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와 60년대: 미국 포스트모던 계파의 발생
R.B.커쉬너의 <현대 영미소설의 이해>중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언급에는 대개 2차 대전 직후에 나타나는 감수성의 단층이 설정되며, 몇몇 비평가들은 그 시대 규명으로서 1945년의 원폭투하와 “핵시대”의 시작이란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언급들은 1960년대와 70년대에서 발단하며, 그 언급 속에서 때로는 거슬러 올라가 카프카의 <변신>(“The Metamorphosis",1916)이나 알프레드 제리의 과격한 익살극인 <우부 로이>(1896)와 같은 작품들이 그 예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초기 언급은 그 기준점으로 샐린져(1919~)의 <호밀밭의 파수꾼>. 솔벨로우(1915~)의 <오기 마치의 모험>. 잭 케루악(1922~ 1969)의 <노상에서>(1957), 죠셉 헬러(1923~)의 <막다른 상황>(1961), 그리고 윌리엄 바러즈의 규범 위반적이며, 창의적 형식을 갖춘 기념비적 작품인 <빈약한 점심>(1964) 등을 예로 든다. 시분야에서는 앨런 긴즈버그(1926~)의 <울부짖음>(1956), 드라마에서는 사무엘 베켓(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1952)계열의 작품과, 그의 서사물 3부작인 <몰 로이>, <말론은 죽다>, 및 <이름붙일 수 없는 것>(모두 1951-1953년간에 불어로 발표됨. 영역, 1951-1960) 등이 포함된다.
대부분 미국 작품인 이들이 풍기는 주조는 분명히 환멸(때로는 무법적인 환희작약으로 희석되는)이다. 이 계열에 선뜻 포함시킬 수 없는 주요 작가 한사람은 조지아 주 출신의 플래내리 오코너(1921-1964)로서, 그녀의 장, 단편 작품들- 그 중에 <현명한 혈통>(1952)과 <난폭한 자가 쟁취하다>(1960) 등이 있다- 은 현대판 고딕적 감수성과 동시대 영국작가인 그래엄 그린보다 훨씬 암울한 가톨릭 종교관을 증언하고 있다.
1950년대에는 여러 사회계층이 느끼는 미국 주류인 중산층과의 소외감과, <난폭자>(1954)나 <이유 없는 반항>(1955)과 같은 영화에서 기록된 청소년 비행문제의 발생에 관한 화제가 두드러졌다. 비행문제나 무정형의 재즈 음악, 마약, 주점의 무법자들로 표방되는 비트족의 하위문화는 모두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들, 특히 사르트르의 <구토>(1938)와 알베르트 카뮈(1913-1960)의 <이방인>(1942)등에서 표현된 염세주의와 아노미 현상에 연관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50년대의 미국 최우수 소설이라 볼 수 있는 랄프 엘리슨의 <투명인간>(1952)은 자연주의와 초현실주의에 가까운 표현을 결합한 작품이다. 주인공의 소외는 베케트의 경우만큼 극단적이나, 분명히 흑인으로서의 위상이라는 역사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죠바니의 방>(1956)에서 제임스 볼드윈(1924-1987)은 나아가 한 미국 흑인 게이가 느끼는 문화적 소외감을 가미시켰다.
영국에서는 문화적 조류가 좀 다르게 흘러갔다. 거기서는 전후의 환멸이 소위 성난 젊은이들‘이라 일컬어지는 작가들을 통해 영국 계급제도의 잔재에 대한 항의로 나타났다. 그 주요 작품으로는 킹슬리 에이미스(1922-1995)의 <럭키 짐>(1954), 존 웨인(1925-)의 <서둘러 내려가라>(1953), 존 브레인(1922-1986)의 <다락방>(1957), 존 오스본(1929-)의 희곡<성난 얼굴로 돌아보라>(1956)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회적 항의는 비트족의 경우만큼 날카롭지 못했으며, 또 성난 사람들’중 누구도 윌리엄 바러즈 정도의 형식적 실험성에는 관심이 없었다. (후자는 여러 다른 문제의 구절들을 무작위로 병치시키는 특유의 “멋 부리기”(cut-up)서술법을 구사하고 있다)
사실 성난 젊은이들은 점차로 문화적 보수파인 반 모더니스트로 나타났다. 그 세대의 대표적 시인인 필립 라킨(1922-1985)은 문화적 모더니즘이 예술적 긍지요, 정통 영국 시에서 벗어난 인위적, 미국풍의 우회로라고 주장했다. <파리대왕>(1954)을 쓴 윌리엄 골딩(1911-)과 같은 영국 작가들은 성난 사람들‘보다 실존적으로 더 암울한 상황을 제시했으나, 그 당시 모더니즘적 시도를 계속하는데 관심을 가진 작가는 소수인 듯했다. 스노우(1905-1980)와 앤소니 파우웰(1905-)과 같은 작가들이 모더니즘의 기법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 상당히 대 연작소설을 썼다. 로렌스 더럴과 조이스 캐리는 다양한 관점을 구사한 연작 소설을 발표함으로써, 후기 모더니즘 계열의 예외자로 불릴 수 있겠다. 좀 다른 모습을 지니지만 위와 같은 성격의 또 다른 작가는 아이리스 머독(1919-99)인데, 그녀의 <그물 아래서>(1954)는 은근한 초현실주의, 익살스런 행동, 및 고의적인 평면적 인물 등으로 이따금 포스트모더니즘 계열로 꼽힌다.
포스트모던계파의 초기 비평가들
각자 나름대로 예술계의 한 출발점을 인식한 현상을 세상에 알린 첫 비평가들 중에는 비평가들 중에는 <반해석>(1964)이란 에세이를 쓴 수잔 손택, <오르페우스의 해체>(1963)를 쓴 이합 핫산, <새로운 돌연변이 체>(1965)를 쓴 레즐리 피들러 등이 있다. 1966년까지에는 명명되지 않은 이 출발점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졌으며, 비평가 프랭크 커모드는 이 비평가들이 지적한 경향들이 모더니즘과 상충되지 않을 지적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핫산의 초기 저술은 베케트가 그 대표로 표방되는 침묵과 반형식주의의 이념을 강조한다. 손택도 일종의 침묵을 논거로 제기하면서, 논의대상인 영화들, 특히 장-뤽 고다르(1930-)와 알랭 로브-그리예의 작품과, 알랭 래스네(1922-)의 <작년에 마리엔 바트에서>등은 자신의 소견으로는 해석을 철저히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손택은 의미를 전혀 고려치 않는 새로운 예술적 신빙성과 감각적 직접성을 요구함으로써, 로버트 라우센버그(1925-)의 회화와 같은 1960년대의 반 구상주의적 예술을 옹호하기에 이른다.
손택이 계속 형식에 대한 관심(혹은 그에 대한 공격)과, “고답적”(high) 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반면, 피들러는 문화에 대한 새로운 개인적 입장을 제기하려고 한다. 그는 “휴머니즘 이후, 남성 이후, 백인 이후, 영웅주의 이후의 세계”(post humanist, post-male, post-white, post-heroic world)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 묵시록적 미래의 대표자들로 보는 새로운 “야만인들”(barbarians)- 그의 표현대로 “백인보다 흑인 쪽”(more Black than White)-을 그 주제로 환호한다. 피들러는 그 이후의 한 에세이인 <경계선을 넘어라- 격차를 좁혀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반지식인, 반이성적, 묵시록적 감수성, 가령 비트족이나 노먼 메일러와 같은 작가들의 소외된 입장에 갈채를 보낸다. 그의 예언에 따르면, 새로운 예술은 과학소설, 웨스턴, 심지어 포르노의 요소들을 뒤섞어 고답적 예술을 벌레스크(burlesque)로 변질시킬 것이며, 구상주의(representationalism)를 포기할 것으로 본다. 피들러는 자신의 초점을 현대 미국 예술과 1960년대에 대두하는 반문화 현상에 맞추면서, 무정부적이며 디오니소스적 관능지향은 물론, 옛 인민당파(populist) 성향이며 정치적 진보성향을 가질, 계몽주의 전통에 대한 자생적 대안물 같은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합 핫산은 1971년경의 몇 출판물에서 모더니즘 자체의 범위 내에서ㅡ 혹은 그에 앞서 나타났던 포스트모던 현상의 한 전통을 가려봄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규정에 맞아들 전후 현대 작가들은 물론, 재리(Jarry), 카프카, 드 사드(de Sade), 및 초현실파 브르통(Breton)과 같은 작가들을 거기에 포함시킨다. 그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그럴듯한 대립항목을 길게 제시한다.:- 형식 대 반형식, 목적 대 유희, 의장 대 우연, 위계질서 대 무질서, 우세/로고스 대 피폐/침묵, 예술 목적 대 그 과정, 현전 대 부재, 구심 대 분산, 장르 대 텍스트, 기의 대 기표, 독자중심 대 작가중심, 생식기/ 남근 대 자웅이형/자웅동체, 확정성 및 불확정성 등등. 이러한 목록은 이 시대에 핫산, 피들러, 및 손택이 제시한 몇 가지 주장을 반영하고 있다.
미국 소설가 존 바스(John Barth)의 유력한 에세이 <소진의 문학>(1967)에서는 그 밖의 다른 현상들이 반영되어 있는데, 그는 이글에서 모더니즘을 통해 문학에서 가능한 대부분의 변화가 시도되었으며, 따라서 현대작가는 극한 상황에 몰렸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를 주목하면서, 이 작가에게서, 문학에는 진정한 “독창성”이란 없으나, “모든 작가는 어느 정도 옛 원형의 충실한 번역자요, 주석가”임을 보여주는 한 실례를 발견한다.
핫산의 또 다른 용어들(텍스트, 기의, 작가 중심적)은 프랑스 이론가 롤랑 바르트의 영향에 관련되는데, 그의 비평 작업이 1960년대 후반에 미국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이 영향력이 특히 중요한 것은 모더니즘이 그 자체를 분석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비평 논리(신비평)를 생성했다고 할 수 있듯이. 포스트모더니즘도 프랑스 <신비평>,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도래의 순서대로)로 알려진 유럽의 비평방법들과 관련이 있다- 또 그들의 옹호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 예술, 건축, 음악, 기타에 대한 논의는 비평가 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이른바 “포스트모던 적 상황”에 대한 논의로 이행했다.
유럽 이론의 유입은 아마 알랭 로브-그리예의 <새로운 소설을 위하여>(1963)에서 시작되었을 텐데, 이 저술은 그 저자와 미셀 뷔토르(1926-), 나탈리 사롯트(1902-)등의 프랑스 <누보로망>을 변호하고 설명하려는 미학적 전략서이다. 로브-그리예의 입장은 반 휴머니즘적이며, 그는 자기 소설의 사물에 대한 집중, 의식을 지속적으로 묘사하지 않는 점, 그리고 서설의 미학적 전개방식으로서 직선적 플롯의 부정이나 파괴 등을 옹호했다. 현대 소설의 개념에 보다 지속적인 공헌을 한 사람은 바르트로서, 그는 “텍스트(작품(Work)혹은 소설‘이란 단어는 너무 휴머니스트적의미를 함축한다고 그는 보았음)의 한 예로서 ”신소설“을 거론했다. ”텍스트"란 “읽기 중심적”이기보다는 “쓰기 중심적”이며(즉 독자의 해묵은 기대감에 부응하기보다 그를 창조적 상호작용에 끌어넣기) 또 “고전적”이기보다는 “현대적”(그러나 바르트는 이 용어로서“모더니즘적”이 아니라, “동시대적”, 혹은 “실험적”이란 뜻으로 쓴 듯하다.)이라는 주장이다. 바르트와 그 밖의 구조주의자들은 말의 ’기표‘와 그 ’기의‘(이것은 임의적이며 항상 부재한다)를 구별한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에서 자신들의 원리를 도출한다고 주장했다. 구조주의자들은 전자(기표)의 체계적 자유를 강조하며, 후자에 우선권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혁신적 제의를 표명했다. 유럽 비평이론의 이러한 양상이 단연코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듯이, 그 미학도 점차로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과 결부되면서 말의 자율성, 서술 형식, 및 실험성- 언어와 서사의 기능들을 특히 조명하는 글쓰기의 특성들-을 특히 강조한다.
유럽 작가들이 영국의 현대소설 발달에 엄청난 영향을 준 반면, 영국 작가들은 대체로 그들에 덜 관심을 가졌으며, 또 이들은 1920년대의 모더니즘 만조기 이루에는 국제적 저술에 전보다 더 무관심한 듯했다. 이러한 태도는 1960년대 후반에 한 비 영어권 작가 군이 영국 소설가들에 보다는 미국 소설가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자 완전히 변했다. 문학 연구 상의 영/미분할 현상은 양국의 작가들이 서로의 작품에 반응을 보이고, 또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칼리비안 제도, 및 여러 아프리카 국가 출신의 영어권 작가들이 그 존재를 부각하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는 프랑스어로도 활동한 애란인 베케트 이외에도, 초기의 영향권으로서 보르헤스(그의 자기 반영적 소설이 번역으로 널리 읽혔다)와, 영어로 쓰기도 한 러시아 망명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있었다. 그 후속 소설인 <창백한 불꽃(1962)에서는 작중 시인의 시 한편에 작중의 한 학자가 끝없이 광적인 주석을 달고 있다. 포스트모던 현상에 대한 일시적 의견일치의 한 전망이 1970년대에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자기 반영성이 강조되었다. 즉 이런 성향의 작품이란 어느 정도 소설에 <관한> 소설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형식적 실험, 사실적 모방의 단호한 거부, 패러디, 문체론의 실험, 등등의 문제를 내포한다.<메타픽션>과 <서픽션>과 같은 용어들이 자기 반영성의 여러 갈래를 나타내는 뜻으로 통용되었다. 존 바스의 <연초 도매상>(1960)과 <염소 소년 자일즈>(1966)등이 그 표본이었다. 전자는 쿠크(Ebeneezer Cook)작의 18세기 실제 시 작품에 대한 소설 형식의 주석서로서, 17세기 후반을 무대로 하면서 18세기 소설 문체로 서술된 피카레스크식 모험담이다. 후자는 대학 캠퍼스 생활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로써, 인간과 염소와의 잡종인 주인공과 컴퓨터 역을 하는 또 한사람을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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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픽션>과 <서픽션>- 이들은 각각 자의식적, 혹은 자아 반영적 작품을 지칭하는 최근의 비평용어들이다. 전자는 미국 소설가 윌리엄 개스가 그의<픽션과 인생의 양떼들, 1970>이란 저술에서 처음 사용했다. 이 용어를 표제로 한 Patricia Waugh 의 <메타 픽션,1984>에 의한 풀이“-Metafiction is a term given to fictional writing which self-consciously and systematically draws attention to its status as an artefact in order to pose questions about the relationship between fiction and reality."
'surfiction'에 관해서는 (프랑스계) 미국소설가인 레이먼드 페더만이 그의 <픽션, 오늘과 내일,1975>이란 저술에서 특히 자신의 소설에 비추어 고찰하고 있다. “The entry of the narrator into the text is also a defining feature of what has been called surfiction'. Raymond Federman's book[ ... ] discusses the mode in terms of overt narrational intrusion so that [ ... ]the focus appears to be on the ironist him/himself rather than on the overt and covert levels of the ironic text. Telling as individual invention, spontaneous fabrication at the expense of external realty or Literary tradition, is emphasized [ ... ]
그밖에 이들과 유사한 의미로 쓰이는 다른 용어들에는
‘introverted novel','anti-novel','irrealism','self-begetting novel','fabulation'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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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자주 인용되는 포스트 모돈 계열의 작가는 아마 토마스 핀쳔(1937-)일 텐데, 특히 그의 초기 소설인 <브이>(V.,1963),<49호 품목의 경매>(1966),<중력의 무지개>(1973) 등은 모두 우주적 문화 편집증을 주제로 삼고 있다. 미국의 포스트모던계열의 소설에서 함께 거론될 수 있는 다른 작가로서는 커트 보네거트(1922-), 윌리엄 개스(1924~), 로버트 쿠버(1932-), 도날드 바셀미(1931-1989) 등이 있는데, 모두 일종의 공상작가들이다. “새 물결”(New Wave)식 과학소설이 비평계의 주목대상으로 떠올랐으며, 그 쪽의 보다 문화적 실험 작가인 사뮤엘 델라니(1942~), 르 귄(1929~), 그리고 영국 작가인 발라드(1930~) 등이 나름대로 환영을 받았다. 1970년대 이래 탁월한 여성 과학소설가( 더 포괄적이고 새로운 의미에서의) 들이 다수 출현했는데, 여기에는 미국 흑인작가 옥타비아 버틀러(1947~)도 포함되며, 또 한편 로데지아 출신의 도리스 레싱(1919~)과 같은 정통 작가들이 때때로 월경하여 이 장르를 실험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존 파울즈(1926~)가 <프랑스 중위의 정부>(1969)라는 작품을 통해 빅토리아시대 소설을 모방하고 작가의 평문을 통한 개입과 , 존 파울즈라는 작중 인물이 출현하는 이색적 모습을 보임으로써, 흔히 이 소설유파에 포함되며, <서커스에서의 밤,1984>과 같은 환각적 우화를 쓴 안젤라 카터(1940~1992)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바스는 전작 에세이의 후편인<소생의 문학, 1980>에서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는 주도적 포스트모던 작가로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나의 이상적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는 20세기의 모더니스트 선배나 19세기의 모더니스트 이전 대선배, 그 어느 쪽과 한갓 절연하지도, 또 그쪽을 모방하지도 않는다. 그는 금세기 전반부를 체험의 바탕으로 삼되 등에 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바스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로 거론된 외국작가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보르헤스, 베케트, 나보코프 이외에도 특히 이탈로 칼비노(1923~1985), 마르께스(1928~), 코르타자르(1914~1984)와 프랑스의 <누보로망> 작가, 및 그 선구자격인 레이몽 케노(1903~1976) 등. 바스는 분명히 중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 작가”- 이 용어는 몇몇 유럽, 영국, 미국 작가들에도 적용됨으로써, 귄터 그라스(1927~), 져지 코진스키(1933~), 마크 헬프린(1927~) 그리고 카터를 포함하기에 이른다- 들을 포함시켜 강조할 뜻을 비친다.
과연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두로 과거에 묻혀진 몇몇 미국 작가들, 특히 <고독한 청혼녀,1933>를 쓴 나사나엘 웨스트가 다시 적절한 자리를 되찾은 듯 했다. 그러나 바스는 존에 주요한 포스트모더니즘계파로 보았던 몇 작가들을 이제는 제외시킬 뜻을 비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은 “베케트의 <허무에 관한 이야기 모음>이나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과 같은 후기 모더니즘의 수작(나의 정의와 판단에 따라)들 보다 그 호소력이 보다 민주적인 소설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바스는 위의 에세이에서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모더니즘 계열의 표본 작품으로 지칭하나, 구조주의 비평 전통에선 많은 평자들이 이미 그것을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으로 선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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