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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위 치 : 전남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621 o 연락처 : 061-863-6446 팩스 061-863-9847 017-633-4861 017-642-5491 |
2007호계문화예술회관 개관기념 학술발표회
호계리의 역사와 문화
제1주제
전남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別神祭 / 1
나경수(전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제2주제
호계리 소장 교지와 진무원종공신녹권에 관한 연구 /23
노기춘(전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
제3주제
호계리․장항리의 역사와 문화 / 33
김상원(호남대학교 고문)
자료
장흥 호계리 문화예술회관 / 39
전남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別神祭
나경수(전남대학교)
Ⅰ. 서언 Ⅱ. 마을 개관과 조사 상황 Ⅲ. 別神祭의 실제 Ⅳ. 儀禮와 典籍 검토 Ⅴ. 결론 |
Ⅰ. 서 언
별신제는 경상도 및 강원도 일원에서 많이 쓰이는 말로, 매년 모시는 골맥이제와는 달리 몇 년에 한번씩 마을단위로 모시는 제사를 지칭한다. 광주와 전남 일대에서 별신제라는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또한 몇 년에 한번씩 모시는 형태의 마을제사도 없다. 그런데 유독 장흥지역에서만 특이하게도 별신제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본고에서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외에도 용산면 운주리와 관산면 방촌리 등에 그 유례가 보인다. 이들은 매년 모시는 전형적인 마을제사이면서도 그 명칭과 양식을 약간 달리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이들 별신제들이 보이는 양식의 공통성은 정형화된 官祭形式을 빌어왔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호계리 별신제는 제례형식 거의 전부가 사직제나 석전제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조선조 후기에 여러 관제들이 민간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1) 이 마을의 별신제는 숙종 41년(1702)에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후 만들어진 大洞刱契 및 大洞契案과 역사를 거의 같이한다는 점에서 조선조 후기의 문화사적 변화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들 책과 축문, 홀기 등을 저술한 만수재 이민기(1646-1704)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이 지역에 계속 머무르면서 학문을 연찬했던 사람이다. 또한 마을 뒤쪽 개울을 건너면 소나무 숲 언덕에 동백정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전형적인 반촌이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한편 장흥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동학혁명 최후의 격전지로서 치열한 전투가 치러진 고장이다. 최근 재조명되기 시작한 동학운동은 과거의 ‘동학란’에서 이제 ‘동학혁명’으로 그 명칭이 바뀐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에 의해서도 그렇고 소위 지배자 논리에 의해서 오랫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아오지 못해 왔다. 동학운동이 이 지역에서 치열하게 일어났으며, 또한 격전지로 선택된 배경에는 동학의 주체세력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세력간의 첨예한 대립이 자리잡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누르는 힘이 강했기에 튀는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스프링의 원리와 같은 사회구조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장흥지역에는 소위 유교문화 또는 양반문화가 비중있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훌륭한 학자와 시인묵객의 배출도 많았다. 부산면 호계리의 별신제 역시 이러한 장흥지역의 두터운 유교문화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역사적 문화자료로서 그에 대한 집중적 연구가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연구과제만 예거하더라도, 첫째 별신제가 가지는 민간신앙으로서 의미, 기능, 가치에 대한 연구, 둘째 그것을 모시게 되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거르지 않고 관련된 기록들을 남기도 있다는 측면에서 역사 고증적 측면의 연구, 셋째 별신제와 사회구조간의 관련성 연구, 넷째 동학혁명과 유교문화의 대립적 상관성에 대한 연구, 그리고 계승발전 및 축제화나 관광자원화라는 측면에서의 연구 등 다양한 주제를 안고 있는 대상인 셈이다. 또한 이러한 연구는 이 마을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광주․전남의 다른 마을들이 민간신앙에 관련된 문헌자료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보면 이 마을에서 얻어진 어떤 결과들은 다른 마을에도 적용이 가능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앞으로 확대된 연구도 기대된다.
본고는 이들 과제를 모두 총괄할 수는 없어 우선 충실한 조사보고서의 형식으로 꾸며지며, 특히 가장 두드러진 의례와 문적에 대한 설명을 부기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앞으로 호계리 별신제에 대한 연구가 앞에서 예거한 바와 같은 문제들과 관련해서 심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구하는 정도의 선에서 본고의 목적을 찾는다.
Ⅱ. 마을 개관과 조사 상황
호계리는 장흥읍에서 보성읍으로 가는 국도 2호선 길목에 위치해 있으며,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 북쪽으로는 虎溪라 부르는 내가 흐르고 있고, 동남쪽으로는 산이 둘러싸고 있지만, 서쪽으로는 부산평야와 연결되는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발달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고려 중엽 趙氏에 의해서 성촌이 되어 長田里 蛇洞으로 불리다가 천재지변으로 인해서 폐촌이 된 뒤 조선 태종조에 청주김씨들이 입촌을 하여 다시 마을이 조성되었으며, 그 후 광산김씨 重器라는 분이 장동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두 성씨가 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장동면 만년리 장항마을에 속하지만, 본래는 호계리에 속했던 곳으로서 호계 건너편 나즈막한 언덕 소나무숲 속에 동백정이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호계리의 역사와 세를 보여주기에 족한 사적 증거물로서 조선조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을 지낸 金麟(1392-1475)이 관직에서 은퇴하고 여기에 터를 잡아 假精舍를 짓고 기거한 데서 유래했다. 그 뒤 1584년 공의 후손인 김성장이 선조를 기려 이곳에 정자를 짓고 뜰앞 나무의 이름을 따서 동백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865년 새로 지은 것이며, 1985년 개보수를 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2)
본래 이 마을은 용계면에 속해 있었는데, 용계면이 부산면과 장동면으로 분면되면서 부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보성과 장흥에 걸쳐 있는 제암산 줄기에서 뻗어나와 이 마을의 동쪽에 이른 산이 호랑이 형국이라 한다. 여기서 연유하여 마을 윗편으로 흐르는 내를 호계라 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호계리가 되었다. 호계를 건너면 獐項(일명 노루목)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으며, 이는 범의 먹이가 되는 노루의 형국이라서 얻어진 이름이다. 그리고 마을 서쪽으로 큰 바위가 있는데, 이곳을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범통시”라고 부른다. 범이 뛰어가다 대변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또 지금 동백정이 서있는 부근을 한새(황새)고개라고 부르며 한새형국이라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큰 인물이 날 자리라 하여 혈을 잘랐는데 자른 자리에서 피가 흘렀더라 한다. 범의 형국 때문인지 마을이 드세었는데, 예전에는 이 마을을 지나 장흥 장에 가던 사람들이 함부로 지나다니지를 못할 정도였으며, 뭔가 상납을 하고 나서야 지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살 때는 120여 호에 이르렀다가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62호가 살고 있다. 다른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현재 마을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은 많지 않으며, 그래서 농사 역시 기계의 의존도가 높은 벼농사 중심이다.
본 마을에 대한 현장 조사는 두 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한번은 1991년 대보름 때인 2월 28일부터 29일까지, 그리고 두 번째는 2002년 역시 대보름 때인 2월 25일부터 26일 사이였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1990년도 남도문화재 민속경연대회에 장흥군 대표로 출전하여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특히 살아있는 닭의 목을 자르는 절차가 있어 인상적이었다. 또한 순수한 유교식 제차로 진행되고 있어서 이런 점들을 보다 생동감 있게 확인하고자 하여 1991년 처음 현장조사를 하게 되었다.
1991년도 조사에서는,3) 우리 조사단 일행이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가 넘어서였다. 마을회관에 들어서자 마을어른들이 모여 계시다가 반갑게 맞아주었으며, 면담조사에 충실히 응해주었다. 면담조사를 하는 도중에 마을에 보관되어 있는 문적을 꺼내 보여주었다. 대동계, 별신제, 금고 등에 관련된 문적들로 숙종조 이래 현재까지 별신제와 대동계에 관한 일련의 사항들을 적어놓고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문적을 확인하고 또 촬영도 하면서 별신제 준비에서부터 모시는 과정까지를 우선 면담조사를 통해서 파악을 하였다. 그리고 밤 10시 30분부터는 호계변 제장으로 자리를 옮겨서 현장참여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제사가 다 끝나고 나서 새벽에 광주로 돌아왔다.
2002년도 조사에서는,4) 국립민속박물관의 직원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역시 마을회관에서 면담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1991년에는 호계에 연한 제방 밑에 협소한 마을회관이 있었으나 몇년 전 현대식 건물로 마을회관을 새로 지었다. 일행은 역시 마을회관에서 면담조사를 실시하였다. 10년이 지난 뒤였으나 변한 것은 거의 없이 별신제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두 번에 걸친 면담조사와 현장조사의 상황이 담긴 녹음을 채록하면서도 역시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5)
Ⅲ. 別神祭의 實際와 口傳
1. 祭場의 구성과 祭神의 성격
호계리는 매년 대보름에 마을제사를 모셔 왔는데 두 곳에 제장이 있다. 한 곳은 별신제를 모시는 제장이고, 다른 한 곳은 당산제를 모시는 곳이다.
마을 북쪽을 따라 넓은 제방이 쌓였으며, 제방 너머 호계가 흐른다. 그 호계는 깊지 않는 내로 주변에 자갈밭이 넓다. 별신제는 그곳 자갈밭 위 일정한 자리를 잡아 모신다. 물론 자갈밭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히 일정한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매년 총회를 하고 나서 장소를 물색한다. 그러나 가령 마을 아래쪽(서쪽)에 유고가 있으면 호계 위쪽으로 자리를 잡고, 반대로 마을 위쪽(동쪽)에 궂은 일이 있으면 아래쪽으로 옮긴다고 한다. 평소 상여가 나갈 때도 이곳 별신제를 모시는 곳을 피하기 위해 길이 멀더라도 마을 앞쪽 길을 택해 돌아나간다.
이곳 자갈밭에서 모시는 제사를 별신제라고 하는데, 마을사람들은 天祭라고도 부른다. 전해지는 문적들에서는 천제라는 말을 찾을 수 없지만, 마을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래서 천제라는 말을 오히려 많이 쓰고 있다. 하늘에 제사를 하기 때문에 마을에서 가장 깨끗한 곳을 고르다 보니까 냇가에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라 한다. 매년 여름철에 큰물이 지면 바닥 청소가 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가장 깨끗한 곳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이 가지고 있는 정화력이 무의식적 지식으로 관용되고 있는 예로 보인다.
별신제에서 모시는 신은 모두 3位로서 天․地․人을 신격으로 하여 모신다고 한다. 메와 탕은 제상에 올리지 않지만, 떡이나 술은 모두 3의 숫자를 맞춰 올린다. 자갈밭 일정한 곳에 제터를 잡으면, 음력 정월 14일 오전에 생대나무를 세우고 주변에 금줄은 친다. 대나무는 28개를 세우며 제관들이 들어오도록 한 곳만 남기고 둥그런 형태로 대나무를 세워 빙둘러 금줄을 친다. 금줄은 왼새끼를 쓰며 한지를 잘라 사이사이에 끼운다. 대나무 28개는 하늘의 28宿을 뜻한다고 한다.
또 제장 주변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그날 사용할 축문을 베껴 쓰도록 하기 위하여 차일을 가설한다. 차일은 금줄 밖에 치는데 삼면은 막고 앞쪽만 트인 채로 하여 제관들이 앉아 있을 정도의 높이이다. 차일 옆에는 당일 오전에 역시 장작을 준비해 둔다. 제사를 모시기 위해 제관과 풍물패들이 제장에 도착하면 장작더미에 불을 지핀다. 전에 호계리와 함께 인근 장동마을과 만수마을이 합동으로 별신제를 모셨다. 그러나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용계면이 부산면과 장동면으로 분면되었으며, 그로 인해 같이 용계면에 속했던 세 마을 중 내를 사이에 두고 호계리는 부산면, 장동과 만수는 장동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분면이 되고 나자 행정구역이 다르고 또 여러 가지 일에서 서로 달라졌기 때문에 차츰 장동면에 속하게 된 두 개 마을에서는 참석을 꺼리게 되었고 결국에 가서는 그들 마을 사람들은 별신제에 참례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호계리만 단독으로 별신제를 모시고 있다. 세 개 마을이 합동으로 별신제를 모실 때는 대개 산지기를 하는 사람들이 나무를 한짐 씩 해왔더라고 한다. 마을에 전하는 제관록에는 나무를 지고 올 사람들의 명단도 “炬”란에 기록되어 있다. 이날 상당히 많은 나무가 쌓이게 되는데, 별신제를 모시면서 불을 지피고 남는 나무는 별신제 준비에 가장 수고가 많은 제물을 장만하는 장찬이 가져갔다고 한다.
별신제를 마치고 나서 지내던 당산제는 마을이 생기면서 심었다고 전하는 국도변 귀목나무 3주가 섰던 곳에서 모셔졌다. 그러나 당산제는 30여년 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이들 나무 마저 모두 고사하여 없어졌다. 마지막 남았던 나무마저 1997년 태풍에 쓰러졌다. 마을에서 당산제를 폐지한 후로도 인근에 살던 한 여노인이 매년 대보름에는 개인적으로 제상을 당산나무 앞에 차려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마저도 나무가 없어지자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별신제를 모시기는 3백년 전 부터요, 당산제는 1백년 전부터 모시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당산제를 모시게 된 내력과 관련해서 전하는 말들이 있다. 예전부터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려면 귀목나무가 벌이 나는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여러 차례 있었다고 전해져 왔는데, 그로 인해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모시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몇 년 전부턴가 마을 입구 국도에서 교통사고가 많이 나서 별신제를 지내고 나서 당산제를 모시던 곳에 술을 한잔 씩 붓고 풍물을 올렸으나 효험이 없는 것 같아 작년부터는 이것도 폐지했다고 한다.
당산할아버지나 당산할머니와 같은 관념은 없다. 그냥 당산이라고 하며, 별신제를 모시고 나면 따로 당산제를 모시기 위해 장만해 둔 제물을 가지고 와서 역시 같은 제관들이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별신제는 엄숙히 홀기에 적힌 절차에 따라 모시는 것과는 달리 당산제는 간단히 제물을 갖추고 초헌관만 잔을 올리고 절을 하며 당산굿을 치고 마쳤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제를 별신제의 부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도 별신제에 비해 낮게 평가하고 있다.
2. 준비 절차와 내용
매년 음력 초이래 날이면 마을 회의가 마을회관에서 열린다. 한 가정에서 한 사람씩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날 회의는 별신제를 모실 사람들을 뽑기 위한 것으로 마을 이장이 주관한다. 마을에 내려오는 별신제향제관망정(別神祭享祭官望定)에는 제사를 모실 사람들의 역할을 구분하여 적고 있는데, 아래와 같이 당연직인 반장을 제외하고 대개 21명 정도가 이날 선정된다.
초헌관(初獻官) - (1명)
아헌관(亞獻官) - (1명)
종헌관(終獻官) - (1명)
집례(執禮) - 홀기를 읽는 사람 (1명)
축(祝) - 축을 쓰고 읊는 사람 (1명)
장찬(掌饌) - 음식 준비 (1명)
전사(典祀) - 제물(祭物)을 진설하는 사람 (1명)
사존(司尊) - 제주(祭酒) 담당 (1명)
봉로(奉爐) - 향로를 담당하는 사람 (1명)
봉향(奉香) - 향불을 피우는 사람 (1명)
봉작(奉爵) - 술잔을 받들어 헌관에게 주는 사람 (1명)
전작(奠爵) - 헌관의 잔을 받들어 올리는 사람 (1명)
찬인(贊引) - 제관을 인도해 주는 사람 (2명)
장생(掌牲) -닭을 죽여 피를 뿌리는 사람 (1명)6)
포진(脯陳) - 제물을 옮기는 사람 (6명)
거(炬) - 제장에 불을 피우고 횃불을 드는 사람 (각 반장)
아래 사진이 보여주는 것처럼 망정에는 선정된 제관별로 그 이름을 적고 “회유문”이라 하여 여기 뽑힌 사람들은 별신제를 위해 일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이들을 선정할 때는 특별히 생기복덕을 보지는 않지만, 집안에 유고가 없는 깨끗한 사람만을 뽑는다. 상복을 입고 있는 가정과 아기를 낳은 가정을 가장 큰 부정이 있는 집으로 생각하며, 정월 들어 개고기를 먹은 사람이나 역시 정월에 집안에 기르던 가축이 죽은 사람도 제외된다. 특히 제물을 장만하는 장찬의 경우는 가장 깨끗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며, 그래서 가능하면 혼자 사는 여노인을 가장 선호하고, 젊은 사람의 경우는 피한다. 이날 뽑힌 사람들은 궂은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일체 가지 않는다. 예를 들면 초상이 난 집이나 산고가 든 집은 절대 가린다. 혹시 마을에 초상이 나더라도 별신제는 모시지만, 별신제를 모실 사람은 초상집에 가지 않으며, 초상집에 다녀온 사람은 별신제에 참례하지 않는다. 뽑힌 사람들에게는 글로 써서 각각 통문을 돌린다. 풍물을 칠 사람은 따로 뽑지 않고 유고가 없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굿을 친다.
마을 사람들은 제관으로 선정되는 것을 대체로 꺼린다고 한다. 춥고 귀찮을 뿐만 아니라 혹시 제사를 잘못 모셔서 개인적으로나 집안이 해를 볼까 싶어서이다. 실제로 별신제를 모시고 나서 머리가 아프고 해서 단독으로 새로 제물을 장만하여 별신제를 모신 사람도 있다고 한다. 비록 좋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마을에서 다시 날을 받아 별신제를 모시는 예는 없다고 한다. 다만 해를 본 사람이 스스로 알아서 다시 제사를 모신다. 마을회의에서 한번 뽑히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거절하지 않는 것이 통례다.
별신제를 모시기 전부터 제사에 참여할 모든 사람들이 조심하며, 비린 것을 먹지 않는다. 특히 장찬의 경우는 대문에 금줄을 걸고 문간에 황토를 파다가 한 삽 씩 듬성듬성 뿌려놓는다. 금줄을 꼴 때도 깨끗한 가정의 짚을 가져다 꼰다. 대문에 금줄이 걸리면 비록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방문을 꺼리며, 다른 사람과의 왕래를 삼가한다. 또 매일 찬물로 목욕을 해야 하며, 특히 소변을 보면 그때마다 손을 씻고 대변을 보면 목욕을 해야 한다. 목욕을 새로 하는 것이 번거로워 장찬을 맡은 사람은 제사가 끝나도록은 식사량을 크게 줄인다고 한다. 다른 제관들 역시 제사 며칠 전부터는 찬물로 목욕을 한다. 그러나 찬물로 목욕을 하는 것은 예전의 일이며, 요즈음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또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제사에 참례할 사람들이 정해지고 나서 초열흘 경에 당샘을 팠다. 물론 요즈음은 집집마다 수돗물을 쓰기 때문에 따로 당샘을 파지 않지만,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쓰는 우물물은 여러 사람이 쓰기 때문에 부정을 탈 수도 있어 따로 샘을 팠다. 별신제를 모실 냇가 자갈밭 깨끗한 곳을 골라 조금만 파면 물이 나온다. 주변에는 금줄을 쳐서 다른 사람의 출입을 막고 단지 제물을 장만하는 장찬만이 그 물을 사용토록 한다. 장찬은 당샘물을 처음 길어다 祭酒부터 앉힌다. 그리고 매일 목욕을 할 때는 이 물을 길어다 쓴다.
이 마을은 500평 정도의 祭畓이 있다. 예전에 대동계에서 매구를 쳐서 모은 돈으로 제답을 장만했다고 전해온다. 마을에서는 논을 맡기고 매년 쌀 한가마니 반의 곡수를 받는다. 이것을 팔아 제비를 장만한다. 시골 장날은 양력으로 잡혀 있기 때문에 대보름에 가장 가까운 장날을 골라 장흥읍장에서 제물을 사온다. 요즈음은 자동차로 다니지만, 예전에는 지게를 지고 이장과 장찬이 장을 보러갔다고 한다. 장을 보러가기 전에 목욕을 깨끗이 하며, 가능하면 다른 사람보다 일찍 물건을 사기 위해 이른 시간에 장에 간다. 사는 물건은 많지 않지만 物目記를 적어간다. 대추, 밤, 꽂감 등 삼실과와 제석자리와 시루, 제기, 소내장, 그리고 한지 등이다. 지금은 제석자리, 시루, 제기 등은 매년 새로 사지 않고 따로 마을회관에 보관해두었다가 매년 사용한다. 살 때 값을 깎지 않는다. 장을 보아오면 제물은 장찬집에 보관한다.
정월 열나흩날이 되면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이 별신제 준비에 들어간다. 대나무를 베어오고 금줄을 꼬고 하여 별신제를 모실 곳에 제장을 만들고, 주변에 차일로 幕次를 치며, 또 밤에 장작불을 피우기 위해 뗄감을 준비한다. 예전에는 이날 당산나무에도 금줄을 걸었으나 지금은 당산나무가 없어 하지 않는다. 또 예전에는 마을 입구에 금줄을 걸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다. 금줄이 둘러진 제장의 북쪽 끝에 흐리상을 만든다. 흐리상은 소나무로 다리를 하고 대나무를 얽어 상판을 만든 것으로서 제사를 모실 때 제상으로 사용된다.
장찬은 별신제를 모실 제물을 장만한다. 우선 제주를 세 병 준비한다. 윗국물을 뜨면 청주가 되는데, 이를 각각 세 개의 병에 나누어 담는다. 예전 당산제를 모실 때는 제주 네 병을 준비했다. 제주를 뜨고 나서 술을 걸러 그날 밤과 다음날 총회 때 먹을 막걸리를 준비해 둔다. 이 마을에서는 메나 탕은 준비하지 않지만, 매년 떡은 장만한다. 특히 시루에 백설기를 쪄서 제상에 올리며, 장찬이 손으로 직접 가래떡을 만든다. 제기 세 개에 올릴 정도의 양을 만든다. 장찬은 제물을 다룰 때는 불결하지 않도록 반드시 수건으로 입을 막는다. 또 나락, 보리, 콩, 팥, 목화씨 등 5가지의 씨앗을 따로 제기에 담는다. 무도 하나 준비한다. 그리고 장닭의 다리와 날개를 묶어 제장에서 희생으로 쓰도록 준비한다. 예전에는 돼지 한 마리를 사서 제장에서 그 목을 잘랐다고 하는데, 경비가 많이 들어 닭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살아 있는 장닭을 제상 밑에 두었다가 제사가 끝나면 목을 잘라 그 주변에 뿌리고 머리는 땅에 묻는다. 피는 악마를 쫓기 때문에 목을 잘라 피를 뿌리는 것이라 한다. 다음날 살코기는 죽을 쑤어 마을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 돼지를 희생으로 사용했던 때는 보름날 낮에 줄다리기를 하고 매구를 치면서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제사를 모실 사람을 뽑을 때 장생을 따로 뽑는데, 그 역할을 닭의 목을 자르는 것이다. 요즈음은 아무도 그 일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4년전부터는 따로 뽑지를 않고 있다. 제사에 참례했던 사람들 중에 아무나 자른다. 그러나 이 일도 잘 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요즈음 여간 곤란을 겪는 일 중의 하나다.
제사상에 올릴 것은 아니지만, 장에서 사온 소내장을 손질하여 국을 끓인다. 제사를 모시는 사람들과 풍물패들이 제사를 모시기 전에 준비할 때나 제사를 끝내고 나서 술안주를 하기 위한 것이다.
각기 가정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제사를 모실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모인다. 풍물을 칠 사람들은 농악기를 이때 손보기도 한다. 이때 특별히 하는 것은 없으며, 제사를 모실 시간까지 함께 모여 잡담을 나눈다. 밤 열시 경이 되면 제관들은 제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제장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풍물을 칠 사람들 역시 풍물 복장을 하고 대기한다. 본래 이 마을은 마포로 제복을 만들었으며, 그 색깔도 검은 색이었다. 그러나 남도문화제에 참가하면서 옷색깔도 바꾸고, 화학섬유로 대신했다. 파란색 5벌과 하얀색 10여벌이 준비되어 있다. 파란색 옷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집례, 축관이 입고, 하얀색 옷은 다른 제관들이 입는다.
3. 별신제의 진행
2002년 현장조사의 상황을 실시간대별로 그 진행 과정을 기술한다.
○ 22시 30분
마을회관에서 풍물패들이 풍물을 울리기 시작했으며, 마당에 모여 조금 풍물을 치다가 제장으로 향했다. 이들을 뒤따라 제관들 역시 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 22시 35분
풍물패와 제관들이 제장에 도착했다. 이미 그곳에는 장작불이 피워져 있었다. 장작불 주변에서 풍물패들은 돌면서 계속해서 풍물을 쳤다.
○ 22시 45분
제관 3명이 차일 안으로 들어가 촛불과 후래쉬를 밝히고 축문을 쓰기 시작했다.
먹을 갈아 붓으로 축문을 썼으며, 조명이 어두워 글을 쓰는데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축문은 아래와 같다.7)
維 歲次干支 後學某 敢昭告于 別神之神 二氣迭旋 三陽宣和 天地交泰 舍生品彙 造化之迹 有鬼有神 盛矣其德 佑我烝民 丁斧寅釰 駕風鞭霆 驅厲逐魔 廓淸四方 視聽吾人 誕降吉祥 有誠必格 有禱必應 時維孟春 萬和方暢 日吉辰良 齊沐告誠 俯伏就位 星斗定中 牲肥尊潔 三酌禮成 神旣醉飽 百靈俱享 錫我白福 惟日不足 家無疾疫 野登麥菽 焚香拜祝 靜息淸明 用伸處告 神其 尙 饗 |
○ 22시 55분
풍물을 치던 사람들이 일렬로 도열하여 제장 쪽을 향해 섰다. 상쇠가 앞에 나서서 “초경 아뢰오.” 하고 한번 소리치자 풍물패가 일제히 복창을 했으며, 다시 “이경 아뢰오.” 하고 두 번 소리를 치자 역시 풍물패가 복창을 했다. 예전에는 초경부터 5경까지 따로 했으나 지금은 1․2경, 3․4경, 그리고 5경 등 세 번으로 축소하여 아뢴다고 한다. 초경은 한번, 2경은 두 번, 그런 식으로 하여 5경은 다섯 번을 아뢰는 형식으로 한다.
○ 23시 24분
3․4경을 아뢰었다. 3경은 세 번, 4경은 네 번을 각각 아뢰었다.
○ 23시 32분
5경을 아뢰었다.
5경을 아뢰고 나서 풍물패가 앞을 서고 제관들이 뒤따르면서 장찬집으로 제물을 가지러 갔다.
○ 23시 40분
장찬집에 도착하여 신궤라고 부르는 나무로 짠 들것에 제물을 옮겨 실었다.8) 장찬은 수건으로 입을 막고 있었으며, 마루에 준비해 놓았던 제물을 신궤에 옮겨 실을 수 있도록 마루끝으로 날랐다. 1991년도의 조사에서는 <그림 5>가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제물을 한지로 싸고, 그 위에 붓글씨로 그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2002년도에는 이것이 약화되어 제기에 바로 제물을 담아 놓은 것이 차이를 보였다.
○ 23시 45분
제장에 도착하였다. 돌아올 때도 역시 풍물패가 앞서서 굿을 치고, 신궤에 제물을 실은 제관들이 뒤를 따랐다. 도착하자 곧 바닥에 배석자리를 펴고 설상을 시작하였다.
○ 23시 50분
설상을 끝내고 제관들이 모두 금줄이 쳐진 밖으로 나가 서 있자, 홀기를 읽는 집례가 초헌관부터 차례로 호명을 하고, 호명된 사람은 금줄 안으로 들어와 차례로 섰다.
○ 23시 59분
호명을 모두 마치고, 집례가 부르는 홀기에 맞추어 초헌관부터 잔을 올리고 제사를 시작했다. 집례는 한문식의 홀기를 부르다가 제관들이 알아듣지 못하면 말로 설명도 하였다.
○ 0시 20분
사신배를 끝으로 제사를 마치고, 제상 다리 밑에 놓아두었던 닭의 모가지를 잘랐다. 처음에는 아무도 목을 자르려 하지 않았으며, 서로 미루었다. 결국 한 사람이 자원하여 목을 잘랐으나 한 번에 자르지를 못해 피가 사방으로 튀겼다. 자른 닭머리는 땅에 묻었다.
○ 0시 22분
모인 사람들이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의 순서로 하여 한지를 한 장씩 나누어 들고 소지를 올리면서 口祝을 하였다. 내용은 국태민안, 소원성취, 농사풍년 등을 비는 내용이었으며, 조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한지를 나누어주며 소지를 하도록 배려를 하였다. 실제로 축관이 소지를 하면서 구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소지는 다름이 아닙니다.
첫짜에는 우리 가정이 평화롭고,
두짜로는 금년에 오곡이 풍년이 들어서 모든 것이 풍년이 든다는 것이고,
세짜는 국태민안한 기원입니다.
종이로 해서 소지해서 올립니다.”
○ 0시 30분
소지가 모두 끝나자 제상 위에 올렸던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 7장의 백지에 싸서 자갈밭에 묻고 나서 음복을 시작하였다. 제상 위에 과일과 떡, 그리고 제주를 한잔씩 나누었으며, 제상 한쪽 다리 밑에 놓아두었던 무를 쪼개 무사태평할 거라면서 서도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 0시 35분
철상을 끝내고 신궤에 제기와 남은 제물을 올려 싣고 역시 풍물패를 앞세우고 장찬집으로 향했다.
○ 0시 41분
풍물패와 제관 일행이 장찬집에 도착하여 제물을 내려놓고 한참동안 마당굿을 했다. 마당굿을 마치자 미리 장찬이 안방에 준비해둔 상에 앉아 술과 안주를 나누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가며 정담을 나누었다. 안주는 소내장으로 끓인 국과 나물이었다.
○ 1시 20분
장찬집에서 모두 철수하여 일부는 마을회관으로 가고 또 일부는 각 가정으로 돌아갔다.
매년 다소 시간상의 융통성은 있으며, 1시에서 2시경 사이에 제사를 마친다. 예전에는 보름 때면 눈이 쏟아지는 날도 많았고 또 날씨가 추워 제사를 지내고 나면 수염에 고드름이 어는 날도 많았다고 한다. 또 손자가 있는 할아버지들은 손자에게 좋다고 하여 예전에는 가래떡을 조금씩 가져왔으며, 지금의 제보자들이 기억하기로는 예전 어려서 할아버지가 가져 오실 가래떡을 먹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었더라고 한다.
4. 별신제의 결산
별신제를 모시고 나서 음력 정월 15일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결산을 한다. 이장이 별신제와 관련하여 수입과 지출에 대한 보고를 하고 마을 사람들 중 의문이나 의견이 있으면 이때 말한다. 장찬집에서 준비해온 안주와 음식을 놓고 마을 사람들이 술을 한잔씩 하면서 별신제와 관련된 이야기도 이때 나눈다.
본래는 대동계로 불리는 마을 총회를 별신제를 마치고 하였으나, 생활의 대부분이 양력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금은 대동계를 양력 12월 25일에 한다. 대동계에서는 마을의 제반사를 논의하며 이장의 선출이나 품삯을 결정하는 등 중요 사안을 다룬다.
따라서 현재는 마을의 총회가 두 번 열리는 셈이다. 실제적인 里政과 관련된 회의는 연말에 열리고, 대보름날은 단지 별신제 관련 결산을 하는 것으로 끝낸다.
5. 영험담
별신제나 당산제와 관련되어 마을에는 구전으로 여러 가지 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 영험담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매우 큰 구속력을 가지며 또한 마을제사와 관련된 지식을 전승시키는 기능도 맡고 있다. 그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을 사람으로서 아직 군대에 가서 죽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는 모두 별신제를 잘 모셔 왔기 때문에 그 덕택으로 별 사고가 없다고 믿고 있다.
원래는 별신제만 모시다가 훗날 당산제를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어떤 제보자는 별신제는 3백년, 당산제는 1백년의 역사를 가졌다고도 한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당산제는 마을의 동쪽 입구 귀목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 모셨는데, 당산제를 모시게 된 배경이 마을에 구전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 귀목나무들이 마치 벌이 나는 소리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밤중에 울었다는 것이다. 귀목나무가 울고나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곤 하였다. 그래서 마을에서 협의를 하여 그 나무에 당산제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제보자 중 한 분이 1943년의 일로 기억하고 있는 사실로서 당시 당산나무가 울자 마을의 한 노인이 무엇이라고 적은지는 모르지만 뭔가 글을 써서 붙이자 우는 소리를 그쳤다고 한다. 또 세 그루 중 1997년에 마지막 남은 귀목나무가 태풍에 의해 쓰러졌는데, 바로 인근에 있는 집쪽으로 넘어지지 않아서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집 주인은 마을에서 당산제를 폐지한 후에도 혼자서 당산나무에 메를 한 그릇씩 지어 매년 올렸다고 하며, 그로 해서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을에서는 말이 전하고 있다. 당산나무가 쓰러진 후에 당산나무 안에서 흰 뱀 두 마리가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전한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별신제 제물을 준비하다가 맛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 후 그 사람은 몸에 열이나고 견딜 수가 없어서 개인적으로 따로 제물을 준비해서 별신제를 모시고 나자 그때서야 몸에 열이 식었다고 한다. 또 별신제를 잘못 모셔 이러한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 마을에서 새로 날을 받아 모시는 대신에 그 피해를 입은 본인이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예전에 별신제를 모신 사람이 그날 밤 부인과 동침을 했다. 아침에 인기척이 없어 시어머니가 방문을 열자 둘이 붙어서 아무리 용을 써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비가 올 때 소에게 씌우는 소어치(소두데)를 씌우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자 그때야 떨어졌다고 한다. 소어치를 씌워 굿을 했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하지 못할 짐승같은 짓을 하였다는 경고와 의미를 담은 구전인 셈이다.
예전에 닭을 희생으로 쓰기 전에는 산 돼지의 머리를 잘라 땅에 묻었는데, 어떤 배고픈 사람이 그것을 파다가 먹었다고 한다. 그 즉시로 그 사람은 천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한다. 또 희생을 할 돼지나 닭을 제상 밑에 별로 묶지도 않지만, 마치 죽은 것처럼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다고 한다. 그것은 신이 엄해서 꼼짝못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제상에 올렸던 오곡을 그대로 놓아두는데 오래 되어서 새들이 침범하지 않는다고 한다. 별신제가 끝나면 제장을 만들기 위해 가설했던 대나무나 금줄, 그리고 호리상 역시 그대로 방치해 둔다. 다음에 홍수가 나서 없어질 때까지 그대로 두는 까닭은 만약 손을 댔다가 화를 입을까 보아서라 한다.
Ⅳ. 儀禮와 典籍의 검토
1. 유교식 의례의 전형
호계리의 별신제는 전형적으로 유교식 집례 절차를 따르고 있다. 祭官과 祭物, 祭次와 犧牲까지도 유교식 의례를 준용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특히 홀기에 따라 전반적으로 별신제가 집전되는데, 이 마을 외에도 예를 들면 담양군 금성면 원율리에 전하는 四禮雜錄이라는 책에도 역시 당산제 홀기가 기록되어 있지만,9) 현재 사용하고 있지 않는 것에 반해서, 이 마을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의 전승집적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홀기에 의거하여 진행되는 별신제의 집례 절차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순 서 |
절 차 |
序 立 |
헌관과 제관들이 제 위치에 임석하고 제상에 각각 배례 |
初獻禮 |
초헌관이 손을 씻고 향을 피워올린 후 잔을 올리고 재배 |
讀 祝 |
축관이 독축 |
亞獻禮 |
아헌관이 손을 씻은 후 잔을 올리고 재배 |
終獻禮 |
종헌관이 손을 씻은 후 잔을 올리고 재배 |
飮福禮 |
초헌관이 나가 술잔을 받아 마시면 헌관 일동 재배 |
禮 畢 |
축문을 태우고 헌관이 퇴장한 다음 다른 제관 일동 재배 |
위 표는 간략히 그 진행절차를 요약한 것이지만, 그에 부수되는 일단의 내용들은 國朝五禮儀의 길례 절차와 거의 동일하다. 아래 홀기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무엇보다도 국조오례의와 이곳 별신제 제관명부에 나오는 제관의 명칭과 그들의 역할을 비교해보면 이러한 사실이 명확해진다. 晩守齋 李敏琦의10) 撰으로 되어 있는 이 마을 별신제 홀기는 다음과 같다.
虎溪大洞別神祭笏記 獻官及諸執事皆序立○執禮贊引贊唱先再拜無唱贊引引獻官以下俱就門外位○贊引引祝及諸執事入就拜位○再拜有唱詣盥洗位洗爵省事○贊引進初獻官之左白有司謹具請行事○獻官皆再拜有唱 行初獻禮○贊引引初獻官詣盥洗位拭訖引詣尊所西向立○引詣神位前北向跪○三上香○尊爵納幣○俯伏興○平身○進笏○引詣神位前北向跪 祝○取祝板東向跪讀祝○俯伏興平身○引降福位 行亞獻禮○贊引引亞獻官詣盥洗位拭訖○引詣尊所西向立引詣神位前北向跪奠爵○俯伏興○平身○引降復位 行終獻禮○贊引引亞獻官詣盥洗位拭訖○引詣尊所西向立引詣神位前北向跪奠爵○俯伏興○平身○引降復位○獻官皆再拜有唱 行飮福禮○贊引引初獻官詣飮福位西向跪受爵噿酒受胙降復位○祝○撤籩豆少移故處○獻官再拜有唱贊引初獻官之左白○禮畢○引詣望痤位焚祝○祝引降復位○贊引人三獻官以次而出○祝及諸執事皆再拜有唱執禮贊引贊唱○皆再拜無唱 |
이 마을에서는 현재 별신제를 위해 당연직인 반장을 제외하고 21명의 제관을 선정한다. 제사 규모의 차이로 인해서 조정되는 요소를 감안하고 본다면, 이곳 별신제를 위한 제관의 명칭은 물론 그 역할 또한 오례의에 나오는 제관과 동일하다. 한편 최근 제관 선정에서 빠진 예로서 贊唱과 掌牲이 있다. 찬창은 집례자가 홀기를 부르면 그것을 복창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제관록에 1997년 이후로는 찬창과 장생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사람 수가 줄어들면서 제관의 수 역시 축소해가고 있는 현상이며, 또한 사람들이 산 닭의 목을 자르는 역할을 싫어하기 때문에 장생 역시 뽑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제관의 수와 역할은 다소 유동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오례의의 제관과 이곳 별신제의 제관은 거일 일치한다고 보겠다. 보다 분명한 것 중 하나는 별신제에서 贊引의 역할이다. 찬인은 제장에서 헌관을 인도하는 사람이다. 이는 명확히 유교식 제례형식을 따르고 있는 예로서 민간신앙의례나 불교의례 등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잔대를 세 개 제상에 올리는데 이 역시 오례의 길례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잔대 세 개를 天․地․人을 뜻하는 것이라 하며, 거기에 맞추어 떡도 세 접시, 무도 세 접시를 놓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민간화하면서 재해석된 것일 뿐 사실은 초헌작, 아헌작, 종헌작이다. 그리고 실제로 각각 세 개의 잔이 초헌, 아헌, 종헌에 맞추어서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도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소위 제관들이 머무를 수 있는 장막으로서 幕次를 제단의 서쪽에 가설하도록 하는데, 이 마을 별신제에서 역시 제장 서쪽에 막차를 마련하여 헌관과 축관이 머무르는 한편 축문을 베껴 쓰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헌관들은 품계에 따라 재질을 달리하는 笏을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이 마을 별신제에서 역시 나무로 깎아 만든 홀을 헌관들이 소지하고 제사를 모신다. 다른 마을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祭場의 犧牲을 예로 들 수 있다. 지금을 닭을 사용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돼지를 사용했다고 하는 희생의례로서 이는 전형적으로 유교식 의례의 한 절차가 되어 있어 이곳 별신제가 유교식 제차, 특히 길례의 유례를 전거로 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예라 하겠다.
2. 전적과 마을사
마을에는 숙종 41년(1702)에 대동계를 만든 내력을 담은 대동창계(大洞刱契)라는 책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매년 별신제를 모시고 나서 그해 선정되었던 제관과 결산 내역을 기록하는 문서가 결책되어 보관되어 있다. 또 예전 마을의 풍물을 마련할 때 부의를 했던 사람들의 명단과 그 내역을 기록한 책, 제관록, 그리고 홀기 등 문적이 전하고 있다. 그 현황은 아래와 같다.
연번 |
표 지 |
1 |
肅宗四十一年乙未 大洞契案 |
2 |
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 大洞刱契 |
3 |
第二 |
4 |
第三 虎溪村中執綱案 |
5 |
第四 壬辰二月初一日 大洞契村案 |
6 |
第五 戊午十二月日 虎溪里執綱案 |
7 |
第六 甲戌正月十五日 虎溪里執綱案 |
8 |
第七 乙未正月十五日 虎溪大洞案 |
9 |
第八 歲癸酉正月十五日 虎溪大洞中 |
10 |
第九 甲午正月十五日 虎溪大洞案 |
11 |
第十 甲子正月十五日 虎溪大洞案 |
12 |
戊戌年正月日 虎溪洞案 |
13 |
丙申春正月小望 虎溪洞案 |
14 |
庚寅正月初六日 虎溪洞中金鼓扶儀冊 |
15 |
戊午歲首旣望瞻書 祭官錄 |
16 |
虎溪大洞別神祭笏記 |
이들은 지금까지 300년의 역사를 두고 기록되어 온 것들로서 별신제 뿐만 아니라 마을사 전체를 조명해 줄 수 있는 사료로서 가치가 자못 크다하지 않을 수 없다. 매년 별신제를 모시고 나면 소위 대동계라는 마을총회를 열어 별신제의 결산은 물론 이정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자료는 마을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역대 제관들의 이름을 적고 있는 제관록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1965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농촌인구가 감소한 해이다. 산업화에 따른 농촌인구의 이농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40여년간 지속되는 가운데 농촌인구의 고령화는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마을 역시 이러한 과정을 겪어왔으며, 그런 점에서 사회적 변화가 별신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우리는 제관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60년도부터 2000년도까지의 연도별 제관 연령의 평균치를 내보면, 이 마을의 고령화 추세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과거의 통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언제까지 별신제가 전승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예측도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연령대의 상승곡선을 연장시켜보면 우리나라 농촌인구의 평균수명을 넘어서는 분기점이 바로 이곳 별신제의 자연적 전승이 마감되는 해로 가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가정이기는 하지만, 이를 전혀 무의미한 통계학적 장난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정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여기서 얻어진 통계결과는 단지 호계리에만 한정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농촌사회에서 전통문화와 민속이 전승될 수 있는 상황을 예측하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문화정책을 세울 수 있는 하나의 지표제공도 가능한 연구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홀기 뒷면에 씌여져 있는 축문은 세 종류이다. 아래 <축문 1>은 이미 앞에서 제시했던 대보름 별신제에서 실제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축문 2>는 田祖之神에 대한 제향에서 쓰이는 것인데 오래 전에 없어진 것인지 이와 관련된 사항은 지금 알 수 없다. 이 둘은 최초 동계안을 만들었던 晩守齋 李敏琦의 찬이다. <축문 3>은 小柏 金基權의 찬이다.11) 이 내용은 <축문 1>과 거의 상당 부분 일치를 하면서도 추가된 내용이 있으며, 그것을 검토해 보면 여름에 마을 제사에서 사용된 축문임을 알겠고, 또한 특히 그 여름 제사는 蟲祭의 성격을 지녔던 것을 알 수 있다. 제보자들이 기억하고 있기로는 예전에는 특히 벼멸구가 성했을 때 이 여름 제사를 모셨다 한다. 일제시대 기름을 풀어 벼멸구를 방제하는 방법이 고안되고 나서는 충제를 모시는 일이 잦아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완전히 잊혀진 풍속이지만 이러한 기록물이 전함으로 해서 과거의 마을사와 민속문화를 재조명해볼 수 있는 것이다.
<축문 1>
維
歲次干支 某官姓名 敢昭告于
別神之神 二氣迭旋 三陽宣和 天地交泰 舍生品彙 造化之迹 有鬼有神 盛矣其德 佑我烝民 丁斧寅釰 駕風鞭霆 驅厲逐魔 廓淸四方 視聽吾人 誕降吉祥 有誠必格 有禱必應 時維孟春 萬和方暢 日吉辰良 齊沐告誠 俯伏就位 星斗定中 牲肥尊潔 三酌禮成 神旣醉飽 百靈俱享 錫我白福 惟日不足 家無疾疫 野登麥菽 焚香拜祝 靜息淸明 用伸處告 神其
尙 饗
晩守齋 仁川 李敏琦 撰
<축문 2>
田祖之神 嗟我民事 非穀何食 夏月作苦 稻梁麥稷 金颷屆節 農旣告曰 雨雨果果 五徵乖錯 孽芽其間 非蟊非○ 着葉塗莖 如糠如粃 萃爛將盡 甌窶汙邢 四郊雷同 名以滅吳 細甚蚊蝱 害踰狼虎 農家有事 禱于田祖 豚蹄壺酒 齊人之禳 秉卑炎火 曾孫之祝 今以吉辰 擇淨爲壇 牲酒旣潔 齊沐且誠 所特雖狹 所欲卽奢 伏惟田祖之神 欽玆鑑玆 掃妖蟲投 諸溟渤禾 稼登熟歲 有大年
尙 饗
晩守齋 仁川 李敏琦 撰
<축문 3>
維
歲次干支 某官姓名 敢昭告于
別神之神 二氣迭旋 三陽宣和 天地交泰 舍生品彙 造化之迹 有鬼有神 盛矣其德 佑我烝民 丁斧寅釰 駕風鞭霆 驅厲逐魔 廓淸四方 視聽吾人 誕降吉祥 有誠必格 有禱必應 每歲元望 三里崇祀 民至于今 實賴是佑 于何今歲 怪氣致疹 閭里不淨 死亡間仍 恐或元望 祭禮不誠 衆心危懼 以仲夏晦 更擇良辰 齊沐告誠 俯伏就位 星斗定中 牲肥尊潔 三酌禮成 神旣醉飽 百靈俱享 錫我白福 惟日不足 家無疾疫 野登麥菽 焚香拜祝 靜息淸明 用伸處告 神其
尙 饗
Ⅴ. 결 론
호계리의 별신제는 그 명칭이 뜻하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광주․전남지역에서 볼 수 있는 민간신앙으로서의 당산제와는 크게 차이를 보인다. 경상도 및 강원도 일원의 별신제와도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호계리 별신제는 관제의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하나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제관, 제물, 제차 등 거의 모든 점에서 國朝五禮儀의 길례에서 볼 수 있는 관제의 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관련 서적들은 그 역사를 조명해 주기도 하는데, 특히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관제가 민간화되는 하나의 양상을 찾는데 크게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호계리에는 별신제와 당산제가 병행되어 오다가 당산제는 이미 폐지되고 말았다. 당산제를 지탱하던 민간신앙적 지반은 이미 약화되어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민간신앙화된 별신제는 지금도 살아있는 마을문화의 하나로서 매년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매년 대보름에 현장조사를 다니다 보면 편의주의에 의해 많은 마을들에서 당산제 수행부분이 축소, 약화, 생략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의 별신제는 10여년의 시간을 두고 조사한 결과 거의 변함없는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숙종 때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동계책이 지금까지도 별신제를 모시고 나서 매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왕성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기록 자료는 앞으로 연구 여하에 따라서는 이 마을에 대한 역사문화적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확대된 형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마을들에도 동계에 관한 자료는 많지만, 이 마을처럼 마을제사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예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희소성은 물론 그를 통한 일반화의 가능성, 즉 다른 지역 마을제사의 역사도 이를 통해 조명해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셈이다.
자연 상태에서 호계리의 별신제가 얼마나 더 지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20여호의 마을이 현재 64호로 줄어든 실태를 보거나 주민의 노령화 추세로 볼 때 그 전승의 최종시한이 임박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이러한 문화재에 대한 보존과 전승, 그리고 발전을 위한 문화정책적 차원의 관심이 앞으로 촉구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호계리 소장 교지와 진무원종공신녹권에 관한 연구
노기춘(전남대학교)
1. 서론 2. 淸州 金氏의 由來 및 世系圖 3. 호계리 소장 교지 4. 功臣都鑑과 振武原從功臣錄券 5. 결론 및 제언 |
1. 서론
본 연구는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청주 김씨 가에 대대로 전승하고 있는 교지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金希敏에게 功臣都鑑에서 내린 振武原從功臣錄券을 분석한 글이다.
2. 淸州 金氏의 由來 및 世系圖
청주 김씨는 大輔公 金閼智의 후손으로 신라의 宗姓이다. 원래 청주는 마한 땅으로 백제시대에는 상당현이라 하였고, 낭비성(娘臂城)으로도 불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이후로 지방행정조직이 9주 5소경(九州五小京) 제도로 정비되면서 신라 신문왕 5년(685)에 하식 김원태를 서원소경(청주)에 처음으로 소경장관을 삼으며 도민정책에 의해 경주중앙귀족을 집단이주하게 하고 함께 파견되었던 외관들도 임지에서 그대로 정착하도록 하였다. 후삼국시대에는 지방 세력이 가장 강한 청주지역에서 金勤謙은 왕건의 고려 건국에 선력부위한 개국공신으로 수사도삼중대광의 벼슬을 받았고, 김언규는 고려개국 충현지사로서 첫 조각자리에 등용되었다. 김극진의 두딸은 각각 고려 혜종과 정종이 왕비로 삼은바 있으며, 김근겸의 7세손으로 김덕겸은 고려 전기에 근 세력을 떨친바 있다. 김병종과 김희일은 사촌간으로 당대등직을 지냈고, 김희일은 현재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는 용두사 청종간(청주시 남면로 이가 소재)의 주건을 맡아 완성하였다. 고려 중기에 김보는 섭교위를 거쳐 금오위대장군을 지냈으며, 무신난 이후로는 청주 구봉산하 오동촌에서 세거해 왔으며, 그 후손들은 전라도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등지로 분산 전거해 온 명문의 귀족으로 전해온다.
3. 호계리 소장 교지
3.1 金敬義
父는 溥, 母는 靈光 金씨로 嘉靖 丙午(1546)에 태어나 辛亥(1611) 12月 20일에 졸하였다. 字는 子宜이며, 벼슬은 慶州判官을 지냈다. 死後 天啓 6年(1626) 閏6月 20일에 通政大夫刑曹叅議에 추증되었으며(그림 1), 두 번째 부인인 水原 白氏 역시 天啓 6年(1626) 閏6月 20일에 貞夫人에 추증되었다(그림 2).
3.2 金希敏
父는 金敬仁, 母는 晋州 河氏이며, 萬曆 壬午(1582)에 태어나 甲戌(1634) 正月 1일 졸하였다. 원래 生父 金敬義와 母 光山 金씨 사이에서 3남 1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나 伯父인 金敬仁에 出系하였다. 字는 汝一이며, 萬曆 34년(1606) 武科에 합격하여 萬曆 45년(1617)에 正五品인 忠義校尉(그림 1), 萬曆 46년(1618) 正月 從四品인 定略將軍(그림 2, 3, 4), 萬曆 46년(1618) 5월 慶尙道 所非浦權管(그림 5), 萬曆 48년(1620) 從三品인 保功將軍(그림 6)이 되었다. 仁祖 2년(1624년) 李适의 亂이 일어나자 都元帥 張晩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서울 근교의 길마재(鞍峴)에서 李适의 군을 대패시켜 반란 평정에 큰 공을 세웠다. 이괄의 난이 완전히 평정된 후 김희민은 振武原從功臣 1等의 功을 인정받아 한 계급이 加資되어 正三品 禦侮將軍이 되었고, 이때 下賜받은 振武原從功臣錄券이 현재 호계리 청주 김씨가에 소장되어 대대로 전승되고 있다. 이어 天啓 6년(1626) 全羅道左水營虞侯가 되었고(그림 7), 崇禎 3년(1630) 錦南 鄭忠信 장군의 휘하에서 종군하여 椴島12)에 있는 胡賊들을 격파하였으며, 崇禎 6년(1633) 11월 廣梁鎭 僉節制使가 되어(그림 8) 明將 牟承錄과 함께 椴島에 있는 殘賊들을 토벌하다가 崇禎 7년(1634) 正月 一日 陣中에서 순직하였다.
3.3 金聲一
父 金希敏과 母 草溪 卞氏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次男으로 生沒年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위로 두분의 누님이 있고, 한동안 嫡子가 없었던 金希敏이 金希達의 次男 金益振(1601∼?)을 系子로 맞이한 이후 聲一과 聲運이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그의 형인 益振과 본인, 동생 聲運이 仁祖 6년(1628)년 실시한 武科에 모두 급제한 것을 고려해 볼 때 1605년 이전에 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崇禎 元年(1628) 5월 武科에 급제하여(그림 1) 동년 10월 8일 正九品 效力副尉가 되었고(그림 2), 여러번 진급하여 왕을 近侍하는 宣傳官이 되었다. 특히 그는 廣梁鎭 僉節制使인 父 金希敏이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의 椴島에 있는 殘賊을 토벌 중에 1634년 진중에서 순직하자 천리를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長興郡 安良面 蓼谷의 고향산에 安葬하였다.
3.4 金聲運
父 金希敏과 母 草溪 卞氏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3男으로 生沒年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위의 金聲一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위로 두 분의 누님이 있고, 系子인 長兄 益振(1601∼?)과 親兄 聲一과 함께 仁祖 6년(1628)년 실시한 武科에 모두 급제한 것을 고려해 볼 때 1605년 전후로 출생하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는 崇禎 元年(1628) 5월 武科에 급제하여 동년 10월 8일 正九品 效力副尉가 되었고(그림 1), 여러 번 진급하여 왕을 近侍하는 宣傳官이 되었다.
3.5 金益徽
父 金希達과 母 寶城 宣氏 사이에서 3남 1녀 가운데 長男으로 萬曆 戊戌(1598)에 태어나 丁未(1667) 正月 15일 졸하였다. 字는 君美이다. 崇禎 원년(1628) 5월 武科 乙에 及第하여(그림 1) 崇禎 원년(1628) 10월 承義副尉(그림 2)로 처음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어 順治 원년(1644) 4월 效力副尉 守門將(그림 3), 順治 원년(1644) 7월 修義副尉(그림 4), 順治 3년(1646) 6월 21일에는 宣略將軍行龍驤衛副司果武臣兼宣傳官(그림 5), 順治 4년(1647) 정월에는 秉節校尉行龍驤衛副司果武臣兼宣傳官(그림 6), 順治 4년(1647) 11월에는 保功將軍行武臣兼宣傳官(그림 7), 順治 4년(1647) 10월에는 敦勇校尉行武臣兼宣傳官(그림 8), 順治 4년(1647) 10월 忠毅校尉(그림 9), 順治 5년(1648) 정월 7일 禦侮將軍行鏡城13)鎭管防垣兵馬萬戶(그림 10) 등을 지냈다.
4. 功臣都鑑과 振武原從功臣錄券
4.1 功臣都鑑과 功臣錄券
4.1.1 功臣都鑑
공신도감은 조선시대 공신 책록을 위하여 그 업적 등을 조사하던 임시관서로 1392년(태조 1) 8월에 처음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1434년(세종 16)부터 공신도감을 공신들의 관부로서 충훈사(忠勳司)라 개칭하고, 다시 1454년(단종 2) 충훈부(忠勳府)로 승격시켜 공신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관할하게 하였다. 이후 공신을 정할 일이 있으면 임시로 공신도감을 설치하고, 여기서 의정부·삼사(三司)와 함께 봉군(封君) 대상자 훈공(勳功)을 심사하여 1·2·3등으로 나누어 훈호를 내리게 하였다. 공신도감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공신들에게 녹권을 찍어 사급(賜給)하여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기 위해 비교적 일찍부터 활자 새기는 장인과 인쇄용 물자를 갖추고 운영해왔는데, 이와 같이 공신도감의 장인들이 각종 녹권(錄券)과 회맹록(會盟錄)을 찍기 위해 만든 목활자를 공신도감자(功臣都監字)라고 한다. 이 공신도감자의 성격은 당시의 훈련도감자 및 실록자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공신도감은 일찍부터 활자를 새기고 인쇄하는 장인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실록청이 1603년(선조 36)에 역대 실록을 찍을 때 협조하여 주기도 하였다.
현재 공신도감자본으로는 1605년 인출의 호성원종공신녹권(扈聖原從功臣錄券)과 선무원종공신녹권(宣武原從功臣錄券), 1625년(인조 3) 인출의 정사원종공신녹권(靖社原從功臣錄券)과 진무원종공신녹권(振武原從功臣錄券), 1628년 인출의 영사원종공신녹권(寧社原從功臣錄券)과 19공신회맹록(十九功臣會盟錄), 1646년 인출의 영국원종공신녹권(寧國原從功臣錄券)과 20공신회맹문(二十功臣會盟文) 등이 남아 있다.
4.1.2 功臣錄券
고려‧조선시대에 공신을 책봉하고 이들의 공훈을 등재하여 공신수봉자(功臣受封者)에게 분급(分給)한 문권(文券). 현존 최고본으로 이화(李和)에게 지급한 개국공신녹권이 있다. 공신책봉의 제 과정은 왕조실록에 많이 서술되어 있는바 즉, 각 시대의 공신을 책봉하게 되는 전말과 공신녹권에 표기된 내용으로서 주장 관서인 도감의 설치, 공신 대상원의 절목 선정과 포상 절차 및 상작의 의정, 녹권의 작성과 이의 반사(頒賜), 예문관에서 공신호와 공신교서(功臣敎書)를 마련하는 일, 공신을 책봉하고 부대적인 행사로서 예조를 주장 관서로 하여 집행되는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와 공신연 및 제익일(祭翊日)의 반축례(頒軸禮: 入叅功臣과 嫡長孫이 手決한 공신회맹록과 화맹제문을 頒賜받는 일)를 마치고, 참제신구공신(叅祭新舊功臣)과 집사관(執事官) 및 백관이 전정(殿庭)에서 왕의 향연을 받는 사온사(賜倍事) 등 다양하다. 특히, <녹훈도감의궤(錄勳都監儀軌)>는 해당 공신들의 책봉 전말을 일정별로 구체적으로 기록, 보존하여 공신에 관한 법전적 근거가 되는 구실을 하였다.
조선 초기 공신책봉의 통할 관서는 이조이며, 공신도감과 함께 양사가 주관하였다. 공신전담 관부로서 충훈부(忠勳府)가 설립된 이후 공신책봉이 필요할 때 녹훈도감을 개설하였다. 이곳의 주무자(主務者)는 도감관(都監官)이었다. 이들 전담 관서는 이조·예조 등 유관 관서와 연결, 모든 과정을 추진하면서 공신녹권의 반사와 그 부대 행사를 마칠 때까지 업무를 수행하였다. 따라서, 각 공신책봉의 전 과정을 <녹훈도감등록(錄勳都監謄錄)>으로 작성하였다. 공신 관부인 충훈부에서도 <충훈부등록(忠勳府謄錄)>에 중요한 일들을 기록하였다. 조선시대는 개국공신을 비롯, 28회에 걸쳐 공신을 책봉하였다.
녹권의 삭탈을 보면, 연산조의 위사공신(衛社功臣: 처음은 保翼功臣)은 선조 10년 전원이 삭탈 당하였다. 광해조의 위성공신(衛聖功臣)·익사공신(翼社功臣)·정운공신(定運功臣)·형난공신(亨難功臣) 등은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모두 폐적(廢籍)당하였다. 경종대의 부사공신(扶社功臣)도 영조가 즉위하자 폐적되었다. 이 밖에 추후에 삭탈 또는 적몰(籍沒)되어 공신호와 녹권을 잃은 자는 상당수에 달한다. 조선시대 실명공신의 총수는 국조공신록(國朝功臣錄 : 영조대에 충훈부에서 편찬)에 따르면, 701인으로 되어 있다.
4.2 振武原從功臣錄券
4.2.1 녹권의 발급 배경
李适(1587∼1624)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규(白圭), 병조참판 육(陸)의 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좌랑, 태안군수를 지냈다.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떠나기 직전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해군 축출을 결심, 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김유(金瑬)와 함께 군대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仁祖)을 새 임금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반란계획이 누설되자 망설임 끝에 합류 장소에 늦게 도착한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瑬)를 베려다가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는 등 김류(金瑬)와의 갈등이 싹트게 되었다. 또한 인조반정 뒤 한성판윤·포도대장의 벼슬을 받는 데 그치자 불만이 더욱 커졌다. 같은 해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방에 파견된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의 천거로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었다. 왕에게 포차(砲車) 사용과 요충지 방어를 건의한 뒤, 평안도 영변에 나아가 군사를 훈련시키고 성책을 고치는 등 국경경비에 힘썼다. 3개월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봉해졌다. 인조반정 뒤 공신들간의 알력이 심해지면서 1624년 아들 전(旃), 한명련(韓明璉),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등과 함께 반란을 꾀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괄은 인조의 신임을 얻고 있었으므로 심문대상에서 제외되었으나, 영변의 군중(軍中)에 머물고 있던 아들 전은 모반의 사실여부를 가린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붙잡혀 가게 되었다. 이에 쌓였던 불만이 폭발, 서울에서 파견된 의금부도사 고덕상(高德祥), 선전관 김지수(金芝秀) 등의 목을 베고 휘하의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역시 모반혐의로 서울로 압송되고 있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중간에서 구출한 뒤 서울로 진격, 황주·마탄·임진 등에서 관군을 잇달아 격파하고 서울을 점령했으며, 곧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다음날 뒤쫓아 온 장만 등의 관군에게 파주 길마재에서 크게 패하여 광주·이천으로 후퇴하던 중 부하 장수 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翼獻) 등에게 죽음을 당했다.
4.2.2 振武原從功臣錄券
1) 녹권의 형태사항
振武原從功臣錄券 / 振武錄勳都監(朝鮮) 編
木活字本(功臣都監字 混入 訓鍊都監字)
振武錄勳都監, [天啓5년(1625) 9月 1日]
1冊(77張) : 四周雙邊, 半葉匡郭: 26×17.8cm, 10行18字(注雙行), 版心: 上下內向3葉花紋魚尾 ; 33.6×22cm.
印: 施命之寶.
卷首: 天啓五年(1625)七月二十六日 右承旨臣李楘敬奉.
卷末: 天啓五年(1625)九月初一日 左副承旨臣李植敬奉.
振武原從功臣錄券은 功臣都鑑에서 만든 목활자본 1책으로 선장 형태로 제책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33.6×22cm이다. 표지의 서명은 '振武原從功臣錄券'으로 墨書되어 있고, 권두서명은 '振武原從功臣錄券'이다.
이 책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쌍변으로 되어 있으며, 반곽의 크기는 26×17.8cm로 계측된다. 그리고 반엽을 기준으로 모두 10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행에는 18자씩 배자되어 있다. 인쇄면에는 계선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으며, 계선이 상하의 변란과 떨어져 있어 활자본의 특징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앙의 판심부에는 상하로 3엽화문어미가 내향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계선과 어미가 떨어져 있어 또한 활자본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책 전체가 부식이 심한편이다.
2) 녹권의 체제 및 내용
振武原從功臣錄券의 체제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가) 녹권의 첫 부분
○ 卷首題: 振武原從功臣錄券
○ 수취자명: 萬戶金希敏
○ 문서발급의 목적: 천계5년(1625) 7월 26일 우승지 李楘이 전지를 받들음
○ 印: 施命之寶
나) 본문
본문에 해당하는 부분은 녹권의 핵심 내용이 담겨있는 부분으로 <李适의 亂>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을 크게 3등급으로 분류하여 총 6176인의 명단이 실려 있다.
○ 振武原從功臣一等: 昇平府院君 金瑬 등 640인
○ 振武原從功臣二等: 折衝 許詳 등 1082인
○ 振武原從功臣三等: 折衝 姜進伯 등 4454인
○ 인: 施命之寶
다) 녹권의 끝부분
문서의 발급일자와 포상내용, 발급기관, 담당관원의 職銜과 성씨 등이 수록되어 있다.
○ 문서의 발급일자: 천계5년(1625) 9월 1일 좌승지 신 이식경봉
○ 포상내용: 각 등급에 해당되는 포상내용을 자세히 언급
○ 발급기관: 振武錄勳都監
○ 담당관원의 職銜과 성씨:
堂上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輔國崇祿大夫玉城府院君臣張晩
堂上竭誠奮威出氣振武功臣嘉義大夫晉陽君臣柳孝傑
郎廳奮忠贊謨靖社功臣通訓大夫行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臣兪伯曾
郎廳奮忠贊謨靖社功臣通訓大夫行議政府舍人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臣朴炡
監校郞廳通訓大夫行掌評臣柳英
監造官通訓大夫行義盈庫直長臣張志漢
5. 결론 및 제언
○ 대대로 무과 출신이 많아 문집이 없는 관계로 관련 자료가 충분하지 않으나, 김희민 등에게 내린 敎旨 및 振武原從功臣錄券 등은 청주 김씨를 연구하는데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 1張: 振武原從功臣一等에 들어있는 '漢南都元帥■■■' '洛興君■■■'와 같이 성명을 加墨하여 삭제하였다. 校勘 결과 1644년 반란죄로 처형된 '漢南都元帥沈器遠'14)과 1651년 역모죄로 처형된 '洛興君金自點'15)으로 역모로 인해 삭제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을 고려해 볼때, 加墨 시점은 1651년 이후임을 알 수 있다.
○ 2張: '前萬戶金希敏'에 簡紙가 있는데, 후손이 공경의 표시로 붙인 것으로 보임.
○ 이 책은 功臣都鑑字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활자의 부족으로 인해 훈련도감에서 만든 목활자(훈련도감자)를 혼입하여 인쇄하였다.
○ 책의 상태는 권수의 1장과 권말의 6장 정도가 책의 아래 부분이 부분 탈락이 있어 판독불가능 상태이며, 전체적으로도 책의 지질 및 본문의 내용이 매우 약화된 상태이다. 그뿐만 아니라 호계리에 소장하고 있는 교지를 포함한 모든 고문서와 문헌들이 보관 시설의 미비로 인하여 전체적으로 부식이 진행되고 있으며, 지질 또한 매우 약화된 상태이므로 보존처리가 시급한 것으로 사료된다.
호계리․장항리의 역사와 문화
김상원(호남대학교 고문)
1. 虎溪里의 沿革 2. 虎溪里의 地理的 位置 發生史 3. 虎溪里의 文化的인 側面 考察 4. 虎溪里, 獐項 사람들 앞으로 注意하고 하여야 할 일 5. 結論 |
여기서 말씀드릴 내용은 가정이나 허위가 아니고 사실만을 실재화하여 구사한 것이며, 돌아가신 분들의 휘자나 살아있는 분들의 함자는 존칭어를 생략하겠으니 양지하여주시기 바랍니다.
虎溪里는 장흥 東北方의 龍頭山과 帝岩山 골짜기의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며, 주변에는 十長生 동물들의 명칭이 있는 곳이고, 장흥-보성으로 통한 도로가 인접해 있는 山紫水明한 곳이다.
여기서 虎溪里의 沿革을 알려면 장흥의 역사부터 알아야 한다.
高麗 第十七代 仁宗時 恭睿太后 任氏의 고향이라 하여 처음으로 長興府라 하였고, 그후 여러 해를 거듭하여 숙종 14년에 18坊에 속하여 夫山, 長東, 龍溪坊에 속하다가 1914년 4월 1일로 龍溪面에서 虎溪里는 夫山面에 獐項은 長東面으로 분리되었다. 虎溪里는 일명 ‘범계’, ‘벙개’라고도 한다. 虎溪里와 獐項은 비록 面은 다를지언정 옛날부터 同一面에 속해 있었고, 上下村으로 한 부락 같이 생활해 왔다.
그러면 夫山面은 왜 夫山이라 命名하였을까? 이웃 마을 內洞 서북쪽에 지아비 바위가 있는데 멀리 떠난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 부인과 같이 생겼으며, 또한 億佛山에 있는 며느리 바위와 마주보고 있으며 이 바위 이름을 따서 夫山이라 命名하였다.
虎溪里의 沿革을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1399年경 金麟(長興元-, 원님)이 地理學에도 능하고 陰陽五行說에도 해박하여 어느 날 하루는 친구들, 幹部級들과 함께 자기의 生前死後 터전을 잡으러 지금의 장흥읍에서 耽津江을 따라 오르다가 지금의 夫山面 內安里[흥룡동, 내동]에 터를 잡았는데, 친한 친구인 지금의 灵光金氏 中始祖가 “자네는 地理學에 능하니 이 자리를 나한테 주고 다른 곳을 잡으라”고 애원하여 할 수 없이 그곳을 친구에게 주었다. 이곳이 바로 夫山面 內安里에 있는 灵光金氏의 中始祖 터인 것이다. 따라서 長興에 居住한 모든 灵光金氏들은 淸州金氏의 中始祖인 金麟과의 연고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날 耽津江을 따라 오르다가 자라번지(자래번지)에 이르러 북쪽을 보니 산으로 모두 막혀 있고, 동쪽을 보니 帝岩山이 높게 보이고 맑은 시냇물이 흘러 내려옴으로 거기서 동쪽으로 향하여 걸어가보니 지금의 虎溪里 서남쪽 案山밑에 자리를 잡고 또 냇가를 따라 오르니 지금의 蛇谷에 이르러 死後 墓터를 잡았다.
새터를 잡기 전에는 虎溪里 獐項은 張氏들이 살았고, 그들의 묘가 萬守마을에 지금도 存在해 있다. 虎溪里 마을터는 屛澗沼와 다리 사이 제방이 없을 때 시냇물이 마을쪽으로 흘렀으나, 그곳에 제방을 쌓은 후 지금과 같은 마을터가 생긴 것이다.
虎溪里 문화와 관련하여 이웃 獐項마을을 빼놓을 수 없다. 마을 뒤에는 高麗때 三別抄亂 神義軍의 抗蒙전 基地이며, 지금도 돌화살촉들이 있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앞들과 萬年里 들판까지는 東學亂의 激戰地로 東學軍(長平, 웅치, 會泉)들이 官軍과 싸우고 감나무재를 경유하여 장평, 웅치로 退行했다.
또한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동백정은, 소재지가 長東面 獐項里 707番地로 獐項마을 백호등인 속칭 ‘황새고개’의 鶴嶝에 자리 잡고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곳을 ‘冬柏亭’으로 쓰는데, 冬柏은 잣나무로 측백나무를 말할 때 도는 침엽수일 때 이 字를 쓰고, 동백은 溫帶林으로 분류되어 여기서는 ‘冬栢’으로 써야 옳은 表現이다.
冬柏亭의 歷史的 沿革은 議政府 左瓚城 金麟(김린은 어떤 분인가? 1355년 함경북도에서 출생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좌찬성에 이르렀고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절친한 사이이며 호는 동촌, 뢰은이라 함)이 반대파의 謀陷으로 長興邑제에 外補되어 정자를 세워 거처하면서 손수 冬柏을 심어 冬柏亭이라 命名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단종이 손위하던 시기라 비록 사육신과 같이 행동하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절개를 지키고 동백나무 같이 사시사철 푸르름으로 독야청청한다는 뜻과 청렴결백을 의미한 상징수로 심었다고 한다.
장흥에는 산수의 경치가 빼어난 곳이 많으나 동백정 또한 빼어놓을 수 없는 절경이다. 예양강 상류인 虎溪川이 옷깃처럼 정자 앞을 흐르고 뒤로는 龍頭山을 끌어 당겨 鎭山으로 삼고, 정자 주위에 녹음으로 우거진 老松들이 더 없이 푸르고 싱싱하여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잃게 한다.
金麟이 官界에서 은퇴한 후로는 많은 선비들이 이 동백정에 모여 학문을 講磨하고 詩人墨客들이 음품영월하면서 詩才를 겨루기도 하였다고 전해 내려오니 이는 필시 主賓이 서로 소요하면서 여중동락하였음이 분명하다. 생각건대 太平盛世가 되니 文章家들이 오래도록 품었던 關羽, 張飛가 桃李園에서 다짐하듯 誼로써 사귀었을 것이 분명하다. (冬柏亭 金奉圭 爲한 八道文章家들이 지은 모음집 책이 있음.)
또한 이 정자는 王子師傳 朴光前 이 지은 記文에 따르면 “桐村 金麟의 후손인 光澤과 成章이 나와는 從遊한 벗으로 記文을 청하기에 지었다”는 年度가 宣祖 癸未(1583)이므로 이 무렵에 그들이 重建하고 나서 記文을 청하였을 성싶고, 그후 壬辰倭亂(1592)이 일어나기 전부터 주숙인 判書公 金億秋 廬侯公 萬秋 등과 함께 弓術을 연마하던 활터로도 이용되었다 한다.
여기에서 金成章 등이 重建했다는 것을 뒷받침할 증거로 淸州金氏 大門中 『傳掌記』에 따르면 1583년에 朴光前이 記文을 지은 203년 후인 丁未(正祖 11년, 1787) 12월 28일에 文契를 치르면서 禾穀 12石 10斗中 2斗를 동백정하기로 除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중건한 亭子가 200여 년 동안이나 서 있다는 것 같다.
현 건물은 高宗 壬申(1872)에 후손 金潤賢ㆍ金履漢 등이 중심이 되고 一門둘이 서둘러서 重建된 건물로 그후 乙未(1895)에 후손 金履漢이 서둘러 重修하였으며, 또 한 차례 지난 1986년 金鍾換ㆍ金鍾根ㆍ金光源 등이 主幹하여 重修한 것으로 正面 四間, 側面 二間의 맞배지붕이며, 平面 구성은 서쪽으로부터 전면에 누마루 一間과 후면에 방 一間, 다음 中央間에는 전후로 툇마루를 두고 가운데에 방을 그리고 끝으로는 증축된 부분까지 대청으로 꾸몄으며 전체적으로 평면형태가 특이하고 복잡하다. 기단은 막돌허튼층쌓기 형식이며 초석은 자연주초석을 놓았고 기둥은 원통형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위로는 공구 구성없이 창방을 걸고 主頭를 놓았으며 창방 위로는 柱間마다 3具씩의 소로받침을 두었다. 架構는 5樑架이며 측면 중심으로부터 大樑 위로는 충량을 걸었으며, 처마는 모두 부연을 둔 겹처마이다.
건축양식이나 그 당시 문인들의 업적, 왕래 등을 고려한다면 문화적인 가치가 매우 농후하다고 사료된다. 虎溪마을 洞契案을 보면 肅宗年代(1715)에 淸州金氏를 비롯한 한 마을 上ㆍ下民들이 참여한 大同契의 모임터로도 쓰이고, 마을 別神祭의 준비장소로 이용되면서 洞亭의 역할을 하였다 한다. (大同契와 大洞契의 구별, 별신제 설명)
동백정이 오늘에 이르기까지에는 순탄치 않은 逆境이 있었다. 1935년경 동백정을 비롯한 門中山, 祭閣, 田畓 전부가 법원의 競賣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虎溪ㆍ獐項 사람들 중에서 누구하나 이를 걱정하고 해결할 사람이 없었고 뜻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그러던 중 金奉圭, 金鍾宅 父子께서 私財를 모두 털고 家具도 팔고 또한 金鍾宅의 妻家 소유 黃牛 一頭까지 팔아 競賣資金을 마련하여 元 債權者인 安洪天 씨를 찾아가 그간의 모든 사정과 애원하는 심정으로 자세한 이야기를 하였더니 安洪天 씨께서도 개인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門中을 위하여 이렇게 큰일을 한다면서 크게 감동하여 쾌히 승낙하여 金奉圭씨 父子에게 競落하여 주었다. 그렇다고 이 분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도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안홍천 씨 녹음보유)
그리하여 同門中山, 祭閣, 田畓을 競落받아 개인의 소유로 登記하지 않고 門中에 喜捨하였다. 이 사건은 그 당시에는 청주김씨들이나 他姓들에게까지도 많이 알려졌으나 지금은 일부 老人들만 알고 있다.
또한 동백정 동산에 수백년 된 老松이 울창하게 生長되어 있던 중, 1970년 초에 特定人이 이 老松을 長興郡 山林組合을 통하여 산판업자(長東面 居開里 거주)에게 賣渡하였으나 그 후 이 소식을 들은 金光源이 장흥군 산림조합에 異議를 제기하여 원 상태로 환원시킨 바 있다. 이로 인하여 金光源 兄弟를 장흥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으며 모략ㆍ중상ㆍ비방 등으로 대처하였으나 事必歸正의 원칙에 의거 金光源 씨가 승소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청주김씨들이나 인근 주민들로부터 金光源 씨의 칭찬이 膾炙되고 있다(訴訟記錄 보유). 그리하여 오늘날 동백정이 全羅南道 文化財資料로 지정되고 후손들이나 이곳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자아내고 있다.
이밖에는 左贊成公 김린의 비가 1801년 5월 3일에 세워져 있고, 神道碑가 있는데 이는 高宗 丙申(1896)에 후손 金益權이 주동하여 장항마을 앞 川邊에 桐村先祖의 遺德을 기리고자 세웠는데 이 神道碑가 光復 이후에 美駐屯軍들의 소행으로 銃彈 흔적이 7개 남아 판독이 어렵게 되자 지난 1971년에 후손들이 舊神道碑 옆에 새로운 神道碑를 세웠다.
虎溪里의 돌담을 보십시오. 그것은 個人所有 境界線도 되고 옛 선조들의 哀歡이 서려 있는 痕迹도 되며 또 盜賊의 侵犯을 막기 爲하여 쌓아놓은 것이다. 돌담은 確實完固하게 쌓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허술하게 쌓아 놓아야 盜賊이 넘어오다 곧 쓰러지기 쉽게 함이다. 이렇게 이 마을에는 文化的인 素材가 많은데도 아직까지 문화마을이나 觀光性이 있는 生態 구역이 안 되고 있다.
여기 虎溪, 獐項 주민들은 굴뚝이 많은 産業化가 아니라 굴뚝이 없는 文化産業에 눈을 돌려야 한다. 中國의 茶文化를 보십시오. 단순한 貿易商品이 아니라 中國文化를 全世界에 퍼뜨린 소프트파워의 모델이 되고 있다. 오늘 落成式을 갖는 虎溪里 文化藝術會館을 토대로 앞으로 虎溪里, 獐項이 文化마을로 育成되어야 하고 꼭 되어야 한다. 다른 地方에는 素材나 資源이 많아 이를 開發하고 生産하는데 이곳은 特別한 商品이나 資源이 없다. 그러므로 文化的 資源을 찾아내야 한다. 文化라는 것은 人間의 머리와 가슴 그리고 精神 속에서 캐내기 때문에 절대로 고갈되지 않는다. 그러나 굴뚝産業은 資源이 고갈되면 망한다.
虎溪, 獐項의 文化的인 것을 찾는다면, 다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古來 數百年前부터 내려온 別神祭
2. 冬柏亭에 관한 內譯과 史實들
3. 永慕齋 건축에 있었던 歷史
4. 고인돌 設置背景과 地理的 要件
5. 三別抄亂의 對抗地 背景
6. 東學亂의 激戰地 歷史的 背景
7. 朝鮮 순조때 全羅道 觀察使 한용구 救恤 흔적
8. 역태지역(옛날 말 기르는 곳) 주변 史實
9. 屛間岩의 由來
10. 마을 인근의 十長生이 있게 된 事由
11. 山亭家屋(書堂)이 建築하게된 動機
12. 虎溪橋 建築하기 前 로도이야기
13. 一名 虎溪川이 獐項 술거리에서 獐項 앞으로 흐르게 된 事由
14. 獐項 앞(술거리에서 황새고개) 길 이야기
(長平, 長東, 熊峙, 會泉 ~ 영암, 병영, 나주)
15. 월만과 虎溪里와의 얽힌 이야기
16. 사곡과 貯水池의 불가분의 관계
17. 동내(洞里) 샘에 얽힌 이야기
18. 虎溪里 돌담 쌓은 內譯과 얽힌 事由
19. 龍頭山과 龍溪川이 相扶相助한 理由
이렇게 많은 文化的인 資源이 있다. 虎溪 獐項 住民들이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1. 병간소를 따라 道路 위에 있는 山은 絶對 훼손해서는 안 되고 建築物도 세워서는 안 됩니다.
2. 마을에 쌓여있는 돌담은 絶對 허물거나 없애서는 안 됩니다.
3. 冬柏亭 위 황새고개 잘린 곳을 메워야 합니다. (불도저로 3일이면 완성될 것임.) 그래야 此後 虎溪里, 獐項에서 人物도 나오고 財物도 많아질 것입니다.
4. 獐項住民들은 冬栢亭에서 虎溪橋까지의 제방둑에 키가 큰 사철나무를 심으면 매우 좋을 것입니다.
5. 獐項 住民들은 동쪽에 있는 崔氏 집 뒤 못생긴 바위를 없애야 합니다.
6. 虎溪 住民들은 前에 있던 당산나무(도로변) 있는 곳에 제2의 당산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7. 虎溪里 마을 주위는 될 수 있는 한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합니다.
8. 冬栢亭 밑 沼는 될 수 있는 한 넓고 깊게 工事를 해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끝으로 結論을 말씀드리자면, 이상에서 말씀드린 여러 文化資源을 토대로 이제 虎溪里 文化藝術會館이 完工되어 모든 遺物과 고증 資料가 蒐集 진열되었으니 보성 녹차밭 觀光圈, 강진 도요 및 다산유적圈을 있는 벨트의 中心으로 이 地域 觀光資源을 最大한 活用하여야 한다.
이곳을 發展시키기 위하여서는 事業推進委員會(郡關係者, 郡議員 2명, 道議員, 全南道廳 關係者, 全南大, 朝鮮大, 湖南大 關聯敎授 等) 構成하여 所期의 目的을 期必코 達成하여야 한다.
장흥 호계 문화예술회관
□ 호계마을의 옛지도
전라도 장흥부 지도 全羅道長興府地圖 - 규장각 소장 장흥도호부지도[1872년]
이 지도는 조선시대 왕실도서관이며 국가통치기록 보관처인 규장각[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채색지도이다. 1872년께 조선왕조가 팔도(八道)와 그 군현(郡縣)별로 제작한 지도로 모두 461장이 전한다. 이 지방지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뒤 조선이 국방을 강화하고 사회 경제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작됐다. 따라서 각 군현 지도에는 진보(鎭堡)와 같은 국방시설이 상세히 표시돼 있다. 그리고 산천을 비롯한 자연요소, 읍치 등의 관청건물과 소속 동리와 같은 행정적 요소, 창고. 시장. 역원(驛院). 도로 등의 사회경제적 요소, 제단. 누정(樓亭). 서원. 고적과 같은 문화적 요소를 망라하고 있다. <조선후기지방지도 : 전라도편>(민창문화사, 1996) 등으로 영인본이 나왔다. 장흥부 지도(奎 10439) 크기는 118cmx74cm이다.
장흥부는 지금의 전남 장흥군 장흥읍, 관산읍, 대덕읍, 부산면, 안양면, 용산면, 유치면, 장동면, 장평면과 보성군 웅치면, 회령면 그리고 완도군 금당면, 생일면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읍치는 장흥군 장흥읍 남동리 일대에 있었다. 백제시대부터 고려말기까지 관산 대덕일원에 정안현[오차현, 오아현, 회주목], 장흥읍 일원에 수령현[고마미지현, 마읍현], 장동 장평 일원에 장택현[계천현, 계수현], 회천 웅치 일원에 회령현[마사량현]이 있었다가 합해졌다. 장흥은 전라도의 남쪽 해안에 위치한 고을로 예양강이 고을을 돌아 나간다.
지도는 회화적 기법을 사용하여 산의 봉우리와 기암절벽을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장흥부 읍성을 장령성(長寧城)이라고 부르는데 보통의 읍성과는 달리 평지성과 산성을 겸하고 있다. 지도상에도 천연의 암벽을 성벽으로 이용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산 정상의 봉수대에는 조응관계를 자세히 수록하기도 했다. 북쪽 가지산 아래쪽의 보림사는 보조선사가 세운 절로서 신라 말기 선종 수산문(九山門)의 하나였으며, 9세기에 조성한 삼층석탑과 석등, 보조선사창성탑비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읍치 동쪽의 벽사도(碧沙道)는 9개의 속역을 거느린 찰방역이다. 남쪽 해안가에 있는 회령진성은 조선초기에 축조된 수군만호진성으로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는 수군 진영이었다. 동쪽 해안의 해창에도 전선, 병선 등이 정박하고 있는데 돌로 쌓은 진성도 나타난다. 모두 270여개의 명칭이 표기되어 있다.
□ 호계마을 사람들과 살림집_ 우리들의 삶이 영글어 있는 곳
호계리 살림집 62호 사진[이름, 택호] / 옛 사진
□ 歷史 호계마을의 역사
마을 인근에 고인돌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엽 장전동(현 뒷들보)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는 구전이 있으며, 한때는 삼별초군의 본거지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조선 태종 때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한 김린金麟이 모함을 받아 합천군수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장흥부사로 임명되었는데, 단종이 폐위된 뒤 사육신과 함께 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부임하지 않고 1458년에 현재의 동백정 자리에 가정사假亭舍를 짓고 머물렀으며, 후손들이 주변에 세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1510년경에는 정릉참봉 김중기金重器가 장동에서 이곳으로 분가하여 입촌하였고 서산유씨, 낭주최씨, 천안전씨, 장흥임씨 등이 그 뒤를 이어 입촌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호계마을은 본래 장항, 만수 등과 함께 용계면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호계천을 사이에 두고 호계는 부산면으로, 장항과 만수는 장동면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돌담길_ 구불거림이 아름다운 우리 마을의 자랑
우리 마을의 고샅길은 모두 돌담길로 이어져 있다. 돌을 이용해 담을 쌓고 그 경계 안에 가족의 보금자리를 만든 것이다. 호박덩굴이 한길 높이의 돌담을 올라타고 담쟁이덩굴이 돌담을 완전히 감싸 담장인지 생울인지 모를 정도이다. 이미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편안하고 넉넉한 여유를 갖게 한다.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해온 돌담길은 나무들이며 살림집들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새색시가 빨래터에 갔다가 구불구불한 돌담길에서 집을 찾지 못하고 헤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돌담길은 우리 마을의 자랑이며, 길이 보존해야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生業생업_ 우리들의 땀방울이 맺혀 있는 농업도구
이곳에 터를 닦고 500여 년을 살아오면서 우리들은 한 방울의 땀방울이라도 헛되이 흘리지 않고 고스란히 땅에 뿌렸다. 땅은 고된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해마다 풍년으로 보상해주었다. 이랴이랴 쟁기 꼭지 꽉 잡은 채 보습날 깊이 박아 땅을 일구었다. 써레질로 논을 골라 모내기를 하고, 들판에 벼단풍이 물들면 낫을 들고 나가 정성스럽게 곡물을 수확했다. 이삭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았다. 달구지 가득 나락 가마니 싣고 와 곳간에 쌓아 놓으면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렇게 한 해가 저물면, 언 땅이 녹기를 기다려 다시 소를 몰고 들판으로 나갔다. 헛간에 웅크리고 앉아 지나간 세월만을 그저 반추하고 있는 쟁기, 써레, 멍에, 지게 같은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그 시절로 돌아가는 듯하다.
□ 風俗풍속_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삶의 여백
일년 열두 달 일상생활 속에서 펼쳐온 풍속이 있다. 이 풍속은 오랜 세월동안 생활문화로 정착되면서 바쁜 일상의 여백이 되어주었다. 1월에는 설과 대보름을 쇠면서 액맥이, 망월보기, 더위팔기, 부럼먹기, 노두놓기, 찰밥먹기, 쥐불놀이, 지신밟기, 줄다리기를 했다. 2월에는 콩볶아먹기, 칡캐기, 썩은새끼로 목매달기, 입춘축 붙이기, 미룡알 잡아먹기를 했고 3월에는 화전놀이를 했다. 4월 초파일에는 절에 가 공을 들였고 5월 단오에는 상추물로 화장하기, 그네뛰기, 씨름을 했다. 6월 유두에는 장원술, 보리술, 뚜께비떡, 닭죽을 먹었고 7월 백중과 복날에는 밀개떡과 보양탕을 먹었다. 8월 추석에는 올벼심리, 강강술래, 중로보기를 했고 9월에는 귀일차례, 국화주 담기를 했다. 10월에는 시제를 모셨고 11월 동지에는 동지죽, 시루떡, 호박떡을 해 먹었고 12월에는 베짜기, 빚갚기를 했다. 그리고 윤달이 끼면 묘손질, 이장, 수의장만, 이사, 집수리를 했다.
□ 信仰신앙_ 우리들의 삶을 지켜온 민속신앙
집과 마을을 떠난 삶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삶은 집과 마을이라는 공간 안에서 형성되고 유지되어왔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안녕과 생업의 풍요를 기원하는 별신제를 모셔오고 있으며,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오랜 동안 당산제를 모셔왔다. 이와 함께 각 가정에서는 부녀자를 중심으로 가족의 안위를 위한 신앙행위를 이어왔다. 우리는 가족들의 안녕과 행복을 지켜주는 신들이 집안 곳곳에 있다고 믿어왔으며, 이런 믿음을 통해 우리의 집을 단순한 삶의 공간에서 신성한 공간으로 만들어왔다. 지금은 가옥구조가 개선되면서 대부분 사라졌지만, 우리 마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지앙단지, 지석오가리, 조왕보세기, 지앙상, 칠성, 부적을 모셔왔다.
□ 生活생활_ 우리들의 손때가 묻어 있는 생활용품
우리 마을 어느 집이나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집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 있는 오래된 물건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마당귀 수돗가에는 오래된 확과 맷돌이 세월의 더께를 끌어안고 있고, 뒤꼍 장독대에는 어머니의 손맛을 전해주는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부엌 선반에는 유기그릇과 사기그릇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고, 안방 벽장 속에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고리와 삼합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낡은 책상과 책꽂이도 그대로 있고 교과서, 반짇고리, 다듬잇돌, 인두, 요강, 화로 같은 물건들도 여기저기서 금세 얼굴을 내민다. 이제는 더 이상 쓸모없는 것도 있지만, 삶의 흔적이 그대로 배어 있는 그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수십 년 전의 추억 속으로 어느덧 빠져들고 만다.
□ 別神祭별신제_ 300여년을 이어온 우리 마을의 신앙
우리 마을 별신제는 1702년(숙종 28)부터 시작되었고, 1715년(숙종 41)에는 마을민의 친목과 상부상조를 위해 대동계를 만들었으며, 지금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년 정월 대보름 자정에 모셔오고 있다. 제를 모시는 장소는 마을 북쪽 호계천 둔치에 형성된 자갈밭으로, 해마다 깨끗한 곳을 골라 막차幕次를 치고 금줄을 두른 다음 흐리상을 만들어 나락, 보리, 콩, 팥, 목화씨, 무, 삼실과, 시루떡, 닭, 술 등의 제물을 올린다. 별신제의 집례 절차는 서립序立, 초헌례初獻禮, 독축讀祝,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예필禮畢 순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천제天祭라고도 부르며, 천 ․ 지 ․ 인 삼위를 받들어 모시면서 마을의 안녕과 국태민안 그리고 풍년과 무병을 기원한다. 우리 마을 별신제는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고유한 마을신앙으로, 우리는 성심을 다해 길이 보전하고 전승해나갈 것이다.
□ 冬柏亭동백정_ 역사가 살아 숨쉬는 우리마을의 자랑
동백정은 호계천 건너편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수령 300년에 이르는 홍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조선 태종 때 의정부 좌찬성과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한 김린(金麟, 1392~1474)이 단종이 폐위된 뒤 사육신과 함께 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1458년에 현재의 동백정 자리에 가정사假亭舍를 짓고 머무른 데서 유래하며, 1584년 그의 후손인 김성장金成章이 가정사를 중건하면서 동백정冬柏亭이라 이름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95년(고종 32)에 다시 중건한 것으로, 1985년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하였다. 원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집이었는데, 우측에 1칸을 증축하여 정면 4칸을 이루고 있다. 동백정은 인근 마을의 강학소로 사용되어 왔는데, 효당 김문옥曉堂 金文鈺 선생이 이곳에서 후학을 훈육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부산면에는 동백정을 필두로 한 칠정계七亭契가 조직되어 매년 돌아가면서 시회를 개최해오고 있다. 동백정에는 그간 이곳을 방문했던 시인묵객들의 시문과 기문 등을 새긴 현판 17개가 걸려 있으며,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 人物인물_ 명량대첩의 일등공신 김억추 장군
김억추金億秋 장군은 1548년(명종 3) 강진군 작천면 박산촌에서 청주김씨 김충정金忠貞의 장자로 태어났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고 무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며, 강진 금곡사와 우리 마을의 동백정에서 무술을 연마하여 1577년(선조 10)에 무과에 급제했다. 이후 진산군수, 순창군수, 안주목사 겸 평안방어사, 진주목사, 만포첨사, 장흥부사, 담양부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97년(선조 30)에는 전라우수사가 되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김억추 장군은 군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울돌목에 쇠사슬을 설치하는 전법을 진두지휘했다. 이순신 장군은 왕에게 장계狀啓를 올리면서, 영남보존은 호남에 있고 호남보존은 김억추 장군의 방략에 있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역사적인 평가는 이순신 장군에게만 집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장군은 명량대첩 이후 여러 곳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1605년(선조 38)에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으며, 1618년(광해군 10)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택幽宅은 강진군 작천면 평기리에 모셔져 있다.
□ 장흥 호계리 동계와 별신제 관련 문서
장흥 호계리 동계와 별신제 관련문서는 조선시대 후기(1702년/1715년)부터 전해오는 기록물(동계안, 집강록, 제관록, 홀기, 풍물부의 등 관련 문적 17책과 상서 2건, 절목 1건)로서 동계창설과 운영 등 마을사의 변천, 그리고 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운영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이들 문서들은 지금까지 300년의 역사를 두고 기록되어 온 것들로서 별신제뿐만 아니라, 마을사 전체를 조명해 줄 수 있는 사료로서 가치가 자못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매년 별신제를 모시고 나면 대동계라는 마을총회를 열어 별신제의 결산은 물론 이정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자료는 마을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문서는 다른 마을에서 더 오래된 동계자료들이 확인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의 의미는 매우 다르다. 왜냐하면 현재까지도 호계리는 살아 있는 전통으로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호계리 동계와 별신제 관련 문서는 모두 20건으로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연번 |
문 서 명 |
연도 |
크기 |
1 |
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 |
1715, 1721 |
35.0x30.0 |
2 |
大洞禊案(甲寅二月十五日) |
1734(?) |
44.0x29.0 |
3 |
虎溪村中執綱案(第二) |
1752-1777 |
34.0x28.0 |
4 |
虎溪村中執綱案(第三) |
1781-1831 |
35.5x25.5 |
5 |
大洞契村案(第四 壬辰二月初一日) |
1832-1858 |
34.0x26.0 |
6 |
虎溪里執綱案(第五 戊午十二月 日) |
1858-1873 |
35.0x27.0 |
7 |
虎溪里執綱案(第六 甲戌正月十五 日) |
1873-1894 |
31.5x29.0 |
8 |
虎溪大洞案(第七 乙未正月十五 日) |
1895-1932 |
30.5x28.5 |
9 |
虎溪大洞中(第八 歲癸酉正月十五日) |
1933-1953 |
38.0x27.0 |
10 |
虎溪大洞案(第九 甲午正月十五日) |
1954-1984 |
30.0x26.0 |
11 |
虎溪大洞案(第十 甲子正月十五日) |
1985-2002 |
31.0x27.0 |
12 |
虎溪洞案(戊戌年正月 日) |
무술 |
32.5x28.0 |
13 |
虎溪洞案(丙申春正月小望) |
병신 |
23.0x25.5 |
14 |
虎溪洞中金鼓扶儀冊(庚寅正月初六日) |
1890 |
31.0x27.0 |
15 |
祭官錄(戊午歲首旣望瞻書) |
경진 |
30.0x26.5 |
16 |
別神祭祭需傳掌記(西紀一千九百二十一年辛酉正月) |
1921 |
20.0x21.0 |
17 |
虎溪大洞別神祭笏記(幷祝文) |
|
25.0x 9.5 |
18 |
上書 1(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
정미 |
59.0 x 93.5 |
19 |
上書 2(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
무신 |
58.0 x100.0 |
20 |
節目(龍溪面香徒除減節目) |
갑술 |
113.5x 48.0 |
□ 전시 설명문
o 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
1715년(을미)과 1721년(신축)에 기록된 것으로 대동계 임원과 계원 명단, 그리고 8조의 완의가 수록되어 있다. 표제가 ‘大洞刱契(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로 되어 있는데 숙종 41년은 1715년이다. 표지에 창계(刱契)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대동계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수재 이민기(1646-1704)의 만수재집 권5에는 虎溪新基祝文, 虎溪地神祝文, 獐項地神祝文, 虎溪別神祝文 등이 나오는데, 이 기록에 의하면 1702년에 호계리 별신제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o 大洞禊案(甲寅二月十五日)
대동계서(序)와 완의(完議)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계의 배경과 목적과 마을에 관련된 제반 규율과 의무 등 일종의 자치규약 34개조에 대해서 적고 있다. 상부상조를 회피하는 자에 대한 처벌, 기강을 어지럽히는 자에 대한 처벌, 춘추강회의 실시, 마을의 공동납 등 대동계를 운영하고 마을을 교화하기 위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표제가 ‘大洞禊案(甲寅二月十五日)’으로 되어 있는데 갑인년은 1734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o 虎溪村中執綱案(第二)
1752년(임신)~1777년(정유)의 계 임원 명단이다. 표지가 결락되어 있다. 임원은 1년 단위로 교체 되었는데, 1754년~1758년 등 유임의 기록도 함께 보인다. 촌장(1), 도유사(1), 공사원(2), 유사(2), 직월(2) 등의 임원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1752년부터 대동계에 촌장을 비롯한 마을의 대부분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면서 그 조직 기반도 확고해져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o 虎溪村中執綱案(第三)
1781년(신축)~1831년(신묘)의 대동계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문서 앞부분에 1787년(정미)에 작성된 완의 2종이 있다. 완의는 마을 공동 소유의 상여 활용에 관한 내용이다. 1787년의 완의는 춘추강회를 실시할 때 힘을 보태지 않은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으로, 따르지 않으면 마을에서 쫒아 내도록 하는 규정이다. 또 계원들 가운데 상을 당한 사람이 생기면 상사를 치룰 때 부의금을 거두어 주도록 하였다.
o 大洞契村案(第四 壬辰二月初一日)
1832년(임진)~1858년(무오)의 임원에 관한 기록이다. 촌장, 도유사, 공사원, 유사 등의 직임인데, 1847년(정미)부터 1853년(계축) 사이는 공사원과 유사 대신 별유사기 기록되고 있어 조직의 변화를 볼 수 있다.
o 虎溪里執綱案(第五 戊午十二月 日)
1858년(무오)~1873년(계유)의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촌장 1인, 도유사 1인, 공사원 2인, 유사 2인인데, 1867년~1870년 사이는 공사원이 3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o 虎溪里執綱案(第六 甲戌正月十五 日)
1873년(계유)~1894년(갑오)년 사이의 임원에 대한 기록이다. 표제에는 갑술년(1874년)이지만 실제 그 전해인 1873년부터 기록하고 있다. 조직이 유사 중심에서 직월 중심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알 수 있다.
o 虎溪洞中金鼓扶儀冊(庚寅正月初六日)
1890년(고종 27) 마을에서 금고(농악기)를 마련하면서 부의를 받은 내용을 일일이 수록했다. 마을 주민은 물론 인근 면과 마을, 보림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부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로서 희귀한 문서이다.
o 祭官錄(戊午歲首旣望瞻書)
호계별신제의 제관록이다. 1918년(무오)의 호계대동별신제향 회유문 등의 기록과 함께 있다. 표제의 ‘戊午歲首旣望瞻書’라는 기록으로 보아 무오년에 처음 등서한 것으로 보인다.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해[歲次未攷]도 있으며, 1950년, 1953년, 1960년 등 서기가 함께 기록된 것도 있다.
o 虎溪大洞別神祭笏記(幷祝文)
호계리 별신제의 홀기이다. 김기권(金基權)이라는 인명이 기록되어 있다. 만수재 이민기(1646-1704)의 만수재집 권5에는 虎溪新基祝文, 虎溪地神祝文, 獐項地神祝文, 虎溪別神祝文 등이 실려 있다.
o 上書(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정미)
정미년 7월에 성주(장흥부사)에게 올린 상서문으로 용계면 호계리 거주하는 화민 32명이 연명으로 올렸다. 내용은 폭우로 인해 전답이 유실되고 인명이 표류 익사하였으며 제방이 파손되고 마을이 물에 잠기는 피해가 있었는데 이를 구휼해 달라는 내용이다. 지세히 살펴서 원조를 하겠다는 제음(題音)이 있다.
o 上書(龍溪面虎溪里居化民李奎精安東岳李憲徵等, 무신)
무신년 정월에 성주(장흥부사)에게 올린 상서문으로 용계면 호계리 거주하는 화민 29명이 연명으로 올렸다. 내용은 전년 6월에 입은 태풍의 피해로 잠긴 제방을 보수하여 물이 소통되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전년(정미년)에 올린 상서의 답신에 확인하여 처리한다고 했는데, 해가 바뀌고 농사철이 다가와도 안 되고 있어 장정을 동원해 보수해주고, 인근의 장서면(長西面) 상하점(上下店)과 와석정(瓦石亭) 홍거리(洪巨里) 등의 주민도 동원해 달라는 내용이다.
o 節目(龍溪面香徒除減節目)
갑술년에 용계면의 향도역을 감제하는 절목이다. 용계면에 부과된 향도역을 순찰사가 조정해 주었는데 시일이 지나 다시 부과되자 고통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이에 대해 감제해 줄 것을 청하였고, 그에 따라 감제해준 절목이다.
o 振武原從功臣錄券
仁祖 2년(1624년)에 일어난 李适의 亂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金希敏이 振武原從功臣 1等의 功을 인정받아 下賜받은 振武原從功臣錄券은 功臣都鑑에서 만든 목활자본 1책으로 선장 형태로 제책되어 있으며, 책의 크기는 33.6×22cm이다. 표지의 서명은 ‘振武原從功臣錄券’으로 墨書되어 있다. 녹권의 첫머리에는 수취자명, 문서발급의 목적 등이 적혀 있다. 본문에는 李适의 亂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끝부분은 문서의 발급일자와 포상내용, 발급기관, 담당관원의 職銜과 성씨 등이 수록되어 있다.
o 敎旨 金敬義
父는 溥, 母는 靈光金氏로 嘉靖 丙午(1546)에 태어나 辛亥(1611) 12月 20일에 졸하였다. 字는 子宜이며, 벼슬은 慶州判官을 지냈다. 死後 天啓 6年(1626) 閏6月 20일에 通政大夫刑曹參敬義에 추증되었으며, 두 번째 부인인 水原白氏 역시 貞夫人에 추증되었다.
o 敎旨 金希敏
父는 金敬仁, 母는 晋州河氏이다. 1582년 生父 金敬義와 母 光山金氏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나 伯父인 金敬仁에 出系하였다. 1606년 武科에 합격하여 1617년 正五品인 忠義校尉, 1618년 從四品인 定略將軍, 1618년 慶尙道 所非浦權管, 1620년 從三品인 保功將軍이 되었다. 仁祖 2년(1624) 李适의 亂을 평정하여 振武原從功臣 1等의 功을 인정받아 正三品 禦侮將軍이 되었고, 이어 天啓 6년(1626) 全羅道左水營虞侯가 되었다. 崇禎 3년(1630) 錦南 鄭忠信 장군 휘하에서 椴島에 있는 胡賊들을 격파하였으며, 崇禎 6년(1633) 11월 廣梁鎭 僉節制使가 되어 牟承錄과 함께 殘賊들을 토벌하다가 崇禎 7년(1634) 正月 一日 陣中에서 순직하였다.
o 敎旨 金聲一
父 金希敏 母 草溪卞氏 사이에서 次男으로 태어났는데, 生沒年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위로 두 분의 누님이 있고, 한동안 嫡子가 없었던 金希敏이 金希達의 次男 金益振(1601∼?)을 系子로 맞이한 이후 聲一과 聲運이 출생했고, 형 益振과 본인, 동생 聲運이 仁祖 6년(1628)년 武科에 모두 급제한 것으로 보아 1605년 이전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1628년 5월 武科에 급제, 동년 10월 8일 正九品 效力副尉가 되었고, 여러 차례 진급하여 왕을 近侍하는 宣傳官이 되었다. 특히 1634년 父 金希敏이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의 椴島에 있는 殘賊을 토벌하다 순직하자 천리를 달려가 시신을 수습하여 長興郡 安良面 蓼谷의 고향산에 安葬하였다.
o 敎旨 金聲運
父 金希敏과 母 草溪 卞氏 사이에서 3남 2녀 가운데 3男으로 生沒年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위로 두 분의 누님이 있고, 系子인 長兄 益振(1601∼?)과 親兄 聲一과 함께 仁祖 6년(1628)년 실시한 武科에 모두 급제한 것을 고려해 볼 때 1605년 전후로 출생하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는 崇禎 元年(1628) 5월 武科에 급제하여 동년 10월 8일 正九品 效力副尉가 되었고, 여러 차례 진급하여 왕을 近侍하는 宣傳官이 되었다.
o 敎旨 金益徽
父는 金希達, 母 寶城宣氏이다. 1598년 長男으로 태어나 丁未(1667) 正月 15일 졸하였다. 崇禎 원년(1628) 5월 武科 乙에 及第하여 崇禎 원년(1628) 10월 承義副尉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이어 順治 원년(1644) 4월 效力副尉 守門將과 7월 修義副尉, 順治 3년(1646) 6월 宣略將軍行龍驤衛副司果武臣兼宣傳官, 順治 4년(1647) 정월 秉節校尉行龍驤衛副司果武臣兼宣傳官, 順治 4년(1647) 11월 保功將軍行武臣兼宣傳官, 順治 4년(1647) 10월 敦勇校尉行武臣兼宣傳官과 忠毅校尉, 順治 5년(1648) 정월 禦侮將軍行鏡城鎭管防垣兵馬萬戶 등을 지냈다.
첫댓글 이리도 바쁘게 사는데 나는 무엇하고 있을까? 된 것도 없고, 되지도 않고, 그런다고 열심히 하지도 않고...... 지랄 빙하고 있는지 요새 재미가 없다. 10월의 마지막 밤에는 이런 생각이 없어야 헐 것인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