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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앙코르와트
4월 19일
난생 처음의 해외 나들이를 한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창밖으로 여명이 스며들자마자 창문을 열어보았다. 이른 새벽 하늘은 잔뜩 물을 머금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태세였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간단히 요기를 한 우리 부부는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나와 아파트 정문에서 택시를 탔다. 드디어 해외여행 장도에 오른 것이다.
택시 기사가 문화예술회관 뒤쪽에 내려주겠다는 것을 내가 우겨서 앞에서 내린 시간은 정확하게 일곱 시 이십오 분이었다. 분명 유인물에는 예술회관 앞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는데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나와 내 짝(남편)은 우리가 너무 일찍 도착한 줄 알고 일행을 기다렸다. 약속 된 일곱 시 오십 분이 다 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다시 한 번 유인물을 확인해 보았다. 분명 문화예술회관 앞으로 일곱 시 오십 분까지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내 짝은 무언가 잘못 된 것이라 하면서 팔도관광으로 전화를 냈다. 전화는 관광회사 사장의 휴대폰으로 연결이 되었고 사장은 내 짝의 친구를 바꿔주었다. 모두 회관 뒤쪽에 모여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두고 가려다가 시계를 보기 위하여 가져간 휴대폰이 한 몫을 한 것이다. 우리가 합류하자 대강의 인사가 끝난 다음 우리를 태운 미니관광버스는 김해공항을 향하여 출발했다. 출발시간은 아침 8시였다.
우리의 목적은 동남아관광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사원과 베트남의 하롱베이를 관광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리의 관광 상품명은 ‘패키지관광’이며 관광을 맡은 회사이름은 ‘팔도관광’이다. 우리일행은 여덟 쌍의 부부, 16명으로 구성되었다. 굳이 16명의 인원으로 조를 이룬 것은 15명 이하는 가이드 티켙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송광목씨가 16명의 숫자를 채우기 위하여 애를 쓴 결과다. 가이드를 확보하기 위한 최소의 숫자를 채운 것이다.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김해공항까지는 한 시간정도가 걸렸다.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아홉시, 공항은 관광을 가기위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북적이는 사람들 대부분이 50대를 넘은 사람들로 보였다. 동남아나 중국을 가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여행객들의 면면을 훑어보니 하나같이 상기된 표정이다. 개중에는 정말로 여행이 좋아 나선 사람들도 있을 테고 혹은 ‘따라 장 가듯’ 남이 가니 따라 나선 사람도 있을 터였다.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할머니도 더러 보였다. 나도 머지않아 저런 할머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오싹해졌다. 아무도 늙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여행도 젊었을 때 해야지 나이 들어 허리 꼬부라져 하는 여행은 어쩌면 민폐일 것이다. 비록 본인은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과 열정을 갖고 있어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우선 시각적인 민폐를 끼치게 된다.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호젓이 하는 여행이 아닌 담에야 여럿이 그룹을 지어가는 패키지여행에서는 고려사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항에서 느낀 ‘정말로 많은 사람이 여행을 가는구나!’ 하는 놀라움은 여행지마다 계속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리도 많이 외화를 퍼내고 있어도 우리나라의 돈의 가치가 여전히 높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오전 열한 시, 우리를 태운 베트남 ‘V.N 9711’ 여객기는 출발시간을 일분도 어기지 않고 김해공항을 이륙했다. 항간에서 베트남여객기는 연착을 밥 먹듯 한다는 소문을 여보란듯이 뭉개는 순간이었다. 나도 하도 들은 소리여서 한두 시간의 연착은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의 출발은 이번 여행이 기분 좋을 것이란 예감이라도 되는 듯 상쾌했다. 비행기의 트랩에서 언뜻 본, 엔진부분에 덧댄 용접부분이 우리가 탄 비행기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잠시의 기우를 했을 뿐 상쾌한 기분은 비행기를 내리는 오후 4시까지 계속 되었다.
점심은 기내식을 먹었는데 훈제연어와 불고기와 야채샐러드가 앙증맞은 식판에 얹혀 나왔다. 흘리지 않고 먹으려니 아슬아슬했다. 이빨이 부실한 나로서는 쇠심줄처럼 질기디질긴 불고기를 먹어내기는 역부족이라 대충 먹고 허기를 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식후에 마신 레드와인 한잔이 기내식에 대한 찝찝한 기분을 다 날려주었다. 국내선여객기만 타 본 나로서는 베트남승무원을 눈여겨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한마디로 미소가 없었다.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딱히 불친절하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녀들의 움직임은 사무적이었고 타성적이었다. 우리나라 항공사들의 승무원의 상냥한 미소를 떠 올리며 왜 그런가를 생각해 보았다.
여객손님들의 80%는 한국의 여행객들이다. 큰 소리로 얘기하는 사람, 신발을 벗은 발을 높이 치켜, 앞 의자 등받이에 올리고 있는 사람, 자신의 발밑에 즐비하게 쓰레기를 늘어놓은 사람, 화장실의 사용법을 몰라 미처 버턴 눌림을 생략한 사람, 그야말로 그들의 눈에 한국인은 기내도덕은 깡그리 잊은 사람들로 비쳤을 것이다. 나는 무척 속이 상했다. 그들이 몇몇의 도덕불감증의 여행객들을 우리나라사람 전체로 판단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일었다.
대다수의 여객손님이 한국인인데도 기내방송을 베트남어와 영어로만 한다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정도는 항공사가 조금만 신경을 쓰면 배려가 가능한데도 말이다.
오후 4시에 호치민에 있는 ‘탄손누트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내리니 후끈한 공기가 우리를 에워쌌다. 그도 그럴 것이 베트남은 연중 가장 무더운 여름이었던 것이다. 후끈한 공기도 잠간, 공항의 대합실에 들어서니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어 시원했다. 대합실의 시계가 오후 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과 우리나라의 시차가 두 시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곳서 다시 캄보디아를 가기위한 여객기를 기다렸다.
대합실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베트남도 한자문화권임을 알 수 있었다. 베트남어는 알파베드였는데 많은 악센트 표시가 눈길을 끌었다. 나중에 가이드가 설명해 준 것을 인용하면 중국은 4성구조인데 베트남어는 6성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발음이 무척 어렵다고 했다. 베트남의 문자는 한자를 써 오다가 프랑스의 어느 목사가(이름을 잊었음)알파베드로 베트남에 맞는 문자를 만들어 보급한 것이 아예 국어로 정착이 되었다고 했다. 새삼 우리의 한글이 자랑스러워 목에다 힘을 빳빳이 주고 어깨를 으스대며 흐뭇해했다. 모두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일행 모두가 나와 같은 기분이었으리라!
대합실에서 어영부영 세 시간 하고도 반시간을 더 머물러야 했다. 베트남 시간으로 오후 세시 30분이 넘어 씨엠립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V.N 847’ 기는 65인승의 작은 비행기였는데 남자들은 “쌍발기네.” 했지만 무얼 쌍발기라 하는지 모르는 나로서는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다른 비행기와 확실하게 구분되는 것은 날개가 좌석보다 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작은 비행기를 타면서 나는 운 좋게 창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원래의 자리주인은 내 짝이었는데 나하고 자리를 바꾼 것이다. 정말 그 시간의 그 좌석은 행운의 자리였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내려다 본 탄손누트공항에는 격납고와 월남전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낡은 군용비행기가 늘어서 있어 이 나라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고도를 높이지 않고 날아가는 비행기의 차창 아래로는 드넓은 평원의 들판이 끝없이 나타났다. 경지정리가 잘 되어있는 넓은 들은 끝이 없을 것처럼 이어진 것을 내려다보면서 새삼 우리나라가 산악국가라는 것을 상기해야 했다.
그렇게 얼마만큼이나 달렸을까. 비행기가 고도를 높여서인지 아니면 기상 때문인지 내 눈 앞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나는 헉하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람은 너무 슬퍼도, 너무 기뻐도 눈물을 흘린다. 벅찬 감동이 느껴질 때도 눈물을 흘린다. 아름답다는 수식어조차 붙일 수없는 아름다움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물을 흘리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우윳빛 구름바다 위로 희디 흰 만년설 같은 기암기석들이 솟구쳐올라 갖가지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구름기둥들은 지는 석양을 받아 구름바다위에 엷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형형색색의 광선을 태양을 향하여 되쏘고 있었다. 신은 이리도 아름다운 그림을 어쩌자고 아무 재주도 없는 내게 펼쳐 보이는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진정으로 내가 화가이지 못함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이런 아름다움을 글로서 그려낼 재주가 없음이 서러웠다. 석양과 구름이 어울려 펼치는 흰 빛의 파노라마를 몇 번씩이나 숨을 멈추며 바라보는 동안 비행기는 씨엠릿 공항에 내려앉고 있었다.
비라도 내렸는지 넘실대는 붉은 황토의 강이 내려다 보였다. 시간이 정지한 듯 했는데 어느새 한 시간이 흘러갔나보았다.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면서 우리가 타고 온 비행기의 발통을 보고 내 짝과 한바탕 웃어야 했다. 비행기의 모양은 종이비행기 모양이고 발통이 세 개였다. 앞 발통은 티코의 바퀴보다 더 작은 것이 한 개가 달려 있고 뒤에는 앞 발통보다 조금 큰 것이 양쪽에 한 개씩 달려 있으니 3륜구동인 셈이었다. 이리도 작은 바퀴로 어떻게 비행기가 내려앉을 때의 압력을 이겨내는가 싶었다. 비행기의 날개는 위쪽에 붙어 있었다. 내 짝은 이 비행기가 인도네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씨엠릿국제공항’은 국제공항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을씨년스러웠다. 공항의 창구에 일렬로 늘어앉아 있는 근무자들은 하나같이 군복 같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웃음이 없었다. 동행한 원소장의 말을 빌리면 입국수속을 밟으려면 일인당 2불씩의 급행료를 물어야 빨리 수속을 마칠 수 있다고 했다. 공항이 비좁을 때 정당한 수속을 밟으려고 하면 하 세월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했다. 웃기는 것은 급행료를 문 입국자와 급행료를 물지 않은 입국자의 줄과 창구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근무자들이 영어표기의 이름조차 읽을 수 없는지 비자의 사진을 말없이 치켜들어 보이면 사진의 주인이 나서서 찾아가는 식이었다. 그러자니 자연 업무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비자의 주인이 딴 곳을 보고 있었다면 몇 번씩이나 사진을 쳐들어야하는 불편이 그들 또한 달갑지는 않을 것이었다. 뇌물에 길들은 그들의 눈은 유난히 곁눈질이 많았다. 손님이 없어 일인당 20불의 입국수수료만 지불하는 줄에 줄을 서서 입국수속을 밟았다. 2불이란 급행료를 물지 않아도 되었으니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입국수속을 밟고 공항대기실에 들어서니 한국인 가이드가 현지가이드를 데리고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인 가이드는 금방 만났는데도 직업 탓인지 십년지기처럼 우리를 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탁명진이라고 소개했다.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첫인상이 몹시 느물느물했지만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 특유의 영악함이 느껴졌다.
밖에 나서니 아시아에서 만든 미니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먼 나라에서 우리나라에서 만든 차를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현지인 기사의 선량한 웃음이 우리를 반겼다. 그는 우리말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우리도 “안녕하세요.”라고 답했다. 이로서 그와 우리들의 이틀간의 인연이 맺어진 것이었다.
차를 타고 저녁식사를 하기위하여 ‘평양랭면’이라는 식당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가이드의 유창한 설명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작은 비행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유적지에 금이 갈 것을 우려하여 큰 비행기의 접근을 금지한 때문이라 했다.
‘평양랭면’ 에 도착했을 때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던지 홀의 식탁에는 수저와 냅킨이 놓여 있었다. 음식도 일부분은 이미 차려져있었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식당에서 일하는 북한 처녀들의 미모였다. 그녀들은 꼭 같은 키에 저울에 달아도 오차가 없을 것 같은 꼭 같은 몸매를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머리는 뒤로 빗어 넘겨 약간 치켜 올려 하나로 묶었으며, 검은 브이넥의 원피스를 입었는데 화장은 했는지 안했는지 느끼지도 못할 만큼 투명한 하얀 피부를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청초한 한 떨기 란을 보는 기분이었다. 버섯볶음을 비롯한 평양식의 찬과 밥이 먼저 나온 다음 작은 양의 평양냉면이 나왔다. 음식은 깔끔하고 맛이 있었다. 맛으로 따지자면 우리가 여행지에서 먹은 음식 중 최고였다고 기억한다. 물론 내 경우다.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 그들은 공연이 있다고 했다. 따로 공연단이 있나보다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서빙을 하던 처녀들이 검은 원피스 그대로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은 합창곡으로 ‘반갑습네다’ 를 하더니 금방 또 무희로 변하여 춤을 추는 것이었다. 춤이 끝난 다음 그 중하나가 북한식 가야금을 연주했다. 나머지 처녀들은 어느새 홀로 돌아와 바지런한 동작으로 서빙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공동순서가 되면 행주질 하던 처녀들까지 뛰어나가 노래를 하고 춤을 추었다. 어여쁘고 재주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이 어떠했을까? 한마디로 아리고 쓰라렸다. 김정일에 대한 증오가 끓어올랐다. 김경아는 가야금으로 경쾌한 리듬의 ‘새봄을 노래함’ 이란 곡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그녀가 연주하는 곡목같이 즐겁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이드는 그녀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라고 했지만 우리일행들은 모두 못 들은 척 한 걸로 봐서 모두가 나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부산의 내가 아는 관광단들은 그녀들과 사진을 찍은 대가로 삼불에서 오불까지의 팁을 주었다고 했다. 우리도 사진을 찍었다면 팁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벌어들인 외화가 과연 그녀들 자신을 위해서 얼마가 쓰여 지는지는 모르지만 같은 동포라서인지 한없이 서글퍼지는 마음은 호텔로 돌아와서도 내내 마음속에 앙금처럼 남았다. 내 짝도 무척이나 속상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니 로비에서 기다리던 호텔직원들이 우리들의 목에 긴 스카프를 한 장씩 걸어주었다. 모두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했다. 밖에는 이미 어둠살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가이드도 “내일은 좀 빡센 일정을 소화해야 하니까 푹 쉬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가이드의 숙소는 호텔이 아닌 모양이었다. 열쇠를 받아 2층 호텔방을 들어서니 특급호텔답게 드넓은 객실이 우리 눈을 사로잡았다. 연속극에서나 보아 온 호텔방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어쩐지 남의 옷을 들고 입어볼까 말아볼까 하는 순간처럼 쑥스러웠다. 조금 있으니 현지인 청년이 우리의 여행가방을 들고 왔다. 나는 팁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어리버리 서 있기만 했는데 짐꾼도 나를 빤히 보면서 비척비척 머뭇거리다 나가는 것이었다. 그가 내 눈 앞에서 사라지자 “아차, 팁 주는 걸 잊었네.” 하며 급히 문을 열었지만 그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삼아 다음부터는 수고비를 지불하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호텔직원들이 걸어준 목걸이에는 ANGKR PARADISE HTL 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글자가 새겨져 있으니 목에 걸고 다니긴 글렀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래도 기념으로 받은 것이라고 내가 받은 보라색과 짝이 받은 초록색의 머플러를 고이접어 가방에 넣었다.
환경이 바뀌면 잠을 잘 못자는 버릇은 몸이 천근처럼 피곤해도 여전했다. 짝끼리 한 방을 쓰게 되었지만 침대가 두 개라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잠 못 들어 하며 밤새 뒤척이는 밤이었지만 나는 단연코 내가 두고 온 집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살아감의 걱정 같은 것은 머리에 떠 올리지 않았다. 오직 이국의 깊어가는 밤을 가슴 설레며 지켜보았을 따름이다.
4월 20일
현지시간으로 새벽 네 시, 짝도 일찌감치 잠이 깨어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매만지고 주변을 정돈했다. 나도 덩달아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낮 동안의 앙코르와트 관광을 위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이드가 ‘시원하고 편한 옷차림’ 을 신신당부했기에 가져간 옷 중에서 가장 시원한 옷을 골랐다. 아침 여섯시부터 식사가 가능하다 했지만 우리는 방에서 여섯 시 20분까지 기다리다가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우리가 일등일 것이라 여겼는데 벌써 몇몇 일행들은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이 탓인지 팀원 중 어느 누구도 늦잠을 자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잠을 잔 4박 내내 계속된 이 착한어린이 잠버릇은 우리를 인솔한 가이드를 무척 편하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우리처럼 말 잘 듣는 여행객은 처음이라 했다.
호텔식의 아침식사는 뷔페식이었다. 여행을 나서기 전부터 되도록 현지식의 식사를 했으면 했던 내 바람은 계획된 투어에서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머문 호텔이나 식당은 이미 한국관광객의 입맛을 꿰고 있어 어딜 가나 김치와 밥이 나왔으며 음식 맛도 우리나라에서 먹는 맛과 별 차이가 없었다. 아침을 일찍 먹으려니 입이 까끌까끌한 것이 영 식욕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날의 관광이 일정 중에서 가장 힘든 관광이라고 해서 꾸역꾸역 배가 허락하는 한 많이 먹어 두었다. 인상적인 것은 푸짐한 과일이었다. 푸짐한 과일은 시엠립에 머무는 동안 어느 식당을 가도 마찬가지였다. 파인애플, 망고, 수박, 도마도 그리고도 이름 모르는 과일이 있었다.
아침 8시가 채 되기 전에 아시아미니버스가 호텔로비정문 바로 앞에서 시동을 걸어놓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우리일행들은 가이드가 전날에 7시 50분까지 호텔로비에 모이라는 부탁을 7시 40분에 완료, 대기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우리일행들이 차에 올랐을 때는 에어컨을 틀어놓아 시원해진 차안공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엠립의 기사와 가이드는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시종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안녕하세요.’ 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차에 오르든 차안 공기를 시원하게 식혀놓았다.
오전 8시가 조금 넘어 호텔을 출발한 자동차가 유적지를 향하여 가는 동안 한인가이드는 쉬지 않고 캄보디아의 역사와 앙코르와트 유적의 유래에 관하여 설명했지만 다 알아들을 수도 또 알아들었다고 해도 기억할 수도 없었다. 열심히 메모를 했지만 메모에 집중하다보면 다음 계속되는 내용을 놓치는 게 태반이었다.
도중 창밖으로 본 것은 곳곳에 짓고 있는 호텔로 보이는 건축공사였다. 앙코르와트유적지는 훼손이 심하여 머잖아 관광을 금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저렇게 많은 호텔을 지어도 될까? 하는 팔자에 없는 걱정도 잠시 해 보았다.
사람의 발자국을 허락하지 않는 원시의 우거진 밀림 속에서 앙코르와트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프랑스의 탐험가 헨리 모하트였다. 1868년 그가 처음 그곳에 들어섰을 때는 나무와 넝쿨에 휘감겨 있어 잘 보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보다 이른 1850년 캄보디아에 선교사로 온 표어신부는 그곳의 밀림 속에서 어마어마한 거인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것이 앙코르와트였던 것이다. 방추형의 돌탑들이 언뜻 보면 거대한 사람처럼 보였을 거라는 가이드의 설명이 뒤따랐다. 어찌 되었건 앙코르와트를 세상에 드러낸 이는 헨리 모하트로 기록되었다. 그 뒤 그곳의 수많은 보물들은 모두 도굴되어 프랑스로 가져갔다고 한다.
우리를 태운 차가 20분 쯤 갔을까? 수많은 관광객들과 주차된 차량들이 북적댔다. ‘과연 세계의 7대 불가사의답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구나.’ 싶었다. 그곳이 매표소였다. 북한 인민군 제복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표를 팔고 표를 받았다. 우리는 매표소 앞의 주차장에 차를 놔두고 가이드로부터 받은 입장권을 내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장권을 받은 제복 입은 사람은 표의 한 귀퉁이를 잘라낸 다음 표를 돌려주었다. 그 뒤로도 다른 사원을 들어갈 때마다 우리는 같은 입장권을 내밀었고 때마다 입장권귀퉁이 한곳씩이 잘려나갔다.
덧붙여 가이드의 말을 옮기자면 만일에 입장권을 분실했을 때는 4배의 요금을 물어야 하는데 더러는 입장권을 확인하는 직원들이 표를 돌려주지 않는 일이 발생하니 꼭 표를 돌려받으라는 당부가 있었다. 앙코르와트에서 일 년만 근무하면 집을 살 수 있을 만큼 부패가 만연되어 있으며 이곳에 취직을 하기 위하여 치열한 경쟁을 한다고 한다.
앙코르와트의 입장료는 한 사람이 하루관광에 20불이다. 이틀과 삼일관광은 40불이다. 연간 5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오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찬란한 유적에서 얻어 지는 수입금은 프랑스와 베트남이 나누어 가져가기 때문에 정작 주인인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가 가지는 수입은 얼마 안 된다고 한다. 지금의 캄보디아 수상 훈센이 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집권을 하면서 그 보답으로 앙코르와트 수입지분을 건넸다고 하니 지금쯤은 가슴을 치고 있을 것이다. 내전으로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생명을 담보해야만 관광이 가능했던 당시로야 어찌 지금의 물밀듯이 밀려오는 관광객들을 예측이나 했겠는가. 관광객 한 사람 한사람이 곧 돈이니 캄보디아 국민들의 마음이 아리고 쓰릴 일이지만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이라니 이런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다시 작은 구내용 버스를 탔다. 유적지의 보호를 위해서 큰 차의 출입을 금한다고 하는데 내 눈에는 그게 그것으로 보였다. 하여튼 우리의 전용버스보다는 작은 차는 분명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앙코르톰 가까이 가는 동안 어떤 이들은 코끼리를 타고, 어떤 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물론 운전자는 따로 있음), 어떤 이는 자전거가 끄는 인력거를 타고 이동을 했다. 이곳은 코끼리마저도 회색빛이 아니라 검은 색이었는데 가까이 가면 지독한 냄새가 났다. 모두 냄새를 어떻게 참고 코끼리의 잔등에 높이 앉아 유유히 갈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차로 오 분쯤 갔을까. 우리는 모두 내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사원을 향하여 걸어갔다. 우리가 걸어가는 양편으로는 1000년의 세월을 견디어 온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향하여 곧게 뻗어 있었다. 원시림 그대로였다. 지금의 기온이 거의 35도일 거라고 가이드가 말했지만 숲속이라 그런지 걸을 때는 땀이 흐르다가도 그늘에서 쉬고 있으면 땀이 가셨다. 가이드가 아주 좋아할 나무가 나타 날 거라고 말을 해서 무언가 기대를 했더니 여자의 음부를 닮은 나무흉터였다. 신기하게 닮은 모양의 그것은 사람들의 손이 닿아 반질반질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나무꼬챙이로 옴폭 길게 파여진 가운데를 긁어주면 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나무의 수액일 것이지만 짓궂은 사람들은 한 번쯤 긁어보나 보았다. 또 조금 걸으니 이제는 남자의 거시기를 닮은 혹을 단 나무가 나타났다. 크기는 자그마했지만 영판 남자의 거시기였다. 우리는 박장대소했다. 아직 걸음에 지치지는 않을 시간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한바탕의 웃음이 더위를 덜어주었다.
걷는 동안 우리를 가장 괴롭게 한 것은 더위가 아니라 입구에서부터 널려있는 거지아이들이었다. 신발도 신지 않고 태어나서 한 번도 씻지 않은 듯 새까만 때가 주저리주저리 앉은 그 아이들은 가녀린 모기 같은 소리로 일 달러, 일 달러를 외치며 손을 내밀었다. 좀 나은 아이들은 딸딸이를 신고 한쪽 손에 팔찌들을 감아쥐고 한 손으로 두 개의 팔찌를 내밀며
“일 달러, 일 달러”를 외쳤지만 목소리는 역시 가냘프고 애처로웠다. 어떤 아이들은 우리를 보고
“두 개에 천 원, 두 개에 천 원” 하기도 했다. 한국 관광객 숫자가 워낙 많으니 그 아이들도 한국 말 몇 마디씩은 할 줄 알았다. 심지어는
“아줌마 예뻐” 하면서 물건을 내밀기도 했다.
애초부터 가이드는 ‘가엾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절대로 돈을 주지 말라’고 했다. 관광객들이 던져 주는 몇 푼 때문에 그 아이들은 영원히 거지를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아이들이 벌어오는 돈이 하루 5달러면 한 달 교사 봉급이 25달러인 이 나라에서는 결코 만만한 수입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자신도 열심히 일할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이들을 30불에서 200불을 받고 팔아먹는 부모도 있다고 했다. 생과 사를 하나로 보는 그들은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 때문에 자식을 파는데 대하여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곳에 있는 병원에서는 요즘도 아파서 입원했던 아이들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가이드의 말을 진짜로 믿어야 하는지도 망설여졌지만 사실이라니 어쩌랴. 여행자들이 세계의 굶주린 어린 아이들을 돕겠다고 팔 걷고 나서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앙코르톰은 앙코르와트 북쪽 1.7km 지점에 있는데 12세기말에서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가 불교 사원으로 지었다고 한다. 가이드는 앙코르 톰을 오전 관광으로 잡은 것은 오후에 있을 앙코르와트 관광을 햇빛을 등지고 하기 위해서라 했다. 남문에서부터 바이욘 사원 바푸원사원 피미나카스 왕궁터를 차례로 관람했다. 목조 건물은 다 썩어 사라지고 없고 거대한 돌의 축조물만 남아 우리를 놀라게 했다. 바푸온 사원에는 40m나 되는 부처의 와불이 있는데 1050년에 축조된 사원이라 한다. 원래는 힌두사원으로 지어졌는데 불교사원으로 개보수 되었다고 했다. 돌 하나하나에 새겨놓은 부조를 보고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종이에 그리듯 돌에다 새긴 그림들은 주로 전쟁얘기가 많았다. 톰의 입구의 문부터 어디를 가도 코브라의 조형물이 있었다. 그것은 이 나라가 뱀을 숭배하기 때문이라 했다. 맹독의 코브라에 물려 죽는 사람이 많았을 테니 얼마나 뱀이 두려웠겠는가. 그러니 그들은 차라리 뱀을 숭배하면서 뱀의 해코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을 것이다. 사원 꼭대기를 올라가자면 어디에나 계단이 가팔랐다. 그것은 인간이 신에게 나아갈 때는 구부려서 두 손을 짚어야 한다는 절대복종을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이라 했다. 사원 주변마다 거대한 해자를 만들고 가파른 계단을 만든 것은 외세의 침입을 염두에 둔 설계가 아닐까? 하고 내 짝이 말했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했다. 부조에는 연속동작을 나타내기 위하여 한사람을 겹치기로 연결하여 새긴 것이 눈길을 끌었다. 만화영화를 만들 때 사용하는 기법을 천년도 더 전에 돌에다 새겼다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가이드는 그 밖에도 수많은 힌두교와 불교의 설화를 얘기했지만 다 기억하여 적을 수는 없다.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불교는 힌두교의 자식’이라는 것과 ‘뱀은 땅을 기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어 지혜의 상징이며 이 나라에서 뱀은 모태신이다.’ 정도다. 지금도 사원의 이곳저곳에서는 보수의 손길이 쉬지 않고 있었다. 더위 탓인지 일하는 사람들의 동작은 느렸고 별 의욕도 없어 보였다. 내 짝은 보수가 ‘영 엉터리’라고 투덜거렸다.
바푸원 사원이든가. 이름이 헷갈리는데 왕이 여자와 동침을 하기 위하여 올라야하는 사원이 있었다. 먼저 신에게 고하고 여자를 접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리도 좁고 가파르고 높은 돌계단을 만든 게 아닐까?
농담 잘 하는 가이드는
“여자에게 점을 찍고 다리가 후들거려 어찌 내려 왔는지 몰라” 하며 킥킥댔다.
코끼리를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은 코끼리 행진이 양쪽 끝에 새겨져 있는 코끼리 테라스는 길이가 350m나 되었다. 테라스를 둘러싼 옹벽도 온통 코끼리로 장식되어 있는데 왕의 사열이나 축제의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승리의 문이라고도 하는 테라스의 앞쪽에 있는 석조건물은 한쪽 것은 장서각이고, 한쪽 것은 죄수를 가두는 곳이라고 했는지 알쏭달쏭하다. 코끼리테라스 바로 옆은 문둥이 테라스인데 목이 없이 앉아있는 나상이 있다. 자세히 보니 돌이 아니고 시멘트로 만들어졌다. 가이드의 말이 진품은 목까지 온전히 있으며 박물관에 있다고 했다. 나병으로 죽은 야소바르만 왕이 나상의 주인이다. 문둥이 테라스에서 보았는지 아니면 코끼리 테라스에서 보았는지 모르겠는데 기억에 남는 건물이 있었다. 천옥이라는 이름의 그곳에는 죄인을 가두고 펄펄 끓는 기름에 손을 넣게 한 다음 화상을 입지 않으면 무죄판결을, 또 심한 피부병과 접촉하여 병에 걸리지 않으면 무죄판결을 했다고 하니 죄인을 가리는 판결치고는 참으로 고약한 판결이 아닌가.
코끼리 테라스를 관광하고 다시 차를 타고 오전의 마지막 관광지 타프롬사원으로 이동을 했다.
수리에 바라문왕이 어머니에 대한 충성맹세로 지어준 타프롬 사원은 한때 8만 명의 사람들이 3천 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이행나무와 스펑나무 뿌리가 사원의 탑을 완강하게 휘어감은 채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무너진 사원 벽을 끌어안은 채 우거진 나뭇가지를 바람에 내맡기고 있는 거대한 나무가 내게는 인간의 허욕을 조롱이라도 하는 듯 느껴졌다. 많은 사원 중에서 타프롬사원만은 유네스코의 권고에 의해서 부러 복원하지 않고 그냥그대로 세월의 풍화에 맡겨두기로 했다 한다. 어차피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인 것을 문화재라고 자연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타프롬의 한 방(물론 돌로만 되어 있다)에서는 가운데서 가슴을 치면 울림이 없는데 벽에다 등을 바짝 붙이고 가슴을 치면 텅텅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유독 그 방에서만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나 의미가 있는지는 듣지 못했다.
왕비가 거처했다는 방에 들어서니 벽에는 온통 구멍이 나 있었다. 보석을 빼간 자국이라 했다. 타프롬에서만 500톤의 금붙이와 진주 수만 개, 사파이어와 루비가 몇 천개, 다이아몬드 몇 백 개를 프랑스가 가져갔다고 했다. 정확한 숫자를 당시는 욀 수 있었는데 다 잊어버렸다. 보석이 박힌 벽면을 떠 올려보고 그 화려함의 극치가 어떠할까를 상상해 보았지만 나로서는 상상조차 되지가 않았다.
화려한 궁전은 간데없고 이제 그 천정에서는 박쥐가 다닥다닥 붙어서 관광객의 머리에 배설물을 떨어뜨린다. 그들이 숭배의 제사를 올렸던 신전은 무너지고 복종을 맹세하며 기어올랐던 신전의 계단에는 휘감은 나무의 등걸을 타고 오르는 무심한 작은 도마뱀이 우리를 흘끔거렸다. 그들의 흥망성쇠의 비밀을 죄다 보았을 1000년을 살아 온 나무는 햇빛을 받아 여전히 초록의 기상을 반짝이고 있었다.
영생을 꿈꾸며 환생을 믿었던 그들은 지금쯤 무엇으로 태어나 살아가고 있을까? 과연 죽음 뒤에는 또 다른 삶이 있기나 한 것일까? 어찌하여 그들은 영원을 꿈꾸었을까? 차라리 흙으로 돌아가 얽히고설킨 나무의 거름이 되고자 꿈꾸었다면 어느 먼 나라에서 온 아낙네가 무너진 사원아래서 그들이 누렸을 영화를 더듬으며 한없는 서글픔에 젖지는 않았으리라.
타프롬사원을 보면서 다른 사원이 복구 이전에는 어떠했을까를 가늠해 보았다. 이 사원만 복구를 하지말자고 제의한 사람도 그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나무의 씨앗이 성벽에 떨어져 발아를 한 것도 신기했지만 허공중에서 성벽을 끌어안은 채 양쪽으로 내려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간 뿌리는 내게는 불가사의처럼 느껴졌다. 타프롬 사원을 뒤덮고 있는 모든 나무가 그랬다. 약속이나 한 듯 성벽 혹은 탑을 거대한 여러 마리의 보아뱀이 양쪽으로 휘감은 모양을 하고 있어 바라보노라면 저절로 전율이 일었다. 나무 둥치도 아닌 뿌리가 땅에서 5~10m씩이나 높이 드러나 아름드리로 굵어졌으니 나무가 겪어온 시간을 알만하지 않은가.
처음 사원을 발견했을 때는 탑은 온통 무너져 내린데다 나무뿌리가 뒤엉켜 있었다고 한다. 나무를 잘라내고 원래의 돌을 찾아 제 위치에 쌓고 그림에 맞추어 조각보를 잇듯 복원해 낸 것이 지금의 앙코르와트다. 새삼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느낄 수 있었다.
오전관광을 끝내고 전용버스로 갈아 탄 다음 점심을 먹으러 갔다. 가이드는 우리가 가는 식당이 한정식 집이라 했다. 차에서 내리니 불볕이 쏟아져 내렸다. 우리가 유적지를 도는 동안에도 불볕더위였을 텐데 숲속에 둘러싸여서인지 태양이 불같이 뜨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한글로 ‘청송식당’ 이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우리나라의 여느 식당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가 반갑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식당주인도 한국인이었는데 우리를 맞으면서 특별히 반갑다는 얼굴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에게 우리는 손님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워낙 한국관광객이 많아서 청송식당의 고객은 한국인이 모두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으리라. 된장찌개와 돼지갈비가 메인메뉴였지만 고기는 질긴데다 미리 상을 차려둔 채 기다려서인지 버썩 말라있어 우선 시각적으로도 맛이 없어 보였다. 특별히 맛있는 반찬이 없는데도 우리 모두는 아주 맛나게 식사를 했다. 아침을 일찍 먹은 데다 빡센 관광으로 배가 많이 고팠기 때문이다.
점심식사를 하고 호텔로 돌아와 두 시간을 쉬었다. 캄보디아는 시에스타(낮잠)시간 중에는 온 국민이 잠을 잔다고 했다. 실제로 우리가 호텔방에서 쉬고( 잠을 자지는 못했다)내려오니 호텔 직원들은 하나같이 잠을 자고 있었다. 자신이 근무하는 의자에서 혹은 소파에서 단잠을 자는 그들을 보고는 시에스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고도 남았다. 동남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그들의 시에스타 때문에 체머리를 흔든다고 하더니 실감이 났다. 대신 그들은 아침시작이 이르다고 한다. 가이드 말로는 참으로 게으른 국민이라고 하면서 게으름은 가난을 대물림하는 이유가 된다고 했다.
오후에는 앙코르와트 관광을 갔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도 가이드의 말은 계속되었다. 일정에 쫓기다보면 볼 것, 들을 것을 한꺼번에 집어넣게 된다. 그러다보니 소화불량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눈으로는 밖의 풍경을 보랴, 귀로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랴, 눈도 귀도 바빴지만 기억까지 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씨엠립의 반경 600km 지역 안에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지어진 사원만 100여개의 사원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앙코르와트가 가장 대표적인 사원이라 한다. 앙코르 톰에 있는 사원보다 앙코르와트는 훨씬 정교하고 섬세하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우리는 조금 후에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확인 할 수 있었다. 당시의 앙코르 인구가 100만이 넘었다는데 무슨 사연이 있어 영광의 흔적만 숲속에 버려두고 사람은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고 했다.
앙코르와트는 물속에 떠있는 섬처럼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사원을 둘러 싼 호수는 아득했고 높이 솟은 세 개의 탑은 만화에서 본 마법의 성처럼 신비스런 모습을 드러내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진이나 TV에서 보아온 앙코르와트를 직접 볼 수 있다니 어찌 가슴이 설레지 않겠는가!
우리가 바라보는 호수가 폭이 200m, 길이가 505km 라니 숨이 헉 막힐 노릇이었다. 기계가 있던 시절도 아닌 1000년의 세월 전에 강 같은 호수를 건설한 앙코르의 민족은 도대체 어떤 민족이었을까? 300년에 걸쳐 돌을 쌓아 사원을 만들고, 돌에다는 신과 왕과 군사와 백성의 얘기를 촘촘히 새긴 그들, 임금과 사제와 귀족들을 위하여 보석까지 세공을 해야 했으니 그 백성의 고초가 어떠했을까?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아 호화로운 식단을 차려야 했을 백성들에게 돌아 온 대가는 걸핏하면 죄를 지었다며 끓는 기름에 손을 담그는 재판이었을 것이다. 혹독한 매질과 굶주림에 지쳐서 쓰러져간 원혼들의 모습을 떠 올리며 그들이 믿었을 생명의 윤회가 진실이기를 소망했다. 그래야 이 위대한 유적지를 마음 편하게 관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리아바르만 2세 자신의 무덤을 위하여 1113년에서 1150년까지 37년 동안 가로 1.3킬로미터 세로 1.5킬로미터의 돌을 쌓아 만든 앙코르와트의 사원을 가기 위하여 우리는 차에서 내려 200m의 다리를 건너갔다. 다리입구 난간에는 물의 신이라는 나가신이 조각되어 있었다. 다리 아래로는 무심한 물이(마나사리바호수) 흐르고 있었지만 물살을 느낄 수 없어 차라리 고여 있는 물로 보였다. 이런 물이 앙코르와트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우주의 대양을 상징한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에도 수많은 어린 거지들이 손을 벌렸다. 거지아이들은 사원 안에서도 구석구석 없는 곳이 없었지만 오전 관광에 면역이 생긴 우리들은 조금은 태연해져서 그 아이들을 그냥 지나쳐보내도 마음이 켕기지 않았다. 사람마음 길들이기 잠간이란 말은 이럴 때 쓰려고 생긴 말일 것이다.
앙코르와트를 정면에서 바라보면 세 개의 탑이 동일 선상에 보이는데 그것은 착시현상이라 한다.
병렬기법으로 탑을 올려서 그런 착시를 일으키도록 설계한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가! 사원을 들어가기 전에 연못에 비치는 사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앙코르와트를 소개한 대부분의 사진이 이곳에서 찍은 것이라는데 눈으로 본 그곳은 썩 아름답지가 않았다. 연못은 물이 빠져서인지 을씨년스러운 것이 둘레에는 풀만 무성했다.
사원은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문이 달랐다고 한다. 우리는 그중 한 문으로 들어가 긴 회랑의( 760m ) 벽면에 새겨진 부조를 보며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앙코르는 왕도를, 톰은 거대함을, 와트는 사원을 말하는데 앙코르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한 수리아바르만 2세가 비슈누신과 합일하기 위하여 만든 이곳은 65m 의 중앙탑(수미산을 나타나며 우주의 중앙이라는 의미)을 중심으로 지어졌다. 중앙탑을 삼중으로 둘러싼 사각탑(희말라야 산을 나타냄) 끝을 연결하면 사각뿔의 피라미드 탑모양이 된다고 한다.
하늘의 무희 ‘아프살라’와 부채살처럼 여러 개의 머리를 달고 있는 커다란 뱀을 조각한 이유를, 가이드가 설명을 했다는 것만 기억하니 지금 글을 쓰면서도 가슴이 답답하다. ‘뱀의 머리수를 분명히 세었는데도 메모지에도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자신 있게 왼다고 적어놓지를 않았나보다!’
사각 탑의 가운데는 직사각형 마당이 있는데 가이드는 우리일행을 보고 오줌이 마려운 사람은 오줌을 누라고 했다. 한사람이 파라솔로 용변을 보는 사람을 가려주면 된다고 했다. 어느 곳에도 화장실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라는 것이었지만 세계적인 문화유적지 마당에서 오줌을 누라니 황당한 노릇이 아닌가. 수많은 관광객이 열을 지어 드나드는 사원의 마당을, 일행 중 몇 사람의 여자들이 파라솔을 들고 구석지로 걸어가더니 볼일을 안보고 그냥 되돌아왔다. 왜 그냥 오느냐고 물었더니 도마뱀이 있어서 그냥 참기로 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수리아바르만의 경비병이 도마뱀으로 환생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올라 혼자 속으로 실소를 했다.
중앙탑을 바라보려면 목 고개를 뒤로 90도 재껴야 했다. 그만큼 탑은 높았고 수직으로 뻗은 계단은 쳐다만 보아도 현기증이 날만큼 좁고 가팔랐다. 가이드의 말로는 75도의 경사라고 했는데 내겐 85도의 경사로 느껴졌다. 가이드는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거나 다리가 부실한 사람, 혈압이 높은 사람은 올라가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내 짝은 올라가지 않았는데 나보고도 “올라가지 말지”라고 했다.
그러나 이곳까지 와서 중앙탑을 오르지 못한다면 말이 아니지 않는가.
엎디어 두 손으로 계단을 짚어가며 엉금엉금 기어오르는데 사람들의 신발에서 떨어졌을 흙과 모래가 땀 배인 손바닥에 엉겨 붙었다. 떨어질까 두려운 기분보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더럽다는 기분이 더 고약했다. 밑에서 볼 때는 뾰족한 탑으로만 보인 꼭대기에는 가운데 마당이 있고 역시 긴 회랑이 둘러싸고 있었다.
창문은 일월의 주기에 맞추어 설계되었고 창문의 문설주는 하나같이 건물의 하중을 버티도록 지지대를 만들어 놓았다. 돌을 정교하게 깔아 만든 마당에는 물이 빠질 수 있는 물길도 있다고 했다. 꼭대기의 천정에는 예외 없이 박쥐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천장 아래에는 박쥐의 오물을 받는 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 ‘앙코르와트를 가는 사람이라면 꼭 중앙탑을 올라가 볼 것이다.’ 그곳에 오른 우리의 확신에 찬 권고이다. 왜? 하고 묻는다면 ‘가보면 안다’라고 대답 할 수밖에 없다. -
중앙탑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니 지금은 물이 없지만 사원의 마당이 물을 담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음이 확실하게 보였다. 신전인 중앙탑에 오를 때는 왕과 사제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물에다 발을 담그고 건너야 사원을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더러움을 씻고 순결한 몸과 마음을 신께 바친다는 의미였겠으나 일을 할 때마다 매번 물속을 걸었을 사람들의 고초가 얼마나 컸겠는가. 왕과 사제가 다니는 길은 물에 잠기지 않도록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길을 왕도 사제도 아닌 이국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관람하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에 몸을 떨었다.
내려올 때는 밧줄이 매어져 있는 동쪽 계단을 이용했다. 사람들이 밀리어 한참이나 서 있다가 내려와야 했다.
앙코르와트 관람을 끝내고 돌아서 나오는데 다리위에서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목격했다. 난쟁이 여인이 발가벗은 작은 아기를 보이도록 발랑 뉘어 안고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눈에는 태어난 지 5일도 채 안된 신생아로 보였다. 끔찍했다. 이 나라의 지도자에게 분개하며 걸어 나오는데 역시 신생아를 안은 거지여자가 손을 벌렸다.
모두가 눈을 돌리는 눈치였다. 어쩌면 마음까지 돌리고 싶었을 것이다. 동정심은 분노의 감정 때문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우리는 다시 차를 타고 호수에 비치는 저녁노을을 보기 위하여 반데이 스레이(이름이 정확한지 모름) 사원을 갔다. 앙코르와트에서 한참이나 가야했다. 차는 아래에 두고 언덕을 오르는데 계단 못잖게 경사가 심했다. 언덕 중간에서 전쟁으로 눈을 잃은 사람 대여섯 명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지나가자 어떻게 알았는지 아리랑을 연주했다. 이런 눈먼 악사들이 앙코르톰에도 있었다. 가이드 말로는 그들은 보지 않아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다 안다고 했다. 지나는 사람 나라 민요를 연주해주고 팁을 받아 살아간다고 했는데 우리는 팁을 주지 않았다. 팁을 주고 싶은 마음도, 겨를도 없었다.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 반데이 스레이 사원도 마찬가지로 경사가 급했다. 힘들여 탑 위에 올랐지만 구름에 가려서 지는 해는 볼 수가 없었다. 멀리 보이는 호수에는 지는 해의 여명조차 비치지 않았다.
저녁식사는 현지의 븨페식을 했다. 음식의 가지 수도 많았지만 맛도 있었다. 100석이 넘는 좌석이 꽉 찼다. 압살라 민속 쇼 공연이 있다고 해서 기대를 했었는데 레스토랑 전속공연 팀이 하는 작은 공연에 불과했다. 거기다 많은 사람들이 식사한다고 딸그락대는데다 리듬과 동작으로만 극을 이해해야 했기 때문에 쇼에서 얻는 감동은 반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공연을 보고 다시 차를 타고 간 곳은 발마사지를 하는 집, 기분이 묘했다. 내 평생 이런 곳을 가는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일정 중에 발마사지 순서가 있는 것을 보고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나는 이 일정에서만은 빠지겠다고 마음먹었다. 같은 사람이 신체 중에서 가장 낮음을 의미하는 발을 마사지 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짝이 ‘우리 별스럽게 굴지말자’ 고 했다. 나도 짝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은 왼쪽으로 남자들은 오른쪽으로 방이 갈렸다. 우리가 들어간 방에는 소파가 놓여있고 소파 옆에는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등받이 없는 의자가 딸려 있었다. 소파 위에 놓여있는 반바지로 갈아입고 있으니 나무통을 든 소년들이 들어왔다. 우리들 하나하나 앞에 통을 놓고는 발을 담그라고 했다. 발목이 담길 만큼의 물이었는데 무엇을 넣었는지 색깔이 탁했다. 뜨뜻했지만 어쩐지 께름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 나라에서 만난 사람들의 불결한 모습을 연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년들의 나이를 물으니 열일곱에서 스무 살이 넘는 등 다양했다. 나이로 봐서는 청년들인데 워낙 덩치가 작으니 소년들로 보인 것이다. 팔뚝은 가냘프고 작고 검붉은 얼굴에 쌍꺼풀 진눈을 가진 그 아이들은 선입견 때문인지 하나같이 눈빛이 슬퍼 보였다. 그 아이들은 발을 주무르면서 지압 동작을 할 때는 우리말로 “아퍼요?” “아퍼?” “안 아퍼?” 하는 등 몇 마디씩의 한국말을 알고 있었다. 거지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랑해, 아저씨, 아줌마, 예뻐, 몇 살, 뚱뚱해, 천원’ 하는 제한 적 단어들이었지만 얼마나 많은 한국 관광객이 다녀갔기에!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가까이 마사지를 받고 우리는 각 1불의 팁을 주었다. 마사지를 받고 나서 시원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별로 시원하다거나 피로가 풀린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으니 이것은 그 아이들의 마사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정신의 문제가 아닐까한다. 우리의 관광 첫날은 발마사지를 끝으로 막을 내리고 호텔로 돌아가 씨엠립에서의 두 번째 밤을 보냈다.
4. 21일
아침은 첫날과 마찬가지로 호텔의 븨페식을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호텔의 수영장에서 사진을 찍었다. 드라마에서 보면 주인공들이 폼을 잡고 수영을 하며 근사한 대사를 연출하는 이국의 특급호텔 풀장, 기껏 사진이나 찍으며 이곳을 다녀갔다는 흔적을 만들고 있는 내 모습이 참 그랬다.
8시에 차에 오른 우리는 톤레샵을 향하여 출발했다. 가이드는 길이 나쁘니 손잡이를 꼭 붙들라고 말했다. 비포장의 길은 비에 패어지고 곳곳에 웅덩이가 져 있어 차는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지만 어렸을 때의 포장 안 된 고향 길을 떠 올리며 엉덩이가 들썩대며 방아를 찧는 것이 즐겁기까지 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주민들의 주거가옥은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우리나라의 원두막 형태를 하고 있었다. 비라도 가려질지 의심스러운 지붕은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 아슬아슬했다. 달리는 차안에서 보이는 집안의 풍경 속에 언뜻언뜻 사람이 보이는 것이 그곳이 사람이 사는 집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땅에서 1~5m 쯤 높이에다 사는 공간을 만든 것은 과도한 습기와 뱀의 위험으로부터의 자구책이라고 한다. 나름대로는 지역 특성에 맞는 지혜가 담긴 집이라는 얘기다. 비록 굵기는 가늘었지만 기둥이 네모진 것도 뱀이 감고 오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이곳의 모든 전봇대도 네모졌다. 그것도 뱀으로부터 합선을 예방하기 위한 발상이라고 했다.
키가 큰 갈대를 비롯한 작은 나무들과 풀들이 우거진 초원에는 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었다. 현대자동차에서 만든 덤프트럭이 줄지어 세워져 있는 것도 보였다. 가이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캄보디아에 무상으로 트럭 500대를 원조했다고 말했다. 우리의 국력이 다른 나라에 무상지원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자세히 보니 길보다 높은 곳까지 물이 들었었는지 흙탕물이 휩쓸고 간 자국이 역력했다. 가이드의 말로는 우기가 되면 톤레샵호수는 바다처럼 물이 불어난다고 하니 길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물이 드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다.
톤레샵 입구에는 우리나라의 어떤 목사가 지은 학교가 있었다. 조립식의 그 건물은 일본에서 지은 것과 함께 그곳에서 우리가 본 유일한 교육기관 건물이었다. 일찍 도착해서인지 호수기슭에는 많은 유람선들이 호수위에 떠 있지 않고 대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중 한배에 올랐다. 물빛은 검붉은 흙을 으깨어 풀어 논 것처럼 진한 흙탕물이었다. 유람선은 통통배로 앞쪽에 운전대가 있고 뒤쪽에 수동으로 조정하는 제어기가 있는 것이 특이했다.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운전대에 앉아 배를 몰았고 뒤쪽의 배의 선미에는 13세쯤의 소년이 서 있다가 다른 배가 가까이 지나가면 재빠르게 제어기를 조작하여 속도를 줄였다. 혹시라도 물이 튀면 승객의 옷을 버려놓기 때문에 그곳의 모든 배가 철저하게 지키는 불문율이었다.
이곳저곳에 떠 있는 수상가옥들은 차마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초라하고 누추했다. 그곳에도 빈부의 차이가 있는지 더러는 말끔하고 큰 수상가옥이 있는가 하면, 화분이 놓여 있고 강아지 두 마리가 꼬리를 살랑대며 놀고 있는 집도 있었다. 가이드는 ‘이곳에도 소방서가 있고 경찰서도 있다’고 했다. ‘학교도 있다’고 했지만 이곳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공부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탄 배가 보이자 수상가옥의 곳곳에서 작은 쪽배가 튀어나와 노를 저어 왔다. 우리와 가까워지자 고무다라이나 양은다라이가 쪽배에서 내려지고 작은 아이들이 다라이로 옮겨 탔다. 작은 노를 저어 우리가 탄 뱃전까지 온 아이들은 “원 딸라, 원 딸라!”를 외치며 손을 벌렸다. 어떤 아이는 너무 급히 노를 젓다 다라이가 뒤집혀 물에 빠지기도 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사탕이 고작이었다. 돈을 주지 말라는 가이드의 교육은 이미 우리의 주머니를 꼭꼭 여미게 했다. 내 짝이 가까이 온 두 아이 중 한 아이에게 영양갱을 주었다. 아이는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아이의 기뻐하는 모습에 짝은 남은 하나를 마저 주었다. 남매인 그 아이들은 영양갱 하나씩을 들고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자신들의 어머니가 있는 모선인 쪽배로 돌아갔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가슴이 뭉클했다. 경찰에서 구걸행위를 단속한다했지만 우리는 경찰 비슷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생활환경프로젝트를 주진 중에 있다고 하나 이호수위의 사람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날이 과연 오기나 할지?.......
톤레샵호수는 연간 1제곱키로미터에 7만 톤에서 10만 톤의 생선을 얻는 단백질의 보급원이라고 한다. 온갖 생활하수가 버려지는 호수의 생선을 과연 먹어도 안전한지 염려가 되었다.
(폴보트, 사람 잡은 백정, 전율의 킬링필드)
톤레샵을 뒤로하고 우리는 킬링필드로 향했다.
캄보디아의 수상인 훈센의 경호와 군인들 훈련은 대한민국의 특전사 출신들이 맡고 국왕인 시아누크의 경호는 북한군이 맡고 있다고 했다. 이곳에 와서도 남과 북의 알력을 느끼다니 새삼 분단의 아픔이 쏴하고 밀려왔다.
‘킬링필트’ 영화에서 본 기막힌 해골더미를 실제의 모습으로 본다는 데 대하여 가진 섬뜩했던 기분이 막상 직접 대하니 담담해 지는 것이 이상했다. 짐승의 것이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해골뿐만 아니라, 팔과 다리의 뼈들이 투명하고 커다란 둥근 유리통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이국에서 온 무심한 구경꾼의 시선을 받는 그 해골들이 진정으로 사람의 뼈가 아니길 바랐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형물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사람이 어찌 사람을 그렇게 도륙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옆에는 이런 내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폴보트정권의 끔찍한 악행의 생생한 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장면, 드릴로 여자의 신체에 구멍을 뚫는 장면 등 차마 눈뜨고 볼 수없는 광경을 버젓이 사진으로 남긴 그들의 정신세계가 인간의 사악함이 과연 어디가 한계일까를 생각하게 했다. 10살에서 15살의 소년들을 훈련시켜 지식인을 색출했다니 더 끔찍하지 않은가. 소년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형을 고발했다고 한다. ‘손에 볼펜을 쥔 흔적이 있는 사람, 안경을 쓴 사람’ 모두를 지식인으로 간주하여 무차별로 잡아 죽였던 폴보트의 4년 집권은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훈센에 의해서 막을 내렸다. 지식인이 사라진 캄보디아는 소아마비에 걸린 다리를 일으켜 세우는 만큼이나 국가경제를 일으키기가 힘들 것이다. 내가 본 수많은 어린거지들에게 교육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한 캄보디아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라는 예감이 나를 우울하게 했다
이런 킬링필드가 전국에 180개가 있다고 한다. 폴보트가 살육한 사람들이 180만 명이라니 수거되지 않은 해골인들 왜 없겠는가!
(또 하나의 불가사의, 바라이 호수)
뷔페식의 점심식사를 마치고 바라이 호수를 갔다. 바라이 호수는 인공호수다. 앙코르시대 관개를 위하여 만든 호수라고 한다. 앙코르톰과 앙코르사원의 해자와도 연결된 호수였지만 지금은 흙이 채여 앙코르유적지까지는 물길이 닿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원두막 같은 곳에 들어가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바라보며 열대과일을 먹었다. 과일을 먹는 곳에도 팔찌와 유적지그림엽서를 파는 아이들이 왔다. 앙코르와트에서 ‘두 개에 원 달러’라던 팔찌를 이곳의 아이들은 “여섯 개에 원 달러”라면서 무리말로 “손해다, 손해다”하는 것이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팔찌를 샀고 나는 그림엽서를 하나 샀다. 한 아이가 이곳에서 여러 세트의 그림엽서를 팔았는데 어찌나 좋아하던지 물건을 사 준 우리까지 행복한 기분이었다.
바라이 호수를 보고 호텔로 돌아 온 우리는 캄보디아에서의 마지막 휴식을 취했다. 우리는 저녁식사를 끝내고 밤 비행기를 타고 하노이로 갈 것이다. 현지시간, 오후세시에 우리는 호텔을 출발했다. 호텔을 나서면서 청소하는 아줌마를 위한 2불의 팁을 놓아두고 나왔다. 가방을 차까지 올려준 세터에게는 1불의 팁을 주었다.
일정표에 있는 재래시장 관람이란 것이 상황버섯을 파는 곳과 루비와 사파이아를 주로 파는 보석 가게였다. 모두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상황버섯은 캄보디아 원시림에서 채취한 자연산이라고 했다. 밀림 속은 지뢰밭이기도 해서 버섯을 따려다가 사고를 당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상황버섯 채취는 갈수록 여건이 어려워져 곧 품귀가 날 것이라는 설명은 상술인지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70년산 이하는 1kg에 십오만 원이고 100년산 이상은 1kg에 70만원이라고 했다. 알러지에 좋다는 말에 나도 70년산 2kg을 샀다. 다른 사람은 100년산을 샀다. 물론 사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100년산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고 내가 질문을 했다. 버섯의 결을 보면 세월이 보인다고 했지만 그 또한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으니 그냥 믿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내린 결론은 옳은 상황버섯이 아니라 무독성인 버섯을 상황버섯이라고 속인다는 것, 하루 빨리 여행객들에게 판매를 중지시켜 귀중한 달러 유출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캄보디아는 세계에서 루비와 사파이어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앙코르의 유적이 애초에는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었던 것도 이곳이 보석 산지였기 때문이라 한다. 일행들이 며느리와 딸에게 줄 자잘한 선물 정도를 샀을 뿐 큰 보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자 가이드는 ‘이번 사모님들은 돌을 안 좋아 하신다’고 비꼬았다. 우리가 많은 보석을 사야 가이드의 몫이 많을 터인데 기대가 어긋난 듯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씨엠립에서는 간혹 번호가 없는 차량을 만날 수가 있다. 씨엠립에서만 운행이 허가된 차량이다. 외국에서 들여 온 중고차들은 핸들의 방향이 달라서 한시적으로 적용을 하고 있다고 한다.
스콜(한낮의 소나기)이 잦은 캄보디아는 온도와 습도가 높았다. 지금,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진출해 있지만 정국의 불안으로 언제나 출국할 수 있는 이중국적을 가지고 생활한다고 했다. 이곳에서의 적응에서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기후에서 오는 풍토병이라고 가이드가 말했다. 습도가 높아서인지 병명 없이 아프다는 데야 어쩌겠는가. 비가 오려면 온 몸의 뼈마디가 쑤시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하고 이해했다.
우리가 갔던 호텔이나 식당들은 대부분 현지주민이 아닌 외국인들이 경영하는 곳이었다. 한식당은 우리 교포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가 갔던 식당들의 화장실은 모두 깨끗했다. 화장실마다 작은 샤워기가 비데의 용도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이했다. 전력사정이 좋지 않은 이곳의 업소들은 자가발전기를 설치하고 있는 곳이 많았다. 정전이 되면 몇 시간씩 계속되기 때문에 발전기는 필수품이라고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에어컨 없는 식당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제 에어컨 없는 업소는 장사를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관광객들 대부분이 가이드의 안내를 받을 텐데 에어컨 없는 집으로 손님을 안내하지는 않을 게 아닌가.
수박 겉핥기도 되지못한 쌓아놓은 수박더미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듯 보고 온 앙코르와트지만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현지민의 생활습속을 접한다거나 민초들의 문화를 경험할 기회가 없다는 것도 큰 아쉬움이었다. 패키지여행에서 그런 것까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섭섭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