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에 대해서..
진주성(晋州城)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과 본성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
사적 제118호, 촉석성 이라고도 한다. 남강을 끼고 있는 석축산성으로 둘레가 약4km이다. 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고 하륜의 성문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인다. 구조는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수문, 암문,장대,포루와 촉석루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진주는 고려 말기부터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 방어시설의 보완이 시급했는데 그후 성벽 축조가 시작되어 1437년 (세종19)에 성을 새로 쌓아 완성시켰다.이 때에 3개의 못물을 성 북쪽에 모이게 하고, 진주는 아군 군량의 보급지라 할 수있는 전라도로 가는 길목이므로 이 곳을 빼앗기게 되면 전라도 지방을 방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진주성만은 굳게 뭉쳐 왜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별이며 성을 지켰다.
진주 대첩
1592년 8월에 진주목사로 취임한 김시민은 9월 고성과 창원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내쫓았다, 그러자 김해성에 있던 일본 장수인 가토.하세가와등은 9월24일 2만여 명의 대 병력을 거느리고 경상우도의 조선 주력군이 있는 진주성으로향했다. 일본군의 진격소식을 들은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은 김시민을 독려하고, 곤양군수 이광약과 진주판관
성수경 ,전만호, 최덕량등과 협력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김시민과 이광약은 3,800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방어작전을세웠다. 10월6일 일본대군 3개 중대가 진을 치자 이날 저녁 의병장 곽재우는 심대승으로 하여금 의병 200여 명을거느리고 향교 뒷산에서 호각을 불며 불을 지피게 하여 대군의 구원병이 온 것처럼 꾸몄다. 8일 일본군이 대나무다리로기어오르며 3층의 산대에 바퀴를 달아 공격해오자, 김시민은 현자포를 쏘아 산대를 파괴하고 화약불을 성 밖으로 던져소나무 언덕을 불지르며 올라오는 적을 쳐서 떨어뜨렸다. 이 날 진주 복병장 정유경 휘하의 구원병 500병이 왔고, 9일 김준민,정기룡,조경형이 2,000여 명의 일본군을 패퇴시켰다. 또한 의병장 최경회와 임계영도 구원병 2,000 명 거느리고 왔다. 이튼날 새벽에 일본군이 동문과 북문으로 쳐들어와 김시민이 이마에 적의 총탄을 맞아 의식을 잃자,
대신 이광약이 전투를 지휘하여 적을 막아냈다., 적진의 영막에서 불길이 일어나서 일본군은 퇴각했다, 이 싸움은 소수의 병력으로 일본군의 대병력을 물리친 대승으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부상당한 김시민은 곧 죽었다.
진주대첩은 우리조상 학봉 김성일 할배께서 진주성을 사수하기위해 여러 의병장들 과 수시로 정보을 주고받고 해서 진주대첩을 이루었다.
첫댓글 촉석루에 가보면 학봉할배가 전장에 도착하여 지으신 진주삼장시가 있다 일배소지 장강수 / 장강지수류도도 / 파불갈 혼불사 뜻은 한잔술에 흐르는 강물처다보니 강물은 도도하게 흐르는데 파도치는강물 마르지 않듯이 우리도 혼이라도 죽지마세 라고전장의 도착하시여 그때의 비참한 광경을 보시고 두장수들과 즉석에서 시를 지어 독려를 하신 詩 가있다 위자료 잘읽었다 부지런히 책을 읽어야한다
네 고맙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