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TV시리즈로 방영되었던 전 16부작 '사랑의 이해'란 드라마를 다운로드받아 주인님과 함께 시청했다. 드라마의 각본은 2016년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이혁진 작가의 동명 소설『사랑의 이해』에서 갖고 왔다 하여, 하릴없는 말장난과 우연의 연속으로 버무려진 우리나라의 기존 드라마와는 다를 거라는 기대감으로 열심히 시청했는데...
원작 소설을 각색한 드라마라서인지 이야기는 시종 변화가 없는 데다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를 눈빛과 일상적인 행동으로 보여준 데따라, 주인님은 일찌감치 재미없는 드라마라고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말았으니...에궁! 아마도 주인님은 공중파 방송국에서 저녁 8시 무렵에 내 보내는 드라마에 중독이 되어도 이만저만 아닌 듯하다 볼 수밖에...
드라마에서 상수와 미경, 종현과 수영으로 짝지워지는 두 쌍의 커플이 좁은 공간인 직장에서 맞닥뜨리는 일들은, 일견 사소하지만 큰일의 단초가 되기도 하니 보는 이들에게는 긴장감을 주고 스트레스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해서리 주인님은 시리즈가 이렇게 갑갑하고 답답한데 이걸 어떻게 16부까지 볼 수 있을 것인지 걱정부터 앞서는 듯했다.
김도언 작가의 장편소설『이토록 사소한 멜랑꼴리』(김도언, 민음사, 2008.) 역시 갑갑한 데선 이혁진 작가의『사랑의 이해』와 견주어 쉬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것이다. 소설에서 등장인물로 나오는 학원강사 선재와 자췻방 주인 소라, 소라의 남편인 군인 영표와 선재의 동생인 군인 선규, 선재와 같은 학원에 소속된 강사 미진과 소라의 동생 호준, 사촌간인 학원 원장 철중과 부원장 철민, 그리고 학원 버스기사 진호...
누구의 것이 더 무겁다랄 것도 없이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 군상들이 벌이는 일들의 무대인 소라의 단층집, 학원 사무실, 모텔 마리아 301호, 철민의 원룸, 그리고 진호네가 사는 다세대주택 반지하 방 역시 한결같이 스산하고 음침하기까지 한데...해서리 문학평론가 정은경은 이들의 반복되는 구차한 삶을 묘사한 이 소설을 일컬어 '구원을 향한 둔주곡(遁走曲)'이라 해석하고 있단다.
등장인물들의 덧없고 무의미한 일상을 보면 소설의 제목처럼, 일견 '사소한' 멜랑꼴리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곳곳에는 희미하나마 구원을 향한 몸부림도 읽을 수 있는 건 사실일 것이다. 나환자로 소록도에 격리된 채 아직도 가슴 깊이 애틋한 그리움을 간직한 선재의 어머니, 파계(破戒)의 형벌을 혼자 짊어지고 고행하는 선재의 아버지를 보면서, 어쩌면 남은 자들 역시 구원(求援)을 향한 의지를 갖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둔주곡(遁走曲)'이라 함은 어느 정도에선 타당하다고 봐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끝까지 구원이니 뭐니 하는 그럴 듯한 희망적인 이야기보다는, 인간세에서 결코 피할 수 없는 윤회(輪廻)의 서사를 칼날같이 번득이는 데서 무섭다. 선재의 부모가 저지른 파계의 형벌이 당대에 그치지 않는 듯한 분위기가 그러하고, 선규가 소라의 남편 영표를 죽인 덕분에 그의 형 선재가 오매불망 그리던 소라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감이 또한 그러하다. 사소한 멜랑꼴리지만 그 결과는 창대할 수 있다는 건 우리네 삶에서도 쉽게 간과할 수 없는 진실이리라.
TV 시리즈물『사랑의 이해』는 회를 거듭하면서 소규모의 은행 지점 안에서 벌어지는 등장 인물들의 애증 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게 되고, 이윽고는 조직으로 표상되는 인간 계층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전체를 어떻게 규정하고 종속시키게 되는가를 겉으로는 잔잔하지만 속으로는 격렬하게 묘사한다. 해서리 처음에 예단했던 느려터진 드라마에 주인님은 차츰 몰입하게 되고 몇 편을 연속해서 보자고 조르기까지 하였다.
드라마의 제10회에서는 주인공 상수와 수영이 은행의 VIP 고객 상갓집을 문상하고 돌아오는 가운데 동해안 정동진 바닷가를 걷다, 상수의 권유에 따라 역사 입구에 있는 피아노를 치는 수영의 모습이 나온다. 얼른 들으면 낯선 멜로디의 음악인 듯한데 수영은 그 곡이 쇼팽의 왈츠 '이별(Etude, op.10. No.3 in E Major)'이란 곡이라 말해 주는데...후세 사람들은 이 음악이 쇼팽과 조르주 상드(George Sand)와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것이라고 그럴듯한 사연을 처억 갖다 붙이긴 했다더만...아무려면 어떠랴, 우린 소설 속의 선재와 소라가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맺길 바라니, 구원을 찾아 아직껏 헤매고 있는 선재의 부모와 먼저 간 부인을 잃은 아픔으로 어둠 속에 누워있는 소라의 아버지가 짊어진 굴레를 훠얼훨 벗어 던지고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