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구팔공년 사월 첫째 주 일요일 열시, 강릉 신혼예식장.
삼척중학교 박 선생이 친한 동기들 가운데 앞장서 결혼을 했다.
식이 끝나고 주인공을 위시한 선남선녀들은 경포 해변의 횟집에서 특별 축하연을 벌였다.
그러나 주인공은 곧 자리를 떠야했다.
마을잔치가 하루 종일 치러지고 있는 시골집에
부모님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네들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신랑과 절친한 우리도 함께 갔다.
신랑의 집은 시내버스 노선도 없는 마을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부지런히 삼십분은 걸어가야 하는 산골이었다.
그렇기에, 아니 신혼부부 일행이기에 우리는 택시를 대절하였다.
산골 마을의 잔칫날, 그것도 삼대 독자의 혼인 잔치
신랑의 어머니께서 정성을 다해 빚고 담고 차리신 주안상
감칠맛 넘치는 산해진미의 주안상에 둘러앉은 우리들 모두는 총각들이었으니
신랑각시를 희롱하는 술자리는 꿈결처럼 흘러갔다.
어느덧 두시,
나는 정선고등학교 이 선생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이거 차 시간 놓치는 거 아냐?”
“야아 야, 이거 정말 시간 빨리 간데이, 영월 가는 차는 몇 시라고 했지?
내가 갈 영월은 두시 사십분, 이 선생이 갈 정선은 두시 오십분 버스가 막차다.
우리는 아쉽게 일어섰다.
택시라도 대절내면 좋으련만 전화도 없으니,
버스와 택시가 다니는 신작로까지 그저 부리나케 뛰는 수밖에…
신작로에서 택시를 타긴 탓 지만, 두시 사십분을 조금 넘겨 직행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아, 그런데 영월 행 버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 것은 나의 바램일 뿐, 그러면 그렇지 어찌 그럴리가 있겠는가.
“야, 영월 버스는 이미 갔고…, 나랑 같이 정선 가자.
오랜만에 우리 만났는데 정선가서 거나하게 마시고, 새벽에 기차 타면 니 출근시간 딱 맞다.”
그렇게 친구를 따라 정선행 버스에 올랐고,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친구의 단골집을 찾아들었다.
우리들 고향은 산마루를 사이로 하는 이웃 골짜기였다.
이 선생 집은 주문진 향호리 향개마을 참샘집, 우리 집은 거문리 날근터 새말집.
초등학교 때 같은반이던 이 선생이 5학년 때 강릉으로 전학을 갔는데,
고등학교에서 다시 만났고 같은 대학에 진학을 했었다.
대학시절 방학 때면, 한 시간 남짓 걸어서 고갯마루를 넘어 서로의 고향집을 오가며,
쏟아지는 별빛과 이슬, 겨울엔 눈발도 맞으며 한 사발 김치를 안주로 한 되들이 소주 두어 병을 비우곤 했다.
대다수 민중의 곤궁한 삶과, 매판자본과 군사독재의 정경유착에 울분을 토하면서,
그래도 우리들은 고향의 다른 친구들보다는 행복한 존재라고 서로를 위로하면서…
그 날, 정선에서의 술자리는 대학시절 고향의 술자리와는 달리, 그야말로 호화판이었는데,
어떻게 파장이 났는지는 모른다.
눈을 뜨니 훤했다.
시계를 보니 여섯시가 막 넘었다.
아뿔싸, 기차가 다섯 시 오십분에 발차한다고 했는데…,
어찌되었던지 역으로 갔다. 행여나 하고 갔지만, 나를 출근시킬 기차는 역시나 이미 떠나갔다.
아침은 굶은 채 맞이한 점심시간,
선생님들께서 한 상 차림의 인원을 맞추어 대 놓고 점심을 먹는 집은 내 하숙집이었다.
밥상에 앉으며 교감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째 오늘 설 선생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 어제 과음했지.
아주머니, 얼큰한 찌게 빨리 내 와요.”
찌게 냄비를 상에 놓으며 하숙집 아주머니가 말씀하셨다.
“글쎄, 교감 선생님,
설 선생님 오늘 출근하는데 한 달 치 하숙비를 썼대요.
저 총각 한 달 봉급이 얼마나 되죠?”
정선 역에서 택시를 대절하여 하숙집에 와서
택시 대절 요금 오 만원을 아주머니께 빌렸던 것이다.
정선역전에서 여섯시 반에 출발한 택시가
비포장의 좁고도 구불구불한 비탈길 ‘비행기재’를 넘어
영월 연당의 내 하숙집에 도착했을 때는 여덟시 십 분이었다.
그 때 내가 받는 한 달 봉급이 십이만 원에 귀가 좀 달렸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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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순수했고 열정이 넘쳤던 시절을 회상하며
나태의 늪으로 빠져드는 작금의 내 정수리에 찬 물 한 바가지 퍼 부어야겠습니다.
첫댓글 눈에 선하게 그 때의 그림이 그려지네요.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그 시절이 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