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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 17:1-5).
우리는 지금까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영광을 보편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이 첫 다섯 구절 속에 상세하게 진술된 것들 중에서 한 가지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원합니다. 특히 우리 주님께서 아버지께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4절)라고 말씀하신 부분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의 두 부분은 서로 보완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일을 세상에서 이루심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려 하심이었고 그분이 세상에서 행하신 모든 일은 다 그 목적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자 이제는 그 다음 부분을 특별히 살펴볼 수가 있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물론 이것은 기독교의 구원을 숙고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대체 무엇을 뜻하며 무엇을 수반하며 어떠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를 영광스럽게 진술한 것입니다. 성경은 부단히 이런 일들을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지나가면서 지적하고 싶은데요,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우리가 객관적이고 옳은 관점을 갖게 되는 것보다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거나 여러분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결코 평안과 기쁨과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옳은 길은 이 위대한 구원의 방식을, 이 놀라운 계획을 자세히 살펴보는 길입니다. 언제나 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찬송시 저자의 말에 따르면 '경이감과 사랑과 찬양에 깊이 빠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언제나 이 구원을 하나님의 영광의 관점에서 생각한 사람들이며,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지각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유명한 위대한 표현입니다-그들은 바로 그 안에 몰입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세상에서 정복자 이상의 삶을 살며, 인간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면역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포괄적인 진술의 차원에서 구원의 주제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첫 번째 요점은, 주께서 하시도록 부여받은 일은 명백히 정해진 특별하고 구체적인 어떤 과업이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구원에 관해서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전혀 희미하거나 모호한 것이 없이 분명히 일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이런 용어를 쓸 수 있다면, 어떤 특별한 일의 명령을 받은(briefed) 어떤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명령을 받다' (briefed)라는 표현은 지난 수년 동안에 그 의미가 확대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이 단어를 법정 변호사의 임무와 관련하여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 전쟁 기간 동안 우리는 그 표현과 친숙하게 되었습니다. 공군에 들어간 사람은 어떠한 특별한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 일은 분명하고 구체적이며 미리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기독교 구원에 관해서 우리가 마음속에 매우 분명하게 언제나 붙잡고 있어야 하는 첫 번째 사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 구원에 관한 고찰을 시작하면서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분이 제게 와서 기독교 구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제가 정확한 정의를 줄 수 있을까요? 이런 차원에서 말한다면 저는 응당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원에 대해서 어떤 보편적인 추론이나 희미한 인상을 끼치거나 몇 가지 진술을 하는 것으로 다 설명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정확하게 설명될 수 있는 매우 분명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구원은 분명하고 특별한 것입니다. 물론 성경 자체 속에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분명한 정의들이 내려져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도록 부여받은 일은 인간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친히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예수님이 왜 오셨다고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사도 사울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 사실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위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바로 우리 주님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특별한 임무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좀더 보편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를 원하신다면 이렇게 해 보십시다. 우리 주님이 부여받은 임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친교와 사귐을 회복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히 바로 그 일 때문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사람들을 위하여, 그 관계를 회복해 주시기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묶어 주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셨다고 보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의 일은 이렇게 명약관화(明若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이 특별한 관계와 사귐으로 서로 묶어 줌으로써 상실되고 파괴되었던 그 아름다운 사귐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자 이제 다음 이야기로 나아갑시다. 저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씀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구원의 일을 필요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만일 구원의 일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영원한 회의(The Eternal Council)는 결코 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성자께서 그 모든 고통과 수치를 당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일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된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 구원의 일의 필수불가결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난 언제나 하나님을 믿어 왔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왔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신 일 전체가 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불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당신의 궁극적 소망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내 소망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예, 저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어 왔거든 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신앙에 대한 이런 저런 것들을 이야기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리스도의 일은 불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원의 일은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것입니다. 성자께서 보냄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임무를 받으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완수되지 않고는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심층부로 뛰어들어가게 됩니다. 이 구원의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던 원인은 바로 인류의 죄와 그것이 야기한 문제들이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죄의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와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는지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구원 계획에 대한 설교가 왜 이다지도 듣기 힘든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어째서 사람들이 이 엄청난 주제에 대해서 별로 생각을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죄의 교리에 대해 듣기 싫어하며 그 교리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구원에 관한 이 모든 것을 필요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예식적인 규범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부과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예식적인 규범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번제나 속죄제나 속건제 같은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행해지던 여러 규범들에 속한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짐승을 잡고 피를 흘리고 그 피를 성전에 드리던 일 등입니다. 이 모든 일의 필요성을 일으킨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죄였고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을 필수적으로 만든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더 필연적으로 만든 또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성품입니다. 그런데 저는 죄에 대해 먼저 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문제들을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먼저 화해할 수 있기 전에 두 입장 모두에서 무엇인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문제를 저는 로마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용한 논증을 사용하여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동시에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하실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거룩하고 불변하고 영원하고 의로우며 참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와 허물들을 용서하실 수 있는가?"
저는 이것을 좀더 간단한 방법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본성상 죄를 그냥 묵인하고 넘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상식적 차원의 관념에서는, 우리가 그저 죄를 저질렀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참으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따르면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저는 서슴없이 말씀 드립니다. 저는 기독교의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좀 무정해 보일지는 모르나 사실을 사실대로 말씀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지금 이 사실을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본성상 죄를 그런 식으로 참아 주실 수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가 지금 말씀 드리는 것이 사실임을 입증하라고 요구하신다면 이렇게 입증할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용서하노라"고 말씀하시고서 그냥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으로 파송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주어진 임무, 즉 그 과업은 다시 말씀 드리지만, 그 방법이 아니고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결코 용서하실 수 없기 때문에 주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의로움을 전혀 상하지 않으시면서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방식은 하나님의 성품과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조금도 바꾸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변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요일 1:5)고 하셨습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시며, 절대적으로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품을 지닌 채 인간의 죄를 그냥 용서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은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일이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일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참되신 무한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볼 때 그리스도가 부여받은 일은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또한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 때문에도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특별한 일이 행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일이 필수적인 일이 된 두 번째 큰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 하나를 살펴봅시다. 그 일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셔야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을 스스로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이제 저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부정적 차원의 진술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 스스로는 결코 해낼 수 없는 어떤 일을 우리 대신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 차원의 진술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무엇을 하러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들은 선한 행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이런 일 저런 일들을 해냄으로써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결코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나이다"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계십니다. 저는 가끔 우리가 나무를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성경 학도로 일컬어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분석 방법으로 복음서를 훑어 나가며 주님의 가르침을 살펴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상세한 것들에 사로잡힌 나머지 전체적인 장엄한 계획을 못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포착해야 할 진리가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그분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상고하고, 그분이 앞서 행하고 계셨던 일이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셔서 친히 어떤 특별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 특별한 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분이 우리더러 하라고 하신 어떤 일을 우리가 잘 해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사역은 오직 그리스도의 일이었고 그분이 친히 행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특별히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이 말씀을 종합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예수님은 이미 행하신 일들을 뒤로하고 항상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을 바라보며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전체의 일을 돌이켜보면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나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완성하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외치심으로써 그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일이지 여러분과 저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구원에 대하여 바른 생각과 이해를 갖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매우 좋은 방법은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는 일입니다. 과연 우리는 기독교의 구원이 절대적이고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의 피조물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일을 완수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일구어놓으신 구원을 그저 값없이 선물로 받을 뿐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중대한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 중에서 어떤 부분을 상세하게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다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행하신 일은 단순히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지상 최고의 교훈이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훈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많은 설교자들이 그리스도의 유일한 임무는 그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일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가장 특별한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에서 계시된 바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과 부성애에 대한 가장 영광스러운 진술들을 발견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약의 진술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진술들을 우리는 구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애와 거룩한 성품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또 이렇게도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다른 어떤 일들을 하셨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구원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과 삶과 죽음과 부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우리가 인식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핵심적인 일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이라고 주저없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속성과 부성애에 대한 가르침은 이런 큰 진리들을 끌어 내 밝혀 주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에 대한 교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을 절대적인 필연성으로 규정지어야 합니다. 이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사람이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몇 가지 지식을 얻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특별한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그 일'이 정말 핵심적인 사상임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주 예수께서 보내심을 받아 하신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은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일'은 인류의 대표로 지정을 받은 일입니다. 맨 처음 인류의 대표는 아담이었습니다. 아담은 완전한 인간이었으며 인간의 대표로서 행동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죄하였을 때 우리 모두가 범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를 대표해 줄 어떤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얼굴을 다시 들게 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소개시켜 주실 수 있는 분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일입니다. 더도 덜도 아닌 바로 그 일입니다. 인류의 대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히브리서 2장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주', 즉 우리의 대장, 우리의 지도자, 우리의 대변자가 필요합니다. 첫 사람 아담에 상응하는 새로운 인류의 기원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동정녀 탄생의 기적이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속에 신인(神人)양성이 신비하고 놀랍게 연합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장의 표현대로, 스스로 구원하는 팔을 뻗어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성(人性)을 자기의 신성(神性) 속으로 취하셨습니다. 그것이 성육신(成肉身)의 전체 의미입니다. 2000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강조하고 있는 요점은 그리스도의 그 일은 단순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인류에게 알려 주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의 신현(Theophany: 神)의 방법을 통해서도 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어떤 계시를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치 못합니다. 그분은 사람을 대표하셔야 했고, 사람이 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대표하시려면 먼저 우리 중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많은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세례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요한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며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저에게 오시나이까?" 하였습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니라,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 세례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실 위대한 사역 중에서 한 가지 본질적인 단계를 거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으로서 태어나신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례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 그분이 왜 세례를 받으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죄 가운데 있는 우리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와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계셨으며 우리의 죄를 친히 그 한 몸에 짊어지시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분에게 임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에게 능력이 주어졌을 뿐 아니라 그의 임무를 위해서 기름 부음 받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기가 구원할 백성들을 위한 메시아, 즉 구원자로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서 매우 특별하게 성별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임명과 함께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또 그 일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이 공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본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셔야 하실 일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실 일들 중에는 인성을 취하실 뿐만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우리와 하나가 되시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주목해 보면서 그분의 완전하고 흠 없는 순종의 삶을 바라보십시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지만, 그분이 완전한 삶을 사신 것은 그분이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훨씬 더 중요한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에 순종하는 완벽한 생활을 하심으로써 우리의 머리와 대표로서 율법을 영예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주로서, 그리고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로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율법을 영광스럽게 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적극적인 의를 얻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그 의를 얻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다름아닌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의 한 가지 중대한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그의 완벽한 생활을 찬탄하면서 "그렇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면서 그것으로만 끝마치는 경향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를 살펴보고 하나님의 율법을 높이고 그것을 완벽하게 지키시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는 저와 여러분의 대표자로서 그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고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시기 위해서만 그 일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기 전에 먼저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높여야 했습니다. 그가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일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탄을 이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연구하고 있는 이 구절에 대한 위대한 주석과도 같은 히브리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매우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셨다" (히 2:14. 15)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기록한 요한일서에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이라고 썼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류는 사탄에게 종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과 참으로 화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이 사탄을 정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지배하에서 해방되고 구출되어 하나님의 나라로 이주해야 합니다.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보다 먼저 와서 사탄의 속박에서 인류를 해방하려고 했던 모든 자들은 결국 사탄에게 패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속이 있기 전에 먼저 누군가가 사탄을 정복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인류의 대표로서 인류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모든 일을 완수하셨습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최종적인 임무를 완수하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죄책(罪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 몸 안에서 인류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으며, 속죄의 제물로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람이 없느니라"(히 9:22)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에 대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성상 피흘림이 없이는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가 전에 먼저 우리의 죄를 심판하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여러분과 저의 죄는 처리되었습니다. 응분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을 속함받았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고후 5:19)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자신을 흠없고 점 없는 사람의 대표로, 희생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모든 일들을 친히 행하시지 않았다면 그일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그렇게 그 일을 이루심으로써 마침내 사망을 이기셨습니다. 사망의 치명적 무기인 그 '쏘는 것'을 빼앗아 버리셨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6-57).
저는 여러분에게 단순히 다음과 같은 제목들만을 말씀 드립니다. 시간이 있으면 여러분 스스로 한 가지씩 더 생각해 보라고 권면하는 바입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을 따라 사졌습니다. 죄와 죄책(罪責)과 악에 대해서 율법이 선언하는 형벌을 친히 한 몸으로 다 받으심으로써 그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해내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충족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망과 무덤을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것을 그리스도께서 해내셨습니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새로운 본성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 용서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고 친교하기에 합당하도록 새로 지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본성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 어둠이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고, 또한 요한복음 17:1-5에서 의미하는 그분의 본성과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살펴보신 다음에 여기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나이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하셨습니다. 내 친구 여러분,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을 인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에 관한 한 그 일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식하셨습니까? 아직도 여러분이 스스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직도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지 질문을 받으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대답하면서 그저 이런 저런 일들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도입니까?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나이다"라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 그 일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입증하는 방법은 그 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알고 인식하며 오직 우리의 복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공로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보고 그분 안에서 그 일이 이루어지고 완성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해도 좋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의미에서든지 도무지 확신이 없고 의심스럽고 여러분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시작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나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완벽하게 해내신 일 속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아직도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그리로 들어가셔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그 일을 신뢰하시고, 당장 여러분이 받은 큰 구원을 인하여 기뻐하기 시작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