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첨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를 클릭하라.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8)
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
2009년 4월, 레드셔츠 운동의 '송끄란 시위'
미국 대사관이 2009년 2월에 본국에 보고한 비밀 외교전문은 억압적 분위기가 점차 강화되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아피싯 웻차치와(Abhisit Vejjajiva: 1964년생) 총리 정부의 강경한 대처방식이 반작용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2008년 하반기에 태국을 볼모로 잡았던 가두의 정치위기는 현재 사라진 상태임. 하지만 태국 사회와 정계에 깊이 패인 골짜기는 그대로이며,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년생) 국왕의 최종적 운명이 분열의 핵심 경계선 중 하나가 되고 있음. 추앙받던 국왕의 서거 가능성이 예견되면서, 여러 정파들이 국민들의 인식을 규정해나가는 과정에서 지위 및 이득을 얻고자 투쟁하고 있고, [부왕에 비해] 엄청나게 존경받지 못하고 있는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를 포함하는 왕위계승 과정이 진흙탕이 될 가능성이라든지, 군주제의 역활에 관한 재규정이 거의 확실시되는 분위기 등이 전혀 수그러들지 않는 상황임.
[보수정당] '민주당'(Democrat Party) 소속 여러 지도자들은 [최근 정권을 잡으면서] 정부의 요직들로 옮겨갔음. [성장 및 교육과정 등을 살펴보면] 그들은 코스모폴리탄(=세계시민)에다 고학력자들이지만, 그럼에도 군주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단속하려는 노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음. 그것이 개인적인 신념 때문인지, 아니면 정치적 이득 때문인지, 혹은 양자 모두인지는 분명치 않음.
하지만, 태국은 상당히 강하고 적극적인 시민사회를 가진 국가이며, 그러한 점이 전통적인 제도와 행위규범들에 관한 사회적 태도의 변화를 촉진시키고 있음. 따라서, 이 문제를 덮어버리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임. 군주제 및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 그리고 와치라롱꼰 왕세자에 호의적이지 않은 발언들을 모두 쓸어버리려는 노력은 왕실모독 처벌법(lèse majesté law: 형법 제112조)이라는 모호한 수단을 엉성하게 적용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음. 따라서 정말로 군주에게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들어줄 사람을 발견할 수 없어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는 이들을 구분하지 않은 채 이뤄지고 있음. 이러한 일은 '왕실모독 처벌법'이 애시당초 보호하고자 했던 군주제를 갉아먹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존재함. 이러한 예기치 못한 결과는 2008년 '옐로셔츠 '(PAD) 시위대의 극단적 행동과도 닮아 있으며, 시리낏 왕후가 잘못된 조언을 듣고 2008년 10월 13일에 PAD 시위참가자의 장례식에 참석해 의례를 주재한 것과도 유사한 면을 갖고 있음. (요약 및 논평 끝.) |
2009년 1월 22일,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장군과 위원인 싯티 사웻실라(Siddhi Savetsila: 1919년생) 예비역 공군대장은 미국 외교관들과 오찬을 하면서, 미온적이나마 아피싯에 대해선 칭찬하고,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전 총리에 관해선 맹렬히 비판했다. 미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추밀원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은 아피싯 총리를 "깨끗"하고 "우리가 가진 최선의 인물 중 한명"이라고 묘사했음. 그는 아피싯 정부가 좋은 출발을 보이기를 희망했음. 쁘렘 의장과 싯티 사웻실라는 탁신 전 총리 및 그 지지자들에 관한 이야기에 훨씬 더 활기찬 모습을 보였음. 쁘렘은 탁신이 정치적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함. 탁신이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선전하는 시도를 계속할 것이라는 것임. 싯티는 [친탁신 레드셔츠] 시위대가 시위 과정에서 보인 행동 때문에 신뢰를 상실했다고 주장함. 예를 들면 추완 릭파이(Chuan Leekpai: 1938년생) 전 총리처럼, 자신들의 반대파에 해당하는 인사들에게 계란을 던진 행동 등이 그에 해당한다는 것임. 싯티는 그러한 전술이 반정부 시위대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탁신까지도 뉴스 보도의 관심을 계속 받도록 하기 위해 기획됐을 것이라고 추정함. 쁘렘은 탁신이 암살음모에 관해 말했을 때도 그와 동일한 형태의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덧붙임.
본 대사는 탁신의 향후 행보에 관한 2가지 시나리오의 가능성에 관해 물어보았음. 하나는 탁신이 해외에 체류하며 투쟁하는 가운데 태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서서히 상실해가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귀국해 투옥된 후 협상의 일환으로 사면을 요청하는 것임. 이에 대해 쁘렘은 탁신이 결코 감옥행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탁신의 귀국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음. 쁘렘은 탁신이 매우 위험한 인물이기 때문에 감옥에 넣어야만 한다고 덧붙였음. |
2월9일, 영국인 모친을 둔 혼혈인 학자 짜이 응파꼰(Giles “Ji” Ungpakorn: 1953년생)이 왕실모독죄 기소를 앞두고 영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2007년에 출간한 자신의 책 <부자를 위한 쿠테타>(A Coup for the Rich)에서 [금서가 된] 폴 핸들리(Paul M. Handley)의 <왕은 절대 웃지 않는다>(The King Never Smiles)의 내용을 인용하여 이미 1월에 입건된 상태였다. 짜이 응파꼰은 영국 도착에 맞춰 <레드 시암 성명서>(The Red Siam Manifesto)를 영어 및 태국어로 발표하여, 왕당파들이 지닌 요정이야기에 대해 공개적인 도전을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국왕은
- 살릿 타나랏(Sarit Thanarat: 1908~1963)과 타넘 낏띠카쫀(Thanom Kittikachorn: 1911~2003), 그리고 쁘라팟 짜루사티얀(Praphas Charusathien: 1912~1997) 같은 부패한 군부 독재자들 밑에서 성장하면서,
- 무고한 사람들이 형(=라마8세)의 살해범으로 몰려 처형당하는 일을 허용했고,
- 태국에는 "민주주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한 나머지, 1976년 10월 6일 '탐마삿 대학'(Thammasart University)에서 발생한 유혈 광란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빌리지 스카우트'(village scouts: 의용방위군[VDC])라 불리는 폭력 조직을 키워주기도 했다.
- 그는 군부가 2006년 9월 19일의 군사 쿠테타를 일으키도록 허용했다. 게다가 군부, '옐로셔츠 운동'(PAD) 시위대, '민주당'으로 하여금, 그들이 민주주의를 파괴할 때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는 일도 허락했다.
- 그는 빈곤층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사회복지를 반대하는 경제관을 주창해왔다. 하지만 더욱 나쁜 일은, 이 국왕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명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충족경제'(Sufficiency Economy)라는 관념을 통해, 자신의 가난한 백성들에게 만족하며 살라고 강의하는 오만함까지 갖췄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이 국왕은 자신의 지지자들이 그를 "국가의 아버지"라고 선언하도록 내버려뒀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 사회의 그 누구도 그의 친자식 아들을 존경하지 않는다.
국왕으로부터 적법성을 차용해 소유한 태국의 엘리트 계층은 착취자들이며 흡혈귀들이다. 그들은 태국 사회의 참다운 주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지위가 그들이 업신여기는 보통 시민들의 고된 노동의 결과라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수백만명의 태국인들은 이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오로지 공포와 협박이란 수단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러한 진실을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
3월6일, 경찰이 <쁘라차타이>(Prachatai) 신문사에 전격적으로 들이닥쳤다. 태국 언론계에서 <쁘라차타이>는 독립성과 신뢰성을 갖춘 극소수 언론사 중 하나이다. 경찰은 널리 존경을 받고 있던 찌라눗 쁘렘차이폰(Chiranuch Premchaiporn) 사장을 체포했다. 그것은 총리인 아피싯 웻차치와가 방콕(Bangkok)에서 개최된 '아시아 뉴스 네트워크'(Asia News Network: ANN) 창립 10주년 행사에 참석해 언론자유 보호를 다짐한 바로 그날이었다.
한편, 탁신과 '레드셔츠 운동'(UDD)은 아피싯 정권 퇴진 운동을 더욱 강화시켜나갔다. 푸미폰 국왕의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지자, 탁신은 의회권력을 재장악하는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의회권력의 재장악은 그의 정적들이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왕위계승을 방해하거나 별도의 국왕을 옹립하려는 시도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크 애스큐(Marc Askew)는 자신의 논문 <2008~2010년 사이 태국에서의 대립과 위기>(Confrontation and Crisis in Thailand, 2008-2010)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2009년 3월 26일부터 전개된 사태를 보면, 레드셔츠 운동(UDD)이 자신들의 반대파인 옐로셔츠 운동(PAD)이 사용한 전술들을 어떻게 모델로 차용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은 당국의 대응을 촉발시켜 집단 행동을 위한 명분을 축적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성공적으로 천명하는 패턴을 전수받았던 것이다.
아피싯 정부 역시 미묘한 게임에 휘말려 들어갔다. 그것은 법과 질서, 비폭력 같은 고도의 도덕적 토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게임이었다. 사태의 전개에는 상징, 행동, 빈정거림, 고발 등이 서로 뒤얽혔고, 먼저 폭력을 촉발시킨 쪽이 도덕적 우위를 상실하게 될 터였다. |
3월26일, 레드셔츠 운동은 시위를 재개했다. 수많은 지지자들이 정부청사로 행진한 후, 다시 한번 그곳에 캠프를 차렸다. 이들은 장기 점거를 계획했다. 아피싯 정부는 레드셔츠 시위대가 탁신 친나왓에게 일당을 받는 꼭두각시들이라며 전형적인 비난을 해댔다. 하지만 미 대사관의 외교전문은 아피싯 정부의 주장이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레드셔츠 시위대 중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명분을 확고하게 신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레드셔츠 시위대는 스스로를 '프라이'(phrai)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전어인 이 말은 대략 '농노'(serf)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상대편인 기득권층을 '암맛'(amart: 양반귀족)이라 불렀다. 그들은 엘리트 계층이 지닌 허식과 이중기준, 그리고 기만성을 조롱했고, 태국이 일치단결된 자유롭고 조화로운 국가라는 전설도 풍자했다.
3월27일 밤과 3월28일 밤, 정부청사 앞 집회장 무대에 화상통화로 연결된 탁신이 화면에 등장해 연설했다. 탁신은 최초 연설에서 추밀원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이 2006년 쿠테타를 기획했다고 명시적으로 비난하면서, [추밀원 위원인]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1943년생)과 [왕실의 공보부문 자문이던] 삐야 말라꾼(Piya Malakul)의 이름도 공모자로 거론했다. 미 대사관의 외교전문을 보면, 이들 3인 모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러한 주장을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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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09년 3월 27일 밤에 있었던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화상연설. |
크리스 베이커(Chris Baker: 1948년생)가 탁신의 3월27일 연설 중 일부를 발췌 번역한 내용은 <뉴 만달라>(New Mandala) 사이트에 게시됐다. 해외에 망명 중이던 탁신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면서, 2006년의 유명한 발언에서 자신을 전복시키려 시도 중이라 했던 "카리스마를 지닌" 인사가 바로 쁘렘 띠나술라논을 지칭했던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헌법적인 카리스마적 힘을 가진 인사'라고 했던 말 때문에 커다란 소동이 있었다. [PAD 지도자] 손티 림텅꾼(Sondhi Limthongkul: 1947년생)은 내가 국왕 폐하를 지칭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렇게 대담한 인물이 못되며, [국왕께] 충심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말할만큼 대담하지 못하다. 내가 '초헌법적인 카리스마적 힘을 가진 인사'라고 말했던 이는 바로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이다. (큰 환호와 박수) 나는 그 이후 감히 말을 못하고 있었다. 쁘렘 장군의 측근 중 한명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 내가 말한 사람이 쁘렘 장군이 아니라고 명확히 밝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므로, 그 요청을 수용할 수 없었다. (큰 환호와 박수)
쁘렘 장군이 정치에 개입했고 군부도 연루됐기 때문에 우리가 쿠테타를 겪었고, <2007년 헌법>도 제정됐고, 이 나라가 최소 15년은 후퇴하게 된 것이다.
빠(Pa: 쁘렘의 애칭)는 [추밀원 의장이라는] 자신의 초헌법적인 카리스마적 힘을 이용해 정치를 하면서 이놈 저놈에게 명령을 내리고 위신을 실추시켰다. 이러한 일은 이 나라의 절차들을 파괴한 것이며, 이중기준의 시스템을 출현시켰고, 사회적 불공정을 초래했다.
빠에게는 자식이 없지만, [이 나라의] 아이들은 성장하고 있다. 아이들에겐 미래가 있어야만 하며, 적절한 체제 속에서 살 수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국제사회에서 수용되면서 사회적 정의도 가진 민주주의 체제인 것이지, 결코 빠가 이 단추 저 단추 마음대로 채울 수 있는 그런 체제가 아닌 것이다. |
3월30일 탁신은 지지자들에게 연설하면서, 쁘렘이 지난 수십년간 군대의 정기 인사이동에 일상적으로 관여해왔다고 말했다. 미 대사관의 반응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말은 전적으로 옳았다. 미 대사관의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3월30일 탁신은 해외에서 화상통신을 통해 군중들에게 연설하면서, 추밀원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에 대한 공격을 계속 이어나감. 그는 쁘렘이 추밀원 의장이란 지위를 이용하여 군 장교들의 진급에 자주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고 주장함. (각주: 본 대사관은 지난 수년간 그러한 내용을 보고한 바 있음. 각주 끝.) |
엘리트 계층이 패닉 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탁신의 비난 내용이 극도로 정확했다는 점이었다. 탁신은 그들의 더러운 세탁물을 공개적으로 방송했고, 엘리트 네트워크가 자신들의 정치적 간섭을 가리기 위해 만들어놓았던 우화집에 도전장을 던져, 태국 기성체제가 가진 불문율 하나를 깨뜨렸던 것이다.
4월 초, 탁신은 상당한 긴장 조성을 결정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대규모 소요를 통해 아피싯 정부를 쓰러뜨리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레드셔츠 시위대는 자신들의 "D-데이"가 4월8일이 될 것이라고 발표하고, 이날 쁘렘 띠나술라논의 자택을 향해 행진할 것이라 밝혔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도발 전술이었다.
4월6일 밤, 결전을 앞둔 상태에서 [형식적으로는] 이혼 상태였던 탁신의 부인 퍼짜만 다마퐁(Potjaman Damapong: 1956년생)과 이 부부의 자녀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인척들이 다양한 항공편을 이용해 태국에서 출국했다. 아피싯 총리는 이날 밤 국영TV에 출연해, 평화시위엔 관용을 베풀겠지만 "내전이나 민중혁명"은 허용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시위대에게 쁘렘의 자택을 건들지 말라고도 말했다.
4월7일, 쁘렘의 "지지자"임을 자처하는 한 단체가 그의 자택 앞에 모였다.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주장한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닉 노스티츠(Nick Nostitz)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4월7일, 쁘렘의 지지자들이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단체가 테웻(Thewet)에 위치한 쁘렘의 자택 앞에 모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들은 연한 푸른색의 머플러를 착용했고,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결성된 시민단체인 '끌럼 락 팬딘 끗'(Glum Rak Pandin Goed: 태어난 땅을 사랑하는 모임)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 수십명의 군중들 중 대부분은 그 단체의 이름을 외우는 일조차 버거워했고, 그 뜻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쁘렘의 자택 바로 옆에 위치한 군 초소 안팍을 드나들었고, 군인들과 함께 뒤섞여 있기도 했다. 나는 이곳에서 작년의 정부청사 점거 당시 얼굴을 알고 있던 옐로셔츠(PAD) 사수대원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 역시 나를 기억했다. |
아피싯 총리는 이날 파타야(Pattaya)에서 국무회의를 가졌다. 그곳에도 레드셔츠 시위대가 있었는데, 시위대는 아피싯 총리의 차량을 공격했다. 아피싯은 현장에서 탈출했지만, 운전기사와 경찰관 몇명이 구타를 당했다.
역시 동일한 4월7일, 부리람(Buri Ram) 도의 조폭이자 국회 내 계파 지도자인 네윈 칫촙(Newin Chidchob: 1958년생)이 연출된 성격의 TV 기자회견을 가졌다. 네윈은 이 기자회견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자신이 국왕에 대한 충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탁신에 대해 "군주를 상처주는 일"을 중단하라고 호소했다. 그것은 참으로 파렴치하고도 자기기만적 퍼포먼스였다. [보수 영자지] <더 네이션>(The Nation)은 네윈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눈물을 글썽이는 네윈 칫촙이 화요일(4.7) 자신의 이전 주군 탁신 친나왓을 향해 뼈아픈 공격을 가했다. 그는 탁신에게 레드셔츠 운동을 제동시켜 달라고 요청하면서, 레드셔츠들의 활동이 국왕 폐하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네윈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말을 잘 잇지 못했다. 네윈은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감히 탁신 전 총리에게 2가지를 부탁한다면서, 탁신 전 총리가 "자신의 사람들"에게 군주를 "상처주는"일을 중단하도록 말해 달라는 것과, 그들이 태국 전체를 해롭게 할 수도 있는 활동을 멈추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이 기자회견은 레드셔츠 운동이 네윈과 그 계파 동료들이 탁신을 "배신했다"고 비난한 데 대한 반박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TV를 통해 중계됐다.
네윈은 레드셔츠 지지자들에게 수요일(4.8) 개최 예정인 대규모 집회를 재고해달라고 요청하면서, 레드셔츠 지도부가 아피싯 정권 축출 주장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레드셔츠 지지자들은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달라. 여러분 모두는 이용당하고 있다. 여러분의 지도부는 여러분에게 말한 정권퇴진 운동 말고도 숨겨진 의제들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네윈이 자신은 국왕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으며, 국왕을 해하려 하는 자들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대적해서 싸울 것이라고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촉촉히 젖어 있었다. |
네윈이 관심을 집중시킨 기자회견을 가진 것 외에도, 네윈의 통제 하에 있던 내무부도 4월7일 전국의 도지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한 공문을 발송했다. 이 명령서는 태국 전역에 "제도(=군주제)를 보호하라 - 평정 평화 단결"의 문구가 적힌 입간판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4월8일 아침, 레드셔츠 운동의 'D-데이' 시위가 시작됐다. '시 아유타야 로드'(Sri Ayutthaya Road)와 '로얄 플라자'(Royal Plaza), 그리고 정부청사 주변 도로에는 10만명 이상의 군중들로 가득찼다.
4월9일, 방콕(Bangkok)의 택시 기사들이 레드셔츠 시위에 대한 지지 표명을 위해 자신의 차량들로 여러 도로들을 차단했다. 방콕의 택시 운전수들은 원래 탁신 지지자들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시위의 초점이 섹스관광으로 유명한 해변 휴양지 파타야로 바뀌면서, 방콕의 시위 참가자 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파타야에서는 각국 정상들이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로얄 클리프 호텔'(Royal Cliff Hotel)로 속속 도착하던 중이었다. 파타야 지역의 질서유지에는 경찰과 군인들이 배치된 것 외에도, 옅은 푸른색 티셔츠를 입은 자경단원들(블루셔츠)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의 티셔츠에는 "제도(=군주제)를 보호하라 - 평정 평화 단결"이란 구호가 적혀 있었다.
네윈 칫촙은 탁신과 동맹을 맺고 있던 여러 해 동안 가두에서 폭도들을 조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새로운 동맹세력인 '민주당', 특히 사무총장이었던 수텝 트억수반(Suthep Thaugsuban: 1949년생)을 위해 동일한 일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네윈과 수텝은 모두 극도로 부패한 정치인들로서, 1990년대에 두 사람은 철천지 원수 사이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동지가 됐다. 수텝은 안보담당 부총리로서 레드셔츠 시위와 관련된 모든 것을 관할했고, 네윈의 암흑적 전문성을 이용하려 했다.
4월10일, 유명 대중음악 가수이자 '레드셔츠 운동' 지도자 중 한명인 아리스만 퐁르엉렁(Arisman Pongruangrong: 1964년생)이 파타야의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단에 항의서한을 전달한 직후, 블루셔츠들과 레드셔츠들 사이에 짧은 충돌이 발생했다. 방콕의 정부청사 앞에 설치된 레드셔츠 주력 시위대의 무대에서는, 파타야로 가서 그곳의 동료들을 도와줄 이들을 태우고 갈 교통편이 마련됐다는 발표가 있었다. 방콕에서 파타야로 가는 고속도로에는 레드셔츠 시위대를 가득 태운 택시들과 승합차들, 그리고 버스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4월11일 아침, 정상회의장 겸 외국 대표단 대부분의 숙소이기도 했던 '로얄 클리프 호텔'을 지키던 경찰 병력이 군인과 '경찰 국경순찰대'(BPP), 그리고 블루셔츠들로 대체됐다. 파타야 시내 여러 곳에서 블루셔츠와 레드셔츠 사이의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네윈 칫촙이 직접 블루셔츠들을 지휘하는 동영상과 사진들도 포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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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네윈 칫촙이 파타야에서 블루셔츠 자경단원들을 직접 지휘하는 모습이 포착된 동영상. |
양측의 충돌 가능성이 점증하는 가운데,레드셔츠 지지자 수백명이 '로얄 클리프 호텔'로 향했다. 닉 노스티츠는 그곳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레드셔츠들은 정문 앞에 모여 있다가 갑작스레 밀어부치기 시작했다. 대형 유리문 하나가 부서졌고, 레드셔츠들은 이제 호텔 안에 들어섰다. 나는 완벽하게 놀랐고,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쇄도하는 시위대의 흐름에 내 몸이 떠밀려가도록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다. 호텔 안에는 아시아 각국에서 온 대표단과 보도진, 그리고 업서버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이엔 수영복 차림의 관광객들도 있었다. 일부 레드셔츠들은 그들 옆에 서서 자신들의 휴대폰으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고, 관광객들도 그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폭력사태는 없었고, 단지 기묘하고도 초현실적인 분위기만 있을 뿐이다. 군인들이 호텔 본관을 지키기 위해 달려왔지만, 레드셔츠들은 군인들을 무시하면서 군 병력을 우회해 옆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피싯 총리를 찾기 시작했다. 레드셔츠 시위대는 전반적으로 시끄럽긴 했지만 예의바르게 행동했다. |
닉 노스티츠는 자신의 책 <레드 대 옐로>(Red vs. Yellow) 제2권에서 아피싯 정부가 블루셔츠 자경단을 조직한 이유와 파타야 정상회담 경호를 맡았던 보안군의 무능함에 관해 다음과 같이 논의했다.
블루셔츠를 조직한 것은 보안군이 시위대에 폭력을 사용하는듯한 인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과거 수십년간 태국에서의 시위진압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정부가 그러한 일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따라서 [필요할 경우] 그럴듯한 방식으로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할 수 있는 민병대가 조직된 것이다. 나는 나중에 내가 파타야에서 만났던 옐로셔츠(PAD) 사수대원 한명과 대화를 가졌다. 내가 그에게 PAD가 네윈이나 수텝과 반드시 화기애애한 관계만은 아니지 않는가 지적하면서, [블루셔츠 자경단으로 동원됐던 일에 관해] 혹시 이용당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는 자신의 경험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도 종종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 사건 때까지 알지 못했다. 나는 동료들과 함께 '아세안 정상회의'를 경호하기 위해 갔을 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는 그곳에 가서야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블루셔츠) 대부분이 [사실은] 군인들이란 것을 알았다. 그 중에는 그곳에 있기를 바라지 않았던 많은 수의 징병제 의무복무 사병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분쟁에서 정보수집의 실수는 악명을 떨쳤다. 일선 정보요원들은 극도의 압력을 받았다. 아피싯 정부의 관념은 레드셔츠들이 탁신 친나왓으로부터 일당을 받고 동원됐으며, 자신들의 운동 이념을 참다웁게 신봉하지도 않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것보다 규모도 적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현장 정보요원들이 시위대 규모가 엄청난 수라고 보고해도, 정부측은 그런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았고, 해당 정보원을 질책하면서 혹시라도 그가 레드셔츠에 친향적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따라서 그러한 질책을 피하기 위해, 많은 수의 일선 정보요원들은 자신들의 상관이 듣고 싶어하는 규모의 숫자만 보고했다. 파타야 시위의 경우, 정보요원들이 보고한 레드셔츠 시위대 규모는 1천~1천5백명이었지만, 실제 시위대 규모는 4천~5천명에 달했다. 그래서 보고된 레드셔츠 시위대 규모에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수의 블루셔츠들이 배치됐지만, 실제의 시위대 규모는 그들을 완벽하게 압도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복의 보안군 병력에 내려진 무력사용 금지 명령은 이날 하루가 완벽한 혼란으로 끝나게 되는 데 결정타를 날린 셈이었다.
레드셔츠 시위대가 정상회의장으로 접근하는 일을 막기 위해, 유사한 국제회의 때마다 각국이 폭력 시위대에 사용하는 수단과 마찬가지로, 아피싯 정부가 정규군 병력에 규정된 시위해산 방법, 즉 최루탄과 물대포를 사용하도록 했었다면, 그것은 국제적 규준의 한도 내에서 허용되는 일이며, 해외 언론이나 외국 대표단의 눈이 휘둥그레해지는 사태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파타야에서 블루셔츠 자경단이 먼저 레드셔츠 시위대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레드셔츠 시위대가 과연 회의장인 호텔까지 난입했을까에 관해서도 종종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
정상회의는 취소됐다. 그리고 일본 총리와 중국 총리를 비롯한 9개국 정상들이 '로얄 클리프 호텔'의 옥상에서 헬기를 타고 탈출해야만 했다. 그것은 아피싯 총리 및 그의 정권에는 굴욕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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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09년 4월 11일, 블루셔츠들과 충돌 중인 레드셔츠 시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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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09년 4월 11일, 아세안 정상회의장인 '로얄 클리프 호텔'로 몰려드는 레드셔츠 시위대. |
이제 충돌의 중심은 다시금 방콕으로 옮겨갔다. 4월12일, 경찰이 레드셔츠 운동(UDD) 지도자 중 한명인 아리스만을 체포하자, 레드셔츠 지지자들 사이에는 이 일이 '2중 기준'이라면서 광범위한 분노가 촉발됐다. 4개월 전 발생했던 옐로셔츠 운동(PAD)의 방콕 공항 점거사태와 관련해서 체포된 이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아피싯 총리는 네윈의 '품짜이 타이 당'(Bhumjai Thai Party: BJT)이 관할하는 내무부 청사에서 연설하면서, 방콕 및 수도권 주변 지방들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레드셔츠를 입은 사람들 50여명이 내무부 청사로 몰려와 아피싯 총리의 차량을 공격했다. 아피싯 총리는 간신히 군중들로부터 벗어났지만, 경호원들이 허공을 향해 경고사격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총리실 사무총장이자 와치라롱꼰 왕세자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니폰 프롬판(Niphon Promphan)이 탄 차량은 군중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려다 추돌한 후,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다.
탁신은 이날 화상연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민중혁명"(people’s revolution)을 촉구했다.
저는 모든 진영을 초대하는 바입니다. 손을 맞잡으세요. 국민들에게 참다운 민주주의를 안겨주기 위해, 민중혁명을 이룰 수 있는 이 기회를 포착하십시오. |
출범한지 3달 밖에 안 된 아피싯 정권은 점점 더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피싯 총리는 심각한 신뢰도 하락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부와 군 수뇌부는 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방콕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다.
이날(4.12) 밤 정부청사 동쪽의 딘댕(Din Daeng) 지역을 지키던 병력이 '왕후 근위대'(Queen’s Guard: 육군 제21연대)를 포함하는 '보병 제2사단'(=왕후근위사단) 병력으로 교체됐다. 이 왕당파 부대는 군부 권력에서 주류적 위상을 가진 부대였다. 아누퐁 파오찐다(Anupong Paochinda: 1949년생) 육군사령관은 제21연대장과 제2사단장을 거친 바 있다. 또한 그의 육군본부 참모장이자 나중에 육군사령관직을 승계하는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1954년생) 대장도 아누퐁 장군과 동일한 경력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특히 시리낏 왕후 및 추밀원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 의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몇몇 관측통들은 이같은 병력 교체가 군내에서 발생한 알력의 결과라고 추측했다. 특히 판롭 삔마니(Panlop Pinmanee: 1936년생) 예비역 대장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인물이었다. 판롭은 탁신을 적으로 선언했던 인물이지만, 다시금 탁신의 동맹세력이 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레드셔츠 운동 내에서 직접적인 폭력을 담당하는 자경단(=민병대) 조직을 돕고 있다는 소식이 광범위하게 보고되고 있었다.
왕당파 군부는 여명이 오기 직전에 '전승기념탑'(Victory Monument) 동편의 삼리엠 딘댕(Samliem Din Daeng)에서 레드셔츠 시위대에 대한 총력적인 공격을 펼쳤다. 이 작전의 지휘관은 왕후근위대 파벌에서 새로운 별로 부상하고 있던 제21연대장 롬끌라오 투와탐(Romklao Thuwatham) 대령이었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자동소총을 발사하면서 최루탄을 사용했다. 현장에는 진압군 병력의 잔학상을 취재할 기자들이 극소수만 있었다.
군 수뇌부는 진압작전 후의 발언을 통해 군인들이 발사한 실탄은 시위대의 머리 위를 겨냥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복수의 목격자들은 군인들이 레드셔츠 시위대를 향해 직접 사격을 가했다는 점을 확인했다. 시위대는 폭죽과 새총, 그리고 돌멩이를 들고 저항했다. 군인들 역시 유탄에 피격되기도 했다. 레드셔츠들은 군 병력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바리케이드에 모아 둔 폐 타이어들을 불태웠다.
4월13일 하룻 동안 싸움은 확산됐다. 레드셔츠들은 '전승기념탑'에 모였고, 바리케이드로 사용하기 위해 시내버스들도 징발했다. 일부 버스에는 불도 질렀다. '전승기념탑' 주변 2곳의 장소에는 유조차들도 대기했다. 한곳은 수백명이 거주하는 낡은 아파트단지인 '딘댕 아파트' 앞이었고, 다른 한곳은 써이 랑남(Soi Rangnam)에 위치한 네윈 칫촙의 측근 소유인 '킹파워 호텔'(King Power Hotel) 앞이었다.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남성들이 이 유조차들을 폭발시킬 것이라며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몇몇 지역들에서는 레드셔츠 시위대와 주민들 사이에 마찰도 있었다. 그런 지역들 중 일부는 옐로셔츠 운동이 강세를 보이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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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2009년 4월 8~13일 사이에 진행된 레드셔츠 운동의 '송끄란 시위'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
1973년과 1992년에 이뤄진 군대의 시위진압과는 달리, 2009년 4월 13일 방콕에서 감행된 강제진압은 시위대에게 확실하게 우호적인 여론의 반향을 안겨주진 않았다. 이른 아침에 진행된 군대의 기습공격은 [사망자가 나올 만큼] 매우 과도한 것이었지만, 일부 시위대의 폭력적인 행동 때문에 레드셔츠 시위대는 대중적 지지를 큰 폭으로 상실했다. 게다가 레드셔츠들 중 몇몇은 개인 화기를 갖고 있었고, 임시로 제조한 소형 폭발물과 골프채, 도검류, 화염병 등을 소지한 이들도 많았다. 레드셔츠 시위대 내에서 가장 폭력적인 무장 분파는 검은셔츠를 입고 있었다.
한편, 탁신 전 총리와 아피싯 총리는 뉴스 보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고자, 해외 TV 방송들에 출연해 선전전도 펼쳤다. 이 선전전에서 명백한 승리자는 아피싯이었다. 국내 상황의 경우, 탁신이 태국의 보통 사람들과 뛰어난 소통능력을 보인 반면, 아피싯은 국민들과의 소통에서 냉랭하고 어설픈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해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이와 정반대로, 영국에서 교육받은 아피싯이 그럴듯하고 호감을 가질만한 영어를 구사한 반면, 탁신은 상기된 목소리와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 부분 역시 아피싯 정부에 대한 우호적 여론 조성에 일조했다. 태국의 주류 언론들은 압도적으로 아피싯을 지지했다.
마크 애스큐는 자신의 논문 <2008~2010년 사이 태국에서의 대립과 위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정부가 선전하고 주류 언론을 통해 확산된 내용에 따르면, 송끄란 연휴에 발생한 격동은 탁신과 레드셔츠(UDD) 핵심 동맹세력이 정권 탈취를 위해 고의적으로 획책한 시위이자 공격적인 집단행동이었다. 레드셔츠들이 사회적 혼란을 조성하고, 군부 내에서 탁신의 권좌 복귀를 위한 군사 쿠테타가 촉발될 수 있는 사회적 분열의 씨앗을 뿌리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탁신이 비록 이 사건을 이용하려 했던 것은 명백하지만, 정부의 주장이 맞는지는 불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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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2009년 4월 14일 영국 BBC와 가진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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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아피싯 웻차치와 총리가 2009년 4월 19일 미국 CNN과 가진 인터뷰. |
4월13일의 밤은 긴장감이 높긴 했지만 다른 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온한 밤이었다. 4월14일, 정부청사 앞에 설치된 메인 집회장에 진압군의 결정적 공격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레드셔츠 지도부는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시위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아피싯과 군부가 승리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더욱 분열된 국가였고, 아피싯 정권의 위선과 이중기준 역시 그 어느 때보다 확대되고 있었다.
2008년 8월, 경찰이 정부청사를 점거한 옐로셔츠(PAD)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할 때, 아피싯은 경찰의 노력을 저지하는 데 조력했다. 그리고 2008년 10월 7일, 경찰이 옐로셔츠 운동의 시위 진압에 나섰을 때, 태국의 엘리트 계층은 경찰의 "잔학성"에 극도로 분노했었다. 친-탁신계 정권이었던 사막 순타라웻(Samak Sundaravej: 1935~2009) 총리 정부와 솜차이 웡사왓(Somchai Wongsawat: 1947년생) 총리 정부에서, 군부는 법치를 구현하려던 정부를 돕지 않았다. 방콕의 공항들을 점거했던 옐로셔츠 운동의 지도자들은 여전히 자유로운 상태였고, 옐로셔츠 핵심 인사 중 한명인 까싯 삐롬야(Kasit Piromya: 1944년생)는 외무부장관으로 발탁되기까지 했다.
이제 아피싯과 군 수뇌부는 레드셔츠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나서 그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많은 태국인들은 2006년 9월의 군사 쿠테타 이후 격렬한 분노와 쓰라림을 느끼고 있었다. 2008년 10월 시리낏 왕후가 옐로셔츠 시위 참가자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 그리고 2008년 사막 총리 및 솜차이 총리의 '국민의 힘 당'(PPP) 정권이 [사법부의 개입을 통해] 붕괴한 일은 그들이 가진 분노와 좌절감을 더욱 부채질했고, 2009년 4월의 시위가 진압되자 그러한 분노와 좌절감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활활 타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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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5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6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7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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