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陰 김상헌 선생의 遺址.
- 曺漢雄 -
언제부터인가 임진왜란 克服의 名宰相 서애 류성룡 선생과 병자호란 당시 결사항전을 줄기차게 主張 했던 척화파(斥和派)의 巨頭 청음 김상헌 선생의 자취가 서린 학가산 자락의 풍산 西美계곡을 찾아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차일피일 미루며 미적거리다 마침 시간이 나서 日氣가 불순함에도 카메라를 휴대하고 답사에 나선다.
서미동을 찾아 풍산읍에서 서미동 가는 시골길을 달리며 車中에서 西美洞 이라는 地名의 由來를 생각해본다.
忠節을 지킨 조선의 충신으로 이름 높은 서애가 돌아 가시고, 청음 선생이 머물렀던 유적지인 서미동은 학가산 서쪽에 있었기에 서녘 西,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고 살았다는 백이숙제의 고사에 나오는 청빈과 충절을 본받아 고사리 미(薇), 두자를 합쳐서 西薇 라고 추측했으나 西美라고 표기되는 지명에 조금은 의아한 생각이 든다.
死六臣의 한분인 성삼문도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伯夷叔齊)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 진들 채미도 하난 것 가,
비록 푸새엣 거신들 뉘따헤 낫다니’라며 백이숙제의 고사를 인용하며 忠節을 지켰듯이 조선의
선비들에게 고사리는 절개와 지조를 의미한 것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 하다가보니 어느덧 서미동 입구에 다다랐다.
서미계곡 입구를 지나 조금 지나자 길 우측에 아주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장정 대여섯이 충분히 앉아서 쉴 만큼 넓고 평평한 바닥면 옆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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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암
차를 세우고 살펴보니 隱者巖 이라고 새긴 큰 글자 밑에 작은 글자로 庚辰春 府使金學淳書
라는 문구가 보인다. -
부사 김학순(1767~1845.순조5년 登科))은 병자호란(1636)때 결사항전을 주장한 척화파의 거두이자 壯洞金氏의 始初라는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의 7대 후손인데 안동부사(1820년. 순조20년 봄 赴任)로 있으면서 영호루에 洛東上流(淬) 嶺左名樓 라는 큰 글씨를 남긴 인물이다.
隱者巖 이라고 새긴 뜻을 생각해 보니 이곳 숲 깊은 학가산 밑 산골마을로 청음선생이 숨어 들어 좌절된 척화斥和의 괴롭고 쓰라린 심사를 달래고 삭히려 했다는 뜻이 한층 더 다가온다.
隱者巖 이라고 새긴 글씨 옆면에 또 다른 글씨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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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수양 산남율리
“ 해동수양 산남율리'( 海東首陽 山南栗里 )란 무슨 의미일까?
해동이란 우리나라를 지칭하며 또한 안동을 의미하고 수양이란 중국고사에서 백이숙제가
절의를 지켜 죽은 산으로 청음의 귀향이 夷齊의 그것과 같음을 뜻하리라.
산남은 중국의 지명인데 예로부터 영남지방을 山南 또는 교남(嶠南)이라 불렀기에 그렇게 刻書
했으리라.
율리는 고서에 보면 도연명의 집이 있던 곳이 율리 였으니 청음이 소산 청원루에 거쳐 하시다
망국의 선비가 살기엔 마땅치 않다하여 이 깊은 산중에 木石居라 명명한 두어 칸 초가를 지어
자연에 귀의 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계곡끝 서미1리는 가구수가 15여호되는 쇠락한 마을이다.
마을 뒤편 학가산 자락에는 중대바위가 눈에 들어오고 마을 뒤편에는 바위머리 위에 비각(碑閣)과 ‘청음선생 목석거 유허비’를 이고 있는 커다란 빗집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바위는 사방이 한자가 넘는 높이라 도저히 그냥은 올라 갈 수가 없는 바위다.
바위에는 역시 부사 김학순이 시원한 필체로 木石居라 刻書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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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각과 목석거 刻書
庚辰仲春先生七代孫本府使學淳謹書라 새긴 글자 左面에는 萬石遺虛 百世淸風이라 각서刻書되어 있는데 이는 유허비 부근의 수많은 바위돌 들이 청음의 흔적이니 오랫동안 그 정신이 이어지리라는 후손으로서 청음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나는 뜻이리라..
청음(淸陰=휘 尙憲) 선생은 나름 올곧은 청백과 절의의 정신을 달래려고 一木一石이란 일편단심의 지조志操를 표현하여 목석거란 당호를 써서 초막에 내거는 동시에 自號로도 삼으셨다.
아울러 “서미골”의 깨끗한 석간수를 벗 삼는다는 뜻에서 서간노인西磵老人으로 자칭하고 생활하시면서 지역 사림들과 강론도 벌이며 세월을 낚으셨다고 한다.
그런 곳이기에 청음선생이 돌아가신 후 54년만인 1710년(숙종 36년) 봄에 안동부사 이정신(李正臣)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인 지촌 이희조(芝村 李喜朝)가 지었다.
그리고 목석거가 있는 주변을 살펴보면 바로 근처에 中臺寺란 절이 있고, 그 절 옆에는 白雲樓란 누각이 있어서 선생께서는 늘 이곳을 노니셨다고 한다.
선생의 시에 “石室先生一角巾 暮年猿鶴與同群 秋風落葉無 行跡 齋上中臺臥白雲”이라 하였는데 즉 “석실(자신의 호)선생이 각건을 쓰고, 늙으막에 원숭이와 학과 함께 사노라.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 갈 곳이 없어, 중대사의 백운루에 올라 누웠노라” 라고 하셨는 바가 바로 그것이다.
병자호란(1636년.인조14년) 당시 강화도에 있던 청음선생의 伯氏 김상용은 자결하였다.
淸陰은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자 자진自盡하려다 실패하고, 낙향한 후 서미동에 들어왔다가 칠십(1640년)의 나이로 청군에 붙잡혀, 칠십삼세 (1643년)에 심양에 끌려가 3년동안 고초를 겪다 소현세자등과 함께 돌아와서 좌의정을 지내시고 1652년 춘추83세로 돌아가신다.
심양으로 끌려 가 실 때 지은 시조가 바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라는 시조로 국정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유명한 시조이다.
풍산 소산에 청나라를 멀리한다고 청음이 세운 청원루淸遠樓 앞 마당에 자손들이 세운 시조비가 있다.
이왕 온 김에 유허비문을 살펴 볼려고 빗집바위에 오르려 했으나 너무 높아서 오를 수가 없다. 할수 없이 이웃에 있는 민가를( 임영복씨 댁) 찾아 자초지종을 말하고 사다리를 빌려서 올라본다.
비각碑閣을 떠받치는 기둥 아래 부분은 風雨에 썩어있는 상태狀態고 보존상태가 좋지는 않다. 碑閣 내 石碑에는 좌,우,후면에는 글씨가 없고 전면에만 각자가 되어 있으나 오랜 세월의 흐름에 마멸磨滅되어 자세히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유허비를 살펴보고 유허비 바로 아래에 있는 서간사(西磵祠)를 살펴본다.
서간사(西磵祠)는 선생이 돌아가신 후 지방 사림들이 1669년(현종10년)선생의 유적遺蹟을 추모하여 이곳에 西磵精舍를 세우고 제사를 지낸 곳이다.
조선조 純祖때 사액賜額되었으나 고종 7년(1870)에 이르러 대원군의 훼철령(毁撤令)에 따라 서원은 철거되었다. 따라서 그 자리에다 후학들이 집 한 채를 짓고 강린당講麟堂이라 일컬으며 사림들의 강론講論,강독講讀하는 장소로 삼고 계속 선생을 추모해 왔었다.
그러나 그 건물도 오랜 세월 관리부실로 이제는 심히 퇴락된 가운데 마당엔 잡초만 우거져 있다.
청음淸陰의 유적을 답사한 뒤 사다리를 빌려준 주민(임영복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마을 뒤 중대바위 너머에 아주 커다란 파묘破墓가 있으며, 핏골이라는 지명도 이야기한다.
전해오는바에 따르면 ‘봉황이 되려다가 잘못되어서 破墓가 되었으며 현재 풍천 가일못과 관계되는 이야기라고 임영복씨가 이야기 하신다.
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들어본 이야기고 집히는 데가 있어 발동한 호기심에 가서 살펴보고 싶었으나 날이 저물어 후일을 기약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西美洞계곡을 나선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주화(主和)와 척화(斥和)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임진왜란때 명나라가 직접군대를 보내면서 재조지은(再造之恩)-거의 망하게 된 것을 구원해 도와준 은혜- 의 독특한 이데올로기를 가진 朝鮮의 거의 모든 신료들은, 떠오르는 강대국인 청을 의식해 파병派兵을 반대하는 광해군을 몰아내는 계해정변<1623.광해15년>(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정변 직후 그 주도세력이 반포한 ‘반정교서’에서 계모인 인목대비 폐비 대신 명나라를 배신한 것을 제일명분으로 꼽은 것도 이런 맥락이다.
재조지은의 눈먼 이데올로기는 끝내 정묘丁卯, 병자丙子호란을 불러오며 이 땅과 백성들을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하고 끝내는 국왕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삼궤구고두) 삼전도의 치욕을 가져오게 했다.
임진왜란이란 戰爭의 상처로 인한 經濟의 황폐화와 민생의 피폐, 그리고 참전參戰에 대한 보답으로 명이 요구한 막대한 수탈로 인하여 경제력도 군사력도 갖추지 못한 조선의 현실(現實)은 외면한 채 친명반청만을 외치다가 결국 치욕을 당한 후 (척화)斥和와 허망한 북벌론이 흐르고, 청나라의 지휘를 받으며 출정한 나선정벌을 후대에 이르러 ‘북벌의 실천' 이라는 기억으로 그들은 윤색하여 역사에 남기고 있다.
병자호란, 과연 그 당시 척화斥和란 무엇이었는가?
뒤떨어진 국제정세 파악으로 名分도 實利도 없는 전쟁의 화마에 나라를 송두리째 내던져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政治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치였는가.
孟子가 이르기를 백성이 근본根本이고 위민爲民이 최고라 했거늘 청음淸陰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척화를 외쳤는지 옛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게 가지며 글을 마친다.
- 이상은 12월 중순 서미동 계곡을 다녀온 답사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