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처음 샅바를 잡다
이기수(42)가 처음 샅바를 잡아 본 것은 진주 중안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당시 교내에서 열린 진주교육장기 씨름대회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됐다.
특별활동시간에 기계체조를 배우던 이기수가 씨름대회에 출전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운동을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학교에서 씨름 좀 한다는 덩치 큰 친구들이 맥을 못 추고 줄줄이 무너졌다.
“전교에서 씨름을 제일 잘 한다는 친구마저 제가 넘겨버리니깐 선생님과 친구들이 무척 놀라워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때 처음 씨름의 묘미를 느낀 셈이다. “제가 어릴 적 몸이 무척 말랐어요. 체구도 작고 볼품도 없었죠. 그런데 그 대회서 작은 체구가 덩친 큰 상대방을 이긴다는데 묘한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아요.”
씨름이 인연이 되려고 했나보다. 이기수는 그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진주 중앙중학교로 입학을 하게 된다.
그런데 중앙중은 기존의 야구부가 해체되고 새로이 씨름부가 창단되던 시점이었다. 부원모집 공고가 붙자 이기수도 가입신청을 했다.
그러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고1때 키가 168㎝에 몸무게가 채 58㎏도 안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니 중학교 때는 얼마나 말랐겠습니까. 한번 쑥 보고는 ‘안돼’라고 잘라 말하더군요. 하하.”
끊어질 듯 하던 씨름과의 연은 계속 이어진다. “마침 특별활동시간(CA)시간에 씨름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 들어갔죠.”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우연찮게 정식씨름부와 맞대결이 펼쳐졌다. “그때 제가 나오는 족족 다 이겨버렸어요. 속이 후련하더군요.”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이기수는 학교에서 정식으로 씨름부에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씨름부 가입조차 거부당한 말라깽이 소년
인생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이기수가 씨름과 인연을 맺은 건 누구의 강요도 권유도 아니었다.
오로지 씨름을 좋아해 내린 그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씨름이 늘 재미있었던 건 아니었다. 유난히 작았던 그의 신체가 문제였다. 도통 불지 않는 체중과 키는 씨름선수인 그에게는 늘 따라다니는 핸디캡이요, 스트레스였다.
그래도 중학교는 경쟁이 덜하였기에 그럭저럭 지낼만 했다. 하지만 고교진학을 앞두고 사정이 달라졌다.
‘그 체격에 무슨 씨름이냐, 공부에나 전념해라’는 집안의 반대도 갈수록 거세졌다. 그러나 이기수는 씨름이 하고 싶었다.
결국 부모의 반대를 설득해가며 스카웃 제의도 받지 못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진주상고(현 경남정보고) 씨름부에 특기생으로 들어갔다.
전국최강의 위용을 자랑하던 진주상고 씨름부는 부원수만 당시 40-50여 명에 달했다. 말라깽이 이기수가 주목받을 만한 틈이 없었다.
동기생이자 고향친구인 김칠규와 함께 이기수는 전재성 감독이 선배들을 지도하는 모습을 귀동냥으로 들으며 하나둘 배워나갔다.
“고교 시절은 씨름에 대한 개념이나 인생이 바뀌었던 것 같아요. 전재성 감독님이 키가 작으신 편인데, 뒤집기 등 여러 기술을 지도하실 때 아! 씨름에도 저런 기술이 있구나하고 처음 알았습니다.”
죽어라고 연습만 했다. 새벽 5시에 훈련 하라고 하면 4시부터 일어나 준비를 했다. 이런 생활을 6개월 정도 하다보니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전재성 감독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그의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던 키와 체중도 쑥쑥 늘면서 자신감도 서서히 붙기 시작했다.
1학년을 마칠 무렵, 이기수는 동기생 김칠규와 함께 진주상고의 에이스로 성장했다. 그리고 한 학기를 유급 당했다. 씨름을 너무 잘해서가 이유였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이기수가 어느새 귀하신 몸이 돼버린 순간이었다.
◇한라급 대표스타로 우뚝 서
이기수가 전국적인 스타로 부상하게 된 것은 그가 경상대 4학년인 88년도에 열린 통일장사배전국씨름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부터다.
당시 진로조차 결정되지 않은 이기수는 자신의 마지막일 수 있는 무대에서 인생역전의 반전에 성공했다.
전국으로 생중계된 이날 대회서 이기수는 슈퍼두꺼비 김정필을 비롯한 불곰 황대웅 등 쟁쟁한 선수들을 모두 격파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 대회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때까지 갈곳 조차 없던 그였지만 프로팀에서 서로 스카웃하려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결국 그의 진로는 고교, 대학시절 은사인 전재성 감독이 있는 LG씨름단으로 결정됐다. 그해가 89년 7월1일이다.
프로에 가서도 그의 상승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듬해인 90년 11월 첫 한라장사에 등극하며 그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여는 듯 했다.
그러나 91년 그해 열린 천하장사 대회 황대웅과의 8강전에서 뜻밖의 무릎부상을 당하면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부상 여파는 생각보다 길었다. 2년이 넘는 긴 슬럼프에 빠졌다. 보다 못한 그의 스승인 전 감독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바로 체급을 올린 것. 유난히 체구가 큰 백두급과 붙어 승률이 좋은 이기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연찮게도 그 시합이 강호동의 은퇴무대였다. “원래 제가 강호동 선수랑 붙어야 했는데 갑작스레 은퇴하는 바람에 제가 그 자리에 들어갔죠.”
8강까지 올랐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기 시작한 이기수는 몇 대회를 더 참가한 뒤 다시 한라급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2년 6개월 만에 두 번째 한라장사에 올랐다. 그리고 현역시절 통산 6회의 한라장사를 차지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시련기를 잘 극복해낸 것이 10년 넘게 선수생활을 이어온 힘이 됐던 것 같습니다.”
모래판에서 자기보다 큰 체구의 상대방을 호쾌한 뒤집기로 무너뜨리며 환호하던 이기수의 모습은 그런 시련을 극복했기에 가능했다.
◇씨름부활이 나의 사명
지금껏 천하장사는 늘 백두급 장사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이점은 이기수도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대회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보고 있다. 하루에 예선부터 결승까지 다 해치워 버리는 일정은 기술위주의 선수에게 절대 불리하다는 것이다.
그 자신도 당시 천하장사였던 김정필, 황대웅 등의 쟁쟁한 선수들을 물리치고 간신히 준결승까지 올라가면 체력이 떨어져 덩치만 크고 별 기술은 없는 선수들에게 무기력하게 무너진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 일을 몇 번 겪은 선수들은 체중불리기에 나서 결국 기술씨름의 퇴보와 씨름선수의 대형화를 불러왔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지도자 생활에 더 미련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99년 현역에서 은퇴한 이기수는 고향팀인 LG씨름단 코치로 활동했다.
“대리만족이랄까요. 제가 못다 한 꿈을 최홍만이나 후배들이 이뤄낼 때 뿌듯함을 느끼죠.” 사업가로 변신한 뒤에도 이기수는 대한씨름협회 이사와 세계씨름협회 기획마케팅팀장 등의 여러 대외적인 활동에 본격 나서고 있다.
그가 보는 민속씨름은 어떨까. 그는 지금이 바닥이라고 했다.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어요. 이제 올라갈 일만 남았습니다.”
경기인 출신들이 조금씩 행정권으로 진입해 흩어진 각 협회의 교통정리, 지역연고제의 프로팀 창단 등의 갖가지 위상제고 방안을 구상중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경기인 출신이 씨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고 했다.
“자기의 모체가 씨름이라는 것을 다들 안 잊어버려요. 강호동도 자기가 진행하는 프로에 씨름을 자주 소개하는 걸 보면 애착이 보통이 넘죠.”
경남씨름의 주어진 역할도 강조했다. 씨름의 중흥기에 경남이 있었고 경남씨름이 살아나면 민속씨름도 절로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이다.
끝으로 “지켜봐 달라”는 말로 인터뷰를 갈무리한 이기수 전 한라장사. 그를 보면 “역시 어쩔 수 없는 씨름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진설명=현역시절 이기수가 상대선수를 눕히고 한라장사에 등극한 뒤 기쁨에 겨워 환호를 하고 있는 모습(위)과 은퇴 후 씨름시범단 트라스포 ENT에서 시범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