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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독립당 大獨立黨연구회 G.INDI.P i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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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국시대原朝鮮後 스크랩 부여와 고구려
능소화 추천 0 조회 34 09.08.03 18: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최리 낙랑국.고구려와 관련한 민족사 이해

번조선4군 지역과 최리 낙랑국

북한 평양지역에 위치한 최리 낙랑국은

[한단고기]에 따르면 본래 요서지역에 위치한

번조선의 제후국으로 단군조선이

47대 고열가 대단군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자

재물을 가지고 번조선 낙랑국 왕 최숭이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와서 나라를 개국하니 최씨 낙랑국이다.

따라서 현재 sbs자명고에서 보여주는 한4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라이며, 소위 한4군도 최초 기록인

사마천의 사기에도 기록되지 않는 지명이다.

오히려 단군4군이라 해야 맞다.

단군4군이란 위만조선의 내부분열로 인하여

어부지리로 위만조선을 먹은 한나라가

요서지역 북쪽에 위치한 해모수의 북부여지역으로

쳐 들어오자, 동명성왕으로 알려진

고두막(고열가 대단군의 손자)이 군대을 일으켜

요서지역의 번조선 유민들과 연합하여 물리치고

낙랑.진번.임둔.현도를 지켜내니 조선4군이다.

이 전쟁후에 고두막은 해모수왕조를 무너뜨리고

고두막왕조를 열게 되고 동부여에서 망명해 온

고주몽이 이 고두막왕조의 3번째 왕에 취임한다.

고두막은 해모수의 손자 해부루를 연해주지역으로

이주시켜 동부여를 개국하게 한다. 그리고 해모수의

직계혈통국가인 동부여에서 유와부인과 해모수 손자인

고추모가 피신생활을 하다가 결국 해부루와 피가 다른

양자 금와왕의 아들 대소세력에게 쫓겨나 북부여로

망명하게 되어 북부여 왕 고무서가 아들이 없어

고추모를 둘째 딸과 혼인시켜 후계자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고추모는 단군조선을 계승한

북부여 천제(대단군)의 아들이며,

고구려가 북부여를 계승했노라고

광개태왕비문에 새기고 있는 것이며

북부여와 패권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북부여 세력인 구태세력이 남하하여 구태후손 고이왕때

온조백제를 통합하고 동아시아 해상제국을 건설하여

성왕때 국호를 남부여로 고친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후에 고추모는 북부여토착세력에게 쫓겨나 남쪽으로

망명하여 비루수(혼강)가 흐르는 압록강변 환인의

골본성에 첫 수도를 정하고 소서노와 계루부의 도움으로

고구려을 열게 되고, 문자명왕때에 비로소 북부여를

멸망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의 역사왜곡으로 한4군으로

왜곡되었다고 봐야 맞다.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력이 크다.

따라서 현재 sbs자명고는 한4군을 한반도지역으로 설정하며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한4군문제는 한무제의 전한왕조와

관련된 내용이며, 위치는 명백히 중국 요서지역이다. 그리고

광무제의 후한왕조와 관련한 낙랑군은 고구려의 후미를

치기위해 최씨 낙랑국의 일부지역을 점령하여 설치한

지역으로 [삼국사기]에도 온조백제와 전쟁을 치르는

기록내용이 있고, 광무제가 바다를 건너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기록내용과 일치한다. 그리고 평양지역에서 후한시대에

중앙정부에 보고하는 관청의 인구조사 목간이 출토되어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그러니 전한 한무제의

존재하지도 않은 한4군과 후한 광무제의

한반도 낙랑군을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최숭이 황해바다를 건너 평양에 개국한 낙랑국은

엄연히 독립국가임으로 최리를 태수가 아니라 왕이라고

명확히 지칭해야 한다. 낙랑공주라 칭하면서 최리태수는

또 무엇인가? 공주라고 할 때는 국가를 운영하는

왕의 딸을 의미하지, 태수의 딸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동(好童, 18년경 - 32년)은 고구려의 제3대 왕 대무신왕의 큰아들로, 성은 고(高)이다.

대무신왕 차비(동부여가 대무신왕때 망한 후  대소동생 영포가 개국한 갈사국 왕의 손녀)의

소생이다. 낙랑공주(樂浪公主)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대무신왕 15년인 32년 음력 4월, 호동은 옥저(沃沮)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낙랑(樂浪)국의 왕 

최리(崔理)가 그를 데리고 돌아가 자신의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하게 하였다. 이후 호동이

고구려에 돌아와 낙랑공주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당신이 국가의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자명고, 自鳴鼓)과 나팔을 부숴버릴 수 있다면,

나는 예를 갖춰 당신을 맞이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을 맞아들일 수가 없소이다."

 

당시 낙랑에는 적이 침입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어 그 사실을 알리는 자명고(自鳴鼓)가 있어

정복하기가 어려웠는데, 낙랑공주는 호동에 대한 사랑을 위해 자명고(自鳴鼓)와 나팔을 부숴버린 후

이 사실을 호동에게 전한다. 그러자 호동이 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는데, 낙랑국 왕

최리는 한참이 지나서야 고구려의 침입을 알고, 자신의 딸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알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딸을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그러나 실제로 고구려가 낙랑을 평정한 것은

대무신왕 20년인 37년의 일이었으므로 이를 모두 사실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이렇게 호동이 공을 세우자, 대무신왕의 원비(元妃)는 그가 자신의 아들을 대신하여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대무신왕에게 호동이 자신을 욕보이려 했다고 아뢰었다.

대무신왕은 이를 믿지 않았으나, 왕비가 울면서 계속 이야기하자, 결국 사실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이에 호동은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으며, 대무신왕은 호동이 죄가 있다고

판단하여 죽이려 하였다. 측근이 호동에게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느냐고 묻자 호동은,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그것은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며,

부왕에게 근심을 더해주는 것이니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

라는 말을 남기며, 자살하였다. 또한 자살의 원인을 두고 공주에 대한

사랑의 번민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호동이 죽고 대무신왕의 원비에게서 낳은 아들이 고구려 왕이 되었는데,

폭군정치를 하여 결국 측근에게 살해당하였다. 고구려 왕의 자리는

호동이였던 것이며, 결국 원비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라 할 수 있다.

호동이 잘 생기고 인성까지 좋으니 민심이 따랐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시기한 원비가 음해를 하여 죽이니 또한 원비의 아들도 죽임을 당한 거.

 

세상사 다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다.

- 윤복현 -

고구려 3대 왕은 대무신왕이다. 유리명왕의 3남이고 이름은 무휼이며 재위 기간은 18년~44년이다. 부인은 원비와 갈사왕의 소녀인 차비가 있다. 원비는 모본왕을 낳았으며 차비는 호동왕자를 낳았다. 호동왕자는 후에 낙랑국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와 결혼을 하나 원비의 모함으로 죽고 만다.

  대무신왕은 즉위 11년인 28년에 한나라의 요동태수가 위나암성을 포위, 공격을 했으며 즉위 15년인 32년에는 호동왕자가 낙랑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고구려 4대 왕은 민중왕이다. 그는 유리명왕의 5남이며 대무신왕의 아들 우가 나이가 어려 왕위에 즉위 못하여 그를 대신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색주이며 재위 기간은 44년~48년이다. 부인도 없어 아들 또한 없다.

 

  호동왕자가 음해로 죽은 후 장성하여 왕위에 오른 고구려 5대 왕은 모본왕이다. 이름은 우, 또는 애루이며 재위 기간은 48년~53년이다. 원래 아버지 대무신왕의 왕위를 이어 즉위해야 했으나 나이가 어려 즉위하지 못했다. 이후 민중왕이 소생 없이 죽자 그에게 왕위가 돌아왔다. 그는 대무신왕의 장남으로 고구려의 폭군으로 유명하며 신하에게 죽은 고구려 최초의 왕이다. 그는 시종인 두로에게 죽었다. 부인은 워비가 있으며 소생은 익이 있다.

 

  고구려 6대 왕은 태조왕이다. 그는 유리명왕의 6남인 재사의 아들이다. 재사와 부여 여자에게서 난 장남으로 이름은 궁, 어수이며 재위 기간은 53년~146년으로 고구려에서 오랫동안 왕위를 지켰으며 장수한 왕이다. 부인은 한 명이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막근과 막덕을 낳았다. 즉위 53년인 105년에 한의 요동 현을 공략하였으나 요동태수에게 격퇴당했다. 즉위 80년인 132년에는 강유 등이 왕의 아우인 수성에게 왕의 찬탈을 권유한다. 이에 태조왕은 즉위 94년인 146년에 아우 수성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고구려 7대 왕은 차대왕이다. 이름은 수성이며 재위 기간은 146년~165년이다. 재사의 차남으로 태조왕의 아우이다. 부인은 한 명이며 아들은 추안이 있다.

  그는 원래 132년에 강유 등의 말을 듣고 왕위 찬탈을 하려 했으나 더 기다리기로 하였다. 원래 이전부터 왕이 오래 살았으니 언제 죽을지 몰라 폭동을 대비하여 왕위 찬탈을 마음 먹었으나 언제나 뒤로 미루었다. 왕위에 욕심은 많았으나 결국 평화적으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즉위 20년인 165년에 연나부의 명림답부에게 살해당한다. 하지만 폭군이었던 것은 아닌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8대 왕은 신대왕이다. 이름은 백고, 백구이며 165년에 즉위하여 179년에 승하하였다. 재사의 3남으로 차대왕의 아우이다. 왕비는 위의 형들과 같이 1명이었으며 소생은 발기, 고국천왕, 산상왕, 계수가 있었다.

  즉위 2년인 166년에는 자신의 형이자 부왕인 차대왕을 살해한 명림답부를 국상에 임명하고 좌보와 우보를 구상으로 고쳤다. 즉위 8년인 172년에는 명림답부가 후한의 침략군을 격멸시켰다. 신대왕이 죽던 즉위 15년 179년에 명림답부도 사망하였다.

 

  고구려 9대 왕은 고국천왕으로 신대왕의 차남이다. 이름은 남무이고 179년부터 197년까지가 그의 재위 기간이다. 원래 그에게는 발기라는 형이 있었으나 신대왕이 죽은 후 열린 제가회의에서 발기는 불초하다는 이유로 왕위계승에서 물러나 남무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부인은 우소의 딸인 우씨가 있으며 소생은 없었다.

 

  즉위 6년인 184년에 요동태수가 침입해오자 왕자 계수가 나서서 토벌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왕이 직접 나서 격파하였다. 즉위 12년인 190년에는 좌가려 등이 모반을 꾸몄다가 들켰으며 이에 오랫동안 내분이 진행되다가 즉위 13년인 191년에 반란을 진압하였고 을파소를 국상에 임명하였다. 이후 즉위 16년인 194년에 을파소가 진대법을 실시하였다.

 

  고구려 10대 왕은 산상왕이다. 신대왕의 3남이며 이름은 영우, 이이모이고 재위 기간은 197년~227년이었다. 그는 즉위년에 자신의 큰 형인 발기가 반란을 일으키나 곧 살해된다. 그리고 자신의 형인 고국천왕의 부인인 우씨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는 기묘한 현상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소생이 없었다. 그 외에도 주통촌 여인인 차비가 있었다. 차비는 동천왕을 낳는다.

  즉위 13년인 209년에 도읍을 환도성으로 옮기는 업적 외에는 별 다른 것이 없다.

 

  고구려 11대 왕은 동천왕이다. 산상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교체, 우위거이다. 재위 기간은 227년부터 248년이며 부인은 한 명 있었고 중천왕, 예물, 사구 등을 낳았다.

  즉위 8년인 234년에는 오나라와 화친을 맺고 즉위 11년인 237년에는 위나라의 연호인 하례를 쓴다. 즉위 21년인 247년에는 평양성(장수왕 때의 평양성과는 다르다)을 축조하여 이거한다.

 

  고구려 12대 왕은 중천왕이다. 동천왕의 장남이며 이름은 연불, 재위기간은 248년~270년이다. 부인은 연씨 부인과 관나부인이 있다. 관나부인은 소생이 없었으며 중천왕의 장남의 이름은 기록되어있찌 않다. 차남은 서천왕이다. 그리고 그 밑으로 안국군 달가, 일우, 소발 등이 있었다.

  즉위 26년인 260년에는 6좌평과 관위 16품을 정하고 공복 제도를 실시하였다.

 

  고구려 13대 왕은 서천왕으로 중천왕의 차남이다. 이름은 약료, 또는 약우이며 재위 기간은 270년~292년이다. 부인은 우수의 딸인 우씨가 있으며 소생으로는 봉상왕과 돌고가 있다.

  즉위 17년인 286년에는 왕의 아우인 일우와 소발 등이 모반을 하였으나 곧 들켜 처형되었다.

 

  고구려 14대 왕은 봉상왕이다. 서천왕의 장남이며 치갈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상부, 삽시루이며 292년에 즉위하여 300년에 죽었다. 부인과 소생은 없었다.

  그는 고구려의 폭군으로 즉위 3년인 294년에 자신이 국상에 임명한 창조리에게 왕위를 빼앗겨 자살한다.

 

  고구려 15대 왕은 미천왕으로 서천왕의 차남인 돌고의 장남이다. 호양왕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을불, 우블이며 재위 기간은 300년~331년이다. 자신의 아버지 돌고는 봉상왕이 왕위에 즉위했을 때 왕위 찬탈의 가능성이 있다 하여 죽였으며 그의 부인과 아들들까지 다 죽였다. 하지마 을불은 도망쳐 소금장수로 살았다가 봉상왕이 죽자 왕위로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치적은 없다. 부인은 주씨가 있으며 소생은 고국원왕과 무가 있다.

 

  고구려 16대 왕은 고국원왕으로 국상상왕이라고도 한다. 미천왕의 장남으로 이름은 소, 사유이며 재위 기간은 331년~371년이다. 부인은 비가 있으며 소생은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있다.

  즉위 12년인 342년에는 연나라가 미천왕릉을 도굴하며 환도성을 함락시킨다. 이에 다음 해에 왕의 아우를 연나라에 보내 조공을 하며 미천왕의 시신을 돌려받는다. 하지만 같이 볼모로 잡힌 왕모 주씨는 즉위 25년인 355년에 돌아온다. 즉위 41년인 371년에는 백제의 태자인 근구수가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이에 맞선 고국원왕은 전사하고 만다.

 

  고구려 17대 왕은 소수림왕으로 소해주류왕, 해미류왕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구부이며 재위 기간은 371년~384년이다. 고국원왕의 장남으로 부왕이 전사하자 왕위에 올랐다. 부인은 없었다.

  즉위 2년인 372년에 태학을 설립하고 다음 해에는 율령을 반포하였다. 즉위 5년인 375년에는 불교를 공인하고 사찰을 창건하였다.

 

  고구려 18대 왕은 고국양왕으로 이름은 이련, 이지지이다. 고국원왕의 차남으로 재위 기간은 384년부터 391년까지이다. 부인은 한명이며 소생은 광개토왕 뿐이었다.

  즉위 2년인 385년에 요동과 현도를 공격하였으나 연나라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겼다.

 

  고구려 19대 왕은 광개토왕이다. 이름은 담덕, 안이며 재위 기간은 391년~413년이다. 고국양왕의 소생이며 부인은 한명이며 소생은 장수왕과 승평이 있다.

  즉위 2년인 392년에 백제를 빈번하게 공격하고 고구려의 전성기를 마련한다.

 

  고구려 20대 왕은 장수왕이다. 이름은 거련으로 재위 기간은 413년~491년이다. 광개토왕의 소생이며 부인은 한 명 있었다. 소생은 조다가 있다.

  즉위 15년인 427년에 수도를 평양성으로 천도하고 즉위 43년인 455년에 백제를 공격한다. 즉위 63년인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살해한다.

 

  고구려 21대 왕은 문자명왕으로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의 아들로 장수왕의 손자이다. 할아버지인 장수왕이 너무 오랫동안 재위한 덕에 아들 조다가 먼저 죽었으며 장수왕이 죽자 소생인 조다가 죽은 덕에 그의 손자인 문자명왕이 즉위했다. 문자명왕의 이름은 나운으로 재위 기간은 492년~519년이다. 장수왕은 즉위 79년인 491년 12월에 사망하였고 문자명왕은 다음해에 즉위하였다. 부인은 한 명이며 소생은 안장왕과 안원왕이 있다.

  즉위 12년에 백제가 수곡성을 침범한다.

 

  고구려 22대 왕은 안장왕으로 이름은 흥안이고, 아버지는 문자명왕이다. 재위 기간은 519년~531년, 부인과 소생은 없었다.

 

  고구려 23대 왕은 안원왕으로 이름은 보연이며, 아버지는 문자명왕, 재위 기간은 531년~545년이며 부인은 비, 추군, 세군 등 3명이 있었으며 이들 중 비와 세군은 소생이 없었고 추군도 소생은 양원왕 한 명 뿐이었다.

  즉위 10년인 540년에 백제가 우산성을 침략하였다.

 

  고구려 24대 왕은 양원왕으로 안원왕의 장남이다. 이름은 평성, 재위 기간은 545년~559년이다. 부인은 한 명이며 소생도 평원왕, 한 명이다.

  즉위 10년인 554년에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25대 왕은 평원왕으로 이름은 양성, 탕성이며 평강왕이라고도 한다. 양원왕의 장남이며 재위 기간은 559년~590년이다. 부인은 워비와 차비, 두 명이며 소생은 영양왕, 영류왕, 대양왕이 있다.

  즉위 28년인 586년에 평양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고구려 26대 왕은 영양왕으로 평원왕의 장남이다. 이름은 원, 대원이며 재위 기간은 590년~618년이다. 부인은 한 명이며 소생은 환치가 있다.

  즉위 11년인 600년에 이문진이 신집 5권을 편찬하였으며 즉위 23년인 612년에는 을지문덕이 살수에서 수나라의 군대를 섬멸하였다. 이를 살수 대첩이라고 한다.

 

  고구려 27대 왕은 영류왕으로 평원왕의 차남이다. 이름은 건무, 성이며 재위 기간은 168년~642년이다. 부인과 소생은 없다.

  즉위 9년인 626년에 당나라 사신이 삼국의 화해를 권유하는데 이는 신라의 권유로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당의 침입을 예상하며 즉위 14년인 631년에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즉위 25년인 642년에 연개소무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만다.

 

  고구려 28대 왕은 보장왕으로 이름은 보장, 장이다. 나라를 잃은 왕이라 시호가 없어 이름을 따서 보장왕이라고 하였다. 재위 기간은 642년~688년이며 평원왕의 3남인 대양왕의 장남으로 평원왕의 손자이다. 부인은 원비와 차비가 있으며 원비는 복남, 덕무를 낳았고 차비는 안승을 낳았다.

 

  재위 4년인 645년에서 당나라가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물리쳤다. 이를 안시성 싸움이라 한다. 내년에는 영류왕 때 부터 짓던 천리장성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다시 다음 해에 당나라의 침공을 받았으며 즉위 19년인 660년에는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했다. 다음 해에는 당나라 군대의 공격이 있었으며 평양성을 포위하고 압록강에거 격전을 벌였으나 당나라가 패배했다. 다시 다음 해에는 연개소문에 사수에서 당나라 군을 대파했으며 2년 후에는 돌사성을 신라에게 점령당했다. 즉위 25년인 666년에는 연개소문이 사망하였고 아들간의 권력투쟁이 벌여졌다.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가 남부의 12성을 들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즉위 27년인 668년에는 나당연합군에 항복을 요청하였으며 왕과 함께 대신 등 20만 명이 당나라로 강제 이주를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고구려가 멸망하였다.

 

  669년에는 당나라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자 이에 대항하여 670년에 검모잠이 한성에서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신라와 연합하여 당나라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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