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목사가 병중에서 아침마다 유튜브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요14-16장을 뚫어지도록 보라 말하기도 하고,
또 평강을 얻었고 다른 이들에게 평강을 얻으라고 말하는데 어떤 상태에서
평강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시는지 그 원리를 설명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 충만하라고 말하기에 어떻게 하면 성령이 임하시는
자리로 옮겨 갈 수 있는지 그 루틴을 설명해 보라고 댓글을 달아보기도 합니다.
그건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는 중인데 겨우 파스칼의
이야기나 우찌무라 간죠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모습이 심히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정도의 목사가 섬기는 교회라면 관상의 기도가 더 다이내믹하고
방언을 비롯한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 훨씬 뭔가 있어 보이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20절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여기의 지혜는 소피아가
아닌 프레신입니다. 이 지혜는 장성한 자의 것이며 성령의 능력에 의한 능동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이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의
경건에 대하여 수고하고 단련하지 말라 그런 것에는 차라리 어린아이가 되라 입니다.
21절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어떠한 소리로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 소리를 통해
하나님이 일을 하셔야 합니다. 만일 그 말에 주의 영과 생명이 함께 하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말 겁니다. 문제는 대다수가 그렇습니다.
22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면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방언은 표적이나 예언은 말씀사역입니다. 그러나 방언을 통역하면 예언과 같아집니다.
문제는 아무리 은사가 좋아도 그 은사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말인 예언이 사람을 살립니다.
24-25절에서 예언의 유익은 책망과 판단으로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므로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시인하게 합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임하셔서 그 말씀이 입술에 있고 마음에 있으므로
마음으로 믿어 의를 얻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롬10:8-10)
26-35절은 그 당시의 모임의 성격을 진술합니다. 온갖 구색은 다 있었습니다.
32절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으므로 혼란과 복잡함을 야기합니다.
34절과 같이 중구난방이 되니 정리가 필요합니다. 그러다가 성직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목회자보다 더 진리를 찾아 유리하며 방황하는
평신도가 더 많아 보입니다. 목회자들은 업무수행에 매달려 영적고민을
덜 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소견대로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제재를 받아야죠.
34-35절에 모든 성도 곧 성직자 그룹과 여자, 그들의 남편을 나눕니다.
그 당시의 교회 수준으로 볼 때에 불가피한 처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6절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어느 시대에나 내가 은사를 받았다고 나서는 일로 시비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 마음대로 받을 수 있느냐 하고 반문하는 겁니다.
37절 만일 ‘선지자 혹 신령한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 편지
내용을 주의 명령 곧 주의 입장을 전달하는 줄을 알아먹으라고 말합니다.
38절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만약 알지 못하면 아직 주의 입장이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지는 일입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형편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이 만개된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언제나처럼 말하지만 한국교회를 비롯한 전 세계교회는 전해지는 복음이 문제입니다.
고린도교회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젖만 먹는 어린아이들의 말이 대부분입니다.
39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방언도 금하지 말라 다만 더 나은 차원을 추구하라고 권면을 합니다.
이를테면 삼위하나님 안에 발견이 된 자가 방언이라면 절차와 방법과 원리를
따르지 않고 영으로 바로 하나님께 올라가는 기도를 할 수가 있을 테지요. 그러나 혼이
내 영을 따르려면 죄인으로 출발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여 진리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단계를 스스로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주의 영과 생명의 능력을 입은 말로서 그 절차를 설명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예언이 중요하지만 개인의 비밀을 자신 속에 보존하기 위한 방언도 필요합니다.
40절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적당과 질서를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적당은 단정한 것 품위입니다.
이치에 합당한 것이며 규모가 있는 것입니다(단정 살전4:12)
질서는 하나님의 오더를 받아 행하라는 뜻입니다. 히5,7장의 반차라는 말은 차서
곧 하나님의 오더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오더에 의해 사역을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에 직분도 있고 조직도 있습니다. 이것을 넘어가면 문제가 생기고
그렇다고 조직과 제도와 교리로 눌러놓으면 개인의 기능이 저하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은 교단이나 교권의 권위로 은사나 표적에 머물고 있는 이들을 누르고 있습니다.
교회가 월하의 공동묘지 같으면 잡음이 없어 좋겠지만 생명의 역사와 자람이 없습니다.
어차피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에 차라리 시끄러운 신생아실이 낫습니다.
첫댓글 오늘은 모처럼 따뜻한 봄을 만끽했습니다. 병상에서 유트브로 아침마다 설교하신 그 분이나, 인천에 있는 정ㅇ 목사님..
그런데요. 목사님!
좀 이해가 안가는게... 그렇케 미국 존 맥아더 목사님 설교를 자주 경청해도 교수 그 이상을 못 벗어나니...
정말 신기합니다...😝
교육학이 무섭습니다. 십자가의 도의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니체의 아모르파티나 교육으로 인간을 변화 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나 거기가 거깁니다.
아무리 나아가도 지성적인 경건을 벗어날 수가 없기에 감성적 열광주의와 다투고 있는 겁니다.
아멘!
할렐루야 주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