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암집 > 순암선생문집 제20권 > 제문 > 安鼎福
취암산기우제문 丁酉(1777. 正祖1)
천지가 개벽(開闢)함에 산악(山岳)이 열을 지어 우뚝 솟아 제각기 경내 토지를 맡아 백성들의 준칙이 되었으니, 구름과 비를 토하고 들이마셔 화육(化育)을 도움에 있어 진실로 그 신령스러운 공력을 잃어버리면 누가 그 책임을 맡을 것인가.
근자에 하늘의 꾸짖음으로 혹심한 한발이 계속되어 하천과 못이 고갈되고 들판은 붉게 갈라져 농사의 때가 점점 늦어 파종할 시기를 놓쳐버렸으니, 애달픈 우리 백성들이 하늘을 잃고 어디에 의지하리요. 이같이 한탄하는 것을 민망히 여겨 두려움에 몸둘 바를 몰랐으나 하늘에 호소하려 해도 길이 없어 사직(社稷)에 기도하였는데, 약간의 단비로 신령의 혜택을 입었으나 이렇게 한 번 쏟아진 비로 어찌 넉넉하다 하겠습니까. 다시 희생과 폐백을 정돈하여 분주히 여러 산에다 제사를 지냈는바, 상왕산(象王山)과 작성산(鵲城山)에 차례로 제사를 올렸으나 비가 올 뜻은 묘연하고 밝은 해만 여전히 내리쬐고 있으니, 시정(時政)이 마땅함을 잃었는데 신이 어찌 태연하겠습니까.
오직 이 취암산은 또한 신령스러움이 나타났으니 감히 거듭 경건히 고하여 신의 은혜를 바라는 바입니다. 아, 우리 산신령은 하늘이 맡긴 바를 특별히 생각해서 위로는 하느님께 호소하고 아래로는 대지의 산을 살펴서 우레를 맡은 신에게 찾아가고 번개의 신을 지휘하여 시원히 장마비를 내려 기름진 물이 사방으로 흐르게 하소서. 도랑과 논두둑에 물이 도도히 흐르고 모든 곡식들이 잘 자라서 곡식이 부족할 걱정이 없게 되면 이것이 누구의 덕이겠습니까. 작은 정성을 다 바치노니 삼가 와 이르소서.
ⓒ 한국고전번역원 | 이백순 (역) | 1996
鷲巖山祈雨祭文 丁酉
天地開闢。山岳列峙。各主境土。爲民之紀。吐納雲雨。參贊化育。苟失神功。誰任其責。近有天譴。旱魃爲虐。川澤渴涸。田野赤坼。農時漸晩。播種愆期。哀我民斯。失天何依。悶此嗷嗷。跼蹐未寧。籲天無堦。禱于社庭。一犂甘澤。縱蒙神惠。揆此滂沛。豈曰有裕。再整牲幣。奔走羣望。次及象王。次及鵲城。雨意杳然。杲杲如前。時政失宜。神豈恝然。惟此鷲巖。亦著靈異。敢伸虔告。 冀蒙神惠。咨我山靈。特念所付。上訴天門。下鑑后土。撝駕雷公。指揮電母。夬賜霖雨。膏澤旁流。溝塍滔滔。百糓由由。艱食無憂。是誰之德。罄竭微衷。庶幾來格。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9
☛안정복 : 38세 되던 1749년(영조 25) 안정복은 문음(門蔭: 특별한 연줄로 벼슬에 임명되는 일)으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말단 관직인 만령전참봉(萬寧殿參奉, 종9품)을 시작으로 의영고참사(義盈庫奉事, 종8품), 정릉직장(靖陵直長),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종6품)를 거쳐 43세에 이르러 사헌부감찰까지 올랐다. 그러나 부친의 죽음과 본인의 건강 악화로 5년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고향 광주에 내려갔다. 이후 61세까지 18년간 관직과는 거리를 두고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는데, [임관정요](1757. 46세), [동사강목](1759, 48세), [열조통기](1767, 56세) 등 그의 대표 저술은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저술은 아니지만 [이자수어](1753, 42세), [성호사설유편](1762, 51세)과 같은 편집글도 이 시기에 이루어진 저작물들이다.
40~50대를 학문과 저술 활동으로 보낸 안정복은 61세에 다시 관직에 나갔다. 예순이 넘은 그에게 동궁(훗날의 정조)을 가르치는 일이 맡겨졌는데, 이는 학자로서의 학문적 수준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정조가 왕위에 올라서는 고령의 나이인 그에게 목천현감이라는 수령 자리가 주어졌다. 1776년, 그의 나이 예순다섯 살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안정복 [安鼎福] - 자국의 역사를 체계화한 보수주의 실학자 (인물한국사, 정성희, 장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