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관련 자료 찾아다니다 발견했습니다. 역시 철지난 자료이지만 자세히 몰랐던 내용들입니다.
발해탐사대 최후의 항해일기 “SOS!! 발해 1300호”
눈보라와 함께 몰아치는 거센 바람. 해일처럼 치솟는 성난 파도. 역류하며 소용돌이치는 강한 해류. 칠흑같은 어둠과 추위. 최악의 기상조건 속에서 24일간 목숨을 건 뗏목항해를 감행하다 비장한 최후를 마친 발해탐사대 ─. 그들은 허기와 탈진 상태에서 12시간 동안 사나운 풍랑과 최후의 사투를 벌이다 일본 도고섬 해역에서 수중고혼이 됐다. 그러나 그들은 항해기간 중의 환희와 고통,갈등과 위기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항해일기를 남겼다. 발해항로 탐사를 통해 독도는 우리 땅임을 재삼 확인하려 했던 탐사대원 4명이 요동치는 뗏목 위에서 시간대별로 써내려간 뜨거운 민족혼의 생생한 기록.
바다가 거칠어진다. 배가 섬으로 밀려가고 있다. 우선 섬으로 피신을 했으면 한다. 교신이 빨리 되길 바란다. 우리 탐험대가 맞은 가장 위험한 상황이다. 협조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도고에 들어감. 도고에 잠시 머문다. 일본영사관에 협조요청. 휘발유 급유. 8시 교신.’
발해 1300호 최후의 날인 23일 오후 4시. 장철수 탐사팀대장은 항해일기에 당시의 위기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대원들은 이때 거친 풍랑과 맞서 숨막히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날 동해에 떠 있는 일본의 외딴섬 오키(隱岐)제도 일대는 심한 눈보라와 함께 초속 16m의 강한 북서풍이 불고 있었다. 6m나 되는 파도는 오키제도 북쪽 도고(島後)섬 절벽에 부딪쳐 되돌아 나오면서 9m 정도로 높아졌다. 해일처럼 치솟은 성난 파도는 도고 섬으로 떠밀려 가는 뗏목을 덮쳤다.
16분 후 그들은 다시 한국의 지원팀에 급전을 때렸다. “도와달라. 도고섬 8km 전방이다. 이대로 가면 섬에 충돌할 것 같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항해를 성공시키겠다’는 출발할 때의 각오를 생각하면 탐사대원들의 ‘도와달라’는 호소는 최악의 위기에 처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일본 해상보안청이 한국 해경으로부터 뗏목 구조를 요청하는 팩스를 받은 것은 오후 6시30분. 해상보안청은 즉시 뗏목 위치 파악에 나서 오키섬 앞 5마일 지점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높은 파도로 사고를 염려한 해상보안청은 일본 도고섬의 ‘사이고(西鄕)’로 예인할 계획을 세웠다.
뗏목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탐사팀은 항해일기에 ‘아직 아무 소식이 없다’고 애타는 심정을 담았다. 그리고 ‘급박해지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때가 오후 7시5분이었다. 그로부터 1시간여 후인 밤 8시8분 한국의 아마추어 무선지원팀과 교신했다. ‘도고섬과의 거리가 2km 남았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정확히 17분 뒤인 밤 8시25분 항해일기엔 독백을 하듯 뜻을 알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40분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했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게 하는가. MAY DAY를 외친 후….’물에 젖어 잉크자국 얼룩진 항해일기는 여기서 멈추고 있다.
그러나 대원들은 이후에도 30여분 이상 생존을 위한 싸움을 계속했다.
일본 해상청 브리핑에 의하면 밤 8시30분쯤 순시선은 통신교신이 가능할 만큼 뗏목 가까이 접근했다. 순시선의 레이더에 잡힌 뗏목은 점점 섬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순시선 사령탑은 대원들에게 “구명조끼를 입고 닻을 내려라”고 요구했다. 당시 뗏목과 섬과의 거리는 1백50여m에 불과했다.
대원들은 이 시간에 한국의 무선지원팀과도 교신했다. 밤 8시50분 ‘순시선과 연락이 닿았다.’는 내용을 지원팀에 보냈다. 이어 6분 후 “순시선이 왔다. 걱정할 필요없다”고 타전했다. 지원팀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순시선이 온 것이 사실이냐”고 확인했다. 대원들은 “예. 맞습니다. 이제 준비해야 하니 교신을 중단해야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이것이 지원팀과 아마추어 무선팀간에 오간 마지막 교신이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울릉도~제주 성산포를 잇는 발해항로는 총 6백72해리(1천2백38km)─.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 장도에 오른 ‘발해 1300호’의 항해는 목숨을 건 고난의 여정이었음이 항해일기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장철수 대장은 발해와 신라가 교역로로 삼천리 수천리 동해 바닷길을 더듬어 내려오면서 보고 느꼈던 환희와 고통, 그리고 위기의 상황을 항해일기에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다.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난 탐사팀은 최종목적을 부산항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을릉도 근해에서 역류하는 해류 때문에 뗏목은 해류를 따라 부산이 아닌 일본으로 떠내려갔다. 항해일기에 기록된 항해의 전과정은 긴장의 연속이다. 항해 마지막 날이었던 23일 일기는 아침부터 불길한 예감을 비치고 있다.
‘08:00 도고섬과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 북서풍과 파도는 남쪽으로 치고 있어도 뗏목은 약간의 북쪽을 확보하고 있다. 해류는 북쪽으로 흐르고 있는 모양이다. 사방은 안개가 자욱하여 시계를 분간할 수 없다. 대원들은 지쳐 있는 상황이다. 바람은 여전히 우리 편이 아니다.’
이런 불안감은 오키제도 가까이 다가가면서 점점 가중된다.
‘07:00 장비 고장과 소모가 많다. 눈 앞에는 등대가 보이고 항로는 오키섬으로 들어서고 있다.
09:30 버너 고장으로 가까스로 밥을 하는데 가스가 3통밖에 없다.
10:00 뗏목이 종횡무진이다.
11:05 다시 공격할 시점을 잡고 있다. 북서풍이 미약해질 시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12:00 아침은 비상식 귤. 어디선가 일본측 교신이 비상주파수로 나오고 있다. 일본에서 우리의 뱃길을 따라오고 있다고 함.
13:35 모든 것이 아쉬움 투성이다. 속이 타서 담배를 하나 물었다. 지금은 나의 신체와 정신이 위축되어 있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리고 오후 4시쯤 작성한 일기는 마지막 마음의 정리를 한듯 비장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나라에 짐이 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더욱이 오늘 한·일어업협정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는데 그들의 속셈이 드러났다고 보아진다. 무엇보다도 내가 의연해지고 싶다. 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 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 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 탐험정신. 발해의 정신.’
장철수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은 지난 87년부터 독도지키기에 앞장서 온 독도의 파수꾼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한·일 양국이 어업협정 파기문제로 날카롭게 맞서 있는 상황에서 무단으로 일본 영해를 범한 것이 한국측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이후 그들은 시시각각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리게 된다.
구조에 나선 일본순시선이 뗏목의 불빛을 처음 발견한 시각은 밤 9시쯤. 무선지원팀과 마지막 교신이 오간지 10여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순시선에서는 조명탄을 발사했으나 파도 속에 묻혀 요동치는 뗏목의 위치는 좀체 확인이 되지 않았다. 해상보안청에서는 해상 자위대에 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헬기는 24일 새벽 1시쯤에야 현장에 도착했다.
출동한 헬기는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현장을 수색했지만 강풍·눈보라가 몰아치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위치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첫번째, 두번째 헬기는 연료 부족으로 회항하고 말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순시선 레이더에는 뗏목이 포착됐고 쌍안경으로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번째 헬기가 도착했을 때 이미 뗏목은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새벽부터 헬기는 다시 수색에 나섰다. 그리고 아침 6시쯤 도고섬 서북쪽 후쿠우라(福浦)항 남쪽반도 해변에 좌초해 있는 뗏목을 발견했다. 육지에서 1백m 떨어진 바다 위에는 2명의 대원이 엎드린 채 표류하고 있었다. 또 1명은 뗏목에 몸을 묶은 채 파도를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헬기에서 내려간 다이버는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2명 가운데 이용호 대원을 먼저 구조했지만 숨지고 말았다. 그 사이에 또 한명은 파도에 밀려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육지로부터 불과 수십m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바로 임현규 대원이었다. 뗏목에 묶여 있던 사람은 이덕영 선장. 그러나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흔들리는 뗏목에는 돛대에 묶인 그의 발목만 남아 있었다. 발해 항로 재현의 꿈은 이렇게 파도 속에 묻혔다.
탐사대 뗏목 발해 1300호가 극동의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출발한 것은 지난해 12월31일 오후 2시(한국 시간). 출발 당일은 또 이덕영 선장의 생일이었다. 탐사대는 들뜬 기분으로 닻을 올렸다. 그러나 탐사팀은 출항소식을 한국의 지원팀에 직접 전해 주지 못했다. 무전 교신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駐) 블라디보스토크 최용삼 총영사의 전화를 받고서야 지원팀의 출발 사실을 알게 됐다. 이처럼 첫 출발부터 통신두절로 탐사대와 지원팀은 함께 애를 태웠다. 다음은 항해일기에 기록된 대원들의 고난의 여정.
‘동해의 너울을 고독과 적막으로 건넌다는 것.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파도가 상당히 거칠어지고 있다. 조금의 교만도 험한 상황을 부를 수 있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경계해야겠지만 교만은 절대 금물이다. 무엇이든지 의미있는 작업에는 아픔이 있게 마련이다.’
1월1일
13:20 교신 계속 시도하나 잘되지 않음. 예약 주파수인데 누가 방해 전파 쏘고 있음.
15:30 판자 떨어져 상판에 뒹군다.
20:00 발전기 고장. 선장님이 고치다.
20:35 야간항해. 첫날 항해에 대원들은 만족.
1월2일
04:30 갑자기 기상명령. 어제 측정 때 이상이 있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09:00 밖에는 약간의 눈. 바람과 조류가 전혀 없다. 여전히 상갑판에는 얼음이 붙어 있다.
09:20 날씨가 좋다는 것은 뗏목에 있어 아주 지루한 여행이다. 전대원이 얼음을 깨고 있다.
09:45 아픈 손에 칼을 쥐고 감자를 깎았다. 약간의 통증이 온다. (장철수 대장은 러시아에서 뗏목을 만드는 중에 오른손 새끼손가락 마디 세곳과 네째 손가락이 골절되는 등의 중상을 입었다. 그래서 항해 중 내내 왼손만을 사용했다.)
12:00 교신을 위해 발전기 가동. 교신이 되기를 기다림. (한국과 교신되는 사람에게 보드카 1병을 주기로 하는 등 탐사대원들은 교신 성공을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매달렸다.)
12:50 화장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일 문제는 물을 어떻게 피하느냐다. (항해기간 내내 그들을 가장 괴롭힌 것 중의 하나가 생리 처리 문제였다. )
15:00 북한방송이 들리고 있다.
17:25 첫 교신이 되었다.
일기에는 경기도 안산의 백현호씨 등 6명의 아마추어 무선사(HAM)들과 교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어 오후 7시25분에 시작해 창원의 송차식씨(경일고 교사), 부산의 해양대 HAM 동아리와도 교신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후 교신은 다시 끊기고 만다. 이를 근거로 일부 방송에서는 뗏목 탐사대가 실종됐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1월3일
8:30 정말 밤에는 약간 무서웠다. 선실의 삐걱거림은 적당히 사람을 공포로 몰아 가는 듯했다.
신년 메시지 새해를 맞아 발해 1300호는 경제국난에 처한 상황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혼을 담고 위기를 극복할 정신을 가득 실어 남으로 항진하고 있습니다. 발해 1300호는 어떤 난관도 극복할 것이며 새해를 맞아 우리 모두가 새로운 출발을 약속합니다.
09:20 발해가 중요한 것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대와 중흥에 강한 행보였다는 것이다.
11:05 태양이 바다에 비춰져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야말로 황금바다이다. 이럴 때 시를 쓰자.
21:10 KBS 사회교육방송을 HAM으로 듣고 있다.
22:00 기둥을 타고 들려오는 동해의 물결소리가 정답게 들려오고 있다. 불침번을 서고 있다.
1월4일
04:10 전원이 기상을 했다. 돛줄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충분한 수면이 어려운 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배는 잘 가고 있다. 정말 탐험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표현이 좋을지 모르겠다.
07:00 돛을 모두 내렸다. 물에 밀려가는 속도를 측정한다. 바다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8:30 겨우 백두산 위치인 42도를 넘었다. 파도가 우리를 시험이라도 할 듯 좌우 밑으로 계속 때린다. 시베리아의 북풍은 계속 거세다. 그러나 우리는 꼭 해낼 것이다. 아버지, 이제는 아픔도 고난도 이 동해 바다에 훌훌 던지겠습니다.
16:20 파도는 우리가 수리를 해놓고 나면 그것을 실험이라도 하듯 큰 힘으로 두들겨 재낀다. 참으로 이상한 심보다.
교신이 끊긴 상태인 1월4일 12시쯤 PC통신 하이텔에는 탐사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글 한편이 올라왔다. 홍콩의 한 아마추어무선사(HA M)가 ‘HLO JQT’라는 콜사인을 갖고 있는 한국 사람이 뭔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 같다는 메시지를 들었다는 사연이었다. 그 콜 사인은 바로 탐사대 임현규 대원의 것이었다. 지원팀은 일순 긴장감에 휩싸였다. 지나던 북쪽 공해상에서 탐사대의 의지와 상관없이 북한으로 갔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탐사대나 지원팀 모두 준비 때부터 이 점을 가장 염려했었다. 나중에 교신을 통해 확인한 결과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홍콩 HAM이 상황을 잘못 전달한 것으로 드러나 지원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탐사팀이 남긴 항해도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북한 영해 12해리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는 고비를 실제로 겪었다.
1월5일
어제의 거센 바람은 배를 거의 혼수상태로 만들었다. 이빨을 닦았다. 잇몸을 감싸고 도는 단내를 그냥 두기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15:25 밤 사이 힘들었던 항해였다. 일본쪽으로 많이 이동했다.
21:00 나의 탐험은 지금부터다. 넓은 고구려 땅을 당나라와 신라에 빼앗긴 대조영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03:00 동해의 너울을 고독과 적막으로 건넌다는 것.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럴수록 파도는 거세진다. 바람도 더욱 거세진다.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려면 고통도 있어야 되겠지만 인내 또한 더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의미 있는 작업에는 아픔이 있기 마련이다. 뗏목 탐험은 우리의 동해가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12:00 오른손에 비닐을 감고 돛을 올렸다. 나는 누구보다도 이 배를 믿는다. 탐험은 역시 좋은 것이다.
14:00 파도가 상당히 거칠어지고 있다. 조금의 교만도 험한 상황에 돌입할 수 있다. 그러기에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경계해야 되겠지만 교만은 절대 금물이다. 외무부와 해경의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 또다른 만족이지만 부담으로 남는다.
교신 시작 05:00, 17:00 오전 교신 때 아시아나 항공 HAM 동아리에서 중계를 해주어 많은 분들과 교신을 할 수 있었다. 오전 5시 교신은 끊긴 지 81시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20:00 돛을 내렸다. 엄청난 속도의 바람이 불었다. 뗏목이 바다를 날아간다는 표현이 좋으리라 싶다. 그리고 파도는 뗏목을 선실을 차고 난리 요동을 친다. 가장 어려운 항해다. 벽으로 물이 스미는 것을 보았다. 한기가 느껴져 엔진을 켰다.
1월7일
08:20 선실의 오른쪽이 내려앉았는 것 같다. 과연 뗏목에서 안정의 한계수치는 어디까지일까? 아직 갈 길이 험하다. 간밤 폭풍으로 키(방향타)가 유실되었다. 감기가 들어 콧물과 기침이 나오고 극도로 체력이 저하되었다.
12:00 용골이 튀어나와 용호 형님이 X자로 고정. 안테나 상태가 좋지 않아 다시 고치고 있음.
17:40 달걀을 바닷물로 끓이고 있다. 용호가 상당히 허기진 모양이다. 감기약을 먹었다. 기다리던 북동풍이다. 약간 미약하지만.
20:45 라디오에서 옹헤야를 하니 배가 춤을 추고 있다.
21:30 오늘은 모든 것이 순조롭다. 바람도 가끔은 해류까지 우리를 도와준다. 뗏목은 정말 훌륭한 배다. 이 기능성과 복원력만 갖출 수 있다면 바다에서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오후에는 하늘 저편에서 무지개가 빛나고 있었다.
이날 지원팀에서는 통신두절사태를 막기 위해 뗏목에 비상주파수(22.445 MHz, 콜 사인 BARHAE1300)를 부여했다.
1월8일
09:40 아침식사, 용호. 빵, 소시지, 달걀 무쳐 볶았다. 후식:사과. 오늘의 할 일 안테나 수리.
19:00 연변 방송국 뉴스가 선명하게 나오고 있다. 정말 우리나라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탐사팀은 제주 성산포로 가려던 처음 계획을 이날 부산으로 변경했다. 중간 기착지인 독도 울릉도는 예정대로 들르기로 했다.
1월9일
04:30 계속 북동풍. 그러나 배는 순항한다. 발해 1300호는 버릴 것은 동해 깊은 곳에 던지고 실을 것은 우리의 뗏목에 실어 돌아가겠습니다.
10:00 대원들은 분주히 돛을 꿰매고 주변을 손질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어젯밤은 12시까지 노래를 하고 보드카를 마시며 여흥을 즐겼다.
10:30 거의 바다에 떠 있다. 제문을 짓기로 했다.
무인년 양력 정월 아흐레 탐사대원 발원 신위
동해용왕·사해용왕·문무대왕·영락대왕·대조영황상·충무공이시여!
항해 10일째날 순풍에 돛을 달아 동해를 항해함은 1300년 이 땅의 역사를 용서하심을 바라며 원을 풀어 파도에 실어 보내고 희망은 담아 뗏목에 싣고자 함이오니 작은마음 흠향하시와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땅에는 한과 피가 흥건히 고여 죽어도 용서 못할 원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온 산천이 아귀의 천국이었나이다. 오늘 이 흙을 동해에 뿌리오니 흙은 물을 사함이니 영원히 극락왕생하소서. 부디부디 좋은 길에 땅의 일은 잊으시고 하늘에서 그 뜻 이루소서.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게 희망과 꿈을 주시옵고 온 세상 한 민족의 착한마음 오대양, 동해에서 흘러들어 스미게 하소서. 원하기는 이 민족이 더욱 착하고 열심히 일하여 이 세상을 참일꾼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홍익인간 광명이세 대대손손 겨레의 지혜를 밝혀 주소서. 구구한 글귀가 울음과 슬픔으로 비옵나니, 길이길이 이 민족을 용서하소서.
12:00 교신 어제 폭풍이라고 울진에서 전화. 현재 남풍.
16:30 동해에서 용왕제를 올렸다.
작은 준비. 성냥, 밧데리(축전지). 바다에서는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다.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상황이 언제 어느 순간에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1월10일
10:40 물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멀리 도망갔으나 아쉬웠다. 아침이라도 함께 먹고 싶었는데….
‘잠결에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선체에 불이 들어왔다. 해경배가 도착하였다.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우리 탐사대 옆으로 바짝 붙여 물품을 전달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항해 도중 사람들과의 첫 조우였다. 꼼꼼하게 챙긴 보급품과 편지 고마웠다.’
1월11일
02:00 북풍이 불고 파고가 높다. 탐사에는 반칙이 있어서는 안된다.
11:35 38선을 곧 넘을 것 같다. 오늘은 파도가 거칠었다. 38선. 지금쯤 우리 수역으로 들어온 것 같다. 우리 땅을 건너는 것에 마음이 설레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참 많이 울었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16:00 항상 대장은 악역이어야 하는가. 어렵게 여기까지 와서 의견이 엇갈린다. 그냥 울릉도를 경유하면 좋겠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뗏목이 울릉도 경유계획이 세워지면서 한국의 지원팀도 바빠졌다. 탐사팀과 교신을 통해 고무보트, 자동차용 밧데리, 카메라용 후레쉬, 12mm 로프 한 바퀴 등 필요한 물품 목록을 받아 울릉도에 기착했을 때 전달하기로 했다. 지원팀장 이소희씨와 해양대 HAM회장 이재희씨는 때마침 내려진 폭풍주의보로 포항에서 이틀을 지체한 뒤 13일 울릉도에 도착해 뗏목을 기다렸다.
1월12일
09:35 연구소 깃발이 물에 빠진 모양이다. 모두 기분좋게 다 달아 주고 싶다. 대장노릇 힘들다. 그러나 잘해 내었다. 성공 항해가 마무리되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17:15 밖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렀다.
21:00 이제 탐사가 중반에 들어왔다. 편법과 연출하는 행위. 진지하지 못함. 불성실. 그러한 것은 이미 인정할 수 없는 탐험이다. 울릉도에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4:30 바람은 계속 북동풍인데 동쪽으로 밀려가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해류의 흐름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탐험에서 몇가지 색다른 것은 과학적인 장치가 제법 갖추어졌다는 것이다. HAM, G. P. S(자동위성항법장치), 컴퓨터. 어디까지 이용해야 하며 어디까지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정말 헷갈린다.
1월13일
09:00 오늘이 몇십년만에 중강진에서 영하 44도가 되었던 날이라고 라디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비가 오고 있다. 배가 계속 북쪽으로 밀리는 느낌이다. 대원들이 지쳐 있다. 나의 지도력도 이제는 힘을 잃어 가는 것 같다.
14:40 중요한 고비가 될 것 같다. 바람은 북서풍이 조금씩 불어오고 있다. 울릉도로 갈지 변수가 예상된다.
22:00 동쪽 해류가 강하다. 어려울 때를 생각하자.
1월14일
03:45 동쪽으로 많이 흘러갔다. 초조하게 한시간씩 G. P. S.를 보고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내가 왜 탐험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심신이 피곤하다. 그러나 어제 예기치 않은 해류에 밀려 자칫, 울릉도와 독도마저 보지 못하는 그래서 곧장 일본으로 빠지는 사태가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이 더했다. 그래서, 행여 경비정에나 몰려가는 보기싫은 장면이 연출되지 않을까 하여….
08:00 나침판을 무시하고, 바람 방향만 파악하고 무조건 서쪽으로 항해를 했던 것이 좋았다. 졸리면서도 졸음항해를 방지하려 옷을 가볍게 입었더니, 추위가 몸을 감싸고 돌았다. 발해는 대양항해로 신라와의 교역이 가능했고 고대인들의 독도 발견도 충분히 가능했다.
12:00 폭풍주의보. 3∼4m. 파고가 상당하다. 우리 항해에는 더없이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육지로 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북동풍이다.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시속 5km. 다행히 바람이 우리가 원하는 쪽이 되어 성공항해가 기대된다.
19:15 폭풍을 뚫고 뗏목이 가고 있다. 돛을 내렸다. 울릉도 내릴 계획을 취소하고 북동풍으로 육지쪽을 향한다. 거쳐온 시간들을 조용히 생각해 보니 아련해진다.
뗏목이 울릉도 근처에서 도착한 것은 14일 오후 2시쯤. 이곳의 한 해군기지 레이더에 몇분동안 뗏목이 포착됐다. 이에 앞서 12시쯤 탐사팀은 울릉도 지원팀과 교신을 통해 저동항에 입항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교신하는 그 시간에 동해 전해상에 또다시 폭풍주의보가 내려졌다. 해경경비정도 출항을 하지 못할 만큼 기상상태가 나빴다. 뗏목도 끝내 접안에 실패했다. 지원팀은 15일 아침 8시에 교신에 성공해 뗏목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다음은 을릉도 근해의 상황을 기록한 항해일기.
1월15일
02:00 아직도 울릉도의 집 불빛과 등대가 보인다. 서서 소변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흔들린다.
07:10 나는 이번 항해를 하며 너무 많은 비나리를 하고 있다. 명예도 욕심도 다 버리자. 이 폭풍 속에 살아낼 수 있음에 감사드리자.
11:00 도대체 이 나라에는 바다에 대한 교류도 없었단 말이냐. 그리고 기껏해야 연안을 오가는 짧은 거리만 있고 모두 중국과 일본의 독무대였고 동해가 일본해, 황해가 중국해, 그리고 기껏 남쪽에 있다 하여 남해뿐인가 말이다.
19:00 돛줄을 잡으면서 옷이 흠뻑 젖어 감기가 들어 약을 먹었다. 출입국 관리를 해결해야 할 것 같다.
24:00 손등에 약간의 뼈가 올라왔다. 그리고 아프다. 진통제를 먹었다. 1시간 30분씩 교대근무를 하다.
1월16일
08:00 우리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을 제사의 형태로 바랄 수밖에 없었다.
11:40 동해 지명문제가 UN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될 것 같다.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지명이란 중요하다. 어려울수록 전진하는 것이 뗏목 정신.
14:00 현규가 선미에서 현대깃발을 정리하고 선장님은 선수, 용호는 돛을 잡고 있다. 방황의 30대 마지막 여행. 이제 무얼할까. 깡그리 날려 보내자.
이날 폭풍주의보와 경보가 해제됐다. 뗏목은 육지쪽으로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해군과 해경에 문의한 결과 그대로 순항하면 17∼18일께 부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란 답변을 들었다. 이에 맞춰 부산의 지원팀과 해양대에서는 인양선을 준비하는 등 대대적인 환영행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뗏목은 무풍지대에서 맴돌았다. 18일 낮까지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실제 항해도상에 8자처럼 그려진 항로궤적이 바로 그것이다.
1월17일
08:30 해류가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다. 물이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어렵게 왔는데 다른 방향으로 가고 바람도 불지 않아 안타깝다.
13:10 위대한 탐험가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다 .
16:30 빵이 상했다. 소시지도 상했다. 여전히 무풍지대다. 모두 쉬고 있다. 울릉도에서 기상이 나빠 4:00이 돼서야 배가 3:00에 떠났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한시간 후 쯤에는 그 여파가 뗏목으로 오겠지.
17:00 선플라워호와 비상주파수로 연결하였다. 이소희씨와 연락하여 8:00(오후) 해경과 지원하기로 했다.
22:15 지원함대가 오기로 했으나 오지 않는다.
17일 오후 3시. 폭풍주의보가 해제되면서 13일 입항 이후 운행이 중단됐던 포항행 선플라워호가 울릉도 도동항을 출발했다. 지원팀 이소희씨와 이재희씨도 탐사팀과의 조우를 포기하고 이 배를 타고 포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포항으로 가던 뱃길에서 지원팀을 찾는 선내방송이 들렸다. 뗏목이 먼저 선플라워호를 발견하고 교신을 했던 것이다. 레이더를 살펴본 결과 뗏목은 선플라워호와 12마일 떨어진 곳에서 점으로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지원팀은 ‘어떻게든 밤 8∼9시쯤 만나러 갈 것’을 탐사대와 약속했다.
포항에 도착하는 길로 지원팀은 밤 8시30분쯤 해경을 찾아갔다. 애원과 설득 끝에 밤 9시쯤 겨우 경비정 한척을 얻어 탈 수 있었다. 뗏목을 찾아 헤맸으나 허사였다. 날이 바뀌어 18일 새벽 1시15분쯤 작은 점이 하나 나타났다. 항해를 계속해 새벽 2시쯤에야 꼭대기에 경광등이 달린 뗏목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은 경북 후포 앞바다 41마일 지점이었다.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신호를 보냈지만 한동안 응답이 없었다. 호루라기를 불고 함장까지 합세해 소리치는 고함을 듣고서야 장철수 대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다음은 그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1월18일
02:30 잠결에 아련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선체의 불이 들어왔다. 해경배가 도착하였다.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우리 탐사대 옆으로 바짝 붙여 물품을 전달하였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부랴부랴 옷을 챙기고, 비옷을 챙긴다고 늦었다. 해경에서도 소리를 치며 누구라도 빨리 나오라 했지만 손을 다친 내가 나가서 무얼 할 것인가. 양쪽의 눈치보기에 바쁘고 창으로 랜턴만 비추고 있다. 15분간 급하게 물자를 이동했다. 뗏목과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 부표를 받쳐주는 해경대원들이 고마웠다. 항해 중 첫 사람들과의 직접 조우였다. 꼼꼼하게 챙긴 보급품과 편지(이소희). 고마움에 어쩔 줄 몰랐다. 떠나가는 배를 통하여 무전으로 함장님과 교신하고 고마움을 전했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07:00 탐사에 대한 나의 마음도 정리를 해야 될 시간이 된 것 같다.
9:00 뉴스, 설악산 등반의 사고소식이 들렸다. 우리도 그런 위기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의 사고 방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찔한 순간들. 뗏목의 안전도는 아직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19:00 2시간씩 야간근무. 이상하게 바람은 분명 북서남동 방향인데 G. P. S, 는 동쪽으로 치닫는다.
해경으로부터 보급품을 전달받고 부산으로 항진을 시도했던 18일 밤 8시 다시 폭풍주위보가 발효됐다가 만 하루 뒤에야 해제됐다. 그런데 밑에서 밀고 올라오는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으로 뗏목은 점점 동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15일부터 동경 130도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았던 뗏목은 19일 계속 동진해 마침내 동경 131도선을 넘게 된다. 지원팀에서는 일본 영해 침범을 우려해 동경 129도 안으로 들어올 것을 종용했다. 탐사대도 노력하겠다는 교신을 보내 왔다. 그러나 탐사대의 의지와 노력과는 달리 뗏목은 오키제도 방향으로 마냥 흘러가고 있었다.
1월19일
09:30 폭풍우가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다. 계속 동쪽으로 밀린다. 이 방향이면 오키섬으로 가지 않겠나 싶다. 일본으로 간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1. 우리 어선을 나포하지 말라. 2. 바다는 넓다. 바다를 통하여 더불어 사는 민족이 되길 바란다. 영원한 제국이란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15:25 라디오에서 덕영 고향을 묻는 퀴즈가 나왔다. 다소 위안이 된다. 조금 전 이심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18:00 바다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우리의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바람은 세차게 불어오고 있다. 라디오 방송도 점점 멀어지고 일본어 방송만 들려올 뿐이다. 지치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강한 자신감 하나로 버텨왔는데 이제 또다시 용기를 내자. 할 수 있다. 하늘은 우리 편이다. 나는 기필코 해낼 것이다.
뗏목은 계속 동쪽으로 밀려 독도 주변을 지나게 된다. 탐사대는 1월20일부터 부산 입항을 포기하고 독도 접안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21일 아침 울릉도 ·독도 해상에 다시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이마저 무산됐다.
1월20일
09:00 바다가 다시 거칠어지고 있다. 대원들이 약간 피로해 보인다. 지원팀의 어려움에 아무런 이야기도 못함이 안타깝다.
12:00 날씨는 여전히 북서풍으로 괴롭히고 있다. 용호와 오키섬으로 가는 의논이 있었다. 이 상태에서 어디로 가든 자존심과 자신감이다. 1차 항해의 종료를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한국으로 들어가는 시기도 지금은 좋지 않다.
18:40 바다는 참 마음대로 안된다. 오키쪽으로 가니 위도는 그대로인데 동쪽으로 간다. 일본으로 가는 마음은 썩 좋지는 않다.
20:25 사건이 발생. 발전기에 물이 들어가 타는 냄새. 버너로 말려서 원인 제거. 베니어판으로 물막이를 하다.
21:30 일단 돛을 내리고 표류를 하기로 했다. 이 상태에서 오키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제일 가까운 독도를 생각했다.
‘파도와 바람이 치고있다. 독도로 향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오키섬 깊숙이 들어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지만 바람도, 해류도 따라주지 않는다. 무엇으로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까. 아픈 왼손으로 악다구니를 쓰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 바다는 참 마음대로 안된다.’
1월21일
08:45 독도로 갈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하다. 나의 판단과 결정은 왜 이리 힘들까.
09:25 나라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일본이란 나라? 이 동해 한가운데서 생각한다. 독도가 옆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일본이 우리를 체크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저들은 우리를 무엇으로 여기고 있을까.
09:45 좌표는 점점 밑으로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불리한 상황이다. 어쩌면 예견된 것이겠지만 조치를 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대원들은 아무 말없다. 하늘은 맑은데 바람과 파도는 왜 이러는가? 이런 경우 부적같은 것이 없을까?
15:20 그동안 흘러온 해도를 보았다. 참으로 동해를 헤집고 다녔다. 이 광풍과 파도에 견딜 수 있다는 뗏목에 감사할 뿐이다. 독도. 저 조그만 섬이 위안을 갖게 한다. 오키로 가는 최후의 저지선. 북서풍을 차단하는 해류의 흐름이 있다.
16:10 추위로 바다의 즐거움은 덜하다. 무엇이든 처음부터 시작하자. 그래야만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다를 마음껏 안고 싶던 내게 부상은 30세의 마지막을 정리시키고 있다. 빨리 탈출하고 싶다. 갑자기 눈보라가 치고, 주위는 이내 깜깜하다. 파도가 또다시 발광을 한다. 방황했던 30대. 벌거벗고, 갖은 땟자국을 이 바다에 던지고 싶다. 사랑했던 30대. 잘 가시오.
16:22 나침판이 동북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해류 편승 조짐.
21:15 해류에 밀려 남진하는 방향이 동진하고 있다. 앞으로 야기될 많은 문제들이 불안하게 다가오고 있다. 간혹 오키섬에서 보이는 섬광이 번뜩인다.
독도접안을 시도했던 탐사대는 결국 이를 포기하고 최종 목적지를 오키섬에서 가까운 본토 ‘쓰루가’(敦賀)항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오키제도 도고섬을 1차 접안지로 정했다.
1월22일
08:00 햇빛이 너무 좋다. 육지 실루엣이 보인다. 시집간 딸이 온 기분이다.
08:50 사과에 비상식을 먹었다. 파도는 너울거리고 바람도 잔다. 또 걱정이다.
10:00 교신. 가는 방향으로 진행하라. 냉정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23일까지 휴가.
15:00 초조한 시간들.
18:00 파도와 바람이 치고 있다. 일본에 가서 수속을 하느니 독도로 항해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오키섬 깊숙이 들어왔다.
22:20 아무리 최선을 다하지만 바람도, 해류도 따라주지 않는다. 무엇으로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까. 아픈 왼손으로 악다귀를 쓰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 모든 것은 동물적 생존의식, 약자에게 가해지는 처참함이 내 앞에 놓여있다.
23:20 현재 돛을 내리고 해류를 타고 있다. 도고란 섬을 이야기하며 도고헤이이치로(근대 일본 해군의 국민적 영웅, 충무공 전법을 연구해 1905년 러일전쟁시 대마도 해전서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킴)를 이야기했다. 이순신에게 빌었다. 지금은 저들에게 갈 수 없노라고. 현재 나침판은 북서를 가리키고 있다. 이상하다.
당초 대원들은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일본측에 구조를 요청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그들은 독도는 우리 땅임을 알리기 위해 각종 역사적 사료를 내세우며 일본에 대항해 온 독도의 파수꾼 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일본 상륙을 기정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일본측의 조사에 대비한듯 항해일기에 낙서하듯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학술탐사로 밀려왔다. 한국으로 다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
그러나 탐사대는 이 말을 미처 하지도 못하고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다. 탐사대가 목숨을 바쳐 진정 바다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번 항해일기에서는 그 바람을 찾을 수 있다.
‘이 바다를 통하여 한반도가 통일의 화해를 하고, 러시아와 진정한 우정을 맺어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역사를 올바로 접속시켜 더불어 사는 가교가 되기 바란다. 일본은 참역사의 깨우침과 과거의 교류를 거울삼아, 싸움과 질시의 시대를 마감했으면 좋겠다. 이 바다 항해를 통하여 청년들에게는 개척과 탐험정신을 국민들에게는 용기와 삶의 새로운 활력을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지금을 해양의 시대라고 한다. 바다를 통한 외세의 잠식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이다. 국민들이 강인한 정신과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국난극복의 제일선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실학파가 주장했던 발해사를 복원하고 부흥운동을 속개하는 것이 시급하다.’
장철수 탐사대장이 1월12일자 항해일기에 쓴 ‘김대중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편지내용도 그들의 소박한 꿈이 드러나 있다.
‘항해 준비기간과 항해기간 3개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안타까움과 한숨이 겹치고, 이러다간 우리의 진로마저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였습니다. 다행히 새 대통령의 취임으로 국가가 새로운 분위기로 일신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항해가 대통령의 재임기를 축하하는 희망의 항해가 되길 바랍니다.
이 항해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세기를 알리는 신호와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역사적인 항해로 기록되어 한국의 새 이정표가 되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대항해에 국민들의 관심과 성원이 대통령의 새 힘으로 전해지길 바랍니다. 앞으로 펼쳐질 나라의 사정이 큰 발전 있길 바랍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재임하게 되심을 걱정하며 훌륭한 대통령으로 국민들의 가슴 속에 기억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올해는 우리의 선조 대조영(大祚榮)이 발해(渤海)의 최초 국호인 진국(振國)왕이 된지 꼭 1천3백년이 되는 해. 그러나 한반도의 3배에 달하는 발해와국의 웅혼한 기상을 되살리려 했던 발해 1300호의 꿈은 이처럼 일본 도고섬 해안 절벽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눈과 바람, 파도와 해류에 맞서 무려 스무나흘동안 벌였던 처절한 사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탐사팀이 수중에 혼을 묻은 도고섬은 공교롭게도 일본이 자신의 영토라고 생떼를 쓰는 독도의 일본측 과거행정관할지.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일본은 일방적으로 도고섬과 최단거리인 독도를 도고섬 행정구역(西鄕町 五箇村)에 편입, 다케시마(竹島)라고 불러왔다. 그래서 대원들은 스스로 독도를 사수하는 도고섬의 원혼이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죽어서도 호국룡이 되고자 동해에 뼈를 묻었던 신라의 문무대왕처럼.
울릉도에서 밀린 뗏목이 육지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1월18일 탐사팀은 후포 앞바다에서 해경경비정과 만났다. 중간 보급품을 전달받기 위해서였다. 다음은 이날 현장에서 탐사대원을 마지막으로 만난 지원팀장 이소희씨(39)의 목격담이다. SMS청소년탐사단장인 이씨는 97년 여름 이덕영 선장과 백두산 등정을 같이한 인연으로 지원팀장을 맡았다.
─ 언제 어떻게 만났나.
“1월18일 새벽 2시쯤이었다. 이날 새벽 1시15분쯤 경비정 레이더에서 뗏목으로 보이는 점을 발견하고 추적했다. 멀리서 경광등 불빛이 보였다. 뗏목이라고 확신했다. 전날 밤 9시에 포항을 출발해 5시간여 동안 일대 바다를 뒤진 셈이다. 그곳은 후포 앞바다 41마일 지점이었다. 파도를 따라 춤을 추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뗏목의 모습은 가랑잎 자체였다. 탐사대원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던 듯 서치라이트를 비춰댔지만 처음엔 아무 반응이 없었다.”
─ 그들 모습은 어땠나.
“15분여 동안 뱃고동을 울리고 합창으로 이름을 부른 뒤에야 장대장의 모습이 창문을 통해 비쳤다. 기브스를 한 팔이 하얀색 탓인지 먼저 눈에 띄었다. 이덕영 선장이 맨 먼저 밖으로 나왔다. 이용호 대원은 그 순간에도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 오른손에 면장갑을 끼고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왼손으로 셔터를 누르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다. 임현규 대원은 우리를 만난 기쁨에 조금 들뜬 표정이었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 파도가 높았다면 접근이 쉽지 않았을 텐데….
“뗏목이 경비정과 부딪치면 뒤집어지기 쉽다는 얘길 듣고 겁부터 와락 났다. 해경들이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해 연신 부표를 내리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웬만큼 거리가 좁혀졌을 때 고무보트·로프 등 물품을 던져 전달했다. 휴대용 안테나만 물 속에 빠뜨리고 준비해 간 나머지 물품은 무사히 건네줬다.”
─ 무슨 대화를 나눴나.
“경비정과 뗏목이 파도를 따라 같이 움직였기 때문에 도저히 말을 주고 받을 수 없었다. 우선 건강이 어떤지만 간단히 물었다. 이덕영 선장이 짙은 경상도 사투리로 ‘괘안심더’‘고생 많았심더’하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
하지만 역시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손을 흔들고 헤어지면서 선박용 통신장비로 몇마디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곳까지 어려움을 헤쳐온 그들에게 포기라는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임현규 대원과 육지서 만나면 맥주 한잔 같이 하기로 약속했는데 영원히 지킬 수 없게 돼버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났다 헤어진다는 임대원의 마지막 말이 지금도 귓전에 울린다.”
─ 사고현장에 가봤나.
“사고소식을 듣고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유족들은 오죽했겠는가. 유족 대표들과 함께 사고 나흘 뒤인 27일 도고섬 고카무라에 도착했다. 사고지점은 후쿠우라항에서 뱃길로 15분 거리에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는 일본측이 구조를 잘못하지 않았나 솔직히 의심을 했었다. 높은 파도 때문에 현장에 접근할 수 없어 망원경으로 살펴보았는데 ‘어쩔 수 없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지형이 험했다. 다음날 1시간 남짓 걸려 육로로 사고지점에 가봤다. 뗏목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고 옷가지 등이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간단한 젯상을 차려 고인들에게 절을 하고 술 한잔씩을 부어 주었다.”
독도에 미친 바다의 사나이들
80년대 대학가에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운동이 한창일 때 나는 바다와 민족사랑을 외쳤다. 독도와 바다는 내가 책임지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갈 것이다.”
발해 1300호 장철수 탐사대장(38)은 한마디로 ‘독도에 미친 사나이’였다.
그는 고향부터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경남 통영이다. 바다와 태생적으로 친숙했던 장씨지만 독도와 인연은 조금은 엉뚱하게 한국외대 러시아어과에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러시아어 수업 중 장씨는 동해가 일본해로, 독도가 죽도로 표기된 ‘이상한’ 서양지도를 자주 보게 된 것이다. 의문을 품고 도서관에서 고지도 10장을 뒤졌다. 이중 일본해와 죽도로 표기된 지도는 무려 8장. 이때 받은 충격으로 그는 왜곡된 역사바로잡기와 독도사랑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87년 외대 ‘독도연구회’부터 만들었다. 당시 독도문제를 연구하는 대학 동아리로서는 처음이었다. 그해 여름방학 때 첫 독도탐사를 시작해 수차례 드나들면서 독도 연구에 매달렸다. 이때 찍은 사진과 자료를 모아 전국에서 ‘사진전’‘영상제’등을 열면서 ‘독도 바로 알기’에 열성을 기울였다.
장씨는 또 88년 8월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92km 거리를 74시간 걸려 뗏목으로 탐사했다. 울릉도 주민들이 뗏목을 타고 독도로 자주 건너갔다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재연함으로써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다시 알리기 위한 모험이었다.
이 탐사여정은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89년 1월1일 방송, 국내외에 파문을 던지기도 했다.
섬백리향 비누 만들어 보급하기도
대학등록금을 독도탐사대 경비로 써버려 4학년 1학기 때는 미등록제적 처분을 받기도 했던 그는 울릉도 주민 참여 하에 ‘푸른 독도모임’을 구성, 해마다 4월5일 식목일이면 독도에서 나무심기운동을 펼쳤다. 또 민간단체인 ‘독도수비대’ ‘독도사랑운동모임’결성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의 이번 발해 뱃길탐사 구상도 독도사랑에서 비롯됐다. 일본이 17세기에 독도를 발견했다는 주장에 대해 우리 선조들은 고대에 발견해 바다 교역로의 중간 기착지로 활용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독도에서 시작된 그의 ‘바다 사랑’은 연안에서 대양으로 시야를 넓혀 가면서 해양국가로의 발전을 호소했다. 그는 바다에 대한 이런 깊은 관심으로 결혼까지 포기하면서 한국해양대 대학원에 진학한다. 전공은 해사법. 아울러 96년 6월께 거의 혼자 힘으로 경남 창원에 사무실을 빌려 21C바다연구소를 만들고 바다연구에 몰두했다.
탐사대 이덕영 선장(49·푸른섬 농장 대표)은 88년 울릉도∼독도 뗏목탐사 때 참여하면서 장철수 대장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는 울릉도 토박이로 어선을 비롯해 배를 숱하게 타본 경험으로 물길을 가장 잘 안다는 이유로 이번 뗏목탐사에서 선장을 맡았다. 그는 67년 대구 경북공고를 졸업한 뒤 고향 울릉도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한편 자생식물·야생화 가꾸기 운동을 펴왔다.
울릉도 자생식물인 섬백리향은 그의 노력으로 전국에 유명해졌다. 말뜻 그대로 ‘향이 백리를 간다’는 섬백리향을 원료로 향수를 만들고 비누를 만들어 일반 국민들에게 보급한 주인공도 바로 그였다. 올해부터는 스승의 날에 스승의 가슴에 서양꽃인 카네이션 대신 우리꽃 섬백리향을 달아 주는 운동을 펴기로 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시작조차 불투명해졌다. 그는 또 독도문제에 관심이 많아 88년 ‘푸른 독도 가꾸기’모임을 만들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했다. 독도 식목행사를 벌이는 것은 물론 자연보호중앙회 울릉도 지회장, 4H연맹 울릉도회장을 맡는 등 그의 일생은 온통 녹색으로 채색돼 있다.
그는 평소 과묵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주변 분위기에 별로 휩쓸리지 않고 자기 소신이 강한 편이었다. 그는 성격대로 1차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나왔을 때 부인과 주변에서 이번 뗏목탐사를 한사코 말렸으나 자신이 꼭 필요하다는 이유로 죽음의 길을 자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탐사대원 중 유일한 기혼자로 부인과 아들 병호(16·고 2), 딸 한나(7) 등 남매를 두고 있으며 장인을 모시고 살아왔다.
이번 탐사에서 촬영을 맡았던 이용호씨(우리 미술연구회·35)는 미대 출신의 그래픽아티스트. 84년 창원대 미술학과에 입학한 이후 89년 경남미술대전 공예부문 최우수 수상을 비롯해 시각·공예 부분에서 수차례 상을 받는 등 경남 미술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형 정화씨(38)는 “바다를 좋아해 바다를 카메라나 화폭에 담는 것을 즐겼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등 단독 기행한 대학생탐험가
그래서 바다 관련 행사가 열리면 빠지지 않고 ‘주최측’으로 참여하는 열성을 보였다. 제1회 바다의 날 기념으로 96년 5월31일 부산 해운대 앞바다에서 열린 국제요트대회(부산~독도~울릉도 구간) 때도 사진촬영을 맡았다. 이 행사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장철수 대장. 장대장이 책임자였던 21C바다연구소가 바로 이 행사의 주최자였던 것이다.
그는 지난해 제2회 바다의 날 기념행사로 열린 독도해상 선상세미나에 다시 장대장과 함께 참석한 것을 계기로 이번 탐사에 참여할 뜻을 굳혔다. 장대장과 함께 8개월여 동안 탐사 실무준비를 도맡아 했다. 항해 중 오른손을 다치는 부상을 입었으나 스틸 사진은 물론 비디오 촬영까지 자기 책임을 끝가지 수행하다 변을 당했다. 유족 대표로 사고현장에 갔던 이대원의 형 정화씨는 “부모·누이에 이어 동생 시신마저 내가 거두게 돼 너무 가슴이 아프다”며 통곡해 주위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통신담당 임현규씨(27)는 한국해양대 해운경영학과 4학년으로 아직 졸업하지 않은 학생이었다. 전남 구례가 고향인 그는 활달한 성격으로 자비로 아프리카·중국·일본·영국·필리핀 등을 단독 기행해 온 대학생 탐험가였다. 특히 아프리카는 두차례나 혼자서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모험심이 강했다.
그는 해양대 아마추어무선사 동아리 회원으로 이 방을 자주 드나들던 장대장과 학교 선후배로 안면을 텄다. 형 재규씨(30)에 따르면 “어딘지 목적지를 밝히지 않고 여행을 간다면서 1백만원을 달라고 해 주었다”며 “11월15일 아버지에게 마지막 안부전화를 하면서 탐사대 참여계획을 처음 털어 놓았었다”고 말했다.
통신사 2급 자격증을 갖고 있어 주변의 권유가 있었던 데다 모험심까지 겹쳐 이번 탐사에 동행했다가 운명을 같이했다.
‘발해 1300호’ 항로와 좌초 원인 북서풍과 역해류가 항로이탈 불렀다
두 개의 돛대와 키만을 장착한 뗏목으로 역사의 물길을 찾아나선 발해 탐사대. 탐사 뗏목은 왜 일본으로 흘러갔나. 악천후 때문인가, 아니면 항로의 판단 잘못 때문인가. 발해·일본 교류사와 해양학적인 분석을 통해 ‘발해 1300호’의 대양항해 과정을 추적, 항로이탈 원인을 규명했다.
바다는 참 마음대로 안된다. 위도는 그대로인데 계속 동쪽으로만 간다.’ 항해 21일째인 1월20일, 발해 탐사대를 태운 뗏목은 중간 기착지로 정한 울릉도·독도를 끼고 돌아 동남쪽으로 1백30여km나 밀려갔다. 애초 목표로 삼았던 내륙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발해 항로를 재현하고자 했던 숭고한 뜻이 물거품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징조는 출발한 지 13일만인 1월12일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항로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대원들간에 논란이 있었지만 예정대로 울릉도를 거쳐 가기로 했다.
그런데 13일 갑자기 동쪽으로 흐르는 강한 해류를 만났다. 뗏목은 이내 좌표를 ‘상실’한 채 동쪽으로 흘러갔다. 항해일기에는 ‘배는 계속 북쪽으로 밀리는 느낌’이라고 적혀 있다. 이 방향대로 흘러가면 발해호는 울릉도는 커녕 독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곧장 일본으로 빠지는 사태가 올지도 몰랐다. 대원들은 아예 나침판을 무시하고 바람방향만 파악, 무조건 서쪽으로 항해했다.
하루 뒤인 14일, 탐사대에겐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폭풍우 속에서 북동풍이 불어온 것이다. 장대장은 “(뗏목이)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육지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면서 잔뜩 기대를 품었다. 그들은 아예 울릉도에 내릴 계획을 취소하고 북동풍을 이용해 육지쪽으로 향했다.
무풍지대서 뜻밖의 역해류 만나
뗏목은 한동안 순항했다. 대원들도 모르는 사이에 울릉도를 지난 것은 15일 정오쯤. 뗏목은 서남쪽으로 항진을 계속해 경북 후포 앞바다 40마일(약 60km) 근처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바람이 잦아들면서 영문도 모르게 뗏목이 헛돌기 시작했다. 흡사 ‘블랙홀’에 휘말리기라도 한듯 뗏목은 남북을 오르내리며 8자를 그렸다. 항해일기에는 ‘무풍지대에 놓여 있었다’고 씌어 있다.
17일에는 뗏목이 아예 거꾸로 올라갔다. 바람은 없었지만 해류의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북쪽으로 흘러갔다.
발해호는 이곳에서 왜 수십시간을 머물러야 했을까. 물론 잠잠해진 바람 탓이 컸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대한해협을 빠져나온 ‘동한(東韓)난류’에 휘말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동지나해를 출발한 쿠로시오 난류의 ‘지류’에 해당하는 동한난류와 대마난류는 이때부터 뗏목의 남서행을 계속 저지했다.
전문가들의 설명을 빌리면, 울릉도 연안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북한한류와 동한난류가 충돌해 ‘전선(戰線)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이다. ‘전선지대’에서 해류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물길을 동쪽으로 진행시킨다. 간헐적으로 불어온 당시 북동풍은 이런 해류의 영향을 저지하기엔 힘이 턱없이 모자랐다.
18일부터는 해류가 ‘발해호’를 오키섬(隱岐島) 쪽으로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항해일기에는 이 상황을 ‘이상하게 바람방향은 분명 북서풍, 동남향인데 GPS(위성항법장치)는 동쪽으로 치닫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서·북동풍이 번갈아 불었지만 뗏목머리는 요지부동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뗏목의 동진을 막기 위한 ‘응급처방’으로 닻과 돛을 내렸지만 뗏목은 선수를 바꾸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해경 경비정을 만났다. 새벽 2시쯤이었다. 경비정의 승무원들은 항해 포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탐사대의 ‘불포기 선언’에 그냥 돌아가 버렸다. 19일엔 폭풍우마저 몰려왔다. 이번엔 강한 북서풍이었다. 뗏목은 속수무책 동쪽으로 흘러갔다. ‘북동풍아 불어라’는 바람은 성난 파도에 묻혀 버렸다. 닻도 돛도 모두 내렸다. 이렇게 되면 오키섬으로 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은 필연인가우연인가. 이 에 대한 답은 바로 탐사대가 복원하고자 했던 발해사가 보여주고 있다. 2백여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발해와 일본간의 항해에는 대부분 계절풍이 이용됐다.
발해사절들은 819년 1차 방문 때를 제외하면 일본행에 대부분 북서풍을 활용했다. 출발시기는 양력 12월과 이듬해 1월께. 계절로는 한겨울이다. 연해주 지방을 출발한 배가 일본에 도착한 것은 1∼2월께였다.
“속일본기”에는 당시 발해사절들은 모두 34차례 일본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뱃길은 “신당서”에 기록돼 있는 발해의 ‘일본도’(日本道)였다. 출발지는 통상 블라디보스토크를 끼고 있는 현 포시에트만에 해당된다.
그러나 9회째 출발한 발해사신들은 출발지를 약간 수정했다. 그들은 부동항을 찾아 남하해 당시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아래 ‘토호포’(吐虎浦)를 출항지로 삼았다. 북한 학자들은 토호포가 오늘날의 함경도 청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발해의 ‘견일본사’(遣日本使)가 일본에 도착한 지점을 보면 탐사대가 오키섬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74쪽 지도 참조). 발해 사절의 일본 도착지는 열도 혼슈 최북단으로부터 쓰시마까지 부챗살처럼 넓게 퍼져 있다. 위치를 꼼꼼히 따져보면 3분의 2 가량은 사실 목적지에서 벗어나 있다. 일본은 발해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오키섬 후쿠우라(福浦)에 객관을 설치했던 것도 주목되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후쿠우라가 발해 사절이 일본에 올 때면 자연스럽게 배가 거쳐가던 길목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해양연구소 이흥재(李興宰) 박사는 탐사대를 동쪽으로 몰고간 북서풍과 해류 흐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겨울철 동해 북부에는 강한 시베리아 북풍이 주기적으로 불지만 위도상 36∼38도 아래로 내려오면 바람이 북서풍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뗏목은 이 북서풍의 영향을 받고 일본쪽으로 밀렸을 것이다. 겨울철 항해에 바람이 배의 항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고려할 때 돛대와 키만으로 뗏목의 흐름을 ‘역전’시키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십중팔구 일본쪽으로 가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탐사대는 목적지를 일본 서안쪽으로 잡았어야 옳았다. 탐사대도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당초 탐사대는 일본 서안쪽의 니가타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입국을 위한 비자받기가 까다로운 데다 일정상 시간도 부족해 이를 포기했었다. 대신 탐사대는 대양항해를 통해 제주도 성산포까지 가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뗏목이 일본쪽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데도 왜 대양으로 나간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큰 바다가 아닌 연안 항로를 이용할 경우 북한 영해를 침범하게 된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때문에 북한 영해 12해리 바깥인 공해상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탐험정신에 길들여진 그들의 취향에도 맞았다.
뗏목은 마지막 순간 후쿠우라항을 남쪽으로 빗겨가 암초 투성이인 해안절벽에 부딪치면서 뒤집혔다.
헝클어진 ‘新羅道’ 찾기와 ‘독도사랑’
또다른 이유는 이번 탐사를 통해 발해∼신라간의 교통로를 나타내는 사료상의 ‘신라도’(新羅道)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사기” 등은 이런 ‘신라도’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경성대 한규철 교수(한국사·48)의 설명. “당시 신라·발해는 각각 두차례씩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신라~발해를 오간 사신들은 39개의 역(驛)을 거치는 육로도 이용했지만 연안 해로도 용이했을 겁니다. 만일 발해사신이 바닷길로 왔다면 이 신라도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북한한류’(北韓寒流)를 타고 청진에서 경주까지 내려오는 연안 해로다.
탐사대는 이 항로를 찾기로 했다. 북한해역을 피한 탐사대는 공해상의 대양항해를 통해 울릉도·독도를 거친 뒤 제주도 성산포까지 항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대원 개개인의 뇌리속에 박혀 있는 독도를 둘러싼 일본의 터무니없는 영토발언도 이 항로를 선택하는데 일조했다. 이번 뗏목탐사로 발해∼신라, 발해∼일본간 ‘교통로’의 중간에 위치한 울릉도·독도가 우리 땅임을 뱃길을 따라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발해항로의 복원’ ‘독도 사랑’ ‘탐험정신’은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장철수 대장의 항해일기는 탐사대가 항해 도중 얼마나 이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울릉도 북쪽에서 뗏목이 처음으로 북서풍과 해류를 만나 동쪽으로 흘러가던 13일,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북서풍 때문에 이번 항해(목표)는 70%가 일본쪽이었으나 얼마든지 항해를 통해 신라와 발해가 빈번하게 교류할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기존의 일본도라는 것도 다각도로 생각해 볼 기회다.’ 이어 그는 스스로 다짐이라도 하듯 이렇게 썼다. ‘기존 신라도는 연안항로로 올 수 있는 것처럼 기록됐으나 북서풍이 불어도 항해술만 뒷받침 된다면 대양항해로도 가능했다.’
그것은 탐험가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思考)의 또다른 ‘블랙홀’인가. 발해~신라간 통상이 아무리 빈번했고, 항해술과 조선술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당시의 발해인들은 십중팔구 항해가 손쉬운 연안항로를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탐사대는 폭풍우라는 ‘극한상황’에서도 대양항해에 도전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자연은 그들의 도전을 포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지적.
“연해주에서 북한 동안을 끼고 흐르는 리만한류→북한한류를 이용하고 적절히 북풍을 타면 탐사대가 애당초 목표로 삼았던 부산·제주도 항해도 큰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울릉도·독도를 경유한 뗏목항해는 무리가 따랐다.”
장대장의 일기 또한 이같은 지적의 타당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북서풍이면 오키로 가는데. 위도는 그대로고 동쪽으로 간다. 그런데 오키로는 갈 수 없다. 제일 가까운 독도를 생각했다.’ 뗏목은 이미 오키섬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장대장은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대원들간에 일본행과 울릉도·독도행을 두고 다시 논쟁이 벌어졌다. 이날 밤 9시쯤 뗏목은 독도와 오키섬의 중간쯤에서 계속 동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22일 밤 늦게까지도 그들은 독도를 포기할 줄 몰랐다. 독도는 탐사대를 향해 손짓했지만 이미 오키섬은 자석처럼 그들을 끌어당겼다.
23일 아침엔 오키섬의 등대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이젠 안전한 접안이나 일본 해경측의 구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SOS를 타전했다. 그러나 폭풍우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오키도 도고지역의 해변에 깔린 암초들은 뗏목의 접안에 결정적인 장애가 됐다. 더군다나 광풍과 5∼8m가 넘는 파도가 몰아쳤다.
폭풍우 또 폭풍우
이번 항해에 이용된 뗏목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그러나 탐사대의 뗏목과 발해가 이용했던 선박은 서로 다르다. 발해시대의 구조선 또한 동력을 빌리지 않고 바람과 물길을 탔던 것은 분명하다. 고대선박연구소 이원식 소장(64)은 “당시 발해 선박은 신라와 고려가 이용했던 구조선 형태의‘초기한선(韓船)’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측 기록은 당시 발해선의 규모에 대해 ‘1백5인이 배 한척을 타고 왔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다. 어림잡아 2백t 규모의 메머드급 ‘구조선’이다. 이 배들도 동해를 횡단하기란 모험 중의 모험이었다.
장대장에게 뗏목탐험을 직접 전수했던 동국대 윤명철 교수(42) 역시 이번 탐사대의 ‘최후난파’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중국 주산군도∼흑산도∼인천 등 수천km 바닷길을 뗏목으로 탐험했던 그는 이번 탐사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발해항로 탐사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자금부족으로 인한 출발 지연, 출발 전 장대장의 부상은 항해에 커다란 손실이었다. 오키섬의 높은 파도 또한 대원들로서는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장대장도 뗏목이 ‘목표(부산)항로’에서 벗어난 원인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는 항해일기에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대양항로 이동 ▷북서풍이 강한 1월 중 겨울항해 ▷대원들의 무경험 ▷항해술 부족 ▷대양항해의 경험부족 ▷두사람의 부상 ▷물자조달의 어려움 ▷기후의 악조건 등을 적고 있다.
24일간의 탐사는 장대장의 표현처럼 ‘탐험이 아니라 서바이벌 게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역류해 오는 해류와 성난 파도에 맞서 처절한 생존게임을 벌였으나 자연 앞에 패배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을 패배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역사의 어둠 속에 가려진 발해항로를 밝히는 작은 촛불이 되었기 때문이다.
발해호가 좌초한 일본 오키시마 도고(島後) 후쿠아라(福浦)항. 그곳은 조선조의 ‘독도 지킴이’ 안용복(安龍福)이 두차례나 일본의 울릉도·독도 침탈에 항의하기 위해 입항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발해의 정신과 독도의 혼을 한꺼번에 안으려던 대원들이 이 섬에서 잠들었다는 것은 기막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준비과정도 고난·갈등의 연속 집까지 팔아 뗏목 만들었다
폭풍우에 휩쓸려 조난으로 끝맺은 발해항로 탐사대의 탐사준비과정 역시 24일간 바다에서의 死鬪 못지않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자금마련이 어렵자 장철수 대장은 살던 집까지 정리했다. 뗏목용 나무 구입에서부터 러시아정부의 최종 출항허가를 얻어내기까지 두달여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고난을 투지로 승화시키는 의연한 자세를 보였다. 알려지지 않은 발해탐사대의 준비과정과 사연들, 그리고 탐사의 의의.
12월30일 오후 6시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내항으로 뗏목 한척이 예인선에 이끌려 미끄러져 들어왔다. 길이 15m, 너비 5m, 전체 넓이 20평 규모. 뗏목치고는 꽤 큰 편이었다. 이 뗏목은 겉모양부터 별난 데다 앞돛에 새겨진 도깨비를 닮은 문양까지 낯선 것이어서 유난히 러시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문양은 도깨비가 아니라 치우(蚩尤) 장군의 얼굴이었다. 치우는 발해의 와당(기와) 유물에도 등장할 정도로 발해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전설적 인물. 기자조선 전 신씨조선의 14대 왕으로 역사서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민족의 수호신으로 기록돼 있다.
뗏목 이름은 ‘발해 1300호.’ 고구려 후예 대조영이 698년 만주·연해주 땅에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를 세운지 올해로 꼭 1천3백년. 이름도 거기서 따온 것이다. 작은 배를 갖고도 동해바다를 앞마당처럼 휘젓고 다녔던 옛 선조들의 웅대한 기상을 오늘에 재현하겠다는 의지가 이 치우 문양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집 팔고 십시일반으로 자금 마련
이 뗏목은 다음 날인 97년 12월31일 오후 2시(한국 시각)에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떠났다. 영사관 직원·교민·유학생 등 동포들이 일부러 항구까지 나와 성공적인 항해를 빌어 주었다. 뗏목 위에서는 장철수(38·탐사대장)·이덕영(49·선장·항해담당)·이용호(35·촬영)·임현규(27·통신) 대원등 네사람이 역시 같은 심정으로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러나 이날 이 뗏목이 출항하기까지 숨겨진 깊은 사연을 아는 사람은 탐사대원 네사람을 빼고는 없었다. 1월23일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까지 24일 동안의 항해도 힘든 여정이었지만 준비과정 또한 못지않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독도 사랑에 10년째 미쳐 있던 장대장이 발해항로 탐사구상을 한 것은 97년 5월께. 장대장의 뜻에 공감해 이용호 대원이 맨먼저 동참했다. 이어 이덕영 선장과 임현규 대원이 합류해 8개월여 동안 대탐사를 같이 준비한 끝에 이날 결실을 본 것이다.
준비과정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는 역시 자금문제였다. 준비 초기에 산출해 본 총 예산은 4천1백50만원. 줄이고 줄여 꼭 필요한 경비만을 뽑았는 데도 이 정도였다. 자체적으로 1천만원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후원과 협찬을 통해 메우려 계획을 세웠다. 주변의 지인들이 뜻을 알고 10만~20만원씩 돈을 모아주었지만 그 정도의 협찬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나 후원기업을 찾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결국 자체적으로 돈을 마련하는 길밖에 없었다. 장대장은 지난해 8월께 두 눈을 꼭 감고 살던 집을 정리했다.‘집을 정리하고 나니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부모님 제사 지낼 공간 하나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무렵 그의 심정이 배어있는 일기의 한 대목이다. 그래도 모자라는 돈은 아쉬운대로 여기저기서 융통해 채웠다.
그 사이 장대장은 사전답사를 위해 수차례 러시아를 드나들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바닷가로 나가 몸으로 상태를 살펴봤다. 바다에 빠지면 어떨지 직접 물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바람은 북서 방향. 쌀쌀한 추위다. 방한대책이 중요하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준비를 더 미룰 수 없어 장대장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날아온 것은 지난해 10월18일. 그러나 여러 가지 도움을 기대했던 한국 상사들의 냉담한 태도는 한때 장대장을 절망에 빠지게 했다. 심지어 장대장이 일기에 ‘한국 상사에는 구걸하고 싶지 않다. 이제 돈에 대해 일체 이야기하지 않겠다’고까지 썼을 정도였다.
그는 10월24일 새벽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난다. ‘꿈에 아버지가 보였다. 형과 나, 아버지가 좋은 차를 몰고 가다 불에 뛰어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꿈에 아버지를 보니 기분이 좋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심정이 읽혀진다.
그 덕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 한국기업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큰 돈을 보태주는 데는 없었지만 뗏목 제작장비나 차량을 지원해 주고 작업을 도울 인력을 보내 주기도 했다. 한국인 현지공사 감독으로부터 스티로폴 10묶음, 농산물유통시장에서 쥬스 10박스, 플랜트업체로부터 받은 볼트와 너트, 교민들이 전해 준 모포·라면·김치 등 눈물겨운 지원내용을 그는 일기에 빼곡이 기록해 두었다.
이처럼 어려웠던 초기에 극동대학의 지원은 큰 도움이 됐다. 극동대학은 뗏목 탐사의 공동주최자이기도 했다. 그보다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우리나라 경기대의 교환학생을 비롯해 유학생이 상당수 머물고 있어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숙소부터 극동대학이 기숙사방을 내줘 해결했다. 뗏목 제작에 필요한 통나무 중 일부나마 구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극동대학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탐사대원 중 마지막으로 이용호 대원이 러시아에 입국한 것은 11월14일. 대원들이 모두 모였을 때 마침 뗏목제작용 통나무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뗏목을 만들 장소인 블라디보스토크 초스킨에 위치한 44부두 조선소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목재가 애초 주문했던 잣나무가 아닌 물푸레나무였던 것이다. 두께도 50cm가 넘어 물에 잘 뜨지조차 않았다. 그래도 방법이 없어 그 나무로 뗏목 제작에 돌입했다.
시간·추위·사기 저하로 애태워
한편 대원들은 극동대와 현지 한국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주정부와 모스크바 중앙정부의 탐사 허가와 물품세관 통과 등 행정절차를 밟아 나갔다. 가장 골치를 썩였던 뗏목항해를 연해주정부가 허락하겠다는 뜻을 최초로 비춘 것은 10월 말. 그러나 중앙정부의 최종허가가 떨어진 것은 거의 12월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무려 한달 넘게 항해허가를 놓고 애를 태웠던 것이다.
갈수록 추워지는 날씨 때문에 하루하루 지체될수록 탐사대는 걱정에 휩싸였다. 11월 중순들어 부동항이라는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가 일부 얼기 시작하면서 탐사대의 출항여부를 의심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장대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시간적으로 쫓긴다. 더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추위가 밀려오고 있다. 대원들의 사기 저하가 걱정이다. 이것은 서바이벌게임과도 같다.’
그러나 우려는 이내 굳은 다짐으로 바뀌었다. 같은 날 일기 마지막 부분에는 탐사대의 이런 다짐이 나온다.
‘나는 오히려 어려움이 많은 것에 대한 우려보다는 이러한 날씨를 선택하게 되는 최초의 사람으로서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불굴의 투지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출항예정일은 11월 말에서 뒤로 밀려 12월 중순으로 정해졌다. 출항 안내장도 만들었다. 그러나 12월17일 장대장은 뗏목제작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 뜻하지 않게 왼손 새끼손가락과 넷째 손가락 뼈마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상처가 심해 장대장은 1주일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이때문에 출항은 또다시 연기됐다.
뗏목 만들기는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12월24일 끝났다. 장대장은 또 이날 병원에서 수술 실밥을 풀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조선소 사용료를 내야만 뗏목을 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번 극동대학에 신세를 졌다. 보증을 서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월30일 드디어 조선소 크레인이 발해 1300호를 들어올려 바다에 띄웠다. 1천3백년 전 발해의 숨결이 살아있는 바다에 뗏목이 뜨자 탐사대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연해주정부의 예인선 사용허가도 떨어졌다.
러시아로 준비차 떠날 때까지만 해도 출발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2백80Km 떨어진 크라스키노항에서 할 계획이었다. 크라스키노지방은 발해의 행정구역인 동경용원부에 속했으며 당시에는 ‘염주’로 불렸다. 청나라 때 이곳을 옌추 또는 옌춘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염주’에서 연유한다. 아직도 이곳에는 발해시대 성터가 남아 있을 만큼 우리 민족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런데 크라스키노는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선인 두만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무렵 북한 경수로 공사 중단사태까지 불거져 나왔다. 남북관계의 경색은 탐사대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촉박한 일정과 예인선 사용료 부담도 문제였지만 이곳에서 출발했을 때 자칫하면 북한 영해를 침범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탐사팀은 동력이 없는 뗏목인 까닭에 추진할 때부터 이 점을 가장 경계했었다. 실제로 탐사팀이 작성한 항해도를 보면 북위 42도에 가까운 북한 영해 근처에서 한바퀴 원을 그리는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다.
발해인 한반도 남부와 일본 왕래 증명
그래서 출발지를 크라스키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바꿨다. 그 이유는 장대장이 현지에서 쓴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를 몇번 드나들면서 우리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무시와 냉대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축제를 벌인 뒤 출발함으로써 한인들에게 민족의 웅대한 혼과 자부심을 심어 주기로 했다’는 대목도 일기에 남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로 극동에서 가장 큰 도시여서 이런 면모를 보여 주기에는 크라스키노보다 훨씬 유리했다.
실로 그들이 목숨을 걸고 발해 항로 탐사에 나선 것은 천년이 넘도록 역사속에 묻혀 잊혀가는 발해사를 우리 눈앞에 살려내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평소 해양주권 확보과 해양국가로의 발전을 외쳐온 탐사대로서는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를 아우르고, 동해를 통해 일본과 교역했던 뛰어난 해양국가 발해의 역사를 되살리는 일은 무엇보다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또 성공적인 항해로 발해인들이 일본을 왕래하면서 울릉도와 독도를 중간 기착지로 삼았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독도가 고대부터 우리 땅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장대장은 현지 준비차 머물던 러시아에서 탐사를 앞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발해 대조영이 나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민족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 있는 1천3백년 전 뱃길을 뗏목 타고 내려오면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고 싶다.’ 탐사대가 항해 중간에 울릉도에 들르려다 폭풍우를 만나 실패하고 해류를 따라 동쪽으로 밀려가면서 독도를 곁에 두고도 지나치는 장면은 그래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미완의 탐사는 가치가 없는 것일까. 대답은 이번 탐사의 출발지였던 러시아에서 먼저 나왔다. 2월7일 러시아 극동대는 이렇게 발표했다.
“장철수 대장이 항해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발해인들이 연해주에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을 왕래했음을 증명해 해양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는 전체교수회의에서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해양학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인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보상은 국민들이 이들 탐사대원들이 이루고자 했던 뜻을 높이 평가하고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한 추모비 건립 등의 사업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발해건국 1300주년 학술탐사대 대장 故장철수 프로필
1960.2.9 경남 통영 생 1981.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입학 1987. 한국외국어대 독도문제연구회 발족 ------. 독도탐사대 창단 ------. 제1차 독도뗏목탐사 참가 (7월,한국탐험협회 주최) ------. 제2차 독도탐사(8월) ------. 제1회 독도종합영상제 개최(11월) 1988. 제2차 독도사진전 ( 7월, 울릉도 농협) 1995. 21세기 바다연구소 소장 1996. 한국해양대 대학원 해사법학과 석사과정 입학 ------. 경남신문 주최 독도와 거북사진전 (4월) 1997. 발해 1300호 탐험대장으로 활동(12월) 1998. 탐험도중 일본 근해에서 사망(1월) ------. 러시아 극동대학 명예 해양학 박사학위 수여(2월)
독도관련 자료 찾아다니다 발견했습니다. 역시 철지난 자료이지만 자세히 몰랐던 내용들입니다.
발해탐사대 최후의 항해일기 “SOS!! 발해 1300호”
눈보라와 함께 몰아치는 거센 바람. 해일처럼 치솟는 성난 파도. 역류하며 소용돌이치는 강한 해류. 칠흑같은 어둠과 추위. 최악의 기상조건 속에서 24일간 목숨을 건 뗏목항해를 감행하다 비장한 최후를 마친 발해탐사대 ─. 그들은 허기와 탈진 상태에서 12시간 동안 사나운 풍랑과 최후의 사투를 벌이다 일본 도고섬 해역에서 수중고혼이 됐다. 그러나 그들은 항해기간 중의 환희와 고통,갈등과 위기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항해일기를 남겼다. 발해항로 탐사를 통해 독도는 우리 땅임을 재삼 확인하려 했던 탐사대원 4명이 요동치는 뗏목 위에서 시간대별로 써내려간 뜨거운 민족혼의 생생한 기록.
바다가 거칠어진다. 배가 섬으로 밀려가고 있다. 우선 섬으로 피신을 했으면 한다. 교신이 빨리 되길 바란다. 우리 탐험대가 맞은 가장 위험한 상황이다. 협조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도고에 들어감. 도고에 잠시 머문다. 일본영사관에 협조요청. 휘발유 급유. 8시 교신.’
발해 1300호 최후의 날인 23일 오후 4시. 장철수 탐사팀대장은 항해일기에 당시의 위기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대원들은 이때 거친 풍랑과 맞서 숨막히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날 동해에 떠 있는 일본의 외딴섬 오키(隱岐)제도 일대는 심한 눈보라와 함께 초속 16m의 강한 북서풍이 불고 있었다. 6m나 되는 파도는 오키제도 북쪽 도고(島後)섬 절벽에 부딪쳐 되돌아 나오면서 9m 정도로 높아졌다. 해일처럼 치솟은 성난 파도는 도고 섬으로 떠밀려 가는 뗏목을 덮쳤다.
16분 후 그들은 다시 한국의 지원팀에 급전을 때렸다. “도와달라. 도고섬 8km 전방이다. 이대로 가면 섬에 충돌할 것 같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항해를 성공시키겠다’는 출발할 때의 각오를 생각하면 탐사대원들의 ‘도와달라’는 호소는 최악의 위기에 처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일본 해상보안청이 한국 해경으로부터 뗏목 구조를 요청하는 팩스를 받은 것은 오후 6시30분. 해상보안청은 즉시 뗏목 위치 파악에 나서 오키섬 앞 5마일 지점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높은 파도로 사고를 염려한 해상보안청은 일본 도고섬의 ‘사이고(西鄕)’로 예인할 계획을 세웠다.
뗏목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탐사팀은 항해일기에 ‘아직 아무 소식이 없다’고 애타는 심정을 담았다. 그리고 ‘급박해지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때가 오후 7시5분이었다. 그로부터 1시간여 후인 밤 8시8분 한국의 아마추어 무선지원팀과 교신했다. ‘도고섬과의 거리가 2km 남았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정확히 17분 뒤인 밤 8시25분 항해일기엔 독백을 하듯 뜻을 알 수 없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40분에 만나자는 이야기를 했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게 하는가. MAY DAY를 외친 후….’물에 젖어 잉크자국 얼룩진 항해일기는 여기서 멈추고 있다.
그러나 대원들은 이후에도 30여분 이상 생존을 위한 싸움을 계속했다.
일본 해상청 브리핑에 의하면 밤 8시30분쯤 순시선은 통신교신이 가능할 만큼 뗏목 가까이 접근했다. 순시선의 레이더에 잡힌 뗏목은 점점 섬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순시선 사령탑은 대원들에게 “구명조끼를 입고 닻을 내려라”고 요구했다. 당시 뗏목과 섬과의 거리는 1백50여m에 불과했다.
대원들은 이 시간에 한국의 무선지원팀과도 교신했다. 밤 8시50분 ‘순시선과 연락이 닿았다.’는 내용을 지원팀에 보냈다. 이어 6분 후 “순시선이 왔다. 걱정할 필요없다”고 타전했다. 지원팀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순시선이 온 것이 사실이냐”고 확인했다. 대원들은 “예. 맞습니다. 이제 준비해야 하니 교신을 중단해야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이것이 지원팀과 아마추어 무선팀간에 오간 마지막 교신이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항~울릉도~제주 성산포를 잇는 발해항로는 총 6백72해리(1천2백38km)─. 옛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 장도에 오른 ‘발해 1300호’의 항해는 목숨을 건 고난의 여정이었음이 항해일기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장철수 대장은 발해와 신라가 교역로로 삼천리 수천리 동해 바닷길을 더듬어 내려오면서 보고 느꼈던 환희와 고통, 그리고 위기의 상황을 항해일기에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다.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난 탐사팀은 최종목적을 부산항으로 변경했다. 그러나 을릉도 근해에서 역류하는 해류 때문에 뗏목은 해류를 따라 부산이 아닌 일본으로 떠내려갔다. 항해일기에 기록된 항해의 전과정은 긴장의 연속이다. 항해 마지막 날이었던 23일 일기는 아침부터 불길한 예감을 비치고 있다.
‘08:00 도고섬과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 북서풍과 파도는 남쪽으로 치고 있어도 뗏목은 약간의 북쪽을 확보하고 있다. 해류는 북쪽으로 흐르고 있는 모양이다. 사방은 안개가 자욱하여 시계를 분간할 수 없다. 대원들은 지쳐 있는 상황이다. 바람은 여전히 우리 편이 아니다.’
이런 불안감은 오키제도 가까이 다가가면서 점점 가중된다.
‘07:00 장비 고장과 소모가 많다. 눈 앞에는 등대가 보이고 항로는 오키섬으로 들어서고 있다.
09:30 버너 고장으로 가까스로 밥을 하는데 가스가 3통밖에 없다.
10:00 뗏목이 종횡무진이다.
11:05 다시 공격할 시점을 잡고 있다. 북서풍이 미약해질 시기를 보고 있는 것이다.
12:00 아침은 비상식 귤. 어디선가 일본측 교신이 비상주파수로 나오고 있다. 일본에서 우리의 뱃길을 따라오고 있다고 함.
13:35 모든 것이 아쉬움 투성이다. 속이 타서 담배를 하나 물었다. 지금은 나의 신체와 정신이 위축되어 있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리고 오후 4시쯤 작성한 일기는 마지막 마음의 정리를 한듯 비장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나라에 짐이 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더욱이 오늘 한·일어업협정이 일방적으로 파기되었다는데 그들의 속셈이 드러났다고 보아진다. 무엇보다도 내가 의연해지고 싶다. 미래와 현재의 공존과 조화. 바다를 통한 인류의 평화 모색. 청년에게 꿈과 지혜를 주고 싶다. 탐험정신. 발해의 정신.’
장철수 대장을 비롯한 대원들은 지난 87년부터 독도지키기에 앞장서 온 독도의 파수꾼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한·일 양국이 어업협정 파기문제로 날카롭게 맞서 있는 상황에서 무단으로 일본 영해를 범한 것이 한국측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이후 그들은 시시각각 죽음의 벼랑으로 내몰리게 된다.
구조에 나선 일본순시선이 뗏목의 불빛을 처음 발견한 시각은 밤 9시쯤. 무선지원팀과 마지막 교신이 오간지 10여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순시선에서는 조명탄을 발사했으나 파도 속에 묻혀 요동치는 뗏목의 위치는 좀체 확인이 되지 않았다. 해상보안청에서는 해상 자위대에 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헬기는 24일 새벽 1시쯤에야 현장에 도착했다.
출동한 헬기는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현장을 수색했지만 강풍·눈보라가 몰아치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위치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첫번째, 두번째 헬기는 연료 부족으로 회항하고 말았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순시선 레이더에는 뗏목이 포착됐고 쌍안경으로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번째 헬기가 도착했을 때 이미 뗏목은 사라져 버렸다. 다음날 새벽부터 헬기는 다시 수색에 나섰다. 그리고 아침 6시쯤 도고섬 서북쪽 후쿠우라(福浦)항 남쪽반도 해변에 좌초해 있는 뗏목을 발견했다. 육지에서 1백m 떨어진 바다 위에는 2명의 대원이 엎드린 채 표류하고 있었다. 또 1명은 뗏목에 몸을 묶은 채 파도를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헬기에서 내려간 다이버는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던 2명 가운데 이용호 대원을 먼저 구조했지만 숨지고 말았다. 그 사이에 또 한명은 파도에 밀려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육지로부터 불과 수십m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바로 임현규 대원이었다. 뗏목에 묶여 있던 사람은 이덕영 선장. 그러나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흔들리는 뗏목에는 돛대에 묶인 그의 발목만 남아 있었다. 발해 항로 재현의 꿈은 이렇게 파도 속에 묻혔다.
탐사대 뗏목 발해 1300호가 극동의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출발한 것은 지난해 12월31일 오후 2시(한국 시간). 출발 당일은 또 이덕영 선장의 생일이었다. 탐사대는 들뜬 기분으로 닻을 올렸다. 그러나 탐사팀은 출항소식을 한국의 지원팀에 직접 전해 주지 못했다. 무전 교신이 전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駐) 블라디보스토크 최용삼 총영사의 전화를 받고서야 지원팀의 출발 사실을 알게 됐다. 이처럼 첫 출발부터 통신두절로 탐사대와 지원팀은 함께 애를 태웠다. 다음은 항해일기에 기록된 대원들의 고난의 여정.
‘동해의 너울을 고독과 적막으로 건넌다는 것.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파도가 상당히 거칠어지고 있다. 조금의 교만도 험한 상황을 부를 수 있다.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경계해야겠지만 교만은 절대 금물이다. 무엇이든지 의미있는 작업에는 아픔이 있게 마련이다.’
1월1일
13:20 교신 계속 시도하나 잘되지 않음. 예약 주파수인데 누가 방해 전파 쏘고 있음.
15:30 판자 떨어져 상판에 뒹군다.
20:00 발전기 고장. 선장님이 고치다.
20:35 야간항해. 첫날 항해에 대원들은 만족.
1월2일
04:30 갑자기 기상명령. 어제 측정 때 이상이 있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09:00 밖에는 약간의 눈. 바람과 조류가 전혀 없다. 여전히 상갑판에는 얼음이 붙어 있다.
09:20 날씨가 좋다는 것은 뗏목에 있어 아주 지루한 여행이다. 전대원이 얼음을 깨고 있다.
09:45 아픈 손에 칼을 쥐고 감자를 깎았다. 약간의 통증이 온다. (장철수 대장은 러시아에서 뗏목을 만드는 중에 오른손 새끼손가락 마디 세곳과 네째 손가락이 골절되는 등의 중상을 입었다. 그래서 항해 중 내내 왼손만을 사용했다.)
12:00 교신을 위해 발전기 가동. 교신이 되기를 기다림. (한국과 교신되는 사람에게 보드카 1병을 주기로 하는 등 탐사대원들은 교신 성공을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며 매달렸다.)
12:50 화장실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일 문제는 물을 어떻게 피하느냐다. (항해기간 내내 그들을 가장 괴롭힌 것 중의 하나가 생리 처리 문제였다. )
15:00 북한방송이 들리고 있다.
17:25 첫 교신이 되었다.
일기에는 경기도 안산의 백현호씨 등 6명의 아마추어 무선사(HAM)들과 교신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어 오후 7시25분에 시작해 창원의 송차식씨(경일고 교사), 부산의 해양대 HAM 동아리와도 교신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후 교신은 다시 끊기고 만다. 이를 근거로 일부 방송에서는 뗏목 탐사대가 실종됐다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1월3일
8:30 정말 밤에는 약간 무서웠다. 선실의 삐걱거림은 적당히 사람을 공포로 몰아 가는 듯했다.
신년 메시지 새해를 맞아 발해 1300호는 경제국난에 처한 상황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혼을 담고 위기를 극복할 정신을 가득 실어 남으로 항진하고 있습니다. 발해 1300호는 어떤 난관도 극복할 것이며 새해를 맞아 우리 모두가 새로운 출발을 약속합니다.
09:20 발해가 중요한 것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대와 중흥에 강한 행보였다는 것이다.
11:05 태양이 바다에 비춰져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야말로 황금바다이다. 이럴 때 시를 쓰자.
21:10 KBS 사회교육방송을 HAM으로 듣고 있다.
22:00 기둥을 타고 들려오는 동해의 물결소리가 정답게 들려오고 있다. 불침번을 서고 있다.
1월4일
04:10 전원이 기상을 했다. 돛줄을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충분한 수면이 어려운 것이 안타깝다. 그래도 배는 잘 가고 있다. 정말 탐험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표현이 좋을지 모르겠다.
07:00 돛을 모두 내렸다. 물에 밀려가는 속도를 측정한다. 바다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8:30 겨우 백두산 위치인 42도를 넘었다. 파도가 우리를 시험이라도 할 듯 좌우 밑으로 계속 때린다. 시베리아의 북풍은 계속 거세다. 그러나 우리는 꼭 해낼 것이다. 아버지, 이제는 아픔도 고난도 이 동해 바다에 훌훌 던지겠습니다.
16:20 파도는 우리가 수리를 해놓고 나면 그것을 실험이라도 하듯 큰 힘으로 두들겨 재낀다. 참으로 이상한 심보다.
교신이 끊긴 상태인 1월4일 12시쯤 PC통신 하이텔에는 탐사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글 한편이 올라왔다. 홍콩의 한 아마추어무선사(HA M)가 ‘HLO JQT’라는 콜사인을 갖고 있는 한국 사람이 뭔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 같다는 메시지를 들었다는 사연이었다. 그 콜 사인은 바로 탐사대 임현규 대원의 것이었다. 지원팀은 일순 긴장감에 휩싸였다. 지나던 북쪽 공해상에서 탐사대의 의지와 상관없이 북한으로 갔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탐사대나 지원팀 모두 준비 때부터 이 점을 가장 염려했었다. 나중에 교신을 통해 확인한 결과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홍콩 HAM이 상황을 잘못 전달한 것으로 드러나 지원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탐사팀이 남긴 항해도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북한 영해 12해리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치는 고비를 실제로 겪었다.
1월5일
어제의 거센 바람은 배를 거의 혼수상태로 만들었다. 이빨을 닦았다. 잇몸을 감싸고 도는 단내를 그냥 두기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15:25 밤 사이 힘들었던 항해였다. 일본쪽으로 많이 이동했다.
21:00 나의 탐험은 지금부터다. 넓은 고구려 땅을 당나라와 신라에 빼앗긴 대조영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03:00 동해의 너울을 고독과 적막으로 건넌다는 것.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그럴수록 파도는 거세진다. 바람도 더욱 거세진다.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려면 고통도 있어야 되겠지만 인내 또한 더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지 의미 있는 작업에는 아픔이 있기 마련이다. 뗏목 탐험은 우리의 동해가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12:00 오른손에 비닐을 감고 돛을 올렸다. 나는 누구보다도 이 배를 믿는다. 탐험은 역시 좋은 것이다.
14:00 파도가 상당히 거칠어지고 있다. 조금의 교만도 험한 상황에 돌입할 수 있다. 그러기에 바다에 대한 두려움도 경계해야 되겠지만 교만은 절대 금물이다. 외무부와 해경의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 또다른 만족이지만 부담으로 남는다.
교신 시작 05:00, 17:00 오전 교신 때 아시아나 항공 HAM 동아리에서 중계를 해주어 많은 분들과 교신을 할 수 있었다. 오전 5시 교신은 끊긴 지 81시간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20:00 돛을 내렸다. 엄청난 속도의 바람이 불었다. 뗏목이 바다를 날아간다는 표현이 좋으리라 싶다. 그리고 파도는 뗏목을 선실을 차고 난리 요동을 친다. 가장 어려운 항해다. 벽으로 물이 스미는 것을 보았다. 한기가 느껴져 엔진을 켰다.
1월7일
08:20 선실의 오른쪽이 내려앉았는 것 같다. 과연 뗏목에서 안정의 한계수치는 어디까지일까? 아직 갈 길이 험하다. 간밤 폭풍으로 키(방향타)가 유실되었다. 감기가 들어 콧물과 기침이 나오고 극도로 체력이 저하되었다.
12:00 용골이 튀어나와 용호 형님이 X자로 고정. 안테나 상태가 좋지 않아 다시 고치고 있음.
17:40 달걀을 바닷물로 끓이고 있다. 용호가 상당히 허기진 모양이다. 감기약을 먹었다. 기다리던 북동풍이다. 약간 미약하지만.
20:45 라디오에서 옹헤야를 하니 배가 춤을 추고 있다.
21:30 오늘은 모든 것이 순조롭다. 바람도 가끔은 해류까지 우리를 도와준다. 뗏목은 정말 훌륭한 배다. 이 기능성과 복원력만 갖출 수 있다면 바다에서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오후에는 하늘 저편에서 무지개가 빛나고 있었다.
이날 지원팀에서는 통신두절사태를 막기 위해 뗏목에 비상주파수(22.445 MHz, 콜 사인 BARHAE1300)를 부여했다.
1월8일
09:40 아침식사, 용호. 빵, 소시지, 달걀 무쳐 볶았다. 후식:사과. 오늘의 할 일 안테나 수리.
19:00 연변 방송국 뉴스가 선명하게 나오고 있다. 정말 우리나라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탐사팀은 제주 성산포로 가려던 처음 계획을 이날 부산으로 변경했다. 중간 기착지인 독도 울릉도는 예정대로 들르기로 했다.
1월9일
04:30 계속 북동풍. 그러나 배는 순항한다. 발해 1300호는 버릴 것은 동해 깊은 곳에 던지고 실을 것은 우리의 뗏목에 실어 돌아가겠습니다.
10:00 대원들은 분주히 돛을 꿰매고 주변을 손질하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어젯밤은 12시까지 노래를 하고 보드카를 마시며 여흥을 즐겼다.
10:30 거의 바다에 떠 있다. 제문을 짓기로 했다.
무인년 양력 정월 아흐레 탐사대원 발원 신위
동해용왕·사해용왕·문무대왕·영락대왕·대조영황상·충무공이시여!
항해 10일째날 순풍에 돛을 달아 동해를 항해함은 1300년 이 땅의 역사를 용서하심을 바라며 원을 풀어 파도에 실어 보내고 희망은 담아 뗏목에 싣고자 함이오니 작은마음 흠향하시와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땅에는 한과 피가 흥건히 고여 죽어도 용서 못할 원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온 산천이 아귀의 천국이었나이다. 오늘 이 흙을 동해에 뿌리오니 흙은 물을 사함이니 영원히 극락왕생하소서. 부디부디 좋은 길에 땅의 일은 잊으시고 하늘에서 그 뜻 이루소서. 새로 태어나는 생명에게 희망과 꿈을 주시옵고 온 세상 한 민족의 착한마음 오대양, 동해에서 흘러들어 스미게 하소서. 원하기는 이 민족이 더욱 착하고 열심히 일하여 이 세상을 참일꾼으로 거듭나게 하소서. 홍익인간 광명이세 대대손손 겨레의 지혜를 밝혀 주소서. 구구한 글귀가 울음과 슬픔으로 비옵나니, 길이길이 이 민족을 용서하소서.
12:00 교신 어제 폭풍이라고 울진에서 전화. 현재 남풍.
16:30 동해에서 용왕제를 올렸다.
작은 준비. 성냥, 밧데리(축전지). 바다에서는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다.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상황이 언제 어느 순간에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1월10일
10:40 물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멀리 도망갔으나 아쉬웠다. 아침이라도 함께 먹고 싶었는데….
‘잠결에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선체에 불이 들어왔다. 해경배가 도착하였다.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우리 탐사대 옆으로 바짝 붙여 물품을 전달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항해 도중 사람들과의 첫 조우였다. 꼼꼼하게 챙긴 보급품과 편지 고마웠다.’
1월11일
02:00 북풍이 불고 파고가 높다. 탐사에는 반칙이 있어서는 안된다.
11:35 38선을 곧 넘을 것 같다. 오늘은 파도가 거칠었다. 38선. 지금쯤 우리 수역으로 들어온 것 같다. 우리 땅을 건너는 것에 마음이 설레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참 많이 울었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16:00 항상 대장은 악역이어야 하는가. 어렵게 여기까지 와서 의견이 엇갈린다. 그냥 울릉도를 경유하면 좋겠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뗏목이 울릉도 경유계획이 세워지면서 한국의 지원팀도 바빠졌다. 탐사팀과 교신을 통해 고무보트, 자동차용 밧데리, 카메라용 후레쉬, 12mm 로프 한 바퀴 등 필요한 물품 목록을 받아 울릉도에 기착했을 때 전달하기로 했다. 지원팀장 이소희씨와 해양대 HAM회장 이재희씨는 때마침 내려진 폭풍주의보로 포항에서 이틀을 지체한 뒤 13일 울릉도에 도착해 뗏목을 기다렸다.
1월12일
09:35 연구소 깃발이 물에 빠진 모양이다. 모두 기분좋게 다 달아 주고 싶다. 대장노릇 힘들다. 그러나 잘해 내었다. 성공 항해가 마무리되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17:15 밖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렀다.
21:00 이제 탐사가 중반에 들어왔다. 편법과 연출하는 행위. 진지하지 못함. 불성실. 그러한 것은 이미 인정할 수 없는 탐험이다. 울릉도에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4:30 바람은 계속 북동풍인데 동쪽으로 밀려가는 것으로 보아 이곳의 해류의 흐름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탐험에서 몇가지 색다른 것은 과학적인 장치가 제법 갖추어졌다는 것이다. HAM, G. P. S(자동위성항법장치), 컴퓨터. 어디까지 이용해야 하며 어디까지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정말 헷갈린다.
1월13일
09:00 오늘이 몇십년만에 중강진에서 영하 44도가 되었던 날이라고 라디오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비가 오고 있다. 배가 계속 북쪽으로 밀리는 느낌이다. 대원들이 지쳐 있다. 나의 지도력도 이제는 힘을 잃어 가는 것 같다.
14:40 중요한 고비가 될 것 같다. 바람은 북서풍이 조금씩 불어오고 있다. 울릉도로 갈지 변수가 예상된다.
22:00 동쪽 해류가 강하다. 어려울 때를 생각하자.
1월14일
03:45 동쪽으로 많이 흘러갔다. 초조하게 한시간씩 G. P. S.를 보고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내가 왜 탐험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심신이 피곤하다. 그러나 어제 예기치 않은 해류에 밀려 자칫, 울릉도와 독도마저 보지 못하는 그래서 곧장 일본으로 빠지는 사태가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이 더했다. 그래서, 행여 경비정에나 몰려가는 보기싫은 장면이 연출되지 않을까 하여….
08:00 나침판을 무시하고, 바람 방향만 파악하고 무조건 서쪽으로 항해를 했던 것이 좋았다. 졸리면서도 졸음항해를 방지하려 옷을 가볍게 입었더니, 추위가 몸을 감싸고 돌았다. 발해는 대양항해로 신라와의 교역이 가능했고 고대인들의 독도 발견도 충분히 가능했다.
12:00 폭풍주의보. 3∼4m. 파고가 상당하다. 우리 항해에는 더없이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육지로 붙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북동풍이다.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시속 5km. 다행히 바람이 우리가 원하는 쪽이 되어 성공항해가 기대된다.
19:15 폭풍을 뚫고 뗏목이 가고 있다. 돛을 내렸다. 울릉도 내릴 계획을 취소하고 북동풍으로 육지쪽을 향한다. 거쳐온 시간들을 조용히 생각해 보니 아련해진다.
뗏목이 울릉도 근처에서 도착한 것은 14일 오후 2시쯤. 이곳의 한 해군기지 레이더에 몇분동안 뗏목이 포착됐다. 이에 앞서 12시쯤 탐사팀은 울릉도 지원팀과 교신을 통해 저동항에 입항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교신하는 그 시간에 동해 전해상에 또다시 폭풍주의보가 내려졌다. 해경경비정도 출항을 하지 못할 만큼 기상상태가 나빴다. 뗏목도 끝내 접안에 실패했다. 지원팀은 15일 아침 8시에 교신에 성공해 뗏목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다음은 을릉도 근해의 상황을 기록한 항해일기.
1월15일
02:00 아직도 울릉도의 집 불빛과 등대가 보인다. 서서 소변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흔들린다.
07:10 나는 이번 항해를 하며 너무 많은 비나리를 하고 있다. 명예도 욕심도 다 버리자. 이 폭풍 속에 살아낼 수 있음에 감사드리자.
11:00 도대체 이 나라에는 바다에 대한 교류도 없었단 말이냐. 그리고 기껏해야 연안을 오가는 짧은 거리만 있고 모두 중국과 일본의 독무대였고 동해가 일본해, 황해가 중국해, 그리고 기껏 남쪽에 있다 하여 남해뿐인가 말이다.
19:00 돛줄을 잡으면서 옷이 흠뻑 젖어 감기가 들어 약을 먹었다. 출입국 관리를 해결해야 할 것 같다.
24:00 손등에 약간의 뼈가 올라왔다. 그리고 아프다. 진통제를 먹었다. 1시간 30분씩 교대근무를 하다.
1월16일
08:00 우리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을 제사의 형태로 바랄 수밖에 없었다.
11:40 동해 지명문제가 UN에서 본격적으로 거론될 것 같다.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지명이란 중요하다. 어려울수록 전진하는 것이 뗏목 정신.
14:00 현규가 선미에서 현대깃발을 정리하고 선장님은 선수, 용호는 돛을 잡고 있다. 방황의 30대 마지막 여행. 이제 무얼할까. 깡그리 날려 보내자.
이날 폭풍주의보와 경보가 해제됐다. 뗏목은 육지쪽으로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해군과 해경에 문의한 결과 그대로 순항하면 17∼18일께 부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란 답변을 들었다. 이에 맞춰 부산의 지원팀과 해양대에서는 인양선을 준비하는 등 대대적인 환영행사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뗏목은 무풍지대에서 맴돌았다. 18일 낮까지 거의 전진하지 못했다. 실제 항해도상에 8자처럼 그려진 항로궤적이 바로 그것이다.
1월17일
08:30 해류가 빠른 속도로 올라오고 있다. 물이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어렵게 왔는데 다른 방향으로 가고 바람도 불지 않아 안타깝다.
13:10 위대한 탐험가는 가장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다 .
16:30 빵이 상했다. 소시지도 상했다. 여전히 무풍지대다. 모두 쉬고 있다. 울릉도에서 기상이 나빠 4:00이 돼서야 배가 3:00에 떠났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한시간 후 쯤에는 그 여파가 뗏목으로 오겠지.
17:00 선플라워호와 비상주파수로 연결하였다. 이소희씨와 연락하여 8:00(오후) 해경과 지원하기로 했다.
22:15 지원함대가 오기로 했으나 오지 않는다.
17일 오후 3시. 폭풍주의보가 해제되면서 13일 입항 이후 운행이 중단됐던 포항행 선플라워호가 울릉도 도동항을 출발했다. 지원팀 이소희씨와 이재희씨도 탐사팀과의 조우를 포기하고 이 배를 타고 포항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포항으로 가던 뱃길에서 지원팀을 찾는 선내방송이 들렸다. 뗏목이 먼저 선플라워호를 발견하고 교신을 했던 것이다. 레이더를 살펴본 결과 뗏목은 선플라워호와 12마일 떨어진 곳에서 점으로 나타났다가 이내 사라졌다. 지원팀은 ‘어떻게든 밤 8∼9시쯤 만나러 갈 것’을 탐사대와 약속했다.
포항에 도착하는 길로 지원팀은 밤 8시30분쯤 해경을 찾아갔다. 애원과 설득 끝에 밤 9시쯤 겨우 경비정 한척을 얻어 탈 수 있었다. 뗏목을 찾아 헤맸으나 허사였다. 날이 바뀌어 18일 새벽 1시15분쯤 작은 점이 하나 나타났다. 항해를 계속해 새벽 2시쯤에야 꼭대기에 경광등이 달린 뗏목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은 경북 후포 앞바다 41마일 지점이었다.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신호를 보냈지만 한동안 응답이 없었다. 호루라기를 불고 함장까지 합세해 소리치는 고함을 듣고서야 장철수 대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다음은 그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1월18일
02:30 잠결에 아련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선체의 불이 들어왔다. 해경배가 도착하였다.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우리 탐사대 옆으로 바짝 붙여 물품을 전달하였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부랴부랴 옷을 챙기고, 비옷을 챙긴다고 늦었다. 해경에서도 소리를 치며 누구라도 빨리 나오라 했지만 손을 다친 내가 나가서 무얼 할 것인가. 양쪽의 눈치보기에 바쁘고 창으로 랜턴만 비추고 있다. 15분간 급하게 물자를 이동했다. 뗏목과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 부표를 받쳐주는 해경대원들이 고마웠다. 항해 중 첫 사람들과의 직접 조우였다. 꼼꼼하게 챙긴 보급품과 편지(이소희). 고마움에 어쩔 줄 몰랐다. 떠나가는 배를 통하여 무전으로 함장님과 교신하고 고마움을 전했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07:00 탐사에 대한 나의 마음도 정리를 해야 될 시간이 된 것 같다.
9:00 뉴스, 설악산 등반의 사고소식이 들렸다. 우리도 그런 위기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의 사고 방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찔한 순간들. 뗏목의 안전도는 아직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19:00 2시간씩 야간근무. 이상하게 바람은 분명 북서남동 방향인데 G. P. S, 는 동쪽으로 치닫는다.
해경으로부터 보급품을 전달받고 부산으로 항진을 시도했던 18일 밤 8시 다시 폭풍주위보가 발효됐다가 만 하루 뒤에야 해제됐다. 그런데 밑에서 밀고 올라오는 쿠로시오 난류의 영향으로 뗏목은 점점 동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15일부터 동경 130도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았던 뗏목은 19일 계속 동진해 마침내 동경 131도선을 넘게 된다. 지원팀에서는 일본 영해 침범을 우려해 동경 129도 안으로 들어올 것을 종용했다. 탐사대도 노력하겠다는 교신을 보내 왔다. 그러나 탐사대의 의지와 노력과는 달리 뗏목은 오키제도 방향으로 마냥 흘러가고 있었다.
1월19일
09:30 폭풍우가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다. 계속 동쪽으로 밀린다. 이 방향이면 오키섬으로 가지 않겠나 싶다. 일본으로 간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1. 우리 어선을 나포하지 말라. 2. 바다는 넓다. 바다를 통하여 더불어 사는 민족이 되길 바란다. 영원한 제국이란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15:25 라디오에서 덕영 고향을 묻는 퀴즈가 나왔다. 다소 위안이 된다. 조금 전 이심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18:00 바다는 점점 더 거칠어지고 우리의 바람과는 아랑곳없이 바람은 세차게 불어오고 있다. 라디오 방송도 점점 멀어지고 일본어 방송만 들려올 뿐이다. 지치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까지 강한 자신감 하나로 버텨왔는데 이제 또다시 용기를 내자. 할 수 있다. 하늘은 우리 편이다. 나는 기필코 해낼 것이다.
뗏목은 계속 동쪽으로 밀려 독도 주변을 지나게 된다. 탐사대는 1월20일부터 부산 입항을 포기하고 독도 접안을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21일 아침 울릉도 ·독도 해상에 다시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이마저 무산됐다.
1월20일
09:00 바다가 다시 거칠어지고 있다. 대원들이 약간 피로해 보인다. 지원팀의 어려움에 아무런 이야기도 못함이 안타깝다.
12:00 날씨는 여전히 북서풍으로 괴롭히고 있다. 용호와 오키섬으로 가는 의논이 있었다. 이 상태에서 어디로 가든 자존심과 자신감이다. 1차 항해의 종료를 염두에 두었으면 좋겠다. 어쨌든 한국으로 들어가는 시기도 지금은 좋지 않다.
18:40 바다는 참 마음대로 안된다. 오키쪽으로 가니 위도는 그대로인데 동쪽으로 간다. 일본으로 가는 마음은 썩 좋지는 않다.
20:25 사건이 발생. 발전기에 물이 들어가 타는 냄새. 버너로 말려서 원인 제거. 베니어판으로 물막이를 하다.
21:30 일단 돛을 내리고 표류를 하기로 했다. 이 상태에서 오키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제일 가까운 독도를 생각했다.
‘파도와 바람이 치고있다. 독도로 향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오키섬 깊숙이 들어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지만 바람도, 해류도 따라주지 않는다. 무엇으로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까. 아픈 왼손으로 악다구니를 쓰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 바다는 참 마음대로 안된다.’
1월21일
08:45 독도로 갈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하다. 나의 판단과 결정은 왜 이리 힘들까.
09:25 나라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일본이란 나라? 이 동해 한가운데서 생각한다. 독도가 옆에 있다는 것. 그리고 일본이 우리를 체크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저들은 우리를 무엇으로 여기고 있을까.
09:45 좌표는 점점 밑으로 동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불리한 상황이다. 어쩌면 예견된 것이겠지만 조치를 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대원들은 아무 말없다. 하늘은 맑은데 바람과 파도는 왜 이러는가? 이런 경우 부적같은 것이 없을까?
15:20 그동안 흘러온 해도를 보았다. 참으로 동해를 헤집고 다녔다. 이 광풍과 파도에 견딜 수 있다는 뗏목에 감사할 뿐이다. 독도. 저 조그만 섬이 위안을 갖게 한다. 오키로 가는 최후의 저지선. 북서풍을 차단하는 해류의 흐름이 있다.
16:10 추위로 바다의 즐거움은 덜하다. 무엇이든 처음부터 시작하자. 그래야만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다를 마음껏 안고 싶던 내게 부상은 30세의 마지막을 정리시키고 있다. 빨리 탈출하고 싶다. 갑자기 눈보라가 치고, 주위는 이내 깜깜하다. 파도가 또다시 발광을 한다. 방황했던 30대. 벌거벗고, 갖은 땟자국을 이 바다에 던지고 싶다. 사랑했던 30대. 잘 가시오.
16:22 나침판이 동북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해류 편승 조짐.
21:15 해류에 밀려 남진하는 방향이 동진하고 있다. 앞으로 야기될 많은 문제들이 불안하게 다가오고 있다. 간혹 오키섬에서 보이는 섬광이 번뜩인다.
독도접안을 시도했던 탐사대는 결국 이를 포기하고 최종 목적지를 오키섬에서 가까운 본토 ‘쓰루가’(敦賀)항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오키제도 도고섬을 1차 접안지로 정했다.
1월22일
08:00 햇빛이 너무 좋다. 육지 실루엣이 보인다. 시집간 딸이 온 기분이다.
08:50 사과에 비상식을 먹었다. 파도는 너울거리고 바람도 잔다. 또 걱정이다.
10:00 교신. 가는 방향으로 진행하라. 냉정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23일까지 휴가.
15:00 초조한 시간들.
18:00 파도와 바람이 치고 있다. 일본에 가서 수속을 하느니 독도로 항해하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오키섬 깊숙이 들어왔다.
22:20 아무리 최선을 다하지만 바람도, 해류도 따라주지 않는다. 무엇으로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까. 아픈 왼손으로 악다귀를 쓰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들. 모든 것은 동물적 생존의식, 약자에게 가해지는 처참함이 내 앞에 놓여있다.
23:20 현재 돛을 내리고 해류를 타고 있다. 도고란 섬을 이야기하며 도고헤이이치로(근대 일본 해군의 국민적 영웅, 충무공 전법을 연구해 1905년 러일전쟁시 대마도 해전서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킴)를 이야기했다. 이순신에게 빌었다. 지금은 저들에게 갈 수 없노라고. 현재 나침판은 북서를 가리키고 있다. 이상하다.
당초 대원들은 어떤 위기상황에서도 일본측에 구조를 요청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그들은 독도는 우리 땅임을 알리기 위해 각종 역사적 사료를 내세우며 일본에 대항해 온 독도의 파수꾼 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일본 상륙을 기정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일본측의 조사에 대비한듯 항해일기에 낙서하듯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학술탐사로 밀려왔다. 한국으로 다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
그러나 탐사대는 이 말을 미처 하지도 못하고 수중고혼이 되고 말았다. 탐사대가 목숨을 바쳐 진정 바다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번 항해일기에서는 그 바람을 찾을 수 있다.
‘이 바다를 통하여 한반도가 통일의 화해를 하고, 러시아와 진정한 우정을 맺어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역사를 올바로 접속시켜 더불어 사는 가교가 되기 바란다. 일본은 참역사의 깨우침과 과거의 교류를 거울삼아, 싸움과 질시의 시대를 마감했으면 좋겠다. 이 바다 항해를 통하여 청년들에게는 개척과 탐험정신을 국민들에게는 용기와 삶의 새로운 활력을 가졌으면 한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지금을 해양의 시대라고 한다. 바다를 통한 외세의 잠식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이다. 국민들이 강인한 정신과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국난극복의 제일선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 실학파가 주장했던 발해사를 복원하고 부흥운동을 속개하는 것이 시급하다.’
장철수 탐사대장이 1월12일자 항해일기에 쓴 ‘김대중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편지내용도 그들의 소박한 꿈이 드러나 있다.
‘항해 준비기간과 항해기간 3개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안타까움과 한숨이 겹치고, 이러다간 우리의 진로마저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였습니다. 다행히 새 대통령의 취임으로 국가가 새로운 분위기로 일신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항해가 대통령의 재임기를 축하하는 희망의 항해가 되길 바랍니다.
이 항해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세기를 알리는 신호와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역사적인 항해로 기록되어 한국의 새 이정표가 되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대항해에 국민들의 관심과 성원이 대통령의 새 힘으로 전해지길 바랍니다. 앞으로 펼쳐질 나라의 사정이 큰 발전 있길 바랍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재임하게 되심을 걱정하며 훌륭한 대통령으로 국민들의 가슴 속에 기억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올해는 우리의 선조 대조영(大祚榮)이 발해(渤海)의 최초 국호인 진국(振國)왕이 된지 꼭 1천3백년이 되는 해. 그러나 한반도의 3배에 달하는 발해와국의 웅혼한 기상을 되살리려 했던 발해 1300호의 꿈은 이처럼 일본 도고섬 해안 절벽에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눈과 바람, 파도와 해류에 맞서 무려 스무나흘동안 벌였던 처절한 사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탐사팀이 수중에 혼을 묻은 도고섬은 공교롭게도 일본이 자신의 영토라고 생떼를 쓰는 독도의 일본측 과거행정관할지.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일본은 일방적으로 도고섬과 최단거리인 독도를 도고섬 행정구역(西鄕町 五箇村)에 편입, 다케시마(竹島)라고 불러왔다. 그래서 대원들은 스스로 독도를 사수하는 도고섬의 원혼이 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죽어서도 호국룡이 되고자 동해에 뼈를 묻었던 신라의 문무대왕처럼.
울릉도에서 밀린 뗏목이 육지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1월18일 탐사팀은 후포 앞바다에서 해경경비정과 만났다. 중간 보급품을 전달받기 위해서였다. 다음은 이날 현장에서 탐사대원을 마지막으로 만난 지원팀장 이소희씨(39)의 목격담이다. SMS청소년탐사단장인 이씨는 97년 여름 이덕영 선장과 백두산 등정을 같이한 인연으로 지원팀장을 맡았다.
─ 언제 어떻게 만났나.
“1월18일 새벽 2시쯤이었다. 이날 새벽 1시15분쯤 경비정 레이더에서 뗏목으로 보이는 점을 발견하고 추적했다. 멀리서 경광등 불빛이 보였다. 뗏목이라고 확신했다. 전날 밤 9시에 포항을 출발해 5시간여 동안 일대 바다를 뒤진 셈이다. 그곳은 후포 앞바다 41마일 지점이었다. 파도를 따라 춤을 추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나는 뗏목의 모습은 가랑잎 자체였다. 탐사대원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던 듯 서치라이트를 비춰댔지만 처음엔 아무 반응이 없었다.”
─ 그들 모습은 어땠나.
“15분여 동안 뱃고동을 울리고 합창으로 이름을 부른 뒤에야 장대장의 모습이 창문을 통해 비쳤다. 기브스를 한 팔이 하얀색 탓인지 먼저 눈에 띄었다. 이덕영 선장이 맨 먼저 밖으로 나왔다. 이용호 대원은 그 순간에도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마저 오른손에 면장갑을 끼고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왼손으로 셔터를 누르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다. 임현규 대원은 우리를 만난 기쁨에 조금 들뜬 표정이었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 파도가 높았다면 접근이 쉽지 않았을 텐데….
“뗏목이 경비정과 부딪치면 뒤집어지기 쉽다는 얘길 듣고 겁부터 와락 났다. 해경들이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해 연신 부표를 내리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웬만큼 거리가 좁혀졌을 때 고무보트·로프 등 물품을 던져 전달했다. 휴대용 안테나만 물 속에 빠뜨리고 준비해 간 나머지 물품은 무사히 건네줬다.”
─ 무슨 대화를 나눴나.
“경비정과 뗏목이 파도를 따라 같이 움직였기 때문에 도저히 말을 주고 받을 수 없었다. 우선 건강이 어떤지만 간단히 물었다. 이덕영 선장이 짙은 경상도 사투리로 ‘괘안심더’‘고생 많았심더’하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
하지만 역시 마음은 놓이지 않았다. 손을 흔들고 헤어지면서 선박용 통신장비로 몇마디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곳까지 어려움을 헤쳐온 그들에게 포기라는 말을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 임현규 대원과 육지서 만나면 맥주 한잔 같이 하기로 약속했는데 영원히 지킬 수 없게 돼버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만났다 헤어진다는 임대원의 마지막 말이 지금도 귓전에 울린다.”
─ 사고현장에 가봤나.
“사고소식을 듣고 기절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유족들은 오죽했겠는가. 유족 대표들과 함께 사고 나흘 뒤인 27일 도고섬 고카무라에 도착했다. 사고지점은 후쿠우라항에서 뱃길로 15분 거리에 있었다.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는 일본측이 구조를 잘못하지 않았나 솔직히 의심을 했었다. 높은 파도 때문에 현장에 접근할 수 없어 망원경으로 살펴보았는데 ‘어쩔 수 없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지형이 험했다. 다음날 1시간 남짓 걸려 육로로 사고지점에 가봤다. 뗏목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고 옷가지 등이 여기 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간단한 젯상을 차려 고인들에게 절을 하고 술 한잔씩을 부어 주었다.”
독도에 미친 바다의 사나이들
80년대 대학가에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운동이 한창일 때 나는 바다와 민족사랑을 외쳤다. 독도와 바다는 내가 책임지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갈 것이다.”
발해 1300호 장철수 탐사대장(38)은 한마디로 ‘독도에 미친 사나이’였다.
그는 고향부터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경남 통영이다. 바다와 태생적으로 친숙했던 장씨지만 독도와 인연은 조금은 엉뚱하게 한국외대 러시아어과에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러시아어 수업 중 장씨는 동해가 일본해로, 독도가 죽도로 표기된 ‘이상한’ 서양지도를 자주 보게 된 것이다. 의문을 품고 도서관에서 고지도 10장을 뒤졌다. 이중 일본해와 죽도로 표기된 지도는 무려 8장. 이때 받은 충격으로 그는 왜곡된 역사바로잡기와 독도사랑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87년 외대 ‘독도연구회’부터 만들었다. 당시 독도문제를 연구하는 대학 동아리로서는 처음이었다. 그해 여름방학 때 첫 독도탐사를 시작해 수차례 드나들면서 독도 연구에 매달렸다. 이때 찍은 사진과 자료를 모아 전국에서 ‘사진전’‘영상제’등을 열면서 ‘독도 바로 알기’에 열성을 기울였다.
장씨는 또 88년 8월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92km 거리를 74시간 걸려 뗏목으로 탐사했다. 울릉도 주민들이 뗏목을 타고 독도로 자주 건너갔다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을 재연함으로써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다시 알리기 위한 모험이었다.
이 탐사여정은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89년 1월1일 방송, 국내외에 파문을 던지기도 했다.
섬백리향 비누 만들어 보급하기도
대학등록금을 독도탐사대 경비로 써버려 4학년 1학기 때는 미등록제적 처분을 받기도 했던 그는 울릉도 주민 참여 하에 ‘푸른 독도모임’을 구성, 해마다 4월5일 식목일이면 독도에서 나무심기운동을 펼쳤다. 또 민간단체인 ‘독도수비대’ ‘독도사랑운동모임’결성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의 이번 발해 뱃길탐사 구상도 독도사랑에서 비롯됐다. 일본이 17세기에 독도를 발견했다는 주장에 대해 우리 선조들은 고대에 발견해 바다 교역로의 중간 기착지로 활용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독도에서 시작된 그의 ‘바다 사랑’은 연안에서 대양으로 시야를 넓혀 가면서 해양국가로의 발전을 호소했다. 그는 바다에 대한 이런 깊은 관심으로 결혼까지 포기하면서 한국해양대 대학원에 진학한다. 전공은 해사법. 아울러 96년 6월께 거의 혼자 힘으로 경남 창원에 사무실을 빌려 21C바다연구소를 만들고 바다연구에 몰두했다.
탐사대 이덕영 선장(49·푸른섬 농장 대표)은 88년 울릉도∼독도 뗏목탐사 때 참여하면서 장철수 대장과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는 울릉도 토박이로 어선을 비롯해 배를 숱하게 타본 경험으로 물길을 가장 잘 안다는 이유로 이번 뗏목탐사에서 선장을 맡았다. 그는 67년 대구 경북공고를 졸업한 뒤 고향 울릉도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한편 자생식물·야생화 가꾸기 운동을 펴왔다.
울릉도 자생식물인 섬백리향은 그의 노력으로 전국에 유명해졌다. 말뜻 그대로 ‘향이 백리를 간다’는 섬백리향을 원료로 향수를 만들고 비누를 만들어 일반 국민들에게 보급한 주인공도 바로 그였다. 올해부터는 스승의 날에 스승의 가슴에 서양꽃인 카네이션 대신 우리꽃 섬백리향을 달아 주는 운동을 펴기로 했으나 그의 죽음으로 시작조차 불투명해졌다. 그는 또 독도문제에 관심이 많아 88년 ‘푸른 독도 가꾸기’모임을 만들고 초대회장으로 활동했다. 독도 식목행사를 벌이는 것은 물론 자연보호중앙회 울릉도 지회장, 4H연맹 울릉도회장을 맡는 등 그의 일생은 온통 녹색으로 채색돼 있다.
그는 평소 과묵하며 내성적인 성격으로 주변 분위기에 별로 휩쓸리지 않고 자기 소신이 강한 편이었다. 그는 성격대로 1차로 러시아를 방문했다 나왔을 때 부인과 주변에서 이번 뗏목탐사를 한사코 말렸으나 자신이 꼭 필요하다는 이유로 죽음의 길을 자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탐사대원 중 유일한 기혼자로 부인과 아들 병호(16·고 2), 딸 한나(7) 등 남매를 두고 있으며 장인을 모시고 살아왔다.
이번 탐사에서 촬영을 맡았던 이용호씨(우리 미술연구회·35)는 미대 출신의 그래픽아티스트. 84년 창원대 미술학과에 입학한 이후 89년 경남미술대전 공예부문 최우수 수상을 비롯해 시각·공예 부분에서 수차례 상을 받는 등 경남 미술계의 떠오르는 별이었다. 형 정화씨(38)는 “바다를 좋아해 바다를 카메라나 화폭에 담는 것을 즐겼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등 단독 기행한 대학생탐험가
그래서 바다 관련 행사가 열리면 빠지지 않고 ‘주최측’으로 참여하는 열성을 보였다. 제1회 바다의 날 기념으로 96년 5월31일 부산 해운대 앞바다에서 열린 국제요트대회(부산~독도~울릉도 구간) 때도 사진촬영을 맡았다. 이 행사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장철수 대장. 장대장이 책임자였던 21C바다연구소가 바로 이 행사의 주최자였던 것이다.
그는 지난해 제2회 바다의 날 기념행사로 열린 독도해상 선상세미나에 다시 장대장과 함께 참석한 것을 계기로 이번 탐사에 참여할 뜻을 굳혔다. 장대장과 함께 8개월여 동안 탐사 실무준비를 도맡아 했다. 항해 중 오른손을 다치는 부상을 입었으나 스틸 사진은 물론 비디오 촬영까지 자기 책임을 끝가지 수행하다 변을 당했다. 유족 대표로 사고현장에 갔던 이대원의 형 정화씨는 “부모·누이에 이어 동생 시신마저 내가 거두게 돼 너무 가슴이 아프다”며 통곡해 주위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통신담당 임현규씨(27)는 한국해양대 해운경영학과 4학년으로 아직 졸업하지 않은 학생이었다. 전남 구례가 고향인 그는 활달한 성격으로 자비로 아프리카·중국·일본·영국·필리핀 등을 단독 기행해 온 대학생 탐험가였다. 특히 아프리카는 두차례나 혼자서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모험심이 강했다.
그는 해양대 아마추어무선사 동아리 회원으로 이 방을 자주 드나들던 장대장과 학교 선후배로 안면을 텄다. 형 재규씨(30)에 따르면 “어딘지 목적지를 밝히지 않고 여행을 간다면서 1백만원을 달라고 해 주었다”며 “11월15일 아버지에게 마지막 안부전화를 하면서 탐사대 참여계획을 처음 털어 놓았었다”고 말했다.
통신사 2급 자격증을 갖고 있어 주변의 권유가 있었던 데다 모험심까지 겹쳐 이번 탐사에 동행했다가 운명을 같이했다.
‘발해 1300호’ 항로와 좌초 원인 북서풍과 역해류가 항로이탈 불렀다
두 개의 돛대와 키만을 장착한 뗏목으로 역사의 물길을 찾아나선 발해 탐사대. 탐사 뗏목은 왜 일본으로 흘러갔나. 악천후 때문인가, 아니면 항로의 판단 잘못 때문인가. 발해·일본 교류사와 해양학적인 분석을 통해 ‘발해 1300호’의 대양항해 과정을 추적, 항로이탈 원인을 규명했다.
바다는 참 마음대로 안된다. 위도는 그대로인데 계속 동쪽으로만 간다.’ 항해 21일째인 1월20일, 발해 탐사대를 태운 뗏목은 중간 기착지로 정한 울릉도·독도를 끼고 돌아 동남쪽으로 1백30여km나 밀려갔다. 애초 목표로 삼았던 내륙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발해 항로를 재현하고자 했던 숭고한 뜻이 물거품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징조는 출발한 지 13일만인 1월12일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항로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대원들간에 논란이 있었지만 예정대로 울릉도를 거쳐 가기로 했다.
그런데 13일 갑자기 동쪽으로 흐르는 강한 해류를 만났다. 뗏목은 이내 좌표를 ‘상실’한 채 동쪽으로 흘러갔다. 항해일기에는 ‘배는 계속 북쪽으로 밀리는 느낌’이라고 적혀 있다. 이 방향대로 흘러가면 발해호는 울릉도는 커녕 독도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곧장 일본으로 빠지는 사태가 올지도 몰랐다. 대원들은 아예 나침판을 무시하고 바람방향만 파악, 무조건 서쪽으로 항해했다.
하루 뒤인 14일, 탐사대에겐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폭풍우 속에서 북동풍이 불어온 것이다. 장대장은 “(뗏목이)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육지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면서 잔뜩 기대를 품었다. 그들은 아예 울릉도에 내릴 계획을 취소하고 북동풍을 이용해 육지쪽으로 향했다.
무풍지대서 뜻밖의 역해류 만나
뗏목은 한동안 순항했다. 대원들도 모르는 사이에 울릉도를 지난 것은 15일 정오쯤. 뗏목은 서남쪽으로 항진을 계속해 경북 후포 앞바다 40마일(약 60km) 근처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바람이 잦아들면서 영문도 모르게 뗏목이 헛돌기 시작했다. 흡사 ‘블랙홀’에 휘말리기라도 한듯 뗏목은 남북을 오르내리며 8자를 그렸다. 항해일기에는 ‘무풍지대에 놓여 있었다’고 씌어 있다.
17일에는 뗏목이 아예 거꾸로 올라갔다. 바람은 없었지만 해류의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북쪽으로 흘러갔다.
발해호는 이곳에서 왜 수십시간을 머물러야 했을까. 물론 잠잠해진 바람 탓이 컸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대한해협을 빠져나온 ‘동한(東韓)난류’에 휘말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동지나해를 출발한 쿠로시오 난류의 ‘지류’에 해당하는 동한난류와 대마난류는 이때부터 뗏목의 남서행을 계속 저지했다.
전문가들의 설명을 빌리면, 울릉도 연안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북한한류와 동한난류가 충돌해 ‘전선(戰線)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지역이다. ‘전선지대’에서 해류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물길을 동쪽으로 진행시킨다. 간헐적으로 불어온 당시 북동풍은 이런 해류의 영향을 저지하기엔 힘이 턱없이 모자랐다.
18일부터는 해류가 ‘발해호’를 오키섬(隱岐島) 쪽으로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항해일기에는 이 상황을 ‘이상하게 바람방향은 분명 북서풍, 동남향인데 GPS(위성항법장치)는 동쪽으로 치닫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서·북동풍이 번갈아 불었지만 뗏목머리는 요지부동 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뗏목의 동진을 막기 위한 ‘응급처방’으로 닻과 돛을 내렸지만 뗏목은 선수를 바꾸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해경 경비정을 만났다. 새벽 2시쯤이었다. 경비정의 승무원들은 항해 포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탐사대의 ‘불포기 선언’에 그냥 돌아가 버렸다. 19일엔 폭풍우마저 몰려왔다. 이번엔 강한 북서풍이었다. 뗏목은 속수무책 동쪽으로 흘러갔다. ‘북동풍아 불어라’는 바람은 성난 파도에 묻혀 버렸다. 닻도 돛도 모두 내렸다. 이렇게 되면 오키섬으로 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은 필연인가우연인가. 이 에 대한 답은 바로 탐사대가 복원하고자 했던 발해사가 보여주고 있다. 2백여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발해와 일본간의 항해에는 대부분 계절풍이 이용됐다.
발해사절들은 819년 1차 방문 때를 제외하면 일본행에 대부분 북서풍을 활용했다. 출발시기는 양력 12월과 이듬해 1월께. 계절로는 한겨울이다. 연해주 지방을 출발한 배가 일본에 도착한 것은 1∼2월께였다.
“속일본기”에는 당시 발해사절들은 모두 34차례 일본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뱃길은 “신당서”에 기록돼 있는 발해의 ‘일본도’(日本道)였다. 출발지는 통상 블라디보스토크를 끼고 있는 현 포시에트만에 해당된다.
그러나 9회째 출발한 발해사신들은 출발지를 약간 수정했다. 그들은 부동항을 찾아 남하해 당시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 아래 ‘토호포’(吐虎浦)를 출항지로 삼았다. 북한 학자들은 토호포가 오늘날의 함경도 청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발해의 ‘견일본사’(遣日本使)가 일본에 도착한 지점을 보면 탐사대가 오키섬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74쪽 지도 참조). 발해 사절의 일본 도착지는 열도 혼슈 최북단으로부터 쓰시마까지 부챗살처럼 넓게 퍼져 있다. 위치를 꼼꼼히 따져보면 3분의 2 가량은 사실 목적지에서 벗어나 있다. 일본은 발해사절을 접대하기 위해 오키섬 후쿠우라(福浦)에 객관을 설치했던 것도 주목되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후쿠우라가 발해 사절이 일본에 올 때면 자연스럽게 배가 거쳐가던 길목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해양연구소 이흥재(李興宰) 박사는 탐사대를 동쪽으로 몰고간 북서풍과 해류 흐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겨울철 동해 북부에는 강한 시베리아 북풍이 주기적으로 불지만 위도상 36∼38도 아래로 내려오면 바람이 북서풍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뗏목은 이 북서풍의 영향을 받고 일본쪽으로 밀렸을 것이다. 겨울철 항해에 바람이 배의 항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고려할 때 돛대와 키만으로 뗏목의 흐름을 ‘역전’시키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십중팔구 일본쪽으로 가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탐사대는 목적지를 일본 서안쪽으로 잡았어야 옳았다. 탐사대도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당초 탐사대는 일본 서안쪽의 니가타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입국을 위한 비자받기가 까다로운 데다 일정상 시간도 부족해 이를 포기했었다. 대신 탐사대는 대양항해를 통해 제주도 성산포까지 가는 방법을 택했다. 이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 뗏목이 일본쪽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데도 왜 대양으로 나간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큰 바다가 아닌 연안 항로를 이용할 경우 북한 영해를 침범하게 된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때문에 북한 영해 12해리 바깥인 공해상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탐험정신에 길들여진 그들의 취향에도 맞았다.
뗏목은 마지막 순간 후쿠우라항을 남쪽으로 빗겨가 암초 투성이인 해안절벽에 부딪치면서 뒤집혔다.
헝클어진 ‘新羅道’ 찾기와 ‘독도사랑’
또다른 이유는 이번 탐사를 통해 발해∼신라간의 교통로를 나타내는 사료상의 ‘신라도’(新羅道)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사기” 등은 이런 ‘신라도’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 경성대 한규철 교수(한국사·48)의 설명. “당시 신라·발해는 각각 두차례씩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신라~발해를 오간 사신들은 39개의 역(驛)을 거치는 육로도 이용했지만 연안 해로도 용이했을 겁니다. 만일 발해사신이 바닷길로 왔다면 이 신라도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북한한류’(北韓寒流)를 타고 청진에서 경주까지 내려오는 연안 해로다.
탐사대는 이 항로를 찾기로 했다. 북한해역을 피한 탐사대는 공해상의 대양항해를 통해 울릉도·독도를 거친 뒤 제주도 성산포까지 항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대원 개개인의 뇌리속에 박혀 있는 독도를 둘러싼 일본의 터무니없는 영토발언도 이 항로를 선택하는데 일조했다. 이번 뗏목탐사로 발해∼신라, 발해∼일본간 ‘교통로’의 중간에 위치한 울릉도·독도가 우리 땅임을 뱃길을 따라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발해항로의 복원’ ‘독도 사랑’ ‘탐험정신’은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장철수 대장의 항해일기는 탐사대가 항해 도중 얼마나 이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울릉도 북쪽에서 뗏목이 처음으로 북서풍과 해류를 만나 동쪽으로 흘러가던 13일,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북서풍 때문에 이번 항해(목표)는 70%가 일본쪽이었으나 얼마든지 항해를 통해 신라와 발해가 빈번하게 교류할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기존의 일본도라는 것도 다각도로 생각해 볼 기회다.’ 이어 그는 스스로 다짐이라도 하듯 이렇게 썼다. ‘기존 신라도는 연안항로로 올 수 있는 것처럼 기록됐으나 북서풍이 불어도 항해술만 뒷받침 된다면 대양항해로도 가능했다.’
그것은 탐험가만이 가질 수 있는 사고(思考)의 또다른 ‘블랙홀’인가. 발해~신라간 통상이 아무리 빈번했고, 항해술과 조선술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당시의 발해인들은 십중팔구 항해가 손쉬운 연안항로를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탐사대는 폭풍우라는 ‘극한상황’에서도 대양항해에 도전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자연은 그들의 도전을 포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전문가들의 지적.
“연해주에서 북한 동안을 끼고 흐르는 리만한류→북한한류를 이용하고 적절히 북풍을 타면 탐사대가 애당초 목표로 삼았던 부산·제주도 항해도 큰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당초 울릉도·독도를 경유한 뗏목항해는 무리가 따랐다.”
장대장의 일기 또한 이같은 지적의 타당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북서풍이면 오키로 가는데. 위도는 그대로고 동쪽으로 간다. 그런데 오키로는 갈 수 없다. 제일 가까운 독도를 생각했다.’ 뗏목은 이미 오키섬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장대장은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대원들간에 일본행과 울릉도·독도행을 두고 다시 논쟁이 벌어졌다. 이날 밤 9시쯤 뗏목은 독도와 오키섬의 중간쯤에서 계속 동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22일 밤 늦게까지도 그들은 독도를 포기할 줄 몰랐다. 독도는 탐사대를 향해 손짓했지만 이미 오키섬은 자석처럼 그들을 끌어당겼다.
23일 아침엔 오키섬의 등대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이젠 안전한 접안이나 일본 해경측의 구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SOS를 타전했다. 그러나 폭풍우는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오키도 도고지역의 해변에 깔린 암초들은 뗏목의 접안에 결정적인 장애가 됐다. 더군다나 광풍과 5∼8m가 넘는 파도가 몰아쳤다.
폭풍우 또 폭풍우
이번 항해에 이용된 뗏목의 안전성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그러나 탐사대의 뗏목과 발해가 이용했던 선박은 서로 다르다. 발해시대의 구조선 또한 동력을 빌리지 않고 바람과 물길을 탔던 것은 분명하다. 고대선박연구소 이원식 소장(64)은 “당시 발해 선박은 신라와 고려가 이용했던 구조선 형태의‘초기한선(韓船)’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측 기록은 당시 발해선의 규모에 대해 ‘1백5인이 배 한척을 타고 왔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다. 어림잡아 2백t 규모의 메머드급 ‘구조선’이다. 이 배들도 동해를 횡단하기란 모험 중의 모험이었다.
장대장에게 뗏목탐험을 직접 전수했던 동국대 윤명철 교수(42) 역시 이번 탐사대의 ‘최후난파’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중국 주산군도∼흑산도∼인천 등 수천km 바닷길을 뗏목으로 탐험했던 그는 이번 탐사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발해항로 탐사는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자금부족으로 인한 출발 지연, 출발 전 장대장의 부상은 항해에 커다란 손실이었다. 오키섬의 높은 파도 또한 대원들로서는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장대장도 뗏목이 ‘목표(부산)항로’에서 벗어난 원인들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는 항해일기에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대양항로 이동 ▷북서풍이 강한 1월 중 겨울항해 ▷대원들의 무경험 ▷항해술 부족 ▷대양항해의 경험부족 ▷두사람의 부상 ▷물자조달의 어려움 ▷기후의 악조건 등을 적고 있다.
24일간의 탐사는 장대장의 표현처럼 ‘탐험이 아니라 서바이벌 게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역류해 오는 해류와 성난 파도에 맞서 처절한 생존게임을 벌였으나 자연 앞에 패배했다. 그러나 그들의 희생을 패배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역사의 어둠 속에 가려진 발해항로를 밝히는 작은 촛불이 되었기 때문이다.
발해호가 좌초한 일본 오키시마 도고(島後) 후쿠아라(福浦)항. 그곳은 조선조의 ‘독도 지킴이’ 안용복(安龍福)이 두차례나 일본의 울릉도·독도 침탈에 항의하기 위해 입항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발해의 정신과 독도의 혼을 한꺼번에 안으려던 대원들이 이 섬에서 잠들었다는 것은 기막힌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준비과정도 고난·갈등의 연속 집까지 팔아 뗏목 만들었다
폭풍우에 휩쓸려 조난으로 끝맺은 발해항로 탐사대의 탐사준비과정 역시 24일간 바다에서의 死鬪 못지않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자금마련이 어렵자 장철수 대장은 살던 집까지 정리했다. 뗏목용 나무 구입에서부터 러시아정부의 최종 출항허가를 얻어내기까지 두달여동안 수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고난을 투지로 승화시키는 의연한 자세를 보였다. 알려지지 않은 발해탐사대의 준비과정과 사연들, 그리고 탐사의 의의.
12월30일 오후 6시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내항으로 뗏목 한척이 예인선에 이끌려 미끄러져 들어왔다. 길이 15m, 너비 5m, 전체 넓이 20평 규모. 뗏목치고는 꽤 큰 편이었다. 이 뗏목은 겉모양부터 별난 데다 앞돛에 새겨진 도깨비를 닮은 문양까지 낯선 것이어서 유난히 러시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문양은 도깨비가 아니라 치우(蚩尤) 장군의 얼굴이었다. 치우는 발해의 와당(기와) 유물에도 등장할 정도로 발해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전설적 인물. 기자조선 전 신씨조선의 14대 왕으로 역사서 “한단고기”(桓檀古記)에 민족의 수호신으로 기록돼 있다.
뗏목 이름은 ‘발해 1300호.’ 고구려 후예 대조영이 698년 만주·연해주 땅에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를 세운지 올해로 꼭 1천3백년. 이름도 거기서 따온 것이다. 작은 배를 갖고도 동해바다를 앞마당처럼 휘젓고 다녔던 옛 선조들의 웅대한 기상을 오늘에 재현하겠다는 의지가 이 치우 문양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집 팔고 십시일반으로 자금 마련
이 뗏목은 다음 날인 97년 12월31일 오후 2시(한국 시각)에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떠났다. 영사관 직원·교민·유학생 등 동포들이 일부러 항구까지 나와 성공적인 항해를 빌어 주었다. 뗏목 위에서는 장철수(38·탐사대장)·이덕영(49·선장·항해담당)·이용호(35·촬영)·임현규(27·통신) 대원등 네사람이 역시 같은 심정으로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러나 이날 이 뗏목이 출항하기까지 숨겨진 깊은 사연을 아는 사람은 탐사대원 네사람을 빼고는 없었다. 1월23일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까지 24일 동안의 항해도 힘든 여정이었지만 준비과정 또한 못지않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독도 사랑에 10년째 미쳐 있던 장대장이 발해항로 탐사구상을 한 것은 97년 5월께. 장대장의 뜻에 공감해 이용호 대원이 맨먼저 동참했다. 이어 이덕영 선장과 임현규 대원이 합류해 8개월여 동안 대탐사를 같이 준비한 끝에 이날 결실을 본 것이다.
준비과정에서 가장 큰 고민거리는 역시 자금문제였다. 준비 초기에 산출해 본 총 예산은 4천1백50만원. 줄이고 줄여 꼭 필요한 경비만을 뽑았는 데도 이 정도였다. 자체적으로 1천만원을 마련하고 나머지는 후원과 협찬을 통해 메우려 계획을 세웠다. 주변의 지인들이 뜻을 알고 10만~20만원씩 돈을 모아주었지만 그 정도의 협찬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나 후원기업을 찾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결국 자체적으로 돈을 마련하는 길밖에 없었다. 장대장은 지난해 8월께 두 눈을 꼭 감고 살던 집을 정리했다.‘집을 정리하고 나니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부모님 제사 지낼 공간 하나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 무렵 그의 심정이 배어있는 일기의 한 대목이다. 그래도 모자라는 돈은 아쉬운대로 여기저기서 융통해 채웠다.
그 사이 장대장은 사전답사를 위해 수차례 러시아를 드나들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 바닷가로 나가 몸으로 상태를 살펴봤다. 바다에 빠지면 어떨지 직접 물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바람은 북서 방향. 쌀쌀한 추위다. 방한대책이 중요하다고 본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준비를 더 미룰 수 없어 장대장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다시 날아온 것은 지난해 10월18일. 그러나 여러 가지 도움을 기대했던 한국 상사들의 냉담한 태도는 한때 장대장을 절망에 빠지게 했다. 심지어 장대장이 일기에 ‘한국 상사에는 구걸하고 싶지 않다. 이제 돈에 대해 일체 이야기하지 않겠다’고까지 썼을 정도였다.
그는 10월24일 새벽 꿈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만난다. ‘꿈에 아버지가 보였다. 형과 나, 아버지가 좋은 차를 몰고 가다 불에 뛰어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을 어떻게 풀이해야 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꿈에 아버지를 보니 기분이 좋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심정이 읽혀진다.
그 덕일까.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 한국기업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큰 돈을 보태주는 데는 없었지만 뗏목 제작장비나 차량을 지원해 주고 작업을 도울 인력을 보내 주기도 했다. 한국인 현지공사 감독으로부터 스티로폴 10묶음, 농산물유통시장에서 쥬스 10박스, 플랜트업체로부터 받은 볼트와 너트, 교민들이 전해 준 모포·라면·김치 등 눈물겨운 지원내용을 그는 일기에 빼곡이 기록해 두었다.
이처럼 어려웠던 초기에 극동대학의 지원은 큰 도움이 됐다. 극동대학은 뗏목 탐사의 공동주최자이기도 했다. 그보다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우리나라 경기대의 교환학생을 비롯해 유학생이 상당수 머물고 있어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숙소부터 극동대학이 기숙사방을 내줘 해결했다. 뗏목 제작에 필요한 통나무 중 일부나마 구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극동대학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탐사대원 중 마지막으로 이용호 대원이 러시아에 입국한 것은 11월14일. 대원들이 모두 모였을 때 마침 뗏목제작용 통나무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뗏목을 만들 장소인 블라디보스토크 초스킨에 위치한 44부두 조선소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목재가 애초 주문했던 잣나무가 아닌 물푸레나무였던 것이다. 두께도 50cm가 넘어 물에 잘 뜨지조차 않았다. 그래도 방법이 없어 그 나무로 뗏목 제작에 돌입했다.
시간·추위·사기 저하로 애태워
한편 대원들은 극동대와 현지 한국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주정부와 모스크바 중앙정부의 탐사 허가와 물품세관 통과 등 행정절차를 밟아 나갔다. 가장 골치를 썩였던 뗏목항해를 연해주정부가 허락하겠다는 뜻을 최초로 비춘 것은 10월 말. 그러나 중앙정부의 최종허가가 떨어진 것은 거의 12월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무려 한달 넘게 항해허가를 놓고 애를 태웠던 것이다.
갈수록 추워지는 날씨 때문에 하루하루 지체될수록 탐사대는 걱정에 휩싸였다. 11월 중순들어 부동항이라는 블라디보스토크 앞바다가 일부 얼기 시작하면서 탐사대의 출항여부를 의심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장대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시간적으로 쫓긴다. 더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추위가 밀려오고 있다. 대원들의 사기 저하가 걱정이다. 이것은 서바이벌게임과도 같다.’
그러나 우려는 이내 굳은 다짐으로 바뀌었다. 같은 날 일기 마지막 부분에는 탐사대의 이런 다짐이 나온다.
‘나는 오히려 어려움이 많은 것에 대한 우려보다는 이러한 날씨를 선택하게 되는 최초의 사람으로서 좋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나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불굴의 투지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출항예정일은 11월 말에서 뒤로 밀려 12월 중순으로 정해졌다. 출항 안내장도 만들었다. 그러나 12월17일 장대장은 뗏목제작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 뜻하지 않게 왼손 새끼손가락과 넷째 손가락 뼈마디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상처가 심해 장대장은 1주일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이때문에 출항은 또다시 연기됐다.
뗏목 만들기는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12월24일 끝났다. 장대장은 또 이날 병원에서 수술 실밥을 풀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조선소 사용료를 내야만 뗏목을 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번 극동대학에 신세를 졌다. 보증을 서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월30일 드디어 조선소 크레인이 발해 1300호를 들어올려 바다에 띄웠다. 1천3백년 전 발해의 숨결이 살아있는 바다에 뗏목이 뜨자 탐사대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연해주정부의 예인선 사용허가도 떨어졌다.
러시아로 준비차 떠날 때까지만 해도 출발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2백80Km 떨어진 크라스키노항에서 할 계획이었다. 크라스키노지방은 발해의 행정구역인 동경용원부에 속했으며 당시에는 ‘염주’로 불렸다. 청나라 때 이곳을 옌추 또는 옌춘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염주’에서 연유한다. 아직도 이곳에는 발해시대 성터가 남아 있을 만큼 우리 민족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런데 크라스키노는 북한과 러시아의 국경선인 두만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무렵 북한 경수로 공사 중단사태까지 불거져 나왔다. 남북관계의 경색은 탐사대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촉박한 일정과 예인선 사용료 부담도 문제였지만 이곳에서 출발했을 때 자칫하면 북한 영해를 침범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탐사팀은 동력이 없는 뗏목인 까닭에 추진할 때부터 이 점을 가장 경계했었다. 실제로 탐사팀이 작성한 항해도를 보면 북위 42도에 가까운 북한 영해 근처에서 한바퀴 원을 그리는 위험한 순간을 맞기도 했다.
발해인 한반도 남부와 일본 왕래 증명
그래서 출발지를 크라스키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바꿨다. 그 이유는 장대장이 현지에서 쓴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를 몇번 드나들면서 우리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무시와 냉대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축제를 벌인 뒤 출발함으로써 한인들에게 민족의 웅대한 혼과 자부심을 심어 주기로 했다’는 대목도 일기에 남아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연해주의 주도로 극동에서 가장 큰 도시여서 이런 면모를 보여 주기에는 크라스키노보다 훨씬 유리했다.
실로 그들이 목숨을 걸고 발해 항로 탐사에 나선 것은 천년이 넘도록 역사속에 묻혀 잊혀가는 발해사를 우리 눈앞에 살려내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평소 해양주권 확보과 해양국가로의 발전을 외쳐온 탐사대로서는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를 아우르고, 동해를 통해 일본과 교역했던 뛰어난 해양국가 발해의 역사를 되살리는 일은 무엇보다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또 성공적인 항해로 발해인들이 일본을 왕래하면서 울릉도와 독도를 중간 기착지로 삼았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독도가 고대부터 우리 땅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장대장은 현지 준비차 머물던 러시아에서 탐사를 앞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발해 대조영이 나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민족의 웅대한 기상이 서려 있는 1천3백년 전 뱃길을 뗏목 타고 내려오면서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고 싶다.’ 탐사대가 항해 중간에 울릉도에 들르려다 폭풍우를 만나 실패하고 해류를 따라 동쪽으로 밀려가면서 독도를 곁에 두고도 지나치는 장면은 그래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미완의 탐사는 가치가 없는 것일까. 대답은 이번 탐사의 출발지였던 러시아에서 먼저 나왔다. 2월7일 러시아 극동대는 이렇게 발표했다.
“장철수 대장이 항해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발해인들이 연해주에서 한반도 남부와 일본을 왕래했음을 증명해 해양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는 전체교수회의에서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해양학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인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보상은 국민들이 이들 탐사대원들이 이루고자 했던 뜻을 높이 평가하고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한 추모비 건립 등의 사업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발해건국 1300주년 학술탐사대 대장 故장철수 프로필
1960.2.9 경남 통영 생 1981.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 입학 1987. 한국외국어대 독도문제연구회 발족 ------. 독도탐사대 창단 ------. 제1차 독도뗏목탐사 참가 (7월,한국탐험협회 주최) ------. 제2차 독도탐사(8월) ------. 제1회 독도종합영상제 개최(11월) 1988. 제2차 독도사진전 ( 7월, 울릉도 농협) 1995. 21세기 바다연구소 소장 1996. 한국해양대 대학원 해사법학과 석사과정 입학 ------. 경남신문 주최 독도와 거북사진전 (4월) 1997. 발해 1300호 탐험대장으로 활동(12월) 1998. 탐험도중 일본 근해에서 사망(1월) ------. 러시아 극동대학 명예 해양학 박사학위 수여(2월)
첫댓글 비록 잊었지만... 이런 삶들도 있었읍니다.
잊고있었던것이 기억이 나네요 발해 뗏목탐사단..... 분명 좋은 곳에서 지금 하는걸 바라보고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