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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기독교 세계관: 인간과 자연 환경의 창조
(1) 핵심적 본문
창 1:11, 21, 24, 26-28 11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 21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 24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 26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 창세기 1장의 내용 정리
(i)하나님: 창조주.
(ii)창조 대상.
①자연.
a.물리적 환경: 하늘(v. 8), 땅 및 바다(v. 9), 해, 달, 별(v. 16).
b.생물.
㉠식물 (v.11).
㉡동물 (vv. 21, 24).
②인간 (vv. 26, 27).
a.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vv. 26, 27).
b.다른 피조물에 대한 다스림의 사명 부여 (vv. 26, 28).
(3) 인간: 하나님의 형상
(i)하나님 형상의 형식적 의미.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데 있어, 가장 선행되어야 할 바는 구약 당시 신의 형상물(形像物) (the image of a god)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구약학자 클라인즈(D. J. A. Clines)는 근동 지방의 형편을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 형상의 의미를 여섯 가지 사항으로 제시하고 있다.
①신의 형상물은 보통 원형의 삼차원적 물체로서 입상(立像)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간은 몸과 영혼의 통전적 단일체로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②신상(神像)은, 신이 신체적으로는 아니로되 영적으로 함께 할 수 있는 곳에 세운 형상물로서, 자신을 대표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상에 세우신 하나님의 대표자이다.
③형상물은 많은 경우 자기가 대표하는 원형과 유사성이 있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을 닮았다.
④신의 형상물을 인간과 관련시킬 때 그것은 주로 왕을 가리킨다; 인류는 집합적 의미에서 모두가 함께 왕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⑤하나님의 형상이 왕에 대한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만물에 대한 통치를 함의한다.
⑥한 번 신의 형상물이 되면 영영 그런 존재로 남는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은 첫 인물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후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ii)하나님 형상의 내용적 의미.
하나님의 형상이 의미하는 바를 이상과 같이 묘사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즉 그 형상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하여 세 가지 수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①인류 대 자연계: 피조계를 다스림 (창 1:26-28).
②인간 상호간: 사회성 혹은 공동체성 (창 2:18-24).
③인간 개개인: 좁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 및 넓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아보고자 할 때, 우리는 세 가지 수준 모두를 총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①그런데 인류라는 집합적 수준에서 보면, 이 때 하나님의 형상은 피조계를 다스리는 권세와 연관이 된다.
②인간과 인간 상호 간의 인간 관계적 수준에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사회성 혹은 공동체성을 가리키는데, 더욱 구체적으로는 상보성, 친밀성, 합일성을 그 특징적 내용으로 한다.
③인간 개인적 수준에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개개인이 보유한 바 근본적 특성들을 나타내는데, 흔히 좁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과 넓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을 구별해서 이야기한다.
a.좁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에는 의(엡 4:24), 거룩(엡 4:24), 참지식(골 3:10)이 포함되는데, 이들은 인간이 원초에 부여 받았으나 타락과 더불어 상실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하게 된 특성들을 말한다.
b.반면 넓은 의미의 하나님 형상은 타락으로 인해 손상은 입었지만 상실되지는 않은 바로서,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도덕성, 지성, 영성, 창의성 등의 특성을 가리킨다.
(4) 문화 명령
(i)용어에 대한 이해.
①“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이라는 용어는 화란의 신학자 스킬더(K. Schilder, 1890-1952)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동산을 경작하라는 말은 이 세계에 잠재된 것들을 개발하라는 구체적인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이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은 앞으로 증가하게 될 인류 전체가 문화 명령 -- 모든 시간적 국면과 모든 지리적 공간을 총망라한 문화 전반에 참여해야 할 의무 -- 에 종속된다는 뜻이다.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 -- 하나님의 부(副)통치자(vice-regent) -- 를 직면하도록 해 준다.
②어떤 이들은 문화 명령보다 창조 명령(creation mandate)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두 가지를 교호적으로 사용한다.
(ii)“하나님의 형상”과 “땅을 다스림” 사이의 연관
①창 1:26 및 1:27-28에 두 개념이 연접해서 등장한다.
창 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②의미하는 바.
a.하나님의 궁극적 권세: 주권적인 작정에 의해 자신의 세계를 다스리는 창조주-주님(Creator-Lord)으로서의 하나님 모습을 나타냄.
b.인간의 제한된 권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에 대하여 향유하는 왕적 권세를 주시고, 또한 정복하고 다스릴 영토를 부여 받음.
(iii)인간: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
①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a.우리는 자율적인(autonomous) 존재가 아니다.
b.우리는 하나님의 법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그의 종이다.
㉡우리는 그의 통치 하에 살고 있다.
②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a.우리는 문화-역사적 피조물이다.
b.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그것을 경작하고 개발하게 하셨다.
c.이러한 신분과 권위 -- 이것을 가리켜 청지기 직분이라 하는데 -- 가 우리 인간됨의 중심이다.
(iv)배경: “땅을 다스림”의 구체적 내용.
①이중적 사명: 피조된 환경을 개발하고 보존하는 것 (창 2:15).
a.첫 사명: 개발의 사명.
b.둘째 사명: 보존의 사명.
②문화 명령의 내용.
a.땅을 다스리라는 이중적 사명 가운데 첫째 사명 -- 곧 개발의 사명 --과 연관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b.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보존의 사명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cf. “땅을 정복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포함된 자애로운 보호와 보존이라는 극히 중요한 요소를 인식해야 한다”).
II. 자연 환경에 대한 세 가지 입장
(1)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연 환경을 바라볼 때 다음과 같은 진술들이 마련된다.
(i)인간은 몸을 가진 존재로서 신체․생리적 차원에서 보면 생태계의 일부이다.
(ii)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자연계를 초월하는 면모 또한 갖추고 있다.
(iii)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피조계를 관리하고 보전해야 한다.
(2) 이러한 진술들을 염두에 두고 생태계의 문제와 관련해 제시된 몇 가지 대안들을 검토해 보자.
ACB
범신론적 언약 관계적 기계주의적
자연관 자연관 자연관
(i) [A] 범신론적 자연관(pantheistic view of nature).
① 범신론은 신과 우주를 존재론적으로 동일시하는 신관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화이므로 신과 자연은 같은 사물을 지칭하는 서로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또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함께 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② 최근에는 뉴 에이지 운동이 대두하면서 범신론적 자연관이 대중화되었다. 어떤 이들은 뉴 에이지의 환경 보호 운동을 심층 생태학(deep ecology)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의 자연관은 범신론과 같아서 “인간과 비인간의 영역 사이에는 실상 아무런 구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또 가이아(Gaia) 가설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범신론적 입지를 더욱 강화시키기도 했다.
③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범신론적 자연관이 일말의 진리조차 담고 있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인간이 몸을 가진 존재이고, 그 몸은 신체적생리적 작용 가운데 유지되고 있음을 생각할 때, 생태계의 다른 피조물들과 같은 삶을 나누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 있어 범신론적 자연관의 한계와 오류 또한 명백히 드러난다. 인간은 동시에 자연을 초월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안목에 대한 청지기적 사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범신론적 자연관은 앞에서 제시한 진술 가운데 (i)은 충족시키되, (ii)와 (iii)의 내용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입장이라고 하겠다.
(ii) [B] 기계주의적 자연관(mechanistic view of nature).
①기계주의적 자연관은 17 세기에 등장한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의 기계론적 사유 방식에 힘입은 것이다.
데카르트는 자연 자체가 그 성격상 기계론적이라고 주장했다 … 데카르트에게는 자라나는 나무나 움직이는 시계나 어떤 점에서 보든 똑같은 대상이었다. 그는 자연 피조물을 하나의 기계로 보았는데, 그것을 구성하는 일이나 재구성하는 일 또한 (원칙상으로는) 연역적 사고의 지배를 받는 바이었다 … 이러한 자연관에서는 생동감, 내적 자발성 그리고 목적성이 철저히 배제되었다.
② 인간은 자유롭고 의식이 있으며 이성적인 행위자인 반면, 자연은 반대로 물질적이고 결정론적이고 기계론적인 대상에 불과했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얼마든지 자연 대상을 조작하고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을 착취하고 남용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와 실제적 원동력은 실상 이러한 기계주의적 자연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③ 기계론적 자연관은 앞에 소개된 진술 가운데 (i)과 (ii)를 모두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ii)의 면에서 극단적으로 나아가 인간-자연 이분법을 고착화시키고 말았다. 그리하여 (iii)의 진술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결국 오늘날의 생태 위기를 재촉했던 것이다.
(iii) [C] 언약 관계적 자연관(covenantal view of nature).
①기독교의 자연관은 창조, 타락, 구속의 파노라마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창조 시부터 자연계 -- 인간을 제외하고라도 --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는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피조된 모든 만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좋다”고 평가하신 바 (창 1:4, 10, 12, 18, 21, 25)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인간을 지으시고 나서 “심히 좋았다”고 했을 때에도, 그 대상은 “지으신 모든 것” (창 1:31)으로서 인간 이외의 모든 피조 세계까지 포함함을 알 수 있다.
②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배려는 계속되는 하나님의 섭리에서 나타난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이 피조계와 더불어서 언약을 맺으셨다.
창 9:8-1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족속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노아 당시 맺은 언약이지만 먼 후일 선지자의 사상에서도 여전히 반영되고 있다 (cf. 렘 33:20-21, 25-26). 바로 그런 언약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되느냐와 상관없이 다른 하등 동물에 대해서도 은혜의 섭리를 베푸신다 (시 104:10-13, 16-22, 25-30; 145:9; 147:8-9; 148:3-10; 마 6:26, 28-30; 10:29).
③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은 종말론적 구속의 완성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증거이니, 피조계는 하나님에 의해 멸절되든지 단절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이다 (cf. 사 11:6-9; 65:25; 롬 8:19-22; 골 1:15-20).
④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피조계를 다스리심에 있어 항시 직접적으로 일하시는 것은 아니고 인간을 자기와 비슷하게 만드셔서 대행자로 삼으셨다. 따라서 인간은 피조계를 다스리되 항시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다스림 밑에 있는 존재임을 의식해야 했으며,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피조계를 다스리고 보전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형상의 의미이며 청지기적 직분의 요체인 것이다.
III. 그리스도의 환경 윤리: 개발과 보전
(1)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위치와 자세
(i) 숭물론(崇物論).
① 이 입장은 인간이나 자연이나 존재론적인 위치가 똑같다는 등위론(parity thesis)적 사고에 기초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따름이기 때문에 자연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도 지배권이나 상위적 권세를 행사할 수가 없다고 본다.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범신론의 중심 신조이며 뉴에이지 사상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또 뉴에이지 운동의 주창자들이 편승하는 가이아(Gaia) 가설이든지 심층상태학(deep ecology) 역시 숭물론에 입각한 환경 윤리를 내세우고 있다.
② 숭물론의 또 한 가지 형태로서, 자연에 신적 지위를 부여하는 입장이 있으니 이름하여 물활론이다. 이는 자연에 속한 사물 중 특정한 대상 속에 영적 실체가 내재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런 생각은 일반적으로 원시 사회에서나 미개한 오지의 주민들 사이에 편만해 있다. 신적 숭배의 대상으로는 산, 강, 늪지대뿐 아니라 여러 동식물 -- 참나무, 거북이, 코끼리, 악어 등 -- 까지도 포함되는 수가 있다.
③ 숭물론은 그것이 범신론이든 물활론이든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 성경은 자연을 신격화하지도 않고 인간과 자연이 존재론적으로 똑같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결코 신적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거나 신과 더불어 공동의 실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ii) 정복론(征服論).
① 두 번째 소개하는 입장은 자연에 대해 첫째 번과 정반대의 태도를 취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고, 영혼을 소유한 인격적 실체로서 자연과는 엄밀하게 구별된다. 자연은 흡사 기계와 같이 생명이 없는 대상으로서, 인간의 목적과 유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이용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채 인류의 발전과 복지라는 미명 하에 자연을 마음껏 유린하고 말았다. 심지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② 정복론은 데카르트의 기계주의적 자연관과 계몽주의의 인간 본위적 발전관에 힘입어 근 300-400년 동안 서양의 사고를 지배했다. 실상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식론적 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결과 자연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착취되었고, 급기야는 신음과 탄식으로써 인류에 대해 생태 위기의 경종을 울리게 되었던 것이다.
(iii)동반론(同伴論).
① 자연에 대한 성경의 입장은 앞에 소개한 두 가지 견해 모두를 거부한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분명 자연과 다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음 받은 존재로서 자연과 구별되며 자연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았다 (창 1:26-28). 문화 명령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간에, 어쨌든 그런 명령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숭물론이 기초한 존재론적 등위론은 합당하지 않다.
②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자연이 인간의 착취와 남용의 대상인 것처럼 멋대로 생각하는 정복론으로 갈 필요도 없다. 인간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자연의 일부이다. 우리는 흙으로부터 만들어졌으며 (창 2:7; 3:19), 몸이 지니는 화학적 성분과 생리학적 기능을 고려할 경우 다른 동식물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③ 따라서 인간은 자연과 동떨어진 위치에서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동반자로서 자연을 섬기는 -- 이것이 “정복하다,” “다스리다” (창 1:28) 및 “다스리다,” “지키다” (창 2:15) 등의 동사가 진정으로 표현하는 바인데 -- 것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자연을 “다스림”(dominion)에 관해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착취와 남용을 일삼는 자연의 정복자가 아니라 자연을 아끼고 지켜 주는 자연의 동반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자연의 가치
(ii) 그러나 역시 그렇다고 하여 자연의 가치를 유독 인간 중심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자연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가치를 지닌다. 자연계는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었다 (창 1:4, 10, 12, 18, 21, 25). 또 여섯째 날의 창조 사역을 끝내시고 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을 때에도, 그 대상은 “지으신 모든 것” (창 1:31)으로서 인간만이 아닌 다른 모든 자연 세계를 포함했던 것이다.
(iii) 그렇다면 자연은 인간에게 주는 유익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하나님 앞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하고 [본유적 가치(inherent value)], 동시에 인간에게 유익을 끼친다는 점 -- 그것이 심미적이든 실용적이든 --에서 도구적 가치(instrumental value) 또한 보유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자연과 관련하여 취해야 할 방침은 결국, 자연의 본유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를 어떻게 결합시키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이 된다. 만일 자연의 본유적 가치를 강조하면 자연을 그대로 지키자는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요, 자연의 도구적 가치를 일차적인 사항으로 내세운다면 자연을 개발하고자 하는 방침 쪽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물론 실제 상황은 이것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어쨌든 그리스도인으로서 개발과 보전의 문제에 대한 기본적 시각의 형성은 자연으로부터 기대하는 가치의 종류와 그것의 결합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iv) 이왕 내친 김에 자연의 보존(保存, conservation)과 자연의 보전(保全, preservation)이 갖는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학자들에 따라 용어 사용이 일관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다음과 같은 설명은 베풀 수 있을 것이다. “보존”은 자연을 보호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주장이기는 하지만,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장기적 관점에서 인간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자연은 인간에게 기껏해야 도구적 가치 밖에는 갖지 않는다. 그 도구적 가치라는 것도 주로 경제적인 -- 목재 생산, 농지 확장, 공장 부지 확보, 도로 건설, 위락 시설 마련 등 -- 목적을 염두에 두고 쓰는 말이다. 따라서 보존을 내세우는 환경론자들은 하시라도 필요하다고 여길 때에는 자연 개발을 찬성한다.
(v) 그러나 “보전”의 경우에는 다르다. 이 방침 역시 자연이 주는 도구적 가치를 도외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입장은 자연이 주는 심미적 가치, 사람들의 심신을 달래주는 심리적 가치, 또 심지어는 자연을 통해 영감을 얻도록 하는 바 종교적 가치에 치중한다. 또 “보전”을 중요시하는 이들은 자연이 인간에게 끼치는 유익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갖는 본유적 가치 또한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보전을 환경 윤리의 관건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자연 개발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게 마련이다.
(3) 보전이 원칙, 개발은 극소화
(i) 보전의 성경적 함의.
환경의 “보전”에 연관된 창 2:15의 “지키다”(ר)-- 아담이 에덴 동산에 대해 책임진 바 -- 는 아론 및 그 아들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할 때 사용된 바로 그 동사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 ” (민 6:2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실” 때 그 지키심은 통전적 관계의 것으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가족․친구․이웃과 더불어, 또 자기들의 주위 환경과 더불어 누리는 충만한 삶이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생태계를 “지키는” 것은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들끼리, 또 다른 종들과 더불어, 건강한 자연 환경 -- 토양, 대기 및 물 -- 가운데 살아가도록 보호하고 관리함을 의미한다.
(ii) 보전이 최상의 원칙.
따라서 인간에게 맡겨진 최상의 원칙은 환경/자연의 보전이다. 동시에 이 원칙은, 개발의 극소화론 -- 개발은 억제하면 억제할수록 좋다 -- 과 병행한다. 사실 인류는 18 세기 산업 혁명 이래 급속한 속도로 자연을 착취하고 수탈했기 때문에,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개발을 억제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iii) 개발에 대한 가늠.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복지를 위해 자연과 환경을 이용해야 할 -- 거기에는 때로 환경의 개발이 포함되는데 -- 필요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연과 생태계의 각종 자원을 이용할 경우, 이것이 이후로의 유지 가능성(sustainability)을 보장할 수 있는지 심각하고 세밀한 조사가 전제되어야 한다.
유지 가능성을 점검함에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은 두 가지이다. 첫째, 수자원, 산림 자원, 해양 자원 등 재생 자원(renewable resources)의 경우, 그 사용 속도가 자연 스스로의 재생 속도 이하를 유지하도록 (혹시 양보한다 해도 재생 속도와 동일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비재생 자원(non-renewable resources) -- 토지, 광물, 석탄, 석유, 가스 등 --의 경우 효율성을 극대화해서 사용하도록 하고, 사용 속도를 줄여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대체 자원의 개발이 시급하다.
(iv) 개발 자극성 요인에 대한 숙지.
인간이 개발을 주도하게 되는 것은 삶의 복잡성과 여러 요인들이 다층적으로 얽힌 때문이다. 따라서 개발을 극소화하고 억제하려면 개발을 일으키도록 만드는 요인들을 미리부터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가능한 경우 예방하도록 힘써야 한다. 세 가지 상호 연관된 요인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첫째, 여러 가지 이권의 개입 때문에 개발이 가속화된다. 리조트 시설의 마련이 가져다 주는 눈 앞의 이득은 사업가의 탐욕을 충동질하여 일시에 산세를 변형하고 숲을 제거한다. 정치가의 무책임한 선거 공약이나 정당의 이득에 눈이 어두워 개발 프로젝트를 밀고 나가기도 한다. 지역 주민의 집단적 낙후감 -- 우리 지역은 다른 곳에 비해 경제적으로 쳐졌다는 생각 -- 이 발동하면 하루 아침에 자연 생태계가 교량, 산업 단지, 오락 시설로 탈바꿈한다. 사실 동강 댐 건설 계획이나 새만금 간척 사업의 경우, 전체 국민 편에서는 부정적 태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대다수가 찬성의 의사를 표현했는데, 이렇게 아이러니칼한 반응이야말로 환경 문제의 복잡성 -- 지역의 경제적 이익 대(對) 환경 보존에 대한 국민 차원의 열망 -- 을 반영하는 단면이라고 하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국가 간의 경쟁이나 국익이 생태계의 피폐에 기여하는 경우도 있다. 브라질 정부가 세계 환경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등 선진국의 도움을 받아 아마존강 유역의 개발에 착수한 것이 그런 예이다.
② 둘째, 개발에 따른 다양한 피해가 즉각, 명백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무리한 개발 행위가 계속된다. 이 경우 불특정 다수가 여러 형태로 피해를 입기 때문에 피해의 상황 자체를 명확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또 그 인과 관계의 규명 또한 난항에 부딪히는 것은 피해나 재난의 원인 [삼림 제거, 농약 사용, 배기 가스 등]이 출현한 때부터 구체적인 피해 현상의 발생 시까지 상당한 시간적 간격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1950-60년대 일본에서 발생한 “미나마따” 병이 대표적 예이다. 공장 폐수를 통해 방출한 수은이 어패류를 오염시켰고, 이를 장기간 섭취한 주민들은 체내에 농축된 수은으로 말미암아 중추 신경에 장애를 겪게 되었으며, 이것이 다시 보행 곤란, 경련, 언어 장애 등을 일으킨 것이었다. 따라서 환경 피해에 있어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할 지 분명하지가 않기 때문에 그런 피해의 예방 -- 이는 개발의 저지를 의미하는데 -- 대해서도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기가 십상이다.
③ 셋째, 개발의 논리는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로 환원시키는 현 시대의 정신과 부합되기 때문에 환영을 받는다. 그런데 경제적 가치는 수량화할 수 있는 것만을 가치의 대상으로 삼기 마련이므로, 자연이 주는 심미적 가치, 심리적 가치, 종교적 가치 등은 환경 정책 입안자, 정부 각료, 환경 전문가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뒷전으로 밀리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요인들은 상호 누적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개발은 여전히 보전보다 매력적인 선택안으로 등장한다.
(v) 환경적 상상력의 발휘.
상상력은 우리의 의식을 넓히고 새로운 안목을 제공한다. 이것은 환경 보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는 현재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 창의적 발상이 요구된다.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할 항목은 네 가지이다.
① 첫째, 우리의 상상 가운데 (인간 중심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해도) 자연의 개발이 결국 인간에게 가져오는 파괴적 결과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숲을 하나 망치는 것은 야생 동물의 거주지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숲의 파괴와 더불어 물, 토양, 대기의 질은 형편 없이 저하되고, 결국 이것은 인간의 거주 환경마저 파괴하는 것이다.
② 둘째, 우리는 상상력의 도움을 얻어 우리의 사는 지역 사회나 국가에만 집착하지 말고 전 지구를 염두에 두는 사고 방식 [global thinking]을 개발해야 한다. 중국의 공업화가 한국에 황사 현상을 일으키고, 다국적 기업의 횡포가 저개발국가의 자연 환경을 황폐시키는가 하면,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지나친 열량 소모가 지구 온난화에 기여하는 현실을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환경 문제와 관련해서도 온 세상을 품어야 한다.
③ 셋째, 우리의 상상력은 우리의 후손이 물려받을(지도 모르는) 피폐한 자연 환경 때문에 거룩한 자극을 받아야 한다. 생태계의 충만함과 자연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보장되어야 한다.
④ 넷째,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 피조물의 탄식(롬 8:22)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멸종되어 가는 동식물의 부르짖음과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는 왜가리 떼의 슬픈 날갯짓과 사육․실험․밀엽 등의 용도 때문에 유린 당하는 동물들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개발과 보전의 문제는 이미 우리가 사치스럽게 선택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과거의 잘못이, 또 현 생태계의 위기가 우리를 보전의 당위성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