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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게시판 스크랩 [경제] 효성그룹 창업주,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을 다 먹어서 서운했다
대칸 추천 0 조회 264 14.10.12 13: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목 효성그룹 창업주,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을 다 먹어서 서운했다 글쓴이 JET-SET(211.47.118.25) 추천 0
 
번호 260569 날짜  2006-10-13 17:40:26 조회수  945  
 
 http://mlbpark.donga.com/board/ssboard.php?bbs=b_bul&s_work=view&no=315624

 

"늦되고 어리석었지만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 효성그룹 창업자 고 조홍제 회장(사진)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발간한 회고록의 제목이다. 회고록의 제목은 조 전 회장의 호(號) ’晩愚’에서 따온 것이다.

조 전 회장의 회고록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삼성그룹 이병철 전 회장과의 삼성그룹 창업에 얽힌 비화. 이 책에는 삼성그룹을 창업한 이후 헤어질 때까지 13년에 걸친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소개했다.

 

다음은 회고록 내용과 이 회고록에 담겨있지 않은 미공개 비화.

조 전 회장은 1906년 경남 함안군 동촌리에서 3천석을 하는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동네 서당을 다니다가 서울 중앙고보(현재의 중앙고)에 입학, 1928년에 졸업했다. 중앙고보 재학 시절 응원단장을 지낼 정도로 활달한 성격이었던 그는 3학년 재학 시절 ’6.10만세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법정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그는 배움도 ’만학(晩學)이었다.

대학 졸업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소일하던 그는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에 서울로 상경해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을 만났다. 당시 조 전 회장의 나이는 39세였고, 이병철 전 회장은 5살 아래인 34세였다.

 

두 사람은 고향(조 전 회장은 함안이었고, 이 전 회장은 의령이었다)이 가깝고, 이 전 회장의 큰 형인 이병각씨와 조 전 회장이 동갑친구 사이여서 두 사람은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두 사람이 만났을 당시 이 전 회장은 대구에서 삼성상회라는 무역회사를 하다가 서울로 진출하기 위해 자금을 모으고 있던 중이었다.

 

두 사람은 사업을 함께 하자는데 의기투합을 한 뒤 준비과정을 거쳐 1949년 2월 조 전 회장이 1천만환, 이 전 회장이 7백만환을 각각 출자해 ’삼성물산공사’라는 이름의 회사를 세웠다. (회고록에는 조 전 회장이 8백만환을 내고 이 전 회장이 2백만환을 출자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쨌든 이 회사가 지금의 삼성그룹 모기업인 삼성물산이었다. 출자는 조 전 회장이 더 했지만 사업경험이 많은 이 전 회장이 사장을 맡고, 조 전 회장은 부사장을 맡았다.

 

삼성물산공사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급성장을 했다. 이 전 회장은 주로 경리업무를 맡았고, 조 전 회장은 독일, 일본 등지를 다니면서 기술자본도입, 물건판매 등 실무적인 일을 도맡아 해냈다. 당시 이 전 회장의 차남 창희씨(전 새한그룹 창업주, 작고)와 조석래 현 효성그룹 회장이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함께 공부를 한 관계로 두 집안은 매우 절친하게 지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업동지 관계는 4.19가 터지기 한달전인 1960년 3월 끝이 났다. 일본 동경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던 중 이 전 회장이 "동업을 그만두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느닺없는 이 전 회장의 충격선언에 조 전 회장은 놀랐지만, 50대에 접어든 조 전 회장으로선 나이가 들었다는 서글픔도 있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 문제는 재산분배비율이었다. 조 전 회장은 출자지분비율대로 재산을 나누자고 했고, 이 전 회장은 30%만 주겠다고 맞섰다. 그럴 즈음 4.19가 터지면서 삼성그룹의 오너인 조 전 회장과 이 전 회장은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때마침 이 전 회장은 일본에 있어 조 전 회장이 한달이나 감옥에서 지냈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다소간 화해를 했지만 결국 조 전 부회장은 삼성그룹 지분의 3분의 1을 받는 선에서 1962년 9월 13년간의 동업관계를 청산했다. 청산조건은 당초 제일제당은 조 전 부회장이 갖고, 나머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이 전 회장이 갖는 조건이었다. 그런 구두약속을 한 뒤 조 전 회장은 곧바로

 

효성물산을 차렸다. 이 회사가 지금의 효성그룹 모태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전 회장과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제일제당을 넘겨준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의 갈등은 3년간이나 더 계속됐다. 그러다가 나중에 1965년 두 사람은 일본 동경의 한 호텔커피숍에서 만나 담판을 지었다. 결론은 조 전 회장이 한국타이어 주식 50%, 안국화재와 천일증권 동양제당 주식 등 당시 돈으로 3억원어치를 받는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조 전 회장은 효성물산을 차려 맨처음 정부 달러공매에 입찰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그 때 조 전 회장을 도와준 사람은 배기은씨(전 동양나일론 사장)과 송재달씨(전 효성바스프 사장) 등이었다. 초기 사업은 정말 형편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조선제분이라는 부실회사를 빌려 밀가루장사를 통해 돈을 벌기도 했다.

 

조 전 회장을 살린 기업은 동양나일론이었다. 1966년 사업이 잘 안돼 헤매던 그는 나일론생산에 나서기로 하고 울산에 공장을 세웠다. 이 회사는 1970년대 섬유수출드라이브정책을 타고 그야말로 달러박스가 됐다. 이 회사에서 남는 돈으로 한국타이어를 정상화시켰고, 관리기업이던 대전피혁을 인수하는 등 사업을 번창시켰다.

 

조 전 회장이 가졌던 이병철 회장에 대한 서운한 감정은 효성이라는 상호에도 배어있다. 조 전 회장은 ’별이 세개인 삼성보다 더 밝은 회사로 만들겠다’며 이름을 ’효성’으로 지었다고 한다. 또 사무실도 처음에는 현재의 삼성본관이 있는 태평로 맞은편에 지었다. 항상 출근하면 삼성본관을 쳐다보면서 치밀어오르는 화를 달랬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조 전 회장은 이병철 회장보다 3년이 앞선 1984년 1월16일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그는 죽음의 순간에도 사업동지였던 이병철 회장을 찾지 않았을 만큼 두 사람의 감정은 생전에 풀어지지 못했다.

재벌닷컴=김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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