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학과: 중어중문
학번: 140210
성명: 박주은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읽고 있는 것인가 조차도 알기 힘들었습니다.
조그마한 책이었지만 한 장 읽으면 그 전 장의 내용을 까먹기 일 수였고 이렇게 어려운 책은 처음 이었다. 너무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제가 그나마 가장 이해가 잘된 피로 사회에 대해서 또 교수님이 블로그에 올려주신 내용을 참고하며 글을 쓰겠습니다.
피로사회에서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고 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많은 백신의 발명으로 사스(SARS)나, 우두(cowpox)같은 바이러스 적인 질병이 사라지고 지금은 신경질적 질환인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등의 병이 21세기에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 이유는 부정성이 아닌 긍정성 과잉 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조금 아이러니하기도 했지만 작가는 과도한 긍정성이 자기 착취를 만들고 또 그것이 개개인을 피로하게 만들어서 우울증과 같은 신경증적인 증상으로서 표출된다고 하니 조금 이해가 되었다.
우리는 질병을 치료하려고 할 때 우리가 치료해야 할 병원균이나 바이러스를 찾는다고 한다. 바로 ‘면역학적인 타자’라고 하는 것인데 면역학적이 라는 것은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버린다. 면역 방어의 대상은 타자인데 아무런 적대적 의도도 또 위험을 초래하지도 않는 타자를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없애 버린다. 그리고 과잉생산, 과잉가동, 과잉커뮤니케이션 등 우리사회에 부정적이지 않은 과잉이라 면역학적으로는 이질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신을 해치게 놔둔다.
이전사회에서는 우리에게 ‘하지 마라’라고 부정적인 말로 우리를 억압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다’라며 성과를 요구하고 또 이 것이 자기 자신을 억압하고 있다. 결과 스스로가 피로를 불러오고 탈진하게 만들어 우울증이 걸리는 것이다. 이게 바로 21세기의 긍정성 과잉에 대한 문제이다.
야생에서 살아남는데 멀티태스킹이 필요하다. 먹이를 먹으면서도 적을 보아야하고 새끼도 지켜야하고 짝짓기 상대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깊은 사색에 빠진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래서 그들은 몰입할 수가 없다. 최근의 사회도 발전과 주변의 변화는 우리를 멀티태스킹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고 있다. 바로 성공, 좋은 삶이라는 것을 위해..
-우울증이라는 병은 현대 사회에 와서 가장 무섭고 많은 병이 되어버렸다. 우울증 이외에도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등 많은 정신병이 출현 했고 현대사회의 적이 되었다. 피로사회에서는 이러한 병이 오는 원인에 대하여 아주 깊고 또 색다르게 다루어 놓은 책 같다 “긍정의 과잉” 어떠한 사람이 이러한 단어를 생각해 낼 수 있었을까?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한번이고 두 번이고 읽어 보았고 그제야 아주 조금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나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왜 우리가 “할 수 있어”, “불가능이란 없어”라는 말을 하며 공부에 내 삶을 억압시키고 살고 있는가에 대해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란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은 성공 그리고 그 성공에서 나오는 돈에서 나온다. 나도 마찬가지 이다.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랐다. 그리고 그 삶을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고 돈을 벌려면 직장 또 그냥 노가다 하는 직장이 아닌 몸이 조금 편한 사무직 또 그런 직장에 들어가려면 공부밖에는 없었다. 나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나에게 ‘할 수 있어’, ‘불가능이란 없어’라는 주문을 걸었고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잘하는 것’, ‘나의 장점’에 대해 생각조차 못해보고 오히려 쓸모없는 일이라고 여기며 ‘해야 해야만 하는 것’, ‘내가 잘해야 하는 것’에 대해 나 스스로에게 긍정성과잉을 하며 학교라는 곳에서 일종의 “자해(정신적)”해왔다.
대학교에 도착 했다.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구체적인 꿈이 보이겠지, 나의 목표가 확실 해 지겠지 ,여자 친구도 대학가면 생기겠지 등) 나의 상상을 깨고 대학은 나에게 피로를 주었다.
나는 “할 수 있어”, “불가능이란 없어”라는 마약을 끊고 싶었다. 그런 나의 지친 마음이 해외 봉사 프로그램으로 이끌었고 작년 한해 중국 북경으로 1년 동안 해외 봉사를 가게 되었다.
중국에서의 처음은 한국과 다를 것이 없었다. 못하는데 잘 하려고 했고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중국의 1년간을 전부는 생략하고 결과만 말하자면 나는 변화를 얻었다.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부족하고 못난 자인지 그런 나에게 “할 수 있어”, “불가능이란 없어”라는 무기를 휘둘러 왔으니... 그렇다 나는 “할 수 없는” 자였다 “불가능한” 자였다. 때문에 이제 나는 내가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자”, “가능한 자”를 찾아 도움을 받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너무 어려워서 읽기도 싫었지만 나중에는 이 책이 얼마나 나 자신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보여 주는 지 보게 되었다.
-교수님 모든 내용을 쓰고 싶었지만 쓰면 쓸수록 점점 그냥 책 요약본이 되어 가는 느낌이 들어서 그냥 가장 이해가 잘되고 말 할 수 있는(메타 인지가 된)내용을 말하고 내 느낀 점을 쓰는 것이 더 좋은 내용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씁니다. 결코 다 안 쓰려고 노력 한 것이 아닙니다.ㅠㅜ
ex)심심함의 발작으로 인해 우리는 걷기에서 춤추기 단계로 넘어 갔다.
걷기와 춤추는 것은 다르다 걷기는 그냥 선 하나를 따라가는 직선운동 이라면 춤은 성과 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사색의 삶 느린 것에 대한 접근 또 오랫동안 머물기라는 것은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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