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도화지 (산문)
맑은하늘 / 이영자
어제 그린 그림은
꼭,
내가 다섯살때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린 그림이었다
유치하고 서툰 그림
"벽이나 땅바닥에 그리지 말고
여기다 그려보렴."
그림 그리는 게 재미있어
여기저기 그리는 내게
맑은 웃음과 함께 스케치북을 펼쳐주시는 할머니
태어나 처음 만나는 하얀 도화지
너무 깨끗해서 무엇을 그려야 할지 어린 나는
한참 동안 도화지만 바라보았다
하얀 도화지 세상이 두렵고 겁났다
"할머니
너무 깨끗해서 어떤 색으로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하얘서 무서워요"
"할머니도
처음엔 하얀 도화지가 무섭고 겁났어.
그래도 그림은 그려야 해. 자꾸 그리다 보니까,
할아버지, 네 엄마, 너를 만난 행복한 세상도 있었단다.
네가 그리고 싶은 세상을 마음껏,
자유롭게 그려보렴."
어린 나는 할머니를 물끄럼히 바라보며 무슨 말씀인지
의미를 잘 모르지만 그림은 그려야 하는 거구나 생각했다
할머니의 눈이 너무 따뜻해서 하얀 도화지위에
그림 그리길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십사 색이 든 크레파스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렸다
앞산 진달래동산에서
놀고 있는 그림을 그렸다
하얀 도화지에 할머니를 그리고 할머니옆에 나도 그렸다
나무, 꽃, 나비들도 그렸다
하얀 도화지는
스믈 네 가지 색으로
빈틈없이 채워져서
벽에 걸렸다
집에 오는 손님마다
잘 그렸다고 칭찬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그렸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하얀 도화지위에
거침없이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나이 들어갈수록
하얀 도화지위에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모르는
다섯 살로 돌아간다
하얀 도화지는
하루를 잘 그려 넣으라고
매일 찾아오는데
하얀 도화지가 두렵고 무섭다
할머니도 없는데...
나 혼자인데...
"하얀 도화지야,
오늘은
진짜 잘 그려볼게."
약속하고선 까먹는다
다 그리고 나면
졸작 중 졸작이다
오늘도 그려야 하는데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까?
그래,
멋있게 그리려고 애쓰지 말자
아름답게 그리려고 애쓰지 말자
다섯 살 적 그렸던 서툴고 유치한 그림을 그린들 어떠하랴
잘 그리려 하지 말고
있는 대로 그리자
흔들흔들 흔들리는 세상을 바로 붙잡아 그리려 말자
잔잔한 바다 위에 떠가는
하얀 돛단배를 그리자
배안에 나 혼자만 있어도
갈매기를 그려 넣으면
친구가 생기고
따스한 색을 써서
노을빛을 그리면
춥지 않을 거니까
살아있는 날까지
그린 그림을
다 펼쳐 내보이면
참 가관일 테지만
소중한 오늘을 배신하지 말고
자신 있게 그리자
하얀 도화지를 겁내지 말고
빽빽하게 가득 채워 나만의 그림을 그리자
먼동이 튼다
오늘도
해는 떠오른다.
*예뻐서 가져온 그림*
첫댓글
글이 너무좋아서
동행자 카페에서 훔쳐왔어요!
글 도둑 자진 신고합니다.
잘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