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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실 따기
오늘 매실을 땄습니다.
봄을 알리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줬던 매화나무는, 또 고맙게도... 나에게 이런 열매까지를 선사해 주었던 겁니다.
엊그제 마을 반장이,
"서둘러 매실을 따야지, 그렇지 않으면... 벌레가 다 먹을 것 같은데요?" 하더군요.
여태까지 나는,
'주변의 소중한 몇몇 분들에게, 매실을 따서 보내야지......' 하고, 잔뜩, 매실에 대한 기대만 가지고 있었는데, 벌레 좋은 일만 시킬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실행에 들어갔는데,
우선 매화나무에 올라 위를 보니, 매실이... 수도 없이 열려 있었습니다.
매화 꽃 한 송이에 열매 하나씩 열렸다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었습니다. 이른 봄에, 꽃이 엄청나게 많이 피었었거든요......
이 '夢想?'의 매실은, 집이 세워질 때 심어... 그 햇수가 37 년이나 된다 듯, 나무도 크고 실하거든요.
원래 매실은 밑에서 장대로 털어 딴다고 하던데,
이 매실은, 집 뒤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서... 밭에 올라가면, 선 채로 손만 뻗어도 웬만큼은 딸 수 있고, 지붕 쪽으로 가지가 많이 뻗어있는데, 그 쪽의 열매는 지붕에 올라가서 따면 그리 어렵지 않게 딸 수 있어서 좋았답니다.
그래서 손쉽게 딸 수 있는 것은, 친구네를 위해 남겨두었고(일요일에 친구 가족도 매실을 따러 온다고 했기 때문에),
나는, 낡아서 위험할 것 같은 잿빛 스레트 지붕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비가 갠 뒤라서(그리고 지붕의 골 사이엔 해 묵은 이물질이 쌓여있어서) 상당히 미끈거렸고, 불안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아무튼, 나는 엉덩이로 기어오르듯... 나무 한 가지 부분의 아래 지붕에 앉았는데요,
편하게 앉아서 따는 매실......
따다 보니, 한 가지에서만도... 두 손을 모아 담아야할 정도로 수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매실을 따다가 밑으로 떨어뜨린 적잖은 매실은, 또... 경사진 지붕을 타고 또르르 굴러 아래로 떨어져 내리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인지 격이 낑낑대기에,
"조용히 해라!"하고 소릴 친 다음, 그 쪽 지붕에다(그 쪽까지는 가지가 뻗어있지 않아) 저절로 떨어지는 매실 두어 개를 놓았더니, 굴러서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드라구요.
그러다 보니, 격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매실을 이상하게 여기다가도... 내 냄새를 맡고는, 그 떨어진 매실을 가지고 혼자서 노는 것 같더라구요.
그러다가 얼마 후 정미가 지나가기에 불렀더니,
그 아이는 집 아래쪽만 쳐다보며 나를 찾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 하고, 몇 번을 얘기해도... 아이는 둘레둘레 집 아래쪽만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허기야 나뭇잎에 반쯤은 가려졌겠고, 또 지붕 위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쉽게 눈에 띄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지붕 위!" 하고 소리를 지르는 등,
나는 마치 애하고 숨바꼭질하는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매화는,
이른 봄에 꽃을 피워, 화사한 분위기는 물론 그윽한 고 품격의 향기까지 선사하며 내 기분을 한껏 띄워놓더니,
이렇게 열매까지 선물해 주니... '참 좋은 나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도, 크나큰 행운일 거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이 걸 따서 군산의 형님 집과, 서울의 누님네도 주고, 서울의 구 병태와 서 창모 등의 지인들에게도 보내고, 김 선생님 댁에도 갖다드리고......
'나머지로는 술을 담궈, 소중한 사람들이 오면... 매실주로 대접하리라......' 하는, 마음은 풍요롭기만 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땄던 영근 매실은, 널찍하고 큰 플라스틱 통에 다글다글 채워져갔고,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지붕에 앉아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며 매실을 땄습니다.
근데, 매실이 그릇에 거의 채워질 즈음에야,
'아, 이런 상황도... 쉬 느낄 수 없는(어쩌면 다음엔 맛 볼 수 없는(내년에는 여기에 살지 않을 테니까)) 행복일 것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아, 지붕에 올라 열매를 따는 마음.
그리고 난생 처음 따보는 매실......
그러다가 언뜻 반대편을 보니, 호수가 펼쳐지는 풍경이 시원하기만 했습니다.
아무래도 평지보다는 높은 곳에 앉아 있다 보니, 시야가 더 트여... 늘 보던 풍경도 새로워 보이드라구요.
게다가, 웬 뻐꾹새는 그리도 울어대는지......
내 주위의 풍경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지면서는,
아, 나는 마치 '신선(神仙)'이 된 듯(?)한 기분이기도 했답니다.
5 . 30
*
너무 좋은 날씨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시원한 바람......
만사를 제쳐두고 나는 배를 호수에 띄웠다.
아침 이른 시간이었지만 날이 길어져서인지 해가 뜬지는 상당히 오랜 뒤였다.
호수 건너에 가서 배를 묶어놓고, 마을의 사진을 찍고 하모니카 몇 곡을 불었다.
그리고 다시 배를 타고 절벽 가까이로 가면서 좋은 날씨를 즐겼다.
마을 한 쪽 구석에서는 반장이 벌을 기다리느라, 벌통 주위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보여... 그 쪽으로 노를 저어 둔덕에 배를 대놓고는, 무덤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무덤 주위에는 이름 모를 보라 빛 야생화가 무리져 피어있었고, 벚나무에는 점점이 까만 버찌가 익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떨어져버린 것도 제법 되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약간의 버찌를 땄다. 비록 적은 양이지만 손에 들 수가 없어서 옆에 있던 칡 잎 하나를 따서 가지런히 모은 다음 버찌를 담았다.
작은 병에라도 넣어 술을 담고 싶어서였다.
점심을 해 먹고는 오늘도 바로 지붕으로 올라갔다.
아직도 따야 할 매실은 많이 남아있으니까.
그렇게 서너 시간을 지붕에서 매실을 땄는데, 오늘은 날이 좋아... 햇볕이 비칠 때는 뜨겁기까지 했다.
'근데, 매실을 따 놓기는 했는데, 어떻게 부친다지? 차가 없으니, 어떻게 전주까지 운반하고, 또 어디다 포장해서 부친다지? 따는 것도 일이지만, 택배로 부치는 것도 번거로울 것만 같은데......'
마루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바로 끊어지는 것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아니면, 잘 못 걸려온 전화인가?'
요즘 들어, 잘 못 걸려온 전화가 잦다.
그러고 보니, 토요일인데... 정말, 아무런 전화도 없다.
뭔가 허전한 것 같기도 하다.
오늘도 땅거미가 지는데......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싶다.
요즘 들어, 가끔 술 생각이 난다.
내 건강이 좋아졌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술을 먹어도 된다고 자신하는 것인가......
어쨌거나, 난 지금 그저 술을 마시고 싶다.
5 . 31
기로가 꿈에서 깨어 일어나 보니, 방바닥이 식어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가 싶었는데, 조금 전에 꾸었던 꿈이 머리에 스쳤다.
좋지 않은 꿈이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도 바깥의 가로등이 창호지 문 사이로 불그스름하게 투영되어, 작업방 벽에 붙어있던 그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그림을 보면서야 기로는 조금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그저께 군불을 지핀 것이지만, 아랫목은 아직 그나마 온기가 남아 있기는 했다. 어젯밤에 그저 따끈한 방에 눕고 싶어서 누웠던 것이,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이고, 그러다 얼마 뒤에 일어나 방의 불을 끄고 다시 누웠던 것이, 작업방에서 자게 되었던 것이다.
일어나 안방으로 가 불을 켜니, 세 시 반이었다.
컴퓨터를 키고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기로 개인 홈페이지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렇지만 어제 한일전 축구에서는 후반 41분에 안정환의 골이 터져 1 : 0 으로 이겼다는 뉴스가 있었다.
기로의 요즘 생활이, 그 좋아하는 축구마저 TV로 직접 보지도 않고, 다음 날에야 그 결과를 알고 넘어가는 식이었다.
아침에 밖으로 나온 상범은 토마토 가지를 지줏대에 묶어주고, 고추에도 지줏대를 박아 놓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흙작업을 하려고 보니, 석고 떠 놓은 것이 문짝을 두 개만 만들어서, 흙으로 다시 뜨는 일이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를 것 같았다.
게다가 이 마을 호숫가에서 떠온 흙을 사용했는데, 점력이 약한 것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당분간은 흙작업을 하려고 했는데, 내 뜻대로 돼주질 않네......' 하면서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마루에 앉아 있는데,
상범 부부가 도착을 했다. 매실을 따러 왔던 것이다.
그런데 매실을 빨리 따지 않으면 버릴 거라는 사실을 알자, 상범은 갑작스럽게 전화를 걸어... 전주의 조카 세 명을 불렀고,
그러다 보니 매화나무에 다섯이나 들어붙어 매실을 따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활달한 성격의 상범 처는,
"아이구! 남자 사는 집이 그렇지 뭐..." 하더니, 통나무집의 대청소를 해 주었다.
물론 기로 역시 지저분하게 해 놓고 사는 사람은 아닌데, 그래도 청소를 해 주니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기로도 매실을 웬만큼 따고 내려와 보니, 집안이 말끔해져 있어서...
"역시, 집안이 여자의 손이 가니 다르군요......" 하면서 상범 처에게 고맙다는 인사까지를 했다.
그러자 상범 처는 환하게 웃었다.
상범 처는 조카들의 차로 전주로 돌아갔고,
기로는 친구 상범에게 부탁을 하여, 차를 빌어 타고... 정읍의 김 선생님 댁에 매실 한 자루를 갖다 드리고는, 바로 돌아 왔다.
# 라마털 양말
오늘 미국인 친구 S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가 전화를 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는데(그는 늘 메일로 연락을 취합니다.), 내 메일에 이상이 있나보다는 것이었습니다. 메일을 보내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요 며칠... 내 메일에 이상이 있는 건지, 메일 회사 자체에 이상이 있는 건지, 내 메일박스가 안 뜨고 있거든요.
그런 얘기를 했더니, 날더러 다른 메일 주소는 있냐고 물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내가 사는 이 곳 주소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일일이 전화에 대고 스펠링을 가르쳐줄 수도 없다 보니, 그는 날더러... 자기에게 내 주소를 적어 메일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데?" 하자,
"장, 당신에게 양말 한 켤레를 보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양말?" 하자,
그는 자기 어머니 얘기를 꺼냈습니다.
아, 나는... 순간적으로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지난번에 가족과 함께 여기로 놀러왔을 때, 얘기 끝에... 자기가 신고 있는 양말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장, 이 양말이... 아주 특별한 거거든요? 라마 털로 짠..." 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회원여러분께서는 '라마'라는 동물을 아십니까?
일반적으론 사람들이 잘 모르는 동물입니다만, 남아메리카에 사는 야생 낙타로...
나는 S의 말을 듣자마자 뭔가 지피는 것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내가 그의 영어회화 수강생이었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요,
하루는 수업시간에,
사람들의 '취미'와 '기호'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하면서... 동물 애호가에 대한 얘기도 나왔었는데,
S의 어머니는 유독 '라마(Lama : 남 아메리카 산지에 사는 조금 이상한 모습의 낙타)'를 좋아해서 본인이 직접 기르기까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아무래도 수업시간이라 조금 조심스럽긴 했지만... 우리 수강생 몇 명은, S의 얘기를 들으면서는... 의아하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습니다.
도무지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미국이란 나라가 다양성과 자유를 표방하는 나라라고는 하지만, 희한하게도 생김새가 이상한 낙타를 애완 동물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에... 게다가 그의 어머니는 라마에 거의 광적이라니......
그런데, 그런 말을 하던 S 자신도, 마치 남 일처럼 웃어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야, 서로가 얼굴을 바라보며 박장대소를 할 수밖에요.
아무튼 그의 어머니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라마를 키우는 조금 이상한(?) 노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옛날 수업시간에 S가 했던 말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신고 있던 양말을 보여주면서, 바로 '라마털 양말'이라니...
그래서 내가,
"당신 어머니의?" 라고 물으니, 그는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웃는 겁니다.
바로 그렇다는 얘기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와 하하하 - - -" 나도 맞장구치며 큰 소리로 웃었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의 어머니는, 라마의 털을 깎아... 정성껏 모아 워싱턴엔가 있다는 양말을 짜주는 공장에 부탁하여(미국에는 라마 털로 그런 일을 맡아 해주는 아주 특별한 직종이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양말을 짰고,
한국에 있는 아들(S)에게까지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라마'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웃음으로 시작되었던 일이, 이제는 그 단어만 들먹여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다 웃어젖히는 것입니다.(그 수업시간 뒤에도 우리는 몇 번인가 '라마' 얘기를 했는데, 그럴 때마다, 큰 소리를 내며 웃곤 했었거든요.)
그런데 결국엔, 이렇게 나에게 라마 양말을 보내겠다고 하니...
매우 뜻밖이었고, 또 재미도 있어서... 오늘도 큰 소리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아마 그는 그 동안에, 나에게 그러듯이... 자기 어머니께도 메일을 보내면서 내 얘기를 했던가 봅니다.
그리고 여기 시골에 놀러 와서 찍었던 사진 같은 것도 메일로 어머니께 보냈을 거구요.
그러니, 그의 어머니도 나를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고... 어쩌면 자신 아들의 한국친구에게도 양말 한 켤레를 선물하고 싶으셨던가 봅니다.
근데, 내가 무슨 라마 양말이랍니까?
"하- 하- 하-"
전화를 받으면서도, 끊고 나서도...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웃음이 절로 나니까요.
웃기지 않습니까?
내 팔자에 무슨 라마 양말까지 신게 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기도 하지만 신기하기까지 하니......
그 양말을 신으면, 혹시... 내 발도 웃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내 앞에 배달될 양말 한 켤레.
두고두고 웃을 일이 또 하나 생겼습니다. 그려......
6 . 1
일교차가 큰 날씨였다.
아침과 밤에는 쌀쌀하고 낮으론 더워서, 축 늘어지는 날이 요 며칠 지속되고 있었다.
감꽃이 피는가 싶더니 지고 있고, 다홍색의 석류꽃도 피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숲가엔 뱀딸기도 빨갛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즈음이다.
기로는 오늘 일부러 강진 5일장에 갔다.
반장이 전주까지 갈 필요 없이 강진 장에 가면 택배 부치는 곳이 있다고 알려줬기 때문에,
이미 따 놓은 매실을... 서울에 택배로 부치기 위해서였다.
그가 여태까지 땄던 몇 자루의 매실을, 서울의 누님과 '구 병태' 그리고 '서 창모'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시골에 사는데,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지......' 하면서 기로 스스로 돈을 들여 부치는 거지만, 마음은 흡족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승차권 판매원에게 물으니, 바로 옆 철물점에서 택배를 취급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기로가 그 곳에 가보니, 다른 사람들도 택배로 보내기 위해 이미 포장까지 끝낸 몇 개의 상자엔 매실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생각보다는 쉽게 택배로 부칠 수 있었고, 혹시 다음에 다른 걸 부칠 경우엔 택배지소에 전화를 걸면 차가 집까지 온다는 얘길 듣고, 명함 하나를 얻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장에 갔다고 해도,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장이래 봐야 5 분이면 다 도는 곳이라..
밀짚모자가 눈에 띄기에 하나 샀고,
아침을 부실하게 먹고 나왔기 때문인지 배가 출출해서, 기로는 장에 나온 김에 오늘은 식당에 들어가 팥죽을 사 먹었다. 오전인데도 식당 안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칼국수에 물국수를 먹거나 술을 마시는 노인들도 있었다.
팥죽이라는 것이 칼로 자른 밀가루 반죽을 넣은 ‘팥칼국수’인 셈이었지만, 시골 맛은 났다.
"배추 한 포기에 500 원!" 이라는 마이크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커다란 배추를 실은 트럭이었다.
'저렇게 큰 배추 한 포기가 500 원밖에 안 간다니, 그렇다면 농사를 지은 사람은 상인에게 얼마를 받고 팔았단 말인가. 그러니, 농부들이 농사지을 기분이 나겠는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 것도 기로가 시골에 살기 때문에 관심이 갔던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번에 찐빵을 팔던 할머니도 안 보였고,
'혹시 앵두 같은 과일을 (사다가 술을 담고 싶어서 ) 파는 사람이 있나?' 하고 장을 다 돌아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시골 장이었지만, 시골사람들이 손수 짓거나 따다가 파는 채소 보다는 트럭을 가진 상인들이 파는 야채가 주를 이루고 있어서... 뭔가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이런 장에 오면, 조금 옛 스런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세상이 자꾸만 변해 가는 것 같아서... 기로는 어쩐지 안타까운 기분만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탔던 직행버스 기사는 참 친절했다.
원래 직행버스는 '막은댐'에 서질 않고 통과하는데, 시내버스를 기다리기가 너무 지겨워서... 강진에서 직행버스가 서기에 차라리 운암대교에서 내려 걸어갈 것을 각오하며 버스를 탔던 버스였는데,
기사에게 혹시 물어보기라도 하자며,
"저, 죄송하지만... '막은댐'에서 버스를 세워줄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더니,
"그래드리죠." 하면서, '운암 대교'를 지나 막은댐의 정확한 위치에서 기로른 내려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중히 고개를 숙여서까지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는,
고생하지 않고 마을까지 걸어올 수 있었다.
겨우 세 시간 정도 만에 장에 갔다 집에 돌아왔는데, 주인을 보고 격은 펄펄뛰고 난리였다.
"그래, 너라도 나를 반겨주는구나. 몸부림을 치면서까지......" 하고, 기로는 개의 목덜미를 긁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그런데 마루에 걸터앉고 보니, 강진의 우체국에 가는 길에 서울의 L씨에게 부치려고 아침에 준비해가지고 갔던, 여태까지 '夢想?'에서 찍은 필름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뭐에 정신이 팔려(허기야 매실 부치는 것 때문에 다른 건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런 것도 다 잊고 멍청히 돌아다니기만 했을까?' 하고 기로는 자신을 탓했다.
그런데 점심 무렵에 마을에 들른 우체부에게 그 얘길 하니, 앞으로는 우체국에 갈 일이 있으면... 웬만한 건 모두 자기에게 달라며, 자기가 필름을 알아서 부쳐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방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기로는 전주의 우체국에 가는 번거로움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몇 달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 역시... 한 가지 한 가지를 배워가며, 시골의 삶을 살아가는 거다......' 하고 흙작업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흙의 점력이 떨어지는 건 물론 밑그림의 준비까지가 소홀해서인지, 기로가 맘 먹은 대로 작품이 나와주질 않았다.
'근데, 이번에 하는 흙 작업은... 끝까지 나를 괴롭히기만 하는 것 같네!' 하면서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작업을 중단해버렸다.
그리곤 바람도 쐴겸, 반장네 뒤 무덤가로 버찌를 따러 갔다.
오늘도 까맣게 익은 버찌는 보였다. 그렇지만 높은 가지에 있는 건 손도 대지 못한 채 밑에 있는 가지에 달린 것들만을 따가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제 기로의 형이 올 때 부탁해서 사왔던 소주에다, 지난번에 따서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던 버찌와 합한 뒤 '夢想?' 뒤 언덕에 있던 앵두나무에서 딴 앵두 조금을 같이 넣고 소주를 부어놓았다.
''앵두 버찌 술'인가?' 하고 피식 웃었던 기로는,
'그래, 시골에 사는데...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지......' 하면서 흐뭇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