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諫院大司諫金公墓表
사간원 대사간 김공묘표(김홍복, 1649∼1698)
原文; 艮齋集[1](奎15757筆寫本)
解釋; 2005. 9. 20. 金順大
최규서(崔奎瑞)는 1650(효종 1)∼1735(영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문숙(文叔), 호는 간재(艮齋)·소릉(少陵)·파릉(巴陵). 광주(廣州)출신. 삼당시인으로 꼽히는 경창(慶昌)의 현손으로, 현감 석유(碩儒)의 아들이다. 저서에 간재집이 있다.
公諱洪福字子懷號東園金氏系出駕洛國王仍以金海爲籍三重大匡金寧君牧卿子侍中金寧府院君普大顯麗代簪組迄于本朝有左正言孝芬承文校理震孫繼籍文譜校理子永堅又再登科官吏曹參判公六代祖也
공의 휘는 홍복이고 자(字)는 자회이고 호는 동원이며 김씨로서 가락국왕의 후손에서 나왔으므로 김해를 본적으로 하였다. 삼중대광 금녕군 목경(牧卿)의 아들인 시중 금녕부원군 보(普)는 고려시대에 뛰어났고, 여러 세대의 벼슬아치가 이어져 조선에 들어와서 좌정언 효분(孝芬)이 있었고, 승문원 교리 진손(震孫)이 호적을 이어 받았으며, 교리의 아들인 영견이 또 과거에 합격하여 이조참판을 지냈으니 공(洪福)의 6대조이다.
高祖光壽通仕郞曾祖希禹成均進士 贈司僕正祖盡善義禁府都事 贈左承旨考德承獻納 贈禮曹參判 贈以公貴也 妣贈貞夫人坡平尹氏縣監程女銓平君珤後也
고조는 광수로서 통사랑을 지냈고, 증조는 휘우로서 성균진사를 지내고 사복시정을 증직받았으며, 조부는 진선으로 의금부도사를 지내고 좌승지를 증직받았고, 부친은 덕승으로 헌납을 지내고 예조참판을 증직받았는데, 이러한 증직은 공이 훌륭했기(貴) 때문이다. 모친은 정부인 파평윤씨로서 현감을 지낸 윤정(尹程)의 따님으로 전평군 보(珤)의 후손이다.
公以己丑正月二十八日生 登壬戌春塘臺庭試由槐院入翰苑丙寅擢重試 陞典籍歷職直講監察禮曹佐郞兵曹爲正佐郞者各二入臺再爲持平四爲正言選知製敎祿 玉堂値 己巳黨議不果拜出 定州牧使辛未拜 東萊府使陞 通政階 七入銀臺至 右承旨一貳春官三 長薇垣出爲黃海觀察使驪州牧使戊寅六月二十九日卒 葬于楊州治東栗北村負壬之原
공은 기축(1649)년 1월28일에 태어나셔서 임술(1682)년 춘당대시의 정시에 합격하여, 승문원(槐院)을 거쳐 한림원(翰苑)에 들어갔다. 병인(1686)년에 중시에 뽑혀 전적으로 승진하고, 직강을 거쳐 감찰, 예조좌랑과 병조의 각 2명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정좌랑이 되었다.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정언의 4명중에 한사람으로 되었다가 지제교에 뽑혔고, 홍문관(玉堂)에 들어갔다. 기사(1689)년 당쟁으로 인하여[1] 정주목사로 나갔다가, 신미(1691)년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통정대부로 품계가 오르고, 승정원(銀臺)에 들어가 우승지가 되었으며, 예조(春官)와 사간원(薇院)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황해도 관찰사와 여주목사를 지냈다. 무인(1698)년 6월29일 별세하시어 양주 치동 율북촌의 임좌의 언덕에 장사지내었다.
[1]기사환국; 숙종때 서인이 지지한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고, 남인이 지지한 장희빈이 중전에 책봉됨.
夫人高靈申氏僉正應澄女文忠公叔舟後也 有賢德 後公一年生先公七年卒 與公同墳而左室有 三男一女男宇集縣監宇采洗馬宇槩女適朴弼渭縣監二男長敬熙次幼一女適李海宗洗馬一女幼朴有一女適李禧齡側出三女鄭義昌尹樘李長休其婿也
부인은 고령신씨로서 첨정을 지낸 응징의 따님으로 문충공 신숙주의 후손이다. 현명하고 덕이 있었으며 공보다 1년 후에 출생하시어 공보다 7년 먼저 돌아가셨다. 공과 같은 묘소의 좌측에 장사지내었다. 3남1여를 두었는데, 남자는 현감을 지낸 우집, 세마를 지낸 우채와 우개이고, 여자는 박필위에게 시집갔다. 현감(우집)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경희이고 차남은 어리다. 한명의 딸은 이해종에게 시집갔다. 세마공(우채)의 한명의 딸은 어리다. 박필위에게는 한명의 딸이 있는데 이희령에게 시집갔다. 둘째부인에게서 난 3명의 딸들은 정의창, 윤탱, 이장휴에게 시집가서 사위로 맞았다.
公母病斫指喪三年不見齒以孝誼聞屢魁黌庠重陞桂籍以文詞鳴立朝而言議峻正有簪筆時一疏典邑而興學恤窮有定驪二邑去恩碑名行固塗於人耳目而私竊以得於平日交際者言之盖襟懷曠朗表裏若一粹然君子人也
공이 모친의 병환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렸으며>, 삼년상을 지내는 동안 이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며, 효성이 알려져 여러 번 학교(黌庠)의 높은 자리를 지냈으며, 여러 번 급제(桂籍)하여 글로서 이름을 날렸다. 조정에 들어가서는 말씀과 의론이 준엄하고 발랐다. 붓을 가지고(簪筆) 있을 때면 한번 상소를 올려 그 동네에 학문을 흥하게 하고, 어려운 백성을 도와 두 고을에서 그 은혜에 보답하는 비를 세워주어 그 이름과 행동이 길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평일에 사귄 사람들에게도 대개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襟懷) 밝게 대하여(曠朗), 표리가 하나같이 순수하여 그야말로 군자이었다.
見識 淹通才調敏達措之內外遊刃有裕而時運屢嬗間多流落用旣未究年又不永鳴呼惜哉 言行之詳有誌若碣表陰之刻不可以多略存其槩云
견문과 학식이 오래되고 재능과 통하여 조화되고, 민첩하여 모든 일에 환하게 통달(敏達)하였으며, 내직을 그만두고 외직에 있을 때에도 여유가 있었으나, 시대의 운수가 여러 번 바뀌는 사이 부침이 거듭되었으니, 나랏일을 오래 하지 못했고 또 영원하지 못했다(수명이 짧았다?). 아! 애석하구나. 말씀과 행적을 기록에 있는 바와 같이 상세하게 비음에 새기기에는 불가능하여, 많은 것을 생략하고 개략적인 것만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