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7.
운 좋은 날
빵은 간식이다. 주식으로 삼기에는 아직은 조금 부담스럽지만, 그 일들이 자꾸만 잦아진다. 지역마다 빵 맛집이 있다. 대흥사 가는 길에 이스트 없이 통밀천연발효종으로 발효하여 사워도 빵을 주로 만드는 곳이 있다. 캄파뉴, 포카치아, 치아바타, 젝스콘브롯 등의 생소한 이름의 빵들이 제법 유명하다. 딱 하루, 토요일만 가게 문을 열기에 인연이 닿지 않아 늘 벼르는 중이었다. 피그말리온 효과가 떠오른다. 긍정적인 기대나 관심이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했던가. 마음먹은 지 100여 일 만에 로즈마리치즈포카치아 한 덩이와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게 참 맛있다.
필연이란 게 있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하늘이 알고 정했다는 느낌이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게 순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난 일들을 곰곰이 따져보면 세상사가 항시 내 편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등진 적도 없었다. 불리할 때마다 남을 탓한 내가 어리석었을 뿐이지.
숨은 턱까지 차고 가파른 오르막은 끝이 없다. 그나마 아는 길이라 속도를 조절하며 쉬었다 걷기를 반복한다. 연이틀 줄기차게 내린 봄비 덕분에 작은 계곡마다 물 흐르는 소리가 곱다. 윗삼거리에서 북미륵암으로 가는 샛길은 바위투성이다. 물기 먹은 낙엽길은 푹 빠지고 젖은 바위는 생각보다 매우 미끄럽다.
국보 제308호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다. 어깨가 넓어 무사의 힘이 느껴진다. 귀가 큼직하고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다. 얼굴이 둥글넓적하여 살이 찐 형상이며 입을 굳게 다물어 근엄한 표정이다. 공양천인상이 모서리마다 새겨져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여래좌상은 용화전 안에 모셔져 있다. 여래좌상의 왼쪽 아래 천인상의 모습에서 내 간절함이 보인다. 미륵의 세계다. 소원하면 모두 이루어주실 양으로 두 눈에 힘주어 내려보고 계신다.
스님의 목탁 소리는 장엄하다. 용화전 안은 독경 소리와 내 맥박의 진동만 존재한다. 행여 끝이 나려나 기다려도 멈춤이 없다. 용화전 천장에 소원등 하나 달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스님에게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는다. 오늘만 날인가. 사월 초파일 전에 다시 오겠다는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5주 만에 다시 찾아왔다.
세상이 연두연두하다. 연한 새잎이 하늘 아래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북미륵암 주변은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을 잊은 듯이 조용하다. 인적이 없다. 백구조차도 방문객을 쳐다보기만 한다. 요사채나 용화전에는 스님의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합장하고 삼배하기를 반복하며 마음에 담아둔 소원을 빌어본다. 간절하게 부탁을 전하기도 하고 때로는 고집을 피워보기도 한다. 미륵부처님은 아무런 대답도 없다. 소원등을 달고 싶은데 오늘도 방법이 없다. 두리번거리는데 소원지 한 장이 보인다. 나를 위한 소원지라는 생각이 든다. 소원을 적고 사다리를 옮겨 비어있는 등에 달았다. 편법이다.
족히 한 시간을 걸어 대흥사 종무소 미닫이문을 두드린다. 반갑게 맞이하는 보살에게 “북미륵암에 등을 달고 싶은데…”라고 말을 건넨다. 상냥하고 매우 친절하다. 휴대폰을 들고 통화를 시도하다 문밖을 지나치는 스님을 소리쳐 부른다. “도신 스님!” 그렇게도 뵙고 싶었던 스님의 얼굴이다. 여차저차 지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북미륵암 용화전에 등을 달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다. 스님의 부드러운 낯빛이 친근하다. 종무소 보살이 환하게 웃는다. 우린 공통점이 두 개나 있다. 해남살이 중이며 대구 무태에서 온 동네 사람이다.
만사형통이라 했다. 간절하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더니 모든 게 그렇게 되었다. 빵집에 들렀고 빵도 샀다. 도신 스님은 사진을 찍어 내게 문자로 보냈다. 미륵부처님 시야에 벗어나지 않게 가족소원등을 달았다. 하늘은 파랗고 봄바람은 부드럽다.
첫댓글 이보다 더 행복한 날은 없다 그쟈
맨날 이럴 수는 없지.
그러나 가끔은 숨통 트이듯이 모든 게 내편일 때가 있으면 행복하지.
동생은...
시도 때도 없이 허구한 날 숨통이 쉴새 없이 트여라. 내가 그리 되도록 소원하마.
감사합니다♡♡
뭔 말씀을... 우린 다 행복해야 하고 또 행복을 요구할만큼 열심히 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