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일체 용어와 문장
전래어든 신어든 외래어든, 문장은 일체(一切)의 언어로 짜지는 직물이다. 언어에 따라 비단이 되고, 인조견이 되고, 무명이 되고 한다. 언어에 대한 인식과 세련이 없이는 비단 문장을 짜지 못할 것이다. 언어에 대한 인식으로는 무엇보다 먼저 유일어(唯一語)의 존재를 의식해야 한다.
(1) 유일어를 찾을 것
“한 가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 한 플로베르의 말은 너무나 유명하거니와 그에게서 배운 모빠쌍도
우리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데는 한 말밖에 없다. 그것을 살리기 위해선 한 동사밖에 없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선 한 형용사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한 말, 그 한 동사, 그 한 형용사를 찾아내야 한다. 그 찾는 곤란을 피하고 아무런 말이나 갖다 대용(代用)함으로 만족하거나 비슷한 말로 맞추어버린다든지, 그런 말의 요술을 부려서는 안된다.
하였다. 명사든 동사 형용사든, 오직 한 가지 말, 유일한 말, 다시 없는 말, 그 말은 그 뜻에 가장 적합한 말을 가리킴이다. 가령, 비가
온다는 뜻의 동사에도
비가 온다.
비가 뿌린다.
비가 내린다.
비가 쏟아진다.
비가 퍼붓는다.
가 모두 정도가 다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달이 밝다는 표현에도
달이 밝다.
달이 휘영청-하다.
달이 훤-하다.
달이 환-하다.
가 모두 다르다. 달이 보이고 쨍쨍하게 밝은 데서는 ‘밝다’나 ‘휘영청’인데 그중에도 ‘휘영청’이 더 쨍쨍한 맛이 날 것이요, 달은 보이지 않고 빛만 보이는 데서는 ‘훤―’이나 ‘환인데 그중에도 ’훤‘이라 하면 멀리 보는 맛이요 ’환‘이라 하면 가까이 미닫이나 벽 같은 데 어린 것을 가리키는 맛이다.
토에 있어서도 토씨
한번 죽기로 각오하고서야
한번 죽길 각오했을진댄
이 다르다. 뜻은 한뜻이나 비장한 정도에 차이가 크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 하였으나 대개는 속마음이 외모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무도 쥐를 보고 후덕스럽다고 생각은 아니할 것이요 할미새를 보고 진중하다고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돼지를 소담한 친구라고는 아니할 것이다. 토끼를 보고 방정맞아는 보이지마는 고양이처럼 표독스럽게는 아무리 해도 아니 보이고 수탉은 걸걸은 하지마는 지혜롭게는 아니 보이며 뱀은 그림만 보아도 간특하고 독살스러워 구약(舊約) 작가의 저주(咀呪)를 받은 것이 과연이다-해 보이고 개는 얼른 보기에 험상스럽지마는 간교한 모양은 조금도 없다. 그는 충직하게 생기었다. 말은 깨끗하고 날래지마는 좀 믿음성이 적고 당나귀나 노새는 아무리 보아도 경망꾸러기다. 족제비가 살랑살랑 지나갈 때 아무라도 그 요망스러움을 느낄 것이요 두꺼비가 입을 넓적넓적하고 쭈그리고 앉은 것을 보면 아무가 보아도 능청스럽다.
-이광수의 「우덕송(牛徳頌)」에서
이 글을 보면 한마디의 형용마다 한 가지 동물의 모양, 성질이 눈에 보이듯 선뜻선뜻 나타난다.
수탉은 수탉, 족제비면 족제비다운 제일 적합한 말을 골라 형용했기 때문이다. 만일 “족제비가 살랑살랑 지나갈 때”를 ‘족제비가 설렁설렁 지나갈 때’라 고친다면 그 아래 ‘요망스럽다’는 말을 수긍할 수 없을 것이다. ‘요망스럽다’는 것이 족제비의 성질에 알맞은 말이라면 그 ‘요망스러움’을 살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설렁설렁’보다 ‘살랑살랑’이 더 적합한 형용이다. 이런 경우에 ‘살랑살랑’은 제일 적합한 말, 즉 유일어다.
모빠쌍의 말대로 유일어를 찾는 노력을 피해 아무 말로나 비슷하게 꾸려버리는 것은, 자기가 정말 쓰려던 문장은 아니요 그에 비슷한 문장으로 만족하고 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기가 쓰려던 문장은 끝내 못 쓰고 마는 것이다.
(2) 말을 많이 알아야 할 것
유일어란 그중 골라진 말, 최후로 선택된 말임에 틀림없다. 선택이란 만취일수(萬取一收)를 의미한다. 여럿에서 하나를 골라내는 것이다. 먼저 여럿이 없이는 고를 수 없다. 먼저 말을 많이 알아야 할 것이다. ‘밝다’와 ‘휘영청-’ 둘밖에 모른다면, 이 사람은 달이 아직 솟지는 않고 멀리 산머리에 빛만 트인 것을 보고도 ‘밝다’ 아니면 ‘휘영청-’으로밖에 형용 못할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 하나를 택하기만 했다고 유일어의 가치가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말을 있는 대로 전부 모아놓고 그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데만 유일어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먼저는 말 공부를 해야 한다. 말 공부라니까 무슨 학문어, 술어를 배우라는 게 아니다. 학문어, 술어는 정해져 있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속어(일체에 통달해 훤히 알아야 한다. 말 공부의 방법으로는,
① 듣는 것
② 읽는 것
③ 만드는 것
이 세 길일 것이다. 듣는 것과 읽는 것을 졸업할 정도가 되어야 만들어 쓰는 데 비로소 짐작이 날 것이다.
(3) 스스로 발견해 만들어 쓸 것
‘퍽 그리워.’
‘몹시 그리워.’
‘못 견디게 그리워.’
‘퍽’ ‘몹시’ ‘못 견디게’ 다 떠돌아다니는 부사다. 아무나 할 줄 아는 말이다. 그리움에 타는 지금 내 속만을 처음으로 형용해보는 무슨 새로운 부사가 없을까 하고, 내 그리움을 강조할 내 말을 찾아냄이 마땅하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김소월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뭇차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소월은 ‘사뭇차게’라 하였다. 힘차기도 하거니와 훌륭히 신선한 말이다.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의 ‘제금’도 좋은 발견이다. ‘이제는’ 한다든지 ‘지금’ 하면 ‘이제금’ 같은 향토적·민요적인, 자기만의 풍정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해협
정지용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선창(船窓)으로
눈썹까지 부풀어오른 수평(平)이 엿보고,
하늘이 함폭 나려앉어
크낙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투명한 어족(漁族)이 행렬하는 위치에
훗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망토 깃에 솟은 귀는 소라 속같이
소란한 무인도의 각적(角笛)을 불고
해협(海峽) 오전 2시의 고독은 오롯한 원광(圓光)을 쓰다.
서러울 리 없는 눈물을 소녀처럼 짓자.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
다음 날 항구의 개인 날씨여!
항해는 정히 연애처럼 비등하고
이제 어드메쯤 한밤의 태양이 피어오른다.
‘함폭’ ‘크낙’ ‘훗’ ‘오롯’ 다 이 시인의 발견이요 가공이다. 세월이 빠른 것 같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 같이 느끼는 바다. 옛 사람과 요즘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것에는 옛사람들의 말을 그대로 쓰게 되는 것이 많다.
세월은 유수(水) 같다.
광음이 살같이 지나……
진리는 의연하되 얼마나 케케묵은 형용인가? 귀에 배고 걸어서 도리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남이 이미 해놓은 말을 쓰는 것은 흉내다. 세월이 빠른 것을 “유수 같다” 한 것은, 처음 말한 그 사람의 발견이다. 정도 문제지만 남의 발견을 써선 안 된다. 문장에서야말로 특허권 윤리를 지켜야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스스로 발견해 써야 한다.
옥수수 밭은 일대 관병식(觀兵)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甲胄)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이상의 「산촌여정(山村餘情)」에서
옥수수 밭을 관병식으로 형용한 것은 이상(李箱)의 발견이다.
마스트 끝에 붉은 기가 하늘보다 곱다.
감람(甘藍) 포기포기 솟아오르듯 무성한 물이랑이여!
-정지용의 시 「다시 해협」에서
탐스러운 물결이 갈피갈피 솟는 바다를 포기포기 무성한 양배추밭에다 형용했다.
남이 쓰던 묵은 말들이 아니어서 얼마나 신선하기도 한가? 좋은 글을 쓰려는 노력은 좋은 말을 쓰려는 노력일 것이다. 생활은 자꾸 새로워지고 있다. 말은 자꾸 낡아지고 있다. 말은 영구히 ‘헌것, 부족한 것’으로 존재한다. 글 쓰는 사람은 전래어든 신어든 외래어든, 그 오늘 아침부터라도 이미 존재하는 어떤 언어에도 만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끊임없는 새 언어의 탐구자라야 한다.
보편성이 있어 아무나 편히 쓸 수만 있는 말이면 누구의 발견이든, 가공이든 창작이든, 민중은 따른다. ‘느낌’이란 말도 근년에 누가 쓰기 시작해 퍼뜨린 말이다. 지금 일반적으로 쓰는 ‘하였다’도 ‘도다’나 ‘하니라’에 불만을 가진 누군가의 발견일 것이다. ‘거니와’도 고어 냄새가 나면서도, ‘였지만’에 단조로움을 느껴 새로 많이 쓰이는 새 맛의 토다. 과거 조선의 문장은 어휘는 풍부하면서도 토가 없는 한문맥(漢文脈)의 영향을 받아 토가 발달하지 못했다. 신문학이 일어나며 문장에 있어 첫 번째로 고민한 것도 이 토였음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언어는 민중 전체가 의식주보다도 평등하게 가지는 최대의 문화물이다. 글 쓰는 이는 문장보다 먼저 언어에 책임이 크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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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견 사람이 만든 명주실로 짠 비단.
각적(角笛) 뿔로 만든 피리,
원광(圓光) ①둥글게 빛나는 빛, ②후광,
광음(光陰) 햇빛과 그늘, 즉 낮과 밤이라는 뜻으로, 시간이나 세월을 이르는 말.
관병식(觀兵式) 지휘관이 군대를 사열하는 의식.
갑주(甲冑) 갑옷과 투구.
감람(甘藍) 양배추.
-이태준 『문장강화』 중에서
2025.3.18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