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어렸을 때 이순신 장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들은 적이 있다. 군사정권 시절 군사정권의 이미지를 좋게 하기 위해 이순신의 업적을 과도하게 포장했다는 얘기였다. 다행히 군사정권을 지나고서야 오히려 그 업적을 인정받은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이순순 자살설에 대한 이야기도 루머라고 생각했는데 당시 분위기에서는 충분히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안타깝게 다가왔다. 옛날 어휘들과 전쟁 전문어들 때문에 종종 답답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읽혔다. 투자에 대한 생각, 어른에 대한 생각, 나라에 대한 생각, 지도자에 대한 생각, 사람에 대한 생각.... 다양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사람은 고집스럽게 살 필요도 있다.
'징비록 깊이읽기'를 두어서 이해를 더욱 쉽게 했다.
5. <징비록>은 역사의 통절한 실패를 경험한 옛사람이 그 실패를 후손들이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책이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든 실패에 노출되어 있는 이 시대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며 공감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다.
24. <해동제국기>에는 당시 일본의 정치, 사회, 풍속, 지리를 비롯해 외교 관례를 정리하고, 사후에 보충해 놓아 대일 외교의 중요한 지침서로서 일본과 외교 협상에 자주 활용되었다. -해동제국이란 일본 본국, 규슈,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섬과 류큐 국(오키나와)을 총칭하는 말이다.
34. 배가 부산에 정박하자 황윤길은 반드시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내용의 일본 정황을 급하게 보고하였다. / 김성일의 대답은 달랐다.
46. '진관 제도'에 대해서/ 이 사안을 경상도에 내려보냈지만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제승방략을 시행한 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바꿀 수 없다"라고 하여 결국 논의는 중단되었다.
67. 사람들ㅇ른 왜군의 척후병인가 의심하였지만 개령 사람이 당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보고하지 못하였다.
77. 신립은 날래고 예리하기로 당대에 이름이 나 있었지만 계책과 전략에는 서툴렀다. 옛 사람이 말한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적에게 나라를 내주게 된다'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지금 후회하여도 이미 늦었지만 그래도 훗날의 경계로 삼을 만하기에 상세히 적는다.
79.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 이후 더 이상 싸울 일이 없었던 일본군은 칼을 버리고 낫과 호미를 잡아야 하는 것에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그들의 불만은 조선을 침략해 도자기 같은 전리품을 거두고 포로를 포획해 노비로 삼는 데에서 비로소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 '사람 사냥 전쟁' 등으로 부르는 것이리라.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는 수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한다. /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은 6,000여 명 정도였다.
80. 조선에게 범릉적의 체포와 처형은 선왕의 능묘를 훼손당한 일에 대한 속죄와 승전을 기념한다는 두 가지 명분을 충족시키는 일이었다.
81. 그러나 이 일을 주도한 유경영은 가짜일지라도 범릉적을 처치하면 능침 훼손의 치욕도 갚을 수 있고 승전도 기념할 수 있으니 범릉적의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그들을 처형하고자 했다.
117. 일본은 조선의 길을 빌려 중국에 조공을 하려고 하였는데 조선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133. 이때에 우리나라는 연달아 사신을 요동에 보내어 급보를 알리고 원병을 요청하였으며, 또한 명나라의 속국이 되겠다고 애걸하고 있었다.
140.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3국인 한중일만의 전투는 아니었다. 육이오 전쟁이 남한과 북한만의 전쟁이 아니었던 것처럼, 임진왜란 역시 동아시아를 둘러싼 아시아는 물론 유럽인까지 포함된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144. 이 일이 있기 전에 이순신은 거북선을 처음 만들었다. 목판으로 배위를 덮었는데 중앙이 높고 가장자리가 처져서 배의 형상이 마치 거북이 등과 같았다. 군사들과 노 젓는 사람들은 모두 그 안에 있고 좌우, 전후에는 모두 화포를 싣고 종횡무진으로 다닐 수 있어서 마치 베 짜는 북과 같았다.
147. 특히 류성룡이 이순신을 아끼는 마음은 <징비록> 곳곳에서 드러나며, 임진왜란 중 이순신의 활약은 자신의 천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뿌듯함을 감추지 않는다.
173. 임진왜란 초기 육군의 승리인 영천성 전투는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승리에 견줄 정도로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조선군은 경주성까지 탈환할 수 있었고, 이로써 경상 좌도를 간신히 수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일본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시키는 성과도 올릴 수 있었다.
201. 하루는 명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식량이 떨어졌다는 핑계를 대며 제독에게 군사를 데리고 돌아가자고 청하였다. 이에 제독이 화를 내며 나와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 좌도 관찰사 이정형을 불러서 뜰 아래 무릎을 꿇게 하고는 큰소리로 꾸짖으며 군법을 시행하려고 하였다. 나는 계속해서 사죄하다가 나랏일이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제독이 나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다시 명나라 장수들에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208. 그러나 제독 이여송은 북방의 장수로서 이번 전쟁에서 남방의 군사를 심하게 견제하였다. 제독은 그들이 공을 세우는 게 싫어 이 작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233. 일본의 강화 조건 일곱 가지는 / 대체로 명의 황녀와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삼겠다는 요구와 조선의 네 개 도를 할양해달라는 요구, 명과의 무역 재개 요구가 주를 이루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241. 이순신이 옥에서 나와 아산을 지날 때 상복을 입은 채로 곧장 권율의 휘하로 들어가 종군하니, 사람들이 이를 듣고 슬퍼하였다.
247. 배설은 12척의 배를 거느리고 달아나 살아남았는데, 이 12척의 패전선을 나중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이 인수하게 된다.
276. 고니시 유키나가는 우리 수군이 시마즈의 군대를 추격하느라 자기 진영을 앞질러 간 틈을 타서 뒤로 빠져 나갔다. 이보다 앞선 7월에 왜의 우두머리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바닷가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들이 모두 물러난 것이다. : 조정과 류성룡은 7월에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날은 8월 18일이다.
281. 이순신은 진린이 포위당한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또한 포위를 꿰뚫고 전진하여 힘을 합쳐 혈전을 했다. 그러다 총병 등자룡이 탄 배에 불이 나서 온 군사가 놀라 불을 피하느라고 시끄러운 틈을 타 왜국은 등자룡을 죽이고 그 배를 불살랐다. 이때 순신은 적선 가운데 한 척의 가장 높은 곳 붉은색 장막 아래에 금갑옷을 입은 장수 하나가 싸움을 감독하고 있는 것을 보고 군사들의 힘을 합쳐 공격해 금갑옷 입은 자를 화살로 쏘아 적중시키니 적이 진린을 버리고 와서 구원하고 진린의 배는 포위에서 풀려났는데 조금 뒤에 순신이 탄환에 맞았다.
332. 묘호에 '조祖'는 나라를 세운 공이 있거나 국난을 극복해 나라의 전통을 다시 세웠다고 평가되는 임금에게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