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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라혼은 백호영들이 이곳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자 모든 일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봉수 태수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킨 주체가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또 왜 남상의 반란과 동시에 봉기했으면서 남상의 대수영과는 연계가 없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봉수성의 관리들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라혼은 장상의 가문이 구축해놓은 인맥을 통해 단편적으로나마 전후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을 뿐이다. 반란의 주체는 다름 아닌 진토인(塵土人)이라 불리는 자들로 고래(古來)로 남례에서 살던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란 것이다. 과거 수인(獸人)이 도래하기 이전에도 그들은 야만인이라 하여 알게 모르게 멸시를 당했었다. 사실 대밀림(大密林) 안에서 바깥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야만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남례와 남상의 반란은 후선의 강무세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는 흔적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었지만, 남례성의 진토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봉수성이 그렇게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 주민의 8할이 진토인인 상태에서 언제 어떤 세력이 봉수성을 뒤엎을지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바쁘게 움직여도 시원찮을 백호영이 모조리 환자인 상태였다. 그래서 서해대수영 흑선과의 해전에서 뜨거운 맛을 본 라혼은 해노 인치, 장상과 더불어 함대의 전력 강화를 논의했다.
“장군, 수군을 꾸민다는 생각은 좋으나, 그러자면 막대한 자금이 소요될 뿐 아니라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성사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해노의 말이 옳습니다. 그리고 자금이 있다고 해도 사람을 모으고 전통을 세우려면 아무래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라혼은 이번에 위력이 증명된 천보노가 장착된 대선(大船)을 중심으로 돌격선과 쾌속선을 더불어 운영한다는 의견을 물었으나 해노와 장상 모두 부정적인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새로 장착한 천보노의 위력은 주목할 만했습니다. 그러니 전문적인 사수를 키우는 것만으로 전력이 한층 강화될 겁니다. 천보노만으로도 최소한 봉수성 주변 해역 정도는 충분히 장악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지금 당장 효과가 있는 그런 것이 아니오.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세력을 꾸미려는 것이오.”
수군을 만드는 일은 오랜 시간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라혼이 고집을 꺾지 않고 일을 추진하자 손익 계산이 빠른 장상이 말했다.
“사실 저는 지금 이 정도의 함대를 꾸리는 데 겨우 사나흘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말에 놀랐으나, 내용을 조금 깊이 들어가보면 사실 급조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이 정도 함대를 만든 것은 기적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수군을 키우려면 최소한 5년에서 10년의 시간 동안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우리에겐 배가 열한 척이나 있고 봉수성의 수군과 각 섬에 흩어져 있는 수군의 지휘권을 확보하고 복수성이나 주변에서 경험 많은 선원을 모집해 훈련을 시키면 시간과 자금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오.”
“….”
서해대수영에 비해 떨어지기는 하지만 남례성 연안 요새엔 수군이 있었다. 그리고 주군은 그들을 지휘할 권리가 있는 하남천원군이었다. 즉 그들을 통합해 훈련을 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수군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것을 가지고 재편성하는 것은 그리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해노 인치와 장상은 여기까지 생각하자 새삼스런 눈으로 라혼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너무 급하게 할 필요는 없소.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수군을 키우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하시오. 모처럼 수군을 키울 수 있는 인재가 둘이나 있는데 가만히 놀려둘 내가 아니오.”
라혼의 말에 해노 인치와 장상은 감동했다. 남아(男兒)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목숨을 건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참장 라혼은 목숨 걸고 따르기에 차고 넘쳤다.
―탁탁탁탁….
“주군! 큰일났습니다.”
수군을 만드는 계획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될 무렵, 군무관인 모원이 봉수태수부(峰水太守府)에 마련한 라혼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오며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모 정령님과 잔폭광마 육 정위님이 반적들에게 납치되셨답니다.”
“납치?”
라혼은 모원의 말에 의식을 개방해 모석의 행방을 찾았다. 모석은 전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전환(傳環)에 기본적으로 걸려 있는 [디텍트Detect : 탐지] 마법을 이용해 간단하게 모석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모석은 봉수성 밖 밀림 한가운데 땅속에 잡혀 있었다. 라혼은 일단 모석과 잔폭광마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 전후 사정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물론 그전에 먼저 살인적인 더위에 전투력을 잃은 백호영들부터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모원, 백호영을 연무장에 집합시켜라!”
“존명!”
“장상, 봉수성의 관리들은 믿을 수 없다. 그러니….”
“알겠습니다. 모 정령님의 행적을 알아보겠습니다.”
“해노는 배를 부탁드립니다.”
“알았소이다. 장군!”
집무실을 나와 태수부의 연무장으로 먼저 간 라혼은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법진이 완성되고, 얼마 후 찜통 같은 더위 속에서 두터운 갑주를 착용한 초췌하지만 그러나 눈빛은 살아 있는 백호영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1215명의 백호영 전원이 말과 함께 연무장에 집결했다. 전부 모인 것을 확인한 라혼은 준비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인보케이션 배리어(Invocation barrier)!”
[인보케이션 배리어Invocation barrier : 주문 결계] 마법진을 활성시키는 주문.
“레스터레이션(Restoration)!”
체력 회복.
“프로텍션 프롬 버그즈(Protection from bugs)!”
잡벌레로부터 보호.
“프로텍션 프롬 포이즌(Protection from poison)!”
독물로부터 보호.
“프로텍션 프롬 더 히트(Protection from The Heat)!”
더위로부터 보호.
“블레스(Bless)!”
축복.
“포겟(Forget)!”
[포겟Forget : 망각] 주문을 마지막으로 단번에 일곱 개의 마법 주문을 쏟아놓은 라혼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결계를 사용해 집중도를 높였지만 1215명의 마나와 반발성을 지닌 내공을 쌓은 고수들과 1217마리의 말에게 한꺼번에 마법 주문을 시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마나와 내가공력은 서로 잘 맞지 않는 경향이 있다. 비유하여 마나가 타오르는 불의 ‘열’이라면 내가공력은 끓는 물의 ‘열’에 비유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열’이라는 힘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반발하는 것이다. 즉, 아무리 뜨거운 끓는 물이지만 타오르는 불을 끌 수 있기에 서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궁극적으로 가면 어차피 같은 것이기는 했다. 라혼이 백호영들에게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귀찮기도 하거니와 마법을 남발하면 그들의 수련에 방해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마법 아이템을 사용하는 것은 별 문제 없지만 그것을 만들 재료가 없었다.
백호영들은 모석과 잔폭광마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살인적인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봉수태수부의 연무장에 집결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확!’ 하는 느낌과 함께 무덥고 눅눅하게만 느껴지던 날씨가 견딜 만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이 마법 주문이란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비상사태를 맞아 마음가짐이 달라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주군! 모 정령님이 납치되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럴 것이 아니라 당장 찾아 나섭시다!”
백호영의 수장 격인 백호십일걸이 일제히 들고 일어서며 라혼에게 그들을 찾아 나설 것을 간했다. 그러나 라혼은 그들에게 일갈했다.
“군문(軍門)에 있는 자가 어찌 사사로이 움직이려 하는가?”
“….”
“어찌 된 일인지 전후 사정을 알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백호영들은 주군의 뜻밖의 일갈에 움찔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싸늘하게 식어버린 침묵 속에서 라혼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피에는 피로, 죽음엔 죽음으로 되갚아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나의 뜻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
“명(命), 받드오이다.”
―명 받드오이다!
***
봉수 태수 돈석(豚席)은 돈제가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는 돈제와 정적 관계에 있었다. 돈화린이 돈제의 위(位)에 오르기 전, 그와 제위(帝位)를 놓고 겨루는 반대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푸짐한 몸매의 가는눈을 한 메기 수염의 노인 돈석은 진토인 반적에게 조정에서 보낸 하남천원군의 장교가 납치됐다는 소식에 연방 ‘홍홍’댔다.
“홍홍, 내 그럴 줄 알았지, 배에서 내리자마자 병자 꼴이라니. 홍홍….”
봉수 태수 돈석은 계주에서 권력 투쟁에서 밀리자 원주 조정에 뇌물을 써서 도망치듯 이곳에 처음 발을 들여놨을 때의 일은 모두 잊은 듯이 말했다. 아직도 익숙지 않은 혹서 때문에 근육질의 하인들이 웃통을 벗고 양쪽에서 커다란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곱상한 시녀들이 부채질을 했지만 곧 체력과 지구력이 좋은 남자 하인으로 바뀌었다.
“태수님, 이 일은 봉수성 내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참장이 그것을 문제 삼아 따지고 들어온다면 책임을 면하기 힘듭니다.”
“홍홍, 그것도 그렇군. 그럼 자네가 가서 적당히 돕는 시늉이라도 하게! 그리고 시원한 과일 화채라도 마셔야겠어.”
태수에게 간하던 진학사(進學士) 오조(吾調)는 그의 심드렁한 반응에 내심 혀끝을 찼다. 태수란 자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시원한 곳만 찾아 틀어박힌 채 도통 일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봉수성의 태수부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내 제반 사항은 위병(衛兵)들을 책임지는 위장(衛將)이 결정하고 있었다. 하나 그 위병들은 봉수성의 성민이나 봉수부 백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봉수성을 잠시 들르는 뱃사람들과 항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위병들이 월권하여 봉수성의 치안을 확립한 것은 좋지만 안하무인의 태도는 봉수부 성민들에게 적지 않은 원성을 들었다. 그러나 원주 조정에서 직접 임명한 위장은 이곳 원주민인 진토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 만큼 그들을 다루는 방식이 혹독해 봉수부 내 진토인들은 관부 전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태수님, 이 일은 군부의 일입니다. 문관인 제가 나서봐야 아무 소용 없습니다.”
“홍홍, 그래서 어쩌자는 겐가? 홍홍.”
“홍 위장을 불러 몇 마디 당부라도 해두십시오.”
“홍 위장에게 말인가? 홍홍. 그럼 자네가 홍 위장에게 내가 하남천원군 참장을 도우라 했다고 전하게. 홍홍. 일 끝났으면 가봐!”
“…!”
위병대장(衛兵隊將) 홍대보(紅大普)와 오조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태수의 위세를 빌려 그를 움직일까 했는데, 태수는 그마저 귀찮아하고 있었다. 오조는 하남천원군의 참장이란 자가 부하들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례성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군사들을 연무장에 모은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부랴부랴 태수를 찾았다. 가뜩이나 성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진토인들이 관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일로 그 참장이란 자가 휘하 군사들을 풀어 성민들을 괴롭힌다면 큰 사단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를 일단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위병을 이끄는 홍대보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진학사 오조는 지하수에 차갑게 담갔다 가져온 과일 화채에 온 정신이 쏠려 있는 태수를 보며 당장이라도 출진할 기세인 참장을 말려야 할지 아니면 위장 홍대보를 먼저 만나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러나 오조의 고민은 곧 필요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태수님, 하남천원군 라혼 참장님이 뵙기를 청합니다.”
“홍홍, 더워 죽겠는데 오늘따라 뭔 손님이 이리 많은지. 들여보내라!”
오조는 밖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방 안으로 들어서는 장수를 보았다. 그야말로 헌헌장부에 훤칠한 사내가 검은 바탕에 하얀 테를 둘러 장식한 경갑주를 입고 당당한 걸음으로 침상을 겸용한 등나무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있는 봉수 태수 앞에 섰다.
“홍홍, 내가 몸이 편치 않아 장군께 실례를 했소이다.”
“….”
라혼은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태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은섬충을 사용할까 하는 고민을 했다. 그러나 라혼은 봉수 태수 돈석을 나중에 감당하기 귀찮은 존재 이상의 평가를 내릴 수 없었다.
“지금부터 봉수성은 하남천원군이 통제하겠소.”
“….”
라혼의 말에 봉수 태수 돈석은 가는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
“홍홍, 봉수성은 안전하니 장군께선 신경쓰지 않으셔도 되오. 그러니 장군은 어서 위급지경에 빠진 다른 곳으로 가서 공을 세우는 것이 낫지 않겠소?”
라혼은 아직도 침상에 반쯤 누운 봉수 태수를 바라보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나는 ‘통보’를 한 것이지, ‘허락’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감히…!”
―탁!
돈석이 가는눈을 최대한 부릅뜨고 등나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며 과일 화채가 놓인 탁자를 쳤지만 상대는 이미 등을 돌리고 있었다. 라혼은 봉수 태수를 무시한 채 진학사 오조에게 명령했다.
“지금 즉시 봉수성의 모든 관리를 소집해라! 응하지 않는 자는 군법에 따라 벨 것이다!”
“아, 아니….”
“네놈이….”
―땅~!
“….”
“….”
봉수 태수 돈석은 자신의 목젖 부위 살에 살짝 파묻혀 있는 검 끝을 보고 창백하게 질린 채 푸들푸들 떨었다. 라혼은 달려드는 봉수 태수의 머리를 검면으로 때리는 동시에 그의 목젖 부위에 검을 들이밀면서 시선은 여전히 전형적인 학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오조를 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가라!”
“….”
진학사 오조는 갑작스런 사태에 멍해 있다가 재차 종용하는 라혼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상황 파악을 시도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의 요구대로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던 그는 남상과 남례성의 임의로 통제할 권한을 가진 하남천원군의 장군이었고, 지금은 봉수 태수의 목에 검을 들이댄 상태에서 요구하고 있었다.
“알았소이다. 장군의 뜻대로 하겠으니, 태수님 목에서 검을 치워주시오.”
“….”
진학사 오조의 말에 라혼은 검을 거두었고 봉수 태수는 목에 붉은 상흔을 잡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 시진(두 시간)을 주겠다. 그 시간 안에 모이지 않은 관리는 군법에 따라 벨 것이다.”
“아, 알겠소이다.”
진학사 오조는 그의 말이 그저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조급해짐을 느끼며 태수의 관저를 나섰다. 라혼은 진학사 오조가 움직이자 몸을 돌려 주저앉아 눈알 굴리기 바쁜 봉수 태수에게 경고했다.
“네가 무공 고수라는 것을 안다. 무엇 때문에 조용히 숨어 지내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가만히 있어주면 된다.”
“흑…!”
봉수 태수 돈석은 백호나한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유령처럼 자신의 미간에 닿아 있는 검을 보고 숨을 멈췄다. 처음 돈석이 발작하려 했을 때 무슨 수법으로 머리를 때리고 목젖에 검을 두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무런 기척도 없이 그의 검이 눈썹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백호나한이 고수라는 소릴 들었지만 이 정도 수준일 줄이야! 홍홍홍, 오늘 홍대보가 큰 낭패를 당하겠구나.’
라혼은 봉수 태수의 체념한 기색을 읽고 검을 거두었다.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했지만 그것은 앞으로 두고 볼 일이었다. 라혼은 움직이지 않으려는 봉수 태수의 태도를 보고 즉흥적으로 일을 벌였다. 어차피 남례성에 하남천원군의 거점을 가질 필요가 있었기에 거점의 지배권 장악에 든든한 배후가 필요했다. 남례성의 반란은 그 형체가 없었다. 후선이나 남상의 서해대수영 같은 뚜렷한 적이 없는 남례성의 반란을 해결하기 위해선 확실한 배후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라혼은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는 백호영들이 모여 있는 봉수태수부 연무장으로 와서 봉수성을 접수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말했다.
“봉수성을 내 통제 아래 둘 것이며, 반(反)하는 자는 전부 참(斬)할 것이다!”
―존명!
“오차, 하늘에서 위병들의 동태를 살펴라!”
“옛!”
―펄럭~! 휘익!
명(命)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미 더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오차가 검은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고우, 구만혁, 표상치, 웅장모, 초강남은 지금 즉시 항구를 제외한 봉수성의 주요 거점을 확보한다! 반항하는 자는 참해도 좋다!”
“옛!”
―두구구구구구….
봉수성의 주요 거점이란 성채의 각 문(門)과 태수의 관저 그리고 봉수태수부를 말했다. 고우 등은 각 100명씩 백호영을 데리고 연무장을 벗어났다. 라혼이 달리 언급은 없었지만 그들은 알아서 자신이 맡을 거점으로 말을 달렸다.
“나머지는 예비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라혼은 장상의 도움으로 성내 백성들, 특히 진토인들의 관부에 대한 반감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석과 잔폭광마를 납치한 세력이 최소한 진토인들인 것만은 확실했다. 물론 이대로 모석과 잔폭광마를 구해올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뿐이었다. 라혼은 일단 봉수성의 관부를 족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인 다음 그물을 쳐놓고 시냇물을 뒤집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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