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일∥손불서초등학교 교감
인사철입니다. 교육현장 개선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실천해온 이들 영전하는 모습이 좋아 보임에 더해 전남도교육청 인사는 갈수록 클린하며 높은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다만 온통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서울 시장과 서울 교육감 관련의 정치적 사안으로 관심이 기대에 못 미치는 점도 있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많은 역할을 부여받은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힘을 실어주어 교육력이 극대화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라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역사적 사례 하나를 들고자 합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함평 엄다 정개청 선생의 자산서원에 들렀을 때 그 서늘한 정기에 몸을 떨었습니다.
정개청 선생은 조선 중기에 당시의 대학자 이항복, 유성룡보다 학문적 영향력이 더 컸으며 일찍이 임진왜란을 예견하였습니다. 이율곡이 일본의 침략을 예견하고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듯이 정개청도 1588년에 왜적의 침입이 있을 것이니 이 침입을 막기 위한 사전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도이장욕유변'의 상소를 올린바 있습니다.
상소문은 그의 저서 우득록 제 3권에 전문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상소를 본 선조는 당시 영의정 박순에게 “왜구들의 침입을 한다면 이를 막을 수 있는 장수가 누군가?” 물었습니다.박순은 “지리에 밝고 모든 분야에 조예가 깊은 정개청 같은 사람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한 말이 대동야승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4년을 앞서 예견한 정개청의 상소가 조정에 채택될 리 없었습니다. 유성룡은 후에 “정개청은 호남의 인물 중 제일 이름이 있고 평생에 학술 행검으로 자임하였는데 한편의 글로 죽기까지 하였다.” 율곡 이이는 “정개청은 학문이 독실하여 가히 사람들의 스승이 될 만하므로 모름지기 자주 종유하라”고 격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개청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송강 정철을 혹독하게 비판하여 미움을 샀습니다. 기축옥사를 위임받은 위관 정철이 호남에 기반을 둔 사림 관리로서 부제학 이발, 남계 이길, 전라관찰사 조대중 등을 옥중 장살하고 학문적 명성이 높던 최영경, 백유양 가문을 단멸시키자 그를 두고 “속마음을 감추고 거짓 행동을 일삼는 자” 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곡성 현감으로 있을 때 담양에 내려온 송강을 아는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정여립과 내통하였다는 죄목으로 귀양을 가서 죽었습니다. 정개청은 일찍이 주자의 이론이 한없이 넓고 웅대하여 초학자가 요지를 얻기 쉽지 않다 해서 주자의 학문적 고지에 도달하기 위한 ‘초학 절요’를 편찬하여 유명해졌습니다. 또한 향악을 매우 중시하여 덕업상권, 환난상율이라는 실용적 의미에 천착하고 성리학을 본위로 하는 실용 학문에 힘썼습니다.
따라서 정철이 가단(歌壇)중심으로 호남사림을 흡수하여 청풍명월을 노래하는 사풍에 대하여도 지극히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는 정철의 이 같은 활동을 ‘주색에 창광하고 예법을 능멸하니 방사함을 즐기는 자가 초목이 비바람에 쓰러지듯 쏠려 그를 종주(宗主)로 삼는 것’ 으로 보았습니다.
이후 정철의 비호를 받고 있었던 호남사림 대부분은 학문분야보다는 문학에 관심을 기울여 면앙정 가단과 성산 가단을 중심으로 시가나 문학 활동을 활발히 벌인 반면 성리학의 본령인 철학과 예학은 기호사림에 주도권을 넘겨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송강의 선조 임금을 향한 사미인곡이나 성산별곡의 가사문학적 특별한 위치를 감히 논할 바는 못 되지만 절대 지존이요 살아있는 권력을 향한 사모곡이야 누구인들 재주만 있으면 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런 처신에 일침을 가함으로써 자신도 결국 귀양살이로 삶을 마감한 정개청의 그 절개 말입니다. 그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며 안후덕의 절개요 김철의 절개요 심남일의 절개가 하나같이 후손 하나 유물하나 변변히 남기지 못했지만 어려운 시대 상황일수록 새겨볼 가치가 있습니다.
거기에다 영향력 있는 인물들의 반목과 불신에 따른 감정적 초토화가 후대에까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도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구하게 흐르는 우리고장의 전통과 학문적 정기를 이어받아 심신을 단련하여 활기차고 실력 있는 아이들로 거듭나고 있는 학교의 모습을 그려 봅니다.
[ 이광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