이를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 물어. 그 새끼 그 개만도 못한 주인새끼의그 말만은 믿지 말았어야 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번번이 짖는 개에게 물렸다. 사랑을 부르짖는 개는 교회에서 나를 물어 뜯었다.
정의를 부르짖는 개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덮쳤다. 예술을 부르짖는 개는 백주대로에서 내 빵을 훔쳐 달아났다.
괜찮다, 괜찮다는 개소리는 지금도 내 엉덩이를 노린다. 괜찮아, 괜찮아, 물지 않을 거야. 저 새끼, 저 개만도 못한 새끼의싸늘한 속삭임을 나는 도시 믿을 수 없다. 사실 이 시의 제목은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가 아니라 "우리는 지금도 개떼들한테 물리고 있다."라고 해야 맞다.
오늘은 한국의 명문가문 제 6편 "정일권가"에 대해 알아보자. 어릴 때부터 내 머리 속에는 정일권의 이름 석자가 뱅뱅 돌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린 시절 "多景峰"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붙이고 놀던 산이 있었다.
어두컴컴할 정도로 울창한 숲 속에 진달래가 활짝 핀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갑자기 전망좋고 양지바른 곳에 그야말로 호화찬란한 묘가 하나 나오는데 내가 세상 태어나서 본 적이 없을만큼 삐까뻔쩍한 묘였다.
바로 그게 나의 어린시절 놀이터, 정일권가의 묘소였다. 넓직한 잔디밭이 있어서 참 좋았다. 1980년대 초반이었으니까 당시 대다수의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을 때였다. 내가 오죽 아름다웠으면 그 산을 다경봉이라고 불렀겠나?
그 아름다운 산에 봉분을 만들어서 호석을 그야말로 휘황찬란하게 둘러 감아놓고 표석도 참 아름답게 해 놓았다.
그 주변에 수많은 무덤들이 있었지만 호석은 태어나서 처음봤고 그렇게 아름다운 고급석재로 된 상석이며, 표석 또한 그 처음 봤다.
해가 넘어갈 즈음 빽빽한 숲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 정일권 집안 무덤만 환하게 빛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고 감탄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대리석에 햇살이 반사되면 어두컴컴한 숲 속에 광채가 났다. 어린 마음에도 정일권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집 무덤을 보고 느꼈다.
정일권은 1917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지도를 보면 한반도의 최북단이다. 어쨌든 한반도의 최북단에서 태어난 정일권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정일권은 이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상으로 일본 군부대신의 군도를 선물로 받았다.
정일권 집에 놀러온 일본군 장교들조차 이 군도에 거수경례를 하고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고 한다. 그 후 번뜩이는 예복을 차려입고 자신의 모교 광명중학교로 가서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선동하고,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입교를 위한 진학지도를 했다.
정일권은 그야말로 그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일본 육사 수석졸업에, 일본 관동군 사령관 전속부관으로서 화려한 견장을 하고, 허리에는 일본도를 찬 채 백마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이 왜 부럽지 않았겠나? 오로지 조선인 가운데 정일권만이 누리는 영광이었다.
이런 영광을 누리고 싶었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정일권의 언변에 혹하여 줄줄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을 했다.만주군관학교에 그 해(1938년)에 입학한 조선 젊은이들이 13명인데 그 가운데 11명이 정일권의 광명중학교 후배들이다.
이 자들이 해방 이후 정일권을 정점으로 대한민국의 군을 지배했는데 소위 말하는 관북파, 또는 "알래스카 부대"라는 군벌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모조리 대한민국 군내에서 장성급의 요직을 담당했다.
정일권은 어쨌든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로 근무하면서 제국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는 조국과 민족의 비참한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침략자의 주구로서 활동하며 일신의 안위만을 누렸다. 그러다가 미군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정일권은 바빠졌다.
소련군이 선전포고를 하고 곧 일본군이 미군에게 항복하자 정일권은 재빨리 변신을 꾀하기 시작했다. 만주지역의 한국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일본 관동군 출신의 조선인 간부들을 모아 "만주교민보안대"라는 것을 만들어 스스로 사령관에 올랐다.
소련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정일권은 즉시 "만주교민보안대"를 잽싸게 독립군의 모습으로 변신시키고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로 이름을 바꿨다. 심지어 독립군가까지 만들어 불렀다. 이 노래는 후에도 계속 애창되었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치는 애국의 깃발,...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보아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을 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 어쨌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느닷없이 광복군 독립투사로 극적으로 둔갑하였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곧 정일권의 사기행각은 소련군 보안부대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는 곧 무장해제되고 강제해산 명령을 받았다. 또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 정일권은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정일권은 소련군에 체포된 후 소련군 수사관으로부터 소련 유학을 권유받아 유학을 결심하였으나 불합격하였다.
그 이유는 소련군 보안부대에서 정일권을 떠보기 위해서 친구 최 모를 시켜 "소련군 보초를 죽이고 도망치자"는 제안을 하게 했는데 정일권이 덜컥 수락함으로써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 것이다. 즉 소련군 보안부대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반동분자로 몰린 정일권은 시베리아행 숙청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드라마틱하게도 시베리아행 포로열차에서 탈출, 죽기살기로 월남하였다. 월남에 성공한 정일권은 즉시 미군이 운영하는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우수한 일본군 장교에서 독립군으로 변신하고, 소련군에게 체포되자 소련 유학을 결심하고, 극적으로 월남을 하여 영어학교에 입학하는 과정을 한번 보라!!!!! 변신의 대가 살아있는 꺼삐딴 리를 보는 듯하다.
정일권은 충실하게 미군정의 일제 잔재 부활 정책에 편승하여 미군의 신임을 얻고, 지리산에 은거하는 좌파들을 소탕하는데 앞장서서 이승만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5일 뒤, 1950년 6월 30일 불과 32살의 나이에 정일권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된다.
사단과 군단을 지휘해 본 적도 없는 자가 느닷없이 육군참모총장이 된 거다. 전쟁 중 소위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 정일권은 군복을 벗게 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군 윗대가리 새끼들이 전쟁 중에 군인을 양성하라고 국민방위군에 배정된 예산과 물자, 보급을 빼돌리고 죽자살자 달리기만 시켜 부지기수로 굶어죽이고 병들어죽이게 한 사건이다.
무려 젊은이들 천 수백명이 죽었다. 정일권은 이 사건으로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미국 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실로 다행이었다. 훗날 정일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만주의 숨통을 따라 30~50발의 원자탄을 줄줄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50만명에 달하는 중국 국부군을 압록강에 투입하고 우리의 뒷편인 동해에서 황해까지에는 60년 내지 120년 동안 효력이 유지되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을 것이다" 그 후 주불대사로 근무할 때 드골에게도 핵전쟁을 대찬성했다고 고백했다.
한마디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일권의 몰상식한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민족의 고통, 국토의 황폐화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승리만을 꿈꾸는 승리지상주의의 전형이다. 어쨌든 정일권은 1957년 합참의장, 육군대장으로서 22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한다.
그 이후 이승만의 궁정외교의 앞잡이가 되어 터키대사, 주불대사, 주미대사를 맡게된다. 주미대사직에 있을 때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 나흘 뒤 정일권은 하버드대 연구실에서 혁명을 도와달라는 박정희의 전화를 받게 된다.
정일권은 동분서주하며 군사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미국의 각계인사를 접촉한다. 물론 본국에서 김활란, 한경직 따위의 기독교인사들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이 또 박정희를 선전하기 위해 날아와서 정일권을 도왔다. 이 때 정일권은 박정희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제3공화국이 시작되자마자 외무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처음부터 국무총리를 시키려고 했으나 모두 군출신인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한일회담 반대집회가 거세지자 정일권이 국무총리로 올랐다. 이로부터 무려 6년 7개월동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정일권은 운좋게 영국 처칠장례식장에서 기시와 가까이 앉아 대화할 수 있었다. 기시는 A급 전범으로서 사실상 만주국의 실권자였으며 한일 인맥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 정일권과 만주국 실력자 기시는 금방 친밀감을 느꼈다.
게다가 정일권은 만주 관동군 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난성회 회원이었으므로 더욱 문제될게 없었다. 이로써 순탄하게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정일권의 내각을 소위 불도저내각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일권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는 실상 박정희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일권은 무색무취한 스타일로서 철저한 YES맨이었다.
청와대에서 국정보고를 할 때도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만년마담"이었다.
바로 이런 식의 처세술로 박정희를 신처럼 떠받들며 무려 6년 7개월간 최장수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총리직을 6년 7개월간 수행한 후 물러나며 천하의 아부쟁이 정일권은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박 대통령 각하는 정말 진실한 분입니다.
그분의 영도력과 애국심은 언제나 나의 거울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자애로운 인간성은 번번히 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총리직은 물러나지만 그 분을 언제 어디서나 성심 성의껏 보좌해서 이 나라의 국력이 더욱 신장되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총리직을 마친 아부쟁이 정일권은 박정희에게는 유신헌법을 옹호할 국회의장으로서 적격의 인물이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통법부", "행정부의 시녀" 노릇이나 하며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국회가 "어린 아기나 보는" 무위도식 국회의 표상이 된 것이 바로 정일권이 국회의장이 된 9대 국회부터였다.
정일권은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헌법기관을 비방, 모독하는 것을 처벌토록하는 형법개정안을 날치기통과시켰다.
질의도 없고, 찬반토론도 없고, 심지어 의원 수 조차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통과시켰다.
김옥선파동이 일어났을 때도 낼름 처리했다. 그래서 국회의장 정일권의 일처리를 사람들은 "동사무소 직원이 사망신고서에 도장찍듯"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정일권은 사초에 손을 대기도 했다. 심심하면 속기록을 삭제하는 일이 정일권 국회의장의 취미였다.
이런 탁월한 능력 때문에 최장수 국무총리 기록과 더불어 최장수 국회의장의 기록도 보유하게 되었다. 자유와 인권은 엄청나게 손상시키면서도 외유나 세미나만은 매우 풍성하게 했던 국회의장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최장수 국회의장이면서도 가장 적은 회의일수를 기록한 국회의장으로도 역사에 남아있다.
정일권은 이외에도 숱한 의혹을 지닌 인물이다. 사생활도 상당히 문란했던 모양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정인숙사건이다.
그러나 나는 공적인 영역이 아닌 부분에 관해서는 별로 파헤치고 싶지 않다. 또 정일권 스스로 딱 한번 밖에 안 잤다고 하니 이 부분은 생략한다.
이 위대한 과업은 여성지들에게 부여한다.박동선사건과도 연관이 있고, 통일교 문제도 정일권과 연관이 있으나 다 뻔한 얘기다.
자유총연맹 초대총재와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고문을 역임하다가 임파선암에 걸려 지난 1994년 죽었다.
정일권이 죽을 때 유언은 이것이었다.
"전두환 만큼은 정말 나쁜 놈이다." 어쨌든지간에 이 정일권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대한민국 주류로 행세하게 되었는데 정일권가의 후손들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일단 정일권의 후손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문명자씨가 쓴 글을 보면 정일권은 70년대 중반에 현숙한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새장가를 들어 3남매를 또 두었다고 한다.
70년대 중반이면 예순의 나이인데... 헐. 어쨌든 내가 거금을 투자하여 각 신문 인물정보까지 뒤져보았으나 도대체 정일권의 자식들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건 내 책임이 아니다. 순전히 정일권 책임이다. 정일권의 부인도, 며느리도 모르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아나? 파악되는 것은 정일권의 딸 정희경이 코오롱그룹 창업자 이원만의 동생인 이원천의 아들과 결혼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원천의 조카가 일본 와세다대를 나온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다.
이원천의 형, 이원만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동찬, 이동보가 그 들이다. 물론 이동구라는 아들을 나이 일흔 세살 때 낳았다고 한다.
참 그 기구한 얘기를 들어보면 아기가 불쌍하다. 그러나 사생활에 해당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옮기지 않겠다.
이원만의 아들 이동보는 김종필의 딸 김예리와 결혼했다. 곧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어쨌든 이원만은 상당히 정치지향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이원만의 둘째 딸 이미자는 포항의 대지주 박문학의 큰 아들 박성기와 결혼했다.
박성기는 한국 바이린 사장이다. 한국 바이린은 부직포산업의 선두주자인 다국적 기업이다. 막내딸인 이미향은 삼립식품 창업자 허창성 집안으로 출가했다. 태인샤니그룹 회장 허영인이 이미향의 남편이다. 베스킨라빈스니 던킨도너츠니 하는 것들이 다 이 집 거다.
코오롱 설립자 이원만의 큰 아들 코오롱 명예회장 이동찬의 장녀 이경숙은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의 세째 아들 이문조와 결혼하였다.
이동찬의 사돈 이효상, 대구출신으로 동경대를 졸업한 이 자는 정말 악명높은 반민주 인사다.
신라왕조 부흥 운운하며 영남공화국을 부르짖던 자다. 선거 때 지역주의를 최초로 부추긴 자다.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국회에 똥물을 뿌린 김두한을 앞장서서 제명하라고 요구했던 인물이 바로 이효상이다.
이효상은 선거 유세 때마다 이런 개소리를 하고 돌아다녔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이효상은 1963년부터 이런 말도 떠들고 다녔다. "대구는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임금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고장 출신의 박정희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임금님으로 모시자." 정말 이 나라를 위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물이다.
이효상은 이 따위 국민분열 획책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며 코오롱 재벌과 사돈까지 맺은 것이다.
이효상의 세째 아들 이문조는 현재 영남대 교수다.
이문조의 처가 코오롱그룹 현 회장 이웅렬의 큰 누나다. 나는 이효상의 또 다른 아들인 이문희를 눈여겨 보고 있다.
그는 신부로서 천주교 대구교구 대주교다. 현재 김수환의 바통을 이을 천주교 차기 추기경 물망에 올라있다.
말이 되냐?? 코오롱 이동찬의 차녀인 이상희는 고홍명 한국빠이롯드 회장 집안으로 출가했다. 고홍명의 장남 고석진과 결혼한 것이다.
고석진은 코오롱제약(옛 삼영신약) 사장을 거쳐 에나멜동선 전문업체인 빠이롯드전자 회장을 지냈다.
코오롱 이동찬의 세째 딸 이혜숙은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자의 장남인 이동혁과 결혼했다. 코오롱 이동찬의 넷째 딸 이은주는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박정희 경제특보를 지내고, 한국은행장을 거쳐 전두환 신군부하에서 상공부 장관, 경제 부총리를 지낸 신병현의 며느리가 되었다.
남편 신영철의 의사다. 그런데 이 신병현이 봉명그룹 회장이자 문경학원 이사장인 이동녕과 사돈이다. 이동녕은 영남학원 이사장을 지낸 사람이다. 신병현의 딸 신수연이 이동녕의 아들 이승무와 결혼을 하였다. 이승무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서 국회의원을 하였다.
이동녕의 아들인 아세아시멘트 회장 이병무의 둘째 아들 이인범이 얼마전 삼양통상 허정구의 아들 그러니까 GS 칼텍스의 회장 허동수의 막내 딸 허지영과 결혼하였다. 허씨집안하고 맺어졌으면 만사 끝난 것이다.
이동녕은 동양화학그룹 회장 이회림과도 사돈관계를 맺었다. 현 코오롱그룹 회장 이웅렬은 그의 동선이나 그의 배경을 볼 때 민주개혁세력이 의심의 눈초리를 결코 거둘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은 여러번 강조해 왔다.
결혼은 비교적 평범하게 하였다. 한 때 대한민국 고급벽지시장을 좌지우지 하던 동남갈포공업의 서병식의 딸 서창희와 결혼하였다.
다시 원위치하여 정일권 쪽으로 되돌아가자. 정일권의 아들 정세훈은 영풍그룹 창업자 장병희의 딸 장현주와 결혼하였다.
그의 처남 장철진, 장형진 등이 요즘 영풍을 주무르고 있다. 요즘은 31살짜리 정형진의 아들 장세욱이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나보다도 어린데 재산이 몇 백억원이다. 영풍 장병희는 박정희정권 하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김세련과도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침략기에 화려한 견장을 하고, 일본도를 허리에 찬 채 백마를 타고 위세를 부리던 정일권,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못지 않은 금력과 권력을 자랑하며 얽키고 설켜서 일제시대와 다를 바 없이 행세하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개떼들한테 물리고 있다.
■한국의 근대명가- 07편 전두환 家.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사저는 결혼 당시 장인 이규동 예비역장군이 물려준 집이다.
이규동은 육사 2기 출신으로 경리감 출신이다. 이규동은 본래 부유한 집의 아들로 경리감 출신이니 의재에 밝았다.
이규동은 외손자 전재용에께도 130억의 상당한 유산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전두환의 85년생 손녀 전수현이 가지고 있는 강남구 논현동 116평의 시가 30억원가는 음식점도 이규동이 전두환의 장자 전재국에게 물려준 것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88년생 전수현의 남동생 전우석이도 마포구 서교동에 10억원 가는 86평짜리 땅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전두환 정권시절 대한노인회 회장을 지냈다. 이규동의 둘째 딸 이신자는 홍순두씨와 결혼 했다.
홍순두씨는 해운회사 총무부장직을 역임한 후 훗날 5공정권시절 대한통운 사장을 지냈다.으로 임명되었다.
이 홍순두씨의 아들이 권노갑씨의 딸과 혼인하여 사돈관계이고 훗날 홍순두는 항공업계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규동의 세째 딸 이정순은 육사 15기출신인 김상구씨와 결혼하였다. 김상구는 윤필용 사건이 터진 1973년 중령으로 예편하고, 미국으로 이민가 한국일보 하와이지사장을 지냈다.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귀국해 민주평통사무차장, 호주대사 등을 역임하고 12, 14대때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규동의 아들 이창석은 현재 삼원코리아 대표이사다. 삼원코리아는 외국 오디오 수입업체다. 이창석은 공금 횡령과 세금 포탈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조카인 전두환의 아들 전재용이 결혼할 때 축의금을 5000만원이나 냈다.
이규동은 1억 7천만원이나 냈다고 한다. 이창석은 아버지 이규동에게 경기도 화성시 임야 26만평을 증여받으면서 탈세를 하기도 하였다. 이규동의 동생 이규광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최대의 어음부도 사기사건을 일으킨 장영자가 이규광의 처제다.
이규광의 장인과 김대중 전대통령의 세상을 떠난 전처부인 차용애(김홍일, 김홍업의 생모) 여사의 어머니, 그러니까 김대중 전대통령의 장모가 남매지간이다. 이규동의 또 다른 동생 이규승도 군출신으로서 역시 은행부채 유예관련 뇌물을 먹고 징역을 살았다.
전두환은 형제가 무지하게 많다. 그 가운데 전기환과 전경환이 특히 설쳐댔다. 전두환의 형 전기환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순경으로 있다가 시골에서 돼지를 치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12,12 쿠데타가 성공한 즉시 농사를 짓던 전기환은 서울로 올라온다.
동생 두환이가 서초구 반포동에 아파트를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이 집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결국 전두환이 물러난 후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으로 징역을 살았다.
유도대학을 나온 동생 전경환도 새마을운동본부 기금 73억여원 횡령하고 전두환 덕에 여러 이권에서 알선수재를 하고 10억 6,000만원을 탈세하는 등 8개 혐의로 훗날 구속되었다. 전경환의 동서인 황흥식과 김승웅도 이권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전두환의 작은 아버지 전상기의 둘째 아들인 사촌 전순환도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수뢰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전두환의 또 다른 작은 아버지 전상희의 큰 아들인, 사촌 전우환도 고향인 합천 고향에서 작은 정미소를 운영하다가 느닷없이 양곡가공협회 회장이 되었다.
새서울 용역 감사 등, 각종 인허가 청탁에 개입하여 수뢰를 한 혐의로 구속 됬었다. 또한 전두환의 누나 전학렬의 아들, 즉 전두환의 생질(甥姪)도 온갖 청탁에 개입하고 수뢰를 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3남 1녀가 있다. 큰 아들 전재국은 시공사 대표로 대한민국 출판문화업계의 유망사업가이다.
케이벤치라는 회사까지 인수해서 요즘엔 IT 미디어 시장을 넘보고 있다. 얼마 전에 "청와대에서 7년 살은 업보가 너무 가혹하다"고 말해서 민주개혁세력들에게 반감을 사기도 했다.
지금 단지 청와대에 7년 살았다는 이유로 전두환과 그 수족들이 비난받는 것인가?
전두환은 2205억원의 추징금 가운데 불과 314억원만 납부했다. 얼마 전 자기 통장에 전 재산이 29만원이라고 말해 사회에 희자된바 있다.
그러나 장남인 전재국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출판업체인 시공사의 대표로 있고, 강남에 비싼 땅이 있는데다가 손자, 손녀들에게도 수십억원의 재산이 있다. 전재국은 얼마 전 연천에 1만 6천평의 땅을 사서 큰 차익을 얻기도 했다.
이런데도 단지 청와대에 7년 살았다는 이유로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전재국은 얼마 전 음주운전을 하다가 벌금 200만원에 약식 기소됐다. 전두환의 큰 딸 전효선은 한국투자신탁 사장 윤광순의 아들인 윤상현과 결혼하였다. 전두환의 사위 윤상현은 변호사로서 한양대 겸임교수를 맡고 있는 자로 지난 17대총선 때 인천 남구에서 한나라당 간판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민주개혁세력이 정치권 진입을 무슨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할 인물이다. 전두환의 둘째 아들 전재용은 포항제철 명예회장 박태준의 막내딸 박경아와 결혼했다. 박태준 집안은 강원산업으로 연결이 되고 강원산업은 두산이나 현대자동차로 연결이 된다.
또 그 유명한 삼양통상 허씨 집안으로 연결이 된다. 그러나 전재용은 박경아와 이혼하고 공무원을 지낸 최성대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했다. 현재 전두환이 재벌과 끈이 닿는것은 한남동에 100억원대 빌딩이 있는 막내아들 전재만이 유일하다.
전재만은 한국제분회장 이희상의 딸 71년생 이윤혜와 결혼했다. 이윤혜의 여동생 이유경은 신동방그룹 회장 신명수의 동생 신영수의 아들 신기철과 결혼했다. 문제는전두환의 며느리 이윤혜의 막내여동생 이미경이다.
이미경은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의 큰 아들 조현준과 결혼했다. 알다시피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의 동서가 동자부장관을 지낸 이봉서이고 이봉서의 사돈이 한나라당의 이회창이다. 그러니까 전두환의 아들 전재만은 효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과 동서지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현준의 동생 조현문의 부인 이여진이 지금 대통령 비서실에서 노무현대통령 영어통역을 담당하고 있다.
이거 보안이 유지될수 있는지 궁금하다. 대통령 비서실은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는가?
노무현대통령과 부시대통령 사이의 대화를 남편에게 얘기하면 남편이 형에게 얘기하고 형이 동서인 전재만에게 얘기하면 전재만이 처남인 윤상현에게 얘기하고, 윤상현이 그대로 자신의 소속정당인 한나라당에 보고한다면? 전두환은 살아있다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더 골때리는 것은 전두환의 아들 전재만의 동서인 조현준의 작은 아버지가 한국타이어 회장 조양래인데 이 조양래의 아들 조현범이 이명박의 딸 이수연과 결혼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재만의 동서 조현준의 사촌동생 조현범의 장인이 이명박이라는 말이다.
노무현대통령의 영어통역을 담당하는 사람의 남편 사촌동생의 장인어른이 이명박이라는 말이다. 이거 말이 되나?
<이회창 - 전두환 - 이명박>은 굳건하게 손을 잡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알다시피 이명박의 형 이상득도 한나라당의 국회의원으로서 이상득의 큰 딸 이성은 LG벤처투자 회장 구자두의 아들 구본천과 결혼했다.
이상득의 사돈 구자두는 구인회의 네째 아들로써 구자두의 큰 형이 LG명예회장 구자경이다. 구자두의 세째 형수가 삼성그룹 이병철회장의 딸 이숙희다. 구자두의 바로 밑의 여동생 구자혜가 대림그룹 창업자 이규덕의 아들 이재연과 결혼했다.어,,, 골치아프다. 이쯤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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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명가 - 08편 노태우 家 .
처제의 결혼식 때문에 며칠 간 전라남도 땅끝 처가댁을 다녀왔다. 농민들의 시름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구조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내일 모레 예순인 우리 장인어른이 청년 소리를 듣는 농촌을 향해 비교우위론만 외쳐대기엔 상황이 너무 절박하다.
농사가 아니고서야 농민들이 어디에서 생활비를 조달하나? 돈 나올 구석이라고는 농사밖에 없다. 농민들이 편안하고 행복하지 않고서는 결코 선진국이라고 할 수가 없다. 새벽 여섯시에 일 나가서 해가 저물도록허리가 휠 만큼 일하고서 얻는 결과를 보면 참으로 가혹하다.
어쨌든 호남 지역을 순방(?)하느라고 한국의 명문가문 시리즈가 늦어졌다. 오늘은 어떤 명문가문을 후벼파볼까?? 오늘은 군사반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직대통령 노태우 가문에 대해서 알아보자. 흔히 전두환, 노태우 패거리를 우리는 전노일당이라고 부른다.
이 전노일당이 한 짓은 다 거기서 거기다. 전두환 편에서 한번 정리했다시피 한마디로 다 "찢어 죽일 놈"들이다. 인두껍을 쓰고 차마 할수없는 짓을 서슴지 않고 했다. 전두환, 노태우 일당의 정치적, 법적, 역사적 처단을 다시 요구한다.
특히 이 노태우는 초급장교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띠는 전두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지닌육사 동기생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역할을 하면서 전두환의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하게 된 자다. 전두환이 철면피한 군사반란을 일으키는데 전방 9사단 병력을 빼내어 협력하는 등,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2인자로 떠오르게 된다.
그 후 피바다 공화국인 전두환 통치 아래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국민을 철저히 기만하는데 성공하여 직선제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보통사람이라고 속이고, 수천억원의 뇌물을 받고, 나랏돈을 도둑질하였다.
대통령이라는 권좌를 이용하여, SK그룹, 신동방그룹과 사돈을 맺으며 실리를 엄청나게 챙기고 지금도 테니스 구경이나 다니며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다. 아직도 얼굴에 기름끼가 잘잘 흐른다. 이런 자가 전직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여태까지 무궁화대훈장을 보유하고 있다니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인가?
이미 1997년 내란죄로 무기징역형 선고를 받았으므로 전직대통령이 아니라 이제는 군사반란의 수괴다. 열린우리당이 나서서 당장 상훈을 치탈해야 한다. 어쨌든 지금 그런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다행이다.
누군가 5.18 광주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는 표현 자체가 상투적이라고 하던데 현실 자체가 상투적이다. 전두환, 노태우가 무슨 전직대통령이냐?
언론에서도 전두환, 노태우는 전대통령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야한다. 5월 광주가 민주화운동이라면 그 민주화운동을 피바람을 일으키며 진압한 새끼들은 도대체 뭐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전직대통령 운운하면서 대우해주는 것 자체가 국민들 사이에 가치관 혼돈을 일으킬 만한 빌미를 주는 거 아닌가?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판에 꼬박꼬박 존칭 써주면서 높여줄 이유가 어디있나? 우리가 앞으로 한단계 높은 선진정치문화를 만들어나가자면 별 수 없이 한나라당과 상생을 해야하고,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하겠지만 전두환, 노태우일당은 별개다.
이미 법원에서 내란을 일으킨 반란군의 수괴로 판명난 부정부패의 화신들 아닌가? 적대적 대결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일단 역사를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우리가 역사를 왜 공부하는가? 역사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우리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 위해서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는 거다.
불과 20년전의 엄청난 국가적, 역사적 범죄를 저지른 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물타기를 대신 해주거나 감정에 치우쳐서 면죄부를 주는 식의 역사인식으로는 올바른 미래로 나아갈 수가 없다. 한나라당이 진정 공당이라면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이 역사적 부채를 스스로 정리하고, 독재의 유산을 스스로 청산해서 이제는 역사의 한 단계를 넘어서는 그런 결단을 내려야 한다.
나라를 지켜야 할 현역군인들이 정권을 탈취하고, 이에 저항하는 양민들에게 무자비한 총질을 가한 것을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렇게 탈취한 정권으로 사돈의 팔촌까지 나서서 도둑질에 열을 올리고 부정부패를 일삼은 것은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지금의 한나라당과 이제 별 상관이 없고, 이미 선거로서 국민적 심판을 받았다고 강변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그게 상식적으로 한나라당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을 전국민이 알고 있고, 현재도 그 당시의 실력자들, 관료들이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지금 상황에서는 한국 정치의 비생산적인 대결구도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을 모종의 도덕적 결단이 필요한 것 아닌가?
사람 죽이고, 도둑질하고, 뇌물 처먹고, 거짓말하고, 전기고문하고... 이런 것은 나쁜 짓이다. 나쁜 짓을 나쁘다고 하는 것은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그냥 인간의 도리다. 한나라당에게 인간의 도리를 촉구한다. 그래야 한국정치가 한단계 도약할 수 있다.
과거를 붙잡고, 과거에 얽매여서, 과거에 발목잡혀, 과거를 변명하는 제 1야당이 존재하는 한국 정치는 불행하다. 깨끗하게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과거의 어두운 그림자를 털어내고 진정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지도자의 용기다. 한나라당에 그런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정말 없단 말인가?
그런 참다운 용기를 발휘할때 한국정치의 신기원이 열린다. 모든 한나라당의 구성원들이 과거를 변명하고, 과거를 감추는 것으로 일관해도 한나라당의 단 한명의 올바른 지도자가 나서서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결단한다면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럴려면 우선 사람 죽이고, 도둑질하고, 뇌물 처먹고, 거짓말하고, 전기고문했던 과거의 인맥부터 멀리해야 할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오늘의 주인공인 노태우 집안에 대해 알아보자. 노태우의 부인은 김옥숙이다.
노태우의 친가 쪽은 그다지 볼 게 없지만 처가 쪽은 노태우가 아니더라도 자생력을 갖추고 있는 괜찮은 집안이다.
노태우가 처가 덕을 꽤 본 것이 사실인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김옥숙은 촌스러운 이름과는 달리 좀 럭셔리하다.
직접 디자이너를 불러 청와대의 식기를 까다롭게 호화스런 이미지로 바꾼 것도 김옥숙일 정도다. 김옥숙의 오빠가 김복동이다.
김복동은 노태우와 더불어 육사 11기로서 경북고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노태우와 김옥숙을 맺어준 인물이다.
김복동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전두환과 더불어 육사 11기의 양대산맥을 이루면서 육사 11기 생도대장을 맡기도 했다. 김옥숙의 오빠 김복동은 상당히 의연한 군인상을 보여주었다. 전두환이 군사반란을 일으키자고 회유하자“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오직 군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하자는 약속을 잊었느냐”며 거절했다.
김복동이 노태우의 처남이긴 하지만 이 대목은 참 가슴이 뭉클하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5공 출범이후에 군복을 벗었다.
잠시 낭인으로 떠돌다가 광업진흥공사 사장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권토중래를 꿈꾸다가 정치권에 진입, 한 때 김복동 대망론이 회자될 정도로 권력의 핵심으로 돌격했다.
그러나 거물 김영삼을 만나 김복동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결국 정치권에서 축출 당한다. 김복동의 둘째 딸 김미경은 김한수 한일그룹 창업자의 다섯째 아들 김중명과 결혼하였다. 김복동의 사위 김중명의 큰 매형은 전두환이 만든 민정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이재우다.
김중명의 작은 아버지 김택수는 박정희가 만든 공화당에서 원내총무를 지낼만큼 유력한 정치인이었다. 김택수의 둘째 아들, 그러니까 김복동 사위의 사촌형인 국민생명보험 부회장을 지낸 김중민이 LG창업고문 구두회의 딸 구은정과 결혼하였다.
구두회는 LG창업자 구인회의 막내동생이다. 김복동은 아들이 없고 딸만 네명이 있는데 이 가운데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딸 하나가 증권업협회장을 지낸 강성진의 아들 강흥구와 결혼하였다. 이 김복동의 사위 강흥구의 여동생 강신애가 두산그룹 부회장인 박용만과 결혼하였다.
박용만은 두산의 실질적인 창업자 박두병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김복동은 한일그룹과 두산그룹, LG그룹과 연결되어 있다.
김옥숙의 친인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또한 박철언이다. 경북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였다. 사시 8회다.
내가 보기에 박철언은 권력지향형 검사였다.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을 위해 땀을 흘렸다. 국보위 사법분과 위원이었다.
그 후 승승장구했다. 특히 6공의 황태자라고 불렸다. 노태우의 부인 김옥숙의 고모, 즉 노태우의 장인 김영한의 여동생 김당한의 아들, 즉 고종사촌 동생이다. 꽤 호가호위했다.
정무 제1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지냈다. 거물 김영삼에게 맞서다가 정치생명이 끊어졌다. 요즘 마치 자신이 무슨 의로운 일을 한것처럼 큰소리 뻥뻥치면서 회고록을 내고 있지만, 알고 보면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다가 축출당한 정치검사 출신에 불과하다.
부인 현경자가 비리로 감옥에 간 남편 박철언을 대신해서 대구에 출마하여 금배지를 달기도 했다.
이것은 정치후진국에나 있을 법한 일임에 틀림없다. 박철언의 딸 박지영은 청주지방법원 판사인 이상원과 결혼하였다.
또 하나의 김옥숙의 주요 친인척으로는 금진호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금진호의 또 다른 별명은 경제대통령이다.
대구 대륜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은행원으로 있던 금진호는 이화여대 약대를 졸업한 김옥숙의 여동생 김정숙과 결혼하였다.
상공부 국장 등을 지내다가 전두환의 군사쿠데타가 성공하자 승승장구, 국보위 상공분과 위원장으로 나서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이후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정치권에 입성, 5공의 금융대통령 이원조와 더불어 1992년 대선자금 마련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달 금진호의 아들이자 김옥숙의 조카인 금한태가 한큐에 증권투자로 73억원을 벌어들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젊은 나이에 증권으로만 재산이 300억원이다.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도 한방에 100억원의 대박을 쳤다.
김옥숙의 큰 오빠 김진동은 대구 종로학원장으로 학원계를 주름잡았다. 김옥숙의 작은 오빠 김익동은 경북대 보건대학원장과 경북대 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경북대 명예교수다. 김익동의 부인 김경숙도 영남대 의대 교수 출신이다.
미국에서 변호사노릇을 한다는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은 신명수 신동방그룹 회장 딸 신정화와 결혼하였다.
노태우의 아들 노재헌의 장인 신명수는 1941년 부산 출신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컬럼비아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신동방 창업자 신덕균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영자다. 김영자의 남동생이 알만한 사람은 아는 김종대다.
김종대의 사돈이 그 악명높은 김치열이다. 김종대의 딸은 조욱래와 결혼하였다.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의 동생이다.
신명수는 노태우의 비자금 관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외국으로 돈을 빼돌리고 주가조작을 한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국가는 이 신명수를 상대로 230억원의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판결을 받았다.
노태우의 사돈인 신명수의 동생 신영수는 서울대 의대 교수다. 신영수의 장인은 일본제국주의 시절 조선은행 관리로 출발하여 재무부장관을 역임한 천병규다. 이 신영수의 아들 신기철이 한국제분 이희상의 딸 이유경과 결혼하였다.
이 이유경의 형부가 전두환의 아들 전재만이다. 으악!!
또한 이유경은 효성그룹 조석래회장의 장남 조현준의 처형이기도 하다. 이유경의 여동생인 이미경의 남편 조현준의 작은 아버지가 조욱래다. 조욱래의 딸 조윤경은 신라컨트리클럽 홍준기의 아들인 코코젠 사장 홍석융과 결혼하였다.
이 홍석융의 동생 홍지연이 권노갑의 아들 권태민과 결혼하였다. 권노갑의 딸 권수현이 이순자의 동생 이신자의 며느리가 됐으니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이유경의 여동생인 이미경의 남편 조현준의 또 다른 작은 아버지인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도 만만치 않다.
서울시장 이명박과 사돈이니까. 다 알다시피 노태우의 딸인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맡고있는 경희대 겸임교수 노소영도 당대 최고의 재벌 2세인 SK그룹 회장 최태원과 결혼하였다. 물태우가 물태우가 아님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실리에 이보다 더 강할 수는 없다. 섬유와 화학을 하던 SK가 느닷없이 이동통신 사업자가 된 배경??? 그게 참 궁금하다.
그걸로 지금도 떼돈을 긁고 있다. 전국의 모든 국민이 핸드폰 하나씩 들고 톡톡 거릴 때마다 노태우의 사위가 돈방석에 앉는다.
헐... 난 그래서 지금도 핸드폰을 안 쓰고 공중전화를 이용한다.
배 아파서.. 노태우의 사위인 최태원의 작은 아버지 최종관은 그 유명한 한양대학교 이사장 김연준과 사돈이다.
게다가 최종관은 한 때 끗발 좀 날렸던 나웅배 경제부총리와 사돈이다. 나웅배는 민주개혁세력이 유심히 관찰을 해 볼 인물이다.
나웅배의 동생 나중배는 육사 15기 하나회 출신으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내고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여 사우디 대사를 거쳤다.
나중배는 요즘도 무슨 원로 시국선언 같은 곳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며 노무현정부를 압박하는데 앞장선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태원의 작은 아버지의 사돈인 나웅배의 조카가 수원지방검찰청 검사 이문한이다.
이문한의 아버지가 전두환 비자금 사건 때 변호인으로 활약했던 이진강이다. 이진강의 형이 바로 육사 15기 하나회 핵심멤버인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진삼
이진삼의 딸 이운한이 현재 대검찰청 혁신추진단장인 조근호 검사와 결혼했다. 이 조근호 검사가 김대중정부 시절 청와대 민정 비서관을 지냈다. 뭔가 좀 이상하지?? 검찰의 혁신을 하나회 핵심멤버의 사위가 담당한다?
게다가 나웅배의 매제 박정기는 육사 14기 하나회 출신으로서 윤필용사건으로 군복을 벗고 훗날 한국전력 사장을 맡았는데 그의 사위가 서울지검 형사부장을 거쳐 인천지검 차장검사에 있는 한상대다. 한상대의 부친이 변호사 한윤수다.
이렇듯 노태우의 인맥은 무서우리만큼 대한민국 상층부에 거미줄처럼 뻗어있다. 이것도 피상적으로 살펴본 것일 뿐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구지뢰밭을 파헤치다보면 오늘 잠 못 잘 정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