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쇼까왕이 룸비니에 세운 석주 “위대한 분의 탄생에 경배”기록 마을에는 조세 면제 등 예우도 악룡으로 묘사된 외도에게 파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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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비니에 세운 아쇼까왕 석주. 석주에는 “위대한 분의 탄생을 경배드린다”라고 새겨 있다. 아쇼까왕의 불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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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까왕 룸비니에 4개의 스투파, 석주 조성
답사일행을 태운 버스가 인도에서 네팔로 건너가는 국경 도시인 소나울리(Sonauli)에서 멈춘다. 오후 4시 55분이다. 네팔 정부의 입국허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급행료를 지불했는데 지금은 1시간 정도만 기다리면 통과된다고 한다. 국경 도시답게 상점이 즐비하다. 주로 네팔의 보따리장사꾼들이 인도의 물품들을 사가는 모양이다.
국경을 통과하고 나니 날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다. 예약한 숙소는 네팔 쪽에 있다. 네팔 거리에도 예전과 다르게 숙박업소들이 많다. 룸비니를 찾는 순례자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증거다.
아쇼까왕은 재위 20년에 룸비니를 순례했다고 한다. 재위 10년에 부처님 성도지인 보드가야부터 순례를 시작하여 10년 만에 부처님 탄생지인 룸비니를 찾은 셈이었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 룸비니의 아쇼까왕 석주 위치와 상태를 기록하고 있다.
‘사천왕이 태자를 안았던 스투파 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큰 돌기둥이 있다. 위에는 마상(馬像)이 만들어져 있는데 아쇼까왕이 세운 것이다. 나중에 악룡의 벼락같은 큰소리에 그 기둥은 가운데쯤에서 부러져 땅으로 넘어졌다.’
악룡에 의해 석주가 부러졌다는 것인데 외도를 악룡으로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벼락에 맞아 파괴됐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은 것이다. 아쇼까왕이 룸비니를 찾아와 부처님의 탄생을 경배하여 4개의 스투파와 석주를 조성했다고 하는 기록을 보면 당시 룸비니 지역은 제법 큰 마을이 있었던 것 같다. 스투파와 석주는 상당한 인력과 자금, 그리고 기술이 동원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그러나 룸비니는 12세기 전후로 번성했던 네팔의 나가(Naga)왕조 이후 역사의 저편으로 차츰 실종해 버린다. 마을은 사라지고 울창한 사라나무들이 룸비니를 감춰버렸던 것이다. 아쇼까왕이 조성한 스투파나 석주도 숲속에 방치돼 오다가 그것들이 발견된 때는 19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독일의 고고학자 휘러가 1896년에 룸비니를 지역을 탐사하다가 스투파와 승원 터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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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부인사원과 싯다르타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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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아왕조 사리용기 발굴된 마야부인사원
룸비니의 날씨도 인도 북부 비하르주와 대동소이하다. 낮과 밤의 일교차 때문에 아침 한때는 안개의 시간이다. 부처님이 태어난 땅이어서인지 룸비니 안개는 왠지 포근하다. 어머니의 품처럼 모성애가 느껴진다. 답사일행은 한국절인 대성석가사로 먼저 가 참배한다. 절은 5년 전에 하룻밤 머문 적이 있어 낯설지가 않다. 당시에는 법당의 골조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참배할 수 있을 정도로 마무리돼 가고 있는 느낌이다.
답사일행은 법당에 들어 삼배하고 룸비니 참배의미를 되새겨본다.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나신 의미가 무엇인지를 화두 삼아 명상해 보는 것이다. 현장은 부처님이 탄생하시는 모습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부축도 받지 않고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간 다음에 스스로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도다.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생은 다했다. 이것이 최후의 생이며 앞으로는 윤회전생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다.’
<본생경>에는 부처님의 원력까지 나타낸 탄생게가 보인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엄하도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나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
일행은 석가사 스님이 차를 권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룸비니를 참배하고 싶어 서두른다. 안개는 여전히 대지의 입김처럼 일행을 감싸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움직인 순례자들이 안개 속에서 유영하듯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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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이 진행 중인 마야부인사원. 사원에서는 마우리아왕조의 사리용기가 발굴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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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일행은 마야부인사원으로 들어가 발굴 현장을 살펴본다. 30여 년 전에 마우리아왕조 때 만든 사리용기가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다른 장소로 옮겨가 보존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네팔의 나가왕조 때, 그러니까 13세기 초에 말라왕이 조성했다는 탄생불 조각은 다행히 한쪽에 전시하고 있다.
마야부인사원 바로 뒤편에 아기부처님을 목욕시켰던 싯다르타연못이 있다. 짐작하건데 현장이 다음과 같이 기록한 연못이 아닐까 싶다.
‘화살샘(箭泉)에서 동북쪽으로 8, 90리가면 룸비니 숲에 이른다. 이곳에는 석종(사캬족)들이 목욕하던 연못이 있다. 물은 맑아 거울과 같고 주변에 갖가지 꽃이 피었으며 그 북쪽으로 스무 걸음 남짓 되는 곳에 무우화수(無憂花樹)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한때는 우물로 사용했던 것도 같다. 법현은 <불국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마야부인이 세욕(洗浴)한 못은 지금도 중승(衆僧)이 항상 그 물을 떠서 마신다.’
무우수 그늘 법당서 수행하는 父子 스님
마침내 일행은 아쇼까왕 석주 앞으로 가 안내하는 인도청년에게 설명을 듣는다. 현재 석주의 높이는 약 7.2미터라고 하며 지면으로부터 3.3미터 지점에 새겨진 명문이 아쇼까왕 비문이라고 한다. 비문은 인도의 옛 글자이며 다섯 줄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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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부인사원 안의 탄생불 조각. 13세기 초 나가왕조 말라왕이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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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피야다시(Piyadasi 아쇼까왕의 다른 이름)왕은 즉위한 지 20년이 지나 친히 이곳을 찾아 참배하였다. 여기에서 부처님이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석주를 세우도록 했다. 이곳에서 위대한 분이 탄생한바 경배키 위한 것이다. 룸비니마을은 조세를 면제하고 생산물의 8분의 1만 징수케 한다.’
싯다르타연못 건너편에 있는 고목이 현장이 말한 무우화수일 것이다. 마야부인이 아기부처님을 아무 고통 없이 낳는 순간 팔을 들어 올려서 잡았던 그 나무이다. 그래서 무우수라고 하는데 네팔 스님들이 그늘에 앉아 수행을 하고 있다. 나는 그들 중에 내가 아는 비베깐난다 스님이 있을까 싶어 가본다. 내가 비베깐난다를 만난 것은 10여 년 전이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부처님은 왜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태어났는가?’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라문은 신의 입에서, 크샤트리아는 옆구리로, 바이샤는 배에서, 수드라는 발바닥에서 태어납니다.”
나중에 힌두 사두에게 더 정확한 얘기를 들어보니 조금 달랐다. 어쨌든 부처님 탄생은 힌두 설화와 결합돼 있었다. 즉 힌두교에서는 브라만은 아트만(영혼)의 입에서 태어나 신의 전달자가 되고, 크샤트리아는 아트만의 팔뚝에서 태어나 모든 이의 보호자가 되며, 바이샤는 아트만의 배에서 태어나 모든 이의 굶주림을 해결해주며, 수드라는 아트만의 발에서 태어나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이의 종복이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를 처음 만난 지 6년 후에 갔을 때도 그는 무우수 아래서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또 다시 만난다면 세 번째인 셈이다. 그런데 섭섭하게도 비베깐난다는 보이지 않고 낯선 수행자들만 앉아 있다. 승복을 입은 수행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비베깐난다를 묻자 그들 무리 중에 끼어 있던 20대 초반의 청년을 소개해 준다.
비베깐난다의 조카인데 아직은 승복을 입지 않은 행자라고 한다. 그 청년이 비베깐난다는 사원 일을 보느라고 오늘은 늦게 나온다고 알려준다. 대신 비베깐난다의 아버지를 소개해 준다. 그러고 보니 그의 아버지도 스님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미 스님이고, 조카까지 스님이 되려고 하는 불심이 깊은 집안이다.
일행은 각자 흩어져 좌선하는 시간을 갖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려니 문득 비베깐난다의 말이 떠오른다.
“저는 행복합니다. 행복한 기운이 가득한 룸비니에서 수행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룸비니의 어원인 ‘룸브’는 고통이란 뜻이라고 한다. 마야부인의 나이 마흔쯤에 부처님이 태어나셨으니 순산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런데도 경전은 고통이 없었다고 하고 마야부인이 잡았던 나무 이름을 무우수라고 하고 있다.
중생계에서는 고통과 행복이 반대개념이지만 분별없이 받아들이는 부처의 경지에서는 하나인 것일까. 나는 또 다시 망상을 피우고 있다. 망상을 피우는 나는 누구인고? |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_()_
나무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