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을 찾아서
(3월 9일 날씨 흐림)
마창기술봉사단은 오늘도 봉사활동을 하기위하여 중동성당에서 단원들이 모였다. 두 개의 조로 나누어 한 팀은 함안군으로 다른 한 팀은 산청군 생비량면 도전리를 향하여 7시 40분에 출발을 하였다.
마을 이름이 도전리라하여 "무언가을 성취하기 위해 도전한다."는 뜻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그곳 사람들은 "도밭"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道田(도전)리를 한자로 표기하니 도밭이란 표현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중동성당에서 조 편성을 하고>
<함안으로 가는 특공조의 편성>
우리 팀은 군북IC에서 의령을 지나 대의에서 산청군 방향으로 차를 이동시켜 도전리 삼거리를 지나 차량 한 대만 다닐 수 있는 양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마을 입구에 오니 작은 동산이 우리를 맞이했다. 길가에 안동권씨 사적비가 있으며, 붙어서 재실이 있었고 10m앞 공터에 목적지인 마을 회관이 있었다.
<도전리 삼거리 양천강 둑에 도전리 마애석불상군으로 가는 안내표지가 있다.>
<도전교의 모습은 외나무 다리를 생각나게 한다.>
<마을 초입의 모습에 동산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안동권씨 사적비의 모습>
<재실의 모습>
<도전 마을 회관>
마을의 규모에 비해 넓은 토지를 보유하여 넉넉한 마을로 보였고 주산물은 딸기재배로 일반적인 농촌보다 재정이 풍부해 보였다. 마을은 과거와 현재가 조화롭게 바뀌어 변화라는 물결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넓은 들판과 보리밭>
<주생산물인 딸기>
<마을 풍경>
<옛 돌담위에 시멘트 담장을 만든 모습에서 변화의 바람을 실감한다.>
<아직도 돌담이 여전히 존재하고.>
<장작이 땔감으로 여전히 중요한 물건이며.>
<마애석불군 앞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은 한가롭기만 하다.>
나란히 놓인 멧돌이 정감을 더하고 힘자랑을 하던 들돌이 이제는 상징적인 모습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 들돌에는 “춥고 배고프던 시절 우리 동네 장정들이 낮에는 일하고 보름이면 달밤에 나와 힘자랑을 하던 들돌로써 지금까지 하판개라는 동네 장정이 어깨너머로 넘겼다는 유래가 있는 돌을 지금까지 보존해 오다가 박도재씨가 돌탑위에 올려놓고 권영식씨가 정자 밑에 동민을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겨운 멧돌>
<놀이가 없던 시절 힘자랑으로 들돌을 들었는데 머슴들에게는 힘을 쓰는 만큼 세경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논에 물을 대는 마을의 수로는 우리나라 농촌 어디를 가도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U형 시멘트 물길이 쭉 벋어 있다. 논개구리가 사라지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U형수로가 개구리가 빠지면 죽어서도 나오지 못하는 함정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늪 U형수로>
이 동네 초입에 있는 동산은 어찌 보면 산과 연결 된 것이 아니라 들판에 쌩뚱맞게 서있어 주민 조극래(53세)씨에게 물어 보니 “옛날에 저쪽 아래 냇가에서(산청군 방향) 어떤 아낙이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산이 자기가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어 산이 떠내려 온다!”라고 말을 하자 저 자리에 서버렸다는 전설을 말씀해 주셨다.
<마을의 수호신 같은 동산>
<동산의 적송 군락>
그리고 동산에 가면 고인돌이 있을 거라면서 “옛날에는 고인돌 두 개가 더 있었는데 길을 만들고 농지개량을 하면서 땅속에 묻어 버렸다.”고 알려 주셨다. 또한 산청 방향 농지를 보시면서 “저기는 지명이 왕무지인데, 농지개량을 할 때 돌곽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돌칼이며 숟가락 등의 유물이 출토 되었는데 그 당시는 자신도 어렸기에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른다.”는 말씀을 하셨다.
도밭이란 지명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얼마나 많은 道를 내어 놓았으면 "도의 밭"이란 이름을 붙어 놓았을까? 하고 생각해 봤다.
<선사시대 때에도 도전리에는 사람이 살았다는 고인돌의 흔적>
孤山臺 (고산대)
黙窩權學容(묵와권학용)
黙軒權旭容(묵헌권욱용)
(호:묵와=권학용, 호:묵헌=권욱용) 두 사람이 독뫼(고산대)에 이름을 새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