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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16구간 제2부
문수제-내죽마을-하죽마을-오미마을-
오미정-운조루고택-운조루유물전시관
20260616
1.문수골의 깊은 상처, 구름 속의 새처럼 운조루 고택
지리산둘레길 16구간을 탐방하였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송정마을 위쪽 토지송정길에 2주만에 다시 온다. 2주 전 이곳에서 15구간을 역방향으로 탐방할 때는 탐방 내내 비가 내리고 지리산 산줄기는 운무에 덮여 수묵화를 그렸다. 이번 탐방날에도 기상 예보는 비가 내린다고 하였지만 예상과 달리 탐방 내내 땡볕이었다. 지리산둘레길에서는 16구간을 이렇게 개략한다.
송정-오미 구간은 구례군 토지면 전경과 섬진강을 보면서 걷는 길로 농로, 임도, 숲길 등 다채로운 길들로 이어진 10.4km의 둘레길이다. 숲의 모습 또한 다채롭다. 조림현상과 산불로 깊게 데이고 다친 지리산의 상처를 만난다. 아름다운 길에서 만나는 상처는 더욱 아프고 자연과 인간의 상생을 생각하게 한다. 남한의 3대 길지 중 한 곳으로 알려진 운조루를 향해 가는 길은 아늑하고 정겹다. 섬진강 너머 오미리를 향해 엎드려 절하는 오봉산이 만드는 풍광도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송정마을에서 출발해 약 1km의 오르막길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완만하고 숲길이 많은 편이라 걷기에 좋다. 오미마을은 조선시대 양반가를 엿볼 수 있는 운조루로 유명하다. 남한의 3대 길지로 꼽히는 운조루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새겨진 큰 쌀독이 있다. ‘누구든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는 뜻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 쌀독을 열어 구제했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송정 1.8km 송정계곡 1.4km 원송계곡 2.7km 노인요양원 4.5km 오미', 전체 거리는 10.4km, 예상 소요 시간은 5시간 30분, 난도 상이다. 지리산둘레길 16구간을 2부로 나누어 정리한다.
제2부(문수제-운조루유물전시관) : 지리산둘레길 16구간을 문수제가 보이는 곳까지 걸어왔다. 지금까지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지역의 의승재, 송정계곡, 원송정계곡을 지나서 토지면 파도리 지역으로 넘어와, 등평들과 구례군 노인전문요양원이 자리한 반곡을 거쳐 구산리로 넘어왔으며, 단산윗길을 따라 솔까끔마을을 지나, 문수제와 토지면 오미리 마을이 보이는 곳까지 8km 거리를 걸어왔다. 이제 구산리 지역에서 토지천을 건너 오미리 지역으로 건너가 내죽마을과 하죽마을을 거쳐 오미마을 오미정까지는 2km가 조금 넘게 남았다.
문수골 입구에서 지리산둘레길은 단산윗길을 따라 문수저수지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문수골 입구에서 문수골을 올려보았다. 월령봉이 우뚝하고 그 뒤쪽에 노고단이 있을 것이다. 지리산빨치산이 시작된 곳이 문수골이라고 한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러 제주도로 출병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지창수 상사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지회 중위가 반란군을 지휘하면서 여수를 점령하고 육사 동기인 홍순석 중위가 합류하면서 순천까지 장악했다. 정부는 10월 21일 광주에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부를 설치해 여수·순천을 탈환하고 그 여세를 몰아 대대적인 반란군 소탕전을 전개했다. 패색이 짙어진 반군은 10월 24일 순천 삽재와 백운산을 넘어 구례군 간전면에서 섬진강을 건너 25일, 구례군 토지면 파도리와 구만들을 거쳐 왕시루봉 아래의 문수골에 입산했다. 1955년 5월까지 6여 동안 그들은 혹독한 운명을 마주해야 했다."(경남신문 2026.3.4. 황부호 작가 '인문학이 있는 지리산둘레길' 참조)
제주 4·3사건이 무엇인가? 이 사건에 대해 상반된 시각이 있지만 이 역사를 개략한다. 1947년 3월 1일 제주 관덕정 앞에서 3·1절 기념행사 뒤 가두시위 과정에서 기마경찰의 말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 경찰이 이를 수습하지 않고 지나가자 군중이 이를 항의했고 현장의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 시민 6명이 희생되었다. 이 발포 사건은 제주 지역에 쌓여 있던 불만과 긴장이 폭발하게 되고, 1948년 4월 3일 무장충돌이 일어난다. 이후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광복 이후 미군정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일어난 소요를, 군경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진압하러 제주도로 출병하라는 명령이 과연 올바른 것이었고, 이 명령에 따르는 것이 군인의 정당한 책무였을까? 그리고 미군정 하 우리 민족의 특수한 이해 관계가 맞물려 있는 해방공간에서 남한만의 5.10 총선거는 제주도민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득한 막막함이 몰려온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내 이름은'을 지난 달 관람했다. 영화를 보면서 민족의 깊은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현재에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 잉크 자국처럼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 치유의 길로 나아가야 하고 그 비극을 이겨내야 한다. 이번 12·3 비상계엄 때 군병력 동원이 있었지만 민주 시민의 강력한 저항과 무장 군인들의 성숙한 대응으로 위헌적인 비상계엄을 막을 수 있었다. 치유의 길, 희망의 길을 보고 가슴이 얼마나 뜨거웠던가?
비극의 상처를 간직한 깊은 문수골에 펜션들이 들어서 있고, 문수저수지 건너편 토지면 문수리 산자락에 상죽마을이 자리한다. 오미 1.8km 지점의 문수골 입구에서 문수제(文殊堤)로 내려간다. 문수호의 호면은 찰랑찰랑 맑게 빛난다. 노고단에서 발원한 토지천(문수천)은 문수골을 흘러와 문수제 배수문을 통해 흘러내려 오미리 내죽마을을 거쳐 구산리 드넓은 구만들을 동쪽으로 가로질러 섬진강에 유입된다. 문수제에서 내려보면 토지면 구만들과 그 젖줄인 토지천과 섬진강, 그 건너편의 오봉산과 오산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데, 그 풍경은 요란스럽지 않아 고요하고 평화롭다.
섬진강은 서쪽 구례읍 시가지와 사성암이 자리한 문척면 오산(鰲山) 사이를 북쪽으로 굽이돌아 북쪽의 서시천과 마산천, 남쪽의 중산천을 합수하고 동쪽으로 흘러서 다시 북쪽의 토지천을 합수한다. 섬진강 남쪽 문척면 금정리 지역에 나즈막한 다섯 봉우리가 동서로 길게 이어지는 오봉산은 북쪽의 토지면 드넓은 구만들과 정답게 마주한다. 이 들녘이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인지 모르는 탐방객에게 이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을 여유롭게 감싸는 평화가 밀려온다.
문수천인지 죽천(竹川)인지, 이제는 토지천이라 불리는 하천의 내죽교를 건너 토지면 오미리 내죽마을로 넘어갔다. 문수제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 일대는 대나무가 울창하여 대밭골이라고 불렸고, 대밭골 위쪽에 있는 마을이 윗대내, 안쪽에 있는 마을이 안대내,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 바깥대내로 불렸다고 한다. 행정구역으로는 문수제 아래쪽에 자리한 안대내(내죽)와 바깥대내(하죽)는 오미리, 문수제 위쪽에 자리한 윗대내(상죽)는 문수리에 속한다.
하죽마을의 오미수퍼 앞으로 수로가 조성되어 있다. 문수제의 물이 수로를 통해 내죽과 하죽, 오미 마을을 거쳐 토지면 들녘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는 것 같다. 산에 둘러싸이고, 들녘이 넓고, 물이 풍부하여 이 지역이 살기 좋은 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운조루를 건축한 류이주 선비가 18세기 말에 유배 생활을 끝낸 뒤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형네 가족과 함께 대구에서 구례로 이주한 것도 이해가 된다. 오미수퍼 옆 민가 벽에 영화 '까치소리' 장면 사진이 붙어 있다. 아, 영화는 관람하지 못했지만, 학창 시절 김동리의 소설 '까치소리'를 읽은 추억이 되살아났다.
대내길을 따라 오미리 하죽마을을 지나며 남쪽과 북쪽에 펼쳐지는 풍경을 살핀다. 단산윗길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남쪽에는 계족산과 오산이 솟아 있고, 그 앞쪽 섬진강 강변에 오봉산이 나즈막한 넉넉함으로 이어진다. 섬진강 북쪽에 넓은 토지면 구만들이 펼쳐지고, 더 북쪽에 우뚝 솟은 지리산 왕시루봉능선이 이어진다. 그래서 운조루유물전시관 안내문에서는 이곳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지역의 풍수적 형국은 마을 뒤편으로는 지리산 노고단(老姑檀)의 남쪽 능선들이 이루어 놓은 포근한 계곡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이들 사이로 흐르는 하천들이 만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섬진강의 큰 줄기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입지환경을 갖춰 풍수지리의 큰 명당자리로 손꼽힌다. 또한 마을의 앞쪽 섬진강 건너편에는 안산인 오봉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계족산이 주작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에 왕시루봉과 서쪽의 천왕봉이 있어 좌우의 청룡, 백호로 불려진다. 그래서 풍수지리 3대 명당, 금구몰니(金龜沒泥, 금거북이 진흙 속에 묻힌 터),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 오보교취(五寶交聚, 다섯 보물(금, 은, 진주, 산호, 호박)이 섞여 있는 터)가 이곳에 있다."
오미마을 공원 입구의 오미정 난간에 설치되어 있는 지리산둘레길 스탬프함에서 스탬프를 인증하고, 공원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앞쪽에 지리산둘레길 16구간 종점 안내판이 서 있다. 그 옆에 언제 보아도 반가운 지리산둘레길 상징조형물 벅수가 반긴다. 이번 16구간 탐방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탐방을 마치고, 운조루고택과 운조루유물전시관을 탐방하였다. 운조루에 두 번째로 오게 되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퇴락하는 운조루 모습에 마음이 쓸쓸하다. 이곳이 명당 자리라고 한다면, 운조루 개창자 문화 류씨 류이주의 후손들이 더욱 번성하고 불세출의 명성을 빛낼 뿐 아니라 옛집도 더 잘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탐방객에게 운조루의 퇴락하는 모습은, 풍수지리보다는 인간의 의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0.5km
전체 소요 시간 : 4시간 16분
단산윗길에서 문수골 입구에 건립된 문수제를 살핀다. 지리산둘레길은 문수제 옆 단산윗길을 따라 내려갈 것이다.
맨 오른쪽의 토지천이 토지면 구산리와 오미리를 나누며 중앙에서 왼쪽으로 흘러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중앙 오른쪽에 토지천의 내죽교, 그 오른쪽에 내죽마을, 그 뒤에 하죽마을, 중앙에 넓은 들과 섬진강, 그 뒤 오봉산, 왼쪽에 계족산, 오른쪽에 오산이 보인다.
1995년 12월 31일 준공, 2013년 12월 31일 둑높이기를 마친 문수제(文殊堤)와 문수지(文殊池)를 내려보았다.
송정 8.6km, 오미 1.8km 지점의 문수골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간다. 건너편 산비탈에 문수리 상죽마을이 자리한다.
문수골 입구에서 문수골을 올려본다. 해발 819.5m 월령봉이 우뚝하고 상죽마을이 자리한다. 월령봉 뒤쪽에 노고단이 있을 것이다.
지리산둘레길은 임도를 따라 새로 조성한 솔까끔마을을 지나면서, 노고단에서 흘러 내려온 문수골 맑은 물이 넓은 호수를 이룬 문수제를 만나게 된다. 문수골의 이름은 문수암 혹은 문수보살과 연관되어 있는데, 문수보살은 불교에서 복덕(福德)과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현재, 문수암은 노고단 아래 문수대로 유추하고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문수골은 1948년 10월 여순항쟁의 14연대 반란군들이 섬진강을 건너 지리산으로 들어와 주둔한 곳이다. 이때부터 1955년 5월까지 7여 년 동안 총 맞아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고, 굶어 죽어야 하는 혹독한 운명의 지리산 빨치산의 역사적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 지리산둘레길
문수제 옆 단산윗길을 따라 내려간다. 오른쪽 뒤에 토지면 넓은 들녘과 섬진강, 그 뒤에 오봉산, 그 왼쪽 뒤에 계족산이 보인다.
문수저수지는 제방을 준공한 때 1995년 12월 31일, 둑높이기 공사 완공한 때 2013년 12월 31일이다.
단산윗길을 따라 토지면 구산리 지역을 내려간다. 밤나무 꽃이 흐드러지고, 중앙 뒤에 계족산, 왼쪽 뒤에 백운산 산줄기가 가늠된다.
맨 오른쪽 문수제의 수문을 통과한 토지천이 구산리와 오미리를 경계하며 흘러간다. 그 건너편에 오미리 내죽마을, 그 아래에 하죽마을이 자리하며, 중앙의 넓은 들녘 뒤로 섬진강이 오봉산 아래로 흘러가고 왼쪽에 계족산, 오른쪽에 오산이 솟아 있다.
단산윗길을 따라 화덕수제누룽지와 카페 티지를 지나간다.
대왕마늘이라고도 불리는 코끼리마을이 자줏빛 꽃들을 피웠다. 꽃말은 '번영', '행운', '깊은 슬픔'이라고 한다. 오른쪽 뒤에 문수제의 수문이 보이며 수문을 통과한 토지천이 구산리와 오미리를 경계하며 흐르고 왼쪽 건너편에 오미리 내죽마을이 자리한다.
토지면 구산리 지역에서 문수제를 올려본다. 왼쪽에 문수제의 배수문을 통과한 토지천이 흐르고, 오른쪽 뒤 문수골에 해발 819.5m 월령봉이 우뚝하다. 토지천의 발원지는 노고단이며, 문수골을 흘러와 문수제에 갇힌다. 문수천 이름이 토지천으로 바뀐 듯.
단산윗길을 따라 구산리 들녘을 내려간다. 뒤쪽에는 토지면 드넓은 들녘과 섬진강, 그 뒤에 오봉산, 오른쪽에 오산이 솟아 있다.
구산리 논들은 모두 모내기를 끝냈고, 밭에는 과수(果樹)들이 자란다. 토지천 건너편에 내죽마을, 그 아래에 하죽마을이 자리한다.
오미 1.1km 지점의 구산리 단산윗길에서 오른쪽 내죽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직진의 단산윗길은 구산리 단산마을로 이어진다.
토지면 구산리 들녘에서 문수제를 다시 올려본다. 중앙 뒤에 월령봉이 솟아 있고, 오른쪽 위에 걸어온 길과 카페 티지가 보인다.
토지면 구산리 지역에서 토지천의 내죽교를 건너 토지면 오미리 내죽마을로 넘어간다.
오미 0.9km 지점, 토지면 오미리 내죽마을로 넘어와서 걸어온 길과 내죽교를 뒤돌아보았다.
토지면 오미리 대내안길을 따라 내죽마을을 지나간다.
문수제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 일대는 대나무가 울창하여 대밭골이라고 불렸다. 대밭골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 윗대내, 안쪽에 있는 마을이 안대내,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 바깥대내로 불렸다. 마을의 유래에 관한 전설이 내려오는데, 옛날 문수골의 물을 대기 위하여 보를 만들려 하였으나 보의 입구가 암석으로 이루어져 보구(洑口)를 뚫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죽순이 바위틈을 비집고 솟아 올라와 보구를 뚫게 되어 대내(竹川)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 지리산둘레길
내죽마을 주차장 옆 민가 벽에 '살기좋은 내죽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벽화가 눈길을 끈다.
내죽마을 주차장 오른쪽에 쉼터정자, 왼쪽에 내죽마을회관이 자리한다.
내죽마을회관 앞에 내죽마을 표석, 내죽회관준공 기념비, 죽정 박영무 공적비 등이 서 있다.
내죽마을회관 앞에 세워져 있는 내죽회관 준공 기념비의 내용을 옮긴다.
◆内竹마을 由來 : 옛날에 대나무가 울창하여 대나무를 상징하고 文殊川의 냇물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대내라 하되 마을이 안에 있기로 안대내로 불려왔다. 行政名으로는 五美里 1區(內竹)라고 한다. ◆내죽마을 沿革 : 西紀 1500年頃 內竹마을 文化柳氏 金海金氏 晋州河氏 慶州李氏의 移住로 5가구가 살았으며 西紀 1909年 己酉년 日本政治 속에 13家口, 西紀 1945年 乙酉年 日本敗戰으로 解放시 21家口 西紀 1948年 戊子年 麗順反亂시 33家口 西紀 1950年 庚寅年 6.25 戰爭시 47家口가 살았다. 西紀 2003年 癸未년年 現在 43家口가 살고있음. ◆會館新築動機 : 本郡 전경태 求禮郡守 박인환 道議員 김용준 郡議員 고양흠 土旨面長의 주선으로 건축비 五阡四百萬원을 보조금으로 지원받고 마을부담금(住民 喜捨金 등) 壹仟餘萬원 計 六阡四百餘萬원을 들여 건평 30坪 규모로 건축업자 최명균에 의해 會館을 新築하게 되었음. ◆當時指導者 : 開發委員長 鄭熙釵 女老人會長 鄭點南 婦女會長 朴福順 班長 李相根 男老人會長 柳瑩璇 青年會長 柳瑩泰 里長 朴英茂. 西紀 2003年 癸未年 十一月二日
내죽마을 주차장에서 대내안길을 따라 내죽마을회관을 지나 내죽마을 입구의 유래비 앞으로 왔다. 유래비 내용을 옮긴다.
내죽마을은 약 500년 전인 1500년경 진주하씨(晋州河氏), 김해김씨 (金海金氏), 경주이씨(慶州李氏)에 의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 후 문화유씨(文化柳氏), 진주정씨(晋州鄭氏), 밀양손씨(密陽孫氏) 등이 입촌하면서 큰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의 중심에 자리한 당산나무를 보아도 마을의 형성 시기가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큰 대나무가 마을에 울창하여 '대(竹)'자와 문수천의 시냇물 '내(川)'를 따서 '대내'라고 불렀다는 설과 안쪽에 있다고 하여 내죽(内竹)이라 불렀다고 한다.
모내기를 마치지 못한 논에서 써레질을 하며 모내기 준비를 하고 있다. 오른쪽 맨 뒤에 호남정맥 백운산 산줄기가 가늠된다.
토지면 오미리 내죽마을에서 대내안길을 따라 하죽마을로 내려간다. 하죽마을에 토지소망교회가 자리한다.
대내안길을 따라 토지소망교회 앞 문수리 갈림길로 내려왔다. 갈림길 길 입구에 쉼터와 덕양재, 그 앞에 덕양재 연혁비가 있다.
德陽齋 沿革碑 : 이곳에 建立된 德陽齋는 晉州鄭氏 忠莊公 愛日堂派 瞰湖公 諱 致韶系 二十二世祖 諱 敏星公派 門中에서 每歲 先祖의 祭禮를 享祀한 곳이다. 晉州鄭氏의 始祖는 高麗 三韓統合 壁上功臣으로 光祿大夫에 올라 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내신 諡 英節公 諱藝이시고 起一世祖는 諡 文翼公 諱 時陽이시며 中始祖는 朝鮮端宗朝 右議政을 지내신 十四世祖 忠莊公 諱 苯이시다. 一千七百九十年(庚戌) 求禮 入鄕祖이신 諱 敏星公 三世孫 二十四世祖 諱 萬彩公과 諱 萬壽公 兄弟분께서 全南高興으로부터 구례군 토지면 중산리 內獅子項과 外獅子項에 入鄕開村 이래 子子孫孫 많은 後孫이 繁昌하여 世居하여 오던 중 一千九百四十八年(戊子) 險難한 麗順事變의 世波로 因하여 當局의 疎開令에 따라 大多數 宗人들이 이곳 五美里로 集中移住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全國各地로 뿔뿔이 移住되어 살아왔다. 一千九百六十年(庚子) 三月 敏星公 嗣孫이신 諱 元植公이 오직 崇祖睦宗의 一念으로 門中의 先祖享祀를 위하여 五美里 二三九의 一番地 所在 한옥 一棟(垈地 一百八十平米 五十七坪, 建坪 二十坪)을 德陽齋라 이름하고 喜捨하였다. 이에 우리 後裔들은 先代遺業을 崇奉修行하여 追慕之情을 永久不忘하고 永世토록 保存키 위하여 그 동안의 重修內譯을 다음과 같이 明記하여 이 碑를 세우다. 一千九百六十年(庚子) 三月 一次改修 諱 元植公외 十八名 貳拾壹萬五仟원(屋內懸板記) 一千九百八十四年(甲子) 十月 二次重修 熙順외四十三名 三百七拾八萬원(屋內懸板記) 一千九百九十三年(癸酉) 五月 三次重修 点植외 五十一名 六百五拾萬원(屋內懸板記) 二千九年(己丑) 九月 四次重修 諱 任植會長 마루 창문설치 貳百貳拾萬원 서울 昌圭 주방기구 화장실 수리 六拾萬원 二千十五年(乙未) 四月 五次重修 지붕飜瓦 德陽齋沿革碑 設置 西紀 二千十五年(乙未) 四月日 敏星公 八世孫 宇植 撰並書 奉祀孫 九世孫 然太 熙釵 熙淙 十世孫 弘基 文基 永填 十世孫 哲圭 九世孫 炳龍 炯奎 炯一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대내안길을 따라 하죽마을을 지나간다. 오른쪽에 수로가 지나고 바로 앞에 오미수퍼가 있다.
김동리의 소설 '까치소리'를 원작으로 한 김수용 감독의 영화 '까치소리'(1967년) 사진 등 옛 추억의 풍경이 민가 벽에 그려져 있다.
민가의 벽 옆으로 수로가 조성되어 문수제의 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
토지소망교회 앞 문수리 갈림길에서 대내안길을 따라왔다. 왼쪽 뒤에 왕시루봉능선, 오른쪽 뒤에 솔까끔마을이 보인다.
방금 지나온 구산리 단산윗길 중턱에 자리한 솔깔끔마을을 바라보았다. 맨 왼쪽 뒤에 왕시루봉능선이 가늠된다.
오미 0.5km 지점, 오미수퍼 앞에서 마을의 당산나무를 살폈다. 이정목 맨 뒤에 호남정맥 백운산 산줄기가 보인다.
오미수퍼에서 부족한 생수를 구입하여 마시고 나왔다. 중앙 뒤에 문수골의 월령봉이 보인다.
토지면 들녘이 넓게 펼쳐지고, 그 남쪽에 섬진강이 흐르며, 오봉산이 섬진강을 따라 이어진다. 왼쪽 뒤에 계족산이 솟아 있다.
대내안길이 끝나고 대내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에 하죽 버스정류소가 있으며, 오른쪽으로 이어간다. 중앙 뒤에 오산(鰲山)이 솟아 있다.
삼거리 갈림길 하죽마을 버스정류소 옆에 하죽(下竹)마을 표석과 유래비가 서 있다.
선비 정신이 살아 숨쉬는 하죽(下竹)마을 : 조선 영조 중엽(1754년) 경주이씨 이기명(李基鳴)이 길지(吉地)를 찾아 조선 팔도를 헤매다 아들 삼형제를 거느리고 정착하였다. 그후 택리지(擇理志)의 가거지(可居地) 6처(處) 중 가장 살만한 곳으로 숨겨져 있던 땅 구례가 소개되면서 각지에서 양택명당을 찾아 이곳으로 이주해와 촌락이 형성되었다. 대나무가 온 마을에 울창하여 '대내'라 하였고, 하죽은 아랫마을, '아랫대내', '바깥대내'로 오랫동안 불려왔다.
삼거리에서 걸어온 토지면 구산리와 오미리 탐방로를 돌아보았다. 솔까끔마을, 오미리 마을 당산나무와 왕시루봉능선을 가늠한다.
대내길 안쪽에 토지면 오미리 하죽마을회관이 자리한다.
잘 정비된 대내길을 따라 토지면 오미리 하죽마을을 지난다. 오른쪽의 수로는 운조루고택 앞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하죽마을 민가의 문패 '人和 友愛 忠孝 서로 화합하여 우애있게 충효를' 문구가 눈길을 끈다.
문패의 문구가 아름다운 오미리 하죽마을 민가를 다시 바라보았다.
오미리 하죽마을 민가 장독대 위의 작약꽃 벽화와 '꽃보다 고운 당신을 사랑해요' 문구가 가슴을 물들인다.
오미 0.4km 지점, 하죽마을 대내길에서 섬진강 북쪽의 토지면 들녘과 그 남쪽의 오봉산, 왼쪽의 계족산을 다시 살폈다.
지리산숲놀이 농촌유학센터 한옥민박 감나무집이 자리한다. 출입구 오른쪽 석류나무에 붉은 석류꽃이 흐드러진다.
대내길은 감나무집부터 도로명이 운조루길로 바뀐다. 오미리 들녘은 모내기를 끝낸 논들이 펼쳐져 있고, 들녘 건너편 오른쪽에 운조루유물전시관, 그 왼쪽 아래에 곡전재, 그 뒤 섬진강 건너편에 오산이 우뚝하며, 오른쪽 운조루길에 서어나무가 그윽하다.
운조루길의 서어나무는 높이 18m, 나무둘레 3.2m이며, 수령은 290년이 넘었다.
오른쪽은 운조루 가는 길, 정면 앞쪽의 오미정에서 지리산둘레길 16구간 탐방을 마친 뒤 운조루를 탐방하기로 한다.
왼쪽은 곡전재길, 오른쪽 운조루길을 따라 오미정으로 이어간다. 오미마을 버스정류소 맞은편에 오미마을 유래비가 서 있다.
곡전재 갈림목에서 걸어온 오미리 하죽마을을 돌아보았다. 오른쪽 뒤 산중턱의 솔까끔마을, 왼쪽 뒤 왕시루봉능선을 확인한다.
곡전재 갈림목에서 동쪽으로 토지면 들녘을 바라본다. 중앙 뒤에 토지면사무소가 있는 구산리 시가지, 왼쪽 뒤에 국사봉, 오른쪽 맨 뒤에 호남정맥 백운산 산줄기가 가늠된다.
곡전재 갈림길 구석에 세워진 오미마을 유래비 옆에 송정 10.4km, 방광 12.3km 지점을 알리는 지리산둘레길 이정목이 서 있다.
영조 52년(1776년)에 문화류씨 유이주(柳爾胄)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금환락지(金環落地)에 운조루(雲鳥樓)를 지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 전에는 오동이라 불렸다. 오동은 내죽, 하죽, 백동, 추동, 환동을 말한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으로 둘러싼 산들이 길하며, 물과 샘이 족하고, 풍토가 모두 질박하며, 터와 집들이 살아가기에 좋다 하여 오미리(五美里)라 불리고 있다.
운조루길을 따라 오미마을 공원의 오미정 앞으로 이어간다. 오미정 난간에 지리산둘레길 스탬프함이 설치되어 있다.
오미정 난간 기둥 옆에 지리산둘레길 스탬프함이 설치되어 있으며, 오미정 아래에 운조루유물전시관이 자리한다.
지리산둘레길 상징조형물 벅수 옆에 '송정-오미·오미-방광·오미-난동' 시종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운조루고택 탐방
지리산둘레길 16구간 탐방을 마친 뒤 운조루고택을 탐방하였다.
지리산둘레길 16구간 탐방을 마친 뒤 방금 지나온 운조루 출입구로 들어간다. 출입구에 연지가 조성되어 있고, 그 뒤에 솟을대문이 있다. 맨 뒤쪽에 왕시루봉능선이 가늠된다.
오미마을은 풍수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땅으로 마을 뒤로는 노고단 형제봉능선(월령봉능선)이 뻗어 내려오고 마을 앞으로는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섬진강이 흐른다. 풍수지리에서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 오보교취(五寶交聚, 금·은·진주·산호·호박 등 5가지 보물이 쌓인 터), 금귀몰니(金龜沒泥, 금거북이 진흙 속에 묻힌 터)의 3대 명당으로 꼽히는 운조루가 있는 마을이다. 운조루란 이름은 도연명의 칠언율시 ‘귀거래사’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때 유이주(柳爾胄)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다. 조선 후기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이다. 운조루는 일종의 택호에 해당하는데, 원래는 큰사랑채 이름이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이다. 또한, 운조루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쌀독을 두어 주위의 배고픈 사람이 쌀을 가져갈 수 있게 하는 나눔의 정신을 실천해 귀감이 되고 있다. 150여 점의 유물이 보관 전시되어 있는 운조루유물전시관은 운조루의 역사와 삶의 모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 지리산둘레길
운조루 출입구의 연지를 지나 운조루고택 솟을대문 앞으로 이어간다. 중앙 뒤에 지리산 왕시루봉능선이 보인다.
운조루(雲鳥樓)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또는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운조루고택 앞으로는 수로가 흐르고, 그 뒤에 운조루고택 설명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솟을대문 앞에 타인능해 뒤주가 있다.
구례 운조루고택은 영조 52년(1776)에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것으로,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대표 건물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집터가 금환락지(金環落地) 형세로 남한 3대 길지의 하나라고 한다. 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와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一'자형이나 'ㄱ'자형 안채가 많은데, 이와 달리 운조루 고택은 'ㄷ'자형의 안채와 '丁'자형 사랑채를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트인 'ㅁ'자 형식이다. 이 형식은 경상북도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운조루를 세우기 시작한 해는 1771년으로 유이주가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고 살았던 집의 형식으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운조루는 7년이라는 긴 공사 기간을 거쳐 1776년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의 초기 모습은 1800년대에 그린 것으로 추정하는 <전라 구례 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의 '他人能解'가 적힌 뒤주는 쌀 두가마니 반이 들어간다고 한다.
류이주가 집을 지은 12년 후에 작성한 長子區處記(장자구처기)에 따르면 이 집은 78칸 집이었다. 가도에서 볼 수 있는 집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주변의 부속채 집까지 아울러 흔히 '아흔아홉 칸' 집이라 불렀다. 현재 남아 있는 칸수는 모두 73칸 129평이다. 담장의 길이가 동서로 165자, 남북으로 156자로 모두 710평의 집터이다. 크게 나눠 안채, 사랑채, 행낭채, 제실로 나눌 수 있다. 사랑채는 큰사랑, 아랫사랑채로 나뉘고 주인은 큰사랑채에 거처하면서 손님을 맞거나 손님을 재웠다. 큰사랑채 서쪽에 세 방향이 툭트인 누마루가 있어서 여름거처로 쓰였다. 이 사랑채에 二山樓(이산루) 足閒亭(족한정) 雲烏樓(운조루) 歸晚窩(귀만와) 등 현판이 걸려있다. 큰사랑채에 잇대 ㄱ자 형으로 대문쪽으로 뻗은 아랫사랑채에도 누마루가 있고 이곳을 歸來停(귀래정)이라 한다. 아랫사랑채는 弄月軒(농월헌)이라고도 했다. 안채는 사랑채 사이의 중문을 통해 들어간다. 안주인이 거처하며 자식들과 며느리가 산다. 부엌과 찬칸, 곡간, 대청들이 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행낭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남쪽 담장 대신 18칸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헛간과 창고, 마굿간 등으로 쓰이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 솟을 대문 동쪽으로 작은문이 있어서 옛날에는 안주인이 출입했다. *<금환락지金環落地> 향토문화진흥원 1992년 중 발췌 및 각색
솟을대문을 들어와 서행랑채를 살폈다. 대문에 '虎'와 '建陽多慶' 글씨 종이가 붙어 있고, 그 옆에 운조루 종부가 앉아 있다.
사랑채 마당에서 왼쪽의 큰사랑채와 오른쪽의 바깥사랑채를 살핀다. 사랑채에는 모두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귀래정이라 불린 바깥사랑채에 암수재(闇修齋) 현판이 붙어 있고, 기둥에 '學而時習之不亦說乎'와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주련이 새겨져 있다. 바깥사랑채 누마루 아래에 수동 탈곡기가 놓여 있다.
큰사랑채의 당호가 운조루였는데, 집 전체를 이루는 당호가 되었다.
중문을 통해 들어가면 큰사랑채 아궁이에 가마솥이 앉아 있다.
신부가 타고온 꽃가마일까? 운조루 안댁 여인들이 탔을 가마일 것이다. 康福寧이 적혀 있다.
안채 마당에 장독대가 있으며 목련나무가 자란다.
안채는 오른쪽에 안방과 대청마루, 왼쪽에 건넌방이 있다.
안채 건넌방 바깥벽에 꽃그림이 붙어 있다.
안채의 중심 안방과 대청마루를 살폈다. 안방 바깥벽에도 꽃그림이 붙어 있다.
안채 건넌방 앞에 돌절구와 돌확이 놓여 있다.
안채 뒤뜰에 가래굴이 설치되어 있다. 배고픈 이웃이 허기를 느낄까 봐 밥 연기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안채 건넌방 아궁이 세 곳에 가마솥이 각각 앉아 있다.
찬칸에 장(醬)들을 보관하는 여러 옹기들이 놓여 있다.
안채 옆 뒤뜰 사랑채 담장 뒤에 우물이 있다.
운조루 우물을 살피고 큰사랑채 누마루 옆으로 나왔다.
큰사랑채 앞에서, 솟을대문 양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동행랑채와 서행랑채를 살폈다.
운조루유물전시관 탐방
운조루고택을 탐방하고 요기한 뒤 운조루유물 전시관을 탐방하였다.
운조루유물전시관 설명안내판을 읽어보고 유물전시관으로 들어간다.
운조루유물전시관은 조선후기부터 300여 년간 구례 오미동에 터를 잡고 살아온 문화류씨가의 역사와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전시된 유물은 운조루에서 대대로 소장해 온 것이다. 운조루는 조선후기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 1726~1797)가 1776년(영조52)에 세운 99칸(현존73칸)의 가옥으로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운조루란 이름은 원래 사랑채 당호(堂號)로써 도연명(陶淵明)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
운조루 유물전시관은 2012년 7월 공사를 시작하여 전시실 1동, 화장실 1동, 주차장 및 야외 휴게시설 등을 갖추고 2014년 11월에 준공하였고, 2016년 4월 19일 개관하였다고 한다. 전시관 입구는 오른쪽, 출구는 왼쪽이다.
●운조루는 조선후기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 1726~1797)가 1776년(영조52)에 세운 99칸(현존73칸)의 가옥으로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운조루란 이름은 원래 사랑채 당호(堂號)로써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 ●운조루유물전시관은 조선후기부터 구례 오미동에 터를 잡고 살아온 문화 류씨가의 역사와 삶의 모습이 전시된 공간이다. 이곳에 전시된 유물은 300여 년 동안 운조루에 소장되어 온 것으로 운조루 사람들, 풍수지리, 운조루 기록물, 운조루의 생활 모습 등의 주제로 나누어 전시하였다. 곳곳에 배치된 영상, 모형 등이 유물과 조화를 이뤄 운조루에 깃든 정신과 우리네 선조들의 삶의 모습 등 운조루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조선시대 양반가옥 '운조루(雲鳥樓)'는 조선시대 양반가옥으로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운조루 사람들은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 얼굴을 대하지 않고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사랑채와 안채 중간지점에 통나무 속을 비워 만든 뒤주를 놓고 쌀을 채운 후 마개에다가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습니다. '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열어 쌀을 가져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뒤주에는 쌀이 약 2가마니 반이 들어갔는데 운조루 1년 소출의 약 20%인 36가마니를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베풀기 위한 용도로 썼습니다. ●운조루는 도연명(陶淵明)의 칠언절구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두 구절의 머리글자를 따와 지었다고 한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를 돌아나오고(雲無心而出岫운무심이출수), 새들은 날다 지치면 돌아올 줄 아네(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1대 류이주(1726~1797)부터 10대 류홍수(1954~2017)까지 운조루를 지킨 사람들을 소개한다.
운조루의 현판 '귀만와(歸晩窩)'와 '운조루(雲鳥樓)'를 전시하고 기록물과 소개글이 전시된다.
유이주가 선대의 거주지인 경상도 대구에서 구례로 이거해 오미동에 터전을 닦고 살기 시작한 것은 1776년(영조52) 무렵이다. 그는 구전되던 명당에 터를 잡아 운조루를 짓고 새로운 류씨가문의 티를 마련하여 대대손손 가문이 번성하기를 꿈꿨다. 류이주는 풍수설에도 밝아 구례의 귀만(현재의 오미동)에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리하고 삼수의 유배지에서 돌아와 형(류이혜)와 가족들을 모두 이끌고 이 타향에 들어왔다. ··· 세상사람들이 이 오미동의 집터를 길지라고 했었으나 바위가 험하여 누구도 감히 집터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하늘이 이 땅을 아껴두었던 것은 비밀스럽게 나를 기다리신 것'이라 하면서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해 그날로 터를 닦고, 4촌동생(류이익)의 집도 곁에 지어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류이주의 행장' 중에서) 운조루는 7년의 긴 공사기간을 거쳐 1776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1800년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 구례 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를 통해서 건립 초기 운조루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오미동의 풍수지리 : 오미동은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의 산들이 다섯 별자리가 되어 길하고, 물과 샘이 풍족하며, 풍토가 윤택하여 다섯 가지가 아름답다'라고 하여 오미동(五美洞)이라 불렀다. 풍수적 형국은 마을 뒤편으로는 지리산 노고단(老姑檀, 해발 1,506M)의 남쪽 능선들이 이루어 놓은 포근한 계곡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이들 사이로 흐르는 계천들이 만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섬진강의 큰 줄기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입지환경을 갖춰 풍수지리의 큰 명당자리로 손꼽힌다. 또한 마을의 앞쪽 섬진강 건너편에는 안산인 오봉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계족산이 주작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에 왕시루봉과 서쪽의 천왕봉이 있어 좌우의 청룡, 백호로 불려진다.
금환동(金環洞) :『한국의 풍수』(조선총독부 조사자료 21집, 민간신앙, 제2부)에 구례 오미동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910년대 초부터 전국 각지로부터 이주자들이 모여드는 곳으로서 이곳에 100여호나 옮겨왔으며, 이런 추세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는 이곳 어딘가에 유명한 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까닭이다. 비기(秘記)에는 이 지역에 3개의 명당이 있으며, 금환락지(金環落地)라는 것이 상대, 금구몰니(金龜沒泥)가 중대, 오보교취(五寶交聚)가 하대라고 불려지는데 이곳을 찾아 집을 짓고 살면 크게 힘쓰지 않고도 하늘의 도움을 얻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는 금환락지에 해당하는 금가락지가 떨어진 장소라 하여 금환동으로 불려졌다.
금환락지 : 풍수가(地士)들은 한반도를 미인 형국으로 보았고 지리산 자락의 구례를 미녀가 무릎을 꿇고 앉으려는 자세의 중심부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미녀가 금가락지를 빼놓은 곳이 명혈(名穴)이 된다고 하였는데, 운조루의 자리가 명혈에 해당한다. 가락지는 여성들이 간직하고 있는 정표로서 출산할 때와 같이 중요한 경우에만 빼놓는 것이 상례로, 금환락지라는 곳은 풍요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 금환락지는 지리산의 선녀가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를 감으려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도 하고 그때 비녀도 떨어뜨렸는데, 그곳을 금잠락지(金簪落地)라 표현하기도 한다. 토지면의 원 지명도 가락지를 토해 냈다는 토지면(吐指面)이었다고 하는 바, 풍수형국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금구몰니 : 류이주가 잡은 터는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혀 있다는 금구몰니 명당이라고 한다. 특히 금거북(金龜)은 하늘에 사는 영물(靈物)로서 천구(天龜)라 하며, 천지의 기운을 흡수하여 만물을 낳는다고 한다. 금거북이 진흙에 빠지는 것은 오행(五行)의 상생관계에서 토생금(土生金: 토에서 금이 생긴다)에 해당하며, 이러한 지세를 택지(宅地)로 삼는 것을 대길(大吉)로 여긴다. 집터를 잡으면서 땅을 파보니 금구몰니의 명당을 입증이라도 하듯 어린아이의 머리 크기만한 돌거북이가 출토되었다. 그래서 집을 앉힐 때 부엌 자리에 불을 때기 때문에 거북이가 말라죽는다고 거북이가 나온 곳을 습기 많은 부엌 자리로 배치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보교취 : 오보(五寶)는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다섯 가지 보물을 가르킨다. 오보는 이 다섯 가지 보물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하늘의 도움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명당이다. 특히 상대 금환락지, 중대 금구몰니, 하대 오보교취 세 명당 가운데 하대인 오보교취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라고 한다.
한국의 명당
1. 두 명의 황제를 배출한 충남 예산 남연군묘 : 남연군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하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이다. 1822년 남연군이 죽은 뒤 한 지관이 흥선군을 찾아와 명당자리를 알려 주었다고 한다. 지관(풍수가)은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가야산 동쪽의 땅과 만대에 영화를 누릴 광천 오서산을 지목하였다고 한다. 1863년에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 재황은 철종의 뒤를 이어 12살의 나이로 왕위로 오르게 된다. 이어 그의 아들도 후에 순종이 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의 명칭을 얻게 되었으니 가히 2대 천자를 낳은 땅이라고 볼 수 있다.
2. 조선 최고의 상류 주택, 강원도 강릉 선교장 : 선교장은 효령대군의 11대손인 이내번이 1703년에 건립한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가옥 내에서 가장 좋은 살림집은 별당이다. 이 가옥은 쇠락해 후일 신축했지만 집터로서는 가장 좋은 곳이다. 부속건물로 지은 초가도 양택지로서는 흠잡을 데가 없다. 선교장이 음택지라면 현재 별당이 들어서 있는 곳은 양택지다. 양택이나 음택이나 명당으로서 길지임에는 틀림 없지만 그 규모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음택지는 좁아도 되지만 양택지는 넓어야 한다. 선교장의 터는 혈이 강하게 맺혀 있고 별당의 터는 약하게 맺혀 있다. 그로 인해 선교장은 식복이 늘어진 자리라고 볼 수 있다. 큰 인물이 나올 자리라기보다는 먹고 살기 좋은 만석꾼의 집이 된 연유이다.
3. 공작이 알을 품은 유서 깊은 고찰, 강원도 홍천 수타사 : 영서지방의 명산 공작산은 수타계곡을 깊숙이 품고 있는 명산이다.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명당에 유서 깊은 고찰 수타사가 있다. 수타사는 성덕왕 7년인 708년에 우적산 아래 일월사로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원효대사는 686년에 입적하였으므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4. 병마와 환란이 들지 못하는 십승지지, 경북 예천 금당실마을 : 경북 예천 용문면 일대는 예부터 금당실 마음을 위시하여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다. 정감록에서는 이곳을 '병마와 환란이 들지 못하는 곳인 십승지지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왕건과 관련되어 번성한 용문사와 예천권씨 종택, 초간정 등이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운조루의 평면 구성 안내도와 그에 해당하는 건물의 사진을 전시한다.
운조루 전체 모습을 모형물로 제작해 전시한다.
운조루 소장문서 가운데 일기류인 시언, 기어, 농가일기, 전가일기, 조선후기~한말 향촌문서 등은 가정사뿐만 아니라 조선후기부터 일제시기까지 사회경제적 변화, 농업경영 등 농촌생활의 모습이 현실성 있게 묘사되어 있다.
●시언 : 류제양(1846~1922)의 친필일기. 1851~1922년의 기록이 담겨져 있으며, 총 7권 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한말 서구문물의 유입과 그에 따른 위기감, 농촌사회의 변화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기어 : 류형업(1886~1944)의 친필일기. 1898~1936년의 기록이 담겨있으며, 총 38권 31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류제양)의 가르침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할아버지가 시를 많이 쓴데 비해 일상생활을 상세하게 적어 대한제국의 패망과 3.1운동, 지적측량, 신식학교제도 등 근대화과정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운조루에 소장된 자료의 대부분은 기록물로서 ①고서류 ②고문서 ③조선후기~한말 향촌문서 ④류씨가 지주경영문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자료들은 조선후기부터 일제시대까지 운조루와 운조루 사람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당시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관직의 유무와 높낮이는 혼인을 비롯한 사회적 지위를 좌우하며, 혼인은 경제적 부와 직접적 상관관계가 있다. 운조루 류씨가는 창건 류이주(柳爾胄)부터 대대로 무과로 입신한 무반가문으로, 류이주와 그 손자 류억은 각기 군수(郡守)와 부사(府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류이주의 아들 류덕호는 구례지역 부호이면서 역시 무관출신자인 이시화(李時華)의 딸과 혼인하였다. 교지, 분재기, 호적 등을 통해 대구에서 구례로 옮겨와 살기 시작한 초기인 류이주에서 손자 류억에 이르는 시기에 구례지역에서 확고한 사회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음을 알 수 있다. 운조루의 고문서에는 유독 토지명문이 많다. 이것을 통해 운조루에서 많은 토지를 매득했음을 알 수 있으며, 500여 건에 달하는 토지명문은 물가와 소유권변동을 비롯한 상업사, 경제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나눔과 베풂 정신 : 행랑채에 쌀 두가마니 반이 들어가는 목독을 놓아두고 가난한 이웃이 끼니를 끓일 수 없을 때 언제라도 쌀독의 마개를 돌려 쌀을 빼다가 밥을 지어 먹도록 하였다. ●수분 정신 : 아들이 기거하는 누마루에 '수분실(守分室)' 이라는 현판을 걸고 세상을 살아갈 때 자신의 분수에 맞는 생활태도를 갖도록 하였다. ●풍류 정신 : 매천 황현과 같은 시인 및 문우들과 시조를 지으면서 담소를 즐겼다. ●인간존중 정신 : 운조루 건축시 여성을 위한 공간인 안사랑채와 남성을 위한 공간인 사랑채를 대등한 위치에 좌우로 배치하였다. ●기록 정신 : 100여년간 생활 일기와 농가 일기 및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사회조직문서와 지세분정기를 남겼다.
●선정 정신 : 낙안군수 재직 시 안민하고 청빈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다른 부임지로 옮겨갈 때 모든 군민이 길거리에 엎드려 울며 붙들었다고 전한다. ●건축을 사랑한 정신 : 류이주는 수원유수로 재직하면서 수원화성의 축성 감독을 하였다. 정조대왕으로부터 수원성을 아름답고 잘 쌓은 공로를 인정받아 특진하였다. ●선비 정신 : 일제강점기 조선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이었던 창씨 개명을 끝까지 반대하고 선비로서의 절개를 굳건히 지켰다. ●효도 정신 : 생활일기는 부모님에 대한 공양과 묘지를 가꾸고 제사를 모시는 일에 대한 기록이 많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집안에 마련된 가빈터에서 석달 동안 시신을 모신 후 묘지에 안장하였다. ●겸애 정신 : 가난한 이웃의 시선을 배려하여 밥 짓는 연기가 멀리서 보이지 않도록 굴뚝을 처마 밑에다 만들었다. ※운조루 정신은 류이주의 8세손인 류응교에 의해 정리된 내용이다. 류응교는 운조루에서 출생하여 현재 전북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관례, 혼례, 상례, 제례 풍습 모형물과 용구와 용품들을 전시한다.
'살기 좋은 터'를 찾는 풍수지리 : 풍수지리는 산, 땅, 강 등 자연의 형세와 그 기운이 인간의 길흉화복이나 나라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친다는 관념이다. 즉, 음양오행을 바탕에 두고 인간이 자연 속에서 건강하고 안락하게 살아갈 터틀 구하는 일종의 지리관인 것이다.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를 줄인 말로, 장풍은 바람을 감추는 것이고 득수는 땅의 생기(生氣)를 머무르게 하는 것을 뜻한다.
풍수지리는 어디에 쓰이는가 ●풍수지리는 쓰임에 따라 크게 양택풍수(陽宅風水), 음택풍수(陰宅風水), 양기풍수(陽基風水), 비보풍수(裨補風水)로 나뉜다. ●양택풍수 "사람이 어떤 집에 살아야 건강하고 행복을 얻는지 탐구" : 땅의 형세를 살펴서 산수가 조화롭고 오행의 상생에 따라 생기가 창성한 곳을 택해야 복을 받는다. 장풍과 득수가 되는 곳 즉, 바람을 감추고 물을 가까이 접하며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장소를 길지로 본다. ●음택풍수 "묘지를 길지에 두어서 영혼과 유골의 편안함을 추구" : 조상들은 자연의 생명력이 왕성한 길지에 묘를 써서 영혼과 유골의 편안함을 구하고자 하였다. 묘의 영향이 후손에게 널리 미치고 뼈가 존재하는 한 복(福)이 오래도록 계속된다고 믿었다. ●양기풍수 "마음과 도읍의 입지 선택" : 지상을 흘러 다니는 생기는 산천지형의 모양에 따라 땅과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때문에 사람이 거주하는 마을이나 도읍은 산을 등지고 물을 가까이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위치하였다. ●비보풍수 '결함이 있는 터를 좋은 땅으로 전환" : 사람들은 주거지에 결함이 있거나 지기가 쇠약해도 그곳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사람의 힘으로 지기(地氣)를 바꿔 지력(地力)을 회복하려 하였다.
명당이란? 인간은 누구나 보다 좋은 환경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좋은 주거지는 기를 잃지 않고 생기를 얻을 수 있는 장풍과 득수에 의해 형세의 조화가 이루어진 곳이다. 풍수지리적으로 양택지와 음택지의 조건은 배산임수이다. 차이점은 양택지에는 건물을 짓고, 음택지에는 묘를 쓴다는 것이다. 배산임수는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라는 뜻으로 건물을 지을 때 이상적으로 여기는 배치이다. 집터는 앞이 좁고 뒤가 넓은 전착후관(前窄後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풍수해(風水害)와 같은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주변 지형보다 높게 하고, 앞을 낮추고 뒤를 높이는 전저후고(前低後高)를 고려해야 한다. 배산임수에서 바람, 물, 방위는 좋은 터의 중요한 요소이다. 사람이 살기 좋은 터는 산을 등지고 물을 구할 수 있거나 햇볕이 잘 들고 바랍이 잘 통하는 곳이다. 또한 주변에는 현무, 주작, 청룡, 백호가 잘 형성되어 감싸고 있어야 한다.
풍수지리의 도입 : 풍수지리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사상 가운데 하나로 예로부터 국가 정책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에 깊게 영향을 미쳤다. 생활양식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듯이 풍수지리 또한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우리나라 풍수지리는 자생설, 유입설, 혼합설이 있다. 우리나라에 풍수지리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유의 풍수지리가 있었다는 것은 여러 역사적 증거를 통해 알 수 있다. 중국으로부터의 유입설은 통일신라 말엽에 승려들이 당나라에서 배워 옴으로써 유입되었다는 설이고, 혼합설은 고유의 풍수적 사고 방식에 체계화된 중국의 풍수 이론이 합해진 것으로 보는 설이다.
고대 : 우리나라 풍수지리는 산악지의 지리적 환경과 산악숭배사상, 지모사상, 영혼불멸사상, 삼신오제사상 등에 의하여 발생하였다. 신라 4대 왕인 탈해왕이 집터를 잘 잡아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경주 숭복사를 창건할 때 산수를 봤다는 이야기,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 등을 통해 풍수지리가 국가 경영 뿐만 아니라 민간생활에도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풍수지리는 통일신라 말기에 활발해진 중국과의 문화교류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후삼국시대에 등장한 호족들은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자신의 거점을 명당이라 강조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합리화하였다.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왕건의 아버지에게 집터를 잡아주며 왕건의 출생을 예언하였고, 분열된 후삼국의 통일과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할 당위성을 풍수지리에서 찾았다.
중세·근세 고려시대 : 고려시대에는 사찰과 왕궁의 입지, 지배층의 주거지 등을 결정하는 양택풍수가 유행하였다. 고려의 통치에 중요한 기준이 되는 <훈요 10조>는 풍수지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제2조 "(도선이) 점쳐서 정한 곳 외에 함부로 사원을 지으면 지덕을 손상시켜 왕업이 영원히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제5조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 된다."에 잘 나타나 있다. 고려는 산천비보도감이란 관청을 설치 운영하여 산천의 지기 복원을 연구하며 국운 연장을 기원하였다. 고려에서 특히 유행했던 비보풍수는 국토의 효율적 관리와 균형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역대 고려 왕들은 수도 개경 외에 서경(평양), 동경(경주), 남경(서울)을 설치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지덕을 얻고자 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지방세력을 견제하려 하였다. 또한 풍수지리는 묘청의 서경 천도설, 보우의 한양 천도설, 신돈의 서경·충주 천도설 등의 명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 풍수지리는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성계가 수도를 한양으로 정할 때 풍수지리가 중요한 이론이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울러 조선에서는 과거(잡과)를 통해 지관(地官)을 선발하여 궁궐과 왕릉, 관청의 터 선정과 같은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풍수지리는 도읍 선정, 토목 공사, 지방 통치 등에 활용되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 풍수지리는 유교의 효 사상과 결합하여 음택풍수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풍수지리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가 사회문제로 발생하였고, 이는 조선 후기 정약용(丁若鏞)과 박제가(朴齊家) 등 실학자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근대·현대 :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전통 문화와 사상은 탄압받았고, 풍수지리 역시 잡술, 미신으로 치부되어 쇠퇴하였다. 침체된 풍수지리는 해방 후에도 미신으로 격하되었고, 한국전쟁을 통하여 물밀듯이 들어온 서구문화의 영향으로 비합리적인 것으로 천시받았다. 특히 장묘문화가 급속히 매장에서 화장으로 바뀌면서 풍수의 한 축이었던 음택풍수가 쇠퇴하였다. 명맥만 유지하던 풍수지리는 1980년대 들어서 일부 학자에 의해 학문적으로 연구되는 한편,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가유산의 보호 및 관리, 역사교육과 관광자원 활용에 응용되고 있으며 도시개발과 건축, 조경, 인테리어 등 여러 분야에 접목되어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완복지지(完福之地) 구례 :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 구례는 삼대삼미(三大三美)의 고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대는 지리산, 섬진강, 들판이고 삼미는 아름다운 경관, 넘치는 소출, 넉넉한 인심이다. 도선국사가 산수를 유랍하고 기록하였다는 <옥룡자 유산록(玉龍子遊山錄)>에 구례는 땅이 비옥하여 살기 좋은 고장이라 '완벽하게 복 받은 땅' 즉, 완복지지(完福之地)로 평가되었고 문장가가 많이 배출될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처럼 예로부터 구례는 사람이 살 만한 땅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는 길지로 알려져 왔다. 현재 구례가 대한민국 대표 장수 고장이 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구례는 토지면의 운조루와 곡전재, 마산면의 쌍산재, 도선국사가 풍수지리를 공부했던 지리산과 사성암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명당이 있다. 특히 선녀가 지리산에서 목욕하고 올라가는 도중 금가락지를 떨어뜨렸다는 토지면 일대의 금환락지는 명당 중의 명당이었다. "구례는 성곽이 견고하여 완복지지(完福之地) 되겠구나. 그 아래 오봉귀소(五鳳歸巢)의 명당은 음양택(陰陽宅)이 모두 좋다. 문장가와 재사(才士)가 많이 날 것으로 호남(湖南)의 명승지(名勝地)이다." - <옥룡자 유산록(玉龍子遊山錄)> '구례'편 중에서
하늘이 내린명당 운조루(雲鳥樓) : 운조루는 1776년(영조52)에 건립된 살림집이다. 건축주 류이주(柳爾胄)는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역임하였고, 천문과 풍수지리에 정통한 전문가였다. 운조루는 지리산을 배산으로 하고, 섬진강을 임수로 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입지이다. 집터는 풍수지리 3대 명당 중 하나인 금환락지로 풍요와 부귀영화가 메마르지 않는 땅이다. 한편 운조루는 건축 중에 거북이 형상의 돌이 발견되어 또 다른 3대 명당인 금귀몰니로도 불렸다. 이에 따라 운조루 근방에 또 다른 명당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그 결과 오미리와 금내리 일대에는 예로부터 좋을 땅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풍수지리 3대 명당 : 금구몰니(金龜沒泥) 금거북이 진흙 속에 묻힌 터, 금환락지(金環落地)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 오보교취(五寶交聚) 다섯 보물(금, 은, 진주, 산호, 호박)이 섞여 있는 터
금가락지 모양의 곡전재( 穀田齋) : 곡전재는 1929년에 건립된 살림집이다. 운조루처럼 배산임수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환락지에 해당되는 터이다. 곡전재는 섬진강을 따라 생긴 바람으로 인해 집이 건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문을 시작으로 집 주변에 높이 250㎝에 달하는 돌담을 둥글게 쌓아 금가락지를 형상화하였다. 원형의 택지는 부귀와 덕망을 얻는 형태로, 기세가 번창하고 재물이 가득하며 살기에 편안한 형태이다. 또한 큰 길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곳에 진입로를 내지 않고, 옆 담장으 로 출입하였는데, 이유는 풍수적으로 집안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뒷산 규봉(窺峯, 도둑 봉우리)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도선국사가 수행한 사성암(四聖庵) : 사성암은 문척면 오산 정상 부근의 깎아지른 암벽을 활용하여 지은 암자로, 처음에는 오산암으로 불렸다. 이후 우리나라의 풍수지리 사상을 정립한 도선국사가 도를 닦고, 원효와 의상, 진각이 수행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자라 모양의 오산은 풍수지리적으로 백두대간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응집시켜 주는 역할을 하여 '수구막'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정상에 단단한 바위들이 밀집되어 있어 강한 기운을 갖고 있다. 특히 산왕전은 뒤쪽 바위에서 내려오는 맥이 좌우 암벽에 의해 강하게 조여지는 명당 중의 명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