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문턱, 송당리 목장을 찾았다.
입구에서 삼나무 숲길 따라 1㎞ 쯤 걸었을까? 민오름 아래에 아름다운 추억과 동화 같은 이야기가 오롯이 남아있을 법한 숲속에 외딴집 한 채. 귀곡 산장 같기도 하지만 이승만이 사용했던 별장이다.
오랫동안 패가로 방치되었다가 몇 년 전에 보수했다고 한다.
당시에 이곳에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정원 한 가운데의 팽나무 한 구루가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아름 늙어버렸다.
현관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봤다.
유품들이 채취를 풍기는 듯하다. 안방과 방 새 개에 놓여있는 침대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탁자와 의자, 화장대, 장식장, 주방기구, 냉장고, 전기 오븐, 벽난로, 청소기, 변기 등 등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집기와 가전제품들은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모두가 낡아버렸다.
이 별장은 1957년에 미군의 지원을 받아 대지 660㎡, 건물면적 234㎡의 1층 규모로 1950년대에 나타나는 서구의 새로운 주택의 문화를 예술적으로 표현했다고나 할까 모더니즘 주택 모습으로 지어졌다.
이승만은 이곳을 1959년까지 두 차례 이용했다고 한다. 국가원수가 사용했던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2004년에 국가등록문화재 제113호로 지정되었지만 제주 4·3사건을 일으킨 책임자 논란 속에 50년 넘게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서부의 아담한 단독주택을 옮겨온 것 같은 현무암을 꼼꼼히 다듬어 지은 아름다운 돌집. 자제는 돌을 제외하고는 거의 미국에서 가져왔고, 거실바닥은 돌로 깎아서 신발을 신고 다니는 서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수세식 화장실이 실내 세 곳에 꾸며져 있다. 안방화장실은 욕조시설까지 되어있다.
건물 외벽에 시멘트로 쌍희(喜喜)자를 쓴 것이 독특하다. 두 가지의 기쁜 일이 동시에 어우러지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제주조약돌을 모아 계단에 회문 장식으로 멋을 냈다.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 눈앞에 펼쳐지는 너른 목장을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즐겼던 모습을 연상해 본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때에는 국립마목장 제1소장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제주도 목축문화의 기원지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민들은 1950년대 당시만 해도 상당수는 가축사료인 밀기울로 겨우 연명해 가고 있었다. 그나마 밀기울조차도 가격이 매일 비싸서 구하기 어려웠다. 그즈음에 정부는 미8군사령관을 지낸 당시 한미재단고문이었던 ‘밴플리트’ 에 의해 제주도에 대규모 목장건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밴플리트는 이승만과 친분도 있었지만, 퇴역 후 실제로 캘리포니아에서 목장을 경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계획은 어떻게 보면 국민들에게 쇠고기를 먹이기 위한 정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밴플리트 일행은 제주를 방문, 이곳 송당지역이 목장지대의 최적지임을 확인하고는 계획대로 추진하였다.
이승만이 제주국립목장에 대해 얼마나 지대한 애착을 가졌는지 육군 공병단에 의해 야간 공사까지 하면서 5개월 만에 1차 완공을 끝냈다고 전해진다. 그때, 캘리포니아에서 직송되어 온 미국 산 육우 166두도 성산포항을 거쳐 제주도에 들어온 것이다. 제주도로서는 근대적 제주축산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루 평균 150여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축사 7동과 창고 1동, 특호관사 1동, 을호관사 3동이 완성되었고 자가발전 시설과 구내전화도 가설되었다. 이 별장을 당시에는 귀빈을 모시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귀빈사貴賓舍’로 불렀다.
이승만이 이곳에 마지막 묵었을 때의 나이가 85세였다고 한다. 1960년 이듬해 4․19혁명으로 하야하게 되었으니 더 이상 이곳에 올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1960년 5․16쿠데타 이후에 송당목장의 경영부실을 보고받은 박정희 정부는 목장을 방문하여 실태를 파악하고는 문을 닫으라고 지시함으로써 국립 송당목장의 운명으로서는 끝이 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