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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원정 보고서.
로체원정대 초반에는 짐 싸기가 참 어려웠다. 뭘 얼마나 어떻게 싸야 할지 몰라서 짐을 싸는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러나, 회가 거듭될수록 짐 싸는 데 도사가 됐다. 그리고 훈련이 토요일이라면 화요일 수요일 즈음에는 벌써 짐을 다 싸 두고는 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해외원정을 떠나는 데 짐을 싸기가 너무나도 싫은 것이다. 해외 원정인 만큼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시간은 코앞으로 다가오는데 짐은 안 싸고 멍하니 있었다. 평소 잔소리 안 하시는 엄마도 며칠 전부터 짐은 싸 뒀니, 언제 쌀 거니 하며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셨다.
그런 거였다. 이번 원정이 끝나면 대원으로서의 훈련들은 이제 없었다. 난 그게 두려웠던 것 같다. 마지막이라는 게, 누군가를 떠나보낼 때 돌아서는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지 않듯, 로체원정대원으로서의 나를 떠나보내는 그 시작이 참 힘들었다.
그러나, 해외 원정을 끝내고 돌아올 나를 그리며 굳게 마음 먹고 저녁부터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다음 날, 원정을 떠나기 전 부모님과 함께 밤을 보내는 날, 우리 부모님 모두 오실 수 없었다. 혼자 인천공항 주변에 있다는 왕산펜션을 찾아가야 했는데 마침, 수현이 아버님이 우리랑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하셨다. 수현이 아버님께서 우리 집 앞까지 날 데리러 오셨고 수현이와 함께 차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차창 밖을 보니 바다가 보였다. 인천대교를 지나는 데 내가 원정을 떠난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 나기 시작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엄마 아빠 부디 건강히 계시길.
금세 밖은 어두워 졌고 우리는 왕산펜션에 도착했다. 참 어색했다. 원래 같으면 카고를 싣고 산 아래에서 만나야 할 사람들을 이런 집 안에서 그것도 따뜻한 공기가 있는 펜션에서 만나니 원정대 훈련이 맞나 싶었다. 게다가, 어머님들은 분주히 맛있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계셨다. 도와드리려 해도 편히 쉬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결국, 우린 옆방에서 이불 속에 들어가 오랜만의 수다를 떨었다. 좀 있으니 저녁 식사가 다 되었다며 부르셨고 가 보니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온갖 진수성찬들이 놓여있었고 테이블마다 고기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항상 설익은 밥에 삶은 고기, 통조림 반찬만 먹다가 이렇게 누군가 차려준 맛있는 밥상을 받으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부모님들의 정성을 입으로 마음으로 느끼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곤 우린 문화교류 연습을 했다. 문화교류 연습을 거의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우리는 처음으로 노래와 율동을 짜기 시작했다. 3곡을 해야 하는데 아름다운 세상 한 곡을 짜기도 힘에 부쳤다. 문화교류 연출을 맡은 나는 속이 탔다. 시간은 가는데 합창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대원들은 지쳐 가고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했다. 그래서 화를 냈다.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고 후회가 됐다. 대원들을 다독이고 대원들이 즐겁게 연습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내 역할인데 그렇지 못하면서 화만 낸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리고 아까, 범수와 지은이가 의견을 냈는데 바로 별로라고 받아쳤다. 대화의 제1원칙이 상대방의 의견을 먼저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을 지키지 못했고 두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그 때 많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다음엔 그것도 좋아, 그런데 이건 어떨까? 하고 말하는 내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밤이 깊었고 미처 한 곡도 끝내지 못한 채 방으로 들어왔다. 부모님과 대원, 대장님, 서포터즈 샘, 팀닥터님까지 모두 둥그렇게 둘러 앉아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대장님이 곧바로 출사의 변을 내게 시키셨다. 당황스러웠다. 솔직하게 나는 준비없이 말을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제발,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으면 하고 바랐는데 넘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말 하지 못하고 내 차례는 지나갔고 다시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대학 면접 때가 생각났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준비한 대답도 미처 못하고 돌발질문에는 여지없이 나가떨어졌었다. 참, 말을 잘 하고 싶은데 맘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그 날, 지현이가 말을 참 잘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국내훈련 때도, 해외원정 때도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잘 말하는 것 같아 지현이가 참 부럽기도 하고 닮고 싶었다.
대원들의 출사의 변이 끝나고 이어서 부모님들의 말씀이 있었다. 동진이 어머님께서 “ 빨리 정상에 갈 필요는 없잖아요? 천천히 내 걸음으로 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달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거에요.”라고 말하시는데 참 와 닿았다. 해외원정 때, 걸음걸음마다 이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팀닥터님께서 육체의 극한에 도달하면 정신도 통할 것이다 라고 말하시는데 꼭 그 말이 참말이길 바랐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정상보다도 내 마음의 넓이를 넓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긴 이야기를 나누고는 짐을 새로 쌌다. 그리곤 그제서야 제일 중요한 침낭과 매트리스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히 챙길 거라 생각하고 넘겼던 것인데 그걸 빠뜨린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꼭 모든 것, 하나하나 다 꺼내서 점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반성은 둘째 치고, 그 추운 히말라야를 침낭없이 지낼 걸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부모님 모두 병원에 계실 거고 아빠를 간호하시느라 밤새 잠 못 주무셨을 텐데 어머니를 이중으로 고생시킬 수는 없었다.
착잡한 심경으로 짐을 싸는데 동진이 아버님께서 진심으로 걱정해주셨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두려웠지만 용기가 생겨 그래, 버텨보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모님들께서도 걱정을 해주시는데 부모님이 안 계신데 마치 부모님이 곁에 계시는 듯한 기분이 들어 뭉클했다.
그 날 밤, 잠이 오지 않았고 지현이랑 같이 햇반 포장지와 색종이, 박스 테이프를 이용해서 문화교류에 쓸 청사초롱을 만들었다. 모양은 허접했으나 다 만들고 자리에 누우니 새벽 5시였다.
다음 날, 아침 체조를 하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진수성찬 아침밥상을 받고는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9기 때, 서포터즈 샘이셨던 홍지원 선생님이 우리를 배웅하러 오셨다. 그 마음이 얼마나 예쁘고 따뜻하던지... 대원으로 서포터즈 샘으로 해외원정 경험자답게 여러 가지 중요한 조언들을 해주셨고 고산병 예방 호흡법을 전수해주셨다. 덕분에 난 대원들 중에 가장 늦게 고산병이 왔다.
비행기 탑승장으로 떠나기 직전 부모님들의 응원을 받으며 다짐했다. 무사히 건강히 멋진 모습으로 돌아오리라.
우리는 네팔로 바로 가지 않고 홍콩을 경유해서 네팔로 가게 되어 총 24시간을 공항과 비행기 안에서 보냈다. 인천 공항에서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에서는 잠만 잤다. 이 대장님이 옆에 계셨는데 맏이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조언을 해주셨는데 잠이 쏟아져서 혼났다. 코는 안 골았는지 모르겠다. 언제 한국을 떠났는지 모르게 홍콩에 도착해 있었다.
네팔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에서 6시간을 보냈다. 철이 없게도 몰래 나가서 홍콩의 밤을 즐기고 싶단 생각이 자꾸자꾸 들었다. 지은이가 국제미아가 되고 싶으면 나가라고 해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로체원정대답게 막간을 이용해 출국 전 네팔에 대해 조사했던 것들을 발표했다. 다른 대원들이 PPT를 만든 것들을 보고 속으로 정말 감탄했다. 휘리릭 효과도 제법이고 차트도 만들 줄 알고 파워포인트가 아닌 다른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신문기사나 TV뉴스 스타일의 결과물을 만들어 낸 걸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나도 대학 가거나 기업에 입사하면 저렇게 해야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집에 돌아가면 저것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 조사 발표를 마치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사실, 대장님께서 읽을 책을 꼭 가져오라고 하셨을 때, 과연 읽을 시간이 있을까 괜히 짐만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첫날부터 읽을 시간이 참 많다는 걸 느꼈다.
나는 저번 훈련에 이외수 작가의 갤러리에서 샀던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이란 책과 앞으로 대학에서 공부하게 될 문화인류학 관련 서적 이렇게 2권을 가져왔다. 먼저, 이외수 선생님의 책을 집었다. 짧은 글들이 여러 편이 있어 어떤 글을 읽을까 하고 목차를 살폈는데 “오늘 그대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한마디답게 짧고 굵었다.
어두운 밤거리의
가로등은
자신의 모습을 비추기 위해 거기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다.
(여기서부터는 1월 7일에 썼던 일기의 내용이다.)
하, 난 로체원정대 10기의 맏이다. 나를 제외한 10명의 대원을 이끌어야 한다. 6개월간 리더란 어때야 할까, 리더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왔다. 카리스마 있는 리더가 최고인지, 아니면 따뜻하고 유연해야 하는지, 혹은 그 둘 다인지, 어떤 게 가장 좋은 리더일까 수없이 고민이 많이 됐다.
또한, 리더의 목표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들었다.
모든 대원들이 정상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지, 나 한 명의 희생으로 서너명이 더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면 나를 희생해야 하는지 등등 고민이 가득했다.
그런데, 오늘 이외수 씨의 글을 읽으면서 왠지 그 해답을 얻는 듯 했다.
리더는 가로등과 같았다. 나 혼자가 아닌 대원, 로체원정대 전체를 위해 그 곳에 홀로 서 있어야 한다.
모두가 잠든 어둑한 밤에 달빛마저 가릴 정도로 밝은 가로등이지만 그 빛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 밤 중 어둠 속을 헤맬 그 누군가를 위해 무시무시한 밤의 공포와 추위를 견디며 외로운 곳에 홀로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과연 가로등일까?
나보다 욕심 많고 성취감의 희열을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나는 그동안 빛이기 보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늘은, 이번 해외원정부터는, 조금씩 빛이 되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아주 희미한 불빛이라도 누군가를 비출 수 있다면 난 이번 해외원정에서 목표를 이룬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홍콩 공항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이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갑자기 비행기 티켓이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가 곧 출발한다는데... 아까 지나가면서 떨어뜨렸나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여기저기 티켓을 찾으러 다니는데 이 대장님이 여기 있다며 티켓을 주셨다. 손에 들은 것이 많아 줄을 서 있다가 떨어뜨린 것이다. 침낭도 두고 오고 티켓도 잃어버릴 뻔 하고 말도 잘 못 하고 해외원정에서 국내훈련 때보다도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너무 창피했다. 해외에서 자꾸 이렇게 정신줄을 놓고 다니면 안 되는데...
다행히 비행기를 탔고 네팔 승무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인천에서 홍콩으로 떠날 때는 잠을 자느라 바깥구경을 못 했는데 이젠 잠이 좀 깼는지 창가자리에 앉아 이륙하는 비행기의 모습을 보았다. 드디어 여행을 시작하는 것 같았다. 설레고... 또 설레고 어젯밤엔 설렘보단 두려움이 더 컸는데 오늘밤은 설렘만이 온 가슴을 꽉 채웠다.
조금 지나니까 기내식이 나왔다. 콩 커리와 붉은 닭 커리, 드레싱 소스가 없는 샐러드, 연유를 부은 케잌 그리고 빵. 아, 네팔 음식은 조사하지 않아서 기대만 가지고 있었는데 인도 옆 나라이고 같은 힌두교나라여서 그런지 커리가 나왔다. 네팔 말로는 달밧이라고도 한다. 빨간 닭 커리는 밤에 먹기는 조금 그래서 노란 콩 커리를 먹었는데 맛있었다. 아까 간식을 많이 먹었는데도 맛있게 느껴지는 건 정말 맛있는 거였다. 그리고, 아까 아시아나 항공에서 줬던 샐러드는 드레싱 소스가 너무 강해서 잘 못 먹었는데 이건 소스가 없으니까 채소 맛이 살아 있었다. 연유를 부은 케잌도 맛있고.. 전에 태국에 갈 때, 처음으로 기내식을 먹었는데 정말 맛이 없었다. 태국에 가서 먹었던 태국음식도 별로였다. 그런데, 네팔은 기내식도 맛있고 네팔 현지식도 아주 맛있었다. 사실, 다른 대원들은 향이 너무 강하고 입맛에 맞지 않아 잘 못 먹겠다고 하는데 난 입맛에 아주 잘 맞았다. 그 때부터 네팔이 좋기 시작했다.
기내식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했다. 내생애 가장 용감했던 17일 이란 책에서 본 것처럼, 카트만두 공항은 온통 붉은 벽돌로 되어 있었고 정말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기차역 같았다. 입국 심사대에 계신 네팔 사람은 롯데리아에서 쓰는 모자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차 대장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런 모자를 쓴 사람들은 네팔 민족 중 네와르족에 속한다고 하셨다. 아까 홍콩 공항에서부터 느꼈는데 역사와 네팔 문화에 대한 차 대장님의 지식이 대단한 것 같았다. 한국사 시험이나 세계사 시험을 치룰 때면 연도와 사건들의 순서를 외우는 것이 내겐 쉽지 않았는데 대장님은 전체적인 세계사, 네팔의 역사를 꿰뚫고 계시는 것 같아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입국 심사장을 지나 공항 밖으로 나가니 뛰뛰빵빵 우리 아파트 주차대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찌나 차가 많던지, 그 틈을 비집고 우리가 탈 버스를 찾으려는데 네팔 현지인 가이드 분이 하얀색 스카프를 둘러주며 따라오라고 했다. 하얀색 스카프는 카타(Khata)라고 한다. 몽골인과 티벳인의 전통적인 스카프로 순수와 연민을 상징하며 얇은 실크로 만든다고 한다. 흰색은 주는 이의 순수한 마음을 상징하고 카타를 선물하는 건 항상 행운이 함께하기를 축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다른 나라에 갔을 땐 받지 못했던 환대를 받으니 기분이 참 좋았다.
그러나, 버스에 탔는데 바로 팁을 요구했던 그 사람은 달갑지 않았다. 좁은 버스에 올라 배낭을 무릎에 얹고는 우리가 묵을 호텔 숙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창밖을 보니 문을 닫은 상점과 집들이 보였다. 펩시와 코카콜라가 눈에 띄었다. 문을 닫은 셔터엔 하나같이 색색깔의 여러 문양을 새겨 놓았다. 그 모습이 참 예뻤다. 그러나, 건물들이 문을 연 가게임에도 공사 중에 있는 아파트 건물처럼 회색 빛이었다. 간판도 페인트가 다 벗겨져 이 곳이 수도가 맞나 싶었다.
덜컹이는 버스가 도착한 곳은 ‘삼사라 리조트’. 앞엔 잔디밭도 있고 호텔은 카페 레스토랑처럼 예뻤다. 누군가 이 곳이 앞으로 우리가 묵을 숙소 중에 가장 좋은 곳이 될 거라 했다. 로비 옆엔 작은 식당이 있었고 그 곳엔 차가 있었다. 아버지가 차를 좋아하셔서 어렸을 때부터 차를 마실 기회가 참 많았다. 그래서, 나도 차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이 곳, 네팔에도 차가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 그런 차를 마주하니 정말 기뻤다. 네팔 문화가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네팔에 있는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셀파들이 차를 타주고 차를 마셨다. 그게 참 힘이 됐던 것 같다. 네팔에서 먹었던 차는 주로 블랙티(설탕을 탄 홍차)와 밀크티(밀크커피색)였는데 고도가 높아지면서 당도 또한 높아졌다. 첫 날 마셨던 차는 블랙티였다. 달큰하면서 홍차의 맛이 나는 것이 일품이었다.
그런데, 실수를 했다. 웃어른이 드시기 전에 먼저 먹으면 안 되는데 먼저 맛을 본 것이다. 대장님께서 외국에서는 장유유서가 없지만 우리는 우리나라 사람이고 우리끼리 있을 때엔 우리나라 예절을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뜨끔했다.
난 사실 그동안 그 예절을 잘 지키지 않았다. 집에서 아침을 먹을 때는 밥상에 먼저 앉는 사람이 먼저 먹었다. 학교에서 어른이 드시기 전에는 숟가락을 들지 않는 거라고 배워서 엄마께 엄마가 드시기 전까지 안 먹겠다고 했더니 엄마는 계속 내게 먼저 먹으라고 하셨다. 그 이후론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 곳에 오니 달랐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내가 그 때, 어머니가 먼저 먹으라고 하셔도 한 번 더 기다리겠다고 했으면 됐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한국에 돌아가서는 꼭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집에 돌아온 지금은 다행히 그걸 잘 실천하고 있는데 해외원정 때는 그 실수를 자꾸 했다. 밥을 먹을 때 뿐만이 아니고 간식도 대장님과 교수님, 서포터즈샘께 먼저 권하지 않고 내 입 속으로 먼저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 입을 베어 물고 나서 아차 싶으면 그 땐 늦었다. 처음엔 한 입 베어 물고는 어른께 다시 권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대장님께서 먼저 먹고 나서 권하는 건 실례라고 말씀하셔서 그 때 서야 내가 실례를 범했다는 걸 알았다.
지현이가 느감배 시간에 배려라는 건 무의식적으로 해야 하는것이지만 안 될 때는 자꾸 의식을 해서 배려를 해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중엔 어느새 그것이 몸에 배어 무의식적으로 하게된다고 했다. 배려 뿐 아니라 이러한 예절, 에티켓도 처음엔 의식을 해서 실천하는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차를 마시고는 숙소에 들어갔더니 호화스러운 침대와 욕실이 있었다. 사실, 국내훈련을 할 때 텐트를 치고 코펠에 밥을 해 먹으며 해외에 나가면 이것보다 더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웬걸, 환영의 목도리를 둘러주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호텔에서 묵고 있었다. 부모님께 정말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샤워를 했다. 물 트는 법을 잘 몰라 그리 따뜻한 물은 아니었으나 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침대에 이불이 없다는 것에 당황했지만 로비에 내려가 이불이 없냐고 물었더니 친절한 미소로 가져다 드리겠다며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사람들의 친절함. 네팔이 두 번째로 좋았다.
다음날 아침, 새벽 5시반에 일어났다. 예정보다 빠른 시간이었다. 어젯밤 늦게 잠이 들어서인지 조금만 더 자게 해주지 하고 투정을 부렸다. 옷도 안 입고 밖에 나갔더니 새벽은 추웠다. 별을 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추우니까 별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어제 차를 마셨던 곳에서 식사를 했다. 작은 호텔이어서 그런지 15명 적은 인원이 앉았는데도 식당이 꽉 찼다. 이제는 뷔페에서 대원들이 음식을 다 담아 자리에 앉고 대장님이 수저를 드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음식을 앞에 두고 참기가 쉽지 않았다. 배가 고팠는지 해외에서, 그거도 뷔페에서까지 이렇게 기다려서 먹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음식이 들어가고 배가 좀 채워지기 시작하니, 예전에 뷔페 레스토랑에 갔을 때, 아버지 지인분께서 우리가 음식을 담아서 자리에 앉기까지 안 드시고 기다리셨던 것이 생각났다. 아, 그런거구나. 사실, 그 땐 그런 마음으로 그러셨단 걸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 생각하니 내가 그동안 참 예절없이 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부턴 그러지 말아야지.
해외에 나오니 짐 관리에 더욱 더 신중을 기하는 듯 했다. 짐 개수가 다 맞는지 확인하고는 드디어 네팔 여행이 시작됐다. 어제는 어두워서 네팔 시내를 볼 수 없었는데 버스가 있는 곳까지 걸어서 이동하며 구경하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나는 네팔의 이 거리가 뉴욕 거리보다 이국적이고 멋있다고 느껴졌다. 주황빛의 붉은 벽돌에 건물들이 높진 않지만 분위기 있었다. 한국이라면 분주했을 시간인데 경적 소리도 없고 고요하고 맑았다.
청소부 아저씨와 말끔하게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두 명이 지나갔다. 여기엔 방학이 없나? 공부를 많이 하게 돼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네팔 학생이었다면 그 반대로 생각이 들었겠지만 말이다.
네팔은 버스에 짐을 싣는 것이 우리랑 달랐다. 우리는 보통 버스 뒤나 아래에 짐을 싣지 위로는 짐을 잘 싣지 않는데 네팔은 대부분의 무거운 짐들을 버스 위에 실었다. 그래서 버스마다 뒤에 사다리가 달려 있었다. 버스 위를 땅처럼 걷는 네팔인들이 신기해보였다.
어제보다는 넓고 고급스런 하얀 버스를 타고 안나푸르나를 향해 출발했다. 어젯밤엔 건물들이 모두 회색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보니 어제와는 달랐다. 집들마다 하늘색, 핑크색, 보라색, 연두색... 파스텔 톤으로 색칠해 놓았고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고 정말 예뻤다. 서로 누가 더 높은지를 두고 경쟁하진 않았지만 누가 더 개성있고 아름다운지를 두고 경쟁하는 것 같았다. 그런 점에서 참 네팔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대원들은 네팔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나, 불쌍하다, 내가 있는 곳이 참 행복한 것이구나 하고 생각한 것 같은데 나는 반대였다. 내가 사는 곳은 편리하고 현대적이지만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고층 건물들에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건물이고 산과 나무는 보이지 않아 삭막하기만 한데, 이 곳 네팔은 건물들마다 개성이 넘쳐 났고 낮은 건물들 덕에 저 멀리 산도 보이고 건물 위를 따뜻하게 비추는 아침 햇살이 더욱 더 밝고 따사롭게 느껴졌다.
카트만두 도시만 그런 줄 알았더니 도시를 벗어나서도 파스텔 톤 색의 집들은 여전했다. 산꼭대기에 있는 집의 색깔이 보라색인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나중에 집을 지으면 네팔 사람한테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중간에 버스에 우리말고도 네팔 현지인들이 탔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미소가 참 예뻤다. 난 그렇게만 보고 있었는데 범수가 밑을 보라고 했다. 뭔가 해서 봤더니 그들의 신발이었다. 날씨가 많이 추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곳은 겨울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것도 닳고 닳은 슬리퍼를. 약간 짠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손꼽히는 나라가 맞긴 맞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게소에도 잠깐 들려서 화장실을 갔는데 물 내리는 곳도 없는, 수세식 화장실 우리나라 휴게소의 간이 화장실 같았다. 물이 귀하고 시설이 열악하니까 이해가 갔다.
그러나, 내가 네팔을 안 좋게 본 건 그 때뿐이었다.
내가 열흘 간 본 네팔은 아름다운 나라, 사람, 자연 그 자체였으니까.
내가 앉은 왼쪽 창가는 산 쪽이어서 산과 집들만 봤는데 우연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더니 엄청나게 큰 강이 보였다. 우리나라와 물 색깔이 달랐다. 약간 초록빛이 나는 진한 하늘색이었다. 아이스크림 중에 뽕따 같은 색이랄까? 예술이었다. 여울도 많아서 이 곳에서 래프팅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셀파에게 여쭈었더니 그 곳에서 래프팅을 하러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했다. 나중에 마음 맞는 대학 동기들이랑 꼭 와야지!
산골짜기를 지나니 이제 시내가 나왔다. 우리나라처럼 도로에서 과자와 과일을 파는 사람이 있었다. 다만, 우리나라는 그게 아저씨 아주머니였는데 여기는 아이들이란 점이 달랐다. 난 근데 별로 불쌍해보이지 않았다. 아이들 표정이 당당했고 굳이 아이들이 우리나라처럼 공부를 해야 하고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쁜 건 없으니까. 그저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와 시대에 맞게 살면 그뿐인거라는게 내 생각이다.
그 아이들이 바나나를 들고 있었는데 너무나 먹고 싶었다. 사주면 좋았을 걸.
배가 고파질 때즈음이었는데 내려서 현지식인 달밧을 먹을 거라고 했다.
유후~ 현지식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달밧이 주식인가보다. 기내식에 이어서 이번에도 달밧이었다. 기내식에서보다 가짓 수가 많았다. 이번에도 맛있었다. 쌀은 길고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의 쌀이었는데 난 그게 참 맛있었다. 부드럽고 고소하다. 원활한 장활동을 위해 채소도 많이 먹었다. 후식까지 나왔다. 그것도 귤. 우리나라의 귤과 오렌지를 합친듯한 크기와 맛이었다. 씨가 있는 것이 달랐다. 난 씨도 같이 먹었는데 다른 대원들이 나보고 씨도 먹냐고 했다. 난 그렇다고 했다.
배가 부르니 슬슬 잠이 오기 시작해서 한 숨 잤다. 곤히 자고 있는데 갑자기 버스가 멈춰 섰다. 사람들이 내리길래 따라 내렸다. 웬걸, 좁은 길에 버스 한 대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었다. 알고보니 뒷바퀴가 빠져서 꼼짝을 못 하고 있었다. 버스 기사도 승객도 없었다. 조금 옆에 세웠으면 좋았을 것을 도로 중간에 서 있으니 뒤에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같이 기다리는 사람들이 유럽사람이었다. 그 사람들도 우리처럼 안나푸르나 트래킹, 아마 관광을 하러 왔다고 했다. 키가 작고 까무잡잡한 네팔사람들만 보다가 유럽사람들을 보니 그래도 유럽사람들이 더 익숙한 사람들이고, 같이 트래킹을 하러 간다고 하니 동지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동 소리가 들리더니 우리 앞 차가 아슬아슬하게 길을 빠져나왔고 우리 버스 기사님도 뒤따라서 타이어 빠진 버스를 제치고 나왔다. 못 갈 줄 알았는데 나오셔서 놀랐다. 버스 기사님도 우리 로체원정대 대원으로 영입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또 얼마 가지 않아 오색기가 펄럭이는 마을에서 멈췄다. 길이 좁고 험해서 지프차를 타고 간다는 것이었다. 지프차가 오길 기다리면서 이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장님께서 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입구에 표시된 표지를 보았냐고 하셨다. 봤는데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하니까 마오이스트의 마을이라는 표시였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전봇대마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글들 혹은 낫과 망치가 서로 엇갈린 모양의 검정마크가 보였다. 그게 바로 마오이스트들의 증표였던 것이다. 낫과 망치의 뜻을 난 잘 몰랐는데 대장님께서 낫은 농민을 의미하고 망치는 공장 노동자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제서야 그 마크가 이해가 갔다. 공산주의의 지지세력이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이며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을 대변하는 공약을 많이 내걸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오이스트들의 마을. 과연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일까?
어렸을 때는 북한 사람들이 모두 다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보고나서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속 주인공의 누나는 쌀을 준다는 말만 듣고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했다. 그리고는 6.25전쟁이 터졌고 누나는 잡혀갔으며 결국은 민주주의 이념을 채택한 남한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이 곳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마오이스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들이 이 마을을 점령한 것일 뿐 마을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민주주의 이념, 민주주의 이념을 채택한 대한민국에 태어난 덕분에 난 잘 살고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도 민주주의, 자본주의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념이란 게 뭔지, 그 이념 때문에 누군가 아파해야 하고 서로 전쟁을 벌이고 갈라서야 하는지 도대체 잘 모르겠다. 모든 이념을 아우르는 이념은 없는 것일까? 아니, 이념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일까.
얼마 후, 지프차가 왔고 생각보다 신식이었다. 예전에 한 번 지프차를 타 본 적이 있는데 주체할 수 없이 차가 흔들려서 몸이 여기저기 부딪히고 엉덩이가 무지하게 아팠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이 차를 타고 오랜시간 달린다고 하니 시작부터 겁을 먹었다.
출발. 그런데 희한하게 엉덩이도 안 아프고 정말 재밌는 것이다. 생애 처음 탔던 롤러코스터는 이것에 비하면 스릴 재미 어느 축에도 들지 못했다. 다른 애들은 모르겠는데 동진이랑 나랑은 재밌어서 난리였다. 안나푸르나가 가까워지니 주변 경관도 너무나 아름답고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기사님께서 인도 노래를 틀어주는데 녹음해서 집에 가서 매일 듣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세 얼간이 라는 인도 영화가 인도 문화에 대한 첫 경험이었는데 그 때도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영화에 삽입된 인도 음악이 참 좋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 노래를 지프차를 타는 내내 들으니 하늘을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지루해질 만하면 센스만점 기사님께서 노래를 바꿔주셨고 거의 3시간을 넘게 탄 것 같은데 모두 다른 노래였다.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범수가 휴대폰으로 한국 노래를 틀었는데 문화교류 연습을 할 겸 문화교류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대원들이 다같이 신나게 따라불렀다. 앞사람은 메기고 뒷사람은 받으며 신나게 불렀다. 급기야는 기사님과 함께 탄 셀파도 노래가 맘에 들었는지 천추만대에 빛날세라 강강술래 하면서 같이 따라 불렀다. 마지막에는 아름다운 세상의 라랄라라를 차에 탄 모든 사람들이 따라 불렀다. 동진이가 해외원정에서 오늘보다 더 즐겁고 행복할 순 없을 거라고 말했고 난 그 말에 공감했다.
중간에 기사아저씨와 셀파가 저녁식사를 위해 작은 휴게소에 들러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선민이랑 지현이가 지프차 위에 올라가 앉았는데 낭만적이어서 따라하고 싶었으나 높은 곳은 무서웠다. 식당에 들어가니 셀파가 뭘 먹고 있었다. 먹어보라고 하면서 새 접시에 담아주었다. 배도 고프고 달밧과는 다른 네팔음식 같아서 한 번 먹어봤다. 돼지고기와 마름모꼴의 밀가루 반죽, 여러 가지 채소를 섞은 볶음이었다. 향신료 향이 날거라 생각했는데 냄새도 나지 않고 맛있었다. 몇 입을 더 먹는데 갑자기 셀파들이랑 절대로 음식을 나눠먹거나 나눠주지 말라는 대장님의 당부가 생각났다. 놀라서 배부르다며 얼른 자리를 피했다. 대장님이 아마 네팔 음식을 같이 먹다가 탈이 날 수도 있어 먹지 말라고 하셨을 것 같다. 다행히 탈은 나지 않았으나, 만약, 탈이 났으면 대장님께 무척 혼이 났을 것 같다.
낮에 출발했는데 가로등불빛만 빛나는 어둑한 저녁이 돼서야 우리가 머물 롯지에 도착했다. 롯지가 산장같은 거라고 해서 어렸을 때 묵었던 설악산 산장을 생각했는데 이 곳 산장 롯지는 부엌에 식탁보가 있는 식탁이 있고 방에는 깔끔한 싱글침대 2개가 있었다. 서양식이었다. 게다가, 저녁 음식이 나왔는데 고추장 불고기에, 양파, 마늘, 고추, 갖가지 한국식 반찬에, 양배추쌈, 된장, 상추쌈까지 좋은 한정식 집에 간 것 같았다. 한국 음식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지금껏 해외에서 한국음식을 먹어도 현지인이 만들고 현지식재료로 만들어서 그렇게 맛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고추장 불고기를 빼고는 다른 반찬들이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국도 전혀 향신료향이 나지 않고 우리나라 특유의 진한 국물 맛이 났다. 네팔에서 이런 음식을 맛보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현지식이 나오면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정말 눈물이 났다.
자꾸 여러 가지로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들이 생기니까 한국에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불교에서는 한 명의 신을 믿지는 않지만 천지, 부모, 동포, 법률 이 사은님의 은혜와 그 모두가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일원상의 진리를 믿는다. 정말 19년동안 교당을 다니고 기도를 드렸지만 사은님이 계시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기도를 할 때도 내가 어떤 분에게 기도를 드리나, 무언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 의문이 들곤 했었다. 그런데, 네팔에 온 이후로 사은님의 존재와 그 사은님이 나와 이 온 우주를 이루고 있으며 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신기했다. 이것이 바로 히말라야의 기운일까?
한국에 있을 때는 밥 먹기 전에 기도도 그렇게 꼬박꼬박하지 않았는데 네팔에 있으면서 그 은혜를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에 기도로라도 매번 감사함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기도했다. 오늘도 이렇게 좋은 곳에 좋은 음식을 먹으며 아름다운 곳을 보고 건강하게 길을 걸을 수 있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이번 원정을 제발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 주세요, 이번 원정에서 많은 걸 얻고 깨달으며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나은 사람, 발전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다음 날 아침 셀파가 모닝콜을 하러 오기 전에 이미 깨있었다. 화장실 때문이었다. 새벽에 화장실을 두 번을 갔다. 왕산펜션에서부터 3일 째인데 화장실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 차 대장님께서 한 대원이 15일간 변을 보지 못해서 한국에 가서 관장을 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가 강렬했는지 그 날 밤 나는 진짜 관장하는 꿈을 꿨다. 그것도 새벽에 화장실에서 의사 선생님이 아닌 쿠르카족이 관장을 해줬다. 말도 안 되는데 그 꿈이 너무도 생생해서 아직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어쨌든 화장실을 보지 못한 상태로 꿈이 사실이었다면 성공한 채로 아침 체조를 했다. 마음 속에 불편함은 있었으나 배가 아프지 않아 다행이었다. 허 교수님께 나의 사정을 전했더니 여행을 오면 원래 잘 못 가는 사람이 많다며 별 문제가 없다고 하시면서 6일째도 안 나오면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다. 마음이 편해졌다. 허교수님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별말씀 안 하시는데도 큰 힘이 되고 깨달음을 얻곤 했다.
그리고는 고갤 들어 아침 경관을 봤는데... 와.. TV에서만 보던 그런 곳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높고 넓은 산맥에 예쁜 롯지들, 길을 지나는 말들... 네팔에 있는 하루하루가 기쁨과 행복의 연속이었다. 이런 곳을 나 혼자 오면 안 되었다. 길을 걷는 내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날씨도 봄 날씨 같아서 부모님과 꼭 이 곳을 다시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럴 수 있을까? 아버지는 수술은 잘 되셨는지. 수술만 하면 완치된다고 하지만, 만약 잘 되셨다고 해도 이제 교당으로 가시면 시간을 내서 여행을 다녀오시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젠 얼마 없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안타까운 생각과 함께 그 동안에 너무 못 되게 굴었던 내 자신이, 아빠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몰랐던 내 자신이 너무 바보같았다. 제발 내가 돌아가는 날 무사히 건강하게 살아계셔서 내가 잘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부모님과 함께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히말라야는 험한 산일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우리 동네 뒷산 같았다. 고도가 높을 뿐,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었고 눈으로 뒤덮혀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가는 길에 눈을 본 건 정상에 올라가던 날 밤, 얕게 눈과 얼음으로 얼어붙었던 길 정도였을 뿐, 그 외엔 황토색보다도 옅은 색의 흙이 우릴 마주했다. 덕분에 노란 잠바도 황토색 흙과 시커먼 때로 절어 마지막 날엔 길을 다니기가 민망할만큼 동네 아이들 옷차림보다도 더 때가 꼬질꼬질하게 꼈다. 하루만 지나도 새까맣게 때가 타는 옷을 보고 동네 주민들의 옷이 왜 그렇게 더러웠는가 이해가 되었다.
첫날은 그렇게 아름다운 안나푸르나를 구경하는데에만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 날 의 느낌과 감사한 점, 자신이 배려한 점을 말하는 느.감.배 시간에 대장님이 좋았다, 아름다웠다 이런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하시니 난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었다. 첫날 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날들이 그러했다. 국내훈련에서는 경치를 구경할 새 없이 힘겨운 훈련들이 지속됐고 고3 힘든 시간이었기에 내가 가진 여러가지 고민들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능이 끝나고 대학에 합격한 후로는 고민도 없고 하루하루가 행복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보니, 해외 원정에서 무언가를 얻어가고 고민을 풀어가기 보다 그 순간을, 대자연의 숨소리를 만끽했던 것 같다. 행복한 것들만 눈에 들어왔고 불편또한 감사하게 여겨졌다.
내가 만약 해외원정을 갔을 때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히말라야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히말라야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궁금했다. 같은 사람이라도 마음상태에 따라 다른 것들이 보이는데 대장님을 포함한 15명, 셀파까지 열흘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다들 다른 것들을 보고 느꼈을 거라 생각하니 보고서가 기다려졌다. 느감배 시간이 짧기도 하고 말하기가 부끄러워 말하지 못했지만 각자 자신에게 강렬한 메시지로 남았던 것들이 하나하나 궁금했다.
이 날 승준이가 느감배시간에 아주 좋은 말을 했다. 같은 물인데 웅덩이는 탁해서 밑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반면에 흐르는 물은 에메랄드 빛을 내며 맑게 흐르고 있다. 자기 혼자서 자기 고집만 피우다 보면 주위의 어떤 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고여서 탁한 물로 암울하게 썩게 되지만 만약 타인과 함께 같이 흐르다 보면 자신도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이는 물이 되어 세상에 알맞게 쓰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라고 말이다.
아주 좋은 말이었던 이유는 내가 고인 물이었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장님이 메모해라, 3차원적으로 생각해라 하시는데 실은 귓등으로 듣고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행동했었다. 그러니 계속 고인 물이 될 뿐이었다. 나같은 작은 웅덩이가 이 곳 히말라야 깨끗한 강에 쏟아진다면, 계곡 중간에 난 작은 웅덩이가 된다면 금방이라도 깨끗해질 것 같았다. 부디 안나푸르나의 맑고 깊은 영험한 기운을 얻어 내가 깨끗하고 흐르는 물이 되어 흘러갈 수 있게 되길 바랐다.
오늘의 여정도 모두 마무리되어 갈 즈음, 대원들이 엽서를 사러 가자고 했다. 사실, 준비물에 엽서 보낼 사람들의 주소를 알아오라 할 때, 보낼 사람도 딱히 떠오르지 않고 에이 뭘 엽서야 하면서 그냥 넘겼는데 해외에 있으니 엽서가 쓰고 싶어지고 엽서를 보내고 싶은 사람도 하나 둘 생각났다. 아쉬움이 들었다. 다음에 해외 나갈 땐 꼭 주소를 알아놓고 가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엽서는 샀다. 써서 직접 전해 줄 생각으로 말이다.
엽서 사러 간다고 신나하면서 돈을 가져오는 걸 깜빡해 대원들보고 잠시 기다려달라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불 켜진 방 하나가 보였다. 뭐지 하면서 보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불 켜진 방 안에 혼자 남아 엽서 사러 가지도 못하고 영호를 챙기고 있는 승준이와 아파서 죽 한 술 못 뜨고 있는 영호가 있었다. 그 둘을 보는데 내가 얼마나 내 생각만 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아까도 산행할 때, 승준이랑 지은이는 영호를 너무나 잘 챙겼다. 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둘이 영호를 부축하며 말동무도 되주고 힘이 되어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내가 작아지는 순간이었다. 출사의 변에서 엄마 같은 대원이 돼서 아픈 대원들을 잘 보살피겠다고 해 놓고 그 순간이 되니 난 두 손 놓고 바라보며 그저 내 갈 길만 가는 사람일 뿐이었다. 아, 어찌나 나의 부족함이 느껴지고 창피하던지...
영호가 그렇게 아픈 줄 몰랐다.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승준이와 영호의 엽서를 사다주는 일 밖에. 방에 들어가서 영호의 상태와 엽서를 몇 장 사다줄까 하고 물어보고는 돌아서 나왔다. 승준이의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졌다.
엽서를 사러 가는데 마을이 정말 아름다웠다. 난 이제 웬만한 곳을 보지 않으면 아름답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총총이 박혀 있는 별과 맑은 공기, 길 옆으로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내 마음도 맑고 시원해지는 듯 했다. 이미 문을 닫은 상점의 주인을 깨워 신나게 엽서를 골랐다.
돌아오는 길, 다른 대원들은 각자 방으로 돌아가고 나는 마당에 섰다. 달이 너무도 밝아서 눈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도 그랬는데 달을 보면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도 똑같은 달을 보고 있지 않을까? 엄마는 잘 계실는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그 날, 영호도 아팠지만 영호 못지 않게 선민이와 수현이도 고산병에 시달렸다. 아픈 대원과 함께 가자란 말을 가슴 깊이 새긴 그 날, 우연찮게 수현이와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엽서 사러 가면서 찬 공기를 많이 마셨는지 수현이가 비몽사몽해서 곧 쓰러질 것 같았다. 마치, 드라마에서 술 취한 남편의 양말을 벗기는 아내처럼 수현이의 양말을 벗기고는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침낭을 깔아 자리에 눕혔다. 다행히 난 체력이 아주 쌩쌩했다. 그래서, 마저 수현이의 옷가지와 짐들을 정리한 후 엽서를 썼다. 근데 뭔가 깜빡했다는 게 느껴졌다. 바보, 나밖에 모르는 바보가 또 있을까. 내 엽서만 사고 승준이 걸 사는 걸 깜빡한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승준이에게 어울릴만한 엽서를 한 장 주기로 했다.
서둘러, 부모님께 오늘 너무나 아름다웠던 안나푸르나와 오늘 느꼈던 감정들, 부모님에 대한 걱정 및 안부를 담아 공간 빽빽이 편지를 썼다. 그리고는 일기를 썼다.
주제는 행복이었다. 내 마음이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네팔 사람들이 겉으로는 가난하고 불행해 보여도 그들의 표정은 분명 가난에 허덕이거나 불행한 표정이 아니었다. 행복이었다. 네팔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손꼽힌다던데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륙이라는 아프리카의 사람들도 그들과 마찬가지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아무리 잘 산다고 해도 행복한 사람들만 사는 나라는 아닌 것처럼 행복은 상대적이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은 것이었다. 지금 현재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행복은 나와 항상 함께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행복의 나라 네팔에 와 있으니 나도 더욱 더 행복해지는 듯 했다.
1월 10일, 또 다른 감동을 느꼈다. 오색의 라마교 깃발이 펄럭이고 눈앞엔 안나푸르나 설산이 보이고 뒤로 돌면 너무나도 멋진 암벽이 있다. 날씨도 좋고. 어제에 이어 멋진 길이었다. 어젠 첫 날이라 셀파랑 친해질 겨를이 없었는데 이젠 마음의 여유가 생겨 셀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주황색 잠바를 입은 셀파 빠상과, 우리의 총 책임가이드 도르지 다이와 친해졌다. 특히, 빠상은 첫 날부터 눈에 들어왔다. 항상 스마일,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나에게도 활짝 웃고, 그래서 내가 항상 웃고 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내 인생이 항상 즐겁기 때문이죠”라고 말했다. 와우, 나도 질수 없어 내 인생도 그렇다고 했다.
셀파일을 어느정도 했냐고 물었더니 16살에 처음 안나푸르나에 왔고 일을 한지는 6년정도 됐다고 했다. 대학은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셀파들한테도 물어보니 다들 대학을 다니거나 다닌 경험이 있었다. 우리나라만 대학 진학률이 높은 줄 알았더니 네팔 사람들도 대학 진학률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대학을 나와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도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이렇게 짐을 나르고 가이드를 하면 생계를 꾸릴 정도가 되냐고 물었더니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장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스물여덟살인 빠상은 동생이 7명이라고 했다. 우리 엄마아빠 시절이 생각났다. 그런데, 도르지 다이에게 여쭤보니 요즈음 네팔사람들은 아이를 적게 낳는다고 했다. 참으로 우리나라랑 비슷한 점이 많았다.
네팔이란 나라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네팔에 오기 전 네팔 종교에 대해 조사할 때는 네팔 인구의 대부분이 힌두교 신자라고 나와 있었다. 그런데, 셀파한테 종교를 물으면 대부분 불교신자들이었다. 알고보니, 셀파 민족이라서 불교를 믿는 것이었다. 셀파족은 전체 인구의 0.7%였다. 주변에 있는 네팔 사람이 셀파밖에 없으니 그렇게 착각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불교를 믿던, 라마교를 믿던, 힌두교와 매우 연관이 깊은 듯 했다. 정상에 내려와 힌두교 사원을 들어갔는데 분명 불교 신자라고 했던 셀파가 절을 하고 기도를 했다. 알고보니, 네팔의 종교는 여러 종교가 혼합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힌두교의 여러 신들 중 서가모니 불이 있어 불교를 믿던 사람들도 힌두교에 녹아들 수 있었다고 한다.
도르지 다이에게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풀들과 나무들이 보여 그 이름을 물었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행나무였다. 분명 다르게 보이던 나무도 도르지 다이한테 물어보면 다 행나무라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 네팔 특유의 나무인가 해서 지금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향나무의 강원도 사투리라고 나온다. 아니, 아무리 도르지 다이가 한국말을 잘 한다지만 내게 사투리를 가르쳐준거야? 도르지 다이는 한국말을 정말 잘한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한국말을 잘 하냐고 물어봤더니 어렸을 때 네팔 한식당에서 오래 있었다고 했다.
조금 가다보니 한국인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40~50대 정도의 분들이셨는데 우리에게 빨리 가려 하지 말고 천천히 느긋하게 가라고 하셨다. 그 다음에 만난 분들도 하나같이 천천히 가라고 하셨다. 한국에선 수고하세요 라고 말하는데 여기는 천천히 가세요 가 인사인가 보다. 아무튼 외지에서 한국인을 만나니 반가웠다. 그리고는 정말 예쁘고 청순한 젊은 여자분을 만났다. 강인해보이는 외모가 아니어서 분명 누군가, 특히 남자친구랑 같이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혼자 왔다고 했다. 대단했다. 어떻게 이 곳을 여자 혼자 올 생각을 하지? 게다가 우리는 완전 중무장을 했는데 그 여자분은 얇고 캐쥬얼한, 광고에 나올 법한모습이었다. 팀닥터님이 미혼이셔서 두 분이 잘 되셨음 했는데 아쉽게도 다시 그 분을 만날 순 없었다.
중간에 쉴 때마다 셀파들이 차를 내줬다. 주스도 따뜻하게 데워줘서 살 맛이 났다. 고산병에 걸리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가 잘 먹고 대접을 잘 받아서 인 것 같다. 셀파와 특별 요리, 특히 내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음식들을 알아차리고 메뉴를 짰던 식량지원팀한테 진심으로 감사하다.
1월 10일, 이 날 밤은 내게 특별하다. 마음 하나를 더 얻은 날이기 때문이다.
이 날 저녁, 대장님은 맏이 3인방 네 바퀴에게, 정상에 오르기 전 흐트러졌던 위계질서를 바로잡고 그 동안 묵었던 감정들을 솔직하게 꺼내 놓는 시간을 가지라고 하셨다. 마침 내가 하려고 벼뤄뒀던 일인데 대장님께서 얘기해주셔서 그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위계질서, 이것을 대장님께서 말씀하신 건 형식적인 위계질서뿐만 아니라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고 따르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보살피는 것을 넘어서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깨달음을 주라고, 그래서 더 끈끈한 로체원정대가 되길 바라셔서였다. 물론, 옛 조선시대처럼 사람의 위계가 정해져있고 귀천이 있는 시대는 지나갔지만 시대가 변한다해도 나보다 언니이고 오빠이고 선생님인 사람, 하루의 경험, 1년의 경험이 더 있는 사람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존댓말, 그러니까 형식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었다. 왜 존댓말을 쓰라고까지 직접 이야기 하셨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 날, 얼핏 대장님께서 하신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요즈음은 결혼을 2~30분안에 해 버린다고 한다. 빠르고 간소해진 결합만큼이나 파기도 쉬워졌다. 그래서, 현재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 최고란다. 그러나, 예전에는 결혼은 아주 중요하고 신성시 여겨졌으며 그에 걸맞게 엄격한 절차를 밟고 혼례를 올리는 데 하루 반나절이 지날 정도로 결혼식 시간이 매우 길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당시 이혼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이혼을 하면 손가락질을 받았다. 당시 사회풍속도 작용했겠지만 형식이 정신과 의미를 더욱 더 깊게 만들어준다는 것은 사실인 듯 했다.
또한, 언젠가 동갑이지만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는 부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부부는 부부싸움을 할 때, 아무리 화가 나도 끝까지 존댓말을 쓴다고 했다. 그러면 서로의 마음이 다치지도 않고 어느 정도의 선을 넘지 않아 싸움도 금방 끝난다고 했다. 형식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다. 형식이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걸 새로이 깨닫게 되었다.
이걸 대원들에게도 알려주러 갔는데 군기를 잡고 말았다. 특히, 첫만남부터 좋지 않게 봤던 정범이가 눈을 치켜뜨고 말을 하는 것이다. 위계질서를 잡는답시고 그렇게 눈 치켜뜨지 말라며 명령투로 화를 냈다. 분위기가 싸늘해졌고 맏이 3인방만 잠시 따로 나왔다.
지은이가 내게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정범이가 더 거칠게 나올 거라고 했다. 그럴수록 다그칠 것이 아니라 다독여야 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다독여야 하냐고 했더니. 일단,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혼을 내지 말고 단둘이 있을 때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그리고, 내 생각만 말하는 게 아니라 먼저, 너가 지금 왜 그런 행동을 한 거냐고, 어떤 마음에서 그런 행동을 보인 거냐고 물어보라고 했다. 그런 다음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말하면서 다음부턴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라고 했다. 감탄스러웠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냐고 했더니 자기가 예전에 정범이처럼 선배한테 반항했던 적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고 했다. 지은이를 보며, 정범이도 이렇게 변화될 수 있을까 싶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갔더니 그 친구들도 정범이와 나와 이야기할 시간을 갖길 바랐다. 정범이와 나는 그 동안에 쌓여있던 감정들, 첫 만남부터 엉클어졌던 단추를 하나 둘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일부터는 제대로 새로 첫 단추를 끼우자고 했다. 나는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인간관계의 첫 단추인 첫인상, 그것이 잘못 끼워지면 다음에 볼 때도 그 사람의 첫인상처럼 안 좋은 모습만 자꾸 보이게 된다. 난 그것이 영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 정범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단, 그 단추를 자꾸 채워갈 게 아니라, 잘못 끼웠다고 생각이 들 때 다시 돌아가서 단추를 하나둘 씩 풀어야 한다. 모든 단추가 풀리면 새 단추를 끼울 수 있다. 그게 인간관계에서도 가능했다. 서로의 첫인상을 알고 그곳까지 돌아가서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하다보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서 관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범이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이해하게 되니까 정범이가 내일 더 못 되게 굴어도 난 정범이를 내 식구로 생각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그렇다. 남들 보기에 미운 짓을 하지만 난 그를 믿고 이해하기 때문에 이젠 내 가족이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이런 일이 종종 생기는 것 같다.
누구보다도 가까운 가족에게서도 있었다. 우리아빠가 내게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아버지가 미워보였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에 퇴근하고 돌아오실 때면 과일을 한 아름 안고 오시고 내게 필요한 것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사주시는 아버지이며 엄마가 매번 내게 아버지가 널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고 아끼시는지 모른다. 너희 아버지처럼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못 봤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내눈에 아빠는 내 말에 귀기울여주시지 않는 분이었고 나를 믿지 못하시며 사사건건 잔소리만 하는 분일뿐이었다. 그래서, 난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면 다 귀를 막아버리고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셔도 인사를 하지 않고 마치 집에 아버지가 없는 것처럼 생각했다. 출장을 떠나신 날이면 아빠가 보고싶다기보다 너무 편안하게 느껴졌고 그 시간이 끝나가는 게 아쉬웠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 친구들이 혹은 TV에서 죽고 못사는 아버지와 딸의 모습을 보면 부러웠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어렸을 땐 그랬으니까... 이제는 아버지와 갈등을 풀고 싶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고 고맙게도, 이 곳 네팔에 있으면서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어느 순간 애틋함과 소중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남은 날들 동안 그 동안 잘 해드리지 못한 만큼 더 밝게 더 따뜻하게 말하고 따뜻하게 마음을 쓰고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말로만 그랬는데 이번엔 진짜 행동으로 보여드리고 싶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면, 서로 힘들 때, 힘이 되는 사이가 되었으면...하고 바랐다.
모두에게 소중했던 밤, 많은 시간을 우리 둘을 위해 써주었던 대원들 모두에게 고맙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1차훈련에서 있었나 보다. 역시 처음이 문제다. 그 때의 많은 의혹들도 모두 풀렸다. 그리고는 서로의 다짐들을 이야기했다. 우리들 모두 이 로체원정대 해외원정이 터닝포인트가 되길 바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각자 원하는 터닝포인트가 무엇이었는지, 얼마나 이룬 것 같은지, 앞으로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돌아가면서 이야기했다. 로체원정대 10기 파이팅을 외치면서 다들 편안하면서도 약간의 두려움을 안은 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지현이랑 나랑 같은 방을 썼는데 지현이는 눈물을 보였다. 덕분에 나도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게 되었고 서로 모든 단추가 풀리게 된 기쁨을 나누었다. 그 날 밤은 기분좋은 설렘으로 잠이 들었다.
1월 11일, 전날 강행군을 예고하셨으나 오늘은 300m 정도밖에 올라가지 않을 거라 하셨다. 어제 다들 심기일전했는지 어제와 달리 산행을 할 때 조용했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다. 어제 아파서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갈등이 있었다고 했던 선민이와 범수는 서로 대화를 나누며 오해를 풀어갔고 어제 극적으로 친해졌던 동갑내기 친구 경민이와 지현이가 웃음꽃을 피우며 정답게 걸어갔다. 참 뿌듯했다. 나 또한 어제처럼 정범이가 한 식구처럼 여겨졌다.
그 날, 차대장님과 함께 길을 가는 시간을 가졌다. 주된 말씀이 능력이 있다면 인술을 베푸는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도 능력이 된다면 그리고 그 일이 내 일이 맞다면 기꺼이 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그쪽이 아닌 것 같다.
차대장님이랑 가면서 느낀게 확실히 느리게 가는 것도 아닌데 차대장님이랑 가니까 정말 편했다. 숨도 안 차고.. 역시 산악인이라 다르신 것 같았다.
오전의 햇살은 참 따사롭다. 그리고, 하늘도 가을 하늘처럼 푸르렀다. 이런 색의 하늘을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아 나중에 힘들 때 보려고 사진을 찍어두었다. 얼마 가지 않았는데 점심 먹을 데에 도착했다고 했다. 12시가 되기도 전이었다. 배가 아직 고프지 않았는데 마침 대장님께서 점심 먹기 전에 토론시간을 가지자고 하셨다. 그러나, 처음이라 그런지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어 조용한 토론이 되었다. 나중이 돼서야 다들 한 마디씩 하곤 했다.
나는 중간에 화장실을 가려고 밖을 나왔다. 상쾌한 공기에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아, 좋다. 어제부터 고도와 우리가 묵는 곳들의 이름이 적힌 지도가 보이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래서, 결국 셀파에게 하나 더 있냐고 물어보러 갔다. 셀파들은 부엌에서 점심을 먹으려 하고 있었다. 메뉴는 달밧. 그런데 손으로 먹는다. 어제 내가 먹을 때는 수저가 있길래 이 사람들도 수저를 이용해서 먹는가보다 했더니 이제보니 그건 한국사람을 배려한 것이었다. 인도랑 똑같구나 싶었다. TV에서만 보던 거라 신기해서 계속 보고 또 봤다. 호기심이 들었다.
대장님이 네팔사람들이랑 먹지 말라고 했는데... 에잇 몰래 먹었다. 도르지 다이도 먹고 빠상도 먹는데 내가 못 먹을까. 한 번쯤은 손으로 먹어 보고 싶었다. 내가 먹어봐도 되냐고 했더니 매우 반기며 들어오라고 했다. 밥도 엄청 많이 퍼 주고 커리도 듬뿍 부어 주었다. 그리고 숟가락도 주었다. 그런데, 내가 숟가락은 괜찮다고 했다. 셀파들이 놀라더니 내가 손으로 먹기 시작하니까 매우 좋아했다.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드니 더 좋아했다. 이것도 먹어보라며 국물도 권했다. 역시 먹길 잘했어.
그렇게 먹고 있는데 생각해보니 지금쯤 대원들이 점심을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다 먹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손을 대충 씻고는 들어갔더니 웬걸. 식사 준비가 다 되어있고 누군가 식사의 변을 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척 하며 얼른 자리에 앉았다.
오우, 점심은 라면. 라면이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계란도 넣고 국물도 심심한게 내가 끓인 것보다 백배 더 맛있었다. 욕심을 부려 한 그릇 더 시켰더니 과식이었다. 그래서, 후식도 먹고 싶었던 사과가 나왔는데 많이 먹지 못했다. 아아, 과식하지 말자.
나가니까 어제 봤던 것보다 더 많은 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종들의 정체는 라마교였다. 이 종을 돌리면서 옴마니반매온을 외치면 되는 거였다. 만물박사 차 대장님께서 종을 돌리는 건 불교에서 탑을 돌며 소원을 비는 것과 같은 것이고 옴마니 반매온은 나무아미타불과 비슷한 뜻이라고 하셨다. 대장님을 따라서 종을 돌리고 옴마니 반매온을 자꾸 외웠다. 그런데, 내가 라마교 신자가 아니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이 말이 익숙지 않은 건지 별로 느낌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며 종을 돌렸더니 느낌이 확 왔다. 그래, 그런거였어.
고도가 높진 않았지만 쉬지 않고 진행되는 산행에 지쳐갔다. 그러나, 가면서 지은이랑 대화를 나누는 건 참 즐거웠다. 가족이야기도 하고 진로에 관한 대해서도, 20대때 빼놓을 수 없는 연애이야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는데 정신이 팔려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놓쳤지만 아름다운 자연경관만큼이나 뜻깊은 시간이었다. 그 사이 오붓해진 우리는 안나푸르나 고봉을 배경으로 신혼부부처럼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이놈의 길이 가도가도 끝이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지겨웠다. 왜 그럴까 생각하니 내가 너무 앞만 보고 간다는 걸 느꼈다. 주변 경치에 감탄하다 보면 힘든 것도 잊어버리는데 너무 앞만 보고 달리니 힘에 부쳤다. 다시금 주변 경치로 눈을 돌렸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푸른 초록색은 사라지고 흙, 황토색 암벽만 보였다. 황토색 암벽도 자세히 보니 아름다웠다.
조금 가다보니 옅은 눈발이 날렸다. 고되었다. 발도 슬슬 아파오고 어서 마낭에 도착했으면 싶었다. 걷고 또 걸으니 끝내 안 올 것 같았던 마낭에 도착했다. 눈발이 날리는 바깥과 달리 이 곳 안에는 난로가 피워져 있었다. 그리고 셀파들이 고산병에 특효라는 마늘국을 만들어주었다. 국물 맛이 끝내줬다. 맛도 좋은데 몸에도 좋다니 한 그릇 더. 팝콘도 주셨다. 한국에 있을 때 살찔까봐 손에도 안 댔던 음식인데 도르지 다이가 먹으라고 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믿고 먹었다.
그 날 밤. 해냈다. 화장실에서 일을 냈다. 6일만이었다. 오늘까지도 안 되면 교수님이 말하라고 하셨는데... 마늘국의 힘이었다. 그리고 엄마가 큰 힘이 되었다. 나 말고도 화장실을 못 가는 대원이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도 이 비법을 전수해주었더니, 결국 그 친구도 해냈다.
사실, 우리 엄마가 매일 서서 일하다가 몇 년 전 장시간 앉아서 일하는 직업으로 바꾸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장운동이 갑자기 멈췄다. 그래서, 몇 번 응급실에 실려가곤 하셨다. 엄마의 심정이 이제서야 이해가 갔다. 장장 6일만에 화장실을 갔는데 기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면 신경이 쓰여서 잘 못 가는데 그 날은 화장실 내부가 보일수도 있는 위험한 화장실이었고 그 어느때보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는데도 해낸 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아무래도 6일이 지나면 말하라는 허교수님의 말이 내게 위급한 순간이라는 걸 짐작케 했던 것 같다.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대원들은 엽서를 사러 갔었다. 나도 마낭 엽서는 어떨까 하고 궁금했는데 바로 옆이라고 해서 가봤다. 어제 샀던 건 먼지도 많이 쌓여있고 옛날 엽서였는데 여기는 새로 나온 엽서 같았다. 엽서도 크고 사진도 깔끔했다. 다행이었다. 승준이를 비롯해서 어제 사지 못한 대원들이 더 좋은 걸 갖게 돼서.
원정을 떠나기 전, 각자 맡은 임무가 있었다. 식량지원, 문화교류, 행정통역, 장비수송, 의료지원, 의류봉사. 각자 한 가지씩 팀장을 맡고 2개를 팀원으로 총 3개팀의 임무를 맡았다. 내게 맡겨진 임무는 총괄, 행정통역, 의류봉사였다. 이 날 밤, 대장님이 나를 따로 부르시더니 의류를 계절별로 분류하고 내일 아이들에게 줄 옷 20벌을 챙겨놓으라고 하셨다. 이것 외에 주문이 많아서 적으려고 했는데. 아뿔싸, 메모장과 펜을 침대맡에 두고 왔다. 불안한 마음으로 입속으로 말씀하셨던 걸 외며 의류봉사팀을 불러 모았다. 의류봉사팀엔 경민이, 수현이, 영호 이렇게 셋이 있었는데 수현이 영호가 고산병을 심하게 앓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자기역할을 잘 해주었다. 경민이는 두말할 것도 없고. 그 날 밤, 여름 상의 하의, 겨울 상의 하의, 신발 및 기타의류 이렇게 완벽히 분류를 한 우리는 스스로 뿌듯해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극도의 피곤이 몰려왔다. 경민이 방에 잠시 쓰러져 자다가 홀로 있을 선민이가 걱정이 되어 새벽 3시쯤 다시 나의 방으로 갔다. 다행히 곤히 자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맛있게 밥을 먹고 기분 좋게 밖을 나섰는데 무슨 동네 아이들이 우리 숙소 앞에 2~30명이 서 있는 것이다. 뭘까 하고 있는데 대장님께서 “어제 옷 20벌 빼놨지?” 하셨다.
순간,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어제 분류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옷 스무 벌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내가 팀원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팀원들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이건, 완벽한 내 잘못이었다. 애들은 모이고 아이들 엄마까지 온 것 같은데 의류를 실은 카고는 이미 아침에 셀파들이 가져가고 없었다. 그냥 돌려보낼 수 없어 차 대장님이 우리가 가진 간식 중에 초코파이를 거두셨다.
이 아이들이 아침부터 초코파이 하나를 받으려고 이곳에 와야 했을까? 옷을 기다리고 있었을텐데... 아이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대원들도, 대장님도, 허교수님도, 태연샘도 모두 뵐 면목이 없었다. 난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다른 대원들이 초코파이를 나눠주며 사진을 찍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먼 발치서 나의 잘못을 반성하는 일 뿐이었다. 메모장과 펜은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게 대원의 기본적인 의무인데 그걸 지키지 못 했다.
내가 혼자 서 있는게 안 돼 보이셨는지 이 대장님과 차 대장님이 달래주러 오셨다. 다음에 주면 된다고,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뭘 그러냐면서 위로 해주셨다. 마음이 녹아 내렸다.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너무나도 감사했다. 그리고, 허 교수님께서도 와서 이 일을 잊지 말라고 하시면서 초심을 잃지 말라고 하셨다. 로체원정대에서뿐만이 아니라 어디서든 항상 초심을 잃지 말라고 하셨다. 그 말이 너무나도 와 닿았다. 결국, 내가 오늘 실수했던 건 초심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뭐든 하나라도 더 배우고 얻어가려는 마음, 조금이라도 더 솔선수범하고 희생하고 깨달음을 얻어가려는 마음, 나는 그 마음을 잃었던 것이다. 초심을 잃은 모습이 메모에서, 나의 이기적인 행동에서, 자꾸 뭘 잃어버리는 데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허교수님께서 내가 헌옷 나누기 재단 같은 걸 만들어서 나중에 이곳에서 100벌 200벌씩 나눠주면 된다고 하셨다.
대장님과 교수님 덕분에 아까보다는 가벼워진 마음으로 툭툭 털고 마낭 마을을 빠져나갔다. 걸으면서 마낭 아이들이 초코파이를 입에 물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짠한 마음에 또다시 눈물이 나려했지만 꾹 참기로 했다.
어제는 눈보라가 쳐서 회색빛으로 보였는데 이제 보니 마낭 마을은 온통 황토색이다. 길도 황토색, 집도 황토색, 주변에 나무도 없고 누런 논과 황토색 암산뿐이었다. 색깔이 있는 거라곤 운동회 만년기를 걸어놓은 것처럼 길게 늘어져있는 라마교의 오색기 롱다뿐이었다. 마치 내가 사진 속의 세계문화유산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원들 대부분 고산병이 서서이 찾아오고 있었는데 나와 승준이는 멀쩡했다. 그래서 승준이와 나는 후미를 맡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승준이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게 됐다. 지은이를 제외하면 승준이가 유일하게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진로에 대해서도 공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가 바로 고등학생이었다. 나도 잘 못했지만 내가 했던 공부 방법이라던지 기타 공부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원정대 대원으로서의 승준이만 생각했는데 승준이도 고등학생이고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는 친구구나 하는 생각이 그 때 처음 들었다.
중간에 가다가 영어 안내문이 있었다. 자연보호의 나라 네팔. 레오파드, 순록을 지켜주세요. 라고 써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공부할 때 봤던 단어들인데 생각이 나질 않아 해석하기가 어려웠다. 그 때, 지현이가 레오파드 그러니까 표범은 여기 산 모습이 표범같이 생겼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가시덤불이 띄엄띄엄 있는 것이 표범의 얼룩무늬처럼 보여서 산 전체가 한 무리의 표범 같았다. 사슴도 아마 그런 의미라고 했다.
아, 명색이 외대생이 될텐데... 돌아가자마자 영어단어부터 외워야 겠다.
오늘은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도착한 것 같다. 야크 카르카 호텔이라고 적혀있는 표지판에 4000m라고도 적혀있었다. 아, 뿌듯했다. 와 드디어 고지가 보이는 구나.
저녁 6시쯤 되니 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여서인지 하늘과 가까워서인지 달이 유난히도 크고 밝게 보였다. 달의 위성사진을 하늘에 걸어놓은 것처럼 달표면이 자세히 보였다. 밤이 되니 별도 무척 많았다. 천문학에 관심이 많으신 태연샘이 저녁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별자리를 알려주셨다. 난 이런 것에 참 관심이 없어서 별자리는 봐도 봐도 몰랐는데 이제 오리온자리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밤하늘이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천구’처럼 보였다. 천구란, 반구 모양의 하늘을 말한다. 예전엔 하늘이 그저 편평하게만 보였는데 그 날은 정말 밤하늘이 둥그렇게 땅을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완벽한 별자리판이었다.
저녁을 먹기 전, 셀파들이 모닥불을 피워 두었다. 짐을 정리하고 밖을 나가보니 대원들이 모닥불 곁에서 불을 쬐고 있었다. 낭만적이었다. 대학 MT에 온 것 마냥. 다들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셀파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첫곡은 심심해 다니마~ 로 시작되는 노래였는데 나중에도 자주 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봐서 매우 유명한 노래인 것 같았다. 이어서 네팔의 아리랑이라는 ‘녯상 삐리리’를 불렀다. 안나푸르나에 오기 전 지프차에서 기사아저씨로부터 열띤 강습을 받은 터라 신나게 따라 불렀다. 항상 방긋방긋 웃으시는 할아버지 셀파분이 계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흥이 나셨는지 춤을 추기 시작하셨다. 분위기를 업시키는 재주가 있으셨다. 우리도 흥이 달아올라 같이 춤도 추고 한국 아이돌 댄스도 보여주고 정범이의 ‘바람기억’을 들을 찰나. 태연샘이 너희 이러다 고소 먹어‘라고 하시며 우리가 업 되는 걸 제지 하셨다. 태연샘 말씀이 백번 옳았다. 고도도 4000m가 넘었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거나 들뜨는 건 고산병의 큰 적이었다. 게다가 불 곁에 있는 것도 불이 연소되면서 산소를 빼앗아서 좋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시 오지 않을 이 밤, 분위기도 너무 좋고 한껏 달아오르려 하고 있었고 셀파들과 마음을 나누고 한국의 음악과 네팔의 음악을 서로 교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래, 난 4000m면 됐다. 고산병아 어디 한 번 와 봐라. 하고 신나게 춤추고 노래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자꾸 지은이가 눈치를 주고, 맏이인 내가 이러면 다른 대원들도 고산병에 걸리겠구나 싶었다. 자꾸만 업되는 몸을 가라앉히며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빠상은 내게 마지막 날, 강남스타일을 함께 추자고 했다. 난 OF COURSE!
난 그 날, 고산병에 걸리려고 작정을 하고 덤볐던 것 같다.
고산병 최대의 적, 점심에 이어 또 과식을 했다.
1월 13일, 고산병 환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쌩쌩했던 나도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특히,4800m 토롱 하이캠프에 도착하기 전 깎아지른 절벽을 오를 땐, 호흡이 점점 빨라지고 머리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뒤에서 가니까 자꾸 처지는 것 같아 앞사람 발만 보고 앞사람 속도에 맞춰 갔다. 앞 사람을 가로지르기까지 했다. 뒤에서 태연샘이 앞사람을 따라가지 말고 자기 페이스에 맞춰 걸으라고 하셨음에도 난 그 말을 듣지 않고 앞사람만 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인강을 들을 때, 힘들 때 산을 오르는 가장 쉬운 방법이 앞사람의 발을 보고 그에 맞춰 가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난 그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앞사람 발에 맞춰 가리라.
결국, 보이지 않을 것만 같던 이 길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 반의 반. 40걸음만 더. 저 앞에 오두막집이 보였다.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아무리 가도 끝이 없었다. 고도가 높은 곳에 가면 저 멀리 있는 것이 가깝게 보여서 다 온 것 같으면서 가 보면 또다시 제 자리에 있다고 했다. 이게 그런 거구나 싶었다. 그리고, 정말 눈앞에 산장이 보일 때 나는 다 왔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마음이 놓이면서 갑자기 잊고 있던 몸의 고통이 찾아왔고 갑자기 아주 조금 남은 그 길이 아까 많이 남았을 때보다 더 멀고 힘들게 느껴졌다.
이 때, 거의 다 와서 다 왔다고 위안을 주는 건 오히려 힘을 빠지게 해서 위험하게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착하기 전까진 도착한 게 아니었다. 도착하기 전까지 도착한게 아니라고 생각해야 오히려 마지막까지 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숨 막힐 정도로 힘들었던 그 절벽을 넘어 4800m 하이캠프에 도착했다. 지은이랑 나는 엉엉 울면서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힘든 걸 이겨내고 왔다는 것이 스스로도 장하고 기쁘고 안도감이 밀려왔다. 스무 살이 된 우리는 진격의 20대라며 웃음을 나눴다. 전에는 도착하면 가방 받아주는 걸 잘 하지 못했는데 오늘은 그 뿌듯함이 힘이 되고 여기까지 나머지 대원들을 오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저 밑에까지 내려갔다. 고산병이 시작된 승준이를 보는데 어찌나 마음이 저리던지. 진심으로 수고했다고 격려하며 궁디팡팡을 해주었다. 나머지 대원들도 마찬가지로 서로 물을 나누고 간식을 나누면서 격려했다. 영호까지 도착하자 마음이 놓였다.
아 모두들 대단하다. 장하다.
대원들이 모두 산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는 잠시 밖으로 나왔다. 산장 뒤로 해가 지는 것이 보였다. 하이얀 설산을 붉게 물들이며 저무는 석양을 보며 가슴 깊이 차오르는 감동을 꾹꾹 눌러 담았다. 태연샘도 옆에 오시더니 사진을 찍으셨다. 나도 한 컷 찍어달라고 해서 사진을 찍었다.
산장 안에 들어가니 우리 말고도 백인 무리가 있었다. 우리가 산소포화도도 재고 혈압계로 혈압을 재니 동양인들 쟤네 뭐하냐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리가 의료봉사를 위해 의약품을 큰 드럼통에 가져왔는데 산에 뭐 저런 걸 들고 오냐며 약국 차리려 하냐는 투의 비아냥 섞인 말까지 했다. 처음으로 기분 나빴다. 우릴 무시하는 것 같았고 우월감에 젖어 있는 듯 했다. 선진국이라고 다 좋은 사람은 아니구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느감배시간을 가졌다. 오랜만에 느감배시간에 할 얘기가 생겼다.
아까 올라오면서 산 중턱에 조그마한 건물에서 사과와 과자를 파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대장님이 나보고 저기서 사과를 사 보라고 하셨다. 나는 별로 먹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대장님이 너만 입이냐면서 대원들이랑 수고한 셀파한테 하나씩 선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라고 하셨다. 좋은 생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돈을 지불하고 셀파들에게 줄 사과와 대원들에게 줄 과자를 샀다. 안 그래도 셀파한테 네팔말도 배우고 힘들 때 많이 도와줘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 대원들한테도 맏이로서 못 해주는 게 많아 미안한 게 있었는데 이렇게라도 마음을 전하니 마음이 좋았다. 그리고 사과 파는 아주머니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 그 동안 나누는 것에 대해 인색했는데 이번 기회로 더 나누는 사람이 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눔은 이제 보니 아픔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그리고, 아까 힘든 절벽을 오를 때, 수현이가 내 앞에서 힘들어했는데 나도 몸이 아프니 도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허 교수님도 나와 같은 몸 상태인데도 수현이를 챙기시는 것 보고 많이 반성했다. 아직 난 많이 부족하구나... 자신이 힘들 때 누군가를 돕는 게 진정한 배려라고 하셨는데 해외원정에서 난 사실 한 번도 진정한 배려는 하지 못 한 것 같다. 언제쯤이면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하이캠프에 있는 롯지는 매우 크고 시설이 잘 되어 있었다. 특히, 카운터 옆에는 작은 책장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도 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도 있었다. 꽤 괜찮은 책들이고 영어책이라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주인에게 이 책을 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흔쾌히 보라고 했다. 그래서 신나게 책을 고르고 있는데 태연샘이 너 지금 혼자 뭐하고 있냐고, 다른 애들 부모님 영상편지 보고 울고 있는데 달래줘야지 하고 말하셨다. 아, 오랜만에 여유가 생겨 책 좀 읽어보려 했더니...ㅠ ㅠ
그래서 식당에 들어갔다. 애들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혼자 울고 있는 지은이가 눈에 띄었다. 옆으로 갔다. 어머니의 모습에 감정이 복받쳤나보다. 어제도 어머니 얘기를 했었는데, 젊었을 때 지은이를 가지셨다고 했다. 지은이 어머니는 지은이를 위해서 자신의 젊음, 꿈, 모든 걸 포기하시고 생활전선에 뛰어드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지은이는 가슴에 못 박는 말들과 행동을 했고 지금 생각하니 내가 얼마나 철없고 못된 딸이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지은이 이야기에 푹 빠져서 나도 같이 따라 울었다. 나도 부모님 생각이 났다.
그 날 밤. 참 많이 아팠다. 자꾸 헛구역질이 나고 속이 미식거려서 앉지도 눕지도 서있지도 못했다. 일기는 꼭 써야 하는데, 오늘 적을 이야기가 많은데... 그래서 펜을 잡으면 구역질이 나서 도저히 못 쓰겠었다. 아픈 몸, 그 밤, 나를 달래줄 사람은 없었다. 속으로 눈물이 흘렀다. 이 상태로 내일 아침까지 버텨야 하나, 내일 정상에 가는 날인데... 못 갈 수도 있겠구나 마음을 비웠다. 속이 쓰라렸다. 허 교수님께 가볼까 생각했지만 교수님이 너무 힘드실 것 같았다. 그리고, 갈 힘도 없었다. 그 날 밤은 어찌나 길던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 왔다. 결전의 날. 셀파들이 준 모닝티를 벌컥벌컥 마시고 짐을 쌌다. 아침은 흰 죽이었는데 교수님이 많이 먹지 말라고 하셔서 조금만 먹기는 하는데 아, 맛있었다. 더 먹고 싶었지만 꾹 참고, 새벽 3시 반경, 5416m를 향해 출발했다.
한밤중이라 헤드랜턴을 껴야 앞이 보이는데 몇몇 대원들은 헤드랜턴이 고장나서 없이 가야 했다. 수현이가 내 앞에 있었는데 헤드랜턴이 없었다. 어제 수현이에게 너무 못 한 것 같아 불이라도 비춰주려고 했는데 참 속이 쓰리니까 앞을 보지 못하고 자꾸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오늘은 좀 도와주고 싶었는데 그 날도 수현이에게 참 미안했다.
어제보다 머리에서 심장이 더욱더 요동을 쳤고 구역질이 났다. 한 걸음 내딛기가 그렇게 힘들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도르지 다이가 힘을 주고 물도 주고 용기를 많이 주었다. 그리고 차 대장님께서 100m 올라왔다. 5100m, 5200m 하시는 게 어찌나 힘이 되던지. 힘들게 올라오면 그만큼 성과가 보이니까 다음까지 올라갈 힘이 생겼다.
결국,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 대원 11명 모두 토롱 패스 정상에 올랐다.
멋진 풍경이 가득할 거라 생각했던 정상, 생각과는 달리 무척이나 휑 했다. 보이는 건 오직 네팔어로 토롱패스라고 써 있는 작은 표지판과 그 옆으로 오래된 오색천이 펄럭일 뿐이었다. 안개와 먼지 때문인지 주변 풍경도 잘 보이지 않았다.
허무감이 들었다. 내가 여길 오려고 그 고생을 하며 힘겹게 올라왔던 것인가.
오히려 아름다웠던 건 정상이 아니라 저 아래에 들꽃이 피어있던 마을이었다.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이 말하는 허무감이 바로 이런 것일까.
인생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면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과 정상에 있는 순간은 별로 인생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인생의 의미는 산을 오르는 전 과정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오르면서 본 풍경들, 그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 함께 산에 올랐던 동행자. 그들이 이 원정을,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성공하기 위해 피눈물 나도록 애를 쏟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위해 일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가고, 멋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이웃들과 나누고 하루하루 행복을 쌓아가는 것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걸 휑한 정상이 말해주는 듯 했다.
내려오는 길은 참으로 길었다. 우리가 많이 올라오긴 했나보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없었다. 중간에 쉼터가 나왔다. 도르지 다이가 환타를 사줬는데. 한국의 환타 맛이나 네팔의 환타 맛이나 똑같았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먹던 맛이랑 똑같은 맛을 느끼니 피로가 싹 가셨다.
아까 정상을 같이 올라갔던 사람들 중에 한국인 남녀가 있었는데 그 중에 여자분이랑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중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22살 대학생이었다. 나와 또래가 맞는 분이라 물어볼 게 참 많았다. 난 앞으로 여행을 많이 다니고 싶어서 이 곳을 오는데 얼마나 들었으며 여행경비는 어떻게 마련했는지, 알바는 어떻게 하는지 등 여러 가지를 여쭤봤다.
환타 힘으로 더 내려가니 대원들이 노란 풀밭에 앉아서 피크닉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셀파들은 라면 끓이기에 분주해 있었다. 봄바람이 솔솔 부는 언덕에 푸른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아까 정상에서 느낄 수 없었던 시원함이 정상에서 내려오니 느껴졌다. 접시에 맛있는 라면을 받아 먹었다. 햇살도 좋고 고도가 많이 낮아지니까 고산병도 잦아들었다. 고생 끝에 낙원이었다.
이젠 고산병도 걱정 없어 라며 라면 한 그릇을 더 먹으려 했더니 이미 다른 대원들이 다 퍼 가고 국물만 남았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가 묵게 될 묵티나트 호텔로 이동했다. 주변에 분홍빛과 푸른빛이 나는 풀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에델바이스라고 하셨다. 에델바이스가 꽃이란 건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근데 에델바이스에겐 미안하나 생각보다 예쁘진 않았다.
묵티나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원도 시골마을 같았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정말 딱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마을 풍경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태국에서 볼 법한 황금색 지붕의 사원이 있을 뿐이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니 길거리에 각종 악세사리와 종교용품, 스카프를 내놓고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 내려가니 우리가 묵을 묵티나트 호텔이 보였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하면 이런 느낌일까. 한밤중부터 오후가 되기까지 걸었더니 많이 피곤했다. 방 배정을 받았는데 옥상에 방이었다. 우리 방 앞에 테라스가 있고 경치가 참 좋았다. 감사합니다. 테라스에 앉아 오후 햇살을 즐기다 방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짐정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뻗어서 잤다.
그러길 몇 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태연샘이 오셔서 비상이라며 15분 후에 문화교류를 할 거라고 하셨다. 아니, 예정엔 내일 좀솜에서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무슨 소리지 믿기지 않아서 밖에 나가보니 진짜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모이고 있었다. 마낭에서보다도 더 많은 아이들이었다. 이런, 문화교류 연습이라곤 네팔에 오기 전날 왕산펜션에서 아름다운세상 한 곡 율동을 짜고 맞춰본게 다였다. 그리고 사회자도 외국에서 살다온 경험이 있는 정범이가 맡기로 했으나 대본을 짜진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15분 후에 한다니.
나가보니 아이들이 옹기종기 똘망똘망한 눈빛을 하며 앉아 있었다. 무대는 아스팔트 바닥 운동장. 대장님이 중간중간에 게임을 넣어서 하라고 하셨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문화교류는 시작되었고 내가 노래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고 한 곡씩 불러나갔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된 상황에 노래를 하려니 민망했지만 꾹 참고 불렀다. 동네 주민들과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 셀파들이 지켜보는 데서 노래를 부르는데 나를 내려놨으니 망정이지.휴.. 춤을 추고 원을 그리고 돌고 길게만 느껴졌던 문화교류가 그렇게 끝났다.
내가 꿈꿨던 문화교류는 이게 아니었는데... 난 사실 로체원정대를 지원할 때, 문화교류가 하고 싶어 지원한 것도 없지 않았다. 특히 사물놀이는 정말 하고 싶었는데 이번 기수 대원 중엔 사물놀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있었다 해도 연습할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무리였다. 다른 기수 같았으면 1차 때부터 문화교류를 무엇을 할지 정하고 훈련 때마다 연습을 했을텐데 내가 10기에 처음 합류했을 때가 5차 훈련 전 보충훈련이었는데도 그 때까지 문화교류 때 무엇을 할지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니, 문화교류가 잘 될 리 만무했다.
그리고 나의 책임을 얘기 안 할 수 없다. 내가 문화교류 연출을 맡기로 했으면 시간이 없든 어떻게 됐든 문화교류를 할 수 있을 정도까지 만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반주도 없고 정해진 무대도 없는, 기획과 다른 상황에서 하게 될 것을, 연습할 시간 없이 하루 앞당겨질 수 있다는 걸 미리 예측하고 준비했어야 했다. 누구를 탓할 수 없었다. 다음에 내가 이런 상황이 온다면 내가 책임질 수 없다면 아예 맡질 말던가 책임을 지게 된다면 어떻게 해서든 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내가 예상했던 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항상 염두에 두고 여건이 부족할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여실히 깨달았다. 비록, 내가 꿈꾸던 문화교류를 하지 못했고, 대장님께 꾸지람을 받았을지라도 나의 부족함과 아주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된 것 같아 감사했다.
문화교류가 끝나고 의료봉사팀은 허 교수님께서 주민을 진료하는 걸 도왔다. 그리고 나머지 대원끼리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눠줬다. 아이들이 풍선 하나로 어찌나 재밌게 노는지. 그 풍선으로 축구도 하고 배구도 하고 풍선에다가 아이들 이름을 한국말로 적어주니까 아이들이 무척 좋아했다.
대원들이 아이들이랑 놀고 있을 동안 지은이랑 나랑은 잠시 나와서 떡볶이를 만들었다. 엄마가 집에서 해 주시면 맛있게 먹기만 했지 만들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얼핏 멸치랑 무를 넣고 다신 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들은 것 같아 멸치를 찾아 넣었다. 그런데 그 다음을 모르겠는 것이다. 재료는 준비가 됐는데 떡을 저렇게 계속 끓여도 되는지 건져야 하는지, 채소는 언제 넣어야 좋을지, 양념은 또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이럴 때, 엄마랑 통화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팔 요리사님이랑 이리저리 맞춰가며 우여곡절 끝에 라볶이가 완성이 됐다. 정확히는 멸치라볶이였다. 멸치를 넣고 다신물을 내고는 건져야 하는데 건지지 않은 것이다. 고맙게도 다들 맛있게 먹어주었다. 셀파한테도 맛을 보여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오랫동안 씻지 않고 땀을 흘린 상태로 그대로 있었더니 여기저기 짓무르기 시작했다. 내려올 때부터 아프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아파왔다. 내려오면 샤워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샤워는커녕 화장실 물도 내려가지 않았다. 어떡하지 하고 있다가 셀파한테 뜨거운 물을 가져다 줄 수 있냐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주전자에 물을 데워서 우리 방까지 갖다 줬다. 어찌나 고맙던지, 덕분에 따뜻한 물로 좀 씻고 아까 발이 아프다고 했던 대원들도 족욕을 할 수 있었다.
그 날 밤, 대장님이 셀파들에게 줄 옷과 간식들을 공평하게 나누라고 하셨다. 두 번 다시 실수는 없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의류봉사팀이 아니었음에도 자기일처럼 도와준 승준이와 수현이, 그리고 항상 묵묵히 최선을 다해준 경민이 덕분에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1월 15일, 오늘의 일정은 원래 문화교류를 하기로 했던 좀솜으로 가는 것. 다만, 지프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중간에 눈이 많이 쌓여 있어서 지프차가 올 수 없다고 했다.
출발하기 전에 어제 멀리서 보였던 황금색 지붕의 사원을 들렸다가 가기로 했다. 불교사원이라고 들었는데 우리나라 절에서 보던 불상이랑 많이 달랐다. 그리고 불상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힌두교처럼 이마에 붉은 점을 찍기도 했다. 내가 힌두교 사원 아니냐고 했더니 불교 사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또 옆에 다른 건물에 들어가니 그 곳은 힌두교 신의 사원이었다. 네팔은 종교가 혼합되어 있다고 하더니 그게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었구나 싶으면서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물론 원불교라서 불상을 숭배하진 않지만 그래도 절에 가면 항상 절을 하고 오긴 했다. 그런데, 이 곳의 불상은 내가 보던 것이랑 다르니까 절을 하기가 꺼려졌다. 대신에 빠상이랑 라파가 나를 따로 불렀다. 갔더니 촛불이 여러 개가 켜져 있었다. 내게 촛불 하나를 건네더니 촛불을 켜보라고 했다. 양초는 많이 봤던 거라 마음이 내켰다. 그래서, 촛불도 피우고 그들이 하는 것처럼 나뭇잎이 띄워져 있는 성수를 양초에 뿌렸다. 그리고, 소 머리에서 물이 나오는 곳이 있었는데 빠상이 그 물로 세수를 하길래 나도 따라했다. 마음이 깨끗해지길 바라면서.
내려오면서 빠상이 길거리에서 내놓고 파는 팔찌를 여자대원들에게 하나씩 선물해 주었다. 나중에 한국에 놀러오면 밥 한 끼 사야겠다.
대장님이 지역경제에 도움을 줄 겸 스카프 하나씩 사라고 하셨다. 이 곳은 만든 사람이 부르는 게 값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부르는 게 값이었다. 수공예로 만든 야크털 숄인데도 만원도 안 했다. 장갑도 한국에선 만원 넘게 파는 것들인데도 2000원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무릎담요로 쓸 야크숄과 장갑을 만원에 주고 샀다.
가는 길에 방언을 터뜨리는 선민이와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나의 친구 지은이랑 같이 가게 되었다. 발에 물집이 잡혔는지 지은이가 많이 절뚝거렸다. 그러니까 앞 사람과 거리가 너무 많이 벌어졌다. 마음은 조급해졌으나 내가 얘를 업고 갈 수도 없고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천천히 가니까 쉴 수도 없어서 몇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더니 나도 발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희한하게 점심 먹을 곳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극도의 피곤이 몰려왔다. 어제 짓물렀던 곳이 더 아프기 시작했다.
내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짜파게티가 점심으로 나왔는데 라면 반 개도 안 되는 것 같았다. 밥이라도 더 먹을까 하는데 늦게 왔는데 나 때문에 시간이 지체될 것 같아 안절부절 못 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도 고프고 몸도 아팠다. 아까 내가 많이 힘들어 하는 걸 본 도르지 다이가 내 배낭을 셀파 따지에게 맡겼다. 따지도 배낭이 있는데 내 배낭까지 메게 하니까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다시 달라고 했지만 자꾸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배낭을 따지에게 맡기고 걸었다.
미친 듯이 걸었던 것 같다. 아까 나 때문에 많이 기다렸던 대원들에게도 미안했고 대장님이 눈보라가 많이 치는 걸 보니 심상치 않다고 빨리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고 하시니 위험상황이라는 게 느껴졌던 것 같다. 이전까진 경치도 구경하고 대원들이랑 이야기도 나누며 왔는데 그 순간만큼은 눈도 막고 귀도 막고 좀솜마을에 닿을 때까지 혼이 나간 사람처럼 그냥 그렇게 걸었다.
눈보라는 점점 심해졌지만 산 넘고 물 건너 가다보니 어느새 좀솜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차 대장님이 나보고 행동이 굼뜨고 여자치고 팔도 길다며 늘보 원숭이라고 별명을 지어주셨는데 이 대장님이 내게 이젠 늘보원숭이가 아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수고했다고 하시는 그 말씀에 최선을 다해 걸었던 그 날의 모든 수고가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이 곳 좀솜 마을은 어제 묵었던 묵티나트보다 발전된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빵집도 있고 카페도 있고 집들도 크고 사람들도 많았다. 게다가 숙소에 샤워시설이 있었다. 그것도 따뜻한 물이 나오는.
그 날 저녁, 특별요리 삼계탕이 나왔다. 닭 속에 찹쌀을 넣는 것까지 완벽한, 삼계탕이었다. 닭죽이 어찌나 맛있던지 세 그릇이나 더 먹었다. 죽을 퍼 주는 따지가 내가 너무 잘 먹는 것 같았는지 웃었다.
지프차에 이어 내일 타야할 경비행기도 안 뜰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 걸은 것에 세 배를 더 걸어야 한다나... 중요한 건 셀파도 없어서 카고에 실었던 짐까지 우리가 다 지고 가야 했다. 아이고, 하느님 우리에게 어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그러나, 삼계탕도 먹었겠다. 까이꺼 생애 걸을 거 다 걷고 가자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날 밤, 셀파들이 신나는 뒷풀이 시간을 가졌다. 술도 한 잔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아, 나도 끼고 싶은데 경비행기가 뜨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인지 우리 원정대의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캠프 파이어 때도 흥이 나는 걸 참아야 했는데 내려와서까지, 이렇게 마지막날까지 참아야 한다니... 빠상이랑 강남스타일 같이 추기로 약속했는데,,, 아쉬움을 곱씹고, 곱씹고, 곱씹었다.
그토록 원하던 지은이와 한 방을 쓰게 됐는데 놀지 못한 아쉬움과 내일 비행기가 뜰는지 이런저런 복잡한 심경에 어물쩡 대다가 그 날 밤이 다 지나갔다.
아침이 밝았다. 어제 그렇게 눈보라가 치더니 청명한 하늘과, 강렬한 햇빛. 이대로만 가면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누군가의 기도가 통했나보다. 유럽의 시골마을 기차역처럼 생긴 좀솜 공항에서 얼마를 기다렸을까. 비행기가 도착했다. 경비행기. 말로만 듣던 경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좌석도 승무원과 함께 맨 뒷자리에 앉아서 사탕도 원없이 먹고 밖의 경치도 구경하려 했으나 졸려서 깜빡 잠에 들어버렸다. 얼마 자지 않았는데 벌써 포카라 공항에 도착했다.
잠이 덜 깬 상태라 짜증을 있는 힘껏 내며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날씨가 환상적이었다. 따뜻한 햇살, 시원한 바람. 그리고 포카라 시내는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굉장히 발달해 있었고 휴양지에 온 것 같았다. 경비행기 정원이 15명이어서 함께 타고 오지 못한 3명을 기다리며 대원들끼리 공항 잔디밭에 둥그렇게 앉았다. 소풍을 온 것 마냥, 범수가 노래 선곡을 매우 잘 해준 덕분에 신나게 노래도 부르고 누워서 햇살도 즐겼다. 어렸을 때, 5월 가족들이랑 벚꽃을 보러 강릉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처럼만의 휴식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고생 끝에 행복이란게 이런거구나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발대 3명이 모두 합류하고 나서 포카라 시내를 관광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로 이동했다. 이번엔 내 옆에 도르지 다이가 있었다. 참 편했다. 그동안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하면서 산을 타는 것에만 집중했지 다른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여유가 생겼다. 이번 원정은 10대의 마지막 여행으로 내게 특별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아래로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가는 아이들과 학교 운동장에 서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그동안, 내게 누군가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으면 나는 지금이 좋아서 어디론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아침일찍 혹은 낮에 집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왜 이리도 부러운지. 부모님의 마음이 그러실까.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는 그 때... 3년만이라도 다시 돌아가보고 싶었다. 키도, 마음도 모두 작아져서 아무런 생각 없이 하얗고 순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작년 수능이 끝나고 친구랑 영화 ‘어바웃 타임’이란 영화를 봤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남자 주인공에 관한 영화였다. 그 땐 그 영화가 공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마음이 무언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은 걸까?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하지만, 시간을 빨리 가게 할 수는 있어도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물론, 그래서도 안 되고. 그래, 어제보단 오늘이. 오늘보단 내일이 즐겁고 행복하도록 노력하자.
너무도 편안해서 더 길었으면 했던 경비행기에서의 시간이 끝나가고 어느새 경비행기는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하고 있었다. 내렸는데 공기가 너무 나쁜 게 느껴졌다. 아까 포카라의 공기가 너무 좋았던 건지 숨을 들이쉬는데 먼지와 흙이 내 입과 콧속으로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카트만두 시내로 가니까 눈이 따갑고 목이 아플 정도로 심해졌다. 그리고, 놀라웠던 것은 카트만두 시내에 갔을 때, 내가 베트남에 온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오토바이가 많았다. 오늘이 오토바이 행사날인가 싶을 정도였다. 도르지 다이한테 여쭤보니 카트만두에서는 차보다 오토바이를 많이 탄다고 했다. 온갖 매연에 무질서한 도로, 우리 기사님은 또 어찌나 경적을 많이 울리는지. 덕분에 롤러코스터보다도 더한 스릴을 느끼며 카트만두호텔에 도착했다. 첫 날 묵었던 호텔보다도 고급스러웠다. 새로 지었는지 내부 인테리어도 현대적이고 하늘색으로 된 것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내가 본 네팔 변기 중에 가장 깔끔했다. 저녁을 먹기 전 카트만두의 중심 타멜 거리에 나가 히말라야 립밤도 사고 친구에게 선물할 따뜻한 털덧신도 샀다.
저녁은 옛날 네팔 왕족의 별장을 개조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으며 네팔 각 민족의 전통 춤 공연을 보았다. 오늘 네팔 관광 제대로 하는구나. 그리고 어제 식탁보에 그려진 케잌이 너무 맛있어 보여서 먹고 싶었는데 도르지 다이가 그걸 어떻게 알고 그것과 똑같이 생긴 케잌을 사 주셨다. 맛은 내가 예상했던 맛보다 조금은 물컹거렸으나 행복했다.
호텔에 돌아가서 그 동안 감지 못했던 머리도 감고 샤워를 했다. 어찌나 개운하던지. 어제 아프던 곳도 다 낫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날 피곤해서 일기도 못 쓰고 잤다.
다음 날 아침, ‘티파니에서 아침을’ 이란 영화에 나올 법한 옥상 테라스에서 팬케잌과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바나나를 먹었다. 따뜻한 우유가 너무 맛있어서 5잔은 마신 것 같았다. 주방장에게 직접 가서 리필을 해야 했는데 눈치가 보였으나 4번을 리필했다.
내 생애 가장 멋있는 곳에서의 아침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전, 힌두교 화장터를 갔다. 갔더니, 주변에 일본온천에서 볼 법한 원숭이들이 여기저기 다니고 강 주변에 장작을 쌓아놓고 그 위에 시신을 올렸다. 그리고는 불을 붙였다. 실제 사람이 보이진 않아서 그렇게 징그럽게 보이진 않았으나 순식간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리는 사람을 보고 한 인간이 저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구나 싶었다. 도르지 다이가 옆에서 “사람, 참 아무것도 아니죠?”라고 말하는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렇게 많은 원숭이를 그것도 코 앞에서 본 게 처음이라 신기해서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대장님이 어서 오라고 재촉하셨다.
아쉽지만 이것으로 카트만두, 그리고 네팔의 여행을 모두 끝마쳤다.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서 도르지 다이와 동갑인 셀파 따지에게 고마웠다고 안녕히 잘 계시라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네팔을 떠났다. 뒤돌아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 볼 뿐이었다.
그 동안, 도르지 다이가 내게 참 많은 걸 가르쳐주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따뜻하고 진심으로 대해주어서 고마웠는데 그래서 나중에 한국에 오면 맛있는 밥 한 끼도 대접하고 노래방도 같이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인사도 못 하고 헤어져서 아쉬웠다.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날 수 있겠지? 하며 위안을 삼았다.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부모님이 보내주신 편지를 봤다. 제일 처음 글이 “사랑하는 딸, 여원에게”. 아빠였다. 수술이 잘 되어서 건강하게 퇴원한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는 한 줄 한 줄, 전에 느끼지 못 했던 나에 대한 아빠의 사랑이 느껴졌다. 건강히 잘 계셔주신 것에 대한 안도감과 고마움, 나에 대한 아빠의 사랑이 너무나도 크게 느껴져서 읽는 내내 눈물이 났다.
그런데, 다음에 바로 이어진 엄마의 편지가 슬펐...어야 했는데 너무 웃겼다. 울다 웃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는데...
네팔 비행기는 방콕공항을 향했고 방콕 공항에서 부모님께 답장을 썼다.
그리고는 다음날 1월 18일, 너무나도 건강히,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 저멀리 어머니가 보였다. 그 동안 날 얼마나 걱정하셨을까, 홀로 지새우는 밤이 얼마나 길었을까.
간사님도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셨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간사님은 사람의 마음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아 언제나 감사하고 부럽다. 그리고 다른 대원들의 부모님도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했다.
집에 도착하니, 내가 열흘 넘도록 해외를, 그것도 히말라야를 갔다왔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일상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해외원정의 기억은 마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같았다. 꿈처럼 느껴져서 그랬을까?
아버지를 뵈러 용인교당으로 향했다. 건강하신 모습을 보니 다행이었다. 그리고, 좋은 교당으로 가신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열흘 후, 이렇게 보고서를 쓰는 것으로 드디어 나의 해외원정이 마무리 되었다.
해외원정에서 얻은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 부모님과 함께 있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매일 아침 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를 만나면 아주 반갑게 기쁘게 맞이한다.
해외원정에서 이런 걸 얻게 될 줄 떠나기 전엔 몰랐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아빠한테 잘 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스무살이 되기 전에, 부모님이 건강히 살아계실 때, 부모님의 소중함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이 마음 그대로, 더욱 더 부모님께 잘 하고 삶의 매 순간의 소중함을 알며, 항상 배움에 목마른 사람이 되어야겠다.
늦은 만큼 최고의 보고서를 써내야 한다는 부담때문에 보고서 쓰기가 꺼려졌었는데 대장님께서 할 수 있는만큼만 하는 게 삶의 지혜라고 용기를 주셔서 월요일부터 3일에 걸쳐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내일부터 설 연휴인데 대장님, 허 교수님, 서포터즈 선생님, 10기 대원을 비롯한 모든 로체원정대 식구들 모두 즐거운 명절 되시길 바랍니다.^^ 저도 보고서를 마무리 한 덕분에 즐거운 설날을 보내게 되겠군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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